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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문의 메시지

요셉의 아름다운 마지막(창 50:22-26)

작성자야베스|작성시간15.12.27|조회수345 목록 댓글 0

요셉의 아름다운 마지막(창 50:22-26)


   저는 지난 성탄절에 두 분의 죽음에 참여하였습니다. 한 분은 86세의 일기를 사시고 소천하신 집사님의 어머니이십니다. 나를 낳으시고 나를 기르시고 나를 일평생 가슴에 품고 사랑을 쏟아 부어주신 어머니, 그 어머니도 언젠가 내 곁을 떠난다는 것입니다. 말할 수 없는 이별의  고통이 있지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구원받고 집사로서 생을 마감하고 마지막에 천국환송식을 하면서 장례식을 거행하셨다는 것은 영광스러운 죽음입니다. 많은 분들의 조문이 있었습니다.

   또 한 사람의 죽음은 제 여동생의 딸 22살 먹은 저의 조카입니다. 2년여동안 투병끝에 생을 마감했습니다. 천국환송예배를 드리는데 너무나 비통하였습니다. 엄마는 졸도하였습니다. 아빠는 정신이 없습니다. 그런데 정작 조카의 얼굴에는 평안이 있었습니다. 마친 평소에 잠자듯 누워 있었습니다. 이제 고통도 없고 질병도 없고 아픔도 없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마지막 성탄예배를 드리는 중에 갔습니다.

   그는 엄마가 걱정할까 봐 한번도 아프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제가 지난 번에 방문하였을 때 정신이 매우 약한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조카는 저를 보고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연발하는 것입니다. 살아있는 것이 감사하고 이렇게 치료받는 것이 감사합니다. 투병 중에 있었지만 너무 예뻤던 아이, 그 이름이 한나였습니다. 한나는 이 세상을 떠났지만 그가 할 일은 다 한 것입니다. 우리는 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천국에 더 필요해서 그리로 옮겨 간 것입니다.

   이제 영원히 하나님 품에 안겨서 안식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에게도 언젠가 끝이 오겠죠? 그때 하나님을 나를 어떻게 평가하리라 생각합니까? 그 때 사람들은 나를 뭐라 평가할 것 같습니까?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한 해의 고개턱에서 우리의 끝을 생각하며 좀 더 거룩하고 충성되게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  니다.

   제가 이번에 권사안수집사 후보를 인터뷰하면서 어떤 집사님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이제 한 10년일할 수 있습니다. 남은 10년을 충성되이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라고 말했습니다. 특히 인생에서는 마지막 매듭을 어떻게 짓느냐는 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어떻게 끝을 맺는 것이 아름다운 인생이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을 위해, 교회를 위해 일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나 남은 것 같습니까? 하나님 앞에 서는 날, 마지막 날을 생각하며 오늘을 충성되이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한 해의 끝을 마감하는 송년주일에 110년 동안 살다간 요셉이라는 인물을 통하여 이와 관련된 교훈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1. 가족에게 인정받는 인생이 아름답습니다.


   요셉은 마지막 순간까지 가족을 책임지며 돌보았습니다. 요셉은 어릴 때 가족으로부터 배척받은 사람입니다. 그것도 비참하게 그의 형들에게 미움을 받아 애굽에 노예로 팔려간 사람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애굽에서 수많은 연단을 받은 다음에 마침내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왕 다음가는 총리가 되었습니다. 그는 명예와 권력도 얻고, 부도 얻었습니다. 그러므로 얼마든지 자신을 괴롭혔던 형들에게 복수할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의 섭리를 인정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앞에 자기를 다 내려놓았습니다. "하나님이 행하셨습니다" 그는 원한을 넘어서 하나님의 사랑으로 형들을 바라보았습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형들과 그의 가족을 돌보았습니다. 특히 그는 끝까지 경건한 가정을 지켰습니다. 요셉은 권력도 있는 사람입니다. 돈도 있습니다. 명예도 있습니다. 얼마든지 첩을 거느릴 수 있는 환경 가운데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깨끗한 가정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는 아버지 야곱과는 달랐습니다. 그는 많은 어머니 때문에 큰 어려움을 겪은 사람입니다. 이러한 과거를 거울로 삼아 철저히 가정을 정결하게 지켰습니다.

