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눈깨비
기형도
때마침 진눈깨비 흩날린다
코트 주머니 속에서는 딱딱한 손이 들어 있다
저 눈발은 내가 모르는 거리를 저벅거리며
여태껏 내가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사내들과 건물들 사이를 헤맬 것이다
눈길 위로 사각의 서류 봉투가 떨어진다, 허리를 나는 굽히다 말고
생각한다, 대학을 졸업하면서 참 많은 각오를 했었다
내린다 진눈깨비, 놀랄 것 없다, 변덕이 심한 다리여
이런 귀가길은 어떤 소설에선가 읽은 적이 있다
구두 밑창으로 여러 번 불러낸 추억들이 밟히고
어두운 골목길엔 불켜진 빈 트럭이 정거해 있다
취한 사내들이 쓰러진다, 생각난다 진눈깨비 뿌리던 날
하루종일 버스를 탔던 어린 시절이 있었다
낡고 흰 담벼락 근처에 모여 사람들이 눈을 턴다
진눈깨비 쏟아진다, 갑자기 눈물이 흐른다, 나는 불행하다
이런 것은 아니었다, 나의 일생 몫의 경험을 다했다, 진눈깨비
■ 핵심정리
• 제재 : 진눈깨비
• 특징
- 진눈깨비를 통해 화자의 잠재된 슬픔과 안타까움을 표출
- 시어의 도치와 반복을 통한 독특한 리듬감의 형성
• 주제 : 희망 없이 살아가는 도시 소시민의 비애
■ 이해와 감상 1
진눈깨비의 이미지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아무런 희망 없이 살아가는 도시 소시민의 삶의 비애를 그린 작품이다. 쓸쓸하고 삭막한 배경 묘사와 희망이나 포부 없이 살아가는 삶의 모습, 즐거움이라고는 없는 어린 시절에 대한 추억 등을 제시한 후 현재의 불행한 삶을 다시 진눈깨비의 이미지와 결합하면서 끝맺고 있다. 전체적으로 부정적인 이미지를 환기하는 배경과 두서없이 떠오르는 과거의 기억 등이 진눈깨비와 결합되면서 도시 소시민의 희망 없는 삶을 효과적으로 그려 내고 있다.
■ 이해와 감상 2
기형도 시인은 주로 유년의 우울한 기억이나 도시인들의 삶을 담은 독창적이면서 개성이 강한 시들을 발표하였습니다. <진눈깨비>나 <입 속의 검은 잎>도 그런 류의 시입니다. 인터넷에서 기형도 시인을 검색하다보면 가장 눈에 띄는 것이 그의 죽음에 관한 것입니다. “1989년 시집 출간을 위해 준비하던 중, 종로의 한 극장 안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고 사인은 뇌졸중이었다.”가 그의 죽음에 관한 짤막한 한마디입니다. 지금까지 수많은 시인들이 다 풍족한 생활과 행복한 생활을 한 것은 아니지만 그의 쓸쓸한 죽음에 대해 생각하며 <진눈깨비>라는 시를 감상해 볼까 합니다.
