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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에서 온 조숙한 아이 - 알렉산더 시트코베츠키

최근 유명세를 치르고 있는 신예 바이올리니스트 알렉산더 시트코베츠키의 행보를 앤드류 팔머(Andrew Palmer)가 알아본다.
런던 왕립 음악학교(Royal Academy of Music in London)의 전도양양한 아이들 중에서도 또래에 비해 배(倍) 이상의 연주 경험을 가진 러시아 출신의 바이올리니스트가 있다. 알렉산더 시트코베츠키(Alexander Sitkovetsky)는 십대의 나이에 경험해야 하는 것들을 놓치지 않으면서도 이미 런던의 일급 무대인 위그모어 홀에서 리사이틀을 가졌으며,
자신의 데뷔 음반인(Angel 7243-5-57025-2-4)도 출시했다. <그라모폰> 지는 이 데뷔반을 가리켜 “높은 수준의 테크닉과 결합된 타고난 음악성의 산물”이라고 격찬했다. 이는 18살 난 고교 2년생의 연주자에게 있어 대단한 호평이었고, 이로 인해 알렉산더 ‘사샤(Sasha)’ 시트코베츠키는 더 이상 평범한 고등학생이 아니었다.
명문 음악가 집안의 가장 나이 어린 연주자인 그는, 피아니스트인 어머니 올가 시트코베츠키(Olga Sitkovetsky)와 록 뮤지션인 아버지 알렉산더 사이의 유일한 아들이다. 사샤는 바이올리니스트 드미트리 시트코베츠키(Dmitri Sitkovetsky)의 조카인 동시에 피아니스트 벨라 다비도비치(Bella Davidovich)와 바이올리니스트 줄리안 시트코베츠키(Julian Sitkovetsky)의 손자이기도 하다. 이런 맥락에서 이해한다면 갑작스런 명성도 이 어린 연주자에게는 그리 놀랄 만한 일이 못된다.
“가족 모두가 콘서트 여행을 하는 전문 연주자라는 사실은,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무척이나 편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늘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처럼 말이죠. 그래서 저는 제가 집안의 돌연변이가 아닌 것에 안도하며 만족해하곤 하지요!” 실제로 그는 10대가 되기도 전에 커리어를 시작한 신동 부류는 아니다. 그리고 다년간의 ‘연습 콘서트(사샤 본인의 말을 빌자면 연주력의 발전에 도움을 주는)’의 시간을 보내고 이제 막 더 큰 국제 무대에서 연주를 시작하려고 하는 중이다. “제가 좀더 나중에 경험하게 되길 원하는 ‘화려한 무대와 이목의 집중’을 이미 다 맛보았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가 공손하게 덧붙인다.
젊은이여, 서방 세계로 가라
사샤가 러시아로부터 영국으로 이주한 것은 그가 어렸을 적의 일이다. “제가 여섯 살이었을 때, 예후디 메뉴인이 모스크바의 우리집에 들리셨죠. 그는 나의 어머니를 초청하여 그의 학교(메뉴인 스쿨)에서 가르쳤어요. 그리고 나 역시도 학생으로서 초청했었지요. 그 이후로 계속해서 우리는 영국에 살았답니다.”
1999년 여름, 사샤는 메뉴인의 장례식에 연주자로 초청되었고 그 해가 끝날 무렵 왕립 음악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그는 그곳에서 독주자 경력모든 메뉴인 스쿨의 학생들이 갈망하는 바이지만 모두가 이루지는 못하는을 쌓는 대신에 학업을 모두 마칠 예정이다. 그는 “저는 개개인이 가진 ‘기질’이야말로 무엇이 될 것인가를 드러내는 지표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한다.
