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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문의 메시지

나의 보혜사 성령님(요14:16-18,26)

작성자야베스|작성시간20.05.31|조회수451 목록 댓글 0

나의 보혜사 성령님(14:16-18,26)

 

오늘은 성령강림주일입니다. 부활절 후 50일째되는 주일이 오순절인데 바로 이날이 성령강림주일입니다. 십자가 사건을 앞두고 제자들은 대단히 불안해하고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자기들을 돌봐주시던 예수님이 떠나신다면 자기들은 어떻게 될 것인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면 대단한 역사가 일어날 것을 예상했는데 그게 아니라 대제사장과 종교지도자들에게 붙잡혀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다고 말씀하시니 제자들은 공포심에 사로잡혀 전전긍긍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목요일에 마가의 다락방에서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하시면서 가르쳐주신 말씀 중에 한 부분입니다. 요한복음 14장부터 16장까지의 말씀을 다락방 강화라고 지칭하는데 그중에 강조하신 말씀이 바로 성령님에 관한 말씀입니다. 네 번이나 반복해서 강조하셨습니다. 이렇게 네 번이나 반복해서 강조하신 이유는 너무 중요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성령님이 누구십니까? 구약시대에는 성부 하나님께서 직접 사역을 행하셨고, 신약시대에는 성자 예수님이 사역을 행하셨다면,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에 교회시대가 오는데 그때가 바로 성령시대입니다. 성령님이 오셔서 예수님의 구원역사를 이루시는 시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시대는 성령시대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모르고서는 신앙생활이 불가능하다고 말할 수있습니다. 설사 성령을 안다할지라도 성령체험을 하지 못하면 신앙과 생활은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제가 늘 말씀드린 것처럼 성령은 진리의 영이기 때문에 우리로 하여금 진리를 깨닫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성경의 저자가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의 도우심이 아니면 말씀을 깨달을 수 없는 것입니다. 말씀의 원뜻을 깨닫지 못하면 올바른 신앙생활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자리에 계신 성도들은 성령님이 과연 어떠하신 분이가를 분명히 배우고 체험하심으로 성령님의 도우심과 능력을 체험하는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성령님은 어떠한 분이십니까?

 

1. 성령님은 또 다른 보혜사이십니다.

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라 했습니다. '보혜사'란 무슨 뜻입니까? 헬라어로 '보혜사''옆에서 돕기 위해서 함께 하시는 이'란 뜻입니다. 보혜사(保惠師)'를 한문으로 풀이하면 '보호하고 은혜를 주고 가르치는 자"란 말입니다. 영어로 표현하면 '헬퍼(helper)'로 그 뜻은 '돕는 자', 요즘식으로 표현하면 '도우미'란 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성도들을 돕기 위해 성령님을 우리 곁에 보내 주셨다는 사실은 얼마나 놀라운 말씀입니까? 이 진리만 바로 깨달으면 우리는 세상에서 승리하며 살 수 있습니다. 성령님은 하나님과 더불어 천지를 창조하셨을 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잉태케 하셨고, 그를 죽음에서 일으키신 하나님의 영이십니다. 다시말하면 전지전능하신 삼위일체 하나님중의 삼위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와 함게 계시는 하나님, 성부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을 예정하시고 성자 예수님은 그 구원을 완성하셨습니다. 그러면 성령 하나님은 구원과 어떤 관계를 갖고 계십니까?

 

그 구원을 개인개인에게 적용시키시는 성취시키시는 보헤사 성령님이십니다. 바로 이러한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것을 돕기위해서 우리 곁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을 보십시오. 환란과 핍박이 가득한 환경이었습니다. 복음을 전한다고 붙잡혀 옥에 갇히고 산헤드린공의회에 끌려가서 재판을 받았습니다. 이전에 베드로는 예수님이 산헤드린공회에서 재판받을 때 어떻게 했습니까? 멀찌기 따라갔습니다. 구경꾼 사이에 숨어있다가 발각되는 순간에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두려워떨었습니다. 모두다 은밀한 곳에 들어가 숨어 목숨을 부지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성령충만을 체험하자 저들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예루살렘거리에 12명의 사도가 나아가 당당히 서 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가 대표해서 저들에게 설교를 합니다. 너희가 죽인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였다다고 증거하였습니다. 너희가 십자가에 매달아 죽인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셨다고 증거합니다.

 

그리고 협박하는 산헤드린 공회에 끌려가서 재판석상에서 저들이 협박합니다. 다시는 예수의 이름을 말하지말고 가르치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그때 베드로의 발언은 무엇입니까?

