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사도행전 강해] 7권 제 6강에 나오는 일부인데 요즘 반복적으로 생각하는 것에 많은 빛을 던져주기에 옮겨 보았습니다. 벌써 퇴직을 하고 점점 나이가 많아지는 자신을 바라보면서 이 말씀이 너무나 좋고 귀하며 마음 속에 깊이 간직하고 싶습니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문제는, 바울과 실라가 가지고 있는 그 속사람의 본질이 핍박과 환난에서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평안함을 얻는 정도가 아니라 그 모든 환경에서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는 고고한 위치에 올라 서 있는 품성과 인격이었다는 것입니다. 그의 물질적인 조건이나 환경의 조건이나 육체의 조건은 아주 좋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보면 맞고 수욕을 받아서 상처가 많이 난 자리를 씻겼다고 그랬는데 그냥 옷을 벗겨놓고 막 때려서 피가 많이 흐르고 그랬으니까 그 상처를 아마 옥 근방에 있는 샘물에 가서 씻었을 것인데, 그렇게 씻어야 할 정도로 아주 단단히 매를 맞아서 몸이 아프고 발에 차꼬를 채웠으면 발목도 붓고 아파서 컨디션이 가장 나빴을 때입니다.
우리는 몸만 찌뿌드드해도 평소에 가졌던 쾌활성이나 하나님에 대한 찬송이나 그런 의기(意氣)를 잃어버리고 소침(銷沈)해서 누워 있기가 쉬운데, 이 사람들은 지금 단단히 맞고 발은 차꼬에 매여 깊고 냉습한 옥 속에 갇혀서 몸도 피곤하고 괴롭고 어두운 가운데서도 찬송이 터져 나왔다면 그것이야말로 그 사람들의 육신의 조건과는 상관이 없는 새사람, 속사람의 일입니다.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고후 4:16) 하는 말씀과 같습니다.
우리는 왕왕 예수를 오래 믿은 사람, 소시적부터 예수를 믿어서 아주 백발이 성성하고 고희(古稀)를 넘어선 나이에 있는 사람들을 보는데, 이분들이 지내는 것을 보면 '저이가 60년이고 70년 동안 예수를 믿었다는 것이 무슨 효과가 있는가? 참 그 효과가 아리송하다; 하고 느낄 만한 정도의 사실을 많이 보게 됩니다. 젊었을 때 이야기를 들어보면 교회 안에서 맹장(猛將)이었고, 불을 토하는 사람이었고 열렬한 사람이었다고 다 남들에게 칭찬을 받았던 인물인데, 노후에 보면 보통 인간의 노래(老來)에 나타나는 그 확집(確執), 고집, 아상, 그리고 지둔(遲鈍), 그리고 권위의 자인(自認), 이런 것들이 그냥 꽉 몸에 절어서 움직이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 사람을 한둘 본 것이 아닙니다. 교역자 가운데서도 그런 사람을 보았습니다. 젊어서는 아주 상당히 남에게 날리고 그 정열과 언변과 그 기지(氣志)와 가지고 있는 상식이나 건실한 판단이 과연 한때 교계(敎界)에 운위(云謂)될 만하고, 교계를 이리저리 움직일 만한 그런 지혜가 있는 듯한 사람으로서 남에게 추앙과 사모를 받던 사람이지만 일단 나이를 먹어서 현역에서 은퇴를 하면 가장 은퇴한 사람답게 속된 생각만 남아 있거나, 은퇴를 하지 않고 그대로 주저앉아 있으면 지금까지 쌓아올린 자기의 공로와 명예를 가지고 꽉 누르고, 자기가 최고의 권위자와 같이 행세하는 무서운 아상과 무서운 아집(我執) 가운데 딱 빠져 들어가는 그런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이 젊었을 때에 남에게 '주의 종으로 참 주께 충성을 다했다' 하는 명성을 얻지 못했던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되었는지, 그런 이들을 보고 있으면 '이것 참 예수를 믿고 나도 늙어 가지고 저렇게 될 바에는 지금부터 믿는 것을 고치든지 무슨 수를 내야지 안 되겠다' 하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젊은 사람이 믿는 것이나 노인들이 예수 믿는 생활을 하는 것을 들여다보고 그것을 거울삼아 늘 자기를 반성해 보아야 합니다. 