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23일 토요일 오전 비 조금 내리고, 오후에는 그침
중국 여행 첫날 중국 요녕성(遼寧省) 집안시(集安市) 고구려 유적 탐방
‘단동 페리’ 5102 객실에서 자다가 잠에서 깨어 밖으로 나가보았더니, 5층 선실 밖으로 눈에 들어오는 것은 망망대해에 넘실거리는 바닷물뿐이었다. 우리가 머문 5층 객실 바로 밑까지 바닷물이었다. 1층부터 4층까지는 화물을 실었기 때문에 화물 무게로 물속에 잠기고, 사람이 타고 있는 곳은 5층부터 7층까지가 객실이었다.
어제 인천항에서 출발하여 밤을 새워 항해하여 날이 밝자 중국의 단동항(丹東港)에 도착하였지만 바로 입항 수속을 하지 않고, 입항 업무를 담당할 직원들이 출근하여 업무를 시작할 9시까지 기다려야 하였다.
우리는 7시에 선내 6층 식당에서 아침을 먹은 후, 소지품을 챙겨서 중국인들이 업무를 시작하는 9시가 넘도록 기다려야 하였다. 그리고 9시가 넘어서야 우리 여행객들은 하선(下船) 준비를 하였다.
배에서 내려 멀리 떨어진 입국장으로 셔틀버스를 타고 갔다. 입국 심사는 그리 까다롭지 않았다. 그리고 내 흰 머리를 본 심사관은 까탈을 부리지 않고 금방 통과시켜 주었다. 우리 일행 40명이 다 나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관광버스에 올랐다. 우리를 실은 관광버스는 출고된 지 며칠이 안 된 신형 버스였다. 인솔자인 강원구 원장의 배려로 나이가 많은 노령의 우리 4사람에게 앞에서 두 번째 좌석을 배정해 주었다.
우리가 여행하는 동안 모든 것을 안내해 줄 사람은 30대의 화교(華僑) 출신으로 북한에서 18세까지 성장한 오봉영이라는 젊은 여인이었다. 해주 오씨(吳氏)라고 하였다. 중국에서 태어난 할아버지가 한국전쟁에 참전하였다가 중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광주 출신의 할머니를 만나 평양에 정착하였기 때문에, 할아버지께서는 돌아가셨지만 부모님은 지금까지도 평양에서 살고 있으며, 자기는 평양에서 화교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한국말이나 중국어를 다 자유자제로 할 수 있게 된 것이라고 하였다.
오봉영 양은 먼저 단동시에 대한 설명부터 시작하였다. 단동시는 요녕성(遼寧省)에 있고, 집안시는 길림성(吉林省)에 있어서, 성(省)의 경계를 넘어갈 것이라 하였다.
단동시(丹東市, 단둥시)는 중화인민공화국 요녕성(遼寧省, 랴오닝성)에 위치한 도시로, 같은 성(省)에 속한 동강시(東江市, 둥강시)와 함께 북한과의 최서남단(最西南端) 접경지에 위치해 있는 도시이다. 면적은 15,030㎢이다. 압록강과 황해를 통해 신의주시와 접해 있다.
고대에는 단동(丹東)이 고조선과 고구려의 영토였으며, 668년 고구려 멸망 후에는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에 속했다가, 발해가 건국된 이후 발해의 영토가 되었다. 요(遼)나라 때 거란족 영토였으나 멸망 후 금나라 때 파속부로(婆速府路)였고 원나라 때에도 파속부가 두어졌다. 1차 요동정벌 당시 고려가 잠시 점령했으나 후퇴하였다. 청나라는 만주에서 한족의 정착을 금지하는 정책을 취하고 있었지만, 1874년에 전면 해금을 단행했고 1876년에 안동현이 신설되었다.
안동항(安東港)은 1903년 대외 개항, 압록강 수운의 발달에 의해 유역의 물자 집산지로서 발전했다. 1931년에 만주사변이 발발하자 즉시 일본군에 점령되었고 만주국은 1934년 안둥 성(安東省)을 신설, 안동현(安東縣)을 성도(省都)로 정했다. 1937년 안동현은 안동시(安東市)로 승격했다. 이 시대에 많은 일본 기업이 안동에 진출했다. 1945년 일본의 항복 후 중국 공산당군이 접수하였고 한국 전쟁(1950년 ~ 1953년) 때는 중국인민지원군의 병참 전선이 되었다. 1965년 안동시는 단동시로 개칭되었다.
단동의 인구는 241만 명이다. 한족, 만주족, 몽골족, 후이족, 한민족, 시버족 등 29개 민족이 거주하고 있다. 단동에 거주하는 소수 민족 중 만주족과 한민족(韓民族)이 많이 거주한다.
