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경 : 시 67:1-7절
제 목 : 모든 민족들이 주를 찬송하게 하소서
일 시 : 2021. 4. 21.
시편 67:1-7/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사 복을 주시고 그의 얼굴 빛을 우리에게 비추사 (셀라) 2 주의 도를 땅 위에, 주의 구원을 모든 나라에게 알리소서 3 하나님이여 민족들이 주를 찬송하게 하시며 모든 민족들이 주를 찬송하게 하소서 4 온 백성은 기쁘고 즐겁게 노래할지니 주는 민족들을 공평히 심판하시며 땅 위의 나라들을 다스리실 것임이니이다 (셀라) 5 하나님이여 민족들이 주를 찬송하게 하시며 모든 민족으로 주를 찬송하게 하소서 6 땅이 그의 소산을 내어 주었으니 하나님 곧 우리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리로다 7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리니 땅의 모든 끝이 하나님을 경외하리로다/
우리 한국 개신교선교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두 사람을 꼽는다면, 단연 미국의 목사이자 선교사인 언더우드와 아펜셀러입니다. 장로교 목사인 언더우드와 감리교 목사인 아펜셀러 이 두 사람은 비록 교파는 달랐지만 공통점이 많았습니다.
아펜셀러는 본래 칼빈주의 계통인 개혁주의 전통기독교 집안에서 성장했지만 대학재학 중에 중생을 체험한 후,‘마음 놓고 할렐루야를 외칠 수 있는 교회를 찾아’감리교회로 적을 옮겼습니다. 그는 누구보다 장로교 신앙과 신학전통을 잘 이해하고 있었고, 장로교 선교사들과 말이 잘 통하는 감리교 선교사로 인식되었습니다.
언더우드 역시 집안 대대로 전해 오던 개혁주의 신앙전통을 지키면서도 감리교회의 경건주의적이고 체험적인 면을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는 장로교 동료 선교사들에게서‘시끄러운 감리교도’라는 별명을 들을 정도로‘감리교적인’장로교 선교사였습니다. 이 두 선교사는 1885년 4월 5일 부활주일, 같은 날 인천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두 선교사 모두 처음 계획과는 다른 곳을 선교지역으로 택하게 되었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언더우드는 본래 인도선교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선교지를 결정하는 마지막 순간에 “조선엔 갈 사람이 하나도 없구나. 조선은 어이할고?”라는‘하늘의 음성’을 들은 후 생각을 바꾸어 조선으로 방향을 틀게 되었습니다.
아펜셀러도 처음계획은 일본 선교였습니다. 당시 일본에서는 무사계층에서 집단적인 개종이 이루어지고 있었는데, 조상이 스위스 용병출신이던 그에게 일본은 매력 있는 선교지였기 때문입니다. 반면 조선은 아시아의 마지막 남은 은둔국으로 여전히 위험한 나라였습니다. 그리고 기숙사를 같은 사용하던 동료였던 워즈워드가 그런 조선을 자신의 선교지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졸업을 1년 앞두고 개인사정으로 선교를 나갈 수 없게 된 워즈워드가 아펜셀러에게 “나 대신 조선에 갈 수 없겠는가?”라고 부탁하자, 고민 끝에 친구대신 조선으로 나오게 된 것입니다. 아펜셀러와 언더우드 모두 처음 생각과 달리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손길에 끌려 조선으로 오게 된 것입니다.
그 두 사람은 승천하시기 전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행1:8/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는 말씀을 몸으로 실천한 분들이었습니다. 그분들이 아니었다면 한국의 복음화는 오래 걸렸을 것입니다.
시편 51편부터 70편까지는 다윗의 시가 뒤덮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66편과 67편만 다윗의 시가 아닙니다. 두 시편은 더군다가 저자가 없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두 시를 모든 사람을 위한 노래라고 부릅니다. 마치 한국의 아리랑과 같은 친밀한 느낌을 사람들에게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시편 67편은 한 무명의 시인이 성령의 감동으로 쓴 시입니다.
