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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에세이

[해외기고]<해외기획…미 LA> 박수근과 빈센트

작성자광역매일|작성시간26.06.05|조회수49 목록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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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은 부슬비가 내렸다. 지난달 5월 중순 무렵에 남편과 나는 박수근 전시관을 방문했다. 박수근의 여러 작품은 박수근 전시관 이외에도 국립현대미술관, 리움에서 관람할 수 있지만, 그가 출생하고 어린 시절을 보냈다는 강원도 양구에 가보고 싶었다. 박수근의 소박한 표현, 단순한 듯 보이는, 그러나 많은 이야기를 함축한 판화를 남편도, 나도 좋아한다. 담배 피우는 남정네들의 뒷모습을 그린 판화 한 장을 소장하고 있다. 돌아앉아 담배를 피우는 그 남정네들이 나의 아버지, 아저씨들이 아니었을까.

 

미국에 살고 있는 나로서는 서울에서 양구 갈 길이 쉬울 것 같지 않아 염려되었지만, 챗지피티가 가르쳐 주는 효율적인 대중교통 수단을 이용해서 쉽게 잘 다녀왔다. 서울에 우리가 묵고 있는 호텔에서 지하철로 고속 터미널에 가서, 양구 행 버스를 타고, 양구역에서 내린 후에, 터미널에서부터는 한 시간여 걸어서 전시관에 도착했다. 

 

버스로 이동하면서 비를 맞고 있는 경기도와 강원도의 짙은 녹음을 보았다. 한국은 나 자랄 때와 달리, 산과 들이 진녹색 나무들로 울창하고 건강하다. 논, 밭, 산은 풍요롭고, 고즈넉해 보였다. 비는 양구에 도착한 후에도 그치지 않았다. 우리는 마치 젊었을 때, 데이트하던 때처럼, 우산 하나를 함께 쓰고 천천히 걸었다. 

 

박수근 전시관에 가기 전에, 우선 버스 터미널 근처에 고 안병욱 교수, 김형석 교수 전시관이 있는 양구 인문학 박물관에 들렀다. 친구의 부친인 안병욱 교수의 생애가 잘 정리되어 있는 전시관은 친구가 ‘아버지의 작은 공간’이라 했던 것과 달리 결코 작은 공간은 아니었다.  ‘김형석·안병욱 철학의 집’은 두 분 죽마고우의 가르침이 전시되고 있었고 많은 유물을 소장하고 있었다. 안병욱 교수의 ‘인생론’과 교수님이 만났던 다섯 분의 이야기가 걸려 있었다. 그 중, 윤동주 시인과의 만남의 이야기는 새삼 그 두 분이 같은 어려운 시대에 사셨다는 사실에 그 울림이 멈추지를 않았다. 

 

소양강 길을 따라 형성되어 있는 보도를 따라가니, 양구시(市)를 대표하는 사람, 박수근의 동상이 서 있었다. 환영하는 모습은 아니었다. 왼손에는 스케치북을 들고, 오른손에는 연필을 든 실제 인간의 다섯 배 정도 되는 크기의 박수근은 고개를 약간 숙인 사색하는 모습이다. 

 

우리 이외에는 아무도 길을 걷는 사람도, 차를 타고 가는 사람도, 전시관을 향해 가는 사람도 없었다. 박수근의 동상에서 도보로 한 시간 정도 천천히 걷다 보니, ‘박수근’이라는 말에서 ‘박’자를 뺀 ‘수근’이라는 글자를 반복하여 만든 단어인 듯한 ‘카페 수근수근’이라는 커피숍을 발견했다. ‘수근수근’ 하면 우리말로 ‘수군수군’처럼 들릴 수도 있어서 재미있는 구상 같았다. 손님 한 사람 없는 커피숍에는 노란 얼룩 고양이가 밖을 내다보고 앉아 있었다. 주인 여인은 젊지도 늙지도 않은 지성인처럼 보였고, 자기 나름의 절제된 멋진 삶을 추구하는 듯 보였다. 겸손하고 친절했다. 찻집에는 그녀가 우려 만든 차들이 전시되어 있었고, 벽에는 오래된 책들과 레코드 엘피판들이 꽂혀있었다. 보슬비·정적·인기척 없는 길· 고요한 세상과 잘 어울렸다.

 

박수근의 판화들은 비 맞으며 걸었던 회색빛 양구 길, 소리 없이 흐르는 소양강과 잘 어울리는 듯했다. 나에게 다가오는 그의 판화들은 직선과 직선이 연결하여 과일 파는 여인네들을 만들었고, 벌거벗은 나무를 광야에 세우고 있었다. 쪽진 여인들, 머리에 광주리를 이고 있는 여인들, 그네들은 모두 흰색의 한복 차림이었다. 광목으로 지은 옷이 아닐까 싶었다. 모두 말을 붙이지 않고 묵묵한 가운데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 그의 가난에 대한 성찰과 민족적 표현은 존엄해 보였다. 

 

박수근 하면, 왠지 빈센트 반 고흐를 생각하게 된다. 그 두 화가 그림의 스타일, 살았던 시기가 다르지만, 두 사람 모두가 생전에 가난했기 때문일 것이다. 또 박수근도 빈센트 반 고흐도 밀레를 좋아하였다는 공통점이 있다. 빈센트는 생전 겨우 한 점의 그림을 판 것으로 알려지어 있다. ‘붉은 포도밭’이라는 작품으로 당시 400프랑 정도 받았다고 추정한다. 그가 남긴 2,100여 점의 작품 중에는 860여 점의 유화가 있고, 나머지는 스케치, 드로잉 등이라 한다. 나치 점령 시절, 많은 유대인의 빈센트의 작품은 강제로 나치에게 빼앗기었고, 등록되지 않았을 것으로 본다. 살아 생전 한 폭의 그림을 팔았던 빈센트, 가난과 정신병으로 힘들었던 그의 작품 중에는 8천250만 달러로 경매에 팔린 작품(Dr. Gachet 초상화)도 있다. 세상이 그와 그의 그림 세계를 몰라보았다는 것인지, 참으로 아이러니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빈센트와는 달리 박수근은 여러 번 미술전에 입상하였고, 1960년대에는 30~100달러에 작품을 팔았다고 한다. 400여 점의 드로잉, 삽화, 판화, 초상화 중에, 250여 점이 유화라고 한다. 최근에 그의 그림 중에, 최고 낙찰가는 45억 2천만 원이었다는 소식이다. 역시,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현대를 살고 활동하는 화가들과 그들의 작품이 적절한 대접을 받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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