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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문의 메시지

의를 위하여 박해받은 자(마5:10-12)

작성자야베스|작성시간14.04.06|조회수184 목록 댓글 0

의를 위하여 박해받은 자(마5:10-12)

 

   오늘은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팔복의 마지막으로 여덟번 째 복을 살펴볼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을 갖고 산다는 것은 세상을 거슬러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딪치는 것도 많고 힘든 일도 참 많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박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가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은 이렇습니다.  "의를 위해서 박해를 받은 사람은 복이 있다." 이 얼마나 놀랍고 충격적인 말입니까?

   박해와 고난받는 것이 무슨 축복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손해보고 억울함을 당하는 것이 무슨 축복이라고 말합니까? 이 말씀은 예수를 적당히 믿고 안심하고 살아가고 있는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도전과 충격을 주는 말씀입니다. 도대체 왜 박해를 받는 것이 복이라고 하셨는가? 의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기독교의 본질을 보여주는 말씀이고 참된 그리스도인의 모습과 성품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신약에서는 의를 위해서 박해를 받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여러 곳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딤후3:12).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주심을 바라봄이라"(히11:26).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18]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롬8:17-18). 또 예수님께서도 요한복음 15장 18절에서 세상이 그리스도인들을 미워하고 박해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19]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요15:18-19).

   예수님께서 지금까지 제시해온 그리스도인의 성품은 여기서 모두 용해되어 참된 그리스도인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마음이 가난하고, 애통하며, 온유하고, 의에 주리고 목마르고, 긍휼히 여기는 마음, 마음이 청결하고 화평케 하는 마음이 한 데 어우러져 나타나는 것이 바로 의를 위하여 박해받는 삶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본질은 그리스도의 고난(십자가)속에서 발견될 수 있습니다. 십자가는 바로 고난받는 그리스도인의 싸인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주님을 따라가려면 내게 주신 십자가를 지고 날마다 주님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신 것은 고난이 결코 저주이거나 패배의 상징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고난을 통하여 영광에 이르고 구원에 이릅니다. 만약 우리들이 이 세상에서 환영을 받고 세상이 기뻐하는 존재라면 세상과 우리가 하나라는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 편에 서있으면 세상은 좋아하지 않습니다. 아니 세상을 지배하는 어둠의 세력이 원수처럼 여깁니다.

   사도바울을 보십시오.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예수님을 박해하고 교회를 박해하는 사람이었기에 세상이 영웅시했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에 그의 삶이 변했습니다. 예수님을 증거하는 삶으로 변합니다. 그러니 세상이 이제는 돌변하여 원수가 됩니다.  40여명의 결사대가 그를 죽이지 않으면 밥을 먹지 않겠다고 작정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빛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있는 곳에서 어두움은 정체를 드러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가만히 있어도 빛의 자녀인 그리스도인은 어두움이 싫어하는 대상이 됩니다. 그래서 본문은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구체적으로 11절에서 가르쳐 줍니다.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이 말씀에서 예수님은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를 받은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의를 위하여'라는 말을 정확하게 해석하면 '예수를 위하여'입니다. 예수때문에 욕을 먹고 박해를 받고 온갖 수모와 거짓말로 속임을 당할 때 진정한 축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죄가 없는 사도바울을 억울하게 옥에 가두고 매로 때리고 죽음을 각오해야 했습니까? 예수님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때문에 저들로부터 박해를 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박해받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다고 하였습니다. 주님은 나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시고 목숨을 내놓으셨는데 이 한 목숨 주를 위해 내어 놓겠다는 결의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러한 헌신과 희생이 세계역사를 변화시켰다는 사실입니다.

   한 사람의 십자가가 나라를 변화시키고 그 세계를 변화시켰습니다. 사도바울이 죄수의 몸으로 로마로 끌려가서 복음을 전한 지 250년만이 로마제국이 복음에 의해 정복당하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지만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인 것입니다. 내게 있는 십자가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역설적인 진리이지만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삶의 현장에 어떤 십자가가 있습니까? 예수님 때문에, 복음 때문에 겪는 아픔과 고통이 있습니까? 의를 위해서 박해를 받는다면 그것은 참으로 귀한 일입니다. 기독교의 역사는 피어린 박해의 역사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수많은 믿음의 조상들의 역사가 그렇습니다. 가인에 의해 박해를 받아 죽었던 첫 순교자 아벨에서부터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은 시작됩니다.  애굽의 왕궁에서 편안한 생활보다는 자기 백성과의 고난을 선택했던 모세를 생각해 보십시오. 궁중에서 평안한 삶을 추구하기보다는 차라리 사자굴에 던지움 받는 고난을 택했던 다니엘의 생애는 무엇을 말합니까? 보디발의 집에서 쾌락을 누릴 수 있던 삶을 거부하고 옥중의 고난을 선택한 요셉은 어떻습니까? 그리스도의 생애와 바울의 생애, 이 모든 분들의 삶은 의를 위해 박해를 받은 삶의 표본을 우리에게 남기셨습니다.  그러므로 의를 위해서 산다는 것은 주님을 위해서 산다는 말이고, 의를 위해서 박해를 받는다는 말은 주님을 위래서 박해를 받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박해를 허용합니까?


