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마 28:1-10)
할렐루야! 그가 말씀하시던대로 살아나셨느니라. 부활절에는 '삶은 계란'을 나눠 주는데 그 이유는 일반적으로 2가지 유래가 있습니다. 첫번째, 계란 속에는 생명이 들어 있고, 그 껍질을 깨고 병아리라는 새로운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이같이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어 무덤 속에 들어갔지만, 그 무덤이라는 껍질을 깨고(육신이라는 껍질을 깨고) 영원한 생명으로 다시 부활 하신 것을 상징하는 의미에서 계란을 나눈다는 설.
두 번째, 십자군 전쟁 당시 로잘린이라고 하는 귀족부인이 있었는데 남편이 십자군 전쟁에 나가서 행방이 모연해지자, 나쁜 사람들에 의해서 재산을 강탈당하고 깊은 산속으로 도망쳤다고 합니다. 그 산속에서 만난 이들에게 많은 도움을 받은 로잘린 부인은 자신을 도와준 이들에게 감사의 표시를 하고 싶어서 부활절에 계란을 아름답게 장식해서 자신의 가훈인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감사하라"는 문구를 적어서 나눠줬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로잘린의 남편이 전쟁에서 돌아와서 자기 가문을 되찾았지만 부인을 찾지 못해 사방으로 수소문하러 다니다가 산속에서 사냥꾼을 따라온 꼬마 아이가 갖고 있는 부활절 계란에 적힌 자기 집안의 가훈을 보고 그 글귀를 누가 적어줬는지 물어 보았고, 그 아이의 인도를 받아 다시 부인을 찾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러저런 이유로 삶은 계란을 나누는데. 의미야 어떻든지 간에 서로가 부활의 주님을 증거하는 일들이기에 좋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은 우리 주님께서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다시 사신 날입니다. 사실 이 날이 없었으면 우리 기독교는 이 땅에 존재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주님이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다시 사신 이 부활주일이야말로 기독교회의 생일입니다.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입니다. 예수님은 부활을 통해 우리의 구원을 확증하셨습니다.
십자가는 예수님의 제자들은 절망에 빠트렸습니다. 저들은 모두 실망했습니다. 상심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래서 뿔뿔이 다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전부입니까? 아닙니다. 부활이 있습니다. 부활이 없다면 사도바울의 말처럼 예수 믿는 우리들이 가장 불쌍한 사람들일 것입니다. 거짓에 목숨을 걸고 삶을 드렸으니까요. 제자들은 거짓에 목숨을 걸고 순교하며 삶을 드렸습니다.
가능한 일입니까? 불가능한 일입니다. 살기위해 거짓말을 하는 데 죽기위해 거짓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절대 그럴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굳게 닫힌 무덤문을 깨트리고 부활하셨습니다. 절망의 사슬에서 자유함을 얻고 영원히 승리의 왕으로 부활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상심하며 절망하며 슬픔 가운데서 눈물을 흘리며 두려워하던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부활하신 예수님 자신을 보여 주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에 있는 교인들에게 예수님의 부활을 아주 분명하게 증거했습니다.
고전15:3-8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4]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5]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6]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 [7]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예수는 다시 사셔서 이렇게 사람들에게 보이셨습니다. 이것은 우리 모두에게 확신을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믿기 어려운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 도마같은 제자는 다시 사신 예수님이 나타나셨을 때 그 자리에 없었기 때문에 다른 제자들이 예수님이 다시 사셨다고 하자 나는 내가 직접 만나서 예수님의 손을 만져보고 그 옆구리의 창자국을 확인하기 전에는 믿지 못하겠다고 말했습니다.
동료들이 강하게 말하면 말할수록 더 의심하게 되었습니다. 도마는 결국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나서 손과 옆구리를 확인한 다음에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그때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죽인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이 부활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때문에 무덤을 막은 돌에 인봉하고 군사들을 시켜 무덤을 지키게 했습니다.
오늘 본문 1절에 보면 "안식일이 다 지나고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갔더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여인들은 예수님의 장례식에도 참석하여 마지막까지 예수님의 뒤를 따라갔던 자들입니다. 다 두려워 떨며 도망갔을 때 끝까지 믿음을 지키며 주님의 곁을 떠나지 않던 여인들이 예수님의 시신에 향유를 부으려고 새벽 미명에 무덤을 찾아 갔던 것입니다.
