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광억전(柳光億傳)
이옥
• 주제 : 선비의 올바른 태도(조선 후기 과거의 실상과 문제)
• 줄거리
합천에 살고 있는 유광억은 과체시(科體詩) 잘 하기로 이름이 났었다. 그러나 가난하고 지체가 낮은 시골 선비라 과거를 보아 벼슬살이를 하기 힘들었다. 광억이 서울로 과거 시험을 치르러 갔을 때 어느 대갓집에 잡혀 가 시험 답안을 대신 써 주게 된다. 그 동안 훌륭한 대접을 받고 자신이 써 준 답으로 그 집 자제가 합격을 하자, 그 집에서 많은 선물을 주고 고향으로 내려 보냈다. 고향에 내려가니 소문이 나 과거 시험 답안을 대리로 작성해 주기를 청탁하는 이가 많았다. 광억은 그것으로 업을 삼고 생활하던 중에 영남 경시에서 발각이 되자 결국 자살하고 만다.
•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은 김려(金鑢)가 자신과 주위 문인들의 글을 교열하여 만든 『담정총서(潭庭叢書)』 중에 수록한 이옥(李鈺)의 「매화외사(梅花外史)」에 실려 전하는 한문 소설이다. 이 소설을 통해 작가는 조선 후기에 들어 과거 제도의 모순이 극심해진 현실을 비판하고 있다. 비록, 서술자는 겉으로는 광억이 과시까지 파는 행위를 비판하고 있지만 전체 내용의 흐름을 보면 그러한 것이 일어나면서도 아무런 죄의식이 없는 현실의 문제를 강하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과거 시험에서 문체 반정에 걸려 평생 과거를 치르지 못하게 되었던 작가 자신의 처지를 볼 때, 더욱 더 과거 시험의 문제점을 명확하게 직시하고 있었을 것이다.
■ 작품 읽기
온 세상을 법석대며 오가는 사람들은 모두 이익을 위해서이다. 그리하여 이 세상에서 이익을 숭상한 지가 오래되었다. 그러나 이익으로써만 살고 있는 자는 반드시 이익으로써 죽는 법이다. 그러므로 군자는 ‘이익’이라는 말을 입에 걸지 않으나 소인들은 이익으로 해서 몸을 희생시키는 것이다.
서울은 온갖 장인(匠人)과 장사치들이 모여드는 곳인 만큼 대체로 물건을 살 수 있는 수많은 전방(廛房)이 별처럼 벌여져 있고, 바둑처럼 깔렸다. 어떤 이는 남에게 손으로 품을 팔아 먹는 자도 있으며, 혹은 어깨와 등을 파는 자도 있거니와, 뒷간을 치는 자, 칼을 갈아 소를 죽이는 자, 그의 얼굴을 화려하게 꾸며서 매음(賣淫)하는 자도 없지 않으니 천하에 사고 팖이 이에 극도에 이르렀구료. 외사씨(外史氏)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저 아득한 옛날 나양(裸壤)에선 실과 비단을 파는 저자가 없고, 산짐승을 잡아서 날고기로 먹을 때엔 질솥을 파는 이가 없었던 것이다. 이는 비록 만드는 이가 있다 하더라도 파는 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큰 풀무집에 태어난 사람이라도 쇠망치나 칼을 갖고 남에게 자랑하지 않으며, 농사에 힘쓰는 집에서는 쌀장수가 집 앞으로 지나갈 때도 ‘쌀 사시오’를 외치지 않는 법이니, 이는 제 집에 없는 뒤에라야 남에게 구하는 까닭이었다.”
