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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문의 메시지

한 영혼을 향한 사랑(마18:10-14)

작성자야베스|작성시간16.10.04|조회수945 목록 댓글 1

한 영혼을 향한 사랑(마18:10-14)


   일본 작가 중에 우리가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 작가가 있습니다. 미우라 아야꼬(三浦綾子)라고 하는 작가입니다. '길은 여기에', '빙점'이라는 유명한 소설을 쓴 분입니다. 그녀의 작품은 대부분 간증적인 작품입니다. 자신이 어떻게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고,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게 되었는가를 밑바닥에 깔면서 작품을 그려 나갑니다. 그러므로 그분의 작품을 읽은 사람들 가운데 약 80%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이런 말을 한다고 합니다.

   그의 글을 읽으면 자신도 모르게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자연히 인정하게 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고 싶다는 마음이 은연중에 생기데 된다는 것입니다. 그분이 쓴 책이 일본만해도 수백만 권이나 팔렸고, 우리나라에도 베스트셀러가 될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그 책을 읽는 사람마다 복음을 간접적으로 듣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 엄청난 기여를 한 것입니다.

   그러나 미우라 아야꼬를 전도한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아십니까? 그가 어떤 환경에서 예수님을 만났는지 아십니까? 당시 미우라 아야꼬는 폐병 환자였습니다. 생과 죽음의 갈림길에 서서 매일매일 각혈을 하며 투병해야만 하는 수용소 안에 있을 때, 어떤 청년이 찾아와 그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이야기했습니다. 각혈을 하며 언제 죽을지 모르는, 죽을 확률이 큰 초라한 여자가 무슨 가치가 있습니까? 겉으로 볼 때 무슨 가치가 있습니까?

   동정하고 지나가면 끝인, 그저 한번 쳐다보고 눈물을 흘려 주면 그것으로 끝인 존재, 죽으면 더 이상 찾아갈 필요도 없는 존재가 아닙니까? 거기에 무슨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겠습니까? 그러나 그를 찾아온 청년은 그 여인을 어떻게 보았는지, 각혈을 하면서 파리하게 말라있는 그녀를 붙들고 "예수님이 당신의 구주입니다. 예수 믿으세요. 믿으면 당신은 이 모든 고통에서 벗어나서 영원한 하늘의 축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라며 전도했습니다.

   아마 그 청년은 이 여인이 나중에 일본 열도를 후끈하게 데울 수 있는 엄청난 작가가 되리라는 가능성을 못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 영혼을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 때문에 피를 흘리고 죽어가는 여인을 위해서 복음을 전했던 것입니다. 결국 그녀는 수백 명이 나가서 전도하는 것보다 더 큰 역할을 했지 않습니까? 이만큼 한 사람의 가치는 중요한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통합적으로 묶어 '세상'이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요3:16절에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세상은 전 인류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이 세상 속에 '나' 한 사람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이라는 통합적인 용어 속에 전부 묶어 말씀하시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나'라는 존재는 조금도 의미가 없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나'라는 개인은 그 전체 속에 묻혀버리고 드러나지 않는 것같이 보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셨다고 했지? 그러면 나하나 정도는 눈에 띄지도 않겠네.'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만큼 하나님은 크게 보십니다. 넓게 보십니다. 모든 것을 다 보십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 그것만이 아닙니다. 우리는 서신서를 통해서, 특별히 사도 바울을 통해서 놀라운 사실을 발견합니다.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하나님의 아들은 나를 위하여 죽으셨다고 말씀합니다. 따라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세상을 자기자신과 동일시한 것입니다. '세상을 사랑하신 것처럼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신다. 인류를 귀히 보신 것처럼 하나님은 나를 귀히 보신다. 하나님이 세상을 구원하시는 것처럼 나를 구원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눈에는 나 하나가 세상이요 세상은 바로 나 하나다.'는 말로 표현될 정도로 하나님 앞에는 개인이 이처럼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세상이 하나님 앞에 중요한 것처럼 나 하나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은 한 생명을 향한 하나님 사랑을 웅변적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린아이를 하나 세워놓고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여기서 어린아이는 자기를 낮추는 자라고 설명하셨습니다. 자기를 낮추는 자인 작은 자를 소홀히 여기고 무시하는 시대에 예수님은 이 작은 자를 구원하러 오셨고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너희가 돌이켜 작은 자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 작은 자 곧 잃어버린 한 영혼이 얼마나 소중한 사람인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1. 한 영혼은 천사들의 보호를 받는 존재입니다(10절).