“개인적으로, 저는 언제나 솔로이스트가 되기를 바랬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무엇이 어떻게 될지, 어떤 식으로 성공할 것인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저 역시도 언제나 열린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물론 지금은 그것을 가늠하기에는 매우, 매우 이른 시기임을 잘 압니다. 저는 앞으로 다가올 일들이 어려운 동시에 흥미진진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가족들이 내가 어떤 길로 가야하며 어떻게 이러한 기질적인 면들을 다뤄야 하는지를 조언해 준다는 점에 있어서 저는 무척 행운아입니다. 그러나 그들로부터 제가 음악가가 되어야 한다는 어떠한 압력도 받은 적은 없습니다. 비록 러시아에서는 반드시 추구해야 하는 일류의 커리어라 해도 말이죠.”
‘기질’에 관한 이야기 중에 사샤는 재미난 에피소드분명 누군가가 지어낸 것으로 보이는를 언급했다. “무표정의 대명사, 하이페츠에 관한 이야기가 그것인데, 어느 날 하이페츠의 부인이 자신의 생일 선물로 하이페츠에게 연주중에 미소를 지어달라고 요구했답니다. 이에 하이페츠는 확실히 미소를 지어 보였지만, 그리고 나서 곧바로 연주에서 실수를 범했지요!” 사샤가 웃는다.
“전 세대의 위대한 바이올리니스트들은 좀처럼 움직이지 않고 꼿꼿이 서서 연주했지요. 나 역시 무대 위에서 너무 많이 움직여서는 안 된다고 배웠고 그것에 동의합니다. 그러한 움직임은 물리적으로 연주를 방해하거든요.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마치 돌처럼 경직되어 연주하진 않습니다. 저는 음악이 흘러가는 대로 연주하려고 노력합니다.”
레코드에 관하여
사샤의 콘서트 커리어가 내년 이후로는 유럽을 거점으로 진행될 것이기 때문에, 대서양을 가로지르는 관심은 즉각 그의 CD에 맞추어졌다. 그가 설명하듯이, 데뷔반 제작은 미국 연주 기간중 실로 우연한 기회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3년 전 여름, 저는 뉴포트 음악 페스티벌에 초청 받았어요. 엔젤 레코드사의 부사장인 길버트 헤더윅 역시 거기에 있었는데, 제 생각에 그가 내 연주를 맘에 들어했던 모양이에요! 그 당시, 저는 레코드를 만들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지만 다행스럽게도 헤더윅은 헌신적이고 열정적으로 저를 기다려 주었지요.”
음반은 좀처럼 듣기 힘든,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러시아 작품들을 담고 있다. 사샤는 어머니를 반주자로 대동했으며, 프로듀서 맥스 윌콕스는 루빈슈타인이나 젊은 이착 펄만의 프로듀서로 유명했던 인물이었다. “그와 일하는 것은 정말 즐거웠지요.” 시트코베츠키가 말한다.
“저는 정말로 이 수록곡들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음반을 듣는 여러분들 역시 저처럼 좋아했으면 좋겠어요. 감상자들이 이 곡들을 그리 자주 들어본 것이 아니란 것을적어도 이러한 형태의 선곡 모음으로는저 역시 잘 알기 때문에 우리는 작품에 대해 거의 알지 못하는 이들조차 즐길 수 있도록 흥미로운 녹음을 남기고자 노력했습니다.”
“폴란드인이었던 비에니아프스키를 제외하면, 모든 작곡가들은 러시아 출신입니다. 그리고 저는 스스로 러시아인임을 강하게 느껴요! 제가 러시아를 좋아하는 만큼 그곳에 자주 가보지는 못했지만, 오래 전 몇 번 러시아로 돌아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너무 어린 시절 고국을 떠나 잊고 있었던 러시아 문화들을 보고 배우며 느끼려고 노력했죠.”
그렇지만 시트코베츠키 역시 세계 도처의 동포 러시아인들처럼, 점점 더 국제화 되어가고 있는 음악의 세계 안에서 살고 있다. 지금은 바이올리니스트 후 쿤(Hu Kun)을 사사하고 있는데 그는 동양과 서양 음악 학교들의 상이한 훈련법을 균형 잡힌 시각으로 집대성하여 사샤를 지도하고 있다.