◈집안시(集安市)
중국 길림성(吉林省,지린성) 통화시(通化市,퉁화시)에 속한 현급시(縣級市). 고구려의 옛 수도 국내성(國內城,평지성坪地城))과 환도성(丸都城.산성山城))이 위치했던 곳으로, 압록강변에 위치한 인구 25만의 작은 도시이다. 맞은편에는 북한 만포시가 있고, 후술할 고구려 유적을 방문하는 한국인이 많다. 조선족, 후이족, 몽골족 등 소수민족 인구가 12%에 달한다. 시가지 주변의 산지에서 나는 약재와 목재가 일대의 특산물이다. 한국에서는 한자 발음인 '집안'으로 더 알려져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내용
고구려시대 두 번째 수도인 국내성(國內城)이 위치했던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지.
매우 오랜 역사를 가진 집안(集安)은 압록강과 비류수(沸流水,혼강渾江) 유역의 유적들이 이를 증명하고 있는데, 아홉 곳의 원시 유적을 비롯하여 마제 석기, 빗살무늬토기 등이 출토되고 있다. 한무제 때 현도군의 관할 지역에 편입되었다가 고구려가 다시 현도군을 물리치고 옛 땅을 회복하면서 서기 3년에 오녀산성(五女山城)에서 국내성으로 천도를 했다. 427년에 고구려가 수도를 평양(平陽)으로 옮기기 전까지 집안은 고구려의 정치·경제·문화의 중심 역할을 425년간 지속했다.
집안에는 광개토왕릉비(호태왕비)를 비롯하여 고구려 고분인 장군총(將軍塚)·각저총(角抵塚)·무용총(舞踊塚) 등 관련 유적이 많이 남아 있다. 중국에서는 1994년에 이 지역을 국가역사문화명성(國家歷史文化名城)에 지정하였으며, 2004년에는 고구려 왕성과 고분 유적이 북한의 고구려 유적과 함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환도산성과 국내성 유적은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로 보호받고 있다.
집안은 길림성 동남부에 위치한 압록강을 경계로 북한과 마주 보고 있다. 동남쪽으로는 압록강과 북한의 자성군·초산군·위원군·만포시와 가깝고, 서남쪽으로는 요녕성 관전·환인현과 접하며, 서북쪽으로는 통화현의 혼강과 경계를 이룬다. ‘동북지역의 소강남’이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는데, 4개의 가도(街道), 9개의 진(鎭), 2개의 향(鄕)을 관할하고 있다. 2013년 기준으로 인구는 약 22만 명인데, 한족·만족·조선족·회족·몽고족 등 18개 소수민족이 살고 있다.
청대에 만주족의 발상지인 ‘용흥지지’에 포함되어 200여 년간 봉금지대(封禁地帶)로 묶였다가 청 말에 가서야 개간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1902년에 집안현(輯安縣)이 설치되었다가, 1965년에 집안현(集安縣)으로 도시명을 바꾸었다. 1988년에는 국무원의 비준으로 통화시의 현급시로 승격되었다.
전체 면적의 2/3가 삼림지이며, 오녀봉국가산림공원·압록강풍경구·운봉호풍경여유도가촌·광개토왕릉비·국내성 성벽유적·장군총 등 역사문화관광지가 많이 산재하고 있다. 또 장백삼이 유명한데, 중국에서 인삼생산량이 가장 많으며, 홍삼·백삼·서양삼·고려삼·별직삼 등 다양한 종류의 특산품으로 재가공하고 있다.
그리고 오늘의 일정을 대강 설명하였다. 단동에서 집안시(集安市)로 가는데 전에는 비포장 도로였다가 지금은 포장된 고속도로(高速道路)이며, 약 4시간을 걸려서 가게 되는데 한국처럼 시속 100km가 아니라 80km로 달려야 하며 특히 오늘은 비가 오고 있으므로 80km가 아니라 더 저속으로 달려야 하므로 그렇게 시간이 걸릴 것이라 하였다.
그래서 집안시(集安市)에 도착하면 점심때가 훨씬 지나버리므로, 점심을 먹을 수 없기 때문에, 가는 도중에 점심을 먹어야 하므로, 부득이 도시락을 준비하였다면서, 오후 1시쯤 어느 휴게소에 도착하여 도시락을 나누어 주더니, 차 안에서 식사를 하도록 배려해 주었다.
집안시는 과거 고구려 수도였기 때문에 고구려 유적이 많으므로 한국 사람들이 많이 찾는 지역이라 하였다.
