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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한번 마음에 드는 연주를 할 수 있을까?` - 바이올리니스트,김남윤
“갈라미언 선생님은 엄격하면서도 인자하신 분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친해지기 힘든 부분도 있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다들 느끼는 점이 정말 제자사랑이 많으신 분이라는 겁니다. 하지만 정말 인정받기가 힘든 선생님이기도 했어요. 절대 ‘good’이라는 소리를 하지 않으십니다. 아무리 잘해도 ‘okay’가 가장 좋은 칭찬이었으니까요.”
“제가 커버라고요? 다음달 저 때문에 <스트링 앤 보우> 책 안 팔리는거 아니에요?” 본지에서 김남윤에게 커버 인터뷰를 요청했을 때의 그녀의 첫 반응이었다. 이 얘기를 들은 기자는 웃음이 나왔고, 기자의 이 말을 전해들은 몇몇 사람들 역시 웃을 수밖에 없었다. ‘겸손’이라고 표현하기에는 지나칠 정도로 겸손한 그녀의 태도에서 바이올리니스트로서, 대학교수로서 한평생을 음악 속에 묻혀 살아온 그녀의 채취가 묻어나는 듯했다.
연주자로서의 김남윤... 어렸을 때 유난히 몸이 약했다는 김남윤. 유치원 때부터 노래에 뛰어난 소질을 보였지만 몸이 약한 탓으로 음악을 전공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다만 부모님이 모두 음악을 좋아하셨고 언니가 피아노를 전공했기에 항상 음악 속에서 성장할 수 있었다. “제가 어렸을 때 아버지가 대전으로 전근을 가셨어요. 어느날 대전에서 언니를 따라 실내악 음악회에 가게 됐는데, 그곳에서 들리는 바이올린 소리가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집에 돌아와서는 아버지께 서울에 올라가면 꼭 바이올린을 사달라고 졸랐었죠.”
아버지께서는 여섯 살 때 생일선물로 바이올린을 사주셨고, 그때부터 김남윤은 이제는 바이올린을 배우게 해달라고 졸랐다. 결국 그녀는 초등학교 3학년 때 언니 친구로부터 바이올린을 배우기 시작했다. “언니 친구가 저를 조금 가르치더니 재주가 있다며 지금은 돌아가신 최영우 선생님께 저를 데려갔습니다. 그때부터 선생님과 인연이 되어 레슨을 받게 됐죠. 선생님은 제가 바이올린을 제대로 시작한지 1년도 채 안된 초등학교 4학년 때 이화·경향 콩쿨에 나가보라고 하셨어요.”
그렇게 노파심에 나간 콩쿨이었지만 김남윤은 그 콩쿨에서 2등을 수상하는 영광을 얻었다. 뜻밖의 결과에 놀란 사람은 김남윤만이 아니었다. 그녀의 부모님은 이때부터 더욱 열성적으로 그녀를 뒷바라지 해줬고 그녀는 그 다음해 같은 콩쿨에서 특상을 수상하게 됐다.
“본격적으로 바이올린을 시작하고는 여러 번, 아니 수십 번 슬럼프가 왔었습니다. 사실 지금도 슬럼프는 있어요. 물론 앞으로도 올 것이라고 생각하고요. ‘슬럼프’라는 것은 어느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누가 지혜를 가지고 현명하게 극복하느냐가 중요한 문제죠.”
이화여중 3학년 때 동아콩쿨에서 1등을 한 김남윤은 주위에서 유학을 가라는 권유를 많이 받았다. 하지만 그녀는 서울예고 3학년, 1967년 2월 졸업과 동시에 미국으로 유학을 갈 수 있었다. 바이올린을 처음 배웠던 시기도 늦은 감이 있었고, 유학의 길을 택한 시기도 다소 늦었지만 그런 만큼 그녀에게는 큰 깨달음이 많았다. “지금은 유학가는게 크게 어렵지 않죠. 하지만 그 당시에는 우리나라가 경제적으로 굉장히 힘들었던 시대였거든요. 음악으로 유학을 간 사람이 다섯 손가락 안에 꼽을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저는 갈라미언 선생님에게 배우기 위해 유학을 선택했습니다.”
