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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문의 메시지

덕을 세우기를 힘쓰라(롬14:13-20)

작성자야베스|작성시간11.08.14|조회수294 목록 댓글 0

덕을 세우기를 힘쓰라(롬14:13-20)

   오늘 말씀의 제목은 "서로 덕을 세우기를 힘쓰라"입니다. 로마서 12장 이후에 어떻게 하면 오늘 우리가 그리스도인답게 살 수 있는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난 주에는 "비판하지 말고 이해하라"라는 말씀으로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예수님의 유일한 계명은 이웃사랑입니다. 이웃사랑을 구체적 실천하려면 먼저 비판하지말고 이해해야합니다. 믿음이 연약한 이웃을 비판하지 말고 이해하고 용납하고 세우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말씀은 한마디로 말하면 덕을 세우라는 말씀입니다. 덕을 세우라는 말의 헬라어는 집을 짓는다. 집을 세운다. 쌓아 올린다는 말에서 유래된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상대방을 온전하게 세워서 집을 완성하는 것처럼 온전케 하기 위해 힘쓰라는 것입니다. 집을 세우기 위해 벽돌과 벽돌이 맞물려야 하는 것처럼 오늘 우리가 서로 이해하고 격려해야 덕을 세울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우리가 옳을 일을 한다고 다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이웃에게 옳은 일을 한다 할지라도 이웃에게 덕이 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상대방을 세워 주지 않으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주장하는 많은 것은 분명히 옳은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이 주장하는 옳은 것에 대해서 예수님의 평가는 아주 부정적이었습니다. (마 23:23)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저들은 옳은 일이라고 많은 일을 했지만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생각할 때 옳은 일이라 확신한다 할지라도 반드시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것이 꼭 옳은 일이 되고 덕이 된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나 자신에게 옳고 하나님 앞에서도 옳게 생각된다 할지라도 다른 사람에게 덕을 세우지 않으면 그것은 부득불 옳은 일이 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이 기준을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덕을 세우겠다고, 사람에게만 좋게 하려고 하다가 하나님의 의가 무너져서도 안됩니다. 동시에 나 자신의 마음속에 신령한 은혜와 신령한 기쁨이 사라져서도 안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 너와 나사이에서 온전히 합해질 때에 비로소 참 덕을 이룰 수가 있는 것입니다.

   내게는 옳은데 다른 사람에게는 옳은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안식일제도를 강조하면서 안식일에 병든 자를 고치는 것도 안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병을 고치는 행위는 치료행위이기 때문에 일이라는 것입니다. 안식일에 일하면 절대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아닙니다. (막 2:27-28) "또 이르시되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예수님은 본질을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옳으면 그만이라고 고집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것은 율법의 본질인 사랑을 저버리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에는 세 가지 원리가 있다고 합니다. 우리가 사랑한다고 할 때 기본적으로 세 가지 요소가 들어 있습니다. 이것이 있으면 사랑이고, 이것이 없으면 사랑이 아닙니다.

   1)사랑은 믿어주는 것입니다. 사랑하면 모든 것을 믿는 것입니다. 사랑속에 믿음이 들어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으면 그 증거는 바로 사랑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랑이 말씀의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떤 상황에 처해도 이 모든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이 믿어집니다. 하나님이 나를 여전히 사랑하시고 끝까지 사랑하시기 때문에 이 모든 것은 나에게 최고 좋은 것을 주시기 위한 과정이라고 믿어집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그 사랑 안에 거하면 믿어집니다.

   인간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정말 사랑하면 믿어집니다. 사랑하면 거짓이 없기 때문에 무슨 말을 하든지 믿고 따라갑니다. 이처럼 우리가 교회안에서나 가정안에서 서로 믿을 수 있는 관계는 사랑의 관계입니다. 사랑이 깨어지면 믿음이 사라집니다. 사실 가정 안에서 믿을 수 없는 관계가 되면 모두가 불행한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진실해야 합니다. 한 번 말한 것은 지켜야 합니다. 설혹 최선을 다했는데도 지키지 못했다면 솔직하게 이야기해야 합니다. 그래서 진정한 믿음의 관계를 맺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사랑은 이해하는 것입니다.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어떤 처지라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내 입장에서만 상대방을 비난할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입장에 서서 이해하고 감싸주고 끌어 앉는 것입니다. under-standing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그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 알 수는 없지만 우리가 서로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이해하지 않기 때문에 대립적 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3)사랑은 기다려주는 것입니다. 혹은 기대하는 것이에요. 오늘은 좀 유치하고 마음에 안 들더라도 얼마든지 기다려 줍니다. 몰라서 실수를 한 것이겠지, 그러므로 내일은 안 그럴 것이다, 오늘은 이렇지만 내일은 안 그럴 것이다, 지금은 어려서 그렇지만 이제 크면 안 그럴 것이다. 이렇게 기다려 줍니다. 기다려 주는 마음, 이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25년을 기다렸습니다. 모세는 40년을 기다렸습니다.