우선 시를 전체적으로 한번 훑어보면 월급쟁이 직장인이 삭막한 도시 한 가운데 쓸쓸히 서서 주위를 돌아보는 구도가 떠오른다. 마침 진눈깨비가 내리고 그것을 매개로 해서 자신의 과거를 떠올린다. 과거 대학을 다니던 시절 그는 멋진 사회인이 될 것이라고 다짐을 했다. 그러나 현실은 냉혹하다. “코트 주머니 속의 딱딱한 손”과 “눈길 위로 사각의 서류 봉투가 떨어진다.”가 현재 어떤 일이 잘 풀리지 않음을 알려주는 것 같다. 추운 겨울날 귀가하던 길에 진눈깨비를 맞으며 그는 지금까지 자신의 노력이 헛되었음을 알고 추억의 망상으로 젖어든다. 서서히 그 추억들을 떠올리고 다시 지워버린다. 그는 지워버리는 행위를 시에서는 구두 밑창에 밟힌다고 표현했다. 그리고 다시 귀갓길의 풍경을 바라본다. “어두운 골목길엔 불 켜진 빈 트럭이 정거해 있다. 취한 사내들이 쓰러진다.” 불 켜진 빈 트럭과 취한 사내들은 자신의 현재 모습과 하고 싶은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다. 서서 움직이나 마음이 공허하고 쓸쓸한 자신의 상태를 빈 트럭에 비유하고 차라리 지금의 이 심경을 떨쳐버리고 싶은 마음에 취한 사내들을 바라보는 것은 아닐까? 자신도 취해서 잠시라도 현실에서 도망쳐 보고 싶은 욕구. 그 시선에서 벗어나 다시 진눈깨비를 바라본다. 어린시절을 떠올린다. 진눈깨비 내리던 그 날 어린 시절 그래도 행복했던 날이었던 것 같다. “낡고 흰 담벼락 근처에 모여 사람들이 눈을 턴다.”라고 표현한 것은 지금의 쓸쓸한 모습이 아닌 그래도 그때는 사람들과 교감을 하고 있었던 것을 알려준다. 그 때 다시 진눈깨비가 쏟아진다. 그리곤 눈물을 흘리고 만다. 후회하는 것일까? 체념하는 것일까? 아니면 둘 다인지, 그는 자신이 불행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현재의 삶은 그가 바라던 삶이 아니면서도 자신은 일생 몫의 경험을 다했다고 한다. 기형도 시인의 쓸쓸한 죽음을 알아서일까? 꼭 시 속의 그는 자살을 하러가는 사람의 마음가짐 같기도 하다. 다시 한번 “진눈깨비”란 단어로 시의 마지막을 장식한다. 생각해보면 진눈깨비는 비도 아니요 눈도 아니다. 비와 눈이 섞여 내리는 것을 진눈깨비라고 부른다. 그의 상황이 바로 그런 것이 아닐까 한다. 과거의 행복하고 당찼던 기억과 현재의 쓸쓸하고 불행한 그의 삶이 뒤섞여 이 시를 꾸미고 있는 것이다.
출처: 홍미란
http://poemq.or.kr/lecture/board/board.cgi?id=jho01&action=view&gul=130&page=1&go_cnt=0
■ 이해와 감상 3
기적적인 삶의 체험
- 기형도의 이미지 분석-
이 글은 아직 끝을 보이지 않고 있다, 언제 끝날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내가 다시 기형도를 손에 잡게 되었을 때, 그 때쯤에나 그 부끄러운 종말을 보게 되려나, 한다. 그래도 언젠가는 끝이 나겠지, 싶으면서.
이 글의 맨 끝에는 얼마전, 내가 속해 있던 곳을 나오며 인사대신 늘어뜨려 놓은 꼬리말이 있다. 부끄러운 단어들이나 그냥 놓아두겠다.
우연한 기회(?)에 기형도의 시 중에서 비, 눈, 진눈깨비, 구름등의 물과 관련된 이미지가 매우 빈번하게 등장한다는 지적을 받게 되었다. 이러한 이미지들의 분석 속에서 기형도의 시편들을 이해할 수 있는 하나의 코드를 발견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 그때 나눈 말의 핵심이었다. 생각해보니, 나 자신을 기형도의 열성 팬중 하나라고 말해왔는데 그러한 발견을 왜 못하였는가라는 의문도 들고 또한 기형도의 시를 좋아하는 만큼 그의 시를 이해하고 있지는 못하다는 자책감이 들어서 나 또한 그러한 분석에 동참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사실 그것은 앞에서 말한 팬이라는 단어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나 자신이 기형도의 팬이라는 말 속에는 아마도 그의 시를 분석하기를 웬지 껄끄러워하는 마음도 또한 숨어있었던 것이리라, 원래 팬이라는 말이 그렇지 않은가, 어느 정도의 거리를 두는 것이 오히려 그의 팬이 되기는 더욱 좋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의 시를 굳이 분석하려는 노력은 하지 않았을 것이고 그의 시에서 비, 눈, 진눈깨비 등의 이미지가 많이 나온다는 생각은 했었으나 그것들이 모두 물의 변화된 모습으로서 하나의 연결고리를 가지고 있으리라는 생각은(나 자신은 이과 출신이기에 차라리 그러한 발견을 하기는 더욱 더 쉬웠을것임에도 불구하고) 전혀 염두에 두지도 않았던 것이다.
