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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산우회

박남용과 양수랑의 백두산 여행(네째날, 단동시(丹東市) 압록강(鴨綠江)에서 위화도(威化島)와 황금평을 보다.}

작성자雅石양수랑|작성시간26.06.09|조회수150 목록 댓글 0

5월 26일 화요일 흐림

통화시(通化市)에서 단동시(丹東市)로 이동하여 압록강(鴨綠江)에서 유람선을 타고 위화도(威化島)와 신의주를 보다.

압록강 단교(斷橋) 위 걷기,

황금평을 지나 단동 국제선 터미널로 가서 출국수속

새벽 5시 모닝콜, 6시 식사, 7시 출발

통화시에서 출발한 우리 일행은 단동시까지 4시간의 장거리 여행을 하게 되었다. 버스가 달려가는 도중에 안내양이 차창 너머로 아무런 설명도 없이 오녀산성(五女山城)를 보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런 말은 공허할 뿐 아무런 감동도 흥미도 없었다.

◈ 환인 오녀산성(桓仁 五女山城)

중국 요녕성 본계시 환인만족자치현(桓仁满族自治縣)에 있는 삼국시대 고구려 수도인 집안과 서쪽지방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충지에 위치한 성곽이요. 산성이다.

오녀산(五女山)의 북쪽과 동쪽에 연결되어 있는 높고 낮은 여러 산봉우리 가운데서 가장 높고 험한 800m의 산마루를 중심으로 그 둘레에 축조되어 있다. 오녀산의 서남쪽에는 넓은 환인분지(桓仁盆地)가 있고 동남쪽에는 압록강의 지류인 혼강(渾江)이 있다. 오녀산의 서쪽 산기슭에서 시작되는 좁고 험한 골짜기로는 통화(通化)로 통하는 길이 지나간다.

동남쪽에서 흐르는 혼강은 여러 산굽이를 지나 오녀산 기슭에 이르러 깎아내린 듯한 가파로운 벼랑 사이를 통하여 환인분지로 흘러든다. 환인에서 고구려의 옛 수도인 집안(集安)으로 가는 데에는 통화로 통하는 육로와 혼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수로가 있었으며, 집안에서 심양 쪽으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환인현[桓仁縣]을 거쳐야 했다. 이와 같이 오녀산성은 고구려의 수도인 집안과 서쪽지방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충지대에 위치하였다.

성돌은 - 중략 - 성안에는 천지라고 하는 못이 있다. 이 못의 물은 마른 일이 없다고 한다. - 중략 -

광개토대왕릉비에는 추모왕(鄒牟王, 朱蒙)이 비류곡(沸流谷)의 홀본(忽本, 졸본卒本) 서쪽의 산 위에 성을 쌓고 도읍을 정하였다고 하였는데, 이곳 오녀산성이 이 때에 쌓았다는 성으로 –이하 생략

 

운봉산(雲峰山)휴게소와 관전(寬甸)휴게소에 들러서 쉬어갔다.

아침 7시에 통화시(通化市)를 출발하여 우리는 4시간 만인 오전 11시에, 단동시(丹東市)에 도착하였다.

유람선(遊覽船) 매표소(賣票所, 수표처售票處)에서 선표를 구입하여 유람선에 올랐다.

압록강 건너에는 신의주(新義州)인데, 신의주와 단동시 사이에 있는 섬이 위화도(威化島)이다. 우리는 매우 착잡한 심정으로 유람선에서 강 건너 위화도를 바라보면서 제각기 수많은 상상에 빠졌다. 만약 강 건너 우리 동포들과 대화라도 할 수 있는 상황이라면 감정(感情)의 수위(水位)는 더 높고 깊어졌을 것이다. 위화도 옆을 유람선을 타고 지나갔다 왔지만 북한 주민들의 삶은 전혀 살펴볼 수 없었다. 그냥 수박 겉핥기로 주마간산(走馬看山) 격이었다. 또, 유람선에 탄 사람들이 한국인이니까 한국말로 설명을 해 주어야 할 터인데, 유람선 운영자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중국말로만 계속 떠들어 대니 귀가 따갑게 시끄럽기만 하였다.

역시 문화국가인 프랑스나 영국은 달랐다. 루부르 박물관이나 영국의 대영박물관에서는 여행객들에게 그 나라의 말로 안내하는 제도가 있었다. 이러한 면에서도 국가별로 격(格)이 다르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약 30분 후에 우리는 유람선에서 내려 압록강(鴨綠江) 단교(斷橋)로 갔다.

