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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문의 메시지

핍박속에 담긴 하나님의 뜻(행 4:1-12)

작성자야베스|작성시간18.08.05|조회수341 목록 댓글 0

핍박속에 담긴 하나님의 뜻(4:1-12)

 

서울 양화진 선교사 묘역에 가면 24살 젊은 나이에 조선에 와서 8개월 만에 순교한 루비 캔드릭(Ruby R. Kendrick, 1883-1908)이라는 여선교사의 비석이 있습니다. 미국 텍사스에서 파송된 감리교 선교사인데 아쉽게도 한국에 온지 8개월 만에 급성맹장염에 걸려 수술했지만 소천하고 말았습니다. 그 분 묘비 상단에 보면 이런 글이 쓰여 있습니다. 나에게 천 개의 목숨이 있다 해도 그 모두를 조선에 바치리 “If I had a thousand lives to give, Korea should have them all”

 

이 분이 죽기 직전에 부모님께 쓴 편지가 있습니다. 이곳 조선 땅은 참으로 아름다운 곳입니다. 모두들 하나님을 닮은 사람들 같습니다. 선한 마음과 복음에 대한 열정으로 보아 아마 몇 십 년이 지나면 이곳은 예수님의 사랑이 넘치는 곳이 될 것 같습니다. 저는 복음을 듣기 위해 20킬로미터를 맨발로 걸어오는 어린아이들을 보았을 때 그들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위로를 받습니다. 그러나 이곳에 핍박이 심해지고 있습니다.

 

그제는 예수님을 영접한 지 일주일도 안된 사람 서너 명이 끌려가서 순교했습니다. 토마스 선교사와 제임스 선교사도 순교했습니다. 선교본부에서 철수하라는 지시가 있었지만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그들이 전도한 조선인들과 아직도 숨어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순교할 작정인가 봅니다. 오는 밤은 유난히도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외국인을 죽이고 기독교를 증오한다는 소문때문에 부두에서 저를 끝까지 말리셨던 어머니의 얼굴이 자꾸 눈앞에 아른거립니다. 아버지, 어머니. 어쩌면 이 편지가 마지막일 수도 있습니다. 저는 이 땅에 저의 심장을 묻겠습니다. 이것은 제가 조선을 향해 가지는 열정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조선을 향해 가지신 열정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무엇이 24살 꽃다운 처녀로 하여금 이국땅에서 기꺼이 생명을 바치게 했겠습니까? 예수님의 그 사랑과 그 은혜가 너무 크기에 생명도 아끼지 않고 복음을 위해 다 쏟아 붓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한국 교회가 이토록 놀라운 부흥이 있기까지 그냥 순탄하게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여기 이런 꽃다운 청년들, 수많은 선교사들과 신앙의 선조들의 땀과 피가 쏟아져서 세워진 교회인 것입니다.

 

내 너를 위해 위하여 몸버려 피흘려 내 죄를 속하여 살길을 주었다. 널 위해 몸을 주건만 너 무엇주느냐? 그렇습니다. 주님을 나를 위해 대신 십자가를 지셨는데 난 주님을 위해 무엇을 드리고 있습니까?

 

오늘 본문에 나오는 베드로와 요한은 복음때문에 핍박을 받습니다. 복음 때문에 붙잡혀서 예수님처럼 산헤드린 공의회가 다 모였습니다. 그리고 재판을 합니다. 저들은 권력자입니다. 저들은 기득권세력입니다. 예수님도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는데 무슨 짓을 못하겠습니까? 그 제자인 베드로와 요한이 지금 붙잡혔습니다. 전 같으면 두려움에 떨고 살려고 몸부림을 쳤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달라졌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성령 하나님이 임재하셔서 저들과 함께 계셨기 때문입니다.

 

1. 핍박이 가해진 이유(1-3)

1-3, "사도들이 백성에게 말할 때에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이르러 [2] 예수 안에 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고 백성을 가르치고 전함을 싫어하여 [3] 그들을 잡으매 날이 이미 저물었으므로 이튿날까지 가두었으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반대하고 거부하는 세력이 나타났습니다. 그들이 누구입니까? 그들이야말로 가장 먼저 감사하고 찬양하고 봉사해야 할 성전에서 봉사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제사장, 성전맡은 자, 사두개인들이었습니다. 가장 주님을 위해서 살아야 할 될 신앙의 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저들이 가장 큰 복음의 반대세력이 된 것입니다. 그들이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자부하고 성전제사를 주도하는 세력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저들이 교회를 핍박합니다. 이처럼 복음의 역사를 방해하는 세력은 언제나 교회안에 있었습니다.