집안에서 늦둥이 막내로 자란 김남윤은 이때 처음으로 부모 곁을 떠나고 집을 떠나봤다. 그래서인지 단지 200불을 가지고 떠난 유학길이 그녀에게는 참 외롭고 힘들게만 느껴졌다. 하지만 지금 그때를 다시 회상해보면 그야말로 보람찬 유학생활이었다는 것이 그녀의 기억으로 남아 있다.
“그때는 국제전화를 하려면 전화를 신청해서 3분 동안만 할 수 있었습니다. 한국음식이요? 거의 없었죠. 어느 유학생 부부와 그들 차를 타고 배추를 사기 위해 코리아 타운까지 갔었던 기억도 나는걸요. 사실 고생은 했지만 참다운 유학생활은 고생 속에서 음악을 통해 즐거움을 찾는게 아닐까 생각해요.” 갈라미언 교수를 찾아 떠난 미국 유학생활. 그녀는 10년 동안 갈라미언 교수에게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엄격하면서도 인자하신 분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친해지기 힘든 부분도 있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다들 느끼는 점이 정말 제자사랑이 많으신 분이라는 겁니다. 하지만 정말 인정받기가 힘든 선생님이기도 했어요. 절대 ‘good’이라는 소리를 하지 않으십니다. 아무리 잘해도‘okay’가 가장 좋은 칭찬이었으니까요.”
김남윤에게 갈라미언 교수의 가르침은 음악적으로 뿐만 아니라 교육자로서도 많은 도움이 됐다. 갈라미언 교수가 한 말 중에 너무 감명을 받아서 현재 자신의 제자들에게도 늘 해주는 말이 있다. “소가 밭을 갈 때 얼굴에다 나무판을 씌운다는 겁니다. 왜 그런지 아세요? 다른 곳에 신경쓰지 않고 앞만 보고 일하는데 집중하기 위해서랍니다.” 오는 10월 31일 금호아트홀에서 독주회를 갖는 김남윤은 이번 연주회에서 피아니스트 김대진과 호흡을 맞춘다.
“김대진 선생님이 ‘대단한 사람’이라는 것은 다 알죠? 제가 ‘대단하다’라는 것은 그많은 연주를 기가 막히게 소화하고, 많은 청중들을 이끌고 다니는 것이 대단하다는 겁니다. 김대진 선생님과는 참 인연이 많아요. 같은 학교, 같은 층, 그것도 바로 옆방을 쓰고 있거든요. 게다가 김대진 선생님이 제 제자와 결혼을 했고, 제가 그 딸을 또 가르치고 있으니 이만한 인연도 없죠?”
이번 독주회에서 연주할 레퍼토리는 브람스의 ‘Sonatensatz’, 수크의 ‘Four Pieces for Violin and Piano, Op.17’, 강준일의 ‘아롱(Arong) for Violin and Piano’, 그리그의 ‘Sonata for Violin and Piano No.2 in G Major, Op.13’이다. “그리그 작품은 많이 연주되는 곡은 아니지만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해보고 싶었던 곡이었습니다. 강준일 선생님 작품은 제가 항상 선생님을 볼 때마다 ‘좋은 곡 좀 써주세요’라고 부탁 드렸었는데 드디어 써주셨어요.”
1978년부터 매년 개최한 독주회에서 한두 번을 제외하고는 항상 한국 작곡가의 작품을 레퍼토리에 넣은 김남윤. 그녀는 “한국 작곡가의 작품을 한국 연주자가 연주하지 않으면 누가 하겠냐”며 한국 작곡가들의 작품이 더욱 활발히 연주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10월 21일에는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그녀의 제자 이경선·김현아·백주영과 함께 ‘4 Divas of Violin’ 이란 부제로 연주를 갖는다. 특히 1부에서 연주되는 비발디의 협주곡 ‘사계’는 계절에 따라 한명씩 협연해 더욱 청중들의 관심을 주목하고 있다. 사실 4명의 아티스트가 함께 무대에 서는 것도 힘든 기회이지만, 이들 모두 한국을 대표할 정도로 세계무대에서 활동하고 있는 이들이기에 이번 무대의 특별함은 더하다 하겠다.
