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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도현~임화

이성복 - 그날

작성자두레박|작성시간09.09.22|조회수2,275 목록 댓글 0

그 날

이성복

 

그 날 아버지는 일곱 시 기차를 타고 금촌으로 떠났고

여동생은 아홉 시에 학교로 갔다 그 날 어머니의 낡은

다리는 퉁퉁 부어올랐고 나는 신문사로 가서 하루 종일

노닥거렸다 전방은 무사했고 세상은 완벽했다 없는 것이

없었다 그 날 역전에는 대낮부터 창녀들이 서성거렸고

몇 년 후에 창녀가 될 애들은 집일을 도우거나 어린

동생을 돌보았다 그 날 아버지는 미수금 회수 관계로

사장과 다투었고 여동생은 애인과 함께 음악회에 갔다

그 날 퇴근길에 나는 부츠 신은 멋진 여자를 보았고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면 죽일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 날 태연한 나무들 위로 날아 오르는 것은 다 새가

아니었다 나는 보았다 잔디밭 잡초 뽑는 여인들이 자기

삶까지 솎아내는 것을, 집 허무는 사내들이 자기 하늘까지

무너뜨리는 것을 나는 보았다 새점 치는 노인과 변통(便桶)의

다정함을 그 날 몇 건의 교통사고로 몇 사람이

죽었고 그 날 시내 술집과 여관은 여전히 붐볐지만

아무도 그 날의 신음 소리를 듣지 못했다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

 

     

❒ 핵심 정리

✸갈래: 전 18행의 단연시, 자유시

✸운율: 내재율

✸성격: 허무적, 현실 비판적

✸특징: 자유연상의 파노라마 기법, 이미지의 연쇄 기법, 모순 어법

            (붐볐지만’ ‘듣지 못했다’, ‘병들었는데’ ‘아프지 않았다’)

✸제재: 부조리한 삶의 여러 단면과 초상

✸주제: 피폐하고 타락한 현실의 고발, 일상의 병든 의식과 소외에 대한 각성.

            궁핍하고 타락한 현실적 삶의 비판

✸출전: ‘뒹구는 돌은 언제 잠깨는가’, (문학과 지성사, 1980).

 

 

 

❒ 이해와 감상 1

이성복 시인은 독특한 상상력에 의한 자유연상 기법을 시에 도입하여, 초현실주의 시에서와 같이 현란하고 난해한 이미지를 빚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의 시집 <뒹구는 돌은 언제 잠깨는가>는 이러한 자유연상 기법에 의한 이미지의 연쇄라는 표현기교상의 시적 실험이 이루어지고 있는 시들이 수록되어 있다. 그는 개인과 가족의 과거의 온갖 누추한 기억으로부터 비현실적이고 낯선 이미지들을 연쇄적으로 길어와서, 현재의 자신을 성찰하고 왜곡된 현실의 불행을 고발한다. 그리고 나서 이러한 개인사에 관계된 소재를 보편적이고 공적인 차원으로까지 그 의미를 확대시킨다. 이러한 시적 방법을 통해 그는 ①세계는 고통스러운 곳이며, 삶의 유일한 핵심은 없다. ②모든 사물은 관계적으로 존재한다는 주제 의식을 드러낸다. “그날”은 바로 이 자유연상 기법을 도입한 이성복 시인의 초기 대표작이다.

이 시는 아버지여동생어머니의 상황, 그리고 내가 관찰하는 세계가 자유로운 연상기법으로 속도감 있게 그려지면서 시상이 이어지고 있다. 이 시는 시인의 상상력에서 태어난 독특한 이미지들의 연쇄로 이루어져 있다. 이미지는 이미지의 꼬리를 물고 전개된다. 이 연쇄된 이미지들 사이에서는 무관한 듯 보이지만 사실은 연결 고리를 가진다. 이렇게 이미지의 돌발적이고 우연한 연결을 시도하면서 이미지를 구조적으로 중층화하는 시적 기법으로 삶은 고통스럽고 부조리하다는 주제를 드러내고 있다. 피폐하고 타락한 현실을 비판하고 있으며 허무적인 세계인식을 보여준다.

연상에 의한 시상의 전개 과정을 재구성하여 의미소(意味素)를 축출해보면 다음과 같다.