이 여인들은 진정으로 예수님을 사랑했던 여인들이었습니다. 세상이 다 대적하고 조롱하고 핍박할 때에도 여전히 주님을 사랑했습니다. 변함없이 사랑했습니다. 그것이 아가페의 사랑입니다. 조금 환경이 바뀌었다고, 내게 유익하지 못하다고, 외면하고 돌아서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변함없이 주님이 나를 사랑한 것처럼 나도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참 믿음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 여인들이 부활의 첫번째 증인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열한 제자들도 있었습니다. 수많은 예수님의 은혜를 덧입은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첫번째 부활의 증인은 이 여인들이었습니다. 참으로 영광스런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성경대로 삼일만에 다시 살아나신 것입니다. 2절을 보십시다. "큰 지진이 나며 주의 천사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돌을 굴려 내고 그 위에 앉았는데" 이 여인들은 닫혀진 돌문때문에 걱정하면서 올라왔는데 큰 지진이 나며 주의 천사가 내려와 돌을 굴려내고 그 위에 앉았습니다. 주님의 임재의 현장이었습니다.
두렵고 떨며 어찌할 줄 몰랐습니다. 3,4절 "그 형상이 번개 같고 그 옷은 눈 같이 희거늘 [4] 지키던 자들이 그를 무서워하여 떨며 죽은 사람과 같이 되었더라" 갑자기 큰 지진이 나고 영광스러운 천사들이 나타나니까 무덤을 지키고 있던 군사들이 깜짝 놀라 무서워 떨며 죽은 사람처럼 혼절하였습니다. 정신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여인들도 두려워 떨며 엎드려 있었습니다. 그 때 천사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5절 "천사가 여자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너희는 무서워하지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하나님의 위엄과 권능앞에 두려움을 느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피조물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가장 기본적 태도입니다. 경외감, 즉 하나님 앞에서 두렵고 떨리는 마음이 없으면 신앙은 온전하지 못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도바울의 권면처럼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 신앙의 문제는 하나님에 대한 경외감을 상실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여인들에게 첫번째 한 권면은 너희는 무서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 앞에 어떤 일이 일어나도 무서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는 사람은 세상을 두려워합니다. 세상 앞에 당당히 서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나아가서 부활의 복음을 증거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에서 무엇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하고 있는지 살펴보려고 합니다.
1. 부활은 예언된 말씀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본문 6절에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의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의 누우셨던 곳을 보라"고 했습니다. "그가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예수님의 부활하심은 돌발적인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꾸며낸 이야기도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전에 거듭해서 제자들에게 자신이 살아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자신이 누구인지 물어 보신 예수님은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하자 그때로부터 자신이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변화산에서의 놀라운 사건 후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이 사람들의 손에 넘기워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루살렘으로 가시면서도 자신이 이방인들에 의해 십자가에 못박혀 삼일만에 살아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6절에서도 천사가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의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예수님이 말씀하시던 대로 예수님은 다시 사셨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부활하시지 않았다면 기독교는 죽은 종교입니다. 더 이상 생명력이 없어 벌써 기독교는 없어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은 바로 성경대로 부활하신 것입니다.
고전 15:12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 말씀의 성취입니다.
2. 부활은 빈 무덤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본문 6절에 "…와서 그의 누우셨던 곳을 보라"고 하였습니다. 무덤은 죄악이 만들어 낸 비극의 장소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선언에 따른 죄인된 인생의 종착역입니다. 모든 시대, 모든 인생은 예외 없이 태어남과 동시에 죽음이라고 하는 사망의 문을 향해 질주하고 있습니다. 무덤은 죄의 삯인 사망의 표적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부활은 사망의 권세를 깨트린 하나님의 사건입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으면 사망의 권세를 이기고 부활의 영광에 참여할 수 있음을 증거한 것입니다. 생명의 주님이 사망의 장소에 갇혀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생명의 주님이 땅 속에 묻혀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사망이 주님을 가두어 놓을 수 없었습니다. 죽음이 생명을 잡아 둘 수가 없었습니다. 기독교는 죽음의 종교가 아니라 생명의 종교요, 부활의 종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성도들에게 영원한 소망을 심어 주었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모신 우리는 이제 생명과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함을 얻은 것입니다. 이제 우리의 소망은 부활이요 생명입니다. 죽음이 인생의 끝이 아닙니다. 무엇이 부활을 증거하고 있습니까? 빈무덤입니다. 부활 후에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부활의 첫열매가 되게 하셨다고 하신 것입니다.