유광억(柳光億)은 영남(嶺南) 합천(陜川)에 살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시를 아주 잘하지는 못할지라도 과거(科擧) 문체의 시를 잘하기로 남쪽에서 유명하였다. 그는 집이 몹시 가난하고 지체가 낮았다. 그 당시 시골에서는 향시(鄕試)의 과시(科詩)를 팔아 살고 있는 이가 많았다. 광억(光億)도 역시 돈 때문에 과시를 팔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일찍이 영남 도시(道試)에 합격하여 장차 서울 고시관(考試官)에게 시험을 치르러 갔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부인이 타는 가마 한 채를 갖고 길에서 그를 맞이했다. 그 집에 이른즉 붉은 대문이 몇 겹이요, 화려한 건물이 수십 채나 늘어섰다. 얼굴이 해말쑥하고 성긴 수염이 난 서사꾼 몇 사람이 바야흐로 종이를 펴고 팔 힘을 시험하며 진퇴(進退)의 명령이 내리기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그리고 광억에게는 깊숙한 방을 따로 차려 주고 날마다 아름다운 음식을 제공하고, 과거 시험지와 같은 종이에 시를 써 줄 것을 요구하였다. 주인 대감은 사나흘 만에 한 번씩 아침에 광억에게 들러 경의를 표하되 마치 아들이 어버이를 섬기는 것과 같이 했다. 드디어 과거를 치르고 본 즉, 그 주인의 아들이 과연 광억이 대신 지은 글로써 진사에 올랐다. 그제야 행장을 차려 광억을 시골로 내려 보냈다. 광억은 영광스레 말 한 필, 종 한 사람을 거느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 후 돈 이만 냥을 갖고 광억을 찾아온 자도 있었거니와, 그가 일찍이 빌려 먹은 고을의 환곡(還穀)을 감사(監司)가 벌써 다 청산해 버리기도 했다.
광억의 글이 비록 수준은 높지 못했으나, 산뜻하고 날카로우며 재치와 임기응변에 능하였다. 그러나 그는 지체가 낮아 과거에 뜻을 두지 않았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광억의 이름은 나라에서 유명해졌다.
“영남에선 글재주로써 누가 으뜸입니까?”라고 경상 감사에게 물었다.
“유광억이란 사람이 있습니다.”라고 경상 감사가 말했다.
“내 이번 과거 시험에서 반드시 그를 장원으로 뽑겠소.”라고 서울 시험관이 말했다.
“당신의 답안지 감식하는 눈이 그렇게 될는지요.”라고 경상 감사가 말했다.
서울 시험관은 자신하듯, “되구말구.”라고 말했다.
둘이 서로 논란을 하던 끝에 광억의 글을 알고 모름으로써 내기를 했다.
서울 시험관이 과장에 올라 ‘영남 시월 중구 놀이를 열었으니 남북의 기후가 같지 않음을 감탄한다.[嶺南十月設重九會嘆南北之候不同]’는 시제(詩題)를 내걸었다.
곧이어 시권(詩卷) 한 장이 날아들었다. 그 시 중 두 구는 다음과 같았다.
중구의 이 잔치도 시월에 열 수 있고[重陽亦在重陰月]
북국 손님이 이 곳에 오셔 남국의 술을 마시는구나[北客强醉南烹酒]
서울 시험관이 그 시를 읽고 ‘이것이 필시 광억의 시로군.’ 하며 붉은 빛깔의 먹으로 비점(批點)을 마구 내리치고, 등급을 이하(二下)로 매기어 장원을 뽑았다. 또 시권 한 장이 제법 잘되었으므로 제2등으로 뽑고, 또 하나를 3등으로 뽑았다. 급기야 봉한 부분을 떼고 보니 광억의 이름은 하나도 없기에 남몰래 조사해 보니, 그 답안지들은 모두 광억이 남의 돈을 받고 시를 지어 주되 그 돈의 많고 적음에 따라서 글의 차이를 낸 것이었다.
서울 시험관은 비록 이 일을 혼자 알았긴 하나 경상 감사가 자기를 믿지 않을까 염려해서 광억의 초사(招辭)를 받아 증거로 삼으려 했다. 그리하여 합천에 통첩을 내려 광억을 잡아올리게 했으나 광억을 죄로 다스릴 생각은 없었다. 그리하여 광억은 군수의 명령에 의해 구속 송치되게 되었다. ‘나야말로 과적(科賊)이니 가더라도 죽을 것이니 차라리 가지 않는 게 낫겠다.’고 생각하고는 밤에 친척을 모아 놓고 마음껏 술을 마시고 이내 남몰래 강물에 몸을 던져 죽었다. 서울 시험관은 이 이야기를 듣고 애석하게 여기고 남들도 모두 그의 재주를 안타깝게 여기었다.
그러나 군자는 광억의 죽음은 그의 죄과로 인해 있을 뿐이니만큼 의당한 일이라고 논평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