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한 영혼(누가복음 15:1-7)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라이언 일병 구하기」(Saving Private Ryan)이라는 전쟁영화가 있습니다. 2차 세계대전에 라이언 한 집안에서 네 형제가 전쟁에 나갔는데, 이미 세 형이 전사했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어머니는 세 아들을 잃어버리고 비탄에 빠졌습니다. 미국 정부는 적진에 들어간 네 번째 아들 제임스 라이언을 반드시 찾아오라고 명령합니다. 밀러대위는 일곱 명의 대원을 데리고 그를 찾아 나섭니다.
여덟 명이 한명을 구하러 가라는 무모한 명령을 내립니다. 1명의 목숨이 8명의 목숨과 바꿀만한 가치가 있습니까? 도대체 세상에 이런 이상한 계산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자 밀러대위는 대답합니다. 라이언은 착한 사람일 거야. 우리가 구해야 할 가치가 있을 만큼. 몇몇 대원을 잃어가면서 드디어 라이언 일병을 찾아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마지막 전투에서 라이언 일병만이 살고 밀러대위와 소대원 전원이 죽습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잠시 영화의 마지막 부분을 보시겠습니다)
밀러대위는 라이언 일병에게 말했습니다. "나는 네가 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었기를 바란다. 이 모습들을 감사히 받아라!" 이런 얘기입니다. "오직 너 하나를 살리기 위해 여러 명의 목숨을 바쳤다. 그들의 용기와 희생으로 너는 살아났다. 그들은 더 이상 바칠 것이 없다. 그러나 너에게는 있다. 너는 그들의 희생에 걸맞는 인생을 살아가라. 죄책감에 빠지지 말고 그들이 행한 일을 감사히 받아라" 이것이 영화의 메시지요 결론입니다.
예수님에게는 언제나, 많은 무리들이 따라다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관심은 언제나, 한 사람 한 영혼에게 향해 있었습니다. 잃어버린 한 사람, '잃어버린 한 영혼'을 주목! 예컨대, 수가성의 우물가에서 만난 한 여인, 여리고에서 만난 삭개오, 베데스다 연못가에서 만난 38년 된 한 병자, 예수님은 언제나, 잃어버린 한 사람, 한 영혼을 찾아가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육신의 질병을 고쳐 주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지친 영혼'(상한 영혼, 깨진 영혼)을 위로하시고, 치료하시고, 회복해주셨습니다.
이것은 오늘 말씀 속에서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특별히 눅 15장에는 '3가지' 예수님의 이야기 나옵니다. 공통점 있습니다. 성경보세요? 단락제목 '잃은 양을 찾은 목자비유', '잃은 드라크마를 찾은 여인의 비유'(은전), '잃은 아들을 되찾은 아버지 비유'(돌아온 탕자) 공통점 3가지? "하나를 잃어버렸다, 그리고 되찾았다, 기쁨으로 잔치하다"
그러니까 이 3가지 이야기의 주제는, 결국 한 가지입니다. '잃어버린 한 영혼'을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지극한지 또한 찾았을 때, 하나님의 기쁨이 얼마나 큰지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본문 4절,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 어느 날 해가 저물자 양을 치던 목자는 양떼를 우리 안에 들입니다. 그리고 양의 숫자를 세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평소부터 유난히 목자의 말을 잘 안 듣고 딴 길로 가기를 잘하던 양 한 마리가 보이지를 않는 것입니다. 큰일이 났습니다. 날은 어두워져 가고, 이대로 두면 맹수에게 먹히거나 어떤 위험에 처할지 모릅니다.
광야에서 잃어버렸다는 것은 십중팔구 위험에 처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목자가 찾지 않는다면 죽을 수 밖에 없습니다. 평소에 말도 안 듣고 속 썩이더니 잘됐다. 콧노래 두 다리 뻣고 잠잘 수 있겠습니까? 아닙니다. 목자는 지금 99마리를 그냥 들에 두고,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아 나섭니다. 셈이 빠른 우리로서는 이해가 안됩니다.
99마리가 중요합니까? 한 마리가 중요합니까? 그런데도 목자의 관심은 '잃어버린 한 마리 양' 지금, 길을 잃고 위험에 처해있는 죽을 수 밖에, 한 마리 양을 생각하니까 목자의 마음이 안타깝고, 속이 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주님의 마음입니다. 어제 김해시기독교연합회에서 성탄츄리점등식을 했습니다. 많은 분들이 참석했습니다. 왜 우리가 성탄츄리를 점등합니까? 이 땅에 찿아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리기 위해서입니다.