그런데 1절/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사 복을 주시고 그의 얼굴빛을 우리에게 비추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구절의 말씀은 민수기 6장에서 하나님께서 아론과 그의 아들들, 즉 제사장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축복하라고 주신 메시지와 흡사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민6:24-25/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25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 시편 67편은 민수기와 같은 내용을 담고 있어서 축복의 메시지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시67편은 누구를 향한 축복의 메시지입니까? 그 다음 구절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단지 민수기 6장에 기록된 제사장의 축복, 즉 이스라엘이라는 단일민족을 향한 축복의 메시지가 아니라 모든 민족을 향한 메시지입니다. 그래서 2절에 주의 도를 땅 위에, 주의 구원을 모든 나라에게 알리소서/라고 말씀하면서 이후부터 계속 이스라엘이라는 한 민족을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민족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3절을 넘어오면서 시인은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이여 민족들이 주를 찬송하게 하시며 모든 민족들이 주를 찬송하게 하소서/라고 했습니다. 이 구절이 5절에서도 똑같이 반복됩니다. 5절/하나님이여 민족들이 주를 찬송하게 하시며 모든 민족으로 주를 찬송하게 하소서/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5절 이후 나오는 의미는 3절과 좀 다릅니다. 3절을 기록한 시인은 4절에서 모든 민족들을 심판하시고 통치하시는 하나님에 대해 언급했다면, 5절을 기록한 시인은 6절에서 모든 민족에게 복을 주시는 하나님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시편은 비록 이스라엘 민족 중 한 사람이 기록하긴 했지만 그는 혈통적인 이스라엘만 구원하시고 통치하시며 복을 주시는 하나님으로 이해하지 않고 모든 민족을 구원하시고 통치하시며 복을 주시는 분으로 이해했다는 사실입니다.
중국이 동북공정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면서 수많은 역사학자를 동원해서 중국 주위에 있는 모든 나라들 중국소유로 만들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습니다. 우리 나라도 결국에는 중국에 속해 있다는 식의 논리를 펼치려고 하고 있습니다. 일본도 계속해서 독도를 자신의 나라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보면 한 개인만 욕심이 끝이 없는 것이 아니라 나라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 나라 주변국들을 보면 조금이라도 자신들의 영역을 넓히기 위해 분쟁을 감수하더라도 욕심의 끈을 놓지 않는 모습을 봅니다. 그런 행위들을 보면 얼마나 미운 감정이 쌓이는지 모릅니다. 입에 욕이 나올 정도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태어난 나라를 사랑하고 지켜야 하는 의무가 있지만 그럼에도 모든 민족을 사랑하며, 그들이 하나님께로 나오기 위해 기도해야 하는 제자의 의무가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이런 말씀을 기록했습니다. 사11:9/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고 했습니다.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온 세상에 충만하기를 바라고 기도하며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자세인 것입니다. 물론 우리 주님께서도 자신이 가르쳐 주신 기도문, 즉 주기도문에 나라가 임하옵시며 라고 간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천국을 다스리는 것처럼 이 땅에서도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가 임하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고 주님은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에는 단지 나 자신과 나의 교회, 또한 우리와 우리 나라만을 위한 기도뿐 아니라 모든 민족이 하나님을 알며 경외할 수 있게 해 달라는 간절한 부르짖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시인은 7절에서 7/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리니 땅의 모든 끝이 하나님을 경외하리로다/라고 했습니다.
언더우드와 아펜셀러 선교사 두 분은 땅의 모든 끝이 하나님을 경외하기 위해 먼 이 땅에 와서 자신의 인생과 목숨을 과감히 던진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그들의 기도와 희생을 발판으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받았던 것입니다. 모든 민족이 구원받는 은혜를 달라고 기도할 뿐 아니라 그 일을 위해 나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드리는 복된 성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결론입니다. 시편 67편을 기록한 시인의 반복되는 소원이자 하나님의 소원이 무엇입니까?
1) 첫 번째 소원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사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복은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실 때 주어집니다. 그래서 고후6:2/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라고 했습니다.
만약 하나님의 은혜가 베풀어지지 않으면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다음과 같은 일들이 일어납니다. 눅19:42-44/가라사대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 43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44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권고받는 날을 네가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2) 두 번째 소원은 그의 얼굴 빛을 우리에게 비추사 주의 도를 땅 위에 주의 구원을 모든 나라에게 알리소서 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왜 시인은 주의 도를 땅 위에, 주의 구원을 모든 나라에게 알리소서라고 했습니까? 그 이유는 다음 절에 나옵니다. 3절/하나님이여 민족들이 주를 찬송하게 하시며 모든 민족들이 주를 찬송하게 하소서/라고 했으며, 5절/하나님이여 민족들이 주를 찬송하게 하시며 모든 민족으로 주를 찬송하게 하소서/라고 했습니다. 시인의 소원의 궁극적인 목적은 바로 이것입니다. 모든 민족들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43:21/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시인의 소원은 모든 나라 모든 민족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아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언더우드와 안펜셀러 선교사처럼 모든 나라 모든 민족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아 모든 민족들이 그들의 입으로 구원의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들이 일어나기를 간절히 소원하며 갈망해야겠습니다. 그것이 시인의 소원이며 하나님의 소원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우리 전도자들의 소원이어야 합니다. 시인의 기도가 나의 기도가 되며 시인의 소원이 우리의 소원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은 이 일을 위해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 나라 모든 민족을 가슴에 품고 기도하며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를 갈망하는 언더우드와 아펜셀러와 같은 전도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