   가정에서 성공하고 그로 인해 가족들에게 인정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요셉은 80년 동안 애굽의 총리로 있으면서 나라와 백성들에게 많은 유익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그는 분명 외부적으로 대단한 성공을 거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가정에 실패하였다면 어떠하였을까요? 그의 끝이 아름다웠을까요? 그렇지 못했을 것입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마무리를 위해서는 가정에서 인정받아야 합니다. 아름다운 은퇴를 하는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 무엇입니까?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1999년 6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만델라 대통령이 은퇴하였습니다. 당시 한 신문은 '아름다운 퇴장' 이라는 제목으로 기사를 실었습니다. 프랑스에서 실시된 한 국제 여론조사에 의하면 2000년을 기준으로 볼 때 만델라는 지난 20년 동안 지구상에서 가장 탁월한 정치 지도자라고 합니다. 그는 백인들의 인종 차별 정책에 맞서 싸우다가 27년간 옥살이를 했지만 94년 집권하면서부터는 과거를 묻지 않고 모든 인종을 아우르는 화해의 정치를 실천해 노벨평화상까지 받았습니다.

   그리고 더 이상 권력에 집착하지 않고 타보 음베키에게 자리를 넘겨주고 정계를 은퇴하였습니다. 그는 역할을 모두 끝낸 이상 더 이상 정계에 머무를 이유가 없고 고향으로 돌아가 자신을 키워준 계곡과 언덕과 시냇가를 손자들과 함께 거닐며 생을 보내겠다고 했습니다. 마지막 연설장에는 10만이 넘는 청중이 모였고 만델라의 연설에 온통 눈물 바다를 이루었다고 합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성공을 하여도 가정에서 실패하면 그것은 참다운 성공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혁혁한 공로를 세우지 못했다 하더라도 가정에서 성공한 사람이 참으로 성공한 사람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흠이 무엇입니까? 애굽여인 하갈을 첩으로 얻어 이스마엘을 낳은 것입니다. 가정의 실패입니다. 그의 사후 이 문제는 어떻게 비화되었습니까?

   인류는 그 문제로 지금까지 종교 전쟁, 민족 전쟁을 치르고 있지 않습니까? 야곱의 실수가 무엇입니까? 다윗의 실수가 무엇입니까? 솔로몬의 실수가 무엇입니까? 그들의 공통점은 가정의 실패입니다. 그것으로 인해 가족이 분열되고 나라가 분열되었습니다. 이런 점을 타산지석으로 삼아 우리 성도는 마지막 순간 가족에게 인정받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가족에게 인정받는 아버지, 남편, 어머니, 아내, 자녀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가 잠깐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내가 하나님 나라에 간 후 아이들이 아버지의 생을 돌이켜 보며 무엇이라고 말할까?" 이때까지 열심히 살아오기는 했지만 가정에는 실패한 아버지라고 말한다면 저의 삶은 아름다운 삶은 아닐 것입니다. 부부 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언젠가 사랑하는 사람이 우리 곁을 떠날 날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 시기는 모르지만 반드시 우리 곁을 떠나 홀로 남겨질 때가 다가올 것입니다.

   그 때 남편은, 그리고 아내는 상대의 죽음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두 할머니가 오랜만에 만나 서로의 안부를 묻고 있었습니다. "바깥양반은 잘 계세요?" 지난 주에 세상을 떴다우. 저녁에 먹을 상추를 뽑으러 텃밭에 나갔다가 심장마비로 쓰러졌지 뭐유"

   "에그머니나! 저런. 정말 안됐수. 그래서 어떻게 하셨수?" 그러자 할머니는 덤덤한 표정으로 대답했습니다. "뭘, 어쪄? 상추 사다 먹었지." 이 정도면 안 됩니다. 지긋지긋하였는데 이제 해방되었다고 받아들인다면 아름다운 끝은 아닙니다. 어느 교회 장로님의 장례를 치른 어느 목사님이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그 장로님은 6.25때 월남하여 열심히 사업을 하여 큰 기업을 이루었습니다. 교회를 개척하여 초대 장로로 열심히 수고하여 큰 교회도 세웠습니다.

   참으로 진실하고 겸손한 분이었습니다. 그 장로님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천국에 갔는데, 장례식에서 손녀가 나와 추모사를 이렇게  했답니다. "할아버지, 우리는 할아버지를 사랑합니다. 진실과 겸손과 바르게 사는 길의 표본이 되어 주시고 말없이 실천해 주신 할아버지, 할아버지를 할아버지로 모신 것을 저는 행복하게 생각하고‥할아버지, 우리가 할아버지 같은 신랑 얻게 해 달라고 소원했던 것을 아시지요." 우리가 죽은 후 할아버지와 같은, 아버지같은 삶을 살아야겠다는 자식들이, 손자 손녀들이 있다면 얼마나 아름다운 끝이겠습니까?


   2. 한계를 인정하고 하나님께 맡기는 사람이 아름답습니다(24절).


