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권면(벧후 3:14-18)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성경을 소유하고 때를 따라서 성경을 읽고 들을 수 있다는 것은 크게 복된 일이요, 크게 감사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곧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계 1:3에서 "이 예언의 말씀을 듣는 자와 읽는 자와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다"고 말씀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다는 것보다 더 행복한 일은 없습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은 신비한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이 이 말씀을 자꾸 들으면 믿음이 생깁니다. 낙심한 사람이 이 말씀을 자꾸 들으면 용기가 생깁니다. 슬픔에 잠긴 사람이 이 말씀을 자꾸 들으면 위로를 받게 되고 기쁨이 생깁니다. 미련하고 우둔한 사람이 이 말씀을 자꾸 들으면 삶의 지혜가 생깁니다. 그것이 곧 말씀의 능력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내가 주의 계명들을 금 곧 순금보다 더 사랑하나이다"라고 했고 또 "내가 주의 계명들을 사모하므로 내가 입을 열고 헐떡였나이다"라고 했습니다(시119:127,131).
우리가 그 다윗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사모하는 마음으로 받는다면 반드시 은혜가 되고 복이 될 것입니다. 베드로전서는 신앙 때문에 핍박을 받아서 낙심한 성도들에게 위로를 주고 하나님 나라의 소망을 주고자 하는 목적으로 쓰여졌습니다. 베드로후서는 거짓 선지자들의 미혹을 받아서 신앙이 흔들리는 성도들을 바로잡아 주고자 하는 목적으로 쓰여졌습니다.
특별히 종말에 대한 성도의 자세에 대해서 지난 두 주간에 걸쳐서 7-13절까지의 말씀으로 말씀을 드렸습니다. 지난 주에는 종말을 맞이하는 자세 세 가지를 말씀하였습니다. 1)거룩한 행실과 경건입니다. 2)그날을 기다리고 간절히 사모하라는 것입니다. 3)하나님의 의가 실현될 천국을 바라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종말을 맞이하는 성도들에게 주는 마지막 결론입니다. 마지막까지 사도베드로는 성도들이 어떻게 하면 마지막 하나님앞에 설 때 부끄러움없이 기쁨으로 주님을 맞이하는 성숙한 성도의 모습을 가질 수 있을까를 권면하고 있습니다.
1. 평강 가운데 주님 앞에 나타나기를 힘써야 합니다(14-15절).
14절,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 여기서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라고 했는데 여기서 이것이 무엇입니까? 앞구절 13절에서는 "우리는‥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라고 했습니다. 12절에서는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바라보는 것은 주님께서 재림하실 것과 그분이 재림하심으로 이루어질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그것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바램이요 소망입니다. 그 바램과 소망이 없다면 우리는 참으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을 바라고 소망하는 성도들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고 하십니다.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 '샬롬'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두렵지 않습니다. 아니 기쁩니다. 하나님이 나의 기쁨입니다. 이전에는 환경이 좋아야 기쁨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하박국선지자처럼 외양간에 소가 없어도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없어도 구원의 하나님으로 인하여 기뻐하고 즐거워합니다. 이런 관계가 바로 평강의 관계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 안에 점과 흠이 없어야 합니다. 점이라는 것은 날 때부터 생긴 것이요, 흠은 그 후에 생긴 것입니다. 점이나 흠이 있으면 안됩니다. 이것은 제물을 생각나게 합니다. 하나님 앞에 드리는 제물은 깨끗해야 합니다. 점도 없고 흠도 없는, 깨끗한 제물이어야 하나님이 받으시는 제물이 될 수 있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의 죄를 대신하는 제물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게 희생된 제물의 가장 중요한 것은 피였습니다.
그 피로 죄인이 사함을 받고 깨끗해지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상징합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입니다. 우리의 죄가 주홍같이 붉고 검다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은 우리를 깨끗하게 하고 정결하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찬송가 268장 "주의 보혈 능력있도다 주의 피 믿으오 주의 보혈 그 어린양의 매우 귀중한 피로다 (2)육체의 정욕을 이길 힘은 보혈의 능력 주의 보혈 정결한 마음을 얻게하니 참 놀라운 능력이로다(3)눈보다 더 희게 맑히는 것 보혈의 능력 주의 보혈 부정한 모든 것 맑히시니 참 놀라운 능력이로다"
주의 보혈이 우리를 흠과 티가 없는 거룩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십자가의 보혈을 믿습니다.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 돌아가신 주님의 보혈이 바로 우리를 죄에서 정결하게 하는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구약의 제사가운데 속죄제사가 있습니다. 그런데 속죄제사를 드린 다음에 반드시 함께 드리는 제사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화목제사입니다. 화목제사는 관계의 회복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은 속죄제사의 능력만 있는 것이 아니라 화목제사의 능력도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평강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뭐라고 말씀합니까? '평강가운에 나타나기를 힘쓰라'고 하였습니다. 마치 결혼식 날을 앞둔 신부가 설레이는 마음으로 자기를 깨끗하게 단장하고 아름답게 꾸미는 것처럼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신부는 결혼식날 신랑 앞에 가장 아름답고 예쁜 모습으로 나타나기를 힘씁니다.
