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재석
3대 병역명문가
우리 가족은 ‘병역 3대 명문가’다. 아버지는 한국전쟁 참전유공자, 나는 월남전 참전유공자, 동생은 최전방근무 중 순직했으며 자식과 조카는 육군 병장으로 만기제대 했다.
정부에서 준 편액 문패가 ‘참전유공자의 집’ 2개, ‘국가유공자의 집’ 1개, ‘3대 병역명문가의 집’ 1개를 합하여 4개나 된다. 아무 쓸모 없는 문패가 볼썽사나워 장롱 구석에다 처박아 놨다.
구십 가까이 살다 떠나신 아버지께선 생전에 ‘참전용사의 집’이란 편액을 아파트 현관문 밖 벽에 붙여 놓았다. 노동운동, 민주화운동을 한 사람들에겐 몇억 원을 주면서 나라를 위한 전쟁에 나간 참전용사에겐 이게 뭐냐고 분개하셨다.
3대 병역명문가를 찾는다며 증빙서류를 내라고 그리 요란 떨 일이 아니다. 정보시스템구축 일등국인 대한민국에서 병역을 마친 3대를 못 찾는다는 것이 말이나 되는지 참으로 이상한 행정이다.
큰 혜택을 주지도 않고 달랑 3대 병역명문가 명패나 주려고 그리 성가시게 굴게 뭐람. 보훈청이 생색을 내려거든 그 많은 공무원 시켜서 찾아낼 일이다.
나의 가족사
나의 아버지는 일제 강점기에 국민학교를 다녔으며 왜병 징용에 끌려가지 않으려 산속으로 피신하고 땅굴에 숨어 지내다가 해방을 맞았다. 그리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처자식 둔 늦은 나이에 전쟁에 징집되어 참전하셨다.
아버지가 참전하는 동안 어머니는 농사일하면서 산에 가서 땔감을 모아 머리에 이고 나르셨다. 젊은 나이에 품앗이와 품팔이하며 어린 나와 동생을 키우시느라 갖은 고생을 하셨다.
아버지는 용케도 전쟁터에서 죽음을 피하여 살아 돌아오셨다. 그러나 일제의 잔재와 전쟁의 폐허 속에서 살아가는 것은 또 다른 전쟁이었으며 고난의 연속이었다.
논 두 마지기와 밭 한 뙈기로 시작한 살림은 궁핍하기만 했다. 너나없이 쪼들리는 살림에 어머니들은 금산 인삼을 머리에 이고 행상에 나서야 했다.
나의 어머니는 5남매의 학비를 대느라 인삼 행상으로 집에 머물 새가 없었다. 자식들이 잘 커가고 있으니 힘든 줄도 모르고 일하셨는데 군대에 간 둘째가 그만 죽었다.
큰 자식은 월남 전쟁터에서도 살아왔으니 작은 자식 군대 생활이야 안심했는데 전방 근무 중 전사했다는 통보가 왔다. 대학 1학년생인 동생은 갑자기 군대에 가더니 원인도 모를 전사를 했단다. 생때같은 아들을 잃은 어머니께선 화병으로 몸져누워 계시다 돌아가셨다. 어머니께서 삶의 의욕을 잃고 병 얻어 우리 곁을 떠나시니 우리 집은 쑥대밭이 됐고 동리 사람들은 그 집 망했다고 수군거렸다.
아버지는 온갖 풍파를 겪으시며 살아오시는 동안 본인의 의지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없음에 팔자려니 체념(諦念)하고 자식과 아내 잃은 서글픔을 가슴에 묻고 가시밭길을 외로이 살다가 돌아가셨다.
월남전에 차출
아버지 대의 고단한 삶의 행군은 자식 대로 이어졌다. 자식들은 가난에서 벗어나고자 월남 전선으로 서독 광부로 간호사로 중동 건설 현장으로 뛰어들었다. 나는 60년대 말 군에 입대하였다. 지지리도 가난했던 그 시절. 군대에 가면 살이 붙어 돌아온다고들 했다. 월남에 가면 떼돈을 번다니 가난한 병사들이 너도나도 사지에 지원했다.
나도 월남전에 참전했다. 내가 월남에 파병될 땐 월남전이 막바지에 이르렀는지 전사자가 많이 발생한다는 소문에 지원자가 부족하여 강제로 차출당했다. 안 간다고 항변했는데도 끌려갔다.
강원도 오음리 라는 데서 한 달간 월남전 참전 교육을 마치자 마지막 휴가를 줬다. 고향으로 달려갔다. 그렇게도 그리웠던 어머니는 인삼 행상을 떠나고 집에 안 계셨다. 가족들과 친지들에겐 월남에 간다고 말도 못 했다.