   10절. "삼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그들의 천사들'이라는 말은 너희가 업신여기는 이 작은 자를 지키고 보호하는 천사가 있다는 말입니다. 사람마다 그를 보호하는 하나님의 천사가 있습니다. 누가복음에 보면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이 피가 되도록 기도하실 때 천사가 예수님의 기도를 도왔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천사는 우리의 기도를 돕습니다. 우리가 예배드릴 때 우리의 예배를 돕고, 우리가 찬양할 때 같이 찬양합니다. 히브리서 1:14에 천사는 하나님의 부리는 영으로 구원받은 백성을 보호하기 위해 보냄을 받은 존재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천사는 분명히 있습니다. 천사는 우리에게 기쁜 소식을 전해 주기도 하며, 사탄의 공격에서 우리를 보호하기도 하며, 위기에서 건져 주기도 합니다. 사도행전 12:8이하에 보면 재미있는 사건이 나타납니다.

   베드로가 전도하다가 붙잡혀서 아주 깊은 감옥에 갇혔습니다. 간수들이 겹겹이 지키고 있었는데 밤에 천사가 나타났습니다. (행 12:8-9) "천사가 이르되 띠를 띠고 신을 신으라 하거늘 베드로가 그대로 하니 천사가 또 이르되 겉옷을 입고 따라오라 한대 [9] 베드로가 나와서 따라갈새 천사가 하는 것이 생시인 줄 알지 못하고 환상을 보는가 하니라". 베드로도 누가 와서 그러는지 몰라 환상을 보는 것으로 착각했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첫째와 둘째 파수를 지나 시내로 통한 쇠문에 이르니 문이 저절로 열리는지라 나와서 한 거리를 지나매 천사가 곧 떠나더라"(행 12:10). 문이 저절로 열린 것은 천사가 열어 주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을 때에도 제자들에게 천사가 나타났습니다. 또 승천하셨을 때에도 천사가 나타나서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믿는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천사를 보내셔서 지켜 주시고 격려하시고 보호하십니다. 가끔 우리가 이런 간증을 듣습니다. 어떤 사람이 차를 타고 가다가 교통사고가 나서 자동차는 휴지처럼 구겨졌는데 사람은 머리털 하나 다치지 않고 기적적으로 살아났다는 이야기입니다. 그것은 천사가 보호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심각한 상황에서 우리 성도를 보호하는 역할을 천사가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어 지켜 주시고 보호하시는 존재가 바로 우리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우리를 도와주는 천사가 하나님의 얼굴 앞에 항상 있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우리가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 하나님이 즉시 보호하는 천사를 보내 주신다는 약속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천사는 항상 하나님의 얼굴 앞에 서 있습니다. 이처럼 한 영혼이 얼마나 소중한지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셔서 지키시고 보호하심으로 진리 가운데로 이끌어 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한 영혼은 예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는 존재입니다(12-13절).


   11절은 우리가 보는 성경에는 없지만 난외주를 보면 "인자가 온 것은 잃은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이 빠져 있다 할지라도 그 다음 말씀에서 예수님은 이 말씀과 같은 의미의 살아 있는 생생한 비유를 보여 주셨습니다. 12-13절,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냐 만일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 [13]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찾으면 길을 잃지 아니한 아흔아홉 마리보다 이것을 더 기뻐하리라"

   우리는 이 이야기에서 중요한 몇 가지 교훈을 발견하게 됩니다.