이렇게 시작한 기형도의 시편에 나오는 물의 변화된 이미지에 대한 분석은 그러나 그것을 시작하기로 마음먹는것에 비해서는 매우 어려운 작업이었다. 우선 그의 어떤 시편을 중점적으로 분석해야 하는가라는 것도 큰 문제였다. 그의 시를 상당히 좋아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시 읽기와 시를 분석하기로 마음먹고 읽는 시 읽기는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또한 그렇다해서 내가 그의 시 모두를 읽을만한 여유는 없는상황이었기에 어느 정도의 선택은 필요한것이었다. 그러한 선택을 위해서 기형도의 [입 속의 검은 잎]을 찬찬히 훑어보는 동안, 기형도의 비와 눈과 진눈깨비를 훑어내리는 동안 나는 다시 한 번의 당황스러움을 느껴야만 했다. 마음을 잡아매고 찬찬히 시를 읽게 되면 어느 정도는 시어들의 대체적인 모습이 드러나는 것이 지금까지의 경험이었는데 기형도의 비와 눈과 진눈깨비는 그 모습을 좀처럼 드러내지 않는 것이었다. 아니 아예 시 한편 안에서조차 비가 무엇을 말하는지, 눈은 왜 내리고 있는지, 진눈깨비는 왜 진눈깨비인지, 구름이 떠있는데 도대체 어쩌라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또한 시 한편 안에서는 어떻게 해석이 가능하다 할지라도 그러한 이미지의 분석으로 기형도의 시 전편에 걸친 해석의 코드를 발견하려 한다면 당연히 기형도의 시편 대부분에서 공통적인 이미지들을 나타내야 하는데 그것을 발견하기는 참으로 어려운 것이었다. 그래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을 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과연 기형도의 시 전편에 걸쳐서 비와 눈과 진눈깨비라는 것이 공통된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가라는 문제부터 시작을 한다는 의미였다. 기형도의 시 전편에 걸쳐서 비와 눈 등의 이미지가 많이 나온다고 하여서 그것이 기형도의 시를 이해할 수 있는 코드를 제공하리라고 단언하는 것은 애초에 무리가 있었다. 또한 각 시편마다 다른 의미를 띄고 있다면 이것은 나의 시도 자체에 무리가 있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 뿐이었다. 기형도의 시 전편에 빈번하게 등장하는 비와 눈과 진눈깨비 그리고 구름의 이미지들이 모두 물의 변화된 모습이라는 연관성을 가진다는 대가정 아래서 각 시편 하나하나씩을 분석해 나가는 방법이 그것이었다. 만약 각 시를 분석하면서 이미지들의 연관성을 도저히 찾을 수 없다면 그것은 나의 시도가 처음부터 무리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이 될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그런 결과를 얻는다해도 하나의 결실은 있다고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기형도의 시들에 나오는 물의 변화된 이미지가 모두 시의 중심적인 이미지는 아니라는 것이다. 기형도의 시에서 그것들이 중심적인 이미지들이라면 그것은 반드시 각 시편들에서 어떠한 공통점을 나타내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나 자신의 예를 들자면 나의 시들에서 가장 중심적인 이미지가 '고사목'인 이상 고사목이라는 제목을 가지지 않은 시들에라도 '고사목'이라는 시어가 등장할 때에는 그것이 주변적인 이미지로 등장할 수는 없는 것과 같다. 또한 그것이 주변적인 이미지가 아니라면 그것은 의도적으로 쓰였다고 볼 수 있는 것이고 그러한 의도적인 쓰임은 각각의 다른 시편이라 할 지라도 어떠한 점이지대를 형성하기 마련이라는 나의 경험에 의한 것이기도 하다.
