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명을 위해 살라(행 20:17-24)
여러분, 인간이 살아가는데 아주 중요한 원초적인 질문 3가지가 있습니다. 1)나는 누구인가? 2)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3)나는 왜 사는가? 누구나,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인생을 살면서 묻게되는 원초적 질문입니다. 인생의 의미, 가치, 목적을 묻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 땅을 살아가면서 이런 생각을 깊이 해보신 적 있습니까?
이런 근본적인 질문에 답을 찾지 않고 그저 현실에 메여서 열심히 살아가는 것만이 전부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우리를 이 땅에 태어나게 하시고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신 목적이 있습니다. 구약시대에 출애굽의 영웅인 모세를 보십시오. 그가 애굽의 왕자로 살아온 것이 그 인생의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미디안광야에서의 목동으로 사는 것이 하나님께서 그를 이 땅에 보내신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그를 부르신 하나님은 그에게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애굽에 노예로 붙잡혀 있는 이스라엘 민족을 출애굽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그의 사명이었습니다. 사명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일이요 우리가 이 땅에 존재하는 이유입니다. 그러므로 사명을 모른다는 것은 목적이 없이 바다위에 떠있는 배와 같은 것입니다. 아무리 큰 배를 탔다고 해도 그 배가 가는 목적지가 없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우리의 창조자이시고 우리의 구원자이신 하나님께서 아무 이유없이 저와 여러분을 이 땅에 보내셨다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무지의 소산인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맡겨주신 사명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사명을 찾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과제입니다. 사도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주 예수께로부터 받은 사명’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사명을 끝까지 감당할 수만 있다면 자신의 목숨조차 조금도 목숨을 아깝지 않다고 했습니다. 저는 이것이 사도바울이 사도 바울일 수 있었던 위대한 선언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는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의 주님을 만난 이후, 주께로부터 받은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생명을 걸었습니다.
이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그는 수많은 고난과 위험도 기쁘게 받았습니다. 그는 평생을 사명적 존재로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 예수께로부터 받은 사명은 비단 바울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도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이 세상에 태어날 때에 그냥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사명을 가지고 태어난 사명적 존재입니다. 이 세상에 무의미하게 태어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모든 것에는 존재의 의미가 있습니다.
이것을 깨달을 때에 살아가는 삶의 가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내게도 주 예수께로부터 받은 사명이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이 사명이 무엇입니까? 한문으로 '사명'이라는 말은 '심부름 사(使)자에 목숨 명(命)자'를 씁니다. 그러니까 목숨을 걸고 심부름을 감당하는 것을 사명이라고 합니다. 그 사명이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 24절,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사명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는 일입니다. 은혜란 "받을 만한 자격이 없는 자에게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결국 은혜의 복음이란 받을 자격이 없는 자들에게 하나님이 값없이 부어주시는 선물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인 것입니다. 이 복음을 증거해야 사람이 삽니다. 영원히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인을 살리기 위해서 반드시 이 복음이 증거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생명을 걸고 이 복음을 증거하는 일을 감당했던 것입니다. 이 은혜의 복음, 이 생명의 복음을 증거하는 일은 우리 모두의 사명인 것입니다. 이 일보다 더 긴급한 일이 어디 있습니까? 예수님은 이 일 때문에 창조주이심에도 불구하고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ㅇ취하시고 사람이 되신 것입니다. 이 일때문에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속죄제물이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 바로 은혜의 복음인 것입니다. 이 복음을 위해 친히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 그 생명의 복음을 증거하는 것이 바로 저와 여러분의 사명인 것입니다. 목사가 아니어도 장로가 아니어도 복음을 증거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명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먼저는 우리 가정을 구원해야 합니다. (행 16:31) “이르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이것이 첫 번째 사명입니다. 금식을 해서라도 기도하고 가족을 먼저 구원해야 합니다. 그리고 멀리가서 이방사람보다 내 가까이에 있는 이웃에게 이 복음을 증거해야 합니다. 이것이 생명보다 더 중요한 사명인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이렇게 말합니다. 중생이 제2의 출생이라면 사명은 제3의 출생이라고 말합니다. 칼 힐티는 말하기를 “내 인생 최고의 날은 사명을 깨닫는 날이다”라고 했습니다. 사명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인생의 의미, 가치, 목적이 다 사명안에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우리가 길을 갈 때 힘들고 지치는 것은 길이 멀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이 길을 왜 가는지(어디까지 가야하는지)”를 모를 때 몇 십배 더 힘들고 쉽게 지치는 것처럼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사명을 알고 사는 것은 너무나 중요한 것입니다.