   1)하나님께는 아흔아홉 마리나 한 마리나 같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양적인 사랑이 아니라 질적인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절대 사랑의 가치로 보고 계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양 아흔아홉 마리에 만족하지 않으셨습니다. 목자와 양무리를 떠나 깊은 밤, 산 속에서 울부짖으며 헤매는 한 마리 잃어버린 양에게 생명을 거셨습니다. 자기 생명을 바쳐서 그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으셨습니다.

   경제적으로 계산한다면, 한 마리 양을 구하는데 드는 고생과 수고가 훨씬 더 많습니다. 그 밤에 그런 고생을 하느니 차라리 죽게 버려 두는 것이 더 이익일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세상적인 가치입니다. 세상의 기준은 사람을 그렇게 취급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안전한 곳에 있는 아흔아홉 마리 양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산에서 길을 잃은 상처투성이의 한 마리 양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받을 만한 가치가 있거나 유용하고 이익이 될 만한 존재여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조건 없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구원하셨습니다. 내게 사랑받을 만한 조건이 없지만, 그만한 가치가 없지만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에게는 아흔아홉 마리의 가치나 잃어버린 한 마리의 가치나 같습니다. 하나님에게는 부자나 가난한 자나 동일합니다. 배운 자나 못 배운 자나 동일합니다.

   하나님에게 있어서는 온 천하보다 귀한 것이 한 생명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사람을 구별해서 사귑니다. 높은 사람, 부자, 영향력있는 사람은 더 귀하게 생각하고 낮은 사람, 가난한 사람, 영향력이 없는 사람은 덜 귀하게 생각합니다. 교회의 본질은 이 하나님의 사랑이 구현되는 데 있습니다. 교회에서는 이 하나님의 사랑의 질이 그대로 존재해야 합니다.


   2)하나님은 우리의 잘못을 조건없이 용서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어떤 흉악한 죄도 용서받을 수 있는 특권을 가진 존재입니다. 양이 길을 잃어버린 것은 목자의 실수입니까? 양의 실수입니까? 양의 실수입니다. 목자가 가지 말라고 한 곳에 양이 몰래 간 것입니다. 교회에는 이런 골치 아픈 양들이 종종 있습니다. 아주 제멋대로 신앙 생활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몇 달 동안 안 나오다가 한 번씩 교회에 나오고, 술 한 잔하고 예배 한 번 드리고, 나쁜 짓 한 번 했다가 예배 한 번 드리는 속썩이는 양이 있습니다. 우리가 고생하고 어려움을 겪는 것은 하나님의 실수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실수 때문입니다. 우리가 잘못해서 교만해서, 버릇이 없어서 이리 부딪치고 저리 부딪쳐 온 몸이 상처투성이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실수해서 우리가 잘못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에 보면, 목자가 양의 실수에 대해 야단을 치거나 정죄하지 않고 있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우리의 실수보다도, 우리의 허물보다도 우리를 불쌍히 여기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떠한 희생의 대가를 치르더라도 포기하지 않고 우리를 구원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실수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실수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우리 잘못 때문에 구원을 포기하거나 하나님의 사랑을 유보하지 않습니다.

   여전히 하나님은 우리를 찾으시고 우리를 기억하시고 우리를 구원하기를 원하십니다. 로마서 5:8에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완전한 사람이 되어서 교회에 오기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죄인인 채 오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인간적으로 여러 가지 문제들을 안고 있는 것, 하나님은 너무나 잘 아십니다.


   그것을 다 해결하고 오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 모습 그대로 나오라고 하십니다. 주님은 실수하고 죄짓고 허물 많은 우리를 그대로 용납하십니다. 인간들은 이기적이고 교만하고 자기 중심적입니다. 인간은 본질상 진노의 자식입니다. 인간은 스스로 절망을 선택했고 불행을 자초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처럼 교만하고 어리석은 인간을 조건없이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세상에 보내어 십자가에서 대신 죽게 하셨습니다. 이 비유에서 바로 이 사랑을 보는 것입니다.