우리는 오후 3시 40분에 집안시내를 통과하여 북동쪽의 시 외곽에 있는 광개토대왕릉(廣開土大王陵)과 비(碑)가 있는 곳으로 갔다. 광개토대왕비를 보고 넓은 공원을 400여 미터쯤 떨어진 허름한 능(陵)으로 갔다. 그곳이 광개토대왕릉이라 하였다. 잘 관리되지 않는 크고 높은 무덤에 설치된 돌계단을 올라 무덤의 정상으로 갔더니 석굴이 있고, 굴속에는 ‘왕 내외’가 누워 있었다는 자리가 두 개 있었다. 어마어마한 크기의 광개토대왕비와 어울리지 않는 능의 허술한 모습에 신뢰성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강원구 원장의 말에 의하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는 이곳이 ‘중국의 유산’이냐? ‘고구려의 유산’이냐? 를 놓고 중국이 자기들의 유산이라고 우기고 있는데, 어느 나라의 유산이냐를 판정할 근거를 중국이 숨기고 있는데 자기가 그 근거를 찾았다고 하였다.
세계문화유산을 소개하는 문구 중에 영문 표기가 ‘차이나’인가? ‘고구려(Koguryo)’인가를 보면 알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런데 결과는 ‘고구려(Koguryo)’로 표기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이 광개토대왕릉은 한민족의 유산이라는 것이 확실하다고 역설하였다.
이 경구(景區)를 소개하는 영문에 The world Heritage committee has incribed Capital Cities Tombs of the Ancient Koguryo Kingdom on the world Heritage List.
여기서 고대 우리 민족의 유적인 광개토대왕비와 능을 다 구경하고, 여기에서 조금 떨어진 장군총(將軍塚)으로 가서 장수왕릉으로 여겨지고 있는 왕릉까지 다 보고나서, 다시 집안시내로 돌아왔다. 압록강 변에서 강 건너 북한 지역인 만포시(滿浦市)를 건너다보았다. 해는 지고 조금 있으면 어두워질 것 같았다.
◈중국 지린성 집안시에 있는 고구려 광개토왕의 비석(광개토왕능비, 廣開土王陵碑)
1. 현황
중국 지린성〔吉林省〕 통화시(通化市) 소속의 집안시(集安市)에 있는 석비로서, 고구려의 제20대 장수왕(長壽王, 394~491, 재위 412~491)에 의해 건립되었다. 광개토왕릉비(廣開土王陵碑) 이하 능비(陵碑))의 구체적인 위치는, 압록강 중류의 북한 만포진(滿浦鎭)에서 마주 보이는 통구분지(通溝盆地) 일대이며, 고구려의 평지 도성이었던 통구성(通溝城)에서 동북쪽으로 약 4.5㎞ 지점인 태왕촌대비가(太王村大碑街)에 서 있다.
1928년 이래로 비를 보호하기 위한 비각(碑閣)이 두어지기도 하였는데, 현재는 대형 석조 비각이 설치되어 있으며, 그 사방을 방탄유리로 막아서 외부인들의 접근을 차단하고 있다.
능비는 광개토왕(廣開土王, 374~412, 재위 391~412)이 묻힌 무덤에서 멀지 않은 곳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능비의 서남쪽 약 400m 지점에는 왕릉급 무덤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태왕릉(太王陵)이 있으며, 능비의 동북쪽으로 약 1.7㎞ 지점에는 구조적으로 국내성 도읍기의 가장 늦은 시기에 조영된 왕릉급 무덤인 장군총(將軍塚)이 있다. 현재 우리나라 학계에서는 장군총이 광개토왕의 무덤이라고 보는 연구자가 많다.
구체적인 건립 시기에 대해서는 능 비문에 갑인년(甲寅年) 9월 29일에 왕릉으로 시신을 옮기면서 비를 세웠다는 언급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414년(장수왕 3)으로 볼 수 있다.
능비에 대한 명칭은 여러 가지인데, 광개토왕의 사후에 그의 공적을 기록하였다는 점, 아들인 장수왕이 부왕의 무덤 인근에 세웠다는 점 등을 감안하여 ‘광개토(대)왕릉비’, 혹은 ‘광개토왕비’로 칭하는 경우가 많다. 그 외에 ‘광개토왕’이라는 왕호 대신, 능 비문에 보이는 묘호(廟號)인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을 줄여서 ‘호태왕비(好太王碑)’로 부르는 경우도 있다.
능비는 자연석을 채취한 뒤 다듬어서 세운 사면비(四面碑)로서 재질은 강력 응회암(凝灰巖)이며, 건립 당시의 모습 그대로 현재의 위치에 서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비는 동쪽으로 45도 정도 치우친 동남향 방향으로 서 있으며, 높이는 약 6.39m에 달한다. 제작 당시 글자의 크기와 간격을 균일하게 하기 위해 네 비면의 가장자리에 외곽선을 그리고, 그 안에 세로로 약 13㎝ 간격의 괘선들을 그어 공간을 구획한 뒤 글자를 새긴 것으로 보인다.
1면 11행, 2면 10행, 3면 14행, 4면 9행의 총 44행에 걸쳐 글자들이 음각(陰刻)되어 있으며, 글자 형태는 예서(隸書)에 가깝다. 총 글자 수는 원래 1,775자 정도였다고 추정되나, 그 가운데 최소 140여 자 이상이 자연적인 손상 내지는 후대의 인위적 파손으로 인해 현재 판독이 불가능한 상태이다.