아버지와 누이는 각자 어디론가 떠나고 어머니는 다리가 부어 있다. 그것과 상관없이 나는 별일 없는 듯 사람들을 만나고 의미 없이 노닥거린다. 대낮부터 창녀들이 거리를 서성인다. 나는 평범한 아이들이 창녀가 되는 상황을 연상한다. 아버지와 사장과의 갈등은 애인과 음악회에 간 동생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나는 퇴근길에 부츠 신은 여자를 보며 전혀 엉뚱한 생각을 하고 살의를 느낀다. 일상의 무심함 속에서 새는 새가 아니고, 여인들은 자기의 삶을 솎아 내고, 사내들은 자신의 인생까지 허물어뜨린다. 나는 새점 치는 노인과 변통의 다정함을 떠올리기도 하고 교통 사고로 인해 여러 사람이 죽은 사건을 생각하기도 한다. 사람들은 자신의 향락을 즐기기만 한다. 그날의 신음을 아무도 듣지 못하며, 모두 병들었는데도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

이 시의 주제는 마지막 두 행에 담겨 있다. 많은 사람과 사건들이 연쇄적으로 일어난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신의 일 이외에는 관심을 갖지 않는다. 무관심은 비정한 세계와 통하며, 이 과정에서 사람들은 소외에 빠져 있다. 소외는 심각한 질병이지만 아무도 그것이 아픔인지를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그날’은 바로 이러한 부조리한 상황의 상징적 시간이며, 불감증에 걸린 오늘의 우리이다. 시적 화자인 나의 눈에 들어온 주변 사람과 사물들에 대한 관찰에서 시작된 이 시는 속도감 있는 이미지의 연쇄를 통해, 우연하게 순간적으로 일어나는 일들의 비정함과 그 속에서 소외당하고 있는 구성원들의 현실적 정황을 실감나게 보여준다. 서로가 서로를 소외시키는 인간적 관계의 결핍을 보여줌으로써 ‘그날’의 부조리한 상황을 상징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무감각하게 마비된 병든 세상과 삶, 피폐하고 타락한 현실에 대한 초상을 보여주는 것이 이 시의 기본적 의도이다. 우리를 끈질기게 괴롭히는 병든 현실을 고발하고 그 병듦을 깨닫지 못하는 현대인의 마비되어 가는 의식을 각성시킨다.

이 시는 자유연상의 파노라마 기법을 동원한 산문시이다. 시의 성격은 허무적, 현실 비판적이며. 제재는 부조리한 삶의 여러 단면과 초상이다. 이미지의 연쇄 기법과 함께, ‘붐볐지만’ ‘듣지 못했다’, ‘병들었는데’ ‘아프지 않았다’와 같은 모순 어법을 통해 ‘낯설게 하기’의 시 형식상의 방법이 동원되고 있다. ‘피폐하고 타락한 현실의 고발, 일상의 병든 의식과 소외에 대한 각성’ 쯤을 주제로 볼 수 있다.

[상징사전]

 

 

 

❒ 이해와 감상 2

이성복은 평상인들을 뛰어넘는 특유의 상상력에 의한 자유 연상의 기법으로 등단부터 주목을 받아오고 있는 시인이다. 현실과 직결되며 현재의 불행을 구성하는 온갖 누추한 기억이 연쇄적으로 이어지는 연상은 초현실주의 시를 방불하게 하는 현란한 이미지를 빚어낸다.

이처럼 현실과 밀착된 기억에서부터 창출해내는 비현실적인 이미지는 바로 왜곡된 현실을 고발하는 시적 방법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그러므로 그의 시는 지극히 개인적인 소재를 가지고도 보편적이고 공적인 차원으로까지 그 의미를 확대시킬 수 있다. 삶의 범주 차원에서 그의 시가 암시하는 것은 모든 사물은 상관적으로 존재할 뿐 아니라, 유일한 핵심은 없다는 점이다. 이 시는 연상의 원리를 특징으로 하는 이성복의 초기시 대표작이다.