귀대 길에 대전에 들러 친구를 만나 술로 마음을 달랬다. 버스를 타고 여학생들의 자주색 가방을 한 아름 받아 안았다. 여학생들은 고맙다고 미소 지으며 인사를 했지만 나는 울고 있었다. 이 예쁜 학생들 모습이 마지막일 지도 모른다는 서글픔에 눈시울이 뜨거워 왔다. 차창 밖으로 시선을 돌려 눈물을 삼켰다.
월남전 참전
돈을 벌어 온다는 월남은 비참했다. 고엽제가 뿌려진 정글 속으로 작전 나가고 경계근무를 서는 것은 병사의 일이라 받아들였지만, 무사히 임무를 마치고 살아 귀국한다는 기쁨보다 귀국 준비에 허탈해했다.
당시 귀국 장병들은 상자 한 개를 꾸려 귀국할 수 있었는데 그 안에 채워갈 내용물이 문제였다. 앞서 파월돼 귀국한 선임 전우들은 어떻게 구했는지 선풍기, 카세트, 텔레비전, 냉장고, 에어컨, 카메라들을 상자에 채우고 귀국하여 집안 형편이 폈다는 판이었다.
파월 병사들에게 지급된 전투수당은 원래 600? 여 달러인데 500여 달러는 국가에서 산업자금으로 환수하고 병사들에겐 50여 달러가 지급된다고 했다. 그중 40여 달러는 가정으로 송금하고 월남 현지에서 사용하라며 11달러를 받았다.
작전에 나갔다가 무사히 돌아와, 경계근무를 끝내고 공허한 외로움을 달래느라 전우들과 캔맥주를 마시다 보면 11달러는 금방 달아났다. 자린고비로 생활한다 해도 귀국 상자 채워 자랑스레 귀국하긴 영 글렀다.
선임병의 귀국을 돕기 위해 탄피와 맥주 캔을 모았으며, 심지어 미군 쓰레기처리장의 고물을 상자에 넣어 귀국하는 형편이라서 귀국을 연장하는 병사까지 속출하고 있었다. 가난한 집안을 일으켜 보겠다며 타국의 전장에 목숨 걸고 왔지만 빈손으로 귀국하기가 가족들에게 송구했던 것이다.
낮엔 땀으로 빠져나간 염분 보충을 위해 알약 소금을 먹었다. 밤엔 모기 쫓는 물약을 온몸에 문지르고 고약한 냄새와 끈적거림 때문에 밤을 지새우는 월남 생활이 지긋지긋했다. 수당을 열 배 더 준다 해도 싫었다. 고국이 고향이 가족들이 한없이 그리웠다. 귀국하는 날이 하루빨리 돌아오길 학수고대하며 귀국할 날짜만 세었다.
베트콩이 날린 포탄이 영내로 날아오는 횟수가 많아져서 불안과 초조함에 늘 긴장 속에서 생활했다. 민주 자유 우방을 지킨다는 자부심으론 병사의 마음을 달래지 못했다. 사병들은 알 리가 없었지만, 미국과 월맹이 휴전 협상하는 동안인데도 작전은 더 많아졌다.
맹호 모 부대가 월맹군에 타격당했다는 흉흉한 소문이 번지고 우리 백마 부대가 지원을 위해 북쪽으로 이주한다니 병사들은 더욱 불안해했다.
전투준비
큰아들이 월남전에 참전했다는 편지를 받곤 어머니께선 까무러치셨다. 탈 없이 돌아오게 해달라고 정화수 앞에서 천지신명님께 간절하게 빌었다. 가족들의 기도가 월남 땅 까자 다다라 생사의 갈림길에 선 나를 항상 생의 길로 이끌고 있음을 육감으로 느꼈다.
월남전투는 전선이 없다. 작전지역이 결정되면 전투기가 출격하여 지축을 뒤흔드는 폭격으로 정글을 불태우고 포대의 지원 사격이 이어진다. 이어서 헬기가 작전지역을 선회하면서 기관총 난사로 잔당을 소탕한다. 마지막엔 보병들의 수색 작전으로 마무리됐다.
헬기 작전이 진행되는 동안 적군에 의해 헬기 두 대가 떨어졌다는 소식이다. 경거망동하지 말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매복 호를 파고 호 앞쪽엔 클레이모어 지뢰를 설치했다. 매복 호끼리 연락하는 신호 줄을 연결했다.