   요셉은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미래를 하나님께 맡겼던 사람입니다. 24절을 보면 죽음을 앞둔 요셉이 그 형제들에게 유언적인 말을 하였습니다. "요셉이 그의 형제들에게 이르되 나는 죽을 것이나 하나님이 당신들을 돌보시고 당신들을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시리라 하고." '나는 죽을 것이나.' 이 말은 인생의 한계와 유한성을 고백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당신들을 돌보시고 당신들을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시리라." 이 말은 미래를 하나님이 책임져 주실 것이라는 신앙고백입니다. 이 요셉의 유언이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일에 있어서 최선을 다하되 우리의 한계를 인정하고 모든 것을 이 모든 역사의 주권자이신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셉은 살아있는 동안 아버지와 형제들에게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많은 업적을 남겼습니다. 이제 그의 나이 110살입니다. 조상들에 비하면 한참 일할 나이입니다. 지금으로 생각하면 장수한 것이지만 그 당시 조상들의 나이에 비교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은 175세(24:78), 이삭은 180세(35:28,29), 아버지 야곱은 147세(47:28,49:33)에 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것에 비하면 110세는 아주 젊은 나이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을 떠나기에 앞서 하나님을 원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원망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깁니다. 인간들의 병 중의 하나가 무엇입니까?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기 싫어하는 것입니다. 영원히 살 것이라고 착각하면서 자신이 모든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창세기의 주제가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섭리하신다는 것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것부터 시작한 창세기는 마지막 족장 요셉의 죽음으로 끝이 납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보여 주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아무리 위대한 사람도 끝이 있지만 하나님은 계속적으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가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시대마다 사람들을 사용하십니다. 모세는 위대한 지도자였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여호수아를 세워 놓고 아름답게 하나님의 나라에 갔습니다. 그와 대조되는 인물이 사울입니다. 시작은 참으로 아름다웠습니다. 그런데 사울은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의 섭리에 순응하지 않았습니다. 끝까지 자신이 나라를 주장하려고 하였습니다.

   이미 하나님은 다윗을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을 통치하려고 하시는데 사울은 이것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이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어리석음으로 사울은 결국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였습니다. 사람이 무엇을 하고 사느냐는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왜 그 일을 하느냐는 것입니다. 신앙인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일을 하여야 합니다. 내 사리사욕에 사로잡혀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사실 이러한 마음을 극복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하나님의 일도 세상 방법과 똑같이 합니다. 기업을 경영하듯 교회 일도 그렇게 하면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사회에서 출세하듯 교회생활을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다만 주님에 의해 쓰임받는 것뿐입니다. 그러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주님, 왜 그만 두게 합니까?'하며 원망할 필요도 없습니다. 주어진 시간에 맡은 일에 충실히 하다가 주님이 놓으라 하시면 놓고 영원한 나라로 떠나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이든 중요한 것은 지금 내게 맡겨진 일에 충실하였느냐는 것입니다. 내가 새로운 직분을 맡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새로운 직분을 맡는다는 것은 그만큼 책임이 더 커진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또 그만큼 자기를 내려놓아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한 것입니다.
지난 번 어느 집사님이 이렇게 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지금 집사의 직분도 과분하다고 하셨습니다. 이 직분앞에서도 온전히 충성하지도 못하였다고 자신을 돌아 보았습니다.

   그렇게 자신을 돌아보는 사람은 반드시 내일 더 큰 일을 맡게 될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어떤 직분을 주시면 그 일을 할 수 있도록 새 힘, 새 믿음, 새 가치관을 주십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 나의 한계를 인정하고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을 맡길 때 그 믿음이 아름다운 것입니다. 거기에 진정한 겸손과 헌신이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의 한계를 인정하고 연출자이신 하나님 앞에 내 자신의 삶을 맡기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약속을 붙들고 소망을 갖는 신앙인이 아름답습니다(25절).


   25절, "요셉이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맹세시켜 이르기를 하나님이 반드시 당신들을 돌보시리니 당신들은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 하였더라" 요셉은 죽음의 순간에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에게 언약하신 하나님을 생각하며 약속의 땅에 대한 소망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그 땅에 자신의 시신을 안장할 것을 부탁하였습니다. 요셉에게 있어 애굽은 자신이 평생 산 땅이고 부귀와 영화가 보장된 땅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곳에 안주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가나안을 그리워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그가 하나님의 언약을 철저히 신뢰하였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이것을 요셉의 믿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히 11:22) "믿음으로 요셉은 임종시에 이스라엘 자손들이 떠날 것을 말하고 또 자기 뼈를 위하여 명하였으며". 우리는 생을 마치는 순간까지 천국에 대한 소망을 확실히 갖고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어느 심리학자가 임종자들의 모습을 몇 가지 유형별로 분류하였습니다. 첫째는 '안 죽어'형입니다. 평생 죽음을 생각하지 않고 살아온 사람들입니다. 죽음에 대한 마음의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는 사람입니다.