(4:19,20) “[19]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20]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한치의 양보나 두려움이 없습니다. 당당하게 증거합니다.

 

죽음이 두렵지 않습니다. 사도바울이 고백했던 것과 같습니다. (20:24)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왜 이렇게 당당해졌습니까? 보혜사 성령님이 곁에 계십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예수님께서 성령님을 '또 다른 보혜사'라고 소개하셨습니다. '또 다른'이라는 말은 성령님 외에 다른 보혜사가 또 있다는 말인데 그가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이제 하나님 나라에 가시면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한 손에 쥐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실 것입니다. 거기에 앉으셔서 주님은 보혜사의 일을 하실 것입니다.

 

요일 2:1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세상에 살면서 연약하여 죄를 범할 때가 많습니다. 이래서는 안된다는 것을 하면서도 육신이 약해서 또 죄를 짓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예수님의 보혈을 의지하고 회개합니다.

 

이럴 때마다 하나님의 우편에 계시는 예수님은 자기 손의 못자국을 하나님 앞에 내어놓으면서 우리의 대언자가 되십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대언자'라는 말과 '보혜사'라는 말이 원어로는 '파라 클레토스'라는 동일한 단어로 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우편에 계시면서 범죄하는 우리를 돕는 분이십니다.

 

8:34에도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우편에 계시는 보혜사이신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우리에게 또 다른 보혜사이신 성령님을 보내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하늘에서 우리를 돕는 보혜사시라면, 성령은 땅에 오셔서 우리를 돕는 보혜사십니다.

 

8:26에 보면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고 했습니다. 성령이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위해 하시는 가장 중요한 일은 바로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하늘과 땅에 각각 우리를 돕는 보혜사를 가진 사람들이니 얼마나 행복한 사람들입니까? 그렇습니다. 지금 성령님은 우리 옆에 계시면서 우리를 돕고 계십니다.

 

우리는 그분이 도와주시는 모든 은혜를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다 받아 누리는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이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무슨 어려운 일만 만나면 고아나 된 것처럼 근심하고 두려워한다는 것은 바로 성령님을 슬프게 하고 말할 수 없이 탄식하게 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여러분의 자녀가 무슨 사고로 다쳤다고 합시다.

 

그래서 무엇인가 도와주려고 해도 믿지 못하고 근심하고 두려워하면서 마치 고아인 것처럼 탄식하고 있다면 부모는 너무나 슬프겠습니까? 탄식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곁에 오셔서 우리를 도우시는 보혜사 성령님이 함께 계신 것을 믿고 기도로 도움을 요청하시기 바랍니다. 성령님은 우리를 연약함을 도와주십니다.

 

(8: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그렇습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기 때문에 우리가 마땅히 구할바를 모를 때 성령께서 친히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십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로 하여금 깨닫게 하십니다. 오늘 이 환경속에서 이루지고 있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됩니다. 이렇게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것이 지혜입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여러분, 야고보서에 보면 환란과 시험이 다가왔을 때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지혜가 없으면 한발자국도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없는 것입니다. (1:5)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오늘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지혜입니다. 지혜는 그저 아는 것이 아니라 아는 것을 행하는 힘이 있습니다.

 

이처럼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하기 위해서는 우리도 기도해야 합니다. 역경을 당하고 어려움을 겪을 때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은 지혜를 구하고 그 뜻대로 행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때 거기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성령의 도우심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그 뜻대로 순종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우리만의 힘으로 승리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어떠한 어려움을 만난다 할지라도 성령님이 도와 주신다면 승리할 줄 믿으시고 무슨 일이든지 성령님께 기도하고 도움을 요청하시는 여러분들이 다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 성령님은 우리 속에 영원토록 내주하시는 분이십니다.

성령님은 우리 옆에 계실 뿐 아니라, 우리 안에 계셔서 우리를 도우시는 분이십니다. 16절을 다시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라 했습니다. 영원토록 우리와 함께 계실 것이라는 약속이십니다.

 

17절을 보십시오.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고 했습니다. 성령님이 이 세상에 오셨지만 세상 사람들은 성령을 알지도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령을 압니다. 성령님이 교회 곧 우리 안에 와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와같이 성령님이 내 안에 거하시는 사건은 신학적으로 '내주하심'이라고 표현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신 성령님이 내 마음속에 와서 거하시면서 영원토록 나를 떠나지 않고 나와 함께 하신다니'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너무나 감격적인 생각을 금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더욱 감격스러운 말씀은 18절로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라는 말씀입니다. "고아와 같이 버려 두지 아니하리라" 우리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얼마나 가슴이 뜨거워지는지 모릅니다. 이 말씀은 우리를 외톨이로 내버려두지 않겠다고 하시는 약속입니다.