“저는 다른 것 다 필요 없습니다. 단지 “우리 선생님 눈물 많고 정 많고 참 좋았다. 그지?”라고 대답해 줄 수 있는 스승으로 남고 싶습니다. 작은 꼬마들부터 대학원생, 그리고 더욱 성장해 바이올리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는 제자들 모두가 제 아들같고 딸 같아요. 모두 사랑… 합니다.”
교육자로서의 김남윤... 지난해 3월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장으로 취임한 김남윤. 가끔은 행정적인 업무와 잦은 회의들이 그리 반갑게 느껴지지 않을 때도 있지만 학교를 위해, 그리고 우리나라 음악교육의 발전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학교에 바라는 것은 없습니다. 다만 나라에서 좀더 음악계에 많은 뒷받침을 해줬으면 합니다. 조금만 투자를 해준다면 많은 훌륭한 아티스트들이 우리나라를 더욱 빛낼 텐데 아쉬운 점이 많습니다.”
실제 여러 국제콩쿨에 심사위원으로 참석해 보면 우리나라와 비교해 볼 때 속상하고 안타까운 일들이 다반수라는 것. 학생들이 세계무대에서 자신의 꿈을 펼치기 위해서는 부모·교수·학교 외에도 나라의 관심이 많이 필요하다. 한국 학생들이 예전에 비해 국제적으로 활동도 활발하고 실력도 월등히 향상됐다고들 하는데, 이참에 우리나라 학생들의 장·단점은 무엇인지에 대해 질문했다. “학생들의 실력이 향상된 것은 사실입니다. 이스라엘 정규 TV 프로그램에서 유명한 평론가가 나와서 한국 학생들에 대해 “이제는 코리안 바이올리니스트로 옮겨가고 있다”고 말한 적도 있을 정도니까요.”
특히 테크닉 면에서는 세계 어느 나라 학생들보다 뒤지지 않는다고. 하지만 같은 나이의 외국 학생들에 비해 우리나라 학생들은 대체적으로 어린(?) 학생들이 많다. “주입식 교육인 탓도 있지만 부모님 영향도 많다고 생각합니다. 너무 울타리 안에서 곱게 자라서 성숙하지 못하다는 거죠. 학생들 음악을 들어보면 느껴져요. 정말 자식을 사랑하고 좋은 음악가로 성장하기를 원한다면 좀더 강하게 키우는 것도 훗날 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또 한가지 아쉬운 점은 우리나라 학생들은 체력의 중요성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여학생들의 경우 많이 먹으면 살이 찐다는 이유로 다이어트까지 하는 실정이니 답답할 따름이라는 것. 지금 당장은 크게 차이가 없을지 모르나 장기적으로 봐서 결정적인 순간에 체력에서 큰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부모님들께도 드리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조금만 ‘아니다’ 싶으면 바로 선생님을 바꾸는 분들을 많이 봤습니다. 하지만 정말 학생들에게 악영향을 끼칠 수 있는 부분입니다. 부모님들의 극성으로 아이들이 혼동을 받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뜻이죠. 어리석은 생각일 뿐입니다. 제가 오랫동안 학생들을 지도하면서 느낀 점은 꾸준히 한 선생님한테 배운 학생들이 끝까지 잘한다는 겁니다.” 부모들이 자식 잘되기를 바라듯, 스승 역시 제자가 잘되기를 바라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특히 음악은 단순히 그룹으로 암기 공부하듯 하는 것이 아니라 일대 일로 한 명의 음악가를 탄생시키는 일이기 때문에 스승으로서 제자들이 멋진 음악가로 성장하기를 원하는 것이다.
