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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문의 메시지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신 예수(마8:14-17)

작성자야베스|작성시간15.03.15|조회수338 목록 댓글 0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신 예수(마8:14-17)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오셔서 행하신 사역을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4장 23절에 보면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고 하셨습니다.

   1)회당에서 가르치시는 교육사역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하시고 하나님의 진리를 알려 주셨습니다. 제자들을 부르시고 그들에게 3년동안 제자훈련을 시키셨습니다. 가르치시는 교육사역입니다. 2)천국복음을 전파하시는 전도사역입니다. 예수님은 하늘나라에서 오신 분입니다. 잃어버린 영혼을 구원하시고 그들을 생명의 길로 인도하시는 일을 위해 천국복음을 전하셨습니다.

   3)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쳐주시는 치유사역입니다. "백성 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고 하신 부분에서 인간의 삶을 위협하고 고통스럽게 하는 모든 연약함과 모든 질병을 고쳐 주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인간을 모든 불행의 근원인 죄에서 구원하시는 일을 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인간에게 가장 큰 적은 죄입니다. 죄로 인해 모든 불행이 시작되었습니다.

   뿐 아니라 예수님은 죄로 인해 다가오는 모든 질병과 저주와 고통에서 우리를 자유케 하시는 일도 하셨습니다. 그중에 치유사역은 대단히 중요한 사역이셨습니다. 예수님이 가시는 곳마다 수많은 병자들이 몰려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병든 자를 치료하시는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역을 마치시고 승천하실 때 제자들에게 마지막 분부한 명령을 보아도 치유사역은 매우 중요한 사역입니다.

   막 16:17,18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어 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오늘 믿는 우리도 예수님이 행하신 3중사역의 사명이 있습니다. 믿는 자에게 따르는 표적은 귀신을 쫓아내고 새 방언을 말하며 병든 자에게 손을 얹은즉 나음을 받는다는 약속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이 말씀을 믿고 이 귀한 치유사역을 감당하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께서 산에서 내려오셔서 나병환자를 고쳐 주셨고, 백부장의 하인을 고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예수님은 제자 베드로의 집으로 자리를 옮기셨습니다. 먼저 14,15절 "예수께서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사 그의 장모가 열병으로 앓아 누운 것을 보시고 [15] 그의 손을 만지시니 열병이 떠나가고 여인이 일어나서 예수께 수종들더라"

   이번에는 베드로의 장모의 병을 고쳐 주셨습니다. 가버나움 회당에서 말씀을 가르치시고 시몬의 집에 가게 되었습니다. 성지순례를 가보면 회당과 베드로의 집이 매우 가까이 있습니다. 그래서 말씀을 마치신 후에 베드로의 집에서 음식을 나누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장모가 중한 열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열대 지방의 중한 열병은 말라리아 같은 치사율이 높은 병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 여인은 죽음에 이르는 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구원자 예수님이 가시는 곳에서는 어떤 병이나 질병도 더 이상 큰 문제가 될 수 없었습니다. 사실 전능하신 예수님의 능력을 믿는 자들에게는 어떤 병이냐가 문제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암과 같은 무서운 질병은 고치시지 못하고 감기나 몸살같은 간단한 병만 고치시는 제한된 능력을 가지신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할 수 있거든 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예수께서 하시고자 하면 어떤 질병도 고침받을 수 있습니다. 심지어 병들어 죽고 썩어 냄새나는 나사로 같은 사람도 다시 살리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전능자이신 예수님의 치유의 능력을 믿는 우리의 믿음입니다. 베드로의 장모가 병이 낫는 과정을 보면,

 

   1. 주님이 베드로의 집에 들어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말씀을 전하시고 잠시 휴식을 하시려고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셨습니다. 그러므로 베드로의 장모가 고침을 받는 축복을 받게 된 것입니다. 언제나 주님께서 계시는 곳에는 은혜가 있고 치유가 있고 축복이 있게 마련입니다. 한 번은 제자들이 바다를 항해하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큰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서 삽시간에 배가 뒤집힐 정도의 파도가 몰아 닥쳤습니다.

   제자들은 배가 침몰할 위기를 만나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을 때 예수님께서 기도하고 계시다가 제자들의 이 모습을 보시고 바다 위로 걸어서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하지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배에 올라 그들에게 가시니 바람이 그쳤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모시는 것이 복입니다.