   이처럼 사랑은 믿어 주어야 합니다. 이해해 주어야 합니다. 기다릴 줄 알아야 합니다. 이런 것들이 이루어질 때에 덕을 세우게 됩니다. 상대방이 나와 같기를 바라는 게 아닙니다. 어느 사이에 내가 저와 같아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덕을 세우게 되는 것입니다.

   13절, "그런즉 우리가 다시는 서로 비판하지 말고 도리어 부딪칠 것이나 거칠 것을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하도록 주의하라" 다시는 비판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상대방 앞에, 마음을 부딪칠 것이나, 거칠 것이나, 약해질 수 있는 그런 요소를 두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이 얼마나 중요한 이야기입니까? 관계가 서운해지면 상대방이 상처받기를 원하고 상대방이 아프기를 원해서 자꾸 상대방의 심장을 건드립니다. 육신의 완악함입니다.

   그래서 상대방에게 상처가 될 수 있는 말을 하지 말라, 주의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자꾸 기대에 어긋나는 짓을 하면서 사랑의 관계를 기대하면 안됩니다. 부부간에 오랫동안 함께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면 적어도 남편이 무슨 말을 하면 싫어하는지 무슨 말을 하면 좋아하는지 다 압니다. 그런데 꼭 싫어하는 말을 찾아 합니다. 순간적으로 상대방의 감정을 건드리기 위해 불을 지릅니다. 관계만 악화시킬 뿐입니다. 이것이 덕을 세우지 못하는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약점은 있습니다. 그것만 건드리면 터져요. 비켜가야 해요. 절대로 거치면 안됩니다. 가령 돈 못버는 남편이 있습니다. 그것 때문에 본인도 괴로워하고 있어요. 자기 책임을 다 못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그 남편하고 살면서 아내가 '돈도 못버는 사람이'라고 상처를 주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거치는 것입니다. 덕을 이루지 못하는 것입니다. 말 한마디로 사람을 죽이고 살리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OECD국가중에서 자살율이 최고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런 열등의식에 빠지면 살 의미를 상실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딪칠 것이나 거칠 것을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하도록 주의하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말로 인해 힘이 나기도 하고 힘이 빠지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주어진 말을 어떻게 하면 은혜의 도구로 사용될 수 있겠습니까? (엡 4:29)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여기서 우리는 말에 대해 세 가지 원칙을 배우게 됩니다.
 
   1)더러운 말을 입 밖에도 내지 않는 것입니다.  2)오직 덕을 세우는 소용되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3)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로 하여금 은혜를 끼치게 하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하는 말에는 우리의 믿음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말을 잘해야 합니다. 믿음의 언어를 사용하여 듣는 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에 대한 소망을 갖게 하고 힘을 얻어 일어서게 하는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14절,"내가 주 예수 안에서 알고 확신하노니 무엇이든지 스스로 속된 것이 없으되 다만 속되게 여기는 그 사람에게는 속되니라" 사실 구약시대에는 거룩한 것과 더러운 것이 분명하게 구분되었습니다. 그래서 더러운 것은 가까이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신약에 와서 예수님은 이러한 성속을 완성하셨습니다. 무엇이든지 스스로 속된 것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에서는 음식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떤 음식도 음식 자체로서는 부정한 것이 아니므로 이것을 먹고 안먹는 것의 여부가 하나님과의 관계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만 사도바울이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시장에서 파는 고기들이 거의 제사 음식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제사음식을 금기시하는 믿음이 약한 형제들의 양심을 위해서 성숙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자신의 자유를 스스로 제한하거나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이런 결심을 하였습니다. (고전 8:13) "그러므로 만일 음식이 내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하지 않게 하리라"

   이처럼 믿음이 연약한 성도를 귀하게 여기고 저들의 믿음을 세워주고 덕을 세워주기 위해 고기를 먹지 않더라도 저들을 세워 주어야겠다는 것입니다.

