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마 3:1-4)
우리는 그 동안 마태복음 1장과 2장을 통해서 이 땅에 메시아로 오시는 예수님의 왕되심의 역사를 살펴보았습니다. 예수께서 유대인들이 오랜 역사를 통하여 기다려 왔던 메시야이며 왕이라는 사실을 증거하기 위해서 1장에서 족보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어떻게 이 땅에 출생하시게 되었는지에 대한 경과가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왕으로 오신 예수님, 물론 영원한 하늘나라의 왕이었지만, 세상의 권세를 잡은 헤롯 왕은 자기 왕위에 대한 도전으로 오해하고 예수님을 죽이려고 동방박사에게 알려 줄 것을 지시하였지만 실패로 돌아가자 베들레헴과 그 인근의 두살 이하의 남자아이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하였습니다. 이처럼 세상은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심을 미워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안전한 애굽으로 피신하게 하셔서 그곳에서 위기를 모면하게 하시고 헤롯 왕이 죽은 후에 그 부모를 다시 고국으로 부르셔서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제 그로부터 30년 세월을 훌쩍 뛰어 넘어서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기 위해 6개월 먼저 와서 준비한 세례요한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여러분, 대통령이 해외 순방을 나가시면 어떻게 합니까? 대통령이 나가시면 어느 날 갑자기 나가시는 것이 아니라 미리 예기된 일이기 때문에 먼저 청와대에서 의전 담당관, 경호 담당자들, 그 밖의 외교적인 일에 책임을 맡은 분들이 그곳에 갑니다. 대통령께서 유숙하실 호텔을 어디로 정해야 될는지 또 짧은 기간 머무시면서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일을 하실 수 있도록 미리 가서 준비하게 됩니다.
이처럼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께서 하늘보좌를 내어 놓으시고 이 땅에 오실 때 마땅히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는 일이 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예수님을 대적하고 죽이려는 사람, 시끄럽게 떠들고 그것을 이용하여 자기 욕망을 채우려는 사람들로 가득했습니다. 그렇지만 그가운데에서도 예수님의 길을 진정으로 예비한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가 바로 세례 요한이었습니다.
특별히 3장은 예수님의 길을 예비했던 세례 요한이 어떻게 그 길을 예비하였는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세례 요한은 초림의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는 자라고 한다면 오늘 우리에게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던져 주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재림의 예수님을 맞이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례요한으로부터 어떻게 준비해야 할 지를 배울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
1. 사역 현장은 유대광야이었습니다(1).
1절에 "그 때에 세례 요한이 이르러 유대 광야에서 전파하여 말하되", 세례 요한이 유대 광야로 나아가서 전파했습니다. 누가복음 1장 80절에는 아주 자세하게 세례 요한에 대해서 기록하면서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이가 자라며 심령이 강하여지며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들에 있으니라" 요한이 공식적으로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는 자로서의 사역을 시작하기 이전부터 그는 유대 광야에서 오랫동안 머물렀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왜 그가 광야에 머물렀을까요? 그 거칠고 험하기도 하고 사람이 살지 않고 들짐승만 간간이 나타나는 사막과 같은 곳에서 그 오랫동안 머물면서 있어야만 되었을까요? 역사적으로 유대인에게서 광야, 빈들은 하나님을 만나는 곳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요한이 이 중차대한 사명을 감당하기에는 인간으로서의 한계를 느꼈을 것입니다. 너무 부족한 것을 그가 깨닫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으로부터 능력을 입기 위해 그곳에서 기도하며 말씀을 묵상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능력을 힘입기 위해서 그는 그곳에서 하나님과의 영적인 교제를 했던 것이 틀림없습니다. 이 세례 요한만이 아니라 성경에 나타났던 하나님의 사람들은 먼저 하나님께 쓰임받기 전에 광야로 나아갔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구약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했던 위대한 지도자 모세도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한 것은 아닙니다. 그가 바로 왕궁에서 40년 동안 애굽의 학문과 기술을 다 통달했습니다. 그 다음에는 하나님께서 그를 미디안 광야로 몰아 내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거기서 그는 40년간이나 양들을 치며 목동의 삶을 통해 연단의 삶을 살아갑니다.
그 때 그는 거기서 하나님을 만났고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40년이라고 하는 길고 긴 광야에서의 경험이 그에게는 준비의 기간으로서 반드시 필요한 기간이었습니다. 신약의 사도 바울을 보아도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는 큰 은혜를 체험한 다음 바로 사람들을 만나서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고 아라비아로 가서 3년을 지냈습니다. 거기도 사막입니다. 광야입니다. 사람으로서는 살 수 없는 빈들로 가서 오랫동안 기도하고 하나님과 깊은 영적 교제로 준비한 다음에 비로소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왔습니다.
