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야길을 걷게 하신 이유(신 8:1-10)
일상이 은혜임을 깊이 깨닫을 수 있는 한 주간이었습니다. 갑자기 다가온 코로나바이러스앞에 무력해진 현대의학과 과학이 우리 모두를 두렵게 합니다. 모두가 마스크 속에 파묻힌 것같은 세상을 보면서 우리가 이렇게 바뀔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답답한 시간들을 보내면서 예레미야처럼 하나님을 바라보게 됩니다. “나는 여호와 하나님을 바라리라”는 지난 주의 말씀이 제 마음을 사로 잡았습니다. 오늘 말씀은 광야길을 걷게 하신 이유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한 후 홍해를 건너 광야로 나왔습니다. 하나님은 지중해 해변도로를 따라간다면 열하루면 도착할 수 있는 길인데 그쪽으로 인도하지 않으시고 광야 길로 인도하셔서 40년을 그 광야에서 살게 하십니다. 왜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곧장 가나안땅으로 인도하지 않으시고 광야길로 인도하셨습니까? 물론 역사를 살펴보면 인간의 불신앙이 그 근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하고 여전히 자아중심으로 가득찬 이스라엘 백성들이 믿음으로 살지 못합니다. 그 증거가 불평과 원망입니다.
조금만 어려우면 불평과 원망입니다. 불신앙의 표현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을 돌아보지 않습니다. 지난 주에 예레미야를 통해 주신 말씀처럼 어렵고 힘들 때 “우리가 스스로 우리의 행위를 조사하고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우리의 마음과 손을 아울러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들자”(애3:40,41) 얼마나 좋겠습니까? 왜냐하면 우리에게 다가온 모든 사건은 우연이 없습니다. 모든 사건이 하나님의 주권아래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기서 하나님이 나에게 주시는 메시지를 들을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오로지 환경만 바라보고 원망하고 불평만 했습니다. 또 노예로 살았던 애굽에 돌아가자고 외칩니다. 결국 하나님은 광야생활을 통해 훈련을 받고 연단되어지고 깨닫고 변화시켜 거룩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 가시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사는 세상을 광야에 비유하곤 합니다. 인생은 광야같은 세상을 살아가는 존재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경에는 '광야'라는 말이 자주 나옵니다.
'광야'는 어떤 곳입니까? 광야는 황량한 사막입니다. 그곳은 푸른 나무나 물이 보이지 않습니다. 쉴 곳이 없습니다. 그러니 사람을 찾을 수 없는 곳입니다. 황폐한 곳입니다. 고독하고 외로운 곳입니다. 그런 삭막한 곳에서 어떻게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인생은 그런 곳을 지나가는 나그네와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이 광야에서 승리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광야에서 낙오자가 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광야는 우리를 죽이는 곳이 아닙니다.
가나안 땅으로 가는 길에는 반드시 광야 학교에서 훈련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때로는 원하지 않던 질병이라는 광야, 때로는 상상하지 못한 사고라는 광야, 때로는 끝없이 번창될 것같았던 사업이 어느날 갑자기 부도를 당하는 파산이라는 광야, 실패라는 광야, 이별이라는 광야, 슬픔이라는 광야, 사랑하는 사람과 사별이라는 광야를 건너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왜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왜 내가 이런 고난을 당하여야 만 합니까?
내가 무엇을 잘못하여 이런 고통을 겪어야만 합니까? 라는 질문입니다. 오늘 성경에 나오는 이스라엘 백성들도 마찬가지입니다. 40년 동안 광야길을 걸어갑니다. 때로는 적들의 공격을 받습니다. 물이 없습니다. 편안히 잘 곳이 없습니다. 먹을 것이 없습니다. 왜 이 길을 40년 동안 걸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이유를 명쾌하게 3가지로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1. 낮추시기 위해서입니다(2).
2절,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너를 낮추시며” 다른 말로 하면 겸손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인간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자기가 누구인가를 알게하기 위해서입니다. 자신이 하나님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또 모든 것이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이 잘되면 사람은 끝없이 교만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 교만이야말로 인간 죄악의 뿌리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어떻게 해 볼 방법이 없습니다.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필요성을 느끼지도 못하고 하나님을 찾지도 않습니다. 자기 자신에 몰입되게 되어 있습니다. 자신의 쾌 괜찮은 사람으로 생각합니다. 잘 났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은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어려움을 당하면 그때 자신의 한계를 느끼게 됩니다.