더군다나,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는(소명) 반드시 사명이 있습니다. 그냥 우연히 심심해서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내가 감당해야 할 사명(미션)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사명을 깊이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사명은 사도바울은 24절에서 3가지를 증거했습니다.
1. 사명은 일평생 달려갈 길입니다.
24절,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사명은 잠시 잠깐 달리고 마는 단거리선수의 삶이 아닙니다. 일평생 달려가야 할 장거리의 인생인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사명에서 자신의 인생길을 찾았고, 사명을 일평생 달려갈 길로 삼았습니다.
그래서 말씀하기를 (빌 3:13,14)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여기서 말하는 ‘푯대, 부름의 상’ 이것이 그가 일평생 달려가야할 목표였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일평생 돈을 벌기 위해 살고 일평생 권세를 얻기 위해 살고, 쾌락을 좇아 사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세상에서 무엇하든지 그것을 통해서 이루어야 할 하나님의 목표가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어떤 직분을 맡고 있든지 그 직분자체가 목적이 되면 안되는 것처럼, 내가 세상에서 어떤 직업을 가졌든지 그 직업에서 대성하고 인정받고 성공하는 것 자체가 목적이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수단에 불과하고 그것은 통로에 불과한 것입니다. 일평생 가져야 할 목표는 그런 세상의 성공이 아니라 그것을 통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사명인 것입니다. 어떤 분이 사업을 하고 있습니다. 그 사업의 목표가 돈을 많이 버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고 나서 보니 그것은 인생의 목표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돈을 많이 버는 것이 목표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 사업을 주신 하나님의 목표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그 사업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일평생을 달려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사명인 것입니다.
2. 사명은 하나님께 받은 것입니다.
24절,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누구에게 받았습니까? 사명은 세상 유행을 따라서 내가 선택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예수님께 받는 사명입니다. 예를 들면 사도바울이 언제 사명을 받았습니까? 멀리 다메섹까지 성도들을 붙잡으려고 가다가 도중에 주님을 만났습니다.
하늘로부터 큰 빛이 그를 둘러 비추었고,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그 앞에 엎드리어 ‘주여 누구시니이까’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주님 무엇을 하리이까’, ‘너는 나의 이름을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이것이 사도바울이 주님께 받은 사명입니다. 이전까지는 예수님을 핍박하던 사람이 이제는 예수님을 전하는 전도자로 세움받게 된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믿음의 사람들은 다 이렇게 하나님께 부름받고 사명을 받는 사람들입니다. 특별히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은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사명을 주시는 말씀입니다.
미디안에서 처갓집에서 양치기하고 있던 모세를 찾아가셔서 하나님께서 부르십니다. “모세야 모세야”,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에게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하리라”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십니다. 그리고 그에게 사명을 주십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부르심 다음에는 반드시 부르심의 목적이 있습니다. 그것이 사명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여러분의 사명은 무엇입니까? 일생을 살아가면서 무엇을 하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까? 이 다음에 우리가 하나님앞에 서는 날 그 사명의 결과를 물으실 것입니다. 네가 너에게 한 달란트를 맡겼는데 너는 그것으로 어떻게 살았느냐? 물론 두달란트, 다섯달란트맡은 종에게도 똑같이 물었습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나에게 맡겨주신 사명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 사명을 위해 어떻게 감당하고 있습니까?