갈라디아서 1장 17절을 보면 "또 나보다 먼저 사도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는 사도 바울처럼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능력을 받고 신비의 체험했어도 그것만 가지고는 불완전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세우시고 쓰실 때도 그냥 쓰신 것이 아니라 먼저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는 것이 우선순위였습니다.
(막3:14)"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주님과 함께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사람으로 온전히 쓰임받기를 원한다면 먼저 주님과 함께 있는 시간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앞에 나아와서 엎드려 기도하고 깊은 교제가 먼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마음을 알고 주님의 생각을 알고 사도바울처럼 주님의 심장을 가져야 주님의 일을 제대로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오늘 우리의 현실을 어떻습니까? 주님과 함께 하는 시간 없이 주님의 섬기고 있지는 않습니까? 주님이 먼저 돕는 은혜를 주신다고 약속하셨는데 주님의 은혜없이 주의 일을 하면 머지않아 힘 빠지면 시험에 들고 목적을 상실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일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앞에 나아와 말씀과 기도로 일할 수 있는 능력을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찬양단이든 성가대든 운전봉사를 하든 기도가 먼저인 것입니다. 기도로 충분히 은혜를 체험하고 나아가면 무엇을 하든지 힘이 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주의 일을 하기 전에 먼저 주님앞에 나아와 주님이 위로부터 주시는 능력과 은혜를 힘입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도 교회를 통해서 우리에게 여러가지 책임이 맡겨집니다. 그런데 이 직분에 대해서 우리는 경건한 두려움을 느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혼자가 아니라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공동체 전체에게 미치는 영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머리되신 주님의 음성을 듣고 주님의 마음을 품으면 교회전체가 기쁘고 즐겁고 행복한 것입니다. 무엇을 하든지 은혜가 보이고 은혜가 보이면 감사가 나오고 그래서 서로를 세워주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는 꼭 하나님과 나만의 "광야의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여기 세례 요한처럼 빈들에 나아가서 오직 하나님과만 깊은 교제를 가지는 이런 준비의 과정이 필요합니다. 물론 우리도 미디안 광야라든지 아라비아라든지 이런 데를 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마는 그것은 반드시 지역적인 의미만은 아닙니다. 우리가 주의 일을 하기 전에 먼저 광야의 시간을 가져 하나님의 은혜로 충만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사역의 메시지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였습니다(2).
2절,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였으니" "회개하라!"는 말은 보통 하는 말이 아닙니다. 아주 강력한 명령입니다. 회개(메타노에오)라는 말은 두 단어의 합성어입니다. '다르다'는 뜻의 '메타'라고 하는 말과 '생각'이라는 뜻의 '노에오'라는 말이 합쳐져서 된 말로 원뜻은 '생각을 다르게 하라', '생각을 고쳐라'가 됩니다.
따라서 회개란 단순히 어떤 사건에 대해 후회하거나 슬퍼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고 보다 더 깊은 뜻이 그 안에 있는 것입니다. 곧 잘못된 것에서 돌아서는 것이요 방향을 바꾸는 것이요 결정된 마음과 뜻에서 돌이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회개에는 행동이 뒤따라야 합니다. 교회에서 성도들이 그렇게 많이 회개에 대한 설교를 듣고도 삶이 변하지 않는 것은 회개가 아니라 '후회'를 했기 때문입니다. 회개란 행동의 변화입니다.
어떤 사람은 부흥회 때마다 눈물을 흘리며 가슴을 치고 회개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이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자기 눈물에 자기가 속는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 눈물 흘리는 것으로 자신이 거룩해진 줄로 착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거기서 끝나고 맙니다. 그것은 회개가 아니라 후회입니다. 회개에는 죄를 후회하고 슬퍼하는 애통이 뒤따르지만 슬픔 자체가 나의 행동을 바꾸는 것은 아닙니다.
세례 요한이 여기서 말하는 회개란 지금 나의 죄악을 인정하고 하나님 앞으로 돌이키는 것입니다. 8절에서 세례 요한은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합니다. 즉 눈물로, 입으로 하는 회개가 아니라 열매있는 회개입니다. 예수님은 잎만 무성한 나무는 찍어 버리라고, 불태우라고 하셨습니다. 폼(form)만 좋은 크리스찬들이 참 많습니다. 예수를 잘 믿을 것같이 생긴 사람들은 많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에게 회개에 합당한 열매가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변화되지 않는 크리스찬, 열매가 없는 크리스찬은 불에 타다 남은 나무처럼 아주 불쌍하고 보기 흉합니다.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사람은 예수 안 믿는 사람이라기보다는 예수 믿다가 그만둔 사람, 회개하면서도 열매가 없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들은 믿는다고 말하니까 전도할 길도 없습니다. 차라리 안믿는다고 하면 전도라도 할 수 있지만 믿는다고 하니까 화입니다.