"아, 내 힘으로 다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구나. 아, 내 힘으로 안되는 것도 있구나. 나는 하나님이 없이는 못살겠구나" 이것이 인간입니다. 광야의 과정을 통과하지 않으면 인간이 인간답게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어느 목사님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목사님이 알고 있는 유명한 의사 선생이 계셨는데 그분에게 꾸준히 전도를 하였다고 합니다. 그 때 그분은 차갑게 거절하며 자신은 살만하니 연약한 사람이나 병든 사람에게 전도해서 위로를 주라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도하기를 포기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수년이 흐른 후 그분에게서 만나고 싶다는 연락이 왔다고 합니다. 그분은 그 목사님을 만나 고개를 숙이고 도움을 요청하더라는 것입니다. 암에 걸렸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고칠 수 있는 분은 하나님뿐이라며 애원을 하더라는 것입니다. 사람이란 등 따뜻하고 배부르고 모든 것이 편안할 때는 자기의 힘을 믿고 교만하지만 심한 환난이 다가오면 그 교만이 박살나고 '자기'라는 우상이 산산조각 깨져버리며, 하나님 앞에 무릎을 끓게 되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인간은 하나님의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존재입니다. 이것은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동물이 병들었다고 하여 "아 나는 연약한 존재구나" 라고 깨닫고 겸손해 집니까?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라고 말합니까? 그러나 인간은 어른이든 아이든 고난을 통하여 자신과 이웃과 하나님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고난을 통하여 우리는 나의 실체를 알게 되어 있습니다. 고난의 강을 건너고 광야를 길을 통과한 사람은 사도 바울처럼 죄인중의 괴수라는 고백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가장 가까이에 있는 가족의 죽음을 보면서 인간의 허무를 느끼게 되고 인생이란 별거 아니구나 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사업의 실패를 통해 나의 욕심대로 모든 것을 채울 줄 알았는데 세상은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구나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3절은 어떻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까? 낮추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3절을 보십시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모든 것이 잘 되고 먹을 것이 풍부하고 건강해 지면 어떻게 됩니까? 풍부한 만큼 사람은 교만하게 되어 있습니다. 12-14절 “네가 먹어서 배부르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주하게 되며 [13] 또 네 소와 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14]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염려하노라 여호와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이끌어 내시고” 교만은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내가 잘나서 잘된 줄 아는 것이고, 겸손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인줄 알고, 하나님을 잊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감사할 줄 아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 잊어버린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고난을 통하여 우리가 자신을 알고 더 낮추셔서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고 믿음으로 살게 하시려고 주신 것입니다.
2. 순종을 훈련하기 위해서입니다(2절).
2절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즉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는 않는지 알아보기 위해서입니다. 부모들은 왜 학교 가기 싫어하는 아이들을 학교에 보냅니까? 그것은 이 아이가 나중에 커서 홀로 세상을 살아갈 수 있도록 힘들지만 교육을 시키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때로는 우리를 광야라는 학교에 집어넣고 우리가 고통스럽고 힘들어 한다는 것을 다 아시면서도 훈련시키십니다. 광야 학교를 통하여 세상적인 생각, 인생관, 습관, 철학, 문화를 깨끗이 청소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한마디로 말하여 믿음과 순종의 훈련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도록 하는 훈련입니다. 순종보다 더 완벽한 신앙은 없습니다. 순종은 신앙의 절정입니다. 광야학교를 지나며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알게 됩니다.
지금까지는 내가 전부인 줄 알았는데 내가 주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하나님께 나의 주권을 내어 드립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순종하는 것이 나에게 가장 좋은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이 신앙에 있어서 결정적 변화의 사건입니다. 아직도 여전히 내가 주인인 줄로 알고 내 힘으로 살아가려고 하는 성도여러분, 이제 거기서 내려 오십시오, 나를 낮추시고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이 바로 순종입니다.
순종할 때 비로소 거기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기 시작하며 하나님의 나라가 어떤 나라인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25년동안 순종의 훈련을 받았습니다. 야곱은 30여 년을 광야에서 살았습니다. 모세는 미디안 광야에서 40년, 시내광야에서 40년을 훈련받았습니다. 다윗은 10년동안 광야에서 유리하며 혹독한 훈련을 받았습니다. 특히 신약의 바울은 3년 반 동안이나 아라비아 사막에서 외로운 광야 훈련을 받았습니다. 먹을 것이 없습니다. 입을 것이 없습니다.
