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려진 돌(막 16:1-8)
우리의 구원자이신 예수님께서 무덤에서 부활하신 날입니다. 사망의 불안과 공포의 밤이 지나고 생명의 새날이 밝았습니다. 운동경기 가운데 가장 통쾌할 때가 언제입니까? 역전의 때이지요. 예수님의 부활이 곧 역전의 승리였습니다. 예수님을 죽여 무덤에 장사지낸 후 돌로 막아 인봉하고, 무장한 병력이 지켰습니다. 그들은 승리를 자축했을 것입니다. 그 누가 보아도 예수님은 실패자요, 그들은 승리자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편에서는 아직 끝나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부활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단번에 승리로 바꾸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능력이요, 생명의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무덤에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 이분은 인류의 구세주이시며, 만왕의 왕이시며, 지금은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의 주일 아침 인사가 예수 다시 사셨네!였습니다. 그때 성도들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을 주님의 날로 지키며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날이 곧 오늘날 우리들이 매주 마다 예배드리는 주일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신자나 불신자나 다 예수님께 무덤에서 다시 살아나신 날을 기준으로 쉬기도 하고, 일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섬기는 사람들이 지구상에 20억이 넘습니다. 그들은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복을 받아 누리는 선진국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분명한 역사적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사실로 증명되었다 할지라도 오늘 나와의 개인적인 만남이 없는 부활의 예수님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여러분의 삶 속에서 만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기독교 신앙은 아는 것을 목표로 삼는 신앙이 아닙니다. 믿고 경험하는 신앙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과 경험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것은 부활 신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면 참으로 놀라운 일이 일어나게 됩니다. 왜냐하면 사망 권세를 이기신 주님의 부활의 권세가 우리 가운데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부활의 권세와 능력 이 역사하면 우리를 얽어맨 삶의 결박들이 풀어지는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 있습니다. 바로 주님이 부활하셨을 때 돌문이 굴러간 사건입니다. 여러분, 성경에는 하나님이 이루시는 은혜와 축복, 구원의 역사가 여러 가지로 제시되어 있습니다.
이는 실제로 일어난 역사적 사실이기도 하지만 다양한 의미를 함축하는 상징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부활이 실제 있었던 자리, 즉 주님이 매장된 무덤에는 여러 가지 의미 심장한 상징물들이 있었습니다. 빈 무덤, 빈 무덤 안에 놓여진 주님을 싼 세마포와 머리에 둔 수건, 그리고 그 무덤을 막아 선 돌문이 굴러간 것 등이 그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러한 상징적 의미를 지닌 것들 중 돌문이 열리고 굴러간 사건과 관련해 우리가 부활절에 가져야 할 신앙의 면모가 무엇인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사망에서 생명의 문을 여는 부활 신앙
주님의 부활은 사망에서 벗어날 수 없는 사람들을 영원한 생명으로 갈 수 있도록 문을 열어 주셨다는데 큰 의미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운명하신 후 아리마대 요셉이라고 하는 사람이 자신이 준비한 무덤에 예수님을 모셨습니다. 그리고 관습대로 그 입구를 큰 돌을 굴려서 막아 놓았습니다(마 27:59,60). 이에 대하여 마태는 '큰 돌'이라고 기록했는데, 마가는 '심히 큰 돌' 이라고 더욱 주의 깊게 보고 기록했습니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주의 무덤을 이 큰 돌로 막은 것으로도 만족하지 못해서 보초를 세웠습니다(마 27:66). 그들이 이처럼 이미 운명하신 예수님의 시신을 철저히 지킨 이유는 혹 제자들이 주님의 시체를 몰래 훔쳐간 후 주님이 이전에 말씀하신 것처럼 부활하셨다는 소문을 퍼뜨릴까 우려해서입니다. 그래서 그야말로 철통같이 예수님의 무덤을 막고 또 지키도록 한 것입니다(마 27:62-64).