그저 교회나 왔다갔다하고 찬송가나 높이 부르고 마치 그것이 다인 양 다니지만 그 생활을 보면 회개의 열매가 없습니다. 회개란 열매입니다.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9절). 이 말은 회개에는 지위나 문벌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입니다. 높은 사람이라고 회개를 덜해야 하는 법은 없습니다. 또 돈 많은 사람이라고 하나님이 봐주시지도 않습니다. 누구든지 회개해야 합니다. 이것이 세례요한의 메시지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그 말에 아무런 수식어를 붙이지 않고 단순히 회개하라고만 말했는데 그 말이 불처럼 역사했던 것입니다. 회개는 성경전체의 중심 메시지입니다. 예수님께서도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초대교회 오순절날 성령이 임했을 때 베드로가 한 말이 무엇입니까?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행 2:38)였습니다.
사도 바울도 사도행전 26장 20절에서 회개를 다음과 같이 정확하게 요약했습니다.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회개에 합당한 일을 하라'. 눈물 안 흘려도 좋습니다. 폼 안 잡아도 좋습니다. 열매만 있으면 됩니다. 변화만 받으면 됩니다. 이것이 더 중요합니다. 우리 교회의 영적 대부흥은 여러분 한 사람의 진정한 회개로부터 시작될 것입니다.
교회당이 아름답다고 해서 부흥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많이 모인다고 해서 부흥하는 것이 아닙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정말로 회개하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가 가정과 사회, 직장과 교회에서 보여질 때, 이것이 영적 대부흥입니다. 싫은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회개가 좋을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자존심 상하는 것이고, 자기를 깨뜨려야 하고, 자기의 잘 살던 스타일을 바꿔야 하는 것인데 기분 좋을 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회개 없는 부흥은 없습니다.
회개 다음에 무엇이 옵니까? '천국'입니다. 그렇게 회개하라고 외친 세례요한의 메시지의 동기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천국 때문입니다. 천국이 가까왔으니 회개하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천국 없는 회개는 회개가 아닙니다. 요한의 메시지는 천국의 왕이신 예수께서 바로 지금 여기에 등장하실 것이니 준비하라는 뜻입니다. 이때 최대의 준비는 꽃다발이나 대합창이 아니라 회개입니다. 천국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런데 천국은 장소의 개념이 아니라 통치의 개념입니다. 곧 천국은 어떤 장소라기보다는 누가 통치하느냐가 더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이 오셨다는 말을 천국이 임했다는 말로 직접 해석을 한 것입니다. 천국의 지배자요 통치자이신 성자 하나님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것은 천지가 진동할 사건입니다. 예수가 계신 곳이 천국이요 예수가 지배하는 곳이 바로 천국입니다. 예수는 구약의 예언대로 이 세상에 메시야로 오셨고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구원을 완성해주셨습니다. 이제 그분은 다시 오셔서 완전한 심판을 하실 것입니다.
천국은 이미 우리에게 와 있습니다.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입니다. 지금 우리는 천국을 누릴 수 있습니다. 여러분! 매일매일 천국을 살수 있는 특권을 우리에게 주신 것을 감사하십시오. 구원을 노래하십시오. 의롭게 된 것을 감사하십시오. 천국은 지금 우리 가운데 있습니다. 이것이 임마누엘입니다. 주님은 우리와 함께 거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 천국을 누리며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예수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마지막으로 세례 요한의 사명과 사역에 대해서 생각해보겠습니다(3-4).
그의 사명은 3절 말씀입니다. "3절, "그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자라 일렀으되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가 오실 길을 곧게 하라 하였느니라" 누가복음 3장 5-6절에는 "모든 골짜기가 메워지고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고 굽은 것이 곧아지고 험한 길이 평탄하여질 것이요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리라 함과 같으니라"고 했습니다.