항상 자기 세계에서만 돌아다닐 것이 아니라 '예수 믿어서 저렇게 된다면 자, 예수를 그렇게 믿어서 좋을 것인가?' 하고 생각할 바가 있습니다. 그들이 과거에 예수를 참 맹렬하게 전파하고 훌륭한 증거자로서 명가(名價)를 나타내던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증거자로 훌륭하게 명가를 나타내던 그 코스를 지나서 결론으로 이른 목적지가 그곳인가? 그렇다면 나는 그 길을 안 걸어야겠다' 하고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훌륭한 명가를 안 나타내는 다른 길을 취하고 가서, 늙을수록 젊었을 때보다 좀 더 낫고, 나이 한 살이라도 더 먹으면 그전보다 좀 더 나아서 남들에게 그리스도를 좀 더 나타내고 그래서 죽은 그 시간까지도 자꾸자꾸 올라가서 그리스도를 나타내다가 죽어야지, 얼마만큼 올라갔다가 오십이나 육십 살까지는 잘했는데 그 다음부터는 뚝 떨어져 가지고 아주 헐수할수없는 속물이 되고 완고투성이가 되고, 늙어서도 그냥 자기 멋대로 부리려고만 하고 권력을 쥐려고 하는 이상한 권력주의자나 배금주의자(拜金主義者)가 되고, 혹은 속된 생각이나 육도삼략(六韜三略)에 홀로 빠지게 된다면 지금 젊어서부터 아예 채비를 고쳐야 할 것입니다. 그런 분들이 지나갔을 그 유명한 코스를 달리고 있다면 '아, 이 트랙을 벗어나서 다른 길로 가야지 이 레일(rail) 위에 그냥 얹혀 있다가 그 길로 가게 된다면 큰일이다' 하고 생각하는 것이 좋습니다.
사람이 나이를 한 살이라도 더 먹으면 그만큼 정력도 쇠하고 안력(眼力)도 쇠하고 잘 보이던 눈도 침침해질 것이고, 잘 들리던 귀도 조금 침침해지게 되어서 그전에 젊었을 때와 같이 기민하게 알아듣고 기민하게 말할 수가 없고, 그래서 시원시원하지를 않습니다. 그러니 젊은 사람들에게 혹은 일반 사람들에게 항상 늙은 그 유세(有勢)나 보일까, 늙음으로 말미암은 병폐인 무기능이나 쇠퇴(衰退)나 쇠잔(衰殘)을 가지고는 밀어댈 길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결국 눈치도 빠르고 눈도 밝고 귀도 밝고 말도 잘하고 활동도 잘하고 그래야만 주님을 잘 증거할 수 있다는 이론이 생길 수도 있는데, 그렇게 해야만 주님을 잘 증거할 수 있다고 한다면 결국 ‘사람은 늙어서는 주님을 백 퍼센트 선명하게 잘 증거하지 못하도록 아주 선천적으로 마련하셨나 보다’ 하고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과연 인간의 신체 조건이 쇠퇴하는 데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그 증거력도 쇠퇴하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성경에 “겉사람은 후패하나 속사람은 날로 새롭도다.” (고후 4:16) 겉사람은 썩고 폐해서 점점 쇠잔해 가지만 속사람은 날로 새롭다는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바울 선생도 “나이 많은 나 바울은 ……” (몬 1:9) 하고 자기 나이가 많은 것을 이야기한 일이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 선생이 나이가 많아서 젊었을 때 가졌던 그 빛나던 그리스도의 증거자로서의 능력이 쇠잔했다든지 쇠감했다는 그런 이야기가 없습니다. 죽는 그 시간까지 절정을 향해서 올라가다가 부르시니까 가 버린 것입니다. 사도 요한이 90 세 넘게 참 오래 오래 살았는데, 그가 주님 앞에서 완고하고 아집투성이고 자존망대(自尊妄大)하는 사람이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그의 제자가 폴리캅인데 그는 자기 스승인 사도 요한이 늙어갈수록 성자(聖者)로서 빛이 더 나서 그의 지혜나 그의 가르침이나 그의 모든 전파하는 것이 죽는 시간까지 에베소 감독으로 앉아 있으면서 찬연하게 빛을 내고 갔다고 증거했습니다.