2. 발견 과정
능비는 고구려 멸망 이후 한동안 문헌 기록에 등장하지 않다가 15세기 중반 조선 세종 때 지어진 악장(樂章)인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의 제39장 압강(鴨江) 주해(註解)에 처음 등장한다.
이에 따르면 평안도 강계부(江界府) 서쪽 강 건너에 오래된 성이 있는데, 이는 금(金) 황제의 성(城)이고 북쪽 7리 떨어진 곳에는 비(碑)가 있다고 하였다. 여기서 언급된 지역이 바로 고구려의 수도 국내성(집안분지) 일대로서 금 황제의 성으로 오인된 것이 바로 고구려의 옛 평지 도성이며, 북쪽 7리에 있는 비가 바로 광개토왕릉비를 가리킨다고 본다.
또한, 1596년에 조선의 한성부 남부주부(南部主簿)로 있던 신충일(申忠一)이 건주(建州)의 누르하치(Nurhachi)가 있는 성에 다녀와서 쓴 견문록인 『건주기정도기(建州紀程圖記)』에도 관련 기록이 있다. 이 책에는 현재 집안 지역의 고구려 유적들을 표시한 지도가 남아 있는데, 옛 고구려의 도성과 장군총, 그리고 능비로 추정되는 ‘비(碑)’가 표현되어 있다.
이러한 자료들을 통해 조선 전기부터 능비의 존재가 인지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조선시대에는 집안 일대에 남아 있는 성곽과 무덤들, 그리고 석비를 12~13세기에 여진족이 세웠던 금나라의 유적 · 유물로 여겼다.
게다가 명나라의 감시로 인해 압록강 이북 지역에서 자유로이 활동하기 어려운 시기였기 때문에 조선 후기까지도 문인들은 능비에 깊은 관심을 가지거나 그 글자들을 제대로 판독하려고 하지 않았으며, 자연히 고구려에서 건립하였다는 사실도 인지하지 못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후 17세기 중반에 명나라가 멸망하고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가 중원으로 진출하였는데, 청 조정은 한족(漢族)들이 자기들의 기원이 있는 신성한 만주 지역에 무분별하게 진입하는 것을 막기 위해 봉금(封禁) 조치를 내렸다. 이로 인해 19세기 후반까지 사람이 거의 살지 않게 되었고, 이는 능비가 뒤늦게 발견된 또 하나의 원인이 되었다.
이후 1880년을 전후하여 청나라가 만주 일대에 내린 봉금 조치를 해제하면서 이 지역에 회인현(懷仁縣)을 정식 설치하고 사람들이 들어와 살도록 하였는데, 이후 한 농부가 능비를 발견하여 현(縣)으로 신고를 하였다. 이에 회인현의 설치위원(設治委員)이었던 장월(章越)이 휘하의 관월산(關月山)이라는 사람을 시켜 이를 조사하게 하였다.
당시 능비의 표면을 조사하기 위해서는 비를 뒤덮고 있는 덩굴과 비면에 붙은 이끼를 완전히 제거하는 작업이 필요하였는데, 회인현의 지시에 의해 이러한 작업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이 과정에서 일부 작업자들이 비의 표면에 말똥을 바르고 마르기를 기다린 뒤 그것에 불을 지르는 방법을 사용하였는데, 이때 열이 가해진 능비의 몸에 균열이 가고 일부 표면이 떨어져 나가는 등 심각한 손상이 발생하기도 했다고 한다.
한편 관월산(關月山) 등에 의해 제작된 부분적인 탁본들이 금석문 애호가 등에게 소개되면서 능비의 존재가 외부에 알려지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이후 북경(北京)의 금석학계에서 능비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점차 생겨났고, 1882년(광서 8) 즈음에는 청나라의 금석학자 · 서예가들이 능비의 탁본들을 입수하기도 하였다. 다만 비가 재발견된 초기에는 비면의 상태가 좋지 않았던 데다가, 탁본 여건의 미비 등으로 인해 비면의 일부만 탁본을 하거나, 글자의 윤곽을 모사(摹寫)하고 빈자리에 먹을 칠하는 방식으로 제작된 묵수곽전본(墨水廓塡本)이 주로 제작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1883년경에 일본 참모본부 소속으로 스파이 임무를 띠고 집안 지역을 지나던 사코가게노부〔酒匂景信〕 중위가 능비를 발견한 뒤, 곧바로 묵수곽전본 형태의 탁본을 구하여 일본으로 보냈다.