 

중세시대에도 교회 안에 기득권세력이 전통을 강조하고 거짓 교리를 앞세워 성경을 불태우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자고 외치던 종교개혁자들을 핍박했습니다. 오늘은 어떨까요? 먼저 믿는 우리들이 신앙의 경직화를 조심해야 합니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이 전부라고 믿어서는 안됩니다. 성령충만해야할 성도가 자기충만하면 언제나 자기가 기준입니다. 자기말이 옳고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면 하나님이 기뻐할 것이라고 착각합니다.

 

아닙니다. 언제나 자기가 부정되고 하나님의 뜻을 사모하고 그 뜻앞에 순복할 때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성령충만한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저들은 그렇치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역사를 대적하고 핍박하고 죽이려고 합니다. 어둠의 사람들은 빛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정의와 진리에 도전합니다. 앉은뱅이가 일어나 걷고 뛸 때 함께 기뻐해야 될 것인데 그렇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도들의 가르침의 내용이 거슬리고 예수 부활의 사건이 그들에게는 위협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제사장들은 산헤드린 공회에 속한 권력자들로서 성전에서 모든 예배의식을 집행하는 성직자들이었습니다. 성전 맡은 자는 성전 수비대의 우두머리를 가리킵니다. 이들은 그 당시 대제사장 다음가는 지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두개인들은 제사장 가문의 사람들로서 당시 부유하고 지위가 높은 기득권층들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부활이나 내세같은 것을 믿지 않는 세속주의, 현실주의자들입니다.

 

그러면 이들이 사도들을 핍박하고 체포하여 감옥에 가둔 이유는 무엇입니까? 2절에서 그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예수 안에 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고 백성을 가르치고 전함을 싫어하여"라고 말씀합니다. 저들은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습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살리신 것입니다. 부활은 제자의 확실한 신앙고백입니다. 저들은 부활을 체험하고 비로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만약 부활이 없었다면 그렇게 두려움에 떨던 제자들이 이렇게 담대하게 예루살렘 거리에 나와서, 산헤드린공회에서 예수님이 그리스도라고 선포할 수 있었겠습니까? 부활은 저들을 깨웠습니다. 사망이 끝이라고 믿었던 저들에게 부활은 영원한 생명의 복음이요, 죄와 사망권세를 깨트린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믿었습니다. 부활을 통해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며 우리의 그리스도이신 것을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부활의 복음을 증거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두개인들은 현실주의자들입니다.

영원이나 보이지 않는 영적세계, 천사나 천국조차 믿지 않았습니다. 그저 현 세상에서 잘 살고 잘 먹는 것이 축복이고 은혜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현실과 적당히 타협하며 잘 먹고 잘 살면 되었습니다.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 최고의 목표였습니다. 그러니 부활을 믿을 리가 없었습니다. 산골마을인 나사렛에서 태어난 예수가 메시야일 수 없었습니다. 또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는 실패한 예수요, 저주받은 예수였습니다.

 

그런 예수님을 그리스도라, 하나님의 아들이라, 부활했다 주장하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저들은 마귀의 역사였습니다. 어둠의 역사였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부활을 전하는 것을 싫어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 부활의 복음이 생명의 복음입니다.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우리에게 영혼이 있는 것처럼 영혼은 영원히 삽니다. 그 영혼은 예수님처럼 죽음이 끝이 아니라 부활이 있고 그 부활 후에는 하나님의 심판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하게 선포했습니다. (5:29)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그리스도안에 있든, 밖에 있든 모두가 부활합니다. 문제는 어느 부활에 참여하느냐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저는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자로 생명의 부활에 참여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그들을 잡으매 날이 이미 저물었으므로 이튿날까지 가두었으나라고 말씀합니다. 그 당시 핍박의 주체 세력들은 사도들을 골치 아픈 존재들이라고 여기고 그 세력이 더 확산되기 전에 기를 꺾어야 되겠다고 판단을 했습니다. 그러나 사실을 알고 보면 그것은 그들을 통해 마귀가 역사하는 것이었습니다. 악한 마귀는 생명의 복음이 확산되는 것을 싫어합니다. 복음을 듣고 구원받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래서 제사장들과 사두개인들의 마음을 격동시켜서 핍박을 가하도록 한 것입니다. 5-6절에 보면 그 이튿날 사도들을 심문하기 위해서 정식으로 산헤드린 공회가 소집되었습니다. 거기에는 관원들과 원로장로들과 서기관들과 대제사장과 그 문중들이 다 모였습니다. 그 가운데 사도들이 불려 나와서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라는 심문을 받았습니다.