긴장된 병사들의 맘은 아랑곳하지 않고 서쪽 하늘은 붉게 물들었다. 마당에 펼쳐 놓은 멍석에 둘러앉아 저녁밥을 먹고 있을 고국의 부모 형제 얼굴이 떠오른다. 사무치게 그립다. 저녁으로 시레이션을 까먹으며 그리움을 삼킨다.
‘천지신명이시어, 오늘 밤 전투에서도 지켜주시어 무사히 내일을 맞게 하옵소서!’ 작전에 나서는 병사들은 몸에 지닌 병장기마다 신의 가호가 있어 나를 지켜 주리라 믿지만, 희생은 따른다.
지뢰를 밟고 총탄에 맞는 것은 예고도 없이 한순간에 벌어졌으며 생과 사는 그날 화투장의 운수 띄기였다. 운명이고 숙명으로 짜여진 각본이었다. 나약한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팔자소관이라며 받아들인다.
공포의 전투 앞에 무력한 병사들은 각자의 신들에게 의지하고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벗어나길 간절히 기도 한다. 죽은 자들에겐 신의 가호가 없다. 오직 산 자들에게만 신의 지극한 가호가 있을 뿐이다.
전투
별빛은 머리 위에서 쏟아지는데 멀리 작전지역엔 쉼 없이 포탄이 터진다. 조명탄이 솟구쳐 올라가고 헬기에서 불을 뿜는다.
적들의 저항도 만만찮은 듯 멀리서 가까이서 총소리가 요란하다. 화급한 외침 소리가 멀리서 들려온다. 작전지역을 빠져나가는 베트콩들이 우리가 매복한 곳 앞에까지 나타났다.
이따금 터지는 조명탄 빛에 베트콩들의 움직임이 언뜻언뜻 눈에 띈다. 클레이모어 지뢰가 설치된 앞쪽에 첨병인 듯한 베트콩 한 명이 주위를 살피다 사라졌다. 신호 줄이 흔들린다.
우리 조 다섯은 나타나는 베트콩을 순서대로 정조준하기로 했다. 연발 발사 자물쇠를 풀어 놓고 M16 소총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었다. 첨병에겐 총을 쏘지 말라는 소대장의 말을 되뇌며 기다린다. 심장의 콩닥거림에 숨이 막혀와 가슴이 터질 지경이다. 얼굴이 달아오른다. 베트콩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뒤이어 서너 명의 베트콩 첨병 모습이 희미하게 보인다.
하나둘 셋. 방아쇠를 당겼다. 클레이모어가 폭발하고 수류탄이 터진다. 유탄이 발사되고 굉음과 섬광이 어둠을 찢는다. 베트콩들은 순순히 도주하지 않았다. 만만치 않은 저항을 한다. 우리 중대 방호전선 곳곳에서 긴박한 상황이 밤새 전개됐다.
날이 밝았다. 작전지역을 수색하고 전과를 확인한다. 참혹한 전투 상황 속에서도 병사들은 사기충천한다. 노획품들을 정리하고 사진으로 증거하며 민첩하게 움직인다. 헬기가 들락거린다. 대대장 연대장이 병사들을 격려한다. 중대장은 의기양양 밤새 전개된 작전상황을 설명한다.
전과는 지휘관들의 훈 포상과 일 계급 승진을 노리는 논공행상(論功行賞)이 기다린다. 전쟁은 사람이 할 짓이 아니다. 전쟁은 사람을 동물로 만들고 그 짓거리들을 전과로 덮어버린다. 동물적 행동을 영웅으로 만들고 포상과 훈장으로 위장한다.
전투 상황은 종결됐다. 지휘관과 공훈 병사는 영웅으로 만들어진다. 오늘 하루 무사함에 감사하고 헬기에 실려 가는 부상병들이 부럽기도 하면서 큰 부상이 아니길 바란다. 전우의 주검을 태운 헬기에 명복을 기원하는 기도를 날린다.
죽임이 진실을 삼키곤 허연 이빨을 드러내는 악마들의 전쟁이 지구 곳곳에 벌어진다. 인간이 그토록 매달리는 신은 있는가? 죽은 것인가?
무사 귀국
월남전에서 5천여 명이 전사했다. 1만1천여 명이 부상당한 전쟁터에서 나도 아버지처럼 살아 돌아왔다.
전선이 혼미해지자 귀국이 취소된다는 둥 어수선한 가운데 난 따블백 하나만을 둘러메고 70년 초에 귀국했다. 깡마른 나의 몰골을 보신 어머님은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셨다.