   15절, "만일 음식으로 말미암아 네 형제가 근심하게 되면 이는 네가 사랑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라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를 네 음식으로 망하게 하지 말라" 거룩함과 속됨의 개념을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규정하는 바울은 먹는 문제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랑으로 행하는 문제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의 대상인 성도에 대해서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라고 하였습니다. 즉 성도는 그리스도께서 대신 죽으심으로 구원하신 존재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를 위해 대속제물이 되셨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 좌우에 있는 모든 형제와 자매들이 바로 예수님의 생명을 내어 주시고 구원하신 하나님의 자녀들이라고 생각합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천하보다 귀한 주님의 자녀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형제의 연약함을 비판하고 나만이 특별한 존재라고 생각한다면 우리 스스로를 지혜롭고 의로운 자라 여기는 어리석은 죄악인 것입니다.

   우리가 하는 그 비판으로 비판을 받을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다면 어떻게 주님이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를 비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교회안에서 형제와 자매를 볼 때 그를 대신하여 죽으신 주님을 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좀 더 적극적으로 말하면 우리가 이 땅에 존재하는 이유는 형제를 사랑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죽은 영혼을 살리는 것입니다.

   병든 영혼을 치료하는 것입니다. 연약한 영혼을 강하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를 위해 이땅에 오신 것입니다. 성령은 살리는 영입니다. 그러나 사탄은 죽이는 영입니다. 무슨 문제만 있으면 그 문제로 형제를 비난하고 비평하여 상처를 주어 넘어트리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보다 성령을 좇아 그 영혼을 살리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누구를 만나든 먼저 그 영혼을 보고 그 영혼을 살리는 일에 쓰임받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6절, "그러므로 너희의 선한 것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라" 목적이 아무리 좋아도 방법이 잘못되면 비방을 받습니다. 행위가 정직해도 사랑이 담겨 있지 않으면 그 결과는 빗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한 일일수록 더 조심해야 합니다. 선한 일일수록 내가 드러나면 안됩니다. 선행의 목적은 나를 드러내거나 나의 만족을 위한 것이 되면 결국 실패하고 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9절에서 우리의 선행의 목적이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에 있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나를 위해 봉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다른 사람들과 함께 화평과 덕을 세우고 우리 가운데 하나님 나라가 견고하게 세우지기를 위해서 우리가 주의 일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안에서 어떤 일을 하든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나고 형제를 세우는 일에 힘쓰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7절은 결론과 같은 중요한 말씀입니다. 17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하나님의 나라, 먼저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라고 간단하게 말씀합니다마는, 여기에 아주 깊은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물질적인 것이 아닙니다. 번영도 아니요, 풍요도 아니요, 성취의 문제도 아닙니다. 흔히 말하는 '성공'도 아닙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나라를 간단명료하게 정리해주고 있습니다.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다, 먹고 안먹고의 문제가 아니다, 부하고 가난하고의 문제가 아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하였습니다.

   1. 하나님 나라의 바탕이 되는 가치는 '의'입니다. 의는 인간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고 해 주셔야 인간은 의를 얻을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의를 '칭의'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의로운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죄인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친히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마련된 의의 예복을 준비하시고 우리의 죄를 그 아들의 피로 씻어 청결하게 하시며 그 예복을 입혀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늘 나라의 잔치와 축복을 누릴 수 있도록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함을 입은 성도들이 이 땅에 의를 실현시켜 가는 것은 마땅한 사명입니다.

   2. 하나님 나라의 두 번째 요소는 '평화'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평화의 나라입니다. 의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평화는 인간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의롭게 올바른 관계를 가진 사람만이 이웃 속에 평화를 이루어갈 수 있습니다. 의가 하나님 나라의 터전이라면 평화는 그 터전 위에 세워진 하나님 나라의 집입니다.

   '평화'라는 히브리말은 '샬롬'인데 이것은 단순히 고요한 평정의 상태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평화는 평화를 깨뜨리는 모든 것, 즉 분쟁,시기,상처,전쟁을 치료하는 역동적인 힘과 원리를 말합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과 올바른 의의 관계가 이루어진 사람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3. 하나님 나라의 세 번째 요소는 '희락'입니다. 먹고 마시는 것도 즐거운 일이지만 인간의 최고의 기쁨은 잃어버렸던 낙원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창조주 하나님과 영원한 만남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희락은 육욕적이고 현실적인 쾌락이 아닙니다. 그것은 신령한 기쁨입니다. 의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고 평화가 인간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기쁨은 인간의 마음속에서 솟아나는 성령의 역사입니다.