세상에서 육신의 몸이 죽는 순간까지, 즉 육신이 영혼과 분리되는 그 시간까지 우리의 속사람은 참으로 빛나게 장성해 나가는 것이 중생한 사람이 당연히 걸어가야 할 코스입니다. 육신이 쇠잔해지고 이 장막이 차츰차츰 쇠퇴함과 함께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빛도 마치 관솔불이나 횃불이 차츰 꺼져 가듯이 사그러지다가 나중에는 픽 쓰러져 죽는다는 것은 세상의 예술가나 문학가나 이 세상의 영웅들에게는 있는 일이지만 하나님 나라에서는 그러지 않아야 할 터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일이라고 하면서도 그렇게 나타나는 일이 많은데 그렇다면 그것은 하나님 나라의 일이 아니라 종교의 일일 뿐입니다. 세상의 예술가나 정치가나 종교가는 그런 길을 걷습니다. 한때 생활의 전성기에 찬란하게 빛을 비추다 차례차례 꺼져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중생한 사람은 조건이 나빠지면 나빠진 만큼, 즉 이 껍데기가 벗겨져서 기지(機智)나 총명(聰明), 건강, 발랄한 희망, 욕망, 정열, 이런 것이 탁 꺾어지면 꺾어진 만큼 겉사람에게 가려 있던 찬연히 빛나는 속사람이 그만큼 구실을 더 해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문을 적어 봅니다.
거룩하신 아버지시여, 저희들의 생활의 길에 아버님의 거룩한 나라의 영광과 능력이 충만케 하여 주셔서 우리의 인간적인 조건 여하를 불구하고 그 나라와 그 나라의 시민인 저희의 속사람의 순수한 능력은 세월이 갈수록 증진되어야 하겠고, 저희의 생활을 통해서 더욱 아름답게 비춰야 하겠사옵나이다. 그것은 어떠한 환경에서는 그 환경을 이용해서 찬연하게 비치고, 또 그와 정반대의 환경에서는 그 반대의 환경 때문에 또한 더욱 찬연히 비치는, 도저히 어떻게 변경할 수 없고 어떻게 별달리 영향을 줄 수 없는 생명 자체요, 죽음이라는 것이 없고 쭈그러짐이 없고 패함이 없는 이런 기이한 큰 능력과 생명의 발현이 인간의 조건 여하를 불구하고 늘 나타나는 것을 저희가 아오니, 그것이 저희 속에 늘 쌓여서 저희의 환경이 여하하든지 저희들을 통해서 늘 나타나게 하여 주옵소서. 가장 본질적인 것이 저희에게서 늘 강하고 아름답게 빛날 수 있도록 주님께서 은혜로 인도하옵소서. 유족한 환경에서는 유족한 그것으로 나타낼 것이요, 궁핍한 환경에서는 궁핍한 그것으로 찬연한 하나님의 나라는 또한 빛날 것이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의 조건을 초월해서, 어떠한 인간의 조건이든지 그것이 오히려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는 중요한 도구로 사용되는 이 분명한 사실이 우리 안에 있게 하옵소서.
주님, 불사신(不死身)과 같은 이 찬연한 능력의 발현이 저희들 식구들 속에, 이 교회 안에 찬연하게 능력 있게 깃들고 나타나서 세월이 가면 갈수록 여기서 더욱 그것이 빛나기를 간절히 기도하옵고 구하옵나이다. 저희 모든 현실적 사정을 주께서 아시오니 권고(眷顧)하옵소서. 기뻐하시는 뜻대로 행하사 모든 것을 쓰셔서 결국은 아버님의 영광을 드러내시옵소서. 모든 것을 쓰셔서 아버님의 영광을 저희를 통해서 드러내실 만큼 저희들은 장성해야 할 것이고, 아버님께 전부를 맡기고 의지하고 살아가야 하겠나이다. 구주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이 강설을 하시고 기도를 드리신 종의 최후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이제 점점 나이를 더해가며 ‘늙은’ 사람이 되어가는 자신을 바라보며 이 강설과 기도가 너무나 울리는 것을 느낍니다. 이 말씀과 기도 안에서 하루하루의 삶을 걸어가기를 소원합니다. 2012년 6월 10일 주일 오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