이처럼 큰 돌을 굴려 막아놓은 무덤에 인봉을 하고 파수꾼들까지 지키고 섰으니 어느 누구도 그 시신을 훔쳐 갈 수 없게 된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무덤에 큰 돌문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도 안식 후 첫날 즉, 오늘의 주일 새벽에 여인들은 예수님의 시신에 향유를 바르기 위하여 향품을 사 가지고 주님의 무덤으로 갔습니다. 여인들은 주님의 시신이 안장된 무덤의 돌문을 굴려 낼 힘이 없는 연약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아무런 대책도 없이 오로지 주님의 몸에 향유를 발라야 한다는 일념으로 "누가 우리를 위하여 무덤 문에서 돌을 굴려 주리요"하고 걱정하면서 나아갔던 것입니다. 여러분! 무덤문을 막고 있는 이 돌문은 사망의 권세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죽음이란 한계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이 여인들의 한숨 소리는 오늘을 살아가는 상한 영혼들의 탄식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여러분! 사람이 불가능이라 여기는 그 순간, 사람이 한계라 말하는 그 상황이 바로 하나님이 역사하실 때입니다. 인간에게 있어 가장 큰 한계는 다름 아닌 사망입니다. 그것은 주님의 무덤을 막은 돌문처럼 우리 앞을 가로막고 있으며 우리를 절망케 합니다. 제자들이 이 죽음 앞에 절망하며 도망갔습니다. 만약 죽음으로 예수님의 생애가 끝났다면 오늘의 신약교회는 세워지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죽으신 것으로 끝나지 않고 3일만에 찬란하게 부활하심으로 죽음의 노예인 인간에게 영원한 생명을 소유할 소망을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우리에게 큰 감격과 영원한 기쁨이 되는 것은 우리가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서 과거, 현재, 미래의 죄를 용서받고 그 죄값을 청산받아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고 의인으로서 마귀의 참소를 물리치며 담대한 삶을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사건은 전설이나 소설이 아닙니다. 이는 실제로 있었던 위대한 사건이요,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구원의 확증과 소망을 주는 사건입니다. 누구든지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면 이 부활의 은총을 받아 누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도 살아 계십니다. 예수님께 나아와 부활의 생명을 공급받는 사람이 의미있고 가치있는 삶, 영원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죽음을 증거하는 돌문이 일시적으로 주님의 무덤을 막고 있었으나 부활의 새벽에 무기력하게 굴러가고 말았습니다. 이는 인간의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죽음이라고 하는 장벽이 무너졌음을 상징하는 사건입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요11:25,26)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이길 수도 감당할 수도 없지만 우리 주이신 그리스도께서 사망을 영원히 정복했기 때문에 우리 역시도 사망을 이길 수 있으며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습니다. 아니 우리는 이미 사망을 이겼고 영생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이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소망 가운데 살아야 합니다.
2. 의심에서 믿음의 문을 여는 부활 신앙
주님의 부활은 또한 의심하여 믿지 못하는 사람들을 믿을 수 있도록 마음의 문을 열어 주셨다는 데 큰 의의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십자가에 돌아가신 지 사흘만에 무덤에서 부활하셨고, 40일동안 이 땅에 계시다가 하늘로 승천하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 그러므로 이제 예수님은 더 이상 무덤에 계시지 않고 성도들의 믿음 안에 계십니다. 주님은 이를 믿게 하기 위해, 또 믿을 수 있는 확실한 증거들을 주시고자 무덤의 돌문 역시도 굴려 내신 것입니다.