만약 기형도의 시편들을 일통할수 있는 이미지가 바로 비의 변화된 모습에 있다면 그것은, 반대로 생각할 수도 있는 것이다. 마치 해답을 내리고 증명을 구하는 해석학적 행위와 같이 기형도의 시를 통하고 있다고 일반적으로 여겨지는 여러 이미지들을 물의 변화된 모습에 대입시키고 증명하는 것이 바로 그러한 방법이다. 그의 시에서 가장 크게 느껴지는 것은 비극적 세계인식이다. 그것은 개인적인 차원에서도 그러하고 작자의 개인적인 상처를 확대시킨 일반적인 차원에서도 마찬가지로 그러하다. 그러한 비극적 세계인식은 그럼 어디에서 왔는가, 김현은 기형도의 개인적인 상처를 크게 두 가지로 나누고 있다. 그것은 어린 시절의 가난이라는 것과 그 후의 이별이라는 것이다. 어린시절의 가난 그리고 청년시절의 사랑에 의한 이별, 이처럼 통속적인것도 어찌보면 없으리라, 누구나(?) 겪었을만한 것이고 또한 어떤이는 그것을 상처로 여기지 않는다. 새마을시대를 거친 이 사회에서 어린날의 가난정도는 훈장처럼 달고 다니는 사람들이 허다한 것이 또한 사실이다. 사랑, 그에 의한 이별이라, 그러한 기억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이 얼마나 될 것이며, 또한 그러한 것을 평생 상처로 달고 다니는 사람이 얼마나 될 것인가, 아니 적어도 그것을 가지고 세계를 비극적으로 인식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기형도에게 있어서 그러한 사건(?)들이 왜 비극적 세계인식을 건네주게 되었는가, 적어도 여기서 그러한 작자의 모습을 보고 허약한 인간의 모습이라고 말하는 것만은 피해야 할 것이다. 그러한 지적은 작자의 부모님이 나무랄 거리는 될지 몰라도 독자인 우리에게는 주제 넘은 짓이다. 우리의 몫은 과연 그가 무엇을 보았으며 그러한 두 가지의 사건으로 어떡케 작자의 세계관이 재구성되었는지를 살펴보는 것, 단지 그것뿐이다.
작자의 어린 시절의 가난에 대한 기억은 주로 김현의 지적대로 가난한 아버지와 위태로운 어머니로 대표된다. 가난하고 병든 아버지 그리고 위태로운 어머니라고 할 때, 어머니의 위태로움은 어디에서 발생하는가, 물론 그것은 아버지의 병과 가난이다. 그것이 일차적인 이유가 될 것이다, 그러나 그 뿐은 아니다. 대개의 경우 어머니라는 시어는 구원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것이 일반적이다. 구원, 안식, 보살핌의 이미지가 바로 어머니인 것이다. 그런데 어머니가 위태롭다, 왜? 그 이유는 구원하지 못하고 안식하지 못하고 보살피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니 그렇게 단정짓는 것은 나중에 해야 할 말일지도 모른다. 여기서는 그저 구원과 안식과 보살피지 못 할지도 모른다, 정도로 생각하자, 김현은 그의 해설에서 기형도와 같은 비극적인 세계인식을 보여준 예로서 이성복을 말하며 "아무리 비극적인 세계관에 침윤되어 있더라도, 대부분의 시인들은 낙관적인 미래전망의 흔적들을 보여준다. 이성복이 그렇고,"라는 말로 기형도와 이성복의 차이를 말하고 있다. 그런데 두 시인의 시에는(이성복의 경우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와 『남해금산』에 한정지어서 말한다) 공통적으로 어머니가 등장한다. 김현이 이성복의 시에서 낙관적인 미래전망의 흔적을 본다면 그것은 바로 '어머니'라는 시어가 가지는 이미지에 그 실내용이 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기형도의 시에도 어머니가 등장한다. 그런데 왜 기형도의 어머니는 구원의 이미지를 가지지 못하고 낙관적인 미래전망을 보여주지 못하는가, 아니 그것은 논외로 하자. 기형도의 어머니는 이성복의 어머니와 어떤 차이를 가지고 있는가, 이것이 우리가 살펴봐야 할 가장 중요한 문제중 하나일 것이다. 기형도의 어머니는 무척 힘에 부쳐하고 있다. 