시적 화자의 연상에 의해 그려지는 일상의 소묘는 무감각하게 마비된 병든 삶의 모습을 담담하게 드러내고 있다. 그의 시에서 가족이란 삶의 기본 단위로서 중요한 의미를 갖지만, 이 시에서 보는 것처럼 초기시에서는 주로 피폐하고 타락한 현실의 초상을 보여 주는 역할을 한다. 가장인 아버지의 움직임에서 출발한 연상 작용은 여동생과 어머니에 이어, '나'에까지 이른다. '하루 종일 노닥거렸다'에서 아버지와 어머니의 고단한 삶에 비해 무기력하게 소일하는 화자 자신의 자괴감을 엿볼 수 있다. 젊은 그가 한가롭게 노닥거리는 행동은 한반도의 분단 현실에 비추어 전방의 무사함을 연상시킬 뿐 아니라, 불안한 휴전 상태가 삶의 조건이 되어 있는 현실은 전방이 무사하기만 하면 세상은 완벽하다는 아이러니를 유발시킨다.

이러한 연상의 고리는 통치의 미비함을 무마하고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전시 상황을 강조하던 당시의 정치 현실에 대한 은밀한 비판을 이루기도 한다. 완벽한 세상이라면 없는 것이 없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뒤이어 나타나는 창녀들에 대한 연상을 통해 화자는, 이 현실이 없어야 할 것조차 있는 부조리의 세상임을 강조한다. 게다가 더욱 섬뜩하게 이어지는 '몇 년 후에 창녀가 될 애들'의 연상은 미래에 대한 비관적인 전망으로까지 연결되는 강한 현실 부정에서 비롯된다.

집일을 돕는 애들의 연상은 가장인 아버지의 피로한 일상으로 다시금 이어지고, 여동생의 데이트에 대한 상상에 이어 '멋진 여자'를 본 기억으로 가 닿는다. 자신의 잘 풀리지 않는 사랑에 대해 골똘히 생각한 끝에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면 죽일 수도 있을' 것이라는 과격한 상상을 하기도 한다. '완벽한 세상'에서 태평스럽게 노닥거리는, 그러나 전혀 편하지 않은 '나'의 현실은 '태연한 나무들 위로 날아오르는 것'들이 모두 다 새가 아니라는 생각에 이르며, '잔디밭 잡초 뽑는 여인들이 자기 / 삶까지 솎아내는 것'과 '집 허무는 사내들이 자기 하늘까지 / 무너뜨리는' 것을 발견하기도 하는 등 곤고한 사람들의 삶에 가 닿는다.

그러다가 '새점치는 노인과 변통의 / 다정함'을 떠올리기도 하고 교통 사고로 인해 여러 사람이 죽는 사건을 떠올리기도 하지만, '시내 술집과 여관은 여전히 붐볐'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신의 향락을 즐기기만 할 뿐, 죽어가는 사람의 신음 소리를 듣지 못한다며 씁쓸해 한다. 결국 화자는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라는 마지막 시행으로 시상을 마무리하며 자신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 궁핍과 퇴폐의 현실적 삶 속에 살아가는 존재일 뿐 아니라, 이 현실이 얼마나 부조리한 곳인지 역설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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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해와 감상 3