사실 주님은 돌문을 굴리지 않고서도 얼마든 거기서 나오실 수 있었습니다. 이를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요한복음 20:19을 보면 제자들이 모인 곳의 문들이 닫혔음에도 주님은 문을 열지 않고 그들 가운데 오셨습니다. 물론 주님은 분명 몸을 지니셨으며 그 손과 옆구리에 고난의 흔적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부활체는 우리의 몸과 다릅니다. 그런데도 주님께서 큰 돌을 굴려 내신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바로 우리의 믿음을 돕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로 당신의 부활이 분명한 사실임을 일깨우시고 그에 대한 확신을 주시고자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이와 관련해 복음서들의 기록을 보면 한가지 중요한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28장, 그리고 마가복음 16장, 누가복음 24장, 요한복음 20장은 각각 주님의 고난과 죽음, 매장이 끝난 이후 부활을 알리는 내용으로 채워진 장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내용들을 시작함에 있어 사복음서 기자들 모두는 그 서두에 돌문이 굴러간 사실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곧 마태복음 28:2, 마가복음 16:4, 누가복음24:2, 요한복음 20:1에 돌문이 굴러갔음을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한이 기록한 것처럼 복음서의 기록은 한마디로 말해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우리로 믿게 하며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는 데 있습니다(요 20:31).
이를 감안할 때 주님의 부활을 알리는 장 서두에 사복음서 기자들이 돌문이 굴러간 사실을 한 목소리로 강조한 것은 그것처럼 확실한 부활의 증거가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가 얼마나 쉽게 의심하며 얼마나 쉽게 믿음이 흔들리는지, 우리가 얼마나 확고한 믿음을 갖는 것이 어려운지를 잘 아십니다. 그래서 이처럼 확고한 증거, 부인할 수 없는 증거, 의심할 수 없는 증거를 당시 제자들에게,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도 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예배후에 지역에 목장별로 계란전도를 나갈려고 합니다. 그런데 이 계란은 부활을 알리는 상징적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오래 전부터 부활절에는 색칠한 달걀을 교환하거나 아이들에게 선물해 왔는데 그 이유를 설명하는 여러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첫째 이야기, 그리스도의 고난을 추모하는 수난절 기간에는 금식이나 검소한 생활을 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수난절이 끝나고 부활의 아침을 맞이할 때는 그 동안 먹지 않던 고기나 달걀을 먹습니다. 부활절 아침식사로 오랜만에 식탁에서 맞는 달걀은 얼마나 아름답고 맛있는 것인지!
둘째 이야기, 죽음을 깨치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위대함과 놀라움은 바로 굳은 달걀 껍질을 깨치고 태어나는 병아리와 같다고 해서 달걀을 선물합니다.
셋째 이야기, 부활절 달걀의 유래는 중세유럽에서 시작됐습니다.십자군전쟁(1095~1270)에 참여하기 위해 집을 떠난 남편을 기다리는 로자린드 부인.그녀는 남편이 돌아 올 길목에 집을 얻어 소식이 끊긴 남편이 돌아 오기만을 기다렸습니다.어느 부활절날 그녀는 달걀에 "하나님의 보호를 믿으라.하나님은 자신을 사랑하고 아름다운 일을 하는 사람을 도와주신다"라는 글을 쓰고 그림을 그려 숲속 새집에서 넣고 마을 아이들에게 찾도록 했습니다.
그중 한 아이가 달걀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다 지쳐 쓰러진 십자군전쟁의 패잔병 한 사람을 만났습니다.아이는 병사에게 달걀을 주었습니다.십자군병사는 달걀에 하나님의 보호를 믿으라…는 아내와 즐겨 묵상하던 글이 적힌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그는 십자군전쟁에 참여했던 로자린드의 남편이었습니다.그는 달걀의 출처를 물어 아내를 극적으로 만났고 로자린드는 그후 부활절 마다 색달걀을 만들어 아이들에게 나눠 주어 그 아름다운 풍습이 오늘까지 전해졌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부활은 우리 모두의 희망입니다. 인생이 죽음으로 끝나지 않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부활하는 그날 로잔린느가 잃어버렸던 남편을 만났듯이 우리 주님을 만나게 될 것입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의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것입니다.(고전 15:19-22)"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부활을 주님을 믿을 때 의심에서 믿음으로 나아가고 갈등에서 평강으로 나아가에 될 줄로 믿습니다. 믿는 자에게는 지금도 살아계셔서 우리들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우리의 삶 속에서 일어납니다. 이제 더 이상 의심의 돌문, 불신의 돌문에 갇혀 있지 마십시오. 주님은 의심하고 불신케 하는 돌문을 굴려 내고 다시 사셨고 지금도 살아계시며, 그리고 영원히 살아 역사하시는 우기 주님에 대한 확실한 믿음을 가집시다.