“맨 처음에 그것은 매우 과감한 변신이었어요. 왜냐하면 러시아 악파는 그 무엇보다도 초절 테크닉의 습득을 우선시 하고 있었기 때문이죠. 그러나 결국 바뀐 접근법일지라도 같은 길로 가고 있음을 나중에 알게 되었답니다. 그리고 후 쿤 교수님은 다양한 학파의 영향을 잘 조화시킬 줄 아시는 분이기 때문에 저는 매우 행운아라고 생각합니다. 그분은 러시아 악파의 레퍼토리에 정통했던 교수님을 사사했지만, 동시에 예후디 메뉴인과 가장 가까웠던 제자 중 하나였으며, 그들은 곧잘 함께 연주하곤 하셨어요.
결국 저는 서구 스타일의 다양한 아이디어들을 접할 수 있었고 제가 러시아 악파에서 배운 것들을 이들과 통합해 소화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시트코베츠키는 주목해야 할 바이올리니스트이다. 그의 음악적 역량으로 인해 어쩌면 당신은 음반에서 듣게 되는 그의 잘 다듬어진 테크닉과 놀랄 만큼 성숙하고 강력한 사운드를 당연시하게 될는지도 모른다. 팡파르 매거진(Fanfare magazine)은 “즐거움으로 가득찬 이 디스크는, 단 몇 초만으로도 고전의 향수를 불러일으킨다.”고 전하고 있다. 결국 시간이 말해주겠지만 그 기간 동안 사샤의 초기 커리어는 왕립 음악학교에서 더욱 만개할 것이다. 그는 수업에 충실하고 있고 다른 모든 학생들처럼 동등한 시험을 치르고 있지만, 연주 계약이 있을 때면 언제고 교실을 빠져나오는 것이 허락된다.
“저는 정말로 아카데미에 고마워해야 합니다.” 이 진지하지만 친근한 젊은이는 다음과 같이 결론짓는다. “그러나 그것이야말로 정말로 학교가 지향해야 하는 바라고 생각합니다. 커리어를 만들어가려고 하는 학생들을 도와주는 것 말이에요. 저는 왕립 음악학교가 저에게그리고 우리 모든 학생들에게최선의 성공방법을 제공하기 위해 애쓴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김광훈 옮김
러시아에서 온 조숙한 아이 - 알렉산더 시트코베츠키

최근 유명세를 치르고 있는 신예 바이올리니스트 알렉산더 시트코베츠키의 행보를 앤드류 팔머(Andrew Palmer)가 알아본다.
런던 왕립 음악학교(Royal Academy of Music in London)의 전도양양한 아이들 중에서도 또래에 비해 배(倍) 이상의 연주 경험을 가진 러시아 출신의 바이올리니스트가 있다. 알렉산더 시트코베츠키(Alexander Sitkovetsky)는 십대의 나이에 경험해야 하는 것들을 놓치지 않으면서도 이미 런던의 일급 무대인 위그모어 홀에서 리사이틀을 가졌으며,
자신의 데뷔 음반인
명문 음악가 집안의 가장 나이 어린 연주자인 그는, 피아니스트인 어머니 올가 시트코베츠키(Olga Sitkovetsky)와 록 뮤지션인 아버지 알렉산더 사이의 유일한 아들이다. 사샤는 바이올리니스트 드미트리 시트코베츠키(Dmitri Sitkovetsky)의 조카인 동시에 피아니스트 벨라 다비도비치(Bella Davidovich)와 바이올리니스트 줄리안 시트코베츠키(Julian Sitkovetsky)의 손자이기도 하다. 이런 맥락에서 이해한다면 갑작스런 명성도 이 어린 연주자에게는 그리 놀랄 만한 일이 못된다.