그리고 자신은 순결한 처녀임을 강조하기 위해서 하얀 드레스를 차려 입고 입장합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서는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성도는 세마포를 입고 단장한다고 하였던 것입니다. (계 19:8)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받은 것은 우리의 죄를 깨끗하게 하는 비결입니다. 그러나 거기서 만족하면 안됩니다. 우리가 그 깨끗함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성도의 옳은 행실이 뒤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옳은 행실이란 우리가 선하게 살아가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거기서 더 높은 삶의 차원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삶인 것입니다.
윤리적인 선행은 외형적인 것에 묶일 수 있지만 신앙적인 선행은 내면적인 것에서부터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선행입니다. 십자가의 은혜속에 살아가는 성도는 이웃사랑을 생명으로 압니다. 이웃을 사랑하지 않고는 진정한 생명이 그속에 들어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옳은 행실이 우리의 영혼을 거룩하게 하고 온전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힘쓰라'고 했습니다. 성결한 삶은 그냥 저절로 되지 않습니다.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이 패역한 세상이 우리를 그렇게 살도록 가만히 놓아 두지 않습니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타락한 본성이 있어서 가만히 놓아 두면 죄 짓는 데로 치우치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결한 삶은 힘쓸 때만 가능합니다.
매일매일 더러워진 손과 발을 씻고 거울 앞에서 흐트러진 자신의 용모를 고치고 다듬는 것처럼 우리도 매일 말씀의 거울 앞에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 보고 영적인 상태가 더러워지지 않도록 힘써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주님앞에 서는 그날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5절,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우리가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오래참으심에 대해서는 9절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벧후 3:9)"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기다림입니다. 마치 탕자가 집을 나갔을 때부터 아버지가 기다립니다. 언제 오려나 기다리는 아버지의 맘이 타들어 갑니다. 그러나 멈추지 않습니다. 돌아올 아들을 기다리며 하루하루를 보낸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 하나님은 아직 구원받지 못한 이들이 구원받고 주께로 돌아오기를 기다립니다.
뿐 아닙니다. 아직도 확신이 없어 머뭇머뭇거리는 신자들이 깨닫고 온전히 돌아서기를 기다립니다. 또 더 있습니다. 자기 중심적으로 신앙생활하는 성도들이 하나님 중심으로, 주장하는 자세로 살던 성도들이 섬기는 자세로 변화되기를 기다립니다. 그야말로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온전히 닮아 가기를 기다리십니다.
이런 기다림으로 인해 때가 되면 온전하게 조금도 부족함이 없이 정금같은 믿음의 사람으로 세워질 줄로 믿습니다. 지금 맘에 들지 않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저 미래를 바라봅니다. 하나님의 간섭과 섭리로 온전히 세우질 그날을 기다리며 오늘 씨를 뿌리고 물을 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버지 심정인 것입니다. 이런 심정으로 충성되이 봉사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성숙한 신앙으로 말씀위에 굳게 서야 합니다(16-17절).
16절,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 성경 말씀 중에는 해석이 쉽고 이해하기 쉬운 구절들도 있지만, 어떤 말씀 은 해석하기가 곤란하고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런 말씀들은 인위적으로 억지로 해석하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그런데 이단들과 거짓 선지자들은 꼭 그런 구절들을 무리하게 해석하려고 하고 전혀 엉뚱하게 해석해서 마치 진리라도 발견한듯이 주장합니다. 그것이 이단들의 공통된 면입니다. 그 들은 모두 성경을 자기들만 깨달았다고 이야기 하지만 아닙니다. 2000년 교회역사에서 수많은 신학자들이 성경을 연구하여 온 것이 오늘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신학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통으로 보지 못하고 문자 하나하나에 메여 있으면 온전한 해석이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성경을 풀고 비유해석을 푸는 것을 접하면 기가막힌 것같이 느껴지지만 아닙니다. 너무 잘 맞는다는 것이 바로 문제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신비는 우리가 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개혁자들은 성경이 가르쳐 준 데까지만 갑니다. 그 이상은 해석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위에 서지 못하고 굳세지 못한 신자들이 이단의 유혹에 쉽게 빠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난해한 말씀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빠지게 됩니다.