 

사실 제자들과 함께 했던 3년 동안 예수님은 어머니와 아버지 같았습니다. 제자들을 먹이고 입혔습니다. 가는 곳마다 그들을 데리고 다녔으며, 어려운 일을 만날 때 그들을 보호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떠나시게 되자, 남은 제자들은 자신들이 고아처럼 여겨져 한없이 슬퍼하며 두려움에 빠져 있었습니다.

 

이런 제자들을 보시고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고아가 아니다. 내가 가면 성령을 보내겠는데 그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면 내가 지금 있을 때보다 너희가 훨씬 더 행복해 질 것이다. 너희들이 나와 함께 3년 동안 있을 때는 내가 육신의 몸을 입고 있으니까 내가 안 보이면 너희들이 찾아 다녔지 않느냐? 내가 배를 타고 가다가 자면 너희들이 흔들고 깨웠지 않느냐? 그러나 성령이 오시면 너희들이 그럴 필요가 없게 된다. 왜냐하면 내가 성령과 함께 너희 속에 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부터는 내가 너희 속에 있기 때문에 너희는 어느 때든지 내 이름만 부르고 기도하면 우리 아버지께서 다 들어주신다고 말했지 않느냐? 내가 너희 속에 있기 때문에 내가 하는 일을 너희도 할 것이요. 그것보다 더 큰 일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내가 말했지 않느냐? 그렇다면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는 행복이니라. 너희는 고아가 아니다." 이것은 제자들에게만 해당되는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에게도 똑같이 해당되는 위로의 말씀입니다.

 

제자들의 마음속에 계시던 성령님이 지금 우리 마음에도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성령님을 모르는 세상 사람들은 거의 날마다 고독을 느낍니다. 세상 사람들을 보십시오. 그들이 느끼는 공허함과 고독은 말로 다 할 수가 없습니다. 어느 목사님이 말씀하시기를 '현대인들은 젊은이들로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 한시도 가만히 혼자 있지를 못합니다. 인기척이 없는 적막이 죽음처럼 느껴져 혼자 있기 싫어합니다.'

 

'그래서 핸드폰을 들었다 놓았다, 켰다 껐다 정신이 하나도 없습니다. 혼자 가만히 있지를 못합니다. 혼자 있을 때면 음악을 틀든지, 텔레비전이라도 켜 놓고야 마음이 가라앉습니다. 이와 같이 자신이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어떤 방법으로든지 확인해야 마음이 놓이는 것이 바로 현대인들입니다. 현대인들은 모두 혼자의 고독을 견딜 힘을 상실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고아가 되어 있기때문에 그렇습니다. 실존적인 고독에서 자유함을 얻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있는 우리는 다릅니다. 물론, 우리 역시 인간인지라 때로 외로움을 느낄 수 있습니다. 어떤 때는 외로워서 눈물을 흘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현대인들이 느끼는 실존의 고독은 느끼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우리 속에 거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우리 영혼의 빈곳을 가득히 채우고 계십니다. 그의 생명의 풍요로움이 우리 마음을 물댄 동산처럼 만들고 계십니다. 주님은 절대 우리를 혼자 두지 않습니다. 이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는 그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교회를 출석하면서 이런 놀라운 감격을 모르고 사는 교인들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많은 교인들이 '성령이 누구냐?'고 물으면 대답을 너무나 잘합니다. '예수님이 누구냐?'하면 역시 대답을 잘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고아처럼 울고, 고아처럼 두려워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우리의 근심과 고독과 무기력은 어디에서 온다고 생각합니까? 성경의 예수님을 그만큼 많이 알고 있는데 왜 이토록 무기력합니까?

 

성령님이 내 마음에 충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이 계시긴 계시는데 아주 마음깊은 곳에 손님으로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의 감동하심을 소멸해서 교제가 되지 않습니다. 사실 성령님이 내안에 계신다는 것은 예수님도 내 안에 거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순간부터 고아라는 영적 고독감과 공허감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성령님 앞에 우리는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성령 하나님, 나를 도와주옵소서. 내 안에 충만하게 역사하소서. 그러므로 내 안에 계시는 예수님을 알게 하시고 체험하게 하옵소서."라고 해보십시오.