 

예수님도 바로 그 공회 앞에서 신성을 모독한 자로 규정되어서 빌라도 총독에게 넘겨졌습니다. 사도들도 바로 그 공회 앞에서 심문을 받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가 복음때문에 처음으로 당한 핍박이었고 시련이었습니다. 그때 이후로 교회는 지금까지 박해 속에 성장을 거듭해 왔습니다. 여러분,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기독교 신앙때문에 핍박을 당하고 죽임을 당하는 것이 비일비재합니다. 지금 우리는 그렇게 당하지는 않지만 우리가 온전히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려면 세상을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세상을 거슬러 올라간다는 것은 부딪치는 것이 많다는 이야기입니다. 더욱더 강력한 것은 우리 속에 있는 육신의 생각입니다. 이렇게 부딪치는 것을 이기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간다는 것은 희생도 손해도 각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성도 여러분 가운데 예수님 때문에 어려움이 있다면 , 내가 믿음을 지키고 있구나하고 생각하고 영적인 어둠의 세력과 싸움으로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핍박을 당하는 사도들의 태도(7-12)

7-10, "사도들을 가운데 세우고 묻되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8]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이르되 백성의 관리들과 장로들아 [9] 만일 병자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받았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한다면 [10]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사도들이 감옥에 갇혔다가 공회 앞에 끌려 나와서 심문을 받지만 조금도 두려워하거나 무서워서 떨지 않았습니다.

 

이전에 베드로는 예수님이 붙잡혔을 때 작은 여종에게까지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며 두려워 떨며 도망쳤는데 이제는 달랐습니다. 자기가 죄수의 몸으로 끌려왔는데도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하게 외칩니다. 어쩌면 예수님처럼 이곳에서 억울하게 죽을 수도 있는데 말입니다. 베드로는 이제 혼자가 아닙니다. 성령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셨습니다.

 

성령이 충만해서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담대하게 말합니다. 그 당시 하나님처럼 권위를 앞세우고 백성들 위에 군림하던 공회원들을 향하여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그 예수를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셨고 그 예수님의 이름이 앉은뱅이를 고쳤다고 힘있게 외쳤습니다. 그리고 너희와 모든 백성들은 그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전 같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달라진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변화가 일어나야 합니다. 세상에 대해서 담대해야 합니다. 악한 원수 마귀에 대해서 담대해야 합니다. 믿음은 담대함입니다. 어떤 환경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하게 설 수 있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1:10)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께 모든 것을 다 맡긴 사람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사도바울은 로마감옥에 붙잡혀 순교할 수도 있는 상황 속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1:20)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오늘 저와 여러분도 삶의 목표가 분명해야 합니다. 여러분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은 무엇입니까?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 삶을 통해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것이 우리 힘으로 가능합니까? 아닙니다. 우리와 함께 성령님이 충만하게 역사할 때 우리도 이렇게 담대해지는 것입니다. 성령충만함을 받으면 강하고 담대해집니다. 특히 생명의 복음에 대해서 확신이 넘치게 됩니다. 그래서 어디서든지 누구에게나 복음을 전할 수 있게 됩니다.

 

이번에 필리핀 단기선교팀이 나아가서 거리에서 노방전도를 했습니다. 물론 기도하고 나갔습니다. 중학교 1,2학년 학생들, 얼마나 담대한지 제가 힘을 얻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예수님은 구주이십니다. 담대합니다.

