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양왕 고원(高元)과 성덕태자 고덕(高德)
571년 4월 15일, 왜 29대 흠명천왕이 죽자 왕의 차남이 왕위에 오르니 30대 민달천왕이었다.
572년 4월 3일, 제30대 민달천왕 뉘중창이 백제궁에서 즉위하였다. 585년 8월 15일에 천왕이 전염병으로 죽었다. 배다른 이복 오빠 뉘중창의 아내가 된 왕후 액전(額田)은 딸만 셋을 낳았다.
585년, 9월 5일, 민달천왕의 뒤를 이어 흠명천왕의 4남이 왕위에 오르니 왜 31대 용명천왕이었다. 587년 4월 9일, 용명천왕 역시 전염병에 걸려 죽으니 재위 불과 1년 7개월이었다.
587년 8월 2일, 흠명천왕의 5남이 욍위에 오르니 왜 32대 숭준천왕이었다. 왕은 선왕들이 전염병에 쓰러진 것을 몹시 두려워하여 불법에 귀의하였다. 이에 백제 목씨 세력 소아마자(蘇我馬子)는 석가불에 기대는 유약한 숭준천왕을 미워하였다.
590년, 고구려 평원왕의 장자 고원(高元)이 왕위에 오르니 제26대 영양왕이었다. 영양왕 고원의 그때 나이 30세였다.
592년 11월, 왜 32대 숭준천왕이 살해되었다. 왜 제일의 외척세력 소아마자가 보낸 은자(隱者,자객)가 천왕을 살해하였다. 천왕을 살해한 자객은 동한직구(東漢直駒)였다. 그는 백제 동한(東韓)에 살다 왜로 투화한 인물이었다. 백제 성왕과 신라 신주 군주 김무력이 벌인 관산성 전투에서 살아남아 열도로 귀화한 인물이었다. 숭준천왕이 죽고 나자 왕위를 이을 왕자가 없었다. 이에 소아마자는 민달천왕의 왕후 액전에게 왕위에 오를 것을 강권하였다. 암살이 두려운 왕후 액전은 소아마자의 권유를 극구 사양하였다. 그러나 더이상 거절할 방법도 없었다.
593년 1월, 고구려 영양왕 고원이 왜국에 사신을 보냈다. 왜국에 전염병이 돌아 민달천왕과 용명천왕이 죽었다. 연이어 내란이 있어 숭준천왕이 시해되었다. 더이상 왕위를 이을 오를 왕자가 없음을 알았다. 이에 영양왕 고원은 왕의 아우 고덕(高德)을 태자로 임명하여 아스카(飛鳥)에 보냈다.
593년 1월 15일, 민달천왕의 왕후 액전(額田)이 왕위에 올랐다. 제33대 추고천왕(推古천왕)이었다. 그때 나이 39세였다. 추고천왕은 고구려 영양왕이 보낸 고덕(高德)을 태자로 임명하고 동궁(東宮)에 거주하게 하였다. 고덕을 섭정으로 삼아 열도의 모든 일을 고덕황자에게 맡겼다. 수시로 천왕위를 노리는 백제계 소아마자의 세력을 견제하였다. 그때 고덕 태자의 나이 19세 였다.
595년 3월, 고구려의 승려 혜자(惠慈) 스님과 백제의 승려 혜총(惠聰) 스님이 아스카에 도착하였다. 혜자는 고덕 태자의 스승이 되어 열도 왜국의 일을 조언하였다. 아울러 법흥사에 머물러 불법을 널리 전파하였다.
598년 고구려 영양왕 8년, 중국을 통일한 수 양제가 고구려를 침공하였다. 수 양제는 30만 대군으로 고구려를 굴복시키고자 하였다. 수나라 군사를 육로와 해로로 고구려의 수도 평양성을 공취하고자 하였다. 이에 고구려 영양왕 고원(高元)은 왜에 사신을 보냈다. 왜의 고덕태자에게 사신을 보내 려왜연합군을 결성할 것을 제안하였다. 수 양제가 고구려를 침공하느라 비워 둔 수나라의 동도(東都) 낙양(洛陽)을 함선으로 공격하려는 작전이었다. 열도 고덕황자는 추고(推古)여제와 승려 혜자(慧慈)와 수나라 침공의 사태에 대비하였다. 그런데 한여름에 출정한 수나라 군대는 고구려의 강역에 들어오기도 전에 패퇴하였다. 장마와 태풍, 질병과 기아, 군자기계와 식량 보급 문제로 큰 피해를 입고 자진 철수했다.
