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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인생을 담는다, 첼리스트 조영창

작성자효정|작성시간07.05.13|조회수1,176 목록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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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인생을 담는다, 첼리스트 조영창




인터뷰를 준비하기 위해 그가 소개되었던 자료들을 찾아보니 20대의 순수하고 앳된 시절의 옛 모습들이 새롭고 신선하다. 15여 년의 시간을 뚫고 빛바랜 사진 속에는 수줍은 듯한, 그러나 뭔가 강한 의지에 차 있는 것 같은 발그스레한 홍안의 젊은 청년이 환하게 웃고 있다. 얼마 전 찍었다는 그의 사진을 다시 보니 반짝이는 눈빛은 예나 지금이나 여전하다. 어린 시절의 샘솟던 영감이 시간과 함께 고갈되어버린 불운한 음악 천재가 있는가 하면, 세월과 함께 진한 향을 내며 음악적 상상력을 넓혀 나가는 예술가들도 있으니... 그는 확실히 세월과 함께 더 깊이 있고, 사려 깊고, 인간적인 연주가로 성숙해 온 음악인인 듯싶다.

헬로?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 머나먼 땅 독일에서의 그의 전화통화 음성은 낮고 차분했다. 우수개소리지만 사실 처음 헬로? 하는 말을 들었을 때 그가 첼로? 하고 말하는 것으로 착각을 했다. ‘목소리도 참 첼로와 닮아있구나’하는 느낌을 지울 수 없을 즈음 그는 자신의 이미지가 첼로와 비슷하다는 말을 꽤 많이 들어왔다는 말을 들려주었다.



◆ 노래하는 악기, 첼로를 사랑했던 청년

“어린 시절부터 전 음악과는 뗄래야 뗄 수가 없는 관계였어요. 성악가셨던 아버지(조상현)의 노래를 들으며, 또 두 누나 (피아니스트 조영방, 바이올리니스트 조영미)와 함께 음악을 배우면서 자연스럽게 첼로를 접하게 되었죠. 언젠가 다시 태어나도 첼로를 할 거냐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곰곰이 생각해 보고는 그러고 싶다고 했어요. 지금도 마찬가지구요. 첼로의 선율이 가져다주는 그 깊은 영감, 그 속에 흐르는 아름다운 감성이 결국 메마른 인간의 영혼을 구원해 줄 거라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1987년부터 현재까지 독일 에센 폴크방 국립음대 교수로 재직 중인 조영창은 한국에서는 1997년부터 화음 쳄버 오케스트라의 리더로 활동하고 있으며, 97년부터 매년 7인의 음악인들에 참여해 왔다.

머나먼 이국 땅에 그가 있어서 그런지 고국의 팬들은 그가 언제쯤 고국에서 연주회를 갖는지, 무슨 계획들이 진행되는지 그의 행보에 늘 관심을 갖고 궁금해 한다. 사실 연주회 이름만 다를 뿐 청중들에게 보이는 아티스트들이 지나치게 한정되어 있는 공연계의 현상들을 고려해 본다면 등장인물이 매번 비슷한 음악회를 봐야 하는 팬들에게 조영창이라는 연주가는 어딘지 베일에 가려져 있는 듯한 신비감 같은 것을 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가 이번 연주회를 통해 선보이게 되는 곡은 쇼스타코비치의 피아노 트리오 2번 으로 피아노에 정명훈과 예핌 브론프만, 바이올린에 슐로모 민츠과 다이신 카지모토, 첼로에 미샤 마이스키와 조영창, 비올라에 유리 바슈매트가 함께 호흡을 맞춘다. “모두가 재능 있는 뛰어난 연주가들이고 처음 무대에 같이 서는 연주가들도 있어서 저도 이번 공연에 기대가 큽니다. 고국에서 연주하는 거라서 의미가 더 깊게 느껴지고요.”

세기의 일곱 명의 솔리스트가 함께 하는 무대로 계획된 이번 공연은 2002년 한·일 월드컵의 해를 맞아 진행되는 빅 콘서트의 일환이기도 하다.



◆ 우아한 백조처럼, 포효하는 표범처럼‘격정적이면서 서정적인 연주자’. 그에 대한 연주평은 늘 이렇게 상반된 언어로 표현되곤 했다.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사이, 그러나 어느덧 그의 연주장은 높이 솟아났다가 다시 깊이 침잠하는 뜨거운 열정과 섬세한 부드러움이완벽하게 조화를 이뤄내는 ‘고요한 폭풍의 현장’이 되어버리고 만다. 그의 음악의 세계는 이미 박제된 언어 속에는 존재하지 않는 무안한 생명력을 지니고 있다.

일찍이 첼로계의 거장이었던 로스트로포비치에게 각별한 애정을 받으면서 음악계의 주목을 끌었던 조영창. 그는 얼굴 한번 보기도 힘든 숱한 음악계의 거장들과 인연이 깊은 사람 중 한 사람이다. 예원학교 2학년 때 내한한 야노스 슈타커에게 연주를 선보인 것이 계기가 되어 미국 유학길에 오른 그는 피바디 음대·커티스 음악학교·뉴잉글랜드 콘서바토리 등을 차례로 거쳤고, 로스트로포비치 콩쿨 입상으로 그와 인연을 맺는다.