귀국 후, 참전 후유증으로 반년이 넘도록 내 행동거지가 이상했지만, 내색을 안 했다고 어머니께서 나중에 말씀하셨다. 혹여 정신병이면 어쩌나 하는 걱정에 이것저것 보약을 먹이시며 애타셨다. 큰 자식 살아 돌아오게 해 달라고 천지신명께 빌며 얼마나 노심초사(勞心焦思)하셨을까!
이역만리(異域萬里) 타국에서 전사한 전우들의 부모님 슬픔에야 빗댈 순 없지만 살아 돌아온 자들의 아픔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병 얻어 고통 속에서 살아온 동지들이 하나둘 세상을 떠난다.
백 살을 산다는 이 좋은 세상을 환갑도 못 살고 간 상술이, 환갑을 갓 넘긴 종남이, 종아리의 살이 썩어 도려내고 절뚝이다 간 내구, 거동이 어려워 드러누웠다 간 세명이, 신경이 점점 마비되어 병원에서 아픔을 삭이는 기옥이….
내 고향 친구들이 이리 살아가고 있는 형편이니 전국 방방곡곡엔 얼마나 많은 전우가 국가유공자에게 주는 쥐꼬리만 한 혜택도 누리지 못하고 아픔의 고통 속에 살아가고 있으랴!
전우들의 말년
암울했던 5·16, 3·15, 4·19, 5·18, 민주화투쟁시절, 산업화와 정보통신 시대를 정신없이 살다 보니 지난 세월은 일장춘몽이었더라. 인생은 70부터라 억지 부리며 평생학습관으로 시민대학으로 복지관을 들랑거렸다.
컴퓨터 스마트폰 사용법을 배우고 인문학 명리학 풍수지리 강좌를 수강하며 국가유공자증의 혜택을 누렸다. 인생 말년에 주는 국가의 시혜(施惠)인 유공자증을 사용하지 않으면 손해라는 생각이 들어 수강료를 감면해주는 학습관 여기저기를 기웃거렸다.
나는 도시에 살면서 유공자증을 이용하지만, 시골에 사는 유공자들에겐 그림의 떡 일 게다. 환경이 열악한 지역에 사는 유공자들에겐 별도의 혜택을 주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현충일이다. 대전 현충원을 찾았다. 현충탑 참배는 현충원에 안장되신 모든 순국선열과 호국영령들의 충의(忠義)와 위훈(偉勳)을 기리고 숭고한 희생정신을 받들어 평화적 통일을 달성하고 더 큰 대한민국을 만들겠다는 의지를 다지며 감사의 뜻을 나타내는 곳이다.
‘여기는 민족의 얼이 서린 곳, 조국과 함께 영원히 가는 이들, 해와 달이 이 언덕을 보호하리라’
현충탑에 새겨진 비문이다. 진작 보호할 대상은 영면하고 있는 영령들이 아니라 힘들게 살아가고 있는 그 유족들이다.
장애인이 된 남편을 평생 보살피며 가족들을 지켜온 청주에서 오신 유족을 만났다. 결혼 후 6개월 만에 남편은 월남으로 파병되었으며 작전 중 총상으로 한쪽 다리를 잃고 귀국했단다.
“내가 식당을 하면서 애들하고 살았는데 사는 게 너무 힘들었어요. 자식과 손자들 쳐다보면 가슴이 아프고 그래요.”
월남전에 참전했던 병사와 결혼했는데 남편은 고엽제 후유증으로 평생을 고생하다 돌아가셨다는 유족도 만났다. 그런데 고엽제가 자식에게까지 유전되어 자식도 고엽제 후유증으로 죽었단다. 어린 손자들을 어떻게 키우며 살아야 할는지 막막하단다.
“국가유공자는 당사자만 되고 2세까지는 안 된다는 거여. 자식이 고엽제로 죽었는데. 이게 말이 되냐고? 죽지 못해 살고있는 거여. 정말로 환장하겠어. 미쳐버릴 것 같아요.”
남편은 생전에 보훈병원에서 치료받았으며 죽어서는 대전 현충원에 묻혔지만, 자식은 고엽제 후유증이란 원인을 밝힐 수 없어 아무런 보훈 혜택을 받지 못한다고 하소연하신다.
막 결혼한 신혼에 아버지는 월남전에 참전했단다. 어머니가 딸이 태어났다는 편지를 보냈는데 아빠의 전사 통지가 답장으로 왔다. 아버지 얼굴도 모르며 홀어머니 품에서 자란 그 딸이 국립묘지를 찾았다. 쥐꼬리만 한 국가의 지원으로 어렵게 살다 돌아가신 어머니를 그리며 아버지의 묘비를 쓰러 안고 울부짖는다.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는 유족들이 어찌 이분들 뿐이랴! 국가가 이들을 챙겨주지 않는다면 그 누가 전장에 나서겠는가? 나타나지 않는 아픔을 안고 사는 전우들과 그 가족들은 어떻게 치료받고 치유될까?
