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경 : 골 3:12-17절
제 목 :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이란2
일 시 : 2026. 6. 19.
골로새서 3:12-17/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13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14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15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 16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17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사도 바울은 골로새교회 성도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이 어떤 것인지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원하시는 참된 그리스도인 삶은 어떤 삶입니까?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하면 정기적으로 교회 다니는 사람, 또는 입으로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의 중요한 특징인 것은 맞지만 성경과 주님은 그 이상의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루터가 천주교가 부패하고 타락했을 때 종교개혁을 하면서 개신교와 구교(천주교)로 나뉘어졌습니다. 그 당시 천주교는 사람의 행위를 지나치게 강조를 했습니다. 사람들로부터 돈을 많이 받아 내기 위해서 행위구원과 선행을 지나치게 강조했습니다. 심지어 성당에서 천국 가는 티켓을 판매하기까지 했습니다. 얼마나 타락했는지를 보여 주는 단면입니다. 그래서 루터는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지 행위로 구원받는 것은 아니라고 외쳤습니다. 그 당시의 루터와 종교개혁자들이 반 천주교를 외치다 보니까 믿음만 있으면 되고 행위는 필요없는 것처럼 믿음만을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시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며,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고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개신교인 기독교는 오직 믿음으로 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믿음만을 강조하다 보니까 입술로 고백하는 믿음만 있으면 행위는 필요없는 것처럼 생각하게 되었고 행위를 강조하면 행위주의자라고 이단시비까지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전체를 보면 믿음과 행위는 동전의 양면과 같아서 한가지만을 강조하면 비성경적인 것임을 밝혀 주고 있습니다. 중요한 성경구절을 소개하겠습니다. 약2:14-26/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15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16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17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18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하리라 19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20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을 알고자 하느냐 21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22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23 이에 성경에 이른 바 이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이루어졌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24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 25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들을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26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라고 했습니다.
그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가짜이며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고 강조합니다. 그러면서 두 사람을 예로 들었습니다. 첫 번째는 아브라함이고 두 번째는 기생라합입니다. 1) 먼저 아브라함에 대해서 21절에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라고 주장합니다. 그렇습니다. 아브라함은 입으로만 믿습니다 라고 고백하지 않았고, 100세에 나은 세상에서 가장 귀하고 사랑스러운 이삭을 자신의 손으로 죽여서 번제를 드리는 그 끔찍한 일에 순종했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이삭을 죽이지 못하도록 막아 주셨지만 아브라함이 마음으로는 이삭을 죽였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행함이 있는 믿음을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의롭다고 선포하셨습니다.
2) 두 번째로 라합에 대해서 25절에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들을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라고 주장합니다. 그렇습니다. 기생 라합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리고 성의 왕이 라합에게 정탄꾼들이 들어와서 너의 집에 들어갔다는 보고를 받고 경찰들을 보냈을 때 죽음을 각오하고 정탐꾼들을 지붕에 숨겨 두고 우리 집에 들어온 것은 맞지만 벌써 떠났다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자신과 가족의 목숨을 담보로 거는 위험을 무릎 쓰고 정탐꾼들을 숨겨 주었습니다. 그런 행함이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라합과 그의 가족들 모두가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에는 행함이 따라야 하고 반드시 행함으로 자신의 믿음이 참된 믿음인 것을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보여 주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는다면 바른 신앙고백과 함께 예배당에 참석해서 예배 드리는 일에 충실해야 합니다. 그러나 교회에 출석해서 예배 드리는 것보다 생활을 통해서 드리는 거룩한 산 예배도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 밖에서 삶을 통해서 드리는 예배와 예배당 안에서 드리는 예배가 일치하는 영적예배를 원하십니다. 그것을 롬12:1절에서는 거룩한 산 제사(예배)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거룩한 산 제사(예배)란 1) 우리의 삶이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과 분명하게 구별되어야 한다는 뜻과 2) 예배는 삶을 통해서 드리는 것이지 교회건물 안에서만 드리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며, 3) 예배란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동시에 드리는 모범된 삶을 통해서 드려져야 된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교회로 와서 예배당 안에서 드리는 예배도 결코 쉽거나 만만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배당 밖에서 삶을 통해서 드리는 예배는 더욱더 힘들고 어렵습니다. 순교자의 정신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함께 하시고 도와주시면 그렇게 어렵지 만은 않습니다. 그것이 곧 기쁨이요, 즐거움이 됩니다.
사도 바울은 사랑하는 골로새교회 성도들에게 그들은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사랑 받는 거룩한 사람이라고 하면서 거기에 합당한 삶을 살 것을 권면합니다.
오늘은 지난 주에 있어서 13-14절 말씀을 통하여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이 무엇인지 말씀드리겠습니다.