그 모든 하늘 영광을 버리고 가장 낮고 천한 곳에 찿아오신 예수님은 바로 선한 목자이십니다. (요 10:11)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처럼 잃어버린 영혼을 구원하시기 위해 이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시고 우리를 위해 피흘려 죽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목자는 잃은 양을 찾아 나섭니다. 언제까지요? 4절 끝, "찾아내기까지"(찾을 때까지, 끝까지) 저는 항상 이 대목에서 은혜를 받습니다. 대충대강, 몇번 찾다가 하다가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찾아내기까지, 찾을 때까지, 끝까지 찾으시는,, '목자의 지극한 마음')
산넘고 물건너 산등성이와 골짜기를 헤매면서 양의 이름을 부릅니다. 안타까운 목자의 음성은 골짜기를 메우고 메아리치며 퍼져 나갑니다. 한참을 헤매던 목자는 주인의 목소리를 듣고 처량한 목소리로 우는 양의 소리를 듣습니다. 어린 양은 가시덤불에 걸려 꼼짝하지도 못한채 지쳐 쓰러져 있습니다. 목자는 가시에 찔리는 것도 잊은 채 뛰어들어 양을 가슴에 안으며 기뻐합니다.
5절, "또 찾아낸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휘파람 불며 돌아오는 목자의 모습이 보입니까? 고집 불통인 죄인들이 죄악과 방탕의 길로 나갔다가 자신의 힘으로 돌아올 수 없으므로 목자의 힘에 의지하여 돌아오는, 애처롭지만 승리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장면입니다. 더 계산이 안 되는 장면이 다음에 나옵니다. 목자가 그렇게 해서,, 끝내는 잃은 양을 찾습니다.(양을 어깨에 메고 돌아오는데, 둥실둥실 춤을 춘다) 그리고는 집으로 돌아와 무엇? '동네잔치'를 하지요!(이유? 5, 6절;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았다고,,) 이 대목에서, 우리는 전혀 셈이(이해) 안 되죠!
6절,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 하리라" 생각해보세요? 목자니까, 잃은 양을 찾아 나서는 것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양을 찾았다고, 그 기쁨에 춤을 추는 것까지는 이해가 되는데, 그런데 동네잔치?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돈으로 따지면,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런데도 그것보다 몇 배 몇 십 배를 들여 잔치를 합니다. 계산이 안 되는 목자가 아닙니까? 잃은 영혼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 이보다 더 잘 표현된 곳이 있을까요? 주님이 자신에 대하여 친히 하신 말씀을 들어 보십시오. (요 10:14-16)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저희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유대 격언에는 '하나님을 거역하던 자가 이 세상에서 멸망하면 하나님 앞에서 기쁨이 된다' 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태도는 그것과는 정반대입니다. 주님은 '나와 함께 즐기자'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이것이 '목자의 마음'입니다. '잃어버린 한 영혼'을 향하신, 하나님의 지극하신 사랑(긍휼)입니다. '잃어버린 한 영혼'을 향하신,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저와 여러분을 향하신, 셈할 수 없는(포기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긍휼)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여기서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이 누구를 가리키는 것? 바로, '저와 여러분'(한 사람) 성경은 말씀하기를,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이전에, 우리 모두는 다 하나님을 떠나 살던(등지고 살던), 길 잃어버린 양이었습니다.(내 생각, 고집, 욕심대로 살다)
그런데, 그 잃어버린 양을 찾기 위해서(나를) 이 땅에 예수님을 보내셨고(십자가에 내어주시기까지) 저와 여러분을 찾으신 것입니다. 이것이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지극하신 사랑,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신 하나님의 긍휼이다. 그리고는 찾았을 때의 하나님의 기쁨을 7절에서 표현을 합니다. 7절,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천국 잔치를 합니다. 집을 나갔던 탕자가 돌아 올 때,, 아버지는 벗은 발로 달려가서, 목을 안고(입 맞추고), 제일 좋은 옷, 가락지, 신, 살진 송아지(잔치)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덩싱덩실 춤춘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기쁨)이 바로 이와 같은 것입니다. '잃어버린 한 영혼'을 향하신,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긍휼, 기쁨)이 저와 여러분의 심령에 충만히 부어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우리 주변에는, 안타깝게도 '잃어버린 영혼'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멀리 갈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포기할 수 없으신 것처럼, 우리도 포기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남편,아내,자녀,부모,친구... 한두 번 얘기해서 안 된다고 포기할 수 있습니까? 찾을 때까지 돌아올 때까지, 끝까지, 왜그렇습니까?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나를 사랑한 것처럼 나도 저들을 사랑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기도를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하나님심판을 듣고는 무릎 꿇어 기도합니다. 하나님 그 성에 의인 50명이 있으면 어떻게 하시겠다고 하셨습니까? 용서하겠다! 45명-40-30-20-10,, 아브라함이 이렇게 까지 매달리는 이유? 그곳에 조카 롯이 살고, '롯만은 구원해주소서!' 아브라함의 심정은 포기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어머니는 믿지 않는 아들(남편)을 위해서 '밥을 풀 때마다' "하나님! 사랑하는 아들, 딸을 구원해주소서!(남편), 그리고 실제로, 어떤 가정은 아버지 장례식 때(살아생전에는 그렇게 거절하다가, 아버지의 신앙을 받아드리고 신앙생활을 하겟다고 결단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잃어버린 한 영혼'입니다. '잃어버린 한 영혼'을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지극한지 (찾았을 때, 그 기쁨) 그 사랑(긍휼, 기쁨)을 가지고, '잃어버린 한 영혼'을 주님께로 인도하십시다.