하나의 연으로 되어 있는 「그날」은 하나의 촉매에 의지해 모든 상상이 촉발된다. 그것은 1행의 <아버지의 떠남>이다. 아버지가 떠나자 여동생은 <갔다.> 떠나고 가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다리>다. 그래서 어머니의 다리는 <퉁퉁 부어올랐다.> 그리고 그들에 비해 나는 신문사에서 <노닥거렸다.> 노닥거림은 무사한 것이고 없는 것이 없다. 창녀들도 있다. 창녀가 될 애들도 있다. 그런 식으로 시는 다닥다닥 연결고리를 물고 늘어지는 이미지의 연쇄이다. 이 다닥다닥 연결고리에 의해 맺어진 이미지들은 우리 삶의 무감각한 일상을 연상케 한다. 시인은 시집의 후기에서 "우리가 이 세상에서 자신을 속이지 않고 얻을 수 있는 하나의 진실은 우리가 지금 <아프다>는 사실"이라 했다. 이 <아픔>은 곧, 아버지가 떠나 사장과 다투고, 여동생이 학교에 갔다가 애인과 함께 음악회에 간일. 그리고 자신이 노닥거린 지리멸렬한 일상이다. 그러나 이 <아픔>을 인식하고 있는 이는 역설적이게도 없다. 아픔을 모르고 있기 때문에 <아픈>것이다. 아픔이 없기 때문에(모르기 때문에), 전방은 무사하고, 세상은 완벽하며, 없는 것이 없다. 시인은 <없는 것이 없다>라며 이중으로 부정하고 있다!! 무언가 부재하고 있지만 그것을 <아는>이가 없는 것이다. 한 폭의 낯선 풍경화처럼 우리의 일상은 이제 너무도 고요하다. 쓸쓸하다. 쓸쓸함마저 소외되었다. 그리하여 대낮부터 역전에서 서성거린 우리 모두는, 창녀이며, 아이들은, 장차 창녀가 될 아이들이다. 병들어 있는 이들과 병들어 가는 이들만이 광장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시는 9행에서 다른 양상으로 전개된다. 그것은 <부츠 신은 멋진 여자를 보는 것>으로부터 비롯된다. 부츠 신은 여자를 보고 시인은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면 죽일 수도 있을 거라> 생각한다. 성적 에너지인 리비도가 발생한 것이다. 리비도는 충동이며 환호이다. 그것은 죽어있는 용 그림에 눈을 찍는 일이다. 아픔을 망각한 광장에 던지는 파문인 것이다. 살의(殺意)는 죽음을 넘어서 다시 아픔과 맞서는 삶의 욕망을 이야기하게 한다. 곧이어 날아오르는 것은 다 새가 아니었지만 그것들은 또한 비상의 욕망을 품고 있다. 새의 생명력을 지니지 못하고, 자신의 의지로 날아오르는 것이 아닌, 기계 몸의 비행기일지라도, 그것들은 날고 있다. 그래서 잡초 뽑는 여인들은 그 일이 결코 끝나지 않을 일임을 알지만, 어느 한 순간은 강한 의지로 한 움큼, 와락 잡초를, 자기 삶까지 솎아내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집 허무는 사내들은 자기의 하늘이랄 수 있는 자신의 육체까지 무너뜨리며 살고 있다. <나는 보았다>의, 시인이 본 또 다른 모습은 <새 점 치는 노인>과 <변통의 다정함>이다. 노인이 자신의 남은 생을 점쳐보는 일은, 시간이 흐르는 데로 방기하지 않는 것이며, 똥 누는 행위는 힘겨웁지만 배설하고자 하는 욕망이 있으므로 오히려 다정해진다. 이 두 행위는 미약하나마 무언가를 갈구하는 행위이다.

그러나 9행부터의 이 삶의 욕망들은 결국 깃발의 욕망, 분수대의 욕망 이상으로는 벗어나지 못한다. 지상의 매듭에 걸려 결국 비상하지 못하는 것들의 욕망이다. 서정주의 <추천사>가 떠오르는가? 그렇다. 결국 서(西)으로 가는 달 같이는 갈 수 없는 그네 위의 춘향이다. 분명한 것은 춘향은 자신이 갈망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날」의 광장에는 그 갈망 의지가 거세되어 있다. 또한 분명한 것은 아버지와, 여동생과 어머니, 그리고 역전의 창녀들인 모두는 그네가 아니며, 깃발이 아니며 분수대가 아니다. 즉 생명력이 내재해 있는 존재들인 것이다. 그러기에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라는 마지막 행은 진실로 아프게 다가온다. 시인은 이 마지막 행에서 직접 칼을 들어 우리 일상을 후벼 파는 것이다. <교통사고로 몇 사람이 죽은 것>을 TV로 보며 밥반찬으로 삼고 있는 동안, <시내 술집과 여관>을 서성이는 동안, 우리의 삶은 한 복판에서부터 썩어 들어가는 것이다.

목이 꽉 막힌 것 같은 느낌으로 시를 읽었다. 행과 행을 읽을 때 분명한 휴지를 두어 읽어야 한다는 의식이 나에게는 서릿발처럼 박혀있기에, 시를 더듬거리며 읽을 수밖에 없었다. 불규칙적인 행갈이 때문이다. 시인은 시 읽기의 괴로움을 단순히 통독하는 차원에서마저 요구하고 있었다. 가령 "낡은 / 다리는", "종일 / 노닥거렸다", "없는 것이 / 없었다", "어린 / 동생을" 등등