608년 1월, 수 양제는 100만명의 인민을 동원하여 하남과 하북을 잇는 운하를 팠다. 수 양제가 영제거(永濟渠)를 판 이유는 고구려 정벌에 있었다. 고구려를 두고는 천하를 통일하였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언제 어느 때 고구려의 5만 보기가 수나라를 기습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잠이 오지 않았다.
611년, 운하를 완공한 수 양제는 제2차 고구려 침공에 나섰다. 운하의 북쪽 끝에 위치한 탁군(북경)으로 엄청난 군자기계를 집결시켰다. 무려 113만의 군사와 무기, 군량과 수레를 모아 들였다.
612년 1월, 수 양제는 1백만이 넘는 대규모 병력으로 고구려를 다시 침공했다. 598년 여름에 고구려를 침공하였다가 장마와 태풍에 패퇴한 일을 반복하지 않으려고 겨울에 출병하였다. 이에 고구려 을지문덕 장군은 산성에 의지하는 수성전과 읍성에 먹을 것을 남기지 않는 청야 전술로 대응했다. 추위와 노숙으로 피로에 지친 수나라 군사를 요하를 건너 요동 깊숙이 끌어들였다. 추위와 동상, 기아와 질병에 시달리던 수나라 장수 우문술과 우중문은 전쟁을 서둘렀다. 30만 별동기동대로 고구려의 수도 평양성을 급습하여 고구려 영양왕을 포로로 잡으려고 하였다. 8월, 평양성을 기습하려던 수나라 장수 우문술과 우중문이 30만 기병을 되돌렸다. 을지문덕 장군의 전술 전략에 빠진 것을 깨닫고 후퇴하여 압록강으로 달아났다. 살수에 이르러 잠시 전열을 가다듬고 강가에 머물러 쉬던 때였다. 한밤중에 갑자기 강물이 불어나 군막이 떠내려갔다. 강물을 무서워하는 말들도 크게 놀라 갈팡질팡하였다. 그때에 고구려 을지문덕 장군의 군사가 앞뒤에서 공격하여 왔다. 수나라 군사는 살수대첩에서 대패하여 지리멸렬 사라지고 말았다. 이때부터 청천강의 이름은 살수(殺水,薩水)가 되었다.
613년, 고구려에 패배한 수 양제는 분함을 못이겨 3차, 4차 침공을 명령하였다. 그러나 군량 수송을 책임지던 예부상서 양현감(楊玄感)의 반란으로 성사되지 못했다.
618년 3월, 우문술의 아들 우문화급이 강도(江都)의 궁전에 피해있는 양제를 사로 잡았다. 양제는 신하에 목베이는 것을 부끄러워하여 독약을 달라고 했다. 그러나 우문화급이 양제의 말에 따르지 않자 허리에 매었던 비단 허리끈을 풀어 반란군에게 주었다. 고구려를 정벌하려던 수 양제의 야욕은 자신의 허리띠에 목이 졸려 허망하게 죽었다.
622년 2월, 열도 왜에 대규모 전염병이 다시 돌았다. 2월 21일, 고덕 황자의 아내가 죽었다. 다음 날인 2월 22일 고덕 황자도 따라 죽었다. 향년 49세였다. 고덕 태자를 돕던 고구려 승려 혜자 스님이 태자의 부고를 듣고 깊이 슬퍼하였다. 혜자 스님은 고덕 태자의 열반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태자는 성인이시다. 나도 내년 오늘 태자를 만나러 가셌다"는 말을 남기고 열도를 떠났다. 고구려로 돌아온 혜자 스님은 영양왕의 이복 동생인 영류왕 고무(高武)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이듬해 2월 22일에 입적하였다.
*성덕태자. Yahoo Japan 作
*은자(닌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