   1. 참 성도를 구별하기 위해서입니다.


   박해는 참 성도와 거짓 성도를 구별하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마태복음 13장 20절 이하에 보면 네 가지의 마음 밭에 관한 설명이 있습니다. 그 중에 두번째가 돌밭입니다. 이런 마음은 말씀을 들을 때 즉시로 받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환란이나 박해가 올 때 곧 넘어지는 것입니다. 말씀의 뿌리가 없는 사람에게 환란이 임하면 모두 도망가 버립니다.

   주께서 박해를 허용하는 이유는 참 성도를 구별하기 위해서입니다. 토마스 왓슨이라는 유명한 설교가는 "가짜성도들은 예수님을 따라서 감람산까지는 갈 수 있다. 그러나 갈보리까지는 갈 수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욥기 1장에 보면, 어느 날 사단이 예수님의 보좌 앞에 와서 순결하고 정직했던 하나님의 사람 욥을 참소합니다. "욥이 하나님을 열심히 경배하는 것은 물질적인 축복 때문입니다. 자기가 많이 가지고 있고 살기가 편안하니까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아무 것도 없으면 하나님을 섬기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진정한 신앙의 사람은 고난을 당해도 주를 버리지 않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욥에게 시련을 허용합니다. 박해는 알곡과 가라지를 구별하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2. 그리스도인의 거룩한 성품을 완성하기 위해서입니다.


   박해는 그리스도인들의 거룩한 성품을 완성하는 하나님의 방편입니다. 히브리서 12장 10절에는 "그들은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시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다니엘은 "많은 사람이 연단을 받아 스스로 정결케 하며"(단 12:10)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연단의 풀무불 속에서 모든 찌끼는 녹습니다.

   박해는 그리스도인의 거룩한 성품을 연단하는 하나님의 방법으로 쓰여지며, 박해가 올 때 그리스도인들의 인격은 훈련됩니다. 성경은 "환란은 인내를 낳고,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낳는다"(롬 5:3)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환란 중에서도 즐거워 할 수 있습니다. 환란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며, 이 선은 그리스도 예수의 인격을 우리 속에 부각시킵니다. 우리는 고난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닮은 거룩한 인격을 배웁니다.

   고난의 십자가에서 우리의 자존심은 불타며 혈기는 녹아버리고 맙니다. 성경은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벧전1:6,7)고 말씀하십니다.

   서양 속담에 흐르는 시냇물에서 돌들을 치워버리면 시내는 노래를 잃어버린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돌들이 있기 때문에 시냇물은 홀러가며 노래를 창조합니다. 고난이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이 고난의 아픔의 예술을 통해서 창조적인 인격을 완성해갑니다. 시편기자는 이 비밀을 알았습니다. 그는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시119:67,71)라고 고백하였습니다.

 

   3. 박해는 그리스도와 하나됨을 증거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5장 19절에 보면,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박해는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속해 있기 때문에 받는 것입니다. 타협하는 사람에게는 박해가 없습니다.

   세상은 타협하는 성도를 쌍수를 들어 환영합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의 생애를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초대 교회의 세례는 많은 불신자들이 보는 가운데서 행해졌습니다.  그러므로 세례를 받는 순간 사람들이 이렇게 말을 합니다. "저 사람도 이제 그리스도인이 되었구나!" 그때부터 그에게는 박해가 찾아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박해를 받을 망정 그리스도를 믿고 죄에 대해서 죽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는 영광스런 변화를 간증하기 원했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주님의 사람인 것을 세상을 향해 선포하는 영광스러운 선교적 기회이었음을 그들은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4. 박해는 나의 십자가를 확인하는 계기가 되기때문입니다.