   둘째는 '왜 죽어' 형입니다. 분노를 터뜨리면서 죽어가는 형입니다. 죽을 이유가 없는데 왜 죽어야 하는지 억울해 하면서 죽는 사람입니다.
   셋째는 간청형입니다. 죽음 앞에서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며 자신의 생명을 조금이라도 더 연장해 보려고 애걸복걸하는 형입니다.

   넷째는 절망형입니다. 죽음 앞에서 충격을 너무 받아 정신을 잃어버린 사람들입니다.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하며 죽는 사람들입니다.
   다섯째는 승리형입니다.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부활이요 길이요 진리이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확신을 가지고 웃으며 아름답게 인생을 끝마치는 형입니다. 여러분은 어느 형입니까? 마지막 순간 붙들어야 할 소망이 없는 사람들은 얼마나 불쌍한 사람들입니까? 그의 끝이 얼마나 추하게 보입니까?

   1883년 3월 14일 칼 마르크스가 사망하던 날, 그의 하녀가 다가와서 "저에게 당신의 마지막 말을 남기시면 제가 기록해 두겠습니다"라고 말하자 마르크스는 "시끄러워, 나가!"라고 소리치며 죽어갔습니다. 나폴레옹은 "나는 불행했다. 프랑스, 군대, 조세핀"이라고 말하며 초라하게 숨졌습니다. 장개석은 "영웅이란 용감하게 실패하는 자이다. 그러나 희망은.."라고 말하며 대륙 수복의 한을 남기며 죽었습니다.

   그렇게도 자유를 부르짖던 철학자 사르트르도 1980년 3월 파리의 부르세 병원에서 죽음의 불안과 공포 때문에 병명도 묻지 않고 한 달 동안 발악을 하며 찾아온 사람들에게 소리를 지르다가 죽어 갔습니다. 소망이 없는 사람들의 죽음은 이와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소망이 있습니다. 죽음이란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계21:4)는 말씀처럼 천국으로 가는 관문이기 때문입니다.

   요한 웨슬리는 88세로 죽음에 임했을 때 "모든 것 중에 가장 좋은 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이다"라고 말하며 하늘나라에 갔습니다. 19세기의 유명한 미국 부흥사 D.L. 무디는 임종을 당하여 슬퍼하는 주위 사람들에게 "사랑하는 친구 여러분! 내일 아침에 무디가 죽었다는 소식이 신문에 나거든 정말 내가 죽은 줄로 생각지 마시오. 나는 죽은 것이 아니라 좀 더 높은 곳으로 옮겨가는 것뿐입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존칼빈은 임종시에 "주님! 당신께서 저를 묻어 주시는군요. 이것이 당신의 섭리로 된 것이기에 저는 더 할 수 없이 만족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과학자 톰슨은 임종 시에 제자들이 묻기를 "선생님께서 발견하신 것 중 최대의 발견은 무엇이었습니까?"라고 하자 "나의 생애에서 가장 큰 발견은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한 것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죽은 이의 묘비에 다음과 같은 비문을 새겼습니다. "이 사람은 죽은 것이 아니라 이제야말로 새로운 생명에 들어간 것이다." 실로 마지막 순간까지 약속을 붙들고 소망을 갖는 신앙인은 아름답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2015년을 보내고 있습니다. 두번 다시 맞이할 수 없는 한 해입니다. 올 한해동안 수많은 위기와 역경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그속에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고 하나님의 은혜도 넘쳤습니다.

   이제 새해를 믿음으로 바라보십시다. 믿음의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고 정의하였습니다. 우리는 오늘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행하실 일을  바라보는 것이 바로 믿음인 것입니다. 믿음으로 내일을 바라봅시다. 믿음으로 새해를 바라봅시다. 믿음으로 우리의 남겨진 날들을 바라봅시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처음도 아름다워야 하지만 처음보다는 마지막이 더 아름다워야 합니다. 처음보다 마지막이 아름다워야 진정 아름다운 것입니다. 주님은 가나 혼인잔치에서 물로 최상급의 포도주를 만드심으로 신랑으로 하여금 연회장으로부터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라는 칭찬을 듣게 하였습니다.

   여러분, 물이 좋은 포도주로 변한 것 같이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새로운 피조물이 된 우리는 끝이 아름다운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인생의 끝이 아름다운 사람들이 됩시다. 그리고 한 해를 시작할 때보다 한 해를 마무리할 때 더욱 아름다운 사람들이 됩시다. 이를 위해 다가오는 새해에는 요셉과 같이 가족들에게 인정받는 사람, 하나님을 의뢰하는 사람,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사람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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