 

오늘 우리 믿는 자들에게 성령 충만함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핍박을 두려워하지 말고 베드로처럼 담대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가 예수를 믿는 자가 된 것으로 그치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자들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령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11-12,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12]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다른 이로서는 구원이 없습니다. 예수만 구원입니다. 나는 너를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자다. 놀라운 말씀입니다. 이 말씀이 없다면 다른 이를 믿어도 구원이 있고, 다른 종교를 믿어도 구원을 받을 수 있고, 착한 일을 해서 구원을 받을 수 있고 선한 일을 해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면 이렇게 믿을 필요가 어디있겠습니까?

 

적당히 믿고 말지, 주일도 적당히 지키고. 선교사들이 왜 그 먼 이국땅에 가서 말도 잘 통하지 않고 여러 가지 어려운 상황속에서도 선교에 헌신합니까? 이 말씀때문입니다. 다른 이로서 구원이 있고, 구원의 가능성이 다른 종교에 있을 수 있다면, 선행으로 구원의 가능성이 있다면 이렇게 심각히 예수를 믿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구원은 예수 밖에 없습니다. 예수 외에 구원이 없습니다. 다른 이로서 구원을 주겠다고 약속한 일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 예수를 생명을 바쳐 전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 때문입니다. 무서운 말씀입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이 없습니다. 지성인들이 이 말씀때문에 실족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독선적이다. 왜 자기만 구원이 있다고 하느냐? 예수만 구원이라면 위선자가 아니냐? 편협하지 않느냐? 서울로 가는 길이 동서남북에 있지 않느냐? 그런데 어째서 예수를 믿어야만 구원이 있다고 말하느냐? 이것은 기독교의 사랑과 거리가 있지 않느냐?

 

인간의 이성과 상식을 존중하는 사람들에게는 기독교 밖에도 구원이 있다는 말처럼 멋있는 말이 없습니다. 기독교에도 구원이 있지만 타종교에도 구원이 있다. 그렇습니까? 석가, 공자, 소크라테스에게 구원이 있습니까? 예수 외에는 구원이 없습니다. 사실입니다. 구원은 하나입니다. 해답은 하나입니다. 태양은 하나입니다. 하나라서 불편한 것은 없습니다. 영원한 구원 절대적인 구원은 예수 뿐입니다.

 

인류역사에 구원을 줄 이름이 없다고 말씀했습니다. 나는 이 말씀을 믿습니다. 그래서 선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교사들이 생명을 걸고 주의 이름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석가, 공자, 소크라데스의 문제는 도덕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라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종교란 인간이 하나님이 되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결코 인간은 신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이 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입니다.

 

인간은 신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인간입니다. 인간의 가장 중요한 문제는 인간이 하나님이 되려고 하는데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 이들 가운데서 인본주의적인 생각, 자유주의적인 생각을 가진 이가 많아서 하나님을 자기 편리한 대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진리는 하나입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결단코 아버지께로 갈 자가 없느니라고 선포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만이 참된 구주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공회원들 앞에서 앉은뱅이가 어떻게 해서 고침을 받게 되었는지를 말하면서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이어서 예수님이 바로 그리스도이심을 힘있게 증거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성령충만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누구에게 말할 수 있는 기회만 주어지면 서슴치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였습니다.

 

그는 체포되고 공회 앞에 서서 심문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도리어 하나님께서 공회원들에게 복음을 증거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으로 여기고 담대하게 복음을 증거하였던 것입니다. 그는 핍박받는 기회를 전도할 수 있는 기회로 삼았습니다. 심문받는 장소를 복음전하는 장소로 삼았습니다.

 

베드로가 언제 또다시 그 엄청난 사람들 앞에 설 수 있겠습니까? 이때야말로 하나님께서 주신 기가 막힌 기회라고 생각하여서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였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항상 모든 장소를 전도하는 기회로 삼을 줄 알아야 합니다. 베드로가 전한 복음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곧 너희가 예수 그리스도를 무가치한 자로 여기고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으나 그분은 구원에 있어서 없어서 안되는 메시야가 되셨다는 말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구원자가 되신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그분 때문에 핍박받는 것을 두려워하거나 억울하게 생각하지 말고 베드로처럼 그분을 전하는 기회로 삼으시기를 바랍니다. 이처럼 핍박받을 때는 전도할 수 있는 최상의 기회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3. 핍박을 견딘 결과(4)

4절에서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더라"고 말씀합니다. 사도들로부터 복음을 들은 사람들 중에서 믿는 자가 심히 많아졌습니다. 남자의 수만도 약 오천 명 가량이나 되었습니다. 단시일 만에 이렇게 부흥한 것은 아마 초대교회 뿐일 것입니다. 남자의 수만 오천 명이 되었으니까 어린아이와 여자들의 수를 합치면 엄청난 사람일 것입니다.