단교 입구 광장에 조성되어 있는 대형 청동(靑銅) 동상(銅像,군상群像)이 있었다. 이 청동 동상의 명칭은 《위료화평》 (为了和平, 爲了和平)이다. 한국어로 직역하면 《평화를 위하여》라는 뜻이다.

이 동상은 6·25 전쟁 당시 중국이 이른바 ‘항미원조전쟁(抗美援朝戰爭)’에 참전하기 위해 압록강을 건너던 중공군(中共軍,중국인민지원군)의 모습을 형상화한 것인데, 중심인물은 군상(群像)의 맨 앞쪽 가운데에는 당시 중공군 총사령관이었던 펭더화이(팽덕회, 彭德怀) 원수(元帥)가 지휘하는 모습으로 서 있습니다. 주변 인물들은 펭더화이를 중심으로 양옆과 뒤편으로 당시 참전했던 영웅(英雄), 장령(將領,將星), 그리고 무명용사들을 포함해 총 26명의 인물이 묘사되어 있다. 이 26명 속에는 한국전선에서 전사한 모택동(毛澤東,마오쩌뚱)의 아들(모안영,毛岸英)도 포함되었다고 함. 동상에 포함된 26명의 인물은 1950년 10월 19일 가을, 첫 번째로 압록강을 건너 참전했던 초기 중공군 병력 26만 명을 상징하고 있으며, 중국 측에서는 이동상을 "웅장하고 씩씩하게 압록강을 건너는(웅규규 기앙앙 과도압록강, 雄赳赳 气昂昂 跨过鸭绿江) 지원군"의 역사적 순간을 기념하고, 대외적으로 북·중 혈맹과 평화 수호를 강조하는 정치적 홍보물 및 주요 관광 랜드 마크로 활용하고 있다.

압록강단교(鴨綠江斷橋)의 입구에서 걸어서 철교가 끊어진 곳까지 갔다가 되돌아왔다.

 

 

◈ 압록강단교(鴨綠江斷橋)는 1909년 일본 제국이 서울과 신의주를 연결하는 경의선에서 압록강을 건너 중국 단둥으로 연결되는 압록강 철교를 착공하였다. 철교는 1911년 준공되어 한반도에서 중국의 만주를 거쳐 유럽까지 이어지는 국제 철도 노선이 연결되었다. 압록강 철교는 트러스교로서, 모두 미국에서 1905∼1910년 경에 제작된 것이다. 건설강도는 L-25로서 미국에서 인천까지는 해상수송으로, 인천에서 공사 현장까지는 화차로 수송하였다. 다리 중앙부는 선박이 통행할 수 있도록 선개교였으나, 1934년 3월에 가동을 중단하였다.

한국 전쟁 중 1950년 11월 8일 유엔군의 폭격으로 교량의 중앙부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측까지가 파괴되어 단교가 되었으나, 현재까지 역사적 유산으로서 연결하지 않고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이 다리의 바로 상류에 1943년 완공된 압록강의 두 번째 다리가 현재는 ‘조중우의교’라고 명명되어 이용되고 있다.

 

◈ 압록강철교(鴨綠江鐵橋)

평안북도 신의주시와 중국 요녕성 단동시(丹東市) 사이를 연결한 압록강의 철교이다.

재래교(在來橋, 鴨綠江斷橋)와 신철교(新鐵橋)로 구성되어 있다. 재래교(在來橋, 斷橋)는 1911년 준공되었으며, 압록강 하구에서 상류로 45㎞ 지점에 있다. 재래교 중앙에는 단선철도가, 양측에는 2.6m의 인도가 설치되어 있다.

 

우리는 오후 12시 45분에 ‘압록강단교(鴨綠江斷橋)’에서 조금 떨어진 ‘첨희연회(添禧宴會)’에서 점심을 먹었다.

 

오후 1시 40분에 다시 버스를 타고 단동항 국제선 터미널을 향하여 달렸다. 가는 도중에 황금평(黃金坪)을 구경하면서 갔다.

