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
쥐안성과 쯔권의 사랑은 슬프고 마음 아프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슬픔의 날을 참고 견디면 기쁨의 날 오리니,..’ <죽음을 슬퍼하며>를 읽는 동안 푸쉬킨의 싯구가 계속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소설은 혼자 남겨진 쥐안성의 쓸쓸함만을 긴 여운으로 남기며 끝나는데도 안타까운 희망을 이야기하듯 ‘슬픔의 날 참고 견디면’이 부분이 반복적으로 계속 맴돌았다.
‘나는 나 자신의 것이지 그들 누구도 나에게 간섭 할 권리는 없어요!’ 당당하게 말하며 쥐안성을 선택했던 쯔쥔의 사랑. 그녀가 이처럼 용감하고 두려움이 없었던 것은 오로지 사랑 때문이었다. 두려움 없는 사랑으로 얻어진 평화로움과 행복. 하지만 그 사랑은 그리 오래지 않아 ‘생활’이라는 현실의 벽을 넘지 못하고 무너지고 만다.
‘안녕과 행복은 영원히 안락과 행복인 채로 머물고 싶어’ 352 하기에 ‘진실로 애정은 끊임없이 새로워지고 창조되어야 하는 것’ 이지만 그들은 생활이라는 현실 앞에서 사랑을 지켜나가지 못하고 쥐안성은 쓰쥔을 떠나보내고 그녀의 죽음을 슬퍼하고 있다.
반복되는 일상 속에 매일 매일을 살아내야 하는 생존의 문제와 맞닥뜨린 ‘생활’이라는 삶의 무게. 그것은 굳세고 두려움 모르는 그녀를 변하게 했다. 그리고 쥐안성 자신도 고백한다. ‘나는 지난 반년 동안 오직 사랑-맹목적인 사랑-만을 위해 인생의 다른 의의를 소홀히 해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첫째는 바로 생활이다. 사람은 반드시 살아가야하고 사랑은 바로 그것에 수반되는 것이다. 세상에는 노력하지 않는 자를 위해 활로를 열어주는 일은 결코 없’음을... 360
생활이란 이렇듯 ‘날마다 강물이 흐르듯이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밥을 먹는 일이다.’
‘밥을 먹는 일’이 허락되지 않는 사랑이란 그 모든 것이 공허함으로, 나약함으로, 고통으로 내몰릴 수밖에 없다. 사랑을 잃은 인간은 죽고 만다는 진실을 그녀는 증명이라도 하듯이 쯔쥔의 선택은 죽음이었다.
그녀를 기다리던 들뜨고 설레었던 기억은 이제 광대한 공허와 죽음과 다를 바 없는 정적만을 실감할 뿐 이제 그녀는 없다. 그리고 나는 살아야 한다. 그녀를 향해 비웃고 분노했던 허위의 짐을 벗어던지고 남겨진 자는 살아야만 한다.
그리고 이제 새로운 삶의 길을 가기위해 그가 해야하는 일은 그녀를 떠나보내는 일이다.
나를 위하여, 쓰쥔을 위하여, 나의 화환과 비애를 고백하고 용서를 비는 일,,.. 그리하여 나는 그녀를 진정 떠나보내고 ‘희망과 진실’은 가슴에 깊이 묻어 둔 채로 생존을 위한 ‘밥 먹는 일’의 삶을 살아가게 될 것이다. 한때 그가 꿈꾸었던 드넓은 하늘을 향해 비상하려던 꿈은 접어 둔 채로 말이다.
소설 <죽음을 슬퍼하며>은 루쉰의 다른 소설들처럼 자전적 요소가 짙게 느껴지는 작품이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사상을 함께한 동지에서 연인으로 발전한 쉬광핑과의 사랑 속에서 현실이라는 삶의 무게를 함께 겪으며 현실의 삶을 살아야 했던 두 사람의 생활을 떠올려보면 쥐안성의 회환과 비애는 루쉰 자신의 고백은 아니었을까?
앞서 읽었던 <방황>의 여러 작품에서 느껴졌던 지식인의 고뇌와 비겁함, 나약함, 이모든 것이 <죽음을 슬퍼하며>속에서도 여전히 묻어난다. 창조적 사랑을 꿈꾸지만 여전히 생활의 문제 앞에서는 무력하고 비겁한 지식인 쥐안성과 순수한 사랑의 힘으로 당당하고자했던, 그러나 아직은 구사상의 속박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여인 쓰쥔. 두남녀 주인공들은 지식인의 암울한 초상으로, 남녀평등과 여성해방을 부르짖지만 봉건의 질서라는 구습에서 아직도 벗어나지 못한 나약한 여성으로 그려진다.
루쉰은 말한다. 삶을 도모하는 길을 향해서는 반드시 손을 맞잡고 나아가거나 아니면 홀로 분투해 가야만 한다고. 만약 남의 옷자락에 매달리기만 한다면 그가 전사라고 할지라도 싸울 수없게 되어 함께 멸망하고 말것이라고.362
그래서 쥐안성과 쓰쥔의 사랑은 더욱 더 안타깝다. 서로 사랑했으나 손을 맞잡지도, 홀로 전사가 되어 싸우지도 않고, 그들은 그렇게 죽음으로, 그리고 희망을 버리는 것으로 그들의 사랑을 버렸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