   요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우리가 믿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안에 영접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우리 주님은 언제나 우리 심령 밖에서 두드리고 계시다고 하였습니다.(계 3: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님의 말씀을 듣고 문을 열면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영원한 생명이라는 사실입니다. (요일 5:11,12)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아들이 있는 자는 생명이 있습니다. 영생을 얻은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먼저 우리 중심 안에 예수님을 나의 구주 나의 하나님으로 영접하는 것입니다. 뿐 만 아니라 우리 가정안에도 예수님은 모셔야 합니다. 가정은 하나님이 세우신 가장 작은 교회입니다. 가정예배를 드리면 주님을 모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이 예배를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슨 역사가 나타나겠습니까? 억압된 것이 해방되고 포로된 것이 자유함을 받게 되며 질병이 떠나가고 문제가 해결되는 역사가 나타나게 됩니다.

   그 다음으로는 목장예배를 드립니다. 목장예배는 목장식구들이 돌아가면서 드리는 예배입니다. 자연스럽게 적어도 한 달에 한번은 내 집에서 예배를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가정 안에서 예배를 드릴 때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고 가정을 축복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목장식구들이 내 집에서 평안을 빕니다. 그리고 축복을 빕니다. 문제 해결을 위해서 기도해 줍니다. 그러므로 목장예배를 드리는 것은 가정에 예수님을 모시는 복인 것입니다. 주님을 사업장에 모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을 직장에 모시기를 축원합니다.

 

   2. 사람들이 주님께 간구하였습니다.


   막 1:30과 눅 4:38에 보면 사람들이 예수님께 그녀를 위해 간구하였습니다. 지난 주에 살펴보았던 백부장도 자기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께 나아온 것이 아닙니다. 병든 하인의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께 나아와 간구할 때 응답해 주셨습니다. 간구가 믿음입니다. 언제나 예수님은 믿음을 먼저 보셨습니다. 믿음이 기적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를 들면 저에게 문제가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그 문제를 놓고 하나님께 나아와 간구하는 것, 믿음인 것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간구하지 않습니다. 물론 한 두번 형식적으로 기도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계속적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반드시 믿음이 동반되는 것입니다. 간구는 믿음의 기도입니다. 간구는 어떤 사람들의 말대로 번역하면 간이 절일 정도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주님이 치료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18장 1절이하에 보면 예수님이 어느 날 제자들에게 불의한 재판장에 대한 비유를 들어서 이 문제를 설명해 주셨습니다.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장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었는데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달라고 부탁을 하였습니다. 한두 번이 아니라 번거로울 정도로 자주 찾아가서 애원을 하였습니다. 그 때 이 불의한 재판장이 처음 얼마동안은 듣지 않다가 하는 수 없이 들어 주면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나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결론적으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불의한 재판장이 말한 것을 들으라 [7]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눅18:6,7). 그렇습니다. 불의한 재판관을 자주 찾아가 애원했던 여인처럼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와 밤낮 부르짖을 때 그 원한을 풀어 주시지 않겠습니까? 간구는 이처럼 한맺힌 것처럼 하나님앞에 엎드려 부르짖는 것입니다.

   내 문제만이 아니라 자녀문제, 가족문제, 목장식구들문제, 교회안에 있는 교우들의 아픔을 놓고 기도하는 것, 간구가 필요합니다. 이처럼 간구할 때 하나님은 응답해주시는 것입니다.
(렘 33:3)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3. 주님께서 보시고 그의 손을 만지심으로 고쳐 주셨습니다.


   14절 "그의 장모가 열병으로 앓아 누운 것을 보시고" 보셨다고 하였습니다. 그의 아픈 모습을 보셨다는 것은 예수님의 관심입니다. 예수님의 바로 베드로 장모의 고통의 현실을 보신 것입니다. 사랑은 보는 데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본다는 것은 관심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믿음으로 보시고 우리의 중심을 보십니다. 그러므로 영으로 주님께 나아와야 합니다.


   그리고 나아가서 만지셨습니다. 15절 상반절을 보시면  "그의 손을 만지시니"라고 하였습니다. 주님은 의도적으로 만지셨습니다. 주님이 만지신 것은 주님의 사랑의 표현입니다. 주님의 손은 사랑의 손입니다. 치유의 손입니다. 은총의 손입니다. 앞에서 치유하셨던 나병환자에게도 예수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라고 하였습니다. 마태복음 9장과 예수님께서 두 맹인이 예수님께 보게 해달라고 간구할 때에도 저희 눈을 만지시며 너희 믿음대로 되라고 하셨습니다.