그녀는 요즘 ‘언제나 한번 마음에 드는 연주를 할 수 있을까?’ 생각중이란다. 몇 년 몸이 아프면서 사실 연주자로서의 꿈을 많이 접은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실내악 연주를 하나 하더라도 제대로, 평생 기억에 남을 수 있는 연주를 하고 싶다고. 그래서인지 제자들에게 잔소리도 많고 무서운 선생님이지만 속으로는 그들을 가장 잘 이해하고 있는 스승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과연 김남윤은 자신이 어떤 스승이라고 생각하는지 궁금했다. “선생님, 제자들에게 어떤 선생님이세요?” “무섭고 잔소리 많고 목청 큰 사람이지 뭐.” 그녀의 대답은 참 간단명료했다. 하지만 실제 김남윤의 모습은 그게 전부가 아니다. ‘인정 많고 눈물 많은 사람’이 또한 김남윤이기도 하다. 지난 스승의 날에는 제자들이 불러준 ‘스승의 은혜’ 노래를 듣고 소리내어 울기도 했으니 말이다. “물론 제자들이 많다보니 서운해 하는 제자도 있기 마련이죠. 하지만 제가 모두에게 똑같은 것을 해줄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점들을 제자들이 조금씩만 이해해 줬으면 해요.”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어떤 스승으로 기억되고 싶은지 물었다. 김남윤의 가슴 찡한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저는 다른 것 다 필요 없습니다. 단지 “우리 선생님 눈물 많고 정 많고 참 좋았다. 그지?”라고 대답해 줄 수 있는 스승으로 남고 싶습니다. 작은 꼬마들부터 대학원생, 그리고 더욱 성장해 바이올리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는 제자들 모두가 제 아들 같고 딸 같아요. 모두… 사랑합니다.”
글: 최혜정 기자| 사진 · 윤윤수 기자(표지사진 · 염문종)
"언제나 한번 마음에 드는 연주를 할 수 있을까?` - 바이올리니스트,김남윤
“갈라미언 선생님은 엄격하면서도 인자하신 분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친해지기 힘든 부분도 있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다들 느끼는 점이 정말 제자사랑이 많으신 분이라는 겁니다. 하지만 정말 인정받기가 힘든 선생님이기도 했어요. 절대 ‘good’이라는 소리를 하지 않으십니다. 아무리 잘해도 ‘okay’가 가장 좋은 칭찬이었으니까요.”
“제가 커버라고요? 다음달 저 때문에 <스트링 앤 보우> 책 안 팔리는거 아니에요?” 본지에서 김남윤에게 커버 인터뷰를 요청했을 때의 그녀의 첫 반응이었다. 이 얘기를 들은 기자는 웃음이 나왔고, 기자의 이 말을 전해들은 몇몇 사람들 역시 웃을 수밖에 없었다. ‘겸손’이라고 표현하기에는 지나칠 정도로 겸손한 그녀의 태도에서 바이올리니스트로서, 대학교수로서 한평생을 음악 속에 묻혀 살아온 그녀의 채취가 묻어나는 듯했다.
연주자로서의 김남윤... 어렸을 때 유난히 몸이 약했다는 김남윤. 유치원 때부터 노래에 뛰어난 소질을 보였지만 몸이 약한 탓으로 음악을 전공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다만 부모님이 모두 음악을 좋아하셨고 언니가 피아노를 전공했기에 항상 음악 속에서 성장할 수 있었다. “제가 어렸을 때 아버지가 대전으로 전근을 가셨어요. 어느날 대전에서 언니를 따라 실내악 음악회에 가게 됐는데, 그곳에서 들리는 바이올린 소리가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집에 돌아와서는 아버지께 서울에 올라가면 꼭 바이올린을 사달라고 졸랐었죠.”