이후 일본에서는 참모본부를 중심으로 하여 비문에 대한 기초적 연구를 진행하였다. 그리고 1889년에 『회여록(會餘錄)』이라는 잡지에 능비의 전체 판독문과 여러 논문들이 실리면서 비문의 내용이 대외적으로 큰 조명을 받게 되었고 관련 연구도 본격화되었다.
3. 탁본의 연구
한편 능비의 탁본에 대한 수요가 크게 증가함에 따라 인근에 거주하면서 탁본 제작을 전문적으로 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그 가운데 후대에 이름이 확인된 초천부(初天富) · 초균덕(初均德) 부자는 능비의 표면을 고르게 하고 탁본의 글자들을 더욱 선명하게 하려는 목적으로 1902년 무렵부터 비 표면에 석회를 발랐으며, 심지어 일부 글자들을 임의로 수정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석회를 바른 뒤 찍어 내는 ‘석회 탁본’은 일부 글자의 형태가 변형되는 결과를 가져왔기에 훗날 연구에 활용하는 과정에서 많은 문제점을 드러내게 된다.
이처럼 비면에 석회를 바르고 탁본을 제작하는 실상에 대해서는 이미 1913년에 집안 일대의 고구려 유적들을 조사하였던 세키노타다시〔關野貞〕나 이마니시류〔今西龍〕를 비롯해 여러 학자들이 그 문제점을 지적한 적이 있었다. 이후 1959년에 미즈타니데지로〔水谷悌二郞〕도 능비를 연구할 때 석회에 의해 비면이 가공되기 이전에 제작한 원석 탁본을 중시해야 한다는 점을 누차 강조하였다.
한편 1972년에는 재일(在日) 역사학자 이진희(李進熙)가 여러 종의 능비 탁본과 사진 등을 비교 · 검토한 끝에 일본 참모본부가 의도적으로 비면에 석회를 발라서 왜(倭)의 한반도 활동과 관련한 일부 글자들을 변조하였다는 주장을 제기하면서 학계에 큰 충격을 주었다.
그에 따르면 능비의 탁본을 일본에 처음 보냈던 인물인 사코가게노부가 탁본 제작 과정에서 몇몇 글자들을 의도적으로 고쳤으며, 1900년 전후에는 일본의 육군 참모본부가 사코의 글자 조작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비면에 석회를 도포하여 글자를 고치는 ‘석회 도포 작전’을 행하였다는 것이다. 이진희의 주장은 일본학계의 연구 성과들에 대한 근본적인 의심과 더불어 과거 일본에서 참모본부 주도의 능비 연구가 이루어진 것에 대한 반성을 촉구하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 능비를 둘러싼 논란이 국제적으로 확산되면서 중국 현지의 연구자들도 큰 관심을 갖게 되었다. 특히 1981년부터 현지에서 연구를 진행한 왕건군(王健君)에 의해 능비의 발견과 탁본이 만들어지는 과정 등에 대한 새로운 사실들이 밝혀지기도 하였다.
그는 집안 현지에서 능비의 실측과 판독 작업 이외에도 현지인들과의 인터뷰와 문헌 기록에 근거하여서 비면에 석회를 칠한 이들은 현지의 탁본 제조업자인 초천부 · 초균덕 부자였다는 점, 이들이 석회를 바른 것은 단지 비면을 고르게 하고 보다 선명한 탁본을 얻기 위한 것이었을 뿐, 역사 왜곡을 의도하였다고 보기 어렵다는 점, 결론적으로 석회 도포는 일본 참모본부의 소행이 아니라는 점 등을 주장하였다.
이후에도 탁본에 대한 연구와 현지 조사 등이 진행되면서 비문을 의도적으로 조작한 근거들은 보이지 않는다는 연구들이 잇따라 나왔고, 이에 따라 현재는 비문에 석회를 바른 행위가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기 위한 의도였다고 보는 연구자는 거의 없는 상황이다.
한편 ‘석회 탁본’의 문제점이 적극 거론되면서 1980년대부터 비면에 석회를 바르기 전에 만들어진 탁본, 즉 ‘원석 탁본’들이 잇따라 발견되었다. 현재 중국 베이징〔北京〕 대학 도서관 도서들과 대만(臺灣) 부사년(傅斯年) 도서관 도서, 일본의 미즈타니데지로본과 가네코오테이본 등이 있으며, 우리나라에는 임창순본, 서울대학교규장각 도서, 혜정박물관 도서 등이 있다. 현재도 능비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비문의 글자를 판독하는 과정에서 원석 탁본을 중심에 두는 가운데 연구를 진행하는 경우가 많다.
4. 능비의 내용
비문의 내용은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제1부는 시조인 추모왕(鄒牟王)이 북부여(北夫餘) 땅에서 남쪽으로 내려와 비류곡(沸流谷)의 홀본(忽本,졸본卒本) 서쪽에 도읍을 두고 나라를 세웠다는 건국 설화로부터 시작된다.