<낡은>, 다음의 휴지가 <다리는>이라는 시구로 이어지기까지, <없는 것이>라는 시구 이후 한참 쉰 다음 <없었다>라고 발음하는 것은 결국 독자에게 말 더듬기를 요구하는 것이다. 이러한 행갈이는 위에서 이야기했듯이 삶이 죽은 상황에 대한 시인의 의식적인 거부 행위이다. 또한 독자에게 주는 아이러니적 암호문이다. "너 아프지 않냐?"라고 물어서는 결코 자신이 아픈 것을 모르는 불감증 환자들에게 던지는 시인의 간절한 마음이다. 시인이 부정하는 것은 흘러가는 것이며, 왜 흘러가는지 모르고 흘러가는 것이다. 날아가는 것은 모두 새라고 인식하는 것이며 잡초를 뽑으면서도 오로지 잡초 뽑기에도 열중하지 못하는, 열망이 모두 식어버린 인간 군상의 모습이다. 그것은 시를 읽고 있으면서도 자신이 시를 읽고 있는지 조차 의식하지 못하는 우리의 모습이기도 하다. 시인은 일반적인 문법을 파괴하여 행갈이를 함으로써 그러한 타성을 해체하고 있는 것이다.

 

시집『뒹구는 돌은 언제 잠깨는가』을 살펴보면 시기를 지칭하는 낱말중에 유독 “그”라는 단어가 많음을 알 수 있다. 「그날」다음의 시는 「그해 여름이 끝날 무렵」이고 그 다음 시는 「그해 가을」이며 그 다음 시는 「그날 우리 아침들의 팔다리여」이다. 여기서 우리는 “그”라는 낱말의 의미를 추측해 낼 수 있는데 그것은 어떤 특정한 무엇이 아니라 불특정하게 지속되는, 일상의 모습이다.

이제 「그날」이 언제인지 알 수 있게 되었다. 「그날」은 시가 씌여진 70년대의 유신정권하의 그날이 아니다. 「그날」은 오늘이다. 그리고 내일이며 세끼 밥으로 견뎌온, 모든 어제이다. 아픔을 아픔으로 알지 못하고 욕망마저 자동화되어버린 불감증의 날인 것이다. 우리가 「그날」이 70년대 폭압의 시대라고 가정하고 안심하는 순간 우리는 <나타(懶惰)와 안정>에 또 다시 속는 것이다. 모두가 병들었던 날은 지나간 시대의 것이라고, 그날의 아픔을 망각하는 순간 우리는 처절한 아픔을 격어야 한다. (신음소리마저 듣지 못한 채로....),(... 아픔이 어디에서 연유했는지 모르는 채로...), (아니, 아픔이 있는지조차 모르는 채로!!!) 그리고, 「그날」의 끝은 우리가 「그날」이 언제인가를 아는 날로부터 시작할 것이다.

[http://tuesdayis.egloos.com]

 

 

 

 

 

❒ 이해와 감상 4

1980년 출판된 이성복의 첫시집 《뒹구는 돌은 언제 잠깨는가》에 수록되어 있다. 이성복 특유의 독특한 상상력에 의한 자유연상의 기법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일상의 단면들이 연쇄적으로 이어지는 연상원리에 의해 초현실주의 시와 같은 비현실적인 이미지를 창출함으로써, 현실비판능력을 상실한 채 무감각하게 마비된 병든 삶의 모습을 담담하게 드러내 보여준다.

전18행 단연으로 이루어진 자유시로 내재율을 지니고 있다. 시의 제재는 개인적인 일상의 어느날이며, 주제는 궁핍하고 타락한 현실적 삶의 비판이라고 할 수 있다. 현실과 직결되며 현재의 부조리한 삶을 구성하는 일상의 온갖 누추한 기억들이 시적 화자의 연상에 의해 비유기적으로 그려지는 가운데 무의식 속에 교묘하게 연결되는 독특한 이미지를 빚어냄으로써, 왜곡된 현실을 고발하는 시의 사회적 기능을 획득한 현실주의적 서정시이다. 표현상의 특징으로는 풍요한 자유연상기법을 들 수 있다.

독특한 이미지의 연쇄로 이루어진 이 시는 일반적인 서정시와는 달리 이미지들이 유기적으로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지 않다. 일정한 핵심이 없이 돌발적이고 우연적인 관계에 의해 연결된다. 아버지의 평범한 일상에서 시작된 시적 연상은 여동생과 어머니, 그리고 '나'에게로 이어진다. 연상에 의한 이미지는 꼬리를 물고 전개된다. 전방, 역전의 창녀, 소외된 인간군상, 교통사고, 술집과 여관, 신음소리 등 이 모든 이미지가 무관한 듯하지만 하나의 연결고리를 가지면서 시의 주제를 분명하게 전달하고 있다.