홍해가 앞에 있습니다. 아말렉이 있습니다. 거할 집이 없습니다. 밤은 춥습니다. 낮은 더웁습니다. 어떻게 합니까?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전폭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면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보십시오. 군사력이 있습니까? 탁월한 전략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크신 팔로 통과케 하신 것입니다(출 15:16).
그들의 진로를 가로막는 여러 나라를 거뜬히 통과케 하셨습니다(신 29:16). 바다를 육지처럼 통과하게 하셨고(느 9:11), 강을 도보로 통과하게 하셨으며(시 66:6), 그 어떤 악천후 속에서도 사막을 대로처럼 통과케 하여주셨습니다(시 136:14,16). 본문 3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먹여주셨습니다. 신명기 2장 7절을 보면, 하늘에서는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려 부족함이 없이 먹여주셨고(출 16:8), 땅에서는 바위를 터뜨려 물을 마시우셨습니다.
본문 4절을 보면, 광야 40년 동안 항상 새 옷과 새 신발까지도 공급해주셨습니다. 모자라지도 않았고, 떨어지지도 않았습니다. 아니 고난을 통해서 순종이 바로 가장 행복하고 성공적으로 사는 길이라는 사실을 가르쳐 주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행복하게 사는 비법이 무엇입니까? 성공하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1절을 보십시오. “내가 오늘 명하는 모든 명령을 너희는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고 번성하고 여호와께서 너희의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차지하리라” 말씀에 순종하면 어떻게 된다는 말입니까?
4절, 이 사십 년 동안에 네 의복이 해어지지 아니하였고 네 발이 부르트지 아니하였느니라.
7-10절,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아름다운 땅에 이르게 하시나니 그 곳은 골짜기든지 산지든지 시내와 분천과 샘이 흐르고 [8] 밀과 보리의 소산지요 포도와 무화과와 석류와 감람나무와 꿀의 소산지라 [9] 네가 먹을 것에 모자람이 없고 네게 아무 부족함이 없는 땅이며 그 땅의 돌은 철이요 산에서는 동을 캘 것이라 [10] 네가 먹어서 배부르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옥토를 네게 주셨음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하리라”
이렇게 되는 비법이 무엇입니까? 6절을 보십시오.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의 길을 따라가며 그를 경외할지니라” 우리가 참으로 행복하고 성공하고 잘되는 길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데 있습니다. 말씀에 순종해 보십시오. 가정이 행복해집니다. 말씀의 원리를 적용해 보십시오. 사업이 번창합니다. 행동하기 전에 말하기 전에 말씀에 철저히 귀를 기울여 보십시오. 인간관계가 회복됩니다. 마음에 기쁨에 넘치게 됩니다.
그 무수한 고난의 강을 건넜던 다윗은 (시119:67,71) “[67]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71]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말씀을 듣는 것과 순종하는 것은 별개의 것입니다. 말씀을 듣는다고 다 순종하는 것은 아닙니다. 아담 이후 사람은 참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기를 선천적으로 싫어합니다. 성경의 요나를 보십시오. 니느웨로 가라고 합니다. 그러나 가길 싫습니다.
결국 폭풍을 만나고 바닷물에 빠지고 죽음의 고통을 맛본 후에야 어쩔 수 없이 순종을 합니다. 순종의 훈련에서 우리는 합격해야 합니다. 억지 부릴 필요없습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말씀에 순종하면 광야길은 순조롭게 건너갈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다소 무거운 짐을 주신 것 같으나, 그 짐을 감당할 수 있는 어깨도 주셨던 것입니다. 시련을 허락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면, 통과케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3. 마침내 복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16절).
(신 8:16)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 광야 길을 걷게 하시는 이유는 결국 복을 받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잘 알지 못합니다. 광야길을 통과하게 하는 것은 그들을 죽이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에게 괴로움을 주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근본적으로 복을 주기 위한 것입니다.
부모들이 이빨 빼는 고통을 감수하고 아이들의 이빨을 빼주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아름다운 이를 가지고 행복하게 살게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의사가 병든 사람들을 그 커다란 고통을 받는데도 불구하고 수술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잠시 고통이 있더라도 질병에서 고침받아 행복하게 살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죽기 때문에 수술하는 것입니다. 사실 광야 자체가 축복의 장소입니다.