아버지께서는 여섯 살 때 생일선물로 바이올린을 사주셨고, 그때부터 김남윤은 이제는 바이올린을 배우게 해달라고 졸랐다. 결국 그녀는 초등학교 3학년 때 언니 친구로부터 바이올린을 배우기 시작했다. “언니 친구가 저를 조금 가르치더니 재주가 있다며 지금은 돌아가신 최영우 선생님께 저를 데려갔습니다. 그때부터 선생님과 인연이 되어 레슨을 받게 됐죠. 선생님은 제가 바이올린을 제대로 시작한지 1년도 채 안된 초등학교 4학년 때 이화·경향 콩쿨에 나가보라고 하셨어요.”
그렇게 노파심에 나간 콩쿨이었지만 김남윤은 그 콩쿨에서 2등을 수상하는 영광을 얻었다. 뜻밖의 결과에 놀란 사람은 김남윤만이 아니었다. 그녀의 부모님은 이때부터 더욱 열성적으로 그녀를 뒷바라지 해줬고 그녀는 그 다음해 같은 콩쿨에서 특상을 수상하게 됐다.
“본격적으로 바이올린을 시작하고는 여러 번, 아니 수십 번 슬럼프가 왔었습니다. 사실 지금도 슬럼프는 있어요. 물론 앞으로도 올 것이라고 생각하고요. ‘슬럼프’라는 것은 어느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누가 지혜를 가지고 현명하게 극복하느냐가 중요한 문제죠.”
이화여중 3학년 때 동아콩쿨에서 1등을 한 김남윤은 주위에서 유학을 가라는 권유를 많이 받았다. 하지만 그녀는 서울예고 3학년, 1967년 2월 졸업과 동시에 미국으로 유학을 갈 수 있었다. 바이올린을 처음 배웠던 시기도 늦은 감이 있었고, 유학의 길을 택한 시기도 다소 늦었지만 그런 만큼 그녀에게는 큰 깨달음이 많았다. “지금은 유학가는게 크게 어렵지 않죠. 하지만 그 당시에는 우리나라가 경제적으로 굉장히 힘들었던 시대였거든요. 음악으로 유학을 간 사람이 다섯 손가락 안에 꼽을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저는 갈라미언 선생님에게 배우기 위해 유학을 선택했습니다.”
집안에서 늦둥이 막내로 자란 김남윤은 이때 처음으로 부모 곁을 떠나고 집을 떠나봤다. 그래서인지 단지 200불을 가지고 떠난 유학길이 그녀에게는 참 외롭고 힘들게만 느껴졌다. 하지만 지금 그때를 다시 회상해보면 그야말로 보람찬 유학생활이었다는 것이 그녀의 기억으로 남아 있다.
“그때는 국제전화를 하려면 전화를 신청해서 3분 동안만 할 수 있었습니다. 한국음식이요? 거의 없었죠. 어느 유학생 부부와 그들 차를 타고 배추를 사기 위해 코리아 타운까지 갔었던 기억도 나는걸요. 사실 고생은 했지만 참다운 유학생활은 고생 속에서 음악을 통해 즐거움을 찾는게 아닐까 생각해요.” 갈라미언 교수를 찾아 떠난 미국 유학생활. 그녀는 10년 동안 갈라미언 교수에게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엄격하면서도 인자하신 분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친해지기 힘든 부분도 있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다들 느끼는 점이 정말 제자사랑이 많으신 분이라는 겁니다. 하지만 정말 인정받기가 힘든 선생님이기도 했어요. 절대 ‘good’이라는 소리를 하지 않으십니다. 아무리 잘해도‘okay’가 가장 좋은 칭찬이었으니까요.”
김남윤에게 갈라미언 교수의 가르침은 음악적으로 뿐만 아니라 교육자로서도 많은 도움이 됐다. 갈라미언 교수가 한 말 중에 너무 감명을 받아서 현재 자신의 제자들에게도 늘 해주는 말이 있다. “소가 밭을 갈 때 얼굴에다 나무판을 씌운다는 겁니다. 왜 그런지 아세요? 다른 곳에 신경쓰지 않고 앞만 보고 일하는데 집중하기 위해서랍니다.” 오는 10월 31일 금호아트홀에서 독주회를 갖는 김남윤은 이번 연주회에서 피아니스트 김대진과 호흡을 맞춘다.