   3)하나님의 사랑은 기다리시는 사랑이 아니라 찾으시는 사랑입니다(13절).
   우리가 위기 상황에 몰려 있을 때 하나님은 적극적으로 개입하시는 분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목자는 양이 제발로 걸어 들어올 때까지 기다리는 분이 아닙니다. 탕자의 비유는 어떻습니까? 탕자가 집을 나갔다가 다시 회개하는 마음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럴 때 아버지는 집 안에 앉아서 기다린 것이 아니었습니다.  문 밖에 나가 기다리다가 아들의 모습을 보고 뛰어와 얼싸안고 반기며 맞아 주었습니다.

   그 아버지는 탕자가 집을 떠났을 때부터 벌써 아들을 용서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죄지을 때부터 용서하고 계십니다. 떠날 때부터 용서하고 계셨고, 문을 열고 계셨고,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아들이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아들을 얼싸안고 귀걸이를 달아 주고 반지를 끼워 주고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벌였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렇게 맞아 주시는 분이십니다.

   죄인 가운데 두 부류가 있습니다. 스스로 회개하고 돌아올 가능성을 가진 죄인이 있습니다. 탕자가 되었어도, 하나님을 등 뒤로 하고 세상에 가서 인간적으로 살고 고민하고 죄에 빠져 괴로워하다가도 마지막에는 하나님을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죄인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문을 열고 밤이나 낮이나 기다리십니다.

   그런데 또 하나의 죄인은, 스스로는 절대로 죄 가운데서 빠져 나올 수 없는 그런 죄인이 있습니다. 이런 죄인들을 위해서 목자는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찾아가는 것입니다. 산을 넘고 물을 건너서 그 엄청난 고난의 길을 걸어서 찾아오십니다. 우리를 만나기 위해 예수님은 포기하지 않으시고 찾아오십니다. 우리가 돌아올 수 없는 상황일지라도 주님은 우리를 포기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더 이상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 있을지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절대로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4)하나님은 우리를 찾으시고 잔치를 베풀고 기뻐하신다는 사실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낳으면 그냥 좋아합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그냥 보며 좋아합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우리를 좋아하십니다. 탕자라도, 못된 짓을 평생했을지라도 자녀라고 그냥 기뻐하고 좋아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잃었다가 다시 찾은 양에 대해서 야단치거나 충고하거나 멸시의 눈초리를 보내지 않습니다. 오직 기뻐할 뿐입니다.

   잃었다 찾은 양을 어깨에 메고 돌아와 환호성을 울리며 잔치를 베푸는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우리는 가끔 회개하고 돌아온 사람에게 너무나 가혹하게 대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 사람의 과거 때문에 그가 현재 변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정죄하고 경계하는 수도 있습니다. 우리 사회는 전과범에 대해 너무나 냉대하고 경멸하여 그에게 기회를 주기를 꺼려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의 허물과 죄를 보시지 않고, 잃었다가 다시 찾은 기쁨과 감격만으로 어쩔 줄 몰라 하십니다.


   좀더 실제적으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우리안에 있는 아흔 아홉마리 양은 오늘날 교회를 말합니다. 길 잃은 한 마리 양은 저 세상에 불신자들을 말합니다. 그 길 잃은 한 마리 양도 하나님의 양입니다. 아흔아홉마리도 중요하지만, 길 잃은 한 마리도 못지 않게, 아니 더 중요합니다. 길 잃은 한 마리를 찾아 떠난 목자에게는 이제 99마리도 길 잃은 양 한 마리처럼 목자 없는 양의 상태가 되어 버렸습니다. 하지만, 목자는 길 잃은 한 마리를 찾으러 가는 것입니다.