남북휴전 상태에서 전방이 무사하다니 외관상 '완벽한 세상'으로 보이지만 시적 화자가 궁극적으로 마주친 것은 자신을 포함한 모든 현대인들이 궁핍과 퇴폐적인 삶 속에서 모두 병들어 신음하는데도 아무도 아파하지 않을 만큼 일상에 둔감한 채 살아가는 불감증 환자라는 사실이다. 마지막 시행에서 시인은 모두가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는 역설적 표현으로 시상을 끝맺음으로써, 병들고 소외된 사람들과는 무관하게 무심히 잘도 돌아가는 이 현실이 얼마나 불합리적이고 부조리한가를 뚜렷이 부각시키고 있다.

1980년대의 시대적 아픔을 형상화함으로써, 당대의 사회현실을 인식하는 작가의 현실주의적 시각이 잘 드러나 있는 이 시는 이성복의 초기 대표작이다. 지극히 개인적인 소재를 활용해 보편적이고 공적인 차원으로 의미를 확대시킨 작가적 능력이 높게 평가받았다. 이성복은 작가 특유의 미학과 시적 보편성을 획득한 첫시집 《뒹구는 돌은 언제 잠깨는가》로 제2회 김수영문학상을 수상했다.

[NAVER 백과사전]

 

 

❒시인 이성복(李晟馥 1952~ )

경북 상주 출생. 서울대 불문학과 및 동 대학원 졸업. 1977년 ‘문학과 지성’에 ‘정든 유곽에서’ 등을 발표하면서 등단. 1980년 시집 ‘뒹구는 돌은 언제 잠깨는가’ 간행 제2회 김수영 문학상, 제4회 소월시 문학상 등을 수상. 서울대에서 박사학위 획득. 현재 계명대 교수. 시집으로 ‘뒹구는 돌은 언제 잠깨는가’(1980), ‘남해금산’(1987), ‘그 여름의 끝’(1990), ‘호랑가시나무의 기억’(1992) 등을 간행. 산문집으로 ‘그대에게 가는 먼 길’(1990), ‘꽃핀 나무들의 괴로움’(1990) 등이 있다. 독특한 상상력과 자유연상 기법으로 세상에 대한 근원적이고 보편적인 이해를 주제 의식으로 한 시를 발표하고 있다.

 

 

❒ 참고

詩는 '머리의 언어' 전복시키는 '몸의 언어'

“여배우의 모습 밑에서 수녀를 사랑하다니!…”

 

19세기 프랑스 작가 네르발의 ‘실비’라는 소설의 이 한 구절은 30년의 내 문학적 삶의 도정을 드러내는 적절한 비유로 쓰여질 수 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지금까지 내가 문학을 애지중지해 왔던 것은 구두 밑창을 파고든 압정처럼 좀처럼 빠지지 않는 신경증적 야심을 충족시키기 위한 몸부림이었던 것이다.

쇼펜하우어의 책 제목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끌어와 말하자면, 지난 세월 내 혼곤한 문학적 삶은 ‘야심’이라는 의지와 ‘문학’이라는 표상의 합작품이었던 셈이다.

대체 난공불락의 그 신경증적 야심이 언제 어떻게 시작되었으며, 어떤 까닭으로 하필 문학이라는 탄두를 가지게 되었는지 나는 모른다. 물론 뒤에 전해들은 이야기로 조립된 것이겠지만, 어린 시절 내 최초의 기억은 시골 마을에서 이사를 가는데 두어 살 된 아이가 한사코 떼를 써서 소를 몰고 가는 장면이다.

이를테면 그 최초의 나이테 위에 오랜 세월 내 삶은 닮은꼴을 이루며 덧붙여졌고, 출세지상주의적인 한 소년이 열혈 문학청년으로 바뀌었다 해서 그 나이테의 모습이 달라진 것은 아니었다.

 

 

◈ 출세 지상주의 소년의 변신

처음 문학에 맛들이기 시작한 때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유별나게 문학이 나에게 애증의 대상이 되어 왔던 것도 문학 자체의 문제라기보다는 문학에 대한 나의 신경증적 태도에서 기인하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나는 문학 때문에 행복했고 문학 때문에 좌절했다. 마치 심한 몸살을 앓을 때 몸이 뜨거운지 차가운지 분간할 수 없듯이, 지금 나는 대체 내가 문학을 사랑하는지 증오하는지를 알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나는 그놈의 문학 때문에 하루라도 편할 날이 없었다. 문학은 목에 걸린 생선 가시처럼 나를 불편하게 했다. 아니다, 내가 문학을 불편하게 했던 것이다.