그러면 잃어버린 한 영혼을 구원하는 전도의 사명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보겠습니다.
첫째, 무엇보다 하나님이 기뻐하실 일인 것입니다.
(엡 5:10,11) 『[10]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둠의 일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 (고전 1:21)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오늘 본문에 보니 예수님이 비유로 말씀하시기를 주인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 한 마리를 잃으면 아흔 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한 마리를 찾으러 다닌다고 하였습니다. 그 한 마리를 찾은즉 얼마나 기쁜지 동네 사람들을 불러다 잔치까지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한 사람이 구원 받을 때 우리 주님께서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둘째, 사람의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대통령, 재벌, 국회의원이 된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오늘 그 생명 부름 받아 지옥 간다면 세상의 부귀 영화 아무 쓸데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에게 미래, 영원한 세계가 없다면 우리가 가장 비참한 사람일 것입니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가 않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미래의 소망을 가지고 전도하는 자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가 다른 때는 몰라도 성도가 병들어 입원하였다고 하면 어떻게 해서든 병원심방을 갑니다. 사람이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 서 있을 때는 방황하게 되는 것입니다. 절대자를 찾게 되는 것이지요. 전도하기 가장 좋을 때가 바로 사람이 사경을 헤맬 때입니다. 아무리 항우 장사라 할지라도 죽음의 문턱에서는 약해지는 법입니다.
믿음 좋은 성도가 있었습니다. 미국 이민을 가서 그 고생을 하면서도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열심히 전도를 하였습니다. 어느 날 골목을 지나며 어느 큰 저택 옆을 지나는데 그 집 초인종을 누르고 싶어졌습니다. 물론 행여 망신이나 당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도 생겼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감동하심이 계속되었고 한 번 두 번 벨을 눌렀습니다. 돌아갈까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자꾸 누르라고 다그쳤습니다. 세 번, 네 번 눌렀는데 한 노인이 문을 열었습니다. 이 성도가 뛰는 가슴으로 '예수 믿으세요' 말하고는 전도지를 건네 주고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다음날 그 사람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그 전도지에는 전도하는 사람의 신분이 확실함을 나타내기 위해 전도자의 개인 연락처가 기록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전화를 한 그 사람이 해준 이야기는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자기가 막 목매어 자살하려는데 초인종이 자꾸 울리더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할까 망설이고 있는데 네 번째 할 수 없이 쫓아 나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전도지를 보며 생명의 길을 찾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할렐루야 !
셋째, 복음은 들려줘야 하기 때문입니다.
(롬 10:14)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롬10: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우리 구주이심을 알려 주어야만 합니다. 전파하지 않고 어떻게 듣겠습니까?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막 16:15) 주님이 명령하십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전도를 배울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샘에서 물이 솟아나듯 전도는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것입니다. 열매 없는 나무, 그것은 죽었거나 병들었거나 아니면 아직도 성숙하지 못한 나무입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요15:5상) 그렇습니다. 우리가 주님께 붙어 있으면 과실은 절로 맺힙니다.
열매가 없다는 것은 주님께 붙어 있지 않다는 것이요 주님과는 상관이 없는 자라는 말입니다. 은혜받은 첫 증거가 무엇입니까? 전도입니다. 정말 하나님 살아 계신 것과 천당 지옥이 믿어지면 전도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넷째,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입니다.
한 중풍병자가 침상에 뉘여 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를 보고 병이 나아라 하신 것이 아니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마9:2)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그러셨습니까? 그것은 그 질병이 근본적으로 죄 때문인 것을 깨우쳐 주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우리들 사회에서 일어나는 각종의 부정 부패 비리의 근본 원인이 무엇입니까? 바로 죄입니다. 때문에 전도의 사명이 그렇게도 중요한 것입니다.
근본적으로 우리 영혼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죄로부터 구원 받지 못하면 우리 개인 그리고 나아가 이 사회 이 나라에 소망이 없는 것입니다. "형제들아 내가 여러번 너희에게 가고자 한 것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너희 중에서도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로되 지금까지 길이 막혔도다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롬1:13-14) 사도 바울은 그렇게 고백하였습니다.
더구나 자기와 한 피를 나눈 자기 동족을 위한 전도의 열정은 더욱 뜨거운 것이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노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롬9:1-3). 극단적으로 말해서 나를 지옥에 팔아서라도 내 동족을 구원했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런 안타까운 심령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단 12:3)"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이번 주토요일 12월 7일 오후7시 가족초청잔치 행복한 만남행사를 합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가족, 잃어버린 한 영혼을 찾으신 주님의 심정으로 저들을 초청하여 살아계신 주님을 만나고 변화되는 역사 나타날 뿐 만 아니라 우리 모두 주님의 지상명령 따라 많은 영혼 주님께 돌아오게 하여 하늘의 별과 같이 빛나는 지혜 있는 양문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