3. 사명은 생명을 걸고 감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24절,“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사도바울은 그 사명에 생명을 걸었습니다. 사도바울을 보세요. 그가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복음을 전할 때, 어떤 일들이 있었습니까? 쫓겨나기도 하고, 매도 맞고, 옥에도 갇히고, 재판도 받고, 돌에 맞아 죽을 뻔도 하고, 온갖 시련, 역경, 환난을 당했습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울이 10년동안의 전도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가려고 할 때, 제자들이 만류합니다. 결박과 환난이 기다린다는 것입니다. 22,23절에 보면 여러 번 만류합니다. 그런데도 바울이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행 21:13) “바울이 대답하되 여러분이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
그는 일사각오의 신앙으로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습니다.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이 사명을 감당하는 길이였기 때문입니다. 우리 예수님도 십자가를 바라보시면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왜냐하면, 그 길만이 사명을 감당하는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선교사열전 중에 제가 감동받은 이야기입니다. ‘창끝’이라는 영화로 알려진 미국의 엘리엇 선교사 이야기입니다. 엘리엇은 기독교명문인 휘튼대학을 수석 졸업한 수제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주님이 주신 사명이 있었습니다. 남미의 아마존 유역에 선교사로 자원했습니다. 1956.1.8 다른 4명의 동료들과 함께 당시 가장 악명 높고 접근하기 어려운, 에콰도르의 아우카 부족에게 복음을 전하려다가, 그만 그들의 창에 찔려 순교했습니다. 아우카 부족은 수백 년 동안 외부인들을 거부하고 죽였는데 그 사실을 알고도 엘리엇과 친구들은 그곳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그때 엘리엇의 나이는 불과 28살, 모두 살해되어 강에 버려진 채 발견되었습니다. 당시 미국은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사람들은 “헛되고 헛된 일이었다”라고 비웃었습니다. 촉망받던 20대의 젊은이들이 복음을 전해보지도 못한 채 죽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엘리엇의 아내는 말하기를, ‘엘리엇의 죽음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니다. 그는 목숨 걸고, 생명받쳐 사명을 감당했기 때문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엘리엇과 동료들이 살해당한 지 수십 년이 지난 후 그들이 죽은 마을에서 수백 개의 교회가 생겨났다는 사실입니다. 장로와 교사로 교회를 섬기는 그들이 바로 엘리엇과 그의 친구들을 죽였던 원주민들이었습니다. 더욱이 놀라운 것은 엘리엇의 아내 엘리자베스가 남편이 죽은 후 간호사 훈련을 받고, 1년 뒤에 아우카 부족의 마을로 들어갔다는 사실입니다.
아우카 부족은 이방남자는 죽여도 여자는 죽이지 않는 풍습을 갖고 있었고, 그녀는 5년 동안이나 부족과 생활하며 그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5년 뒤 떠나려는 그녀에게 파티를 열어주며 추장이 물었습니다. “당신은 도대체 누구입니까?” 그러자 엘리엇의 아내가 “저는 당신들이 5년 전에 죽였던, 그 남자의 아내입니다. 남편이 가지고 있었던 당신들을 향한 사랑 때문에, 나는 이곳을 찾아온 것입니다” 그 남편에 그 아내였습니다.
엘리엇은 일기에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이 쓸모없는 나무 개비에 불을 붙여주소서. 그리고 주를 위해 타게 하소서, 내 삶을 소멸하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는 주의 것이니이다.” 엘리엇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어떻게 살았는지를 잘 알려주는 기도입니다. 엘리엇에게는 한평생 달려갈 길, 사명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주님께 받은 사명입니다. 그는 목숨 걸고, 생명 받쳐 사명을 감당했던 것입니다.
본문 19절을 보면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로 말미암아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라고 했습니다. 바울을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모든 겸손과 눈물로 섬겼습니다. 사도바울은 잃어버린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예수님의 심정으로 눈을 흘리며 안타까워하고 하나님앞에 눈물로 기도했습니다. 자기자신을 철저히 낮추어서 종된 삶을 살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모든 겸손이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감담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성품은 겸손입니다.