기형도의 어머니가 구원의 이미지를 가지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이미지를 가짐에도 불구하고 그의 시 안에서의 부정적 이미지들과의 싸움에 힘겨워하고 있고, 좀더 비약한다면 그의 시를 가지고 재구성한 작자의 실생활 속에서는 작자의 가족들의 구원에 힘겨워 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기형도의 어머니는 일차적으로 아버지의 가난과 병으로 인하여 위태롭다고 할 수 있지만 더 자세히 말한다면 그것으로 인한 그의 가족들의 단절에 힘겨워 하고 있는 것이다. [위험한 家系 1969]라는 매우 사실적으로 보이는 시의 어머니와 누이의 대화를 살펴보면 이러한 모습은 매우 극명하게 드러난다. '검댕이가 묻어나'오는 작자와 '심지를 좀 잘라내'려는 누이와 '약값을 줄일 순 없'는 어머니의 모습은 아버지의 병과 가난이 이들의 가정을 어떡케 나누어 놓았는지를, 어머니가 왜 구원이 되지 못하고 위태로운 어머니가 되었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그의 청년시절의 사랑에 의한 이별은 무엇을 보여주는가, 그의 이별에 대한 상처를 보여주는 시편은 직접적으로 두편이 존재한다. [그집 앞]과 [빈집]이 바로 그것이다. 두 시의 제목은 공통적으로 '집'이라는 단어를 가지고 있다. 집, 우리가 고등학교때 배운 분류에 의하면 일차집단이며 모든 집단의 가장 근원적인 존재이다. 그것은 개방성과 폐쇄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집은 식구에 의해서 가정을 이루고 가정은 타집단에 비해 자체적으로는 매우 개방적이며 그러나 타 집단에 대해서는 의외의 배타성을 지니고 있다. 그렇다면 기형도의 시에서 집이란 무엇인가? 나는 오히려 작자가 말하는 집을 작자 자신이라고 본다. 여러시편에서 보여주는 자신의 내면과 집은 특이한 공통점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앞의 작자의 어린시절을 말하는 시의 제목이 [위험한 家系.1969]이기도 하지만 그 가계는 바로 자신의 집을 바라보는 작자의 마음이며 한편으로는 작자의 내면, 그 자체이기도 한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데는 어떠한 현실이 작자의 지각을 통하여 인식되고 또한 그 지각된 것이 글이라는 매개체를 통하여 시로 재구성된다는 측면에서 볼 때, 그의 집이 그의 마음속에서 재구성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그의 시편이라는 점에 있어서는 누구의 시에 있어서도 감히 그러하다고 말할 그런 당연한 것이지만, 바로 그것이 그의 시편들을 이루는 가장 기본적인 모티브가 된다는 면에서는 더욱 더 그러하다 할 것이다. 그의 어린 시절의 가난이라는 상처가 하나의 집으로 표현된것과 마찬가지로 그의 청년기의 이별이라는 상처또한 집으로 표현되는 것이다. 그 집은 기형도의 내면이고 또한 그 안에서 엉키는 자신과 누이와 어머니의 모습은 바로 작자의 숨은 내면 그대로인 것이다. 빈집도 또한 마찬가지이다. 작자가 빈집에 자신의 사랑을 가두는 것이 아니라, 작자가 자신의 사랑을 집(내면)에 놓아두고 분열되는 것이다. 이러한 분열에 의한 자기자신을 바라봄이라는 행위에 이르러서야, 이 시 전반에 흐르는 세계에 대한 모멸과 비난과 비관적 바라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모두 조소가 아닌 안타까움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이유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김현의 [입 속의 검은 잎] 해설에 '영원히 닫힌 빈방의 체험'이라는 제목을 걸어 두었다. 그렇다. 기형도의 내면은 바로 영원히 닫힌 빈방, 아니 오히려 영원히 닫힌 빈집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체험'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자신이 자신을 체험하는 일은 존재하지 않는다. 마치 소크라테스를 연상하게 하는 이러한 문장은, 그러나 그것이 신과 같은 도피처(?)를 선택하지 않는다는데서 그 차이가 있다. 신도 아니다, 어머니도 아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남는가, 김중식이 '시인은 神 없는 광신자'라고 말했을 때, 너무나 정확히 자신을 바라 볼 수 있는 이에 있어서, 이와 같은 말에 무리가 있다한다면 '선천적으로 또는 후천적으로 광신자가 될 수 없는 사람'에 있어서 그의 선택은 어떠한 것이 남아있을것인가, 작자는 자신을 체험한다, 아무런 믿음도 없이.