고전 15:22-23 [22]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23]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그에게 붙은 자요" 부활이 없는 신앙은 결코 기독교 신앙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 위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라 역사 속에 이루어진 사건이었습니다.
오늘도 예수님의 무덤은 빈무덤입니다. 썩어서 흙이 된 것이 아니라 무덤에서 부활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이제 우리 주님이 재림하실 때 우리 모두가 부활할 것입니다. 무덤에 있는 자는 무덤을 깨트리고 예수님처럼 부활할 것입니다. 그리고 살아있는 자도 홀연히 변화되어 영광의 몸으로 주님을 맞이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무덤도 빈무덤이 될 것입니다.
(고전 15:51-52)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부활은 우리 모두의 소망입니다. 우리 주님이 재림하실 때 놀라운 약속이 성취될 것입니다. 그 때까지 살아 있다면 홀연히 영화로운 몸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이것은 절망과 사망의 포로된 인생에게 새로운 세계를 보이는 표적이었습니다. 이 표적으로 나그네 인생 여정 속에서도 절망을 소망으로 바꾸는 능력을 가지시길 바랍니다. 빈무덤이 부활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3. 부활은 예수님의 제자들의 변화가 증거하고 있습니다.
십자가 사건으로 제자들은 한결같이 두려움에 빠져 다 도망가고 말았습니다. 죽음이 두렵고 유대인 지도자들이 무섭고 폭도들이 무서워서 숨었던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보고 부활의 능력을 그들의 자신 속에 체험한 후에는 사도 요한을 제외하고는 모든 제자가 다 순교하면서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했습니다.
그들의 부활이 거짓이었다면 어떻게 제자들이 그렇게 변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두려워하던 저들이 담대하게 예루살렘 거리에서 서서 "너희가 죽인 예수가 바로 메시야"라고 증거할 수 있었겠습니까? 또한 핍박받는 것을 당연시하고 예수님을 사형선고했던 산헤드린 공회에 붙잡혀 협박을 받는데도 여전히 그들은 우리가 보고 체험한 것을 전하지 않을 수가 없다고 증거할 수 있었겠습니까? 부활은 죽음과 사탄의 권세에 눌려 있던 자들에게 희망과 생명과 확신을 가져다주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부활의 복음은 우리를 변화시킵니다. 부활의 복음은 우리에게 생명을 줍니다. 만약 예수님이 죽고 말았다면 그들이 왜, 무엇 때문에 부활을 증거하다가 죽기까지 했겠습니까? 제자들의 변화가 바로 부활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오늘 예수 믿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고 십자가를 나의 십자가로 받아들였다면 거기서 내가 죽어야 합니다.
세례가 무엇입니까?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산다는 구원의 확증입니다. 죽음이 없이는 부활이 없습니다. 죽음을 생각하지 않고는 결단코 부활이라는 영원한 영광을 맛볼 수 없습니다. 십자가 없는 부활을 생각할 수 없는 동시에 또한 부활없는 십자가도 생각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때문에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가… 다시 살아나셨느니라"(마28:5,6)고 전해준 천사의 말이야말로 복음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악과 질고와 저주를 대신 지시고 돌아가셨습니다. 이 죽음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 안에서 죽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사는 역사에 동참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항상 "나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고 고백하였던 것입니다. 죽어야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신비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부활의 원리를 자연의 세계에서 얼마든지 보고 있습니다. 한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할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십자가에 부활의 비밀이 숨겨져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내가 죽어야 삽니다. 여기서 죽는다는 것은 내 못된 자아가 육신의 생각이 죽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나의 죄악된 욕심이 죽는 것입니다. 나의 정과 욕심이 죽는 것입니다. 죽는다는 것은 나의 생각대로 행동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하)
이렇게 변화될 때 우리도 부활을 증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다고 말을 하는데 변화가 없습니다. 교회다니기 전과 후가 달라진 것이 있다면 교회 다니는 것 밖에 없다면 자기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진정으로 우리가 부활의 복음을 믿을 때 우리 속에 이런 변화가 이루어 질 줄 믿습니다. 아무리 말을 잘해도 삶이 변화되지 않으면 세상이 믿어 주지 않습니다.