홍해를 가르는 기적, 물이 없을 때 쓴물을 단물로 바꾼 기적, 200만에 가까운 사람이 40년 동안 광야에서 먹고 사는 기적, 아말렉 군대와의 싸움에서 기도로 승리하게 한 기적, 구름기둥과 불기둥의 기적 광야가 아니면 어떻게 볼 수 있고 체험할 수 있었겠습니까? 광야라는 곳에서 하나님은 보물을 숨겨 놓고 맛보도록 했습니다. 광야는 우리에게 고통스럽고 이해하기 어려울지라도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입니다. 하나님을 체험하는 장소입니다.
광야 40년이 없는 모세, 25년의 고뇌의 세월이 없는 아브라함, 감옥 생활이 없는 요셉을 상상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이 없었다면 그들은 진정 하나님의 사람으로 쓰임받기에는 부족했을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깨달은 베드로 사도는 고난을 받으면 복이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며 근심하지 말고”(벧전 3:14). 하나님은 광야로 보내지만 그 광야에서 이길 힘을 주십니다.
(신 8:18)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력을 주셨음이라 이같이 하심은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오늘과 같이 이루려 하심이니라” 문제는 우리가 그 능력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입니다. 고난이 복된 것을 아는 사람들의 인생 고백을 들어 보십시오. 바울은 고난에 대하여 어떤 태도를 지니고 있습니까? 지긋지긋하다고 말하고 있습니까? 아닙니다.
로마서 5:2-4절에서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3]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4]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심지어는 그 고난에 능동적으로 참여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골 1:24)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그리고 자신 뿐만 아니라 아들처럼 사랑하는 디모데에게 고난을 받으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고난도 받으면 나로 족하지 아들에게까지 고난을 받기를 원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나는 고난을 받았지만 너희들만큼은 편안히 살아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 부모의 마음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바울은 달랐습니다. 바울 뿐만 아니라 진정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는 신앙인들의 삶은 달랐습니다.
고난을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사람들은 누구나 고난을 싫어합니다. 어려운 일은 3D 업종이라고 해서 피합니다. 좀더 쉬운 일을 택하고 좀더 편한 길을 걷고 싶어합니다. 그러면서 많은 영광과 혜택은 받고 싶어합니다. 세상적인 물결에 따라 신앙인들도 이제 십자가를 지기 싫어합니다. 고난의 십자가를 피하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고난의 십자가를 부끄럽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피하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토마스 아켐피스는 그의 명저 “그리스도를 본받아”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십자가에서 도망칠 수는 없다. 십자가를 피한다면 이미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가 아니다. 그대가 밖으로 도망쳐도 거기 십자가가 있고, 안으로 숨어도 거기 십자가를 볼 것이다. 위로 올라가도 십자가가 기다리고, 밑으로 파고 들어도 십자가가 있을 것이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르고자 하는 자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베드로를 보십시오. 십자가를 지고 고난을 받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했습니다.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으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벧전 4:16)
다니엘을 보십시오. 만약 자신이 기도하면 죽음을 당할 것을 뻔히 알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도합니다. 포로로 잡혀와서 어떻게 이루어 놓은 자리입니까? 하루 아침에 모든 것을 다 빼앗길 수 있습니다. 재산이 문제가 아니라 목숨을 내어 놓아야 합니다. 그런데도 그는 어떻게 합니까?
(단 6:10) “다니엘이 이 조서에 왕의 도장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윗방에 올라가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고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의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 고난의 끝은 복입니다. 고난의 과정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인내하면 참고 견디면 마침내 가나안의 축복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고난은 손해가 아니라 거룩한 투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오늘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는 광야 가운데 있는 저와 여러분이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시고 먼저 고난을 받으신 우리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예수님이 앞서 가셨습니다. 우리는 믿음의 주요 우리를 온전케하신 분이신 예수를 바라보고 그분을 따라가면 십자가 다음에 부활의 영광이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약속이 있고 하나님의 나라가 온전히 체험되어질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광야 길을 걷게 한 이유가 있습니다. 1)낮추시기 위해서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겸손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2)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순종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순종하면 하나님의 나라가 임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집니다. 3)마지막으로 마침내 복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다시말하면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다가온 광야, 어렵지만 꼭 통과해야할 영적인 훈련장인 것입니다. 광야가 끝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기 위해 통과해야할 십자가인 것입니다. 아무쪼록 우리모두가 인내함으로 이 광야의 훈련을 통과해서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시는 승리자가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