“가족 모두가 콘서트 여행을 하는 전문 연주자라는 사실은,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무척이나 편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늘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처럼 말이죠. 그래서 저는 제가 집안의 돌연변이가 아닌 것에 안도하며 만족해하곤 하지요!” 실제로 그는 10대가 되기도 전에 커리어를 시작한 신동 부류는 아니다. 그리고 다년간의 ‘연습 콘서트(사샤 본인의 말을 빌자면 연주력의 발전에 도움을 주는)’의 시간을 보내고 이제 막 더 큰 국제 무대에서 연주를 시작하려고 하는 중이다. “제가 좀더 나중에 경험하게 되길 원하는 ‘화려한 무대와 이목의 집중’을 이미 다 맛보았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가 공손하게 덧붙인다.
젊은이여, 서방 세계로 가라
사샤가 러시아로부터 영국으로 이주한 것은 그가 어렸을 적의 일이다. “제가 여섯 살이었을 때, 예후디 메뉴인이 모스크바의 우리집에 들리셨죠. 그는 나의 어머니를 초청하여 그의 학교(메뉴인 스쿨)에서 가르쳤어요. 그리고 나 역시도 학생으로서 초청했었지요. 그 이후로 계속해서 우리는 영국에 살았답니다.”
1999년 여름, 사샤는 메뉴인의 장례식에 연주자로 초청되었고 그 해가 끝날 무렵 왕립 음악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그는 그곳에서 독주자 경력모든 메뉴인 스쿨의 학생들이 갈망하는 바이지만 모두가 이루지는 못하는을 쌓는 대신에 학업을 모두 마칠 예정이다. 그는 “저는 개개인이 가진 ‘기질’이야말로 무엇이 될 것인가를 드러내는 지표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한다.
“개인적으로, 저는 언제나 솔로이스트가 되기를 바랬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무엇이 어떻게 될지, 어떤 식으로 성공할 것인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저 역시도 언제나 열린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물론 지금은 그것을 가늠하기에는 매우, 매우 이른 시기임을 잘 압니다. 저는 앞으로 다가올 일들이 어려운 동시에 흥미진진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가족들이 내가 어떤 길로 가야하며 어떻게 이러한 기질적인 면들을 다뤄야 하는지를 조언해 준다는 점에 있어서 저는 무척 행운아입니다. 그러나 그들로부터 제가 음악가가 되어야 한다는 어떠한 압력도 받은 적은 없습니다. 비록 러시아에서는 반드시 추구해야 하는 일류의 커리어라 해도 말이죠.”
‘기질’에 관한 이야기 중에 사샤는 재미난 에피소드분명 누군가가 지어낸 것으로 보이는를 언급했다. “무표정의 대명사, 하이페츠에 관한 이야기가 그것인데, 어느 날 하이페츠의 부인이 자신의 생일 선물로 하이페츠에게 연주중에 미소를 지어달라고 요구했답니다. 이에 하이페츠는 확실히 미소를 지어 보였지만, 그리고 나서 곧바로 연주에서 실수를 범했지요!” 사샤가 웃는다.
“전 세대의 위대한 바이올리니스트들은 좀처럼 움직이지 않고 꼿꼿이 서서 연주했지요. 나 역시 무대 위에서 너무 많이 움직여서는 안 된다고 배웠고 그것에 동의합니다. 그러한 움직임은 물리적으로 연주를 방해하거든요.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마치 돌처럼 경직되어 연주하진 않습니다. 저는 음악이 흘러가는 대로 연주하려고 노력합니다.”
레코드에 관하여
사샤의 콘서트 커리어가 내년 이후로는 유럽을 거점으로 진행될 것이기 때문에, 대서양을 가로지르는 관심은 즉각 그의 CD에 맞추어졌다. 그가 설명하듯이, 데뷔반 제작은 미국 연주 기간중 실로 우연한 기회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3년 전 여름, 저는 뉴포트 음악 페스티벌에 초청 받았어요. 엔젤 레코드사의 부사장인 길버트 헤더윅 역시 거기에 있었는데, 제 생각에 그가 내 연주를 맘에 들어했던 모양이에요! 그 당시, 저는 레코드를 만들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지만 다행스럽게도 헤더윅은 헌신적이고 열정적으로 저를 기다려 주었지요.”
