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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문의 메시지

부자 청년의 고민(마19:16-22)

작성자야베스|작성시간16.11.06|조회수711 목록 댓글 1

부자 청년의 고민(마19:16-22)


   지난 주에 우리는 자녀를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안수기도를 받으려는 부모들의 이야기를 살펴보았습니다. 자녀들을 주님께 인도하는 일은 부모의 중대한 사명입니다. 그 일을 위해 부모된 성도들을 힘써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도 우리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육신적으로는 부모로서 자녀를 양육하기 위해 온 정성을 다 쏟지만 영적으로는 어떻게 하고 있는지 저도 늘 고민입니다. 기도제목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의 힘이 부족하지만 전능하신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기도제목을 드리고 합력하여 그 뜻을 반드시 이루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신 것을 믿습니다. 내가 믿음 위에 바로 서서 바른 삶을 살면 때가 되면 내 자녀들도 주께로 돌아올 줄로 믿습니다.


   오늘은 부자 청년의 이야기입니다. 먼저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를 살펴보겠습니다. 20절을 보면 청년이라고 했습니다. 어린아이도 아니고 노인도 아니고 혈기가 왕성한 청년입니다. 또 22절을 보면 이 사람은 재물이 많은 사람입니다.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도 이 청년이 부자였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누가복음에는 이 사람이 관리였다는 말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어떤 관리가 물어 이르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눅 18:18).  여기서 관리라고 하는 것은 유대 회당의 지도자나 산헤드린 회원에 해당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찾아온 이 사람은 이 세상 사람들이 가장 부러워하는 세 가지 조건을 다 갖춘 사람입니다. 첫 번째는 젊음입니다. 두 번째는 재물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권력과 명예입니다. 젊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얼마나 부러운 일입니까? 청년, 그것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인생의 꽃입니다. 삶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른들은 청년들을 보면 그 시절을 그리워합니다. 청년이란 젊음, 꿈, 건강, 미래, 소망, 환상을 상징하는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은 젊은 사람입니다. 건강한 사람입니다.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젊은이들은 돈이 없습니다만, 이 사람은 놀랍게도 청년이면서도 부자였다고 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젊음이 있고 돈이 있다." 이 사람은 분명히 자신만만 했을 것입니다.  도도하고 의기양양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의 신분이 이 정도로 끝나지를 않습니다. 그 당시에는 종교 지도자가 곧 정치 지도자였고 사회와 경제를 총괄하는 지성인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누가 봐도 부족함 없는  권세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또 이것으로 끝나지를 않습니다. 대개 명예가 있고 돈이 있고 젊음이 있는 사람들은 도덕적인 약점이 있기 마련입니다. 여자 문제가 있다든지 하여 생활이 좀 복잡합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도덕적으로나 윤리적으로도 완벽한 삶을 살아온 사람입니다.


   18-20절, "이르되 어느 계명이오니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 하지 말라, [19]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 [20] 그 청년이 이르되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온대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이렇게 말할 정도면 도덕적으로 아주 완벽한 삶을 산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는 더 재미있는 말이 있습니다.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 그러니까 성인이 되어서, 좀 철이 들어서 이렇게 완벽한 도덕적 삶을 산 것이 아니라, 그런 도덕적 삶에 대해서는 어렸을 때부터 훈련받고 살아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람은 겸손하기까지 하였습니다.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인 바리새인들이나 사두개인들과는 다른, 이 사람의 구도적인 태도가 참 아름답습니다.


   마가복음 10:17에 보면 "예수께서 길에 나가실새 한 사람이 달려와서 꿇어 앉아 묻자오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하였습니다. 유대인 가운데 그 정도의 신분과 위치에 있는 사람이면 대개 예수님에 대해서 비우수거나 대적하였는데 이 사람은 예수님이 길에 나가시는데 달려가 꿇어 앉았다고 했습니다. 신앙적인 겸손까지 갖춘 사람입니다. 부족한 것 하나 없이 다 갖춘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무엇을 찾고 있었습니까? 16절,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이르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그런데 막 10:17절을 보면 이 말씀을 더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막 10:17) "예수께서 길에 나가실새 한 사람이 달려와서 꿇어 앉아 묻자오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선한 선생님"이라고 불렀습니다.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보는 눈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비방의 대상으로 생각했지, 존경과 경외의 대상으로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예수님이 보통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빨리 눈치챘습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최대의 경의를 표현하는 것입니다.