   길 잃은 한 마리를 찾아오는 것을 더 중요하게 보시는 것입니다. 이게 하나님의 특별한 관점입니다. 오늘날 교회에 나와 예배드리는 저와 여러분도 귀중합니다. 하지만, 우리 주님께서는 바깥 세상에서 하나님을 떠나 방황하는 길 잃은 한 사람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을 더 귀하게 보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13절에 이렇게 표현합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찾으면 길을 잃지 아니한 아흔아홉 마리보다 이것을 더 기뻐하리라."

   우리가 아무 관심없이 그냥 지나쳐버리는 저 세상에 있는 예수 안 믿는 이웃 사람들, 그들은 집을 나간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부모는 가출한 자녀가 돌아오기를 밤잠을 설쳐가며 기다립니다. 자나깨나 늘 집 나간 자녀에게 관심이 온통 가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의 관심은 교회 울타리 밖의 사람들에 가 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 품으로 돌아오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들에게 간절히 바라시는 것은, 우리가 주님의 마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관심이 교회 안 보다는 교회 밖 세상에 방황하는 불신자들에게 가 있기를 원하십니다. 길 잃은 한 마리의 양을 찾기 위해 아흔 아홉 마리 양을 산에 놔두고 이 산, 저 산, 이 절벽, 저 절벽 위험한 곳을 마다하지 않고 다니는 목자의 모습을 그려보십시오. 이번 11월20일 추수감사주일에 추수의 기쁨을 이웃과 함께 나누는 이웃초청행사는 계획하고 있습니다.

   올해 표어에 있는 것처럼 어떻게 해서든 한 영혼을 주님께 인도하겠다는 간절한 마음으로 동참합시다. 한 영혼을 하나님께 드리는 일은 안 믿는 사람을 태신자로 작정하는 일에서 시작됩니다. 그들을 마음에 품고 기도하면서 전도는 시작됩니다. 교회 모든 가족이 11월20일 추수감사절에 한 영혼을 하나님께 드릴 때, 올해 추수감사절은 한 영혼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을 모든 성도들이 함께 보며 춤추며 기뻐 찬양하며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감격스런 날이 될 것입니다.

   14절, "이와 같이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라도 잃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 작은 자 중에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버려진 한 사람의 영혼에 더 많습니다. 여기에 우리의 고민과 갈등이 있습니다. 그 사람 하나쯤 포기하고 싶은데 하나님의 뜻은 그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밉고 힘들고 어려운 사람을 마음에 품고 전도대상자로 삼아야 합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내 모습 그대로 나의 구원의 가능성을 평가하셨다면, 하나님이 나를 포기하셔도 몇 번을 포기하셔야 했고 나를 버려도 몇 번을 버리셔야 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버리지 않으시고 지금까지 참고 기다리신 이유는 바로 이 한 작은 자도 버리지 않는 사랑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포기하시지 않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마음이, 이런 하나님의 뜻이 우리가 잃어버린 한 영혼을 구원해야 할 이유인 것입니다.

   이번 이웃초청 전도행사에 우리가 명심할 것은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다는 것입니다. 이번 행사에 몇 명이 초청되어 오느냐, 이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내가 한 영혼을 주님께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테레사 수녀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는 일이 가끔은 넓은 바다의 한 방울처럼 하찮게 여겨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한 방울의 물이 그 자리에 없다면, 넓은 바닷물의 분량도 그만큼 줄어들겠지요. 그러므로, 언제나 수량만을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는 한 번에 한 사람씩 사랑할 수 있습니다. 한 번에 한 사람을 섬기는 것이지요."

   나 한 사람이 이 거룩한 하나님의 생명사역에 동참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하나님의 영광이 온 세상을 덮는 그 일에 내가 한 방울의 물이 되는 것입니다. 나 한 사람의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나라는 점점 크게 확장되는 것입니다. 내가 구원한 그 영혼이 인류역사를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을 주님께로 인도하는 일, 이것은 천하를 얻는 일보다 더 귀한 일입니다. 이 한 영혼에 관심과 사랑으로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는 일에 쓰임받는 양문교회 모든 성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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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김상목 | 작성시간 16.10.09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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