음반은 좀처럼 듣기 힘든,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러시아 작품들을 담고 있다. 사샤는 어머니를 반주자로 대동했으며, 프로듀서 맥스 윌콕스는 루빈슈타인이나 젊은 이착 펄만의 프로듀서로 유명했던 인물이었다. “그와 일하는 것은 정말 즐거웠지요.” 시트코베츠키가 말한다.
“저는 정말로 이 수록곡들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음반을 듣는 여러분들 역시 저처럼 좋아했으면 좋겠어요. 감상자들이 이 곡들을 그리 자주 들어본 것이 아니란 것을적어도 이러한 형태의 선곡 모음으로는저 역시 잘 알기 때문에 우리는 작품에 대해 거의 알지 못하는 이들조차 즐길 수 있도록 흥미로운 녹음을 남기고자 노력했습니다.”
“폴란드인이었던 비에니아프스키를 제외하면, 모든 작곡가들은 러시아 출신입니다. 그리고 저는 스스로 러시아인임을 강하게 느껴요! 제가 러시아를 좋아하는 만큼 그곳에 자주 가보지는 못했지만, 오래 전 몇 번 러시아로 돌아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너무 어린 시절 고국을 떠나 잊고 있었던 러시아 문화들을 보고 배우며 느끼려고 노력했죠.”
그렇지만 시트코베츠키 역시 세계 도처의 동포 러시아인들처럼, 점점 더 국제화 되어가고 있는 음악의 세계 안에서 살고 있다. 지금은 바이올리니스트 후 쿤(Hu Kun)을 사사하고 있는데 그는 동양과 서양 음악 학교들의 상이한 훈련법을 균형 잡힌 시각으로 집대성하여 사샤를 지도하고 있다.
“맨 처음에 그것은 매우 과감한 변신이었어요. 왜냐하면 러시아 악파는 그 무엇보다도 초절 테크닉의 습득을 우선시 하고 있었기 때문이죠. 그러나 결국 바뀐 접근법일지라도 같은 길로 가고 있음을 나중에 알게 되었답니다. 그리고 후 쿤 교수님은 다양한 학파의 영향을 잘 조화시킬 줄 아시는 분이기 때문에 저는 매우 행운아라고 생각합니다. 그분은 러시아 악파의 레퍼토리에 정통했던 교수님을 사사했지만, 동시에 예후디 메뉴인과 가장 가까웠던 제자 중 하나였으며, 그들은 곧잘 함께 연주하곤 하셨어요.
결국 저는 서구 스타일의 다양한 아이디어들을 접할 수 있었고 제가 러시아 악파에서 배운 것들을 이들과 통합해 소화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시트코베츠키는 주목해야 할 바이올리니스트이다. 그의 음악적 역량으로 인해 어쩌면 당신은 음반에서 듣게 되는 그의 잘 다듬어진 테크닉과 놀랄 만큼 성숙하고 강력한 사운드를 당연시하게 될는지도 모른다. 팡파르 매거진(Fanfare magazine)은 “즐거움으로 가득찬 이 디스크는, 단 몇 초만으로도 고전의 향수를 불러일으킨다.”고 전하고 있다. 결국 시간이 말해주겠지만 그 기간 동안 사샤의 초기 커리어는 왕립 음악학교에서 더욱 만개할 것이다. 그는 수업에 충실하고 있고 다른 모든 학생들처럼 동등한 시험을 치르고 있지만, 연주 계약이 있을 때면 언제고 교실을 빠져나오는 것이 허락된다.
“저는 정말로 아카데미에 고마워해야 합니다.” 이 진지하지만 친근한 젊은이는 다음과 같이 결론짓는다. “그러나 그것이야말로 정말로 학교가 지향해야 하는 바라고 생각합니다. 커리어를 만들어가려고 하는 학생들을 도와주는 것 말이에요. 저는 왕립 음악학교가 저에게그리고 우리 모든 학생들에게최선의 성공방법을 제공하기 위해 애쓴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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