3. 불안에서 평강의 문을 여는 부활 신앙
끝으로 주님의 부활은 두려움과 불안에 떨고 있는 사람들에게 평강의 문을 열어 주셨다는 데에 의의가 있습니다. 인간은 그 어떤 절망적인 환경 가운데서도 본능적으로 희망을 찾기 위하여 몸부림칩니다. 사람은 가슴속에 희망이 있으면 어떠한 역경과 고난도 헤쳐 나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인류에게 영원한 희망을 준 사건이었습니다.
사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었더라면, 인류는 희망을 상실하고 말았을 것이요, 인류 역사는 깊은 어둠의 수렁에 빠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전파하시며, 죄인들을 용서하시고, 병든 자를 고치시며, 귀신들린 사람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시고, 죽은 자를 살리심으로 절망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셨습니다. 그러자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께 모여들었습니다.
그런데 3년이 지난 후 순식간에 예수님의 죽음이 다가왔습니다. 이것은 너무나 기가 막힌 사건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자신이 죽으실 것을 말씀하시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친히 예언하신 대로 십자가에서 강도들과 함께 처형당했습니다. 이로 인하여 제자들은 꿈이 처참하게 부셔졌습니다. 그들은 앞날의 희망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바깥출입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들은 실로 혹독한 절망을 맞이해야 하였습니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죽음보다도 더 고통스럽고 괴로운 것이었습니다. 바로 이때 부활하신 예수께서 제자들을 찾아오셨습니다.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요 20:19). 두려움과 공포와 절망 가운데 있었던 제자들에게 가장 기쁜 소식은 바로 우리 주님께서 주시는 '평강'이었습니다.
오늘 이 불안한 시대를 살아가고 계시는 성도 여러분에게도 가장 필요한 것이 바로 '삶의 평강'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시대적인 불안과 두려움은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습니다. 오직 죽음의 권세를 이기신 부활의 주님으로 말미암아 두려움을 물리치고 평강을 누릴 수 있습니다. 여러분, 누군가 무덤과 같은 비좁은 곳에 들어가 있고 그 문을 돌로 가두었다 해보십시오. 그가 거기서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까? 그는 불안과 공포, 절망에 휩싸여 지낼 수 밖에 없습니다.
그에게는 밤이나 낮이나 아침이나 저녁이나 다를 게 없습니다. 돌문으로 막혀 있기에 거기에는 어떤 빛도 들어 올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돌문이 굴러가게 되고 거기에 새벽의 빛, 아침의 광명이 비춘다 해보십시오. 더 이상 불안과 공포가 그를 얽어맬 수 없습니다. 그는 그 자리에서 일어나 광명한 햇살을 온 몸으로 받으며 자유와 평안을 노래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무덤을 막은 돌문이 굴러간 것은 바로 이처럼 우리에게 공포와 불안에서 헤어나와 평안을 누리며 이를 노래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부활 신앙은 한마디로 죽음을 이기는 신앙입니다. 죽음까지 이겼는데 무엇을 이기지 못하겠습니까? 또한 부활 신앙은 소망의 신앙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부활에서 이어지는 천국 본향이 있음을 언제나 기억하고 어디서든 정의로우며 어떤 상황에서도 담대하고, 무슨 일을 만나도 절망하거나 낙담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도 평안을 노래할 수 있습니다. 주님이 사망을 이기시고 부활하시며 절망과 죽음, 두려움과 공포의 돌문을 밀쳐 내셨기 때문입니다. 바라기는 여러분 모두 날마다 살아계신 주님을 믿음으로 만나고, 느끼고, 감격하는 체험적인 부활 신앙을 가져서 늘 기쁨과 소망이 가득한 삶을 사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