   그러한 사람은 먹을 것이 있든 없든, 마실 것이 넉넉하든 부족하든, 세상의 것들이 좀 있든 없든, 몸이 건강하든 병들든 간에 그런 육신의 상황과 관계없이 가슴속에 주님 주시는 기쁨이 넘치게 될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항상 기뻐하라' 고 말씀합니다. 빌립보서 4장 4절의 말씀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그리스도인의 기쁨은 세상의 기쁨이 아닙니다. 주 안에서 성령 안에서 누리는 신령한 기쁨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기쁨의 나라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인 그리스도인의 삶도 항상 기뻐하는 삶입니다. 감사하고 만족하는 삶입니다.

   어느 노인 한 분이 하도 생선이 먹고 싶어서 푼푼이 모은 돈으로 시장에 가서 생선을 한 마리 샀습니다. 이것을 들고 오면서 생각하니 어찌 기쁜지 생선 굽는 냄새만 생각해도 군침이 돌고 그걸 먹을 생각을 하니 절로 어깨가 으쓱으쓱해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너무 자기 기쁨에 도취되어 길을 잘 살피지 않아서 그만 돌에 걸려 넘어졌습니다. 그순간 손에 쥐고 있던 생선을 떨어뜨려 버렸습니다.

   그랬더니 지나가던 개가 그 생선을 입에 물고는 줄행랑을 쳐버렸습니다. 멍하니 보고있던 이 노인이 아주 기쁜 얼굴로 일어나면서 "하나님 감사합니다."하고 말했습니다. 옆에서 보고 있던 한 사람이 하도 기가 막혀서 "여보시오. 뭐가 그렇게 감사하고 그렇게 기쁜 거요?" 하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이 노인의 대답이 걸작입니다. "내가 생선은 잃어버렸지만 입맛을 잃어버리지 않았으니 어찌 기쁘지 않소."

   그렇습니다. 생선이 아무리 수십 마리가 있은들 입맛을 잃어버렸으면 어쩔 뻔했습니까? 주님께서 우리 마음속에 그런 기쁨의 역사를 일으켜 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나라는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의 나라는 무엇보다 먼저 우리 마음속에 있습니다. 예수님이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눅 17:20,21)"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21]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그렇습니다. 우리 마음에 죄가 용서되고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고 하나님과의 평화를 누리고 그 기쁨을 노래하며 살아가는 마음이 바로 천국입니다.

   "높은 산이 거친 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 우리 마음에 의와 평화와 기쁨으로 먼저 작은 천국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예수님이 성령으로 우리 마음에 임재하시면 의와 평화와 기쁨의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게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마음에 천국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어찌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 나라는 성령 안에서 우리가운데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지금 천국을 맛보지 못하고 지금 천국의 이루지 못하면 이다음에 영원한 천국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기쁨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처럼 하나님 나라를 누리는 사람을 18절에서 이렇게 표현하였습니다. "이로써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느니라." 당연히 그렇지 않겠습니까? 이처럼 하나님 나라를 누리는 사람은 바로 그리스도를 섬기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사람에게 칭찬을 받습니다. 교회가 인정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내면에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그 삶에 미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통치가 미치면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납니다. 환경을 넘어선 하나님의 기쁨과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서로 덕을 세우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나를 위한 삶이 아닙니다. 이웃을 세우는 일입니다. 이웃을 세우는 일은 바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일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이 땅에 살아가면서 이웃사랑을 구체적으로 실천하기 위해서 이웃을 용납하고 이해하고 섬겨야 합니다. 뿐 만 아니라 서로 덕을 세우기를 힘써야 합니다. 서로 덕을 세우다 보면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가운데 세워집니다. 하나님의 의와 평강과 기쁨이 우리가운데 충만해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처럼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사람에게도 칭찬받는다고 하였습니다. 오늘 참석한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우리가운데 이루어 무엇보다 교회안에서 서로 덕을 세워 나 아닌 다른 사람을 세워주고 온전케하여 하나님 일군으로 만드는 일에 힘쓰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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