한참 문학에 미쳤던 보다 젊은 시절, 나는 대체 사람이 ‘어떻게 시 없이 살 수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학교에서나 다방에서나 시 얘기를 하지 않으면 재미가 없었고, 그리하여 친구들은 하나 둘 내게서 떨어져 나갔다.

나는 그 시절이 영원히 계속될 줄 알았다. 아니었다. 어디에선가 썼던 비유이지만, 지금 나에게 문학은 내 아이를 배고 있으나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 사랑하려 하면 할수록 더 멀어지는 그런 여자와 같다.

문학과의 신접살림은 첫 시집을 내기까지 3년쯤이나 계속되었을까, 그 이후로는 불화와 별거의 연속이었다.

어찌하여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알 까닭이 없지만, 지금에 와서 짐작되는 바로는 언제 어디서나 고개를 들이미는 신경증적인 야심이 애꿎은 문학을 볼모로 하여 장난을 치고 있다는 것이다.

마치 내장을 보호하는 갈비뼈가 부러지게 되면 날카로운 뼈끝으로 내장을 찔러 죽음에 이르게 하듯이, 문학을 신주단지로 모시던 야심이 제 허영을 채우지 못하자 문학을 애물단지로 구박하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지금까지 ‘완벽한 글쓰기’ 운운하며 글쓰기를 미루어 왔던 것도 무시당한 야심의 자기 합리화였는지 모른다.

그런데 최근에 나는 자아 심리학이나 인지심리학 쪽의 책을 읽으면서 지금까지 나의 행태가 신경증의 한 양상으로 분류되고 있고, ‘완벽주의’나 ‘미루기’라는 병명을 얻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서, 깊은 충격을 받았다.

문제는 문학에 있지 않았다. 문제는 내가, 보다 정확히 말해 내 야심이 일으킨 것이고, 지난 세월 나는 내 살을 파먹으면서 이른바 ‘문학신경증’을 앓아 왔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제 문제의 근원이 드러난 이상, 병과의 싸움은 더 이상 미룰 수 없으며, 아무래도 이 싸움은 해볼 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 詩는 행복·좌절 동시에 안겨

그렇다면 일단 신경증적 야심을 괄호로 묶고 나서, 문학은 나에게 무엇인가. 동어반복적인 위험을 무릅쓰고 말하자면, 문학이 없었다면 볼 수 없는 것을 보게 하는 것. 다시 말해 문학은 삶을 들여다볼 수 있게 해주는 렌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마치 현미경으로 손바닥을 들여다보면 육안으로 안 잡히는 갖가지 미생물들을 발견하게 되듯이, 문학이라는 필터를 통해 베일에 가리어진 삶의 본모습은 여실히 드러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문학은 흙 속에 묻혀 있는 글자를 읽어내는 어린시절의 놀이와 다른 것이 아니다.

문학의 본질이 들여다보는 것, 읽어내는 것, 발견하는 것이라면 꼭 그렇게 해야 할 까닭이 있느냐는 물음이 따를 것이다.

문학신경증까지는 아니라 하더라도, 적어도 문학을 삶의 방식을 택한 사람에게, 자신을 포함한 모든 존재는 원의적(原義的) 의미에서의 ‘콤플렉스’, 즉 표층/심층, 거짓/진실, 추함/고움의 대립구조로 나타날 것이다.

문학을 통해 발견하는 심층, 진실, 고움은 캄캄한 지하실에서 켜 댄 한 개피 성냥불처럼 덧없고 무력하다. 그 불꽃은 우리를 위로해 주거나 해방시켜 주지도 않지만, 그러나 그 불꽃이 사라져도 ‘우리가 보았던 불꽃’은 꺼지지 않는다.

문제는 문학이라는 불꽃, 보다 더 구체적으로 말해 시라는 불꽃이 피어나는 곳은 머리가 아니라 몸이라는 것이다. 흔히 테니스 선수는 팔로 공을 치는 것이 아니라 허리로 친다고 한다.