   "당신은 선한 선생님이십니다." 이 정도만 해도 괜찮겠습니다. 이 사람이 예수님께 질문한 내용이 우리를 또 한 번 놀라게 합니다. 그것은 자기 명예나 지위나 물질에 관한 질문이 아니고, 영생에 관한 질문이었습니다. 예수를 믿어도 핵심을 찌르지 못하고 주변의 문제를 가지고 왔다갔다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아주 정확하게 신앙의 본질에 해당하는 영생의 문제를 가지고 온 것입니다. 그것이 '영생'입니다.

   영생이란 무엇입니까? 성경에서 말하는 영생은 영원히 사는 불멸이 아닙니다.


   1)성경에서 말하는 영생은 하나님 자신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21:33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 에셀 나무를 심고 거기서 영원하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으며." 이 말씀에서 우리는 하나님 자신이 바로 영생의 본질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참된 영생의 개념은 '무한하고 영원한 시간'이 아닙니다. 그것은 영생하시는 하나님의 시간을 의미합니다. 영생하시는 하나님과 연합하는 것을 영생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만약 우리가 150세까지 산다면 얼마나 힘들고 징그럽겠습니까? 하나님 없이 영원한 시간은 불안한 것입니다. 하나님 없는 무한한 세계는 우주의 고아와 같은 것입니다. 우리는 가끔 인공위성이 우주의 미아처럼 떠돌아다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얼마나 불안하고 초조하고 외로운 일입니까? 그것은 영생이 아닙니다. 영생이란 영원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인격의 품에 안겨서 그와 동행하는 것입니다.


   2)성경에서 말하는 영생의 개념은 그리스도 자신을 의미합니다.  (요 14: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예수님이 생명입니다. 그러므로 그 생명을 소유한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 것입니다.
(요일 5:11,12)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12]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요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믿는다는 것은 곧 예수님은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내 마음의 중심에 영접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6:51에 예수님께서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고 하셨습니다. 또 요한복음 6:54에서는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죽음이 없는 것입니다. 죽음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영생은 죽어서 얻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순간에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이 내 안에 있어서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부터 영생의 진정한 축복과 맛을 느끼며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죽음의 세력이, 어떤 절망이 우리를 괴롭히지 못하는 것입니다. 비록 내가 암에 걸려 죽을지라도 영생을 가진 사람에게는 육신이 그렇게 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실패가 두렵지 않습니다. 사업하다 부도 나는 일이 나를 근본적으로 절망케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상황적인 고민은 줄 수 있어도 절망을 내게 줄 수는 없는 것입니다. 남편이 죽어도, 아내가 죽어도, 자식이 병들어 죽어도 이 영생을 가진 사람은 근본적으로 절망하지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영생은 하나님의 생명이고 그 하나님의 생명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영생을 가진 사람들은 자유가 있습니다. 평안이 있습니다. 말할 수 없는 소망이 그 안에 있는 것입니다.

   (요 10:28)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하나님이 맺어 주신 결혼을 사람이 이혼시킬 수 없듯이, 하나님이 주신 생명은 세상의 어떤 세력도 빼앗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요한복음 17:3에서 예수님께서 영생에 대해서 결론을 맺고 있습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여기서 안다는 말은 단순한 지적인 이해를 넘어서 한 신앙 인격의 연합을 뜻하는 것입니다. 참 영생, 그것을 가졌나 안 가졌나는 다음과 같이 테스트해 보면 알 수 있어요.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아직 불안한 사람은 영생이 없는 사람입니다. 진짜 영생을 가진 사람은 어떤 경우에 있어서도 근본적인 삶의 불안이 없는 것입니다. 이 청년은 영생에 대해 관심이 있고 영생을 가지고 싶은 간절한 마음을 가졌지만, 아직도 불안한 것입니다.