 

황금평(黃金坪)은 중국의 단동시(丹東市)와 가까운 곳은 1m밖에 안 된다고 한다. 황금평은 압록강 하구에 있는 북한의 하중도(河中島)이다. 면적은 11.45km²이다. ‘비단섬’과 그 외 하중도 들과 함께 신도군을 이룬다. 이 섬의 원래 이름은 ‘황초평’으로서, 1946년 북한이 황초평의 간석지(干潟地)를 개간해 농토로 만들었고 김일성이 '황금평'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1952년 군·면·리(郡面里) 대 폐합 이후 용천군 신서리였다가 1982년 황금평리로 개칭되었다. ‘북한지역정보넷’의 지도에 따르면 자연촌락으로 중앙에 ‘로평’마을, 동쪽에 ‘병호’마을이 있다.

한반도보다는 만주에 가까운 곳이다. 본디 압록강에 떠 있는 하중도 였다가 퇴적이 점차 진행되면서 원래 섬이었다고는 인식을 하지 못할 정도로 대륙과 너무 붙어버리게 되었다. 중국과 황금평 사이에는 매우 좁은 냇물이 흐르고 있는데, 국경 관리를 위해 냇물이 유지되고 있을 뿐이다. 국경선을 지운다면 대륙의 일부로밖에 안 보인다. 중국과 북한의 경계선은 압록강을 따라서 가다가 황금평에 이르러서 갑자기 지그재그로 꺾이면서 ‘비단섬’ 방향으로 나간다. 중국과의 국경에는 철조망이 쳐져 있지만, 유일하게 통로 하나가 있다.

한때 황금평 경제 특구 계획이 있었기도 했다. 북한과 중국은 2012년 8월 14일 베이징에서 장성택과 천더밍(陣德銘) 상무부장의 합의 하에 황금평과 위화도, 나선 지구를 신흥 경제지구로 육성한다고 합의했으나, 이후 2013년 장성택이 처형당한 뒤 북·중관계가 악화되면서 사업이 좌초되었다. 2018년 즈음에 북·중관계가 다시 개선되었음에도 이렇다 할 후속 움직임은 없다.

 

하늘이 점차 어두워지더니 끝내 비를 뿌리고 말았다. 비가 많이 쏟아지는 가운데 우리는 단동항에서 출국 수속을 마치고 ‘단동페리호’에 몸을 실었다. 우리가 들어간 객실은 올 때와 같은 객실이었다.

저녁 6시에 배에서 제공하는 선내식(船內食)을 마치고 7층 바에서 4사람(박교수와 나 그리고 강문일교수 부부)이 음료수를 마시면서 충무공 이순신(李舜臣)장군이 우리 마을에서 삼숙(三宿)을 하면서, 우리 제주양씨(濟州梁氏) 학포공파(學圃公派) 제오자(第五子) 응덕(應德) 종가(宗家)인 양산항(梁山杭) 가(家)에서 제공하는 떡차(병차,餠茶)와 동과(冬瓜) 삶은 물을 복용함으로써, 한양 감옥(監獄)에서 모진 고문과 장독(杖毒)으로 만신창이가 된 몸을 회복(回復)면서 참모(參謀)들인 송희립(宋希立)과 최대성(崔大晟) 등을 불러 앞으로의 계획을 수립하였던 임시작전지휘소 역할을 하였던 고사(古事)를 이야기 하였다. 그리고 다음 날인 1597년 8월 15일에 충무공은 보성읍 열선루(烈仙樓)로 가서 하룻밤을 지내면서, 옛날 자신의 장인(丈人) 어른이었던 보성군수 방진(方震)의 집에 머물면서 처가살이 하였던 일을 회상하면서, 선조(宣祖) 임금이 보낸, 수군(水軍)을 파(破)하고 육군(陸軍)에 합류하라는 교지(敎旨)를 받고, 그 유명한 “금신전선(今臣戰船) 상유십이(尙有十二) 출사력거전(出死力拒戰) 즉유가위야(則猶可爲也) : 신에게 아직 12척의 전선이 있으니, 죽을힘을 다하여 나아가 막아 싸운다면, 반드시 대적할 방책이 있을 것입니다.”라며 설득하여 수군을 지켜냈다는 이야기로 시간을 보냈다.

 

객실로 들어왔더니 조촐한 술잔치가 벌어지고 있었다. 같이 들어간 우리들(박남용과 나, 강문일교수)는 술을 못 마시므로 그냥 구경만 하였다. 각자의 소감을 말 할 시간이 되어 아무도 망설이지 않고 다 소감을 말하였다. 술자리를 파하고 깊은 잠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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