이후 유류왕(儒留王)과 대주류왕(大朱留王)을 거쳐 17세손인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 즉 광개토왕으로 왕실의 계보가 이어졌다는 점, 그리고 광개토왕의 생전 업적에 대한 찬양과 더불어 갑인년(甲寅年)인 414년 9월 19일에 왕이 승하한 뒤 시신을 왕릉으로 옮기면서 비를 세워 왕의 공적을 적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능비문의 건국 설화와 왕실 계보에 대한 내용은 하늘의 자손인 고구려 국왕의 신성성과 통치의 정당성을 드러내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특히 능비문 서두의 건국 설화 부분은 2012년에 중국 집안시 마선구(麻線鄕)에서 발견된 집안고구려비(集安高句麗碑)(이하 집안비)에서도 거의 동일한 내용이 발견된다. 광개토왕 대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비의 도입부(제1행)에는 시조 추모왕이 왕조를 창업하였다는 내용, 그리고 추모왕께서 천제(天帝)의 아들이자 하백(河伯)의 자손으로서 신령의 보호와 도움으로 나라를 건국하고 강토를 개척하였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능비와 집안비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건국 설화의 내용은 고구려 왕실에서 늦어도 4세기 후반~5세기 초반에는 공식적으로 추모(주몽)를 기원으로 하는 건국 설화를 확립하였다는 사실을 뒷받침한다.
또한, 능비문에 나오는 건국 설화의 내용은 시조 추모왕으로부터 유류왕(儒留王)과 대주류왕(大朱留王)을 거쳐 17세손인 광개토왕으로 왕실의 계보가 이어졌음을 서술하고 있는데, 이것은 건국 시조로부터 광개토왕까지 이어지는 일원적인 왕실 계보와 ‘태왕(太王)’으로 상징되는 지배자의 정치적 권위가 확립되어 있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즉 4세기 후반~5세기 초반 당시의 고구려는 초창기 5부(部) 연합 형태의 분권적 지배 구조와는 차원을 달리하는, 중앙집권적 지배 구조를 갖춘 가운데 강화된 왕권과 통합된 국가 이념을 갖춘 국가였음을 알 수 있다.
◈ 장군총(將軍塚)
장군총(將軍塚)은 중국 길림성(吉林省. 지린성) 통화시(通化市,퉁화시) 집안시(集安市,지안시) 통구(通溝,퉁구)의 토구자산(土口子山) 중허리에 있는 고구려 시대의 돌무덤인 석총(石塚)으로서, 현재 가장 완벽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돌무지무덤이다. 산 아래에 광개토왕릉비가 있다. 고구려의 제20대 태왕인 장수왕의 무덤, 혹은 그 부왕인 광개토대왕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무덤은 총 7층의 단계식 피라미드로 이루어져 있고, 평면은 장방형으로서 한 변의 길이는 31.5~33미터이며, 무덤의 높이는 현재 14미터로 아파트 5층 높이에 달한다. 기단(基壇)의 무덤 둘레로 한 변에 세 개씩 호석(護石)이라 하는 적석 밀림 방지석이 배치되어 있는데, 분실되었는지 오직 동변(東邊)만 가운데 호석 없이 두 개뿐이다.
정부(頂部)는 만두형(饅頭形)을 하고 상단부에 1열의 구멍이 있어 정상에 건축물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 안쪽에는 향당이라 불리는 사당이 있었으리라 추정했지만, 무덤 동쪽에 초대형 제단이 발견됨으로써 현재는 불탑이나 비석이 서 있었을 것으로 보는 추세이다.
안팎 전부를 화강석으로 쌓아올린 석축릉(石築陵)으로 구조가 정연하고 규모가 매우 장대하다. 이 묘는 일찍이 도굴당한 듯하여 아무런 부장품이 남아 있지 않으며, 축석분(築石墳)으로서 거의 안전한 모양을 갖추고 있는 유일한 것이며, 중국에서도 볼 수 없는 독특한 양식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장군총(將軍塚)
장군총(將軍塚)은 중국 길림성 집안시 통구분지 우산하고분군에 있는 고구려시대 5세기 전반경에 조성된 계단식 돌방 돌무지무덤이다. 가장 발달된 기술로 축조된 계단식 돌무지무덤으로, 한 변 길이 30.15~31.25m, 잔존 높이 13.07m 규모이며 묘역과 담장 시설이 있다. 무덤 주변에 딸린무덤 2기와 제대(祭臺), 서남쪽으로 100m 떨어진 곳에서 능묘로 추정되는 건물터가 확인되었다. 무덤은 5세기 전반경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광개토왕릉 또는 장수왕릉으로 비정된다. 2005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1. 발굴 경위 및 결과
조선시대 실학자들은 통구분지의 커다란 돌무지무덤을 왕의 무덤으로 이해하였고, 1907년 프랑스 학자 샤반느(Emanue Edouard Chavannes)는 통구 일대 조사 당시 장군총의 무덤 칸에서 시골 사람들이 모셨던 나무로 만든 패에 ‘호태왕(好太王)의 자리’란 글을 보고서 호태왕의 무덤으로 기록하였다.