   다니엘서 3장에서 우리는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의 이야기를 봅니다. 그들은 느브갓네살 왕이 우상숭배를 강요했을 때 이를 거절하여 풀무불 속에 던지움을 받았습니다. 그때 왕은 풀무불 속에서 네 사람을 보았습니다. 이 제 4의 인물은 바로 주님이셨습니다. 주님은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이 고난에 처한 것을 방관하지 않으시고 그 현장을 찾아 오십니다. 바울과 실라가 복음을 전하고 감옥에 갇혔지만 주님은 그곳에서 그들과 함께 계셨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주님을 믿음으로 고난이 없다고 약속한 것이 아니라 믿기 때문에 오히려 고난을 당할 것이나 그 고난 중에 함께 하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스펄젼 목사님이 육신의 질병으로 말할 수 없는 고난을 당할 때 성도들이 찾아 와서 그를 위로했습니다. 그때 스펄죤 목사님은 "내가 확실히 아픔니다. 그러나 성도 여러분, 이 사실을 아시기 바랍니다. 내가 아픔을 당하고 고난을 당하고는 있지만 그러나 이 아픔보다 주님은 내게 더 가까이 와 계십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사랑하는 이의 아픔을 보고 그대로 방관할 수가 없습니다. 달려가서 고난을 함께 할 것입니다. 그 사랑은 더욱 거룩하게 승화될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신학자는 고난을 가리켜서 "제 3의 성례"라는 유명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세례 외 성만찬 못지않게 고난은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고난을 통하여 우리는 주님을 만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승리의 약속이며 주께서 함께 하신다는 약속입니다. 그러나 이 약속은 고난의 면제의 약속은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눅9:23)고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그 분을 신뢰하는 그 순간 우리에게서 죄와 저주와 지옥을 빼앗아 가는 대신 십자가를 남기셨습니다. 이 십자가가 없이는 부활의 영광도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지나면서 사단의 유혹과 목마름과 굶주림의 시련을 겪은 후에야 젖과 꿀이 흐르는 복지에 들어갔음을 잊지 마십시오. 그런데 우리는 시련의 광야가 없는 가나안의 축복만을 원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의 주님은 박해의 가시밭길에서 우리의 인격을 단련시켜 순수하게 주님을 사랑하는 거룩함을 갖도록 가르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는 뜨거운 마음으로 주앞에 엎드릴 때 주께서는 우리를 감싸주시고 은혜가운데 나아가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이 시련의 광야를 통과하지 않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복지를 탐한다면 그것은 이기적인 탐욕입니다. 십자가없이 부활의 영광만을 사모한다면 어리석은 맹신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믿음을 지키고 사명을 다하려면 많은 환란을 겪어야 할 것입니다. 다시 주님 말씀을 들어봅시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본문 말씀에 나타난 천국에 관하여 두 가지 차원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현재적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치하시며, 고난을 당할 때 그 고난의 현장 속에서 주님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런 점에서 고난은 우리에게 승리를 가져다 주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는 삶을 약속합니다. 천국은 곧 주님의 임재, 그의 함께 하심을 뜻합니다. 그러나 본문은 나아가서 천국의 놀라운 보상을 약속합니다. 성경은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떻게 고난과 박해 속에서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가 있습니까? 이 말씀을 생각해 보십시오. 고난이 우리를 참다운 성도로 만들며, 이 박해가 우리를 그리스도를 닮은 거룩한 인격자로 성화시켜 주는 것이라면 기뻐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성경은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롬8:17)고 말씀하십니다.

 

   사도 바울은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이나 맞았으며, 여러 가지 위험과 굶주림을 겪었으며 말할 수 없는 어려움을 겪은 사람으로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생각컨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롬8:18)  요한계시록 21장을 묵상하면 새하늘과 새땅이 임합니다. 메시야의 왕국이 열립니다. 이 신천신지에서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첫째부활에 참여하여 상급을 받게 됩니다. 성경은 이들이 "예수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베임을 당하고 짐승에게 경배하기를 거절한 사람들"이라고 말씀합니다.

   의를 위해 박해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메시야의 왕국의 주인으로서 하나님의 나라를 지배하는 사람들은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았던" 사람들입니다.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 가운데 가장 극심한 박해와 고난을 당한 서머나 교회를 향해 성령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계2:10)  역사가 필립샤프는 이 서머나 교회의 감독이었던 폴리캅의 최후 장면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처형자들은 그를 채찍으로 몹시 때렸으며 마침내 불태웠다. 신체의 극히 내부에 있는 내장까지 환하게 드러났다. 처형자들은 미처 타지 못했던 신체를 창끝에 걸어놓고 야수의 밥에 던져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그가 화형에 처하기 직전에 "네가 만약 로마의 황제를 숭배하고 그리스도를 부인하면 지금까지의 이 박해를 그만두고 특별히 대우하겠다"는 제안 앞에 폴리캅은 이렇게 대답했다. "85년간 나를 해침이 없이 나에게 성실하셨던 나의 왕, 나의 주님, 그분을 지금 내가 부인할 이유가 어디 있겠오? 나는 그를 사랑하오!"

   우리보다 앞서 간 신앙의 선배들이 이 길을 걸었다면 우리는 삶속의 작은 고난을 두려워하고 피해가려고 합니까?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가는 이 길은 생명의 길입니다. 가는 길이 험하고 좁습니다. 그러나 이 길을 왜 우리가 가야 합니까? 생명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생명을 구원하고 영혼을 살리기를 위한 사명을 감당하려면 십자가가 있습니다. 예수님 따라가려면 십자가도 각오해야 합니다. 그러나 거기에 부활의 영광도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에게 있는 십자가를 지고 의를 위하여 박해를 각오하고 담대하게 나아가는 사명성도가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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