   그 증거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찾아온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와서 확인받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영생이라면 우리는 여기서 자연스런 결론을 하나 내릴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영생이나 구원은 인간의 선행이나 노력이나 수양으로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영생은 은혜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은혜로 이분을 내가 영접함으로써 그 영생이 내게 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이 부자 청년은 영생을 자기가 선을 행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것으로 착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선한 선생님이라고 불렀고 영생을 얻는 것도 행위로 얻어질 수 있다고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자신이 세상에서 성공적인 삶을 살았으니까 당연하게 영생도 소유하고 싶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17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 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아주 놀랍게 접근하십니다.

   지금 이 청년에게 가장 예민한 부분은 선한 행위입니다. 자기가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완벽한 삶을 살아왔기 때문에, 그리고 영생을 자기의 선한 행위로 사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선한 선생님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런 그에게 예수님은 믿음으로 접근을 하신 것이 아니라 선의 문제로 접근하십니다. 아마 우리 같으면 영생을 얻기 위해서는 믿음이 필요하다고 말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러면 하나님의 계명들을 다 잘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청년은 미소를 짓기 시작했습니다. 자신 만만하다 것입니다. 18절에 그가 뭐라고 했습니까? "이르되 어느 계명이오니이까"(18절). 도덕적으로 완벽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어느 계명이냐고 물었습니다. 우리 주위에서도 가끔 이런 사람들을 발견합니다.   자신이 연약함을 인정하는 사람은 전도하기 쉽습니다. 술을 한 잔 한다든지 자기의 삶에 문제가 많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래도 전도하기가 괜찮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문제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문제가 있어도 자기를 드러내지 않고 세상적으로 성공한 사람이나 뭐 자기는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전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은 참 교만합니다. 자기 생각이 자기를 사로잡고 있기 때문에 복음을 받아들일 공간이 없습니다. 본문의 청년이 바로 이런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모르시는 척하면서 이 청년에게 십계명을 소개해 주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대신 계명이 아니라 이웃에 대한 대인계명만, 그러니까 제 5계명부터 마지막 계명까지 말씀해주시는 것입니다. (18-19절) "이르되 어느 계명이오니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하지 말라, [19]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

   그 때 이 청년은 자신만만 합니다. 20절에 "그 청년이 이르되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온대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라고 하였습니다. 여러분, 이 청년 대단하지 않습니까?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는 더 자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어려서부터." 십계명은 어려서부터 다 지키고 살아왔다는 것입니다. 이때 예수님이 그 영혼의 중심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21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예수님은 이 청년의 내면 깊은 곳을 보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외모를 보지 않으십니다. 우리 영혼의 깊은 곳을 하나님은 손으로 딱 짚고 계십니다.

   사람마다 자기 내면 깊은 곳에 하나님 아닌 다른 무엇을 둘 수 있지만 이 사람의 경우는 물질에 대한 애착, 물질에 대한 집념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그것을 보신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고 하셨는데 이 말씀을 오해하기 쉽습니다. 예수를 잘 믿으려면, 구원받으려면 오늘 집에 가서 재산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준 다음에 와서 예수 믿으라는 뜻이 아닙니다. 구원은 은혜로, 믿음으로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청년에게는 물질이 문제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는 직업을 가지고 있는데, 그가 와서 헌금도 하고 봉사도 잘 합니다. 그에게 하나님이 그 직업을 버리고 와서 나를 섬기라 하면 그가 당황하기 시작합니다. 어떤 좋은 지위에 있는 사람에게 예수님이 그 지위를 버리고 와서 나를 섬기라고 말씀하실 수 있습니다.