일제강점기인 1909년 일본 관학자들이 조사한 사진에는 무덤 위에 수목이 무성하지만, 현재는 벌목하여 계단상의 외형을 유지하고 있다. 일제강점기에는 장군총을 동방의 금자탑으로 이해하였고, 당시 현지 주민들은 장군총(將軍塚)이라고 불렀다.
1966년에 통구분지 고분을 정리 · 조사하면서 중국 정부에서는 1966년 우산하1호분(JYM001)으로 편호하여 장군총으로 부르고 있다. 2005년 국내성 시기의 고구려 왕릉으로 통구분지의 초대형 돌무지무덤들과 함께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장군총은 집안 시가지에서 동쪽으로 7.5㎞ 떨어진 용산(龍山) 남쪽 능선의 평탄면에 단독으로 자리한다. 장군총으로부터 남쪽으로 1.5㎞ 떨어져 임강총이 있고, 서남쪽으로 2㎞ 떨어져 광개토왕릉비와 태왕릉이 있다.
무덤의 규모는 현재 각 변의 길이는 동변 30.15m, 남변 30.75m, 서변 31.1m, 북변 31.25m로, 방형 평면이며, 남아 있는 높이는 13.07m이다. 무덤 주변의 딸린무덤 2기와 제대(祭臺)로 추정되는 장방형의 부석 시설, 그리고 무덤 주위를 돌아가는 담장과 무덤의 서남쪽으로 100여 미터 떨어진 곳에서 능사로 추정되는 건축지가 조사되었다.
2. 형태와 특징
무덤은 지면을 파서 기초 시설을 한 후 축조하였다. 기초 시설은 지면을 파고, 그 내부에 냇돌을 뉘어서 채워 넣고 그 위에 산돌을 올리고 다시 냇돌을 뉘어 쌓는 방식으로 축조하였다. 기초 시설의 높이는 1~1.2m 정도이다. 기초를 다진 후 커다란 지댓돌을 놓았고, 그 위에 기단석(基壇石)을 가지런하게 쌓아 기단부를 만들었다.
기단부는 한 변 길이 32.3m 내외이며, 기단 밖으로 둘레를 돌아가면서 두께 10~16㎝인 커다란 냇돌을 돌렸는데, 기단을 돌아가는 둘레석은 폭 3~4m이다. 이 위에 잘 다듬은 거대한 화강암 장댓돌은 3~4단 쌓아 계단을 조성하였다. 무덤 바닥 주위를 돌아가면서 너비 30m 전후로 강돌을 깔았는데, 무덤의 서남쪽 30m 거리에서 돌로 쌓은 담장으로 보아 묘역과 관련된 시설로 추정된다.
계단 분구는 제1층 계단을 조성하고 내부를 냇돌과 산돌로 채워 넣는 방식으로 총 7층의 계단을 축조하였다. 아래쪽 계단석의 크기는 보통 길이 2.4~3.5m, 두께 0.9m 전후로 가장 큰 것은 길이 5.7m, 너비 1.12m에 이른다. 모든 계단석은 아주 정교하고 치밀하게 가공하였는데, 가장자리에 턱을 만들어 위쪽 계단석이 바깥으로 밀려나지 않도록 하였다.
또한 계단 둘레에는 커다란 보호석을 각 면마다 3개씩 세워 놓았고, 각 층의 계단을 안으로 1m 정도 들여쌓아 전체적으로 안정감을 준다. 계단 축조에 사용된 장댓돌은 모두 1,177매인데, 현재 31매가 없어져 1,146매만 남아 있다.
7층 계단 위 정상부의 높이는 지표에서 13.07m인데, 백회(白灰)를 섞은 흙으로 봉하였다. 정상부 가장자리 계단석의 윗면에는 둥근 홈이 일정 간격으로 파여 있는데, 철제 연결고리의 출토 양상으로 보아 목조 건축물이나 구조물과 관련된 것으로 추정된다.
매장 주체부는 굴식 구조의 돌방이며, 제3층 계단 위에 널방의 바닥이 자리하고 널길의 입구는 5층에 있다. 널방의 한 변은 543~550㎝로서 거의 정방형이며, 높이는 510㎝로서 잘 다듬은 장댓돌을 안으로 약간 기울어지게 6단으로 쌓아 올렸다. 평행고임을 한 다음 거대한 천장석 1매로 윗부분을 덮었다.