복음을 듣지 못하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그렇습니까? 우리의 삶이 부활의 복음을 가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예수 안에서 죽고 예수 안에서 다시 살아 거듭난 하나님의 생명을 가지고 하나님의 생명을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부활을 진정으로 증거할 수 있습니다.
4. 부활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사명을 주셨습니다(7절).
본문 7절에 "또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하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일렀느니라 하거늘"이라고 하였습니다. 부활의 소식을 들은 여인들에게 천사들은 해야 할 일을 부탁하였습니다. 그것은 부활의 복음이었습니다. 빨리 가서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하고 갈릴리에서 뵈올 것을 알리라고 하였습니다.
천사는 여인들에게 '빨리 가라'고 하였습니다. 참 신앙은 무덤을 찾는 신앙이 아니라 무덤을 떠나는 신앙입니다. 성도는 절망을 찾고 절망에 머무는 자가 아니라 소망을 갈망하며 나아가는 자입니다. 성도는 사망의 문을 출입하는 자들이 아니라 생명의 길을, 좁은 문을 출입하는 자들입니다. 성도는 무덤을 떠나야 합니다. 왜냐하면 무덤에 예수님이 계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빈 무덤을 목격한 여인들에게 부활을 증거할 사명이 주어진 것처럼 오늘을 사는 저와 여러분에게도 부활을 증거해야 될 사명이 주어졌습니다. 동네에서, 직장에서, 우리의 일터에서 만나는 사람마다 예수님의 부활소식을 전해야 합니다. 부활의 소식은 '빨리' 전해야 합니다. "그의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초대교회는 만나는 사람들에게 부활의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전도입니다. 따지고 보면 모두가 무덤으로 달려가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부활은 복음인 것입니다. 이를 전하기 위해 생명을 걸었습니다. 수많은 성도들이 순교하였습니다. 이 복음을 전하다 순교한 것입니다. 그런데 왜 순교하면서까지 이 복음을 전합니까? 부활의 복음은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부활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부활을 믿지않는 제자들에게 부활을 증거하기 위해 온몸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엠마오로 내려가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함께 걸으시고 함께 먹으시면서 그들에게 부활의 복음을 전하여 주셨습니다. 또 40일동안 제자들에게 보여주시면서 부활의 복음을 증거하셨습니다. 직접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진 후에 제자들은 확신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그 부활의 복음을 나가서 증거한 때는 오순절 성령강림 후였습니다. 아무리 확신이 있어도 인간의 힘으로는 부활의 복음을 증거한다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당장 자신들이 붙잡히고 감옥에 갇히고 순교한다는 것이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망설이던 제자들이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에 확신을 갖고 거리로 나가서 증거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너희가 죽인 예수가 인류를 구원한 메시야이며 그 예수님은 무덤에서 살아나셨다고 전하였습니다. 부활의 복음을 증거할 때 성령이 역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병든 자가 고침받고 장애인들이 고침받고 낫는가 하면 귀신에 사로잡힌 자들이 자유함을 얻었습니다.
부활의 복음은 증거하십시다. (롬 10:14-15)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오늘 저와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입니다. 복음은 증거해야 듣고 들어야 믿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듣던지 아니 듣던지 전해야 합니다. 그 씨를 자라게 하시는 분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믿습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이 말씀은 인생을 위한 가장 위대한 복음입니다.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 나셨다! 이 한마디로 인류 역사의 신기원이 시작되었고 우리 모두에게 생명의 복음을 주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독교의 복음의 핵심은 도덕이나 윤리가 아닙니다. 착하게 살고 남을 돕고 사는 것이 기독교의 전부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물론 선한 행실은 성도에게도 반드시 필요한 일이지만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 사건은 기독교의 복음의 핵심입니다.
부활은 죽음에 대한 생명의 선언이요, 절망에 대한 소망의 선언입니다.
2015년도 부활절을 맞은 성도 여러분은 성경대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으며 빨리 가서 예수님의 부활하심을 증거하라고 하신 사명을 가지고 담대하게 주님이 오시는 날까지 부활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성도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