“김대진 선생님이 ‘대단한 사람’이라는 것은 다 알죠? 제가 ‘대단하다’라는 것은 그많은 연주를 기가 막히게 소화하고, 많은 청중들을 이끌고 다니는 것이 대단하다는 겁니다. 김대진 선생님과는 참 인연이 많아요. 같은 학교, 같은 층, 그것도 바로 옆방을 쓰고 있거든요. 게다가 김대진 선생님이 제 제자와 결혼을 했고, 제가 그 딸을 또 가르치고 있으니 이만한 인연도 없죠?”
이번 독주회에서 연주할 레퍼토리는 브람스의 ‘Sonatensatz’, 수크의 ‘Four Pieces for Violin and Piano, Op.17’, 강준일의 ‘아롱(Arong) for Violin and Piano’, 그리그의 ‘Sonata for Violin and Piano No.2 in G Major, Op.13’이다. “그리그 작품은 많이 연주되는 곡은 아니지만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해보고 싶었던 곡이었습니다. 강준일 선생님 작품은 제가 항상 선생님을 볼 때마다 ‘좋은 곡 좀 써주세요’라고 부탁 드렸었는데 드디어 써주셨어요.”
1978년부터 매년 개최한 독주회에서 한두 번을 제외하고는 항상 한국 작곡가의 작품을 레퍼토리에 넣은 김남윤. 그녀는 “한국 작곡가의 작품을 한국 연주자가 연주하지 않으면 누가 하겠냐”며 한국 작곡가들의 작품이 더욱 활발히 연주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10월 21일에는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그녀의 제자 이경선·김현아·백주영과 함께 ‘4 Divas of Violin’ 이란 부제로 연주를 갖는다. 특히 1부에서 연주되는 비발디의 협주곡 ‘사계’는 계절에 따라 한명씩 협연해 더욱 청중들의 관심을 주목하고 있다. 사실 4명의 아티스트가 함께 무대에 서는 것도 힘든 기회이지만, 이들 모두 한국을 대표할 정도로 세계무대에서 활동하고 있는 이들이기에 이번 무대의 특별함은 더하다 하겠다.
“저는 다른 것 다 필요 없습니다. 단지 “우리 선생님 눈물 많고 정 많고 참 좋았다. 그지?”라고 대답해 줄 수 있는 스승으로 남고 싶습니다. 작은 꼬마들부터 대학원생, 그리고 더욱 성장해 바이올리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는 제자들 모두가 제 아들같고 딸 같아요. 모두 사랑… 합니다.”
교육자로서의 김남윤... 지난해 3월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장으로 취임한 김남윤. 가끔은 행정적인 업무와 잦은 회의들이 그리 반갑게 느껴지지 않을 때도 있지만 학교를 위해, 그리고 우리나라 음악교육의 발전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학교에 바라는 것은 없습니다. 다만 나라에서 좀더 음악계에 많은 뒷받침을 해줬으면 합니다. 조금만 투자를 해준다면 많은 훌륭한 아티스트들이 우리나라를 더욱 빛낼 텐데 아쉬운 점이 많습니다.”
실제 여러 국제콩쿨에 심사위원으로 참석해 보면 우리나라와 비교해 볼 때 속상하고 안타까운 일들이 다반수라는 것. 학생들이 세계무대에서 자신의 꿈을 펼치기 위해서는 부모·교수·학교 외에도 나라의 관심이 많이 필요하다. 한국 학생들이 예전에 비해 국제적으로 활동도 활발하고 실력도 월등히 향상됐다고들 하는데, 이참에 우리나라 학생들의 장·단점은 무엇인지에 대해 질문했다. “학생들의 실력이 향상된 것은 사실입니다. 이스라엘 정규 TV 프로그램에서 유명한 평론가가 나와서 한국 학생들에 대해 “이제는 코리안 바이올리니스트로 옮겨가고 있다”고 말한 적도 있을 정도니까요.”