그렇다고 해서 팔로 공을 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의식할 때만 몸 전체가 돌면서 나오는 힘이 공에 전달된다는 것이다. 또한 피아노를 칠 때 손목에 힘을 주면 어깨로부터 내려오는 힘이 손목에서 딱 끊어지고 손목 힘만으로 치게 된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머리는 제가 아는 것밖에 모른다. 머리는 상식과 체면의 자리이고 신경증의 자리이다.

그런 점에서 공이나 피아노를 칠 때 라켓 헤드와 손가락을 의식하라거나, 돌을 실에 묶어 돌리거나 장도리로 못을 박을 때 돌과 쇠뭉치에 의식이 모인다는 이야기는 문학하는 사람에게도 의미 깊게 들린다.

헤드와 손가락, 돌과 쇠뭉치는 문학에서 바로 언어에 해당한다. 문학은 언어에 기대고, 기댈 뿐만 아니라 투신함으로써 머리의 개입을 막고 몸의 힘을 고스란히 전달하는 것이다.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그것은 캄캄한 밤 배 위에서 쓰레기를 버리려다 쓰레기통과 함께 바다로 떨어졌다는 해군수병의 이야기와도 같다.

몸의 언어 혹은 언어의 몸은 엄청난 돌파력으로 머리의 언어가 구축한 삶의 가건물을 여지없이 무너뜨린다.

가령 피 흘리며 죽어가는 아들을 무릎에 안은 성모 마리아는 부처님의 어머니 마야 부인을 떠올리게 하며, 마야라는 이름은 환(幻)을 뜻하는 산스크리트어 마야(maya)와 다른 것이 아니며, 다시 마야라는 말은 피 흐르는 심장을 주먹으로 움켜쥔 마야 문명의 한 사내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참으로 희한하게도 마리아/마야라는 이름을 통해 피가 피를 부르는 것이다. 이는 미술에서의 스크래치라는 기법과 놀랄 만큼 닮아 있다.

 

◈ 해달 생태서 작가운명 발견

며칠 전 나는 ‘동물의 왕국’이라는 프로에서 바다에 사는 해달의 행태를 보면서, 몸의 언어로써의 글쓰기에 대한 그럴 듯한 은유를 발견할 수 있었다.

새끼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하루에 사백 회 가량이나 물질을 하는 어미 해달은, 잠수할 줄 모르는 아기 해달을 물위에 발랑 뒤집어 눕혀 놓고 물 속으로 들어가는데, 잠수할 수 있는 시간은 고작 사 분이라 한다.

글쓰는 사람에게 어미 해달과 아기 해달은 한 몸이다. 그는 겉똑똑이 머리를 잠재워 두고 몸 속 깊은 곳을 들락거리며 쉬임없이 연상의 물질을 해대는 것이다.

해달이 먹이로 좋아하는 것은 조개류이다. 해달은 해변에서 주워온 돌을 배 위에 올려놓고 그 위에다 조개를 내리쳐 살을 꺼내 먹는데, 해달의 등뼈와 갈비뼈는 그 충격을 견뎌낼 만큼 견고하다. 재미있는 것은 해달이 조개의 빈 껍질을 배 위에 놓고 접시로 사용한다는 것이다. 글쓰는 사람에게 조개 껍질은 언어가 아닐까.

언어는 글쓰는 사람 자신의 몸 위에서 갈라지고 부서지며, 딱딱한 일상의 외피를 벗고 나서야 비로소 부드러운 속살을 드러낸다. 그리하여 속살을 걷어낸 한 언어의 껍질은 다른 언어의 속살을 담는 받침이 되는 것이다.

해달은 바다 밑에 뿌리를 두고 수십 미터 웃자란 해초 다발에 몸을 감고 잔다. 그것은 밤새 높은 파도에 떠밀려 가거나 해변이나 바위에 부딪치지 않기 위해서라고 한다. 몸의 언어로 글쓰기도 그런 것이 아닐까.

누군가 글쓰기가 욕조를 타고 대서양 건너는 일과 같다고 했지만, 언어라는 연약한 물풀에 몸을 감고 밤새 뒤척이며 날 밝기를 기다리는 것.

내가 본 프로에서 어미 해달은 폭풍이 몰아치던 밤 파도에 휩쓸려 떠내려가고, 물질도 할 줄 모르는 아기 해달만 남아 떨고 있었다. 글쓰는 사람이여, 당신도 그런 느낌이 들 때가 있는가.

한국일보 --[나는 왜 문학을 하는가] 시인 이성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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