 

오순절에 성령이 강림하였을 때 믿는 자들이 약 120명이었습니다. 그 후 12명의 사도가 예루살렘 거리에 나가서 서고 베드로사도가 힘찬 설교를 할 때 회개하고 믿은 사람이 약 삼천 명 가량되었습니다(2:41).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남자만 오천 명이 되는 엄청난 부흥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 놀라운 부흥은 사도들이 열심히 복음을 전파한 결과이기도 하지만 핍박이 가져다 준 결과였습니다.

 

원수 마귀는 핍박을 통하여 복음의 확산을 막고 교회를 파괴시키려고 하였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핍박을 통하여 복음이 더 확산되게 하셨고 교회가 결속력있게 부흥하도록 역사하셨습니다. 핍박은 교회성장의 촉진제였습니다. 핍박은 우리에게 아픔을 주고 고통을 주지만 그러나 믿음으로 핍박을 견딜 때는 더 좋은 결과를 가져다줍니다. 그것은 개인도 마찬가지요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핍박을 받을 때 두려워하고 포기하거나 타협하면 마귀가 속으로 웃으면서 "역시 믿는 자들에게는 핍박이 약이야" 하면서 쾌재를 부를 것입니다. 그러나 핍박을 받으면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주님을 사랑하는 믿음을 굽히지 않고 믿음을 지킬 때 마귀는 한길로 왔다가 일곱 길로 떠나가고 핍박하는 자들은 우리의 믿음이 참되고 진실되다는 것을 믿어 주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신앙이 정말 참되다는 사실을 인정받을 수 있는 때는 바로 핍박을 받을 때입니다. 핍박받을 때 두려워서 포기하고 타협하는 사람은 참된 신앙인이 아닙니다.

 

일제시대 때 있었던 일입니다. 모든 믿는 사람들에게 기독교 신앙을 포기하고 신사참배를 할 것을 종용하였습니다. 신앙을 고집하고 신사참배에 임하지 않는 성도들을 붙잡아다가 고문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십자가를 발로 밟고 지나가는 사람은 살려 주고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은 못박힌 송판 위를 걸어가게 한다고 했습니다. 그때 잘 견디던 성도들이 다 신앙을 포기하고 십자가를 발로 밟고 지나갔습니다.

 

그러나 주기철목사님은 끝까지 신앙을 지켰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맨발로 대못이 박힌 송판 위를 걸었습니다. 못이 발등을 뚫고 올라옵니다. 송판 위에도 바닥에도 유혈이 낭자하였습니다. 고문을 가하며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일본 순사가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침을 뱉고 발로 밟고 지나갔던 기독교 신자들을 바라보면서 "당신들이 믿는 예수는 이 분이 믿는 예수님과 다른 분입니까?"라고 하면서 그도 나중에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핍박을 받으면서도 신앙을 지킨 신앙의 선배들이 있었기에 오늘 우리에게까지 복음이 전해질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을 믿는 신앙 때문에 혹시 어려움을 겪는 성도가 있습니까? 두려워하거나 낙심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무릇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핍박이 따르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믿음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다면 인내함으로 믿음을 끝까지 지키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핍박받는 성도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올해가 저 북녘땅이 공산화된지 70년이 되는 해입니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기독교들이 신앙 때문에 공개총살을 당하고 수용소에 끌려가서 짐승처럼 핍박을 받고 있는지 말할수 없습니다. 문을 잠가놓고 옙를 드리며 토굴속에서 신앙을 지키는 성도들이 있다는 소식을 매월 보내오는 모퉁이돌 선교회 소식지인 카타콤소식이나 정세와 선교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기도가 필요합니다. 마마기도회도 바로 이런 북한을 위해서 집중적으로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의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그리고 핍박받는 이웃을 위해서 기도하는 저와 여러분 되셔서 이 복음이 땅끝까지 증거하는 일에 힘쓰고 천국복음으로 생명을 살리고 생명을 고치고 생명을 세우는 생명사역에 쓰임받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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