나는 기형도의 시 전편을 뚫고 있는 하나의 맥을 잡으라 한다면 '고립'이라는 한 단어로 표현하고 싶다. 그는 '검댕이가 묻어나'오는 자신도 '심지를 좀 잘라내'려는 누이도 또한 '약값을 줄일 순 없'는 어머니도 모두 받아들일 수 없다는 의미에서 최소한의 사회인 집과의 고립을 가장한 자신과의 고립을 느끼며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감정이라 할 수 있는 사랑을 자신의 내면에 가두고 나오는 순간 또 다른 자신과의 고립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 두가지의 고립은 그러나 결국에는 모두 자신과의 고립으로 만난다는데 그 기형도적 특징이 있다. 그는 이 모든 것을 밖으로 털어 놓고 심지를 잘라내자는 누이를 욕하지도, 그렇다고 약값을 줄이자는 어머니에 동의하지도 않는다 그렇다해서 이 모든 모순의 근본을 사회로 돌리지도 않는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이 모든 고립은 결국 자신을 향하게 된다. 작자의 세계인식이 비관적이라고하나, 이것은 차라리 작자의 자기인식이 비극적이고, 또한 이러한 자기인식이 시로 표현되는 과정에서 재구성되어, 하나의 세계인식으로 자리잡았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할지도 모른다.
이러한 고립은 그러나 안전하다. 자신이 자신을 체험한 작자에게 있어서 자신이 자신을 체험하는 것은 그 얼마나 끔직할것인가, 또한 자신이 자신을 체험하지 않기 위해서는 얼마나한 노력이 필요했을것인가, 그것은 거의 기적적인 일일 것이다. 자신을 체험한 이가 자신을 체험하지 않기 위해서 노력하다. 그렇다면 그의 고립이란 결국 자신과 자신의 고립이기도 한 것이 아닌가, 그렇다, 그렇기에 그의 고립은 절망인 동시에 하나의 구원인 것이다. 여기에 기형도적 고립의 양면성이 존재한다. '나는 나의 진실을 보았다, 그러나 원치 않는다. 나의 진실을 본다는 위대한 결과는 그러나, 곧 나의 소멸을 의미하는 것이다.' 위대한 몰락인 것이다, 마치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이 인간을 우주의 쓰레기로 만드는 인간이성의 위대한 자멸인것과 근사하게.
지금까지의 논의에서 나는 기형도의 시편들에서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하나의 세계관을 끌어내었다. 그것은 내가 앞에서 언급하였던 '기형도적 고립'이라는 것으로서 어린시절의 위태로운 가정과 청년시절의 이별을 통하여 발견하게된 자기자신과의 고립, 절망이었으나 한편으로는 살아갈 수 있는 구원의 의미도 띄게 되는 그러한 양면적인 고립이다. 이러한 고립의 양태는 그의 시에 사용되는 시어들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이끌어낸다. 기형도적 시어(이러한 쓰임이 가능하다면)는 이러한 고립, 분열, 그로인한 찬찬한 바라봄의 가능함에 그 특징이 있다 할 것이다. 여기서 찬찬한 바라봄이라는 것은 앞에 쓰인 '자신을 체험한다'라는 문장과 연관이 있다. 대개의 사람들은 자신을 체험하지 못한다, 그러나 작자는 자신을 체험하는 끔찍한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자신의 체험은 '자신을 찬찬히 바라봄'을 가능케 한다. 마치 다른 이의 일대기를 찬찬히 바라보듯이 자신의 삶을 찬찬히 바라보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찬찬한 바라봄은 또 하나의 기형도적 시어의 특성을 완성시킨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내면에 대한 또 하나의 인격성의 부여이다. 자신의 '살아온 내용'인 '몇 장의 사진을 들여다'보며 '여인숙과 다름없구나'(추억에 대한 경멸)라고 여기는 작자의 모습이나 "내 희망을 감시해온 불안의 짐짝들에게 나는 쓴다/ 이 누추한 육체 속에 얼마든지 머물다 가시라고/ 모든 길들이 흘러온다, 나는 이미 늙은 것이다"라고 말하는 작자의 모습에서 자신의 내면에 또하나의 인격성을 부여하는 이러한 의인법(?)이 하나의 수사법적인 차원이 아닌, 작자의 자기인식 그 자체임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이제 이러한 기형도적 세계관이 그의 어떤 시어를 통해서 나타나는지, 반대로 말하자면 그의 어떠한 시어가 이러한 기형도적 이미지의 드러냄을 통해 그의 세계관을 나타내는지를 알아보도록 하자.