세례 요한의 사명은 간단합니다. 주의 길을 예비하고, 주의 길을 평탄케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들의 사명은 무엇입니까? 사도바울은 사도행전에서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는 일이라고(행20:24)고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이 목사나 선교사가 아니더라도 여러분의 사명은 바로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는 일입니다. 왜 복음을 증거해야 합니까? 1)주님의 지상명령입니다. 2)죽어가는 영혼을 살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3)이웃사랑의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어디에 있든지 사업장, 직장, 가정에서도, 어디에서든 우리는 사명이 있음을 잊지말고 사명에 충성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명은 주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일입니다. 그러므로 핑게할 수 없습니다. 가을은 결실의 계절입니다. 결실은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농부들의 땀방울의 열매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에게 주어진 환경속에서 전도대상자를 찾아 먼저 마음에 품으십시오. 그리고 기도할 때마다 그들의 이름을 부르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십시오. 그리고 나아가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십시요. 그냥 말로만이 아니라 행동으로 섬겨야 합니다. 그들을 감동시켜야 합니다. 그들이 남편이든, 이웃이든 누구든 그들의 마음속에 여러분의 진정한 마음을 드러내십시오. 성령님이 도와주실 것입니다. 전도에 있어 153운동을 제안합니다.
요한복음 21장을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이 바다에서 고기를 잡는 제자들을 찾아가셔서 오른 편에 그물을 내리라고 명령하셨을 때 그대로 순종하였더니 고기가 그물 가득히 찼습니다. 몇 마리인가 세어보았더니 큰 물고기가 153마리였습니다. 여기서 153운동이 나왔습니다 한 사람이 5명의 태신자를 품고 복음을 전해서 3명을 주님께 인도하는 운동입니다. 함께 같이 해보겠습니다. "내가 5명의 태신자를 품고 3명을 주님께 인도한다" 11월 17일이 추수감사주일이면서 새생명전도축제의 날입니다. 우리가 이번에는 구호로 끝나지않고 열심히 전도해서 영혼구원의 결실을 맺는 기회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나의 교만하고 불충했던 마음을 회개하며 겸손히 주님을 영접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이 주의 길을 예비하는 것입니다. '골짜기가 메워지고'라는 말은 주님을 영접하기 위해서 우리 안에 있는 낮은 골짜기를 채워야 한다는 뜻입니다. 즉 우리 속의 열등감, 낮은 자존감을 치료해야 합니다. 열등감이 많은 사람들은 예수를 믿는 데 어려움이 많습니다. 왜냐하면 열등감을 가지고 있으면 예수를 믿어도 기쁨이 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진다'는 말은 우월감을 깎아내려야 한다는 뜻이고 '굽은 것이 곧아진다'는 말은 못된 성격들을 바르게 만든다는 뜻이요 '험한 길아 평탄하여진다'는 말은 우리의 부정적인 과거들을 깨끗이 청소한다는 뜻입니다. 물론 이것은 사회적으로도 적용될 수 있을 것입니다. 주의 길을 예비한다는 말의 또 다른 의미는 아직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모두의 사명입니다.
이것 때문에 우리들을 지금까지 살려 두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면 이 사명을 이루기 위한 세례 요한의 삶을 살펴보겠습니다. (4절)"이 요한은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이었더라". 세례요한은 꾸미지 않았습니다. 자연 그대로의 삶을 살았습니다. 화려한 제사장옷을 입은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광야의 사람의 모습 그대로였습니다.
약대 털옷, 가죽띠, 메뚜기, 석청은 바위틈에 나는 꿀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제사장들의 그 화려한 옷과 세례 요한의 모습은 완전히 대조를 이룹니다.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세대에 흠이 없고 순전한 모습을 사모했던 사도바울처럼 세례요한은 깨끗했습니다. 순수했습니다. 외모로 자기를 치장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주신 능력으로 하나님이 주신 영적권위로 광야의 외치는 자의 소리가 되어 사명을 다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능력이 아닙니다. 외형적으로 무언가 많이 가져야 주를 위해서 일한다가 아닙니다. 정말 필요한 것은 하나님이 주신 사명에 불타는 마음입니다. 사명을 위해 생명을 헌신입니다. 복음을 위해 충성된 삶입니다. 이것이 세례요한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사회개혁입니까? 교육사업입니까? 아니면 정치참여나 노사 문제입니까? 물론 이런 것들도 중요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다 이차적인 것입니다. 이것보다 더 중요하고 다른 모든 것이 다 잘 될 수 있는 근본적인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천국을 소유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가 지금 하나님 앞에 선다면 부끄러움이 없겠습니까? 세례요한 처럼 사명을 위해 세상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입니다. 다시 오실 주님을 예비하는 것입니다. 육체가 원하는 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우리안에 계신 성령의 감동을 따라 순종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는 거룩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