   누가복음 4:40에는 "해 질 무렵에 사람들이 온갖 병자들을 데리고 나아오매 예수께서 일일이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고치시니"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만나는 병자들에게 일일이 손을 얹으시고 고쳐 주셨습니다. 그 당시에 병자들을 만진다는 것은 종교적으로 부정한 것을 만짐으로 부정하게 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만져주시고 고쳐주셨습니다. 이렇게 만졌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의미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병든 부분을 만지시고 고쳐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만지지 못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몸을 가누지 못하는 환자를 누가 돌봅니까? 누가 대소변을 받아 냅니까? 연로하신 어르신이 병이 들면 그래도 남편, 아내 밖에 없다는 말을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랑하면 무거워도 일으킬 수 있고, 사랑하면 더러워도 만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도 사랑하시기에 온갖 병자들을 일일이 다 만져주신 것입니다. 사랑이 만지게 하신 것입니다.

   어떤 어머니들이 예수께서 만져주심을 바라고 아이들을 데리고 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말리지만 일일이 다 만져주셨습니다. 아이들을 사랑하기에 말려도 만져주십니다. 이처럼 만짐은 예수님의 사랑의 손길이었습니다. 많은 사랑은 혀끝에 있고 참사랑은 손끝에 있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사람은 말과 혀로만 사랑하고 주님은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합니다. 주님은 지금도 우리 모두를 만져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아픈 부분을 만져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복음성가 가운데 이 찬양의 가사를 참 좋아합니다. "주님과 같이 내 마음 만지는 분은 없네. 오랜 세월 찾아 난 알았네, 내겐 주밖에 없네. 주 자비 강 같이 흐르고 그 손길 치료하네. 고통받는 자녀 품으시니 주밖에 없네. 주님과 같이 내 마음 만지는 분은 없네. 오랜 세월 찾아 난 알았네, 내겐 주밖에 없네.

   성경은 예수님께서 그의 손을 만지시니 열병이 떠나가고 여인이 일어나서라고 합니다. 떠나다란 말은 병이 완전히 떠난 것을 의미합니다. 병에서 일어나고 다시 앓아눕지 않음을 뜻합니다. 이 말은 예수님의 완전한 치유의 결과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 이 시간 주님의 만지심이 필요한 분이 계십니까? 이 시간 주님의 만지심을 간구하십시오. 사모하는 자에게 주님은 이 시간도 만져 주실 줄 믿습니다.

   베드로의 장모가 열병에서 고침을 받았다는 소식은 곧 마을에 퍼졌습니다. 소식을 들은 사람들이 병든 자들을 데리고 찾아 왔습니다. 16절 "저물매 사람들이 귀신 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 내시고 병든 자들을 다 고치시니" 많은 사람들이 예수께 나아왔습니다. 귀신들린 자, 병든 자들이 다 주님을 찾아 왔습니다.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내시고 병든 자를 다 고치시니"라고 하셨습니다. 귀신은 어둠의 영입니다. 빛이신 예수님께서 오셔서 어둠의 영이 내어 쫓아 주시고 빛으로 나오게 하셨습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생명과 능력의 말씀으로 귀신을 쫓아 주셨습니다. 더 이상 인간을 사로잡고 괴롭히지 못하게 하신 것입니다. 말씀이 능력입니다. 말씀으로 귀신을 쫓아내시고 진정한 자유와 평화를 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병든 자들을 하나같이 다 고쳐 주셨습니다.

   누구든지 주님께 나아와 믿음으로 구하기만 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했습니다. 돈 있는 자나 권력있는 자, 또는 유식한 자들만 고치신 것이 아니라 주님을 찾아 나온 모든 사람들을 하나같이 다 고쳐주신 것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다 고치시기를 원하십니다. 구별하거나 제한하지 않고 다 고쳐주시는 분이십니다. 믿음으로 다 고침받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7절,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에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 주신 약속을 성취하시려고 하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두 가지로 치유사역을 하셨습니다.

 

   첫째로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이사야53:4에는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연약한 것을 담당하여 주십니다. 대개 강하게 보이는 사람일수록 약한 사람들입니다. 인간은 누구를 막론하고 다 약한 존재입니다. 외로운 존재입니다. 지식이 많거나 돈이 많거나 환경이 부유하다고 강한 것이 아닙니다. 밤중에 아무도 없는 빈 방에 홀로 앉아서 자신을 생각해 보십시오.