바닥에는 널돌을 깔고, 길이 320~325㎝, 너비 130~145㎝, 높이 38~45㎝인 널받침 두 개를 50㎝ 간격으로 놓았다. 입구는 제5층 계단에 위치하여 널길이 아래쪽으로 경사져 있는데, 잘 다듬은 장댓돌로 길이 830㎝, 너비 200~275㎝, 높이 140~220㎝인 널길을 조성하였다.
무덤 주변에는 딸린무덤 2기와 제대(祭臺)로 불리는 석축 시설, 그리고 무덤 서남쪽으로 100m 정도 떨어진 곳에서 제사 건물로 추정되는 건축지도 확인되었다.
1호 딸린무덤은 장군총 동북 모서리에서 43m 떨어져 있으며, 한 변 9.22m, 높이 4.72m로 규모는 작지만 축조 방식은 장군총과 거의 동일하다. 2호 딸린무덤은 1호 딸린무덤 서북쪽 35m 거리에 자리하는데, 한 변 9.57m로 계단의 일부와 그 아래 기단부만 남아 있지만 축조 양상은 장군총과 거의 동일하다.
제대는 길이가 긴 장방형 평면의 석축 시설로, 2호 딸린무덤의 서북쪽에 인접해 있다. 길이 58m, 너비 8m, 높이 0.3~0.8m이며, 둘레에 다듬은 돌로 단을 쌓고 그 내부를 냇돌과 깬돌로 채워서 축조 방식은 돌무지무덤의 기단 축조와 비슷하다.
건축지는 장군총의 서남쪽 100m 거리에서 확인되었다. 남북 길이 100m, 동서 너비 40m 내외 규모의 건축지로 담장, 문이 있던 자리, 배수구 등이 확인되었다. 여기서 붉은색 기와와 와당(瓦當)주3 등이 출토되어서 장군총과 관련된 시설로 추정된다.
장군총에서는 일찍이 연꽃무늬기와와 기왓조각 · 철제 연결고리 · 금동제 비녀채자 등이 출토되었는데, 최근 발굴 과정에서도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장군총 남측 흙더미에서 금동제 머리장식, 철제 연결고리, 연꽃무늬기와, 암키와주4 조각 등이 출토되었다.
1 · 2호 딸린무덤에서는 연꽃무늬기와와 각종 기왓조각을 비롯하여 철제 끌 · 집게 · 정 · 칼 · 말편자 등이, 제대에서는 순금제 귀걸이와 바닥에 못이 있는 금동제 신발 · 고리 등이 출토되었다. 기왓조각 가운데 ‘小’, ‘魚’, ‘十’, ‘申’, ‘大’ 등의 명문(銘文)이 새겨진 경우도 있다.
3. 의의 및 평가
장군총(將軍塚)은 돌무지무덤 축조 기술상 가장 완성된 형식으로, 그 축조 양상이나 딸린무덤으로 보아 왕릉임에는 이견이 없다. 구릉에 자리하여 산상왕릉(山上王陵)으로 비정하기도 했지만, 대체로 국내성에서 마지막으로 사망한 광개토왕이나 즉위한 장수왕의 왕릉으로 비정한다.
고구려에서 수릉제(壽陵制,살아 있을 때 능을 만들어 놓은 제도)가 시행되었다고 보는 중국 학자들은 대부분 장수왕릉으로 비정한다. 우리나라와 일본 학자들은 태왕릉 및 광개토왕릉비와의 관계에 따라 광개토왕릉 또는 장수왕릉으로 비정하며, 최근 남한 학계에서는 광개토왕릉으로 보는 견해가 조금 우세하다.
장군총 이후의 왕릉으로서 돌무지무덤은 국내 도성 일대에서는 확인되지 않아서 장군총 이후 고구려왕릉은 돌방 봉토분 또는 사신이 그려진 돌방 봉토벽화분으로 변화한 것으로 보고 있다.
여기서 고대 우리 민족의 유적인 광개토대왕비와 능을 다 구경하고, 여기에서 조금 떨어진 장군총(將軍塚)으로 가서 장수왕릉으로 여겨지고 있는 왕릉까지 다 보고나서, 다시 집안시내로 돌아왔다. 압록강 변에서 강 건너 북한 지역인 만포시(滿浦市)를 건너다보았다. 해는 지고 조금 있으면 어두워질 것 같았다.
안내양이 어서 저녁을 먹으러 가야한다고 재촉하였다.
5시 40분에 ‘조선족불고기’집으로 가서 저녁을 먹었다.
음식이 들어가니까 피곤함을 느꼈다. 우리는 다시 관광버스에 올라 오늘 저녁에 들어가서 묵을 곳으로 가야 하였다. 다시 버스에 올라 1시간 반을 달려 통화시(通化市)로 들어갔다. 우리가 묵으려고 들어간 호텔은 오성급(五星級) 호텔인 통화 메리어트 호텔이었다.
짐을 풀자마자 나는 샤워를 마치고 자리에 누웠다. 너무 피곤하니까 어느새 잠이 들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