조영창이 프랑스 파리에서 열리는 로스트로포비치 첼로 콩쿨에 참가한 것은 1981년으로 제 2회 때였다. 그는 최연소로 참가해 4위를 차지했는데, 그가 로스트로포비치를 만난 것은 그 콩쿨을 마치고 돌아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였다고 한다. 로스트로포비치는 그에게 훌륭한 연주였다며, 유럽에 올 때마다 레슨을 해주겠다고 제의했고, 그 후부터 유럽에 연주차 들르면 조영창에게 무료로 레슨을 해 주었다.

레슨을 받으러 갈 때마다 조영창은 부인이 손수 만든 김치나 잡채·불고기 등을 대접했는데, 로스트로포비치는 어떤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그때 조영창이 정성껏 준비했던 마음은 돈으로 받은 어떤 레슨비보다도 값진 것이었다”고 회상한 바 있다. 한국에 대한 인상에 대하여 로스트로포비치가 “조영창이 대접했던 김치의 맛 그대로, 계절에 따라 김치의 익는 맛이 다르듯 한국 사람들의 감성은 매우 풍부해 보인다”고 말한 것을 보면 그는‘조영창’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한국에 대한 전체적인 문화 이미지와 정서들을 느껴왔던 것 같다.

조영창은 83년 봄, 로스트로포비치가 워싱턴에서 그를 찾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는데, 그해 4월에 NSO의 서울연주를 앞두고 로스트로포비치가 그와 꼭 협연을 하고 싶다고 한다는 것이었다.

그 수많은 공연 중 지금까지도 가장 생생하게 기억된다는 1984년 워싱턴 내셔널 심포니와의 협연을 통해 조영창은 자신의 음악적인 재능을 세계에 선보일 수 있었던 기회를 얻게 되었고, 그해 그는 ‘올해의 가장 흥분되는 연주회 중의 하나’라는 찬사를 받으며 성공적인 뉴욕 데뷔를 했다. 그 후 로스트로포비치의 70회 생일을 맞아 로스트로포비치 국제 첼로 콩쿨의 1위 입상자와 수제자들만 참석한 로스트로포비치 첼로 콩쿨에 심사위원으로 참석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해 왔다.

“훌륭한 스승을 만난다는 건 연주가에게 있어서 굉장히 큰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그는 로렌스 레서·데이빗 쇼어·팔름· 야노스 스타커 등을 사사했다). 지그프리드 팔름 교수나 로스트로포비치의 가르침을 통해 어떻게 음악을 만들어 갈 것인지, 어떻게 표현해야 할 것인지 음악적으로 많이 성숙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어요. 로스트로포비치의 경우 삶 자체가 음악인 분이죠. 특히 작은 곳에는 굉장히 돈을 아끼는 등 검소한 사람이지만 모스크바에 병원을 설립하는데 기부를 한다든지 하는 가치 있는 곳에는 자신의 모든 것을 헌신할 수 있을 만큼 곧고 강직한 성품의 음악인입니다.”

그렇다면 이토록 훌륭한 스승을 두었던 그는 현재 학생들에게 어떤 스승의 모습인 것일까? “학생들을 가르치고 함께 있는 그 시간, 그 순간들보다 졸업한 뒤, 먼 훗날 어떤 음악인이 되는냐 하는 것이 중요한 거겠죠. 학생 개인의 성향과 감성과 특성을 살려 자신만의 색깔을 가진 음악을 만들어 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그런 역할을 하려합니다. 물론 연습과 인내 없이는 좋은 음악을 만들 수 없다는 건 말할 필요도 없는 것이구요.”

그는 유수의 콩쿨과도 인연이 깊다. 로스트로포비치 국제 첼로 콩쿨 입상, 뮌헨방송국 국제 콩쿨 첼로 부문 입상, 카잘스 국제 첼로 콩쿨 입상, 코다이 솔로 소나타의 특별 연주자상 수상 등 다양한 국제 음악 콩쿨 무대에서 기량을 발휘, 많은 이들의 부러움을 사기도 했다. 그래서 그런지 콩쿨 자체에 대한 그의 생각은 유연하다.

“어떤 것이든지 양면의 모습을 갖게 마련이죠. 지나치면 역효과가 나는 것은 콩쿨도 예외가 아니에요. 결국 콩쿨을 임하는 태도가 중요하다고 봅니다. 새로운 곡들을 배우고 공부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한다면 좋은 계기가 될 수도 있을 테니까요. 하지만 콩쿨에 대한 맹신이나 콩쿨 자체가 목적이 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음악가에게 있어서 콩쿨은 하나의 경험이고, 경력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니까요. 콩쿨에 우승한 사람들이 모두 훌륭한 음악인이 되는 것은 아닌 것처럼 말이죠.”

글·국지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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