[입 속의 검은 잎] 그의 첫 시집이자 마지막 시집의 처음에 위치하고 있는 그의 작품은 '안개'이다. 1985년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이기도 한 이 시는 그러한 이유 때문이었는지, 그의 여타 시와는 약간의 차이를 나타낸다. 김현이 이성복의 시집 남해금산을 말하며 '이성복적 풍경'이라는 말을 하였는데, 기형도 또한 그의 대부분의 시들은 시 하나로서의 독립성보다는 각 시들 사이 풍경이 더욱 중요시 된다. 기형도의 시 또한 까닭모를 좌절과 침묵 그리고 바라봄이 튀어나오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시는 하나만을 뗴어놓고 보았을 떄는 이해가 지극히 어려워진다. 그러나 '안개'만은 다르다. '안개'를 살펴보면 그의 시중에서 예외적으로 내러티브적 구성을 지니고 있으며 등장하는 시어들의 성격또한 명료하게 드러난다. 안개에 나오는 중심시어인 안개는 존재자간의 고립성을 나타내며, 또한 공장이라는 시어에서 알 수 있듯이 현대의 기계문명에 의한 익명성의 사회적 억압과 그로 인한 존재자간의 고립이 바로 안개의 본 모습인 것이다. 기형도의 시 중에서 이처럼 성격이 명료한 시편을 만난다는 것은 그러나 기대하지 말아얄 할 행운이다. 아마도 독립적인 한편의 시로서 승부를 보아야 하는 신춘문예라는 외적 상황이 이 시의 형태에 영향을 끼치지 않았는가라는 의문을 가져보나 알 수 없는 일이다. 위에서 말한 기계문명에 의한 익명성의 사회적 억압, 폭력 그리고 그로인한 존재자간의 분열을 나타내는데 있어서 안개보다 더 그럴듯한 시어를 찾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 고등학교때의 사회시간을 기억해보면 알겠지만 공단이란 물이이 있는 곳을 찾아가기 마련이고, 그렇기에 큰 공단 주위는 늘 안개지대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안개속에서 공장을 찾아가는 사람들의 모습. 기형도는 이러한 모습을 폐수의 고장이라고 표현하였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기형도의 다른 시편에 있어서 안개라는 시어를 찾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다. 내 기억에 있어서는 이후의 어느 시에도 안개가 나오지 않는 것으로 기억한다. 화자를 감싸는 폭력의 근원이 공장이라는 기계화된 문명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근본적으로 기형도에 있어서 가장 큰 문제는 사회적 폭력이나 사회와의 고립이 아니었다. 그가 안고있는 문제는 그의 개인적인 문제이며 또한 그 방향성도 내적으로 향한다. 그는 자신의 삶으로부터의 거리감과 그에 의한 자신의 내면적인 분열이 가장 큰 문제였고 그렇기에 그에 대한 방향성 또한 내적으로 향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렇다해서 기형도의 안개가 전혀 의미를 가지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그의 안개는 후에 나오는 여러 물의 변화된 이미지와 어떤 연관성을 가진다. 그것은 바로 존재자간의 고립이라는 면에 있어서이다. 단지 여기서 존재자란, 인간과 인간이 아닌 작자 자신의 내부에 부여한 여러 인격성들간의 고립이다. 과거와 현재의 단절, 자신의 몸과 여러 감정들간의 단절, 더불어 여러감정들 그 사이에 있어서의 단절. 이러한 단절에 의한 고립의 이미지는 안개를 비롯하여 눈, 비, 진눈깨비등에서도 공통적으로 발견된다. 그는 어디로 갔는가? 흘러가버린 기쁨은, [길 위에서 중얼거리다] 그는 자신의 과거를 곧잘 흘러간다라고 표현한다. 그렇다 시작단계의 시쓰기를 하는 이들부터 유행가 가사까지 시간을 흘러간다라고 표현하는 것은 일상적이다. 그러나 기형도의 흘러간다라는 표현은 약간의 차이가 있다. 흘러간다는 것은 움직인다는것이고 지정된 방향성은 아니었어도 뒤에 돌아보면 어떤 방향이 있기는 했을 것이다. 그러나 눈, 비, 진눈꺠비는 어떠한가, 이것들은 흐르지 않는다. 어떤 방향을 향하지 않는 것이다. 그저 수직급강하를 행할 뿐이지만, 기형도의 눈, 비는 이러한 수직급강하의 방향성도 가지지 못한다. 