어떠한 상황속에서도 자기를 복종시키고 하나님 뜻앞에 순복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했습니다. 그러므로 결코 낙심하거나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이 모든 역사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철저히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사명자에게는 겸손과 눈물이 있습니다. 자기아픔 때문에 서러워서 우는 눈물이 아닙니다. 영혼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마음을 품었기 때문에 눈물을 흘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여러분의 눈물을 어떤 눈물입니까? 정말 이 민족과 나라를 위해서, 그리고 저 북녘 땅에 고통받는 성도들을 위해 눈물 흘리며 기도해 보셨습니까? 아니 여러분의 믿지않는 가족구원을 위해서 그렇게 눈물로 기도해보셨습니까? 우리 주님은 우셨습니다. 나사로의 죽음앞에서 우셨습니다. 멸망할 죄악 도성 예루살렘을 바라보시면서 한없이 우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는 눈앞에 두고 통곡하시면 우셨다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십자가의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려면 눈물이 필요합니다. 눈물로 씨를 뿌리면 기쁨으로 단을 거두는 축복을 맛보실 것입니다. 눈물로 영혼을 사랑하라는 말입니다. 저 영혼이 얼마나 불쌍한지를 알면 울면서 기도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어머니가 자식들을 앞에 두고 아무리 설득을 해도 듣지 않으면 웁니다. 너무 안타까워서 우는 것처럼 바울이 눈물로 호소했다는 것입니다. 어거스틴의 어머니, 모니카의 눈물기도는 탕자 어거스틴을 성자로 만들었습니다. 자기 몸으로 낳은 아들이 방탕한 삶을 살며 희망이 보이지 않을 때 그 자식을 품고 눈물로 기도할 수밖에 없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여인들에게 ‘나를 위해 울지 말고 자녀를 위해서 울라’고 하신 말씀을 생각해 봅니다.
자식의 영혼을 위해서 어머니의 눈물의 기도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모는 사명으로 아이들을 양육해야 된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자식들이 내 마음대로 내 욕심대로 안되는 것은 자식을 키워 본 사람이면 다 압니다. 자식을 위해 해 줄 수 있는 것은 사랑과 기도라는 사실입니다. 교회는 이런 모니카의 눈물이 있어야 합니다. 사명으로 흘리는 눈물 말입니다.
성도를 품고 한 영혼을 품고 가난하고 소외된 자를 품고 병든 자를 품고 사명으로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는 심령들이 많으시길 소망합니다.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행 20:31) “그러므로 여러분이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그는 복음을 전하며 울었습니다. (빌 3:18)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십자가의 사랑과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워 울었습니다.
뿐 만 아닙니다. 사명자는 열심이 있습니다. 바울의 선교현장에는 언제나 유대인의 간교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언제나 핍박과 감옥과 죽음이 기다리고 있었지만 바울의 열심을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뜨거운 심장 뜨거운 마음 뜨거운 감동을 가지고 로마제국의 중심부인 로마에서 복음을 전하기를 원했습니다. 결국 사도바울이 순교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로마제국이 기독교를 국교로 받아들였습니다. 사명자는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기도도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찬송도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무엇을 하든지 열정을 가지고 할 때 성령이 역사하십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요즘 살펴보고 있는 요셉을 보십시오. 열정의 사람입니다. 어디에 있든지 그는 성실하게 충성된 삶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믿지않는 이방인들이 그를 보면서 하나님이 함께 하심은 보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레서 그를 신뢰하고 모든 사무를 다 맡겼습니다. 그가 우연히 보디발의 집의 가정총무가 된 것이 아닙니다. 그가 우연히 감옥에서 왕의 신하들을 섬겼던 것이 아닙니다. 그의 삶이 신뢰를 주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속에 이처럼 사명에 대한 열정을 회복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이 내게 맡겨주신 사명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고 열정을 쏟음으로 100배 60배 30배의 결실을 맺는 사명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루살렘을 향하여 떠나는 사도바울은 말합니다. 본문 22-23절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23]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그렇습니다. 그러나 이런 어려움이 있어도 순교의 십자가가 기다린다하여도 하나님이 내게 맡겨주신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겠다는 결심입니다.
24절,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누구에게나 사명은 있습니다. 다만 사명을 깨달은 자와 깨닫지 못한 자가 있을 뿐입니다. 사명을 알고 사는 사람과 모른 채 사는 사람, 사명은 내가 짊어져야 할 ‘십자가’요, 내가 품어야할 ‘꿈, 비전’입니다. 이 사명을 점검하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나에게 주신 사명을 나는 지금까지 어떻게 감당해 왔습니까? 그 사명을 위해서 나는 무엇을 드렸습니까?
가까이는 내 사랑하는 가족, 그리고 이웃들, 국내외 믿지않는 이웃들을 여러분은 어떻게 헌신했습니까? 어떤 분은 온 힘을 다해서 선교비를 후원하는 분이 있습니다. 어느 분은 열심히 지역전도를 위해서 헌신하고 있습니다. 이런 모든 사역을 통해서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귀한 사명을 가당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