실제로 몇 가지 예를 들어 말씀드리겠습니다.
1)예전에 전도관의 교주인 박태선은 자신을 가리켜 '동방의 의인'이라고 주장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을 추종할 것을 종용하였습니다. 그가 자기를 동방의 의인이라고 주장하는 성경구절은 사 41:25 말씀입니다. "내가 한 사람을 일으켜 북방에서 오게 하며 내 이름을 부르는 자를 해 돋는 곳에서 오게 하였나니 그가 이르러 고관들을 석회 같이, 토기장이가 진흙을 밟음 같이 하리니"라고 했는데 이 말씀은 동방에 위치한 페르시아 제국의 고레스왕을 일으켜서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유대 민족을 해방시켜 준다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박태선은 "한 사람을 일으켜 북방에서 오게 하며"라는 말씀 중의 한 사람은 곧 박태선 자신이며, 북방에서 오게 한다는 말씀은 자신의 고향이 북한의 평안북도 덕천을 의미하며, 해 돋는 곳에서 오게 한다는 말씀을 극동의 해 돋는 나라 한국을 의미한다고 해석했습니다. 그의 해석대로 하면 그는 완전히 동방의 의인, 동방의 메시야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그렇게 엉뚱하게 해석하는 사람이나 그 엉뚱한 해석을 그대로 믿고 그를 메시야로 믿고 따른 추종자들이나 다 스스로 멸망에 이르는 자들입니다.
2)신천지의 교주 이만희는 자기가 보혜사, 이긴 자, 구원자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모든 성경이 상징과 비유로 되어 있다고 주장하고 비유를 깨닫지 못한 사람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라고까지 주장합니다. 또 계시록에 나오는 14만 4천명을 숫자 그대로 믿어 이 숫자가 인을 다 받게 되면 마침내 사탄이 없어지고 이 땅에 지상천국이 이루어지고 자기는 영생불사한다고 주장하고있습니다. 그래서 이만희가 죽기 전에 14만4천명을 채워야 된다고 야단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비유풀이 방식의 성경공부로 신자들을 미혹한 후 요한계시록 공부를 통해 정통교회 성도들이 가지고 있는 성경관과 구원관을 파괴하여 이만희 씨를 재림주로 믿게 만들어 버립니다. 정통교회는 구원이 없는 '바벨론'이고, 신천지에만 구원이 있다고 보기 때문에 정통교회를 자신들이 포교할 추수밭으로 여겨, 훈련된 추수꾼(위장교인)을 잠입시켜 성도들을 미혹하여 빼내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또 이만희는 경기도 과천이 바로 에덴동산이라고 주장합니다. 과천에 청계산이 있는데 바로 거기가 하나님의 계시가 시작된 시내산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계자가 시내계자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과천을 신천지 본부로 삼고 있다고 어처구니 없는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3)하나님의 교회라는 이름을 가진 안상홍증인회입니다. 이들의 교주 안상홍은 죽었는데 안상홍을 하나님이라고 섬기며 그의 재림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또한 안상홍이 예수님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다윗의 위로 왔는데 다윗의 재위기간이 40년이었고 예수님은 공생애 3년만에 돌아가셨으므로 나머지 37년을 채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안상홍은 30세에 안식교에서 침례를 바고 67세에 죽었으니 재림예수가 확실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종말론이 잘못되었습니다. 1988년 종말이 오며 14만4천명이 외에 모조리 멸망한다고 주장하여 충남 연기군 소정면 전의산에 모여 안상홍 재림을 준비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들은 지속적으로 해를 바꿔가며 시한부종말론을 성도들에게 유포하여 신도들의 가족으로 항의를 받아 kbs 추적60분에 방영되기도 하였습니다. 이들의 구원관이 잘못되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이름만으로 구원받을 수 없고 성령을 알고 유월절을 지켜야 구원받을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성령시대인 이 시대는 보혜사 성령으로 온 안상홍 하나님의 이름으로 구원받는다고 주장합니다. 뿐 만 아니라 재미있는 것은 안상홍의 부인이라고 자처하는 장길자가 바로 이 교파의 교주라는 것입니다. 장길자는 하나님이 양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남성인 아버지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여성인 하나님 어머니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성경적 근거가 없는 거짓 주장에 불과한 것입니다.