그가 자신의 지난 삶을 길위의 탈것에 몸을 실은 것으로 표현하고 흘러가는 것으로 표현하는데 반해서 지금의 그는 자신을 흘러가거나 길위에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만약 길 위에 있다 하더라도 그 길은 이미 방향성을 지니지 않았다는 의미에서 길이 아닌 것이다. 그는 어디론가 가기위해 걷고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이러한 무방향성의 이미지는 그대로 그의 눈과 비 그리고 진눈깨비에 대입된다. 그의 눈, 비는 자신 내부와의 단절을 의미하고(차라리 다른 이와의 고립은 이차적인 의미이다) 또한 방향성도 지니지 못한다. 이러한 단절과 눈비로 점철된 삶은 썩을 수밖에 없다. 곰팡이가 피어날 수밖에 없는것이고 어둡고 축축한 세계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여기서 눈과 비를 하나의 덩어리로 묶어서 처리하였는데, 이것에 대해서는 조금 후에 다시 설명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일단 여기서는 눈비 등을 하나로 묶어서 그것들과 반대되는 이미지로 등장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보도록 하자. 그의 시 [어느 푸른 저녁]에 등장하는 빈 통로를 무수히 감추고 있는 공기의 이미지나 [위험한 가계]에 등장하는 '빙판 밑으로 흐르는 푸른 물'의 이미지와 같이 그의 시에서 이러한 고립에 반대되는 이미지는 자주 등장하지는 않지만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그의 눈비와 대조를 이루는 이미지는 '소통'의 의미를 가진다. 단절의 반대되는 이미지 이므로 소통의 이미지가 가져진다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수도 있을것다. 그러나 소통의 이미지라고 이렇게 묶어서 처리하기에는 이 두가지 이미지도 큰 차이를 지닌다. 공기는 차라리 작자의 내면을 표현하는 '축축한, 곰팡이, 어두운' 등과 반대되는 이미지라고 보는 것이 올바를지도 모른다. 이것은 일차적으로 눈비의 반대되는 이미지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눈비의 반대되는 이미지는 '빙판밑을 흐르는 푸른 물' 단 하나뿐이라고 말을 할 수도 있는데 [위험한 가계]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아버지, 여전히 말씀도 못 하시고 굳은 혀. 어느 만큼 눈이 녹아야 흐르실는지."라는 부분에서 알 수 있듯이 '눈이 녹다'또는 '흐르다'의 이미지가 또 한차례 등장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눈과 대비되는 이미지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흐르는' 그 무엇인가가 되어야 할것인데, 불행하게도 그의 시에서 이러한 흐르는 무엇으로 등장하는 것은 빙판 밑으로 흐르는 푸른 물이 유일하다. 여기서 차라리 그에게는 그러한 눈비와 대조되는 이미지를 지닌 시어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해본다. 아마도 그의 시를 철저한 비극적 세계관이라 말하는데에는 이러한 이유가 있을것이다.
그의 시가 철저한 비극적 세계관에 기초하고 있고 그의 시의 그러한 비극성을 나타내는 시어가 눈과 비 그리고 진눈깨비 또는 구름이라고 하였을 때, 만약 그가 지닌 시어중에서 이러한 비극적 이미지의 시어에 반대되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아니 차라리 철저한 비극적 세계관이라는 말에서 그에게 그러한 시어가 있을 수 없음을 눈치채야 했을런지도 모른다) 그에게서 눈, 비와 대조되는 시어를 찾으려는 노력 자체가 헛것일 것이다.
출처 : 밀렵꾼의 시 읽기
http://munhak.somegate.com/topic.php?topic_uid=65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