조국 근대화의 초병이었다는 긍지를 갖고 참전유공자로 살아가라며 국가유공자증을 쥐여줌은 아이들의 사탕발림에 지나지 않는다.
선진국 대한민국
월남전에 참여했던 병사들은 병마에 생활고로 시달리는데 대한민국은 그 위상이 날로 높아졌다. 경제협력개발기구 회원국으로 성장하였으며 세계 평화를 위해 이라크, 아프간, 레바논 등 10여 개 국가에 다국적군과 평화유지군이라며 우리의 세금으로 파병하는 경제 대국에 이르렀고 지금은 선진국 반열에 등극했다며 자랑하고 있다.
대한민국은 1인당 국민총소득 3만 달러 이상과 인구 5천만 명 이상의 조건을 만족하는 ‘30-50’클럽에 진입했단다. 이는 미국, 독일, 일본, 영국, 이탈리아, 프랑스에 이어 세계 7번째이며, 식민 지배를 경험한 국가로는 최초란다.
이처럼 대한민국은 부강해졌는데 목숨 바쳐 희생한 독립유공자, 한국전쟁과 월남전에 참전한 참전유공자, 공무로 인해 순직한 국가유공자와 그 유가족을 위한 보훈은 선진국 수준을 따르지 못한다.
특히 국가경제발전에 이바지한 파월 장병들의 헌신을 인정하고 국가에서 사용한 파월 장병들의 전투수당에 대해선 그 누구도 어떤 정권에서도 말하지 않음은 참으로 야속하다.
나라가 어려운 시절. 국가발전을 위해 개인의 이익을 포기했던 시절은 군사정부를 거치며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문민정부, 국민의정부, 참여정부, 이명박·박근혜·문재인·윤석렬 정부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하소연은 외면당했다.
군사정권의 후신인 이명박⋅박근혜정부에 기대를 걸었으나 허망하게 무너졌다. 문재인 정부에서는 베트남전쟁 참전유공자 특별법 논의를 하는 둥 하더니 막강한 의석을 가졌으면서도 좌우 눈치를 보느라 헛발 질타 지나갔다.
경제 대국에서 선진국으로 등극했다는 오늘에 이르렀는데도 파월 장병들의 희생과 노고에 대해 공식적으로 밝히지 않음에 몹시 서운하다. 이제 공은 ‘국민주권정부’인 이재명 정부에 넘겨졌다.
공정과 정의와 상식이 파월 장병 2만 2천여 명의 한을 풀어 주는 데도 적용되어 박정희 정부에서 빼앗아 간 파월 장병들의 보수를 되돌려 주기 바란다. 지금 우리나라는 돈이 넘쳐나고 있어 그리해도 되는 것이다.
코로나 생활지원금, 민생 회복 지원금, 자연재해와 사고로 인한 보상금, 고유가 지원금 등, 국민을 그리 잘 챙기면서도 평생을 재난 속에서 사는 독립유공자 유족, 참전자와 그 유족, 공무로 순직한 국가유공자와 유족들에겐 그리 박해왔는지 통탄할 따름이다.
민주유공자법, 사고 참사자 특별법, 민생 지원 특별법 등 특별법을 그리도 잘 만들면서도 파월 장병지원 특별법엔 여야 정쟁으로 법사위에 오르지도 못한다. 그 노병들의 궁핍한 여생이 얼마 남지 않았음에도 말이다.
그동안엔 경제위기를 극복하느라 참전용사들에게 손쓸 겨를이 없었다 치지만, 이제는 경제발전에 밑거름이 되어준 월남전 참전용사에게 선진국다운 보상해야 함을 알았다. 이제는 우리가 이렇게 요구해도 됨을 알았다.
국가는 사탕발림으로 이렇게 하면 안 되는 것이었다. 월남전 참전자들에게 진 빚을 갚아야 함을 알았다. 인생 말년을 어렵게 살아가는 참전유공자들의 희생에 정부는 답해야 함을 알았다.
월남전 참전자와 희생당한 장병들에게서 차용해 간 빚을 국가는 갚아야 할 책무가 있음을 알았다.
대한민국은 이러면 안 되는 것이었다.
대전 중구 산성동 한밭가든(아파트) 106-410 조재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