지금도 성경을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하면서 신자들을 미혹하는 이단이 많고 또 그들의 미혹에 빠져 끌려다니는 수많은 신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오늘 우리에게 두 번째로 권면하는 것은 그런 사람들의 미혹을 받아서 우리의 믿음이 잘못될까 조심하라는 것입니다.
17절에서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미리 알았은즉 무법한 자들의 미혹에 이끌려 너희가 굳센 데서 떨어질까 삼가라"고 말씀합니다. 그 당시 교회의 대표적인 이단은 영지주의자들과 유대주의자들이었습니다. 영지주의는 헬라 철학에 뿌리를 둔 이단으로서 한번 구원받은 사람은 어떤 죄를 지어도 괜찮다고 하면서 신자들로 하여금 쾌락을 추구하도록 만들었습니다. 또 유대주의자들은 모세 율법에 뿌리를 둔 자들로서 믿음으로 구원받을 수가 없고 율법을 다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여 성도들에게 무거운 올무를 뒤집어 씌워서 실족하게 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는 수많은 이단과 거짓 선지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최종 목표는 기성 교회 신자들을 미혹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미혹하는 방법은 성경의 난해한 구절들을 인위적으로 무리하게 해석하여 자기들만이 참 교회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성경을 기가 막히게 푼다는 곳이나 신기한 역사가 일어난다는 곳에는 가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복음은 보편적인 것이며, 주님의 말씀은 누구나 다 알아들을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3.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18절)
18절에서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그에게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곧 우리의 신앙이 자라야 한다는 뜻입니다. 영적인 수준이 높아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자라지 않는 신앙은 문제가 큽니다. 신앙은 반드시 자라고 성숙해야 합니다. 언제까지나 미숙아의 수준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됩니다. 자식을 낳았는데 자라지 않으면 부모의 마음이 안타깝고 아픔니다.
정상적으로 자랄 때 부모는 자식을 위해서 수고한 보람을 느끼게 됩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신앙 생활한 지가 벌써 왜 오래 되었음에도 신앙이 자라지 않으면 목자의 마음이 근심이 되고 하나님의 마음도 편하시지 않습니다. 성도들의 신앙이 잘 자라서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될 때 목자는 수고하고 양육한 보람을 느끼게 됩니다. 우리의 믿음이 어디까지 자라야 할까요?
엡 4:13에서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라고 했습니다. 자라야 되는 이유는 거짓 선지자들에게 미혹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마음을 기쁘시게 해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벧후 2:14에서 "굳세지 못한 영혼들을 유혹하며"라고 했습니다. 신앙 생활을 한다고 하더라도 자라지 못한 신앙이나 굳세지 못한 영혼은 사탄 마귀의 밥이요 거짓 선지자들의 일차적인 타켓입니다.
성숙하지 못한 신앙은 교회에 다녀도 늘 시험을 받아서 실족하고 넘어집니다. 모두 성숙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특히 믿음이 자라야 하되 두 가지 측면에서 자라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서 자라야 하고 예수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야 합니다. 강해설교자 위어스비는 말하기를 "은혜가 없는 지식은 무서운 무기가 되고 또 지식없는 은혜는 천박하다. 그러나 은혜와 지식이 합쳐져서 자라는 신앙은 교회를 튼튼히 세우는 놀라운 도구가 된다."라고 했습니다.
신앙 생활을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없이 은혜만 은혜만 하는 사람은 뿌리가 없는 신앙처럼 쉽게 무너집니다. 반면에 은혜가 없이 성경 성경하면서 지식만 갖춘 사람은 늘 비판적이고 교만해집니다. 남을 쉽게 판단하고 정작 자기 자신은 지식대로 행동하지 않는 죽은 신앙으로 전락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이 자라되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서 자라야 하고 예수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야 합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저에게 있을 것입니다.' 은혜와 지식 안에서 신앙이 성숙하게 되면 절대 시험에 들거나 미혹을 받아서 넘어지는 일이 없습니다. 그래서 결국 그런 사람들이 주의 나라에서 영생 복락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종말을 맞는 우리에게 정말 중요한 것은 하나님앞에 부끄러움없이 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점과 흠이 없이 평강가운데서 주님앞에 설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성숙한 신앙으로 말씀 위에 굳게 서 있어야 합니다. 또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야 합니다. 그래서 바른 신앙으로 성숙한 믿음을 갖고 주님을 기쁘게 맞이할 수 있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