13-14절에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14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고 했으며, 새번역은 13-14/누가 누구에게 불평할 일이 있더라도, 서로 용납하여 주고, 서로 용서하여 주십시오. 주님께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과 같이,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14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십시오. 사랑은 완전하게 묶는 띠입니다./라고 했습니다.
1.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라고 했습니다.
불만이란 몸프헤라고 하는데 비난, 실수, 다툼이라는 뜻입니다.
13절 말씀은 12절에서 말씀한 참된 그리스도인의 성품 다섯 가지를 삶에서 실제로 적용하는 것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1) 12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겸손, 온유, 오래 참음이라는 성품을 우리의 삶에서 실제적으로 적용한 결과가 바로 용납입니다. 2) 12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긍휼, 자비의 성품을 삶에서 적용한 것이 바로 용서입니다. 불만이란 원망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서로에게 불만이 있으면 그것을 서로 용납하고 받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원망이나 다툼의 책임은 한편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고 엄밀한 의미에선 양쪽 편 모두에게 다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다른 성도에게 불만을 가지고 원망을 한다고 합시다. 그러면 원망을 하는 사람이나 원망의 원인을 일으킨 사람이나 둘 다에게 원인과 책임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원망이라는 원인을 제공한 사람에게만 잘못이 있는 것이 아니고, 원망할 거리를 잘 참고 용납하지 않고 말과 행동으로 불평을 일으키는 자도 사랑이 부족해서 원망불평을 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불평을 가지고 원망하는 사람 쪽에서는 그런 불만과 불평거리를 사랑으로 용납하는 정신을 가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자신도 다른 사람에게 원망불평거리를 제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서로 같은 교회성도들끼리 무슨 일이 있을 때 서로 넓은 마음으로 서로를 용납해야 된다는 뜻입니다. 넓은 의미에서 보면 그것이 자신의 모습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제삼자가 자신을 보고 똑같은 감정을 느낄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피차 용서하되 라고 했는데 이 말은 용납하는 단계에서 만족할 것이 아니라 한 걸음 더 나가서 서로 용서하는 자리에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용납은 피동적이요 소극적이지만, 용서는 능동적이요 적극적인 일이기 때문입니다, 용납은 12절에 열거된 다섯 가지 미덕 중 겸손, 온유, 오래 참음의 산물이고, 용서는 긍휼과 자비의 열매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도는 용납(겸손,온유,오래 참음)과 함께 서로 용서(긍휼과 자비)해 주는 다섯 가지의 성품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2.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믿기 전에 우리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우리는 창조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반역하고 예수님의 원수가 되었던 자들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께서는 자기가 친히 십자가에서 희생제물이 되셔서 우리의 죄값을 담당하시고 우리를 용서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대하여 불평을 하시려면 얼마든지 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큰 희생을 당하시면서도 우리를 용서하셨습니다. 벵겔(Bengel)은 말하기를, "우리를 책 잡으려면 얼마든지 그리할 만한 최대 이유의 소유자는 그리스도였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용서해 주신 것처럼 우리도 다른 사람을 용서해 주라는 뜻입니다. 죄를 용서하는 문제는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구원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6:12/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셨으며, 마6:14-15/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15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고 했으며, 마18:21-22/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22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고 했습니다. 그 외에도 마18:23-35/이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회계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24 회계할 때에 일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25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처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한대 26 그 종이 엎드리어 절하며 가로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27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28 그 종이 나가서 제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관 하나를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가로되 빚을 갚으라 하매 29 그 동관이 엎드리어 간구하여 가로되 나를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30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저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31 그 동관들이 그것을 보고 심히 민망하여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고하니 32 이에 주인이 저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33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하고 34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저를 옥졸들에게 붙이니라 35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고 했습니다.
3.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십시오. 사랑은 완전하게 묶는 띠입니다.라고 했습니다.
14절 말씀은 12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다섯 가지 덕목에 계속해서 모든 덕행의 근본인 사랑을 더하라고 말씀합니다. 사랑의 중요성에 대해서 성경은 여러번 강조합니다(요13:34-35,롬13:8-10,고전13:1-13,요일4:7-21).
1)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고 했습니다.
12절에서 소개하는 다섯 가지 덕목(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도 중요하지만, 그것들 이상으로 더 중요하여 그것들의 기초가 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고 했습니다. 더하라는 에피라고 하는데 분배하다, 위에 첨가하다 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앞에서 말한 다섯 가지 덕목 위에 사랑을 첨가하라는 뜻입니다.
2) 사랑은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을 직역하면, 완전의 띠란 말로서 사랑은 앞에서 소개한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 라는 덕목을 완전하게 만들어 주는 근본적 요소라는 말입니다. 즉 누구든지 사랑만 붙잡으면 모든 다른 덕행들은 거기에 따라온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롬13:8/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고 했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아가페 사랑만 있으면 십계명 5-10계명을 다 지킬 수가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의 삶이 이렇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