   특히 혼자 계시는 분들, 얼마나 약하고 외롭고 무력한 인간입니까? 그것이 인간입니다. 사람은 외롭고 약한 것이 싫어서 주위에 바벨탑을 쌓는 것입니다. 불안하기 때문에 사람을 끌어 모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불안과 연약함은 막을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우리의 연약한 것을 담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모시고 있으면 무섭지 않습니다. 외롭지 않습니다. 주변에 사람이 한 명도 없다 해도 예수님만 있으면 우리는 웃을 수 있습니다. 감사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우리의 약한 것을 담당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한번 같이 하겠습니다. "그는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셨습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우리의 병을 짊어지신 분입니다.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는 나음을 입었습니다. 예수님에게는 불가능이 없습니다. 보혈의 능력에는 제한이 없습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셨고 우리의 질병을 짊어지셨습니다. 누구든지 십자가의 대속을 믿기만 하면 그 구원의 은혜를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영혼만 구원하신 분이 아니라 우리의 병을 짊어지신 분이십니다. 오늘도 교회에는 병 고치는 기적들이 계속 일어나야 합니다. 그래야 성경적입니다.

   또 귀신이 내어 쫓김을 당해야 성경적입니다.  l6절에 "저물매 사람들이 귀신 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 내시고 병든 자들을 다 고치시니"라고 하였습니다. 귀신 들린 자란 어떤 자입니까? 귀신이 붙잡은 자입니다. 귀신이 그 사람의 영혼을 붙잡고, 육체를 붙잡고 있는 상태를 가리켜 귀신들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귀신들린 자의 예가 많이 나옵니다. 힘 센 사람이라도 밧줄로 묶으면 꼼짝을 못합니다.

   죄 지은 사람은 수갑을 찹니다. 그 두 손이 아무리 힘이 있고, 능력이 있고, 재주가 있고, 천하장사라고 할지라도 묶어 놓으면 꼼짝을 못합니다. 귀신이 우리를 묶어 놓은 것입니다. 힘이 있어도 힘을 못 씁니다. 선행을 하고 싶어도 선행이 되지를 않습니다. 음란과 더러운 생각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하게 됩니다. 귀신 들린 자는 귀신의 포로가 된 상태인 것입니다.

   그 사람이 두 발로 아무리 시내를 활보하고 다닌다고 할지라도 그 영혼은 묶여 있는 것입니다. 자기 생각대로 되질 않습니다. 술집으로, 못된 곳으로 끌려 다닙니다. 거기 가서는 안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자꾸 끌려 다니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가 귀신에게 묶여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의지대로 못합니다. 술을 끊을 수 없습니다. 나쁜 습관이 끊어지지 않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이렇게 귀신에게 사로잡힌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나쁜 습관에 억압된 것보다 더 무서운 억압은 사상으로 억압된 것입니다. 잘못된 철학이나 사상, 잘못된 이데올로기에 묶인 사람은 참 불쌍한 사람입니다. 평생 그 사상의 노예가 되어서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하고 끌려 다니다가 인생을 비참하게 마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억압된 사람입니다. 귀신에 억압된 사람은 하나님의 생각대로 살지 못하고 악한 힘에 의해 살게 됩니다.

   귀신에게 억압된 사람의 결과는 인격의 파괴입니다. 분노하고, 미워하고, 입을 열면 독을 뿜어 냅니다. 그 사람이 입을 열면 많은 사람이 죽습니다. 그 사람의 비판 앞에 설 사람이 없습니다. 자신은 매일 악몽에 시달립니다. 후회하는 삶을 매번 삽니다. 우울증에 빠지기 쉽고, 절망감 속에 살면서 다른 사람을 죽이거나 자신을 죽이거나 둘 중의 하나를 택하려는 상태로 변해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억압된 사람들입니다.

   귀신에 억압된 사람은 두 가지 부류가 있습니다. 겉으로 표현하는 사람이 있고 표현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겉으로 나타나는 사람들은 소리지르고, 자기 몸을 상하게 하고, 다른 사람을 괴롭히며 파괴적이고 부정적입니다. 성경에 보면 그들은 쇠사슬을 끊을 정도로 초인적인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양있게, 점잖게 눈에 안 보이게 억압된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께 반항하고 인간 중심적입니다.
 
   귀신들린 자들이 예수님에게 많이 왔습니다. 그들이 어떻게 치료를 받았습니까?  16절에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내시고 병든 자를 다 고치시니'라고 하였습니다. 말씀으로 귀신을 쫓으셨습니다. 오늘 이 시대를 바로 잡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말씀이 능력입니다. 예수님도 성령의 검인 말씀으로 마귀를 물리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고 말씀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그래서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시고 어둠의 세력인 마귀를 물리치시고 하나님의 빛을 발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우리 주님은 치료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우리의 질병을 친히 짊어지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예수의 이름으로 병든자에게 손을 얹으므로 치료하는 구원의 역사를 오늘도 체험하며 누리시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몸이 아프십니까? 마음이 두렵고 염려와 걱정이 마음을 사로잡고 있습니까? 이 시간 예수님의 이름으로 치료받고 새로워지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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