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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에세이

[광역에세이]힘이 있어야 한다고

작성자광역매일|작성시간26.06.09|조회수20 목록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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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이 없으면 소중한 자유도, 국가도 잃게 된다.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냉혹한 현실 속에서 우리는 감언이설에 넘어가서는 안 된다.

 

대한제국의 독립을 향해 불꽃처럼 타오르다 스러진 별, 수인번호 264. 문학관의 문턱을 넘었다. 39년 짧지만, 굵었던 궤적은 마치 조국의 광복을 향한 횃불과 같았다. 그의 펜은 차가운 감옥에도 꺾이지 않고 평화와 자유의 메아리를 울려 퍼지게 했다. 264는 단지 숫자가 아니었다. ‘장진홍 의거’라는 역사의 거친 파도 속에서 1년 7개월 동안 대구 형무소에서 견뎌야 했던 고통의 심장 박동이자, 저항의 흉터였다. 교과서에서 만났던 이육사의 시 청포도 배경을 찾아 발걸음을 옮겼다.

 

청포도를 입안에 넣을 때마다, 그의 시가 마치 혀끝에서 녹아내리는 듯했다. 어린 시절, 검은 포도는 달콤하고 푸른 포도는 덜 익어 떫다고 생각했다. 배고팠던 시절, 웬만한 것은 모두 삼켜버리던 텅 빈 위장. 흙조차 소화할 만큼 허기졌던 그때, 파란 머루를 입에 넣고 질겅질겅 씹었다. 쓴맛에 침을 뱉었지만, 혀에 남은 잔향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기억 속의 푸른색 포도는 덜 익은 그래서 쓴 포도였다.

 

초등학교 여름 방학, 서울 작은 집에서 머물던 저녁이었다. 해 질 녘, 낮 동안의 번잡함이 가시고 교통이 한산해진 도로변으로 손수레들이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어스름이 깔린 공기 속에서, 각자의 손수레를 밝히는 카바이드 불빛이 희미하게 깜빡였다. 그 불빛 아래에는 여름밤의 진미들이 자리를 잡았다. 한쪽에는 푸른빛을 머금은 청포도가 종이에 곱게 싸인 채, 손수레의 나무 좌판에 탐스럽게 놓여 있었다. 촘촘히 박힌 알알이 탱글탱글하게 빛나며, 마치 금방이라도 터질 듯한 싱그러움으로 지나가는 이들의 침샘을 자극했다. 하지만, 나의 혀는 푸른색 포도, 덜 익은 산머루의 신맛을 기억하고 있었다.

 

중학교에 입학하면서 청포도라는 시를 통해 청포도를 다시 만났다. 이육사의 시 속에서 청포도는 단순한 과일이 아닌, 희망과 기다림, 그리고 아름다운 조국을 향한 염원을 담은 상징으로 태어났다.

 

칠월, 청포도, 푸른 바다, 흰 돛단배, 은쟁반, 하이얀 모시 수건… 소박하고 아름다운 시어들은 조국을 향한 뜨거운 사랑과 맞닿아, 메마른 가슴에 벅찬 감동을 선사했다. 선생의 숭고한 희생이 있었기에, 이 자리에 설 수 있음을 깨달으며,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웅성거림 속에서 홀연히 낯선 이방인과 마주쳤다. 그녀는 훤칠한 키에 유난히 맑은 눈빛을 지녔으나, 마흔 초반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그 눈빛 저편에는 깊은 슬픔이 고여 있었다. 한눈에도 러시아 연방국 출신임을 짐작하게 하는 그녀의 얼굴은 우크라이나 전쟁의 상흔을 담고 있었다. 돈을 벌기 위해, 말조차 통하지 않는 머나먼 이국땅까지 들어온 그녀의 뺨 위에는 깊은 수심이 드리워져 있었다. 짧은 대화 속에서 고국에 대한 그녀의 간절한 그리움을 느낄 수 있었다. 고향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 전쟁이 남긴 가슴 아픈 상처가 그녀의 여린 마음을 짓누르고 있었다.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냉혹한 현실 속에서 힘이 없으면 소중한 자유도, 국가도 잃게 된다. 이육사가 감옥에서 수인번호 ‘264’로 불렸던 것도, 우크라이나 여인이 전쟁을 피해 이국땅을 떠돌아야 하는 것도, 모두 힘이 없었기 때문이다.

 

과거의 아픔은 현재에도 반복되고 있다. 문학관에서 만난 우크라이나 여인의 눈빛 속 슬픔은, 이육사가 노래한 ‘청포도’의 염원이 아직도 이 세상 어딘가에서는 이루어지지 못했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먼 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선생은 조국의 해방을 노래했다.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향한 뜨거운 불꽃이 그의 시라는 그릇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그 불꽃은 ‘힘’이라는 쇠망치가 되어, 무너진 조국을 다시 세우려는 간절한 염원을 꽝꽝 두드리고 있었다. 힘이 있어야 한다고. 이것이 이육사의 ‘청포도’가 우크라이나 여인의 눈빛이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다.

 

청포도는 이제 더 이상 덜 익은 쓴 과일이 아니다. 그것은 자유와 독립을 향한 간절한 염원이며, 평화로운 조국을 꿈꾸는 희망의 상징이다. 하지만 그 희망은 힘이 뒷받침될 때 비로소 현실이 된다.

 

‘평화를 원한다면, 전쟁을 준비하라’는 로마의 격언처럼, 자유를 지키고 싶다면 그것을 지킬 힘을 갖추어야 한다. 그것이 이육사가, 그리고 선열들이 목숨을 바쳐 지키고자 했던 조국을 온전히 지켜나가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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