특히 테크닉 면에서는 세계 어느 나라 학생들보다 뒤지지 않는다고. 하지만 같은 나이의 외국 학생들에 비해 우리나라 학생들은 대체적으로 어린(?) 학생들이 많다. “주입식 교육인 탓도 있지만 부모님 영향도 많다고 생각합니다. 너무 울타리 안에서 곱게 자라서 성숙하지 못하다는 거죠. 학생들 음악을 들어보면 느껴져요. 정말 자식을 사랑하고 좋은 음악가로 성장하기를 원한다면 좀더 강하게 키우는 것도 훗날 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또 한가지 아쉬운 점은 우리나라 학생들은 체력의 중요성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여학생들의 경우 많이 먹으면 살이 찐다는 이유로 다이어트까지 하는 실정이니 답답할 따름이라는 것. 지금 당장은 크게 차이가 없을지 모르나 장기적으로 봐서 결정적인 순간에 체력에서 큰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부모님들께도 드리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조금만 ‘아니다’ 싶으면 바로 선생님을 바꾸는 분들을 많이 봤습니다. 하지만 정말 학생들에게 악영향을 끼칠 수 있는 부분입니다. 부모님들의 극성으로 아이들이 혼동을 받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뜻이죠. 어리석은 생각일 뿐입니다. 제가 오랫동안 학생들을 지도하면서 느낀 점은 꾸준히 한 선생님한테 배운 학생들이 끝까지 잘한다는 겁니다.” 부모들이 자식 잘되기를 바라듯, 스승 역시 제자가 잘되기를 바라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특히 음악은 단순히 그룹으로 암기 공부하듯 하는 것이 아니라 일대 일로 한 명의 음악가를 탄생시키는 일이기 때문에 스승으로서 제자들이 멋진 음악가로 성장하기를 원하는 것이다.
그녀는 요즘 ‘언제나 한번 마음에 드는 연주를 할 수 있을까?’ 생각중이란다. 몇 년 몸이 아프면서 사실 연주자로서의 꿈을 많이 접은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실내악 연주를 하나 하더라도 제대로, 평생 기억에 남을 수 있는 연주를 하고 싶다고. 그래서인지 제자들에게 잔소리도 많고 무서운 선생님이지만 속으로는 그들을 가장 잘 이해하고 있는 스승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과연 김남윤은 자신이 어떤 스승이라고 생각하는지 궁금했다. “선생님, 제자들에게 어떤 선생님이세요?” “무섭고 잔소리 많고 목청 큰 사람이지 뭐.” 그녀의 대답은 참 간단명료했다. 하지만 실제 김남윤의 모습은 그게 전부가 아니다. ‘인정 많고 눈물 많은 사람’이 또한 김남윤이기도 하다. 지난 스승의 날에는 제자들이 불러준 ‘스승의 은혜’ 노래를 듣고 소리내어 울기도 했으니 말이다. “물론 제자들이 많다보니 서운해 하는 제자도 있기 마련이죠. 하지만 제가 모두에게 똑같은 것을 해줄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점들을 제자들이 조금씩만 이해해 줬으면 해요.”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어떤 스승으로 기억되고 싶은지 물었다. 김남윤의 가슴 찡한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저는 다른 것 다 필요 없습니다. 단지 “우리 선생님 눈물 많고 정 많고 참 좋았다. 그지?”라고 대답해 줄 수 있는 스승으로 남고 싶습니다. 작은 꼬마들부터 대학원생, 그리고 더욱 성장해 바이올리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는 제자들 모두가 제 아들 같고 딸 같아요. 모두… 사랑합니다.”
글: 최혜정 기자| 사진 · 윤윤수 기자(표지사진 · 염문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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