   이럴 때 그가 주저하고 망설인다면, 그에서 있어서 우상은 무엇입니까? 숨어 있는 내면의 장애물은 무엇입니까? 직업이고 지위인 것입니다. 오늘 이 청년의 구원의 장애물은 물질이었습니다. 그것을 예수님이 보시고 딱 집어내신 것입니다. 신앙에 장애가 되는 직업, 취미생활, 물질, 그 어떤 것이 하나님과 나 사이에 끼어 있다면 오늘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가 다 팔아 제거하고 나를 따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러한 명령앞에 어떻게 반응하시렵니까? 우리가 주님을 따르는데 버릴 것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우상의 도시인 갈대아 우르, 네 고향, 친척 아비집을 떠나는 것이었습니다. 야곱에게는 욕심으로 가득찬 자기자신이었습니다. 이러한 자기의 자아가 깨어지기 까지 하나님은 수많은 장애물을 통과하게 하였습니다.

   22절을 보십니다.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돈이 많다는 게 참 문제입니다. 그러면 이제 이 청년을 분석해 봅시다. 돈이 있습니다. 젊음이 있습니다. 명예가 있습니다. 도덕적 삶이 있습니다. 신앙적 겸손이 있습니다. 영생에 관한 질문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 와서 무릎도 꿇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것들을 보시지 않은 것입니다. 거기에 관심이 없으십니다.

   예수님은 그 청년의 심령 깊은 곳에 감추어진 물질 우상을 보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안에 중심에 무엇을 모시고 있습니까? 하나님입니까/ 세상 우상입니까? 아니면 자기 자신입니까? 예수님은 지금 그것을 보시고 그것을 버리고 나를 쫓으라고 명하신 것입니다. 이 청년은 이 도전 앞에 고통을 느꼈습니다. 아주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갈등하고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여러분, 말씀을 들으면 갈등하고 고민합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갈등하고 고민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우상은 무엇입니까? 지금 하나님과 우리와의 깊은 관계를 가로 막고 있는 벽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그것을 보고 계십니다. 우리는 딴소리를 합니다. "할렐루야, 뭐 어쩌고 저쩌고' 하는데, 하나님은 하나도 안 들으십니다. 그 우상, 그 벽만 바라보고 계십니다. "너, 헛소리하지 말고 이걸 빨리 치워라" 하십니다. 어떤 사람은 성격일 수가 있습니다. 여러 가지 다양한 것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이 그것만 보고 계신 것입니다. 시편 32:4에서 말했습니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빠져서 여름 가뭄에 마름 같이 되었나이다(셀라)". 오늘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은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지금까지 소중하게 여겼던 그 어떤 것을 치워 버리라고 말씀하실 때 우리는 고민하게 됩니다.

   지적을 받았을 때 우리는 고민해야 합니다. 괴로워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 청년처럼 근심하고 떠나지 말아야 합니다. 이 사람의 비극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근심하는 것까지는 좋았습니다. 근심하고 떠나 버린 것, 이것이 문제입니다. 우리는 근심하고, 그리고 돌아와야 합니다. 그물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던 갈릴리의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적받은 영적인 장애물을 치워 버리고 주님을 따르시기 바랍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부족함이 조금도 없는 부자 청년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는 돈이 많았습니다. 권력도 있었습니다. 지식도 상당했습니다. 주변의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습니다. 겸손했습니다. 그리고 영생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어려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중심에 감추어져 있는 우상을 발견했습니다. 그 우상은 돈이었습니다. 그의 재산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물질을 다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라고 초청하십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우상이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 있어 나를 호령하고 있는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오늘 예수님은 네가 그렇게 사랑하고 귀중하게 생각하는 그것을 내려놓아라. 너의 진정한 주인은 하나님이다. 하나님께 순복하고 하나님을 주인으로 삼으라는 것입니다. 내가 그토록 사랑했던 그 우상을 깨트려 버리고 주님을 진정으로 따르는 참된 제자가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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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김상목 | 작성시간 16.11.2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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