 

어느 순간부터 우리의 삶은 달라지기 시작할 것입니다. 어떤 유대인 청년이 액클레이를 찾아와서 이렇게 질문을 던졌습니다. "아니, 왜 날 보고 예수 믿으라고 합니까? 내가 무슨 이유로 예수를 믿습니까? 십자가에 처형된 젊은이를 내가 왜 믿어요?" 그러자 액클레이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 맞아요. 예수님은 십자가에 처형되셨어요. 그러나 그분은 지금도 살아 계셔요. 내 마음속에 계셔요. 나는 날마다 그분과 함께 동행하면서 그분과 이야기하고 그분과 함께 인생의 모든 문제를 다 극복하고 있어요. 지금도 내 안에 살아계십니다."

 

유대인 청년이 보일 리가 없습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인데 어떻게 그 말을 알아듣겠습니까? 액클레이는 집으로 돌아와 성령님의 감동을 받아서 찬송을 쓴 것이 바로 우리 찬송가162장입니다. "부활하신 구세주 나 항상 섬기네/ 온 세상 조롱해도 주 정녕 사셨네/그 은혜로운 손길 부드러운 음성/ 주 예수 나와 함께 늘 계시네/ 예수 예수 늘 살아계셔서/ 주 동행하여 주시며 늘 말씀 하시네/ 예수 예수 내 구세주 예수/ 내 맘에 살아 계시네 늘 살아 계시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아직도 마치 자기가 고아인 것처럼 고독과 공허를 느끼고 계신 분이 이 자리에 계십니까? 보혜사 성령님을 마음에 모셔 드리십시오. 그 때에 성령님은 여러분의 마음에 거하시면서 부모처럼 영원토록 여러분과 함께 거하실 줄 믿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 성령님은 우리에게 능력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성령님은 우리 옆에서 도우실 뿐 아니라, 우리 안에 영원토록 계시면서 도우십니다. 동시에 우리에게 자기의 능력까지 부어주시는 분이십니다. (딤전 1:12)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하나님은 우리에게 직분을 맡겨주시기 전에 먼저 우리에게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부어주십니다.

 

그 능력을 성령님을 통해서 주십니다. 사람에게 육신의 힘도 중요하고 정신의 힘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도 영적인 능력이 필요합니다. 이 영적인 능력이 있어야 신앙생활도 바로 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근심과 불안을 이길 수 있는 것도 성령님의 능력이 임하실 때에 가능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무조건 "근심하지 말라 두려워하지 말라"고만 명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보혜사 성령님만 마음에 모시기만 하면 그 능력을 통해서 근심과 두려움이 사라지고 오히려 하늘이 주시는 평안과 기쁨을 소유한다고 하셨습니다. 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승천하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마지막 부탁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성령님이 주시는 능력을 받으라는 것이었습니다. 24:49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 하시니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과 120문도들은 예수님의 이러한 말씀을 믿고 성령님의 능력을 받을 때까지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오순절날 성령님의 능력을 받고 그들의 삶이 180도로 달라졌습니다. 그 때부터 그들을 막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누가 그들 속에서 솟구치는 담대한 용기를 꺾을 수 있었습니까? 누가 그들 속에서 솟구치는 기쁨을 억누를 수 있었습니까? 누가 그들의 입에서 찬송을 빼앗아 갈 수 있었습니까? 아무도 할 수 없었습니다. 아무리 채찍을 들고 때려도, 감옥에 투옥시켜도, 맹수나 검투사 앞에 끌고 가도 막을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들 안에 계시는 성령님이 그들을 강하게 붙들고 계셨기 때문에 아무도 상대를 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결국은 300년도 안되어 로마 제국이, 단 한명의 군대도 없는 그 초라해 보이는 그리스도인들 앞에 굴복하고 말았습니다. 얼마나 대단한 일입니까?

 

그래서 롬 8:35-37에서 바울은 고백하기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36]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고 했습니다.

 

4:12-13에서는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성령님에게 사로잡힌 사람은 바로 이러한 존재입니다. 이왕지사 우리가 하나님을 믿으려면 이 정도의 수준은 되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이렇게 기도합시다. "주님, 살아계신 주님을 모시고 세상을 살고 싶습니다. 그 성령님의 손에 붙들려 세상을 살고 싶습니다. 나 혼자 너무 외로운 고아와 같습니다. 나는 자신이 없습니다. 어떻게 세상 유혹과 이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고 다시 일어서야 될지 잘 모르습니다. 나를 도와주세요. 내 안에 오세요. 내가 믿기를 원합니다."라고 계속 기도해 보십시오.

 

그러면 어느 순간에 성령님이 임하시면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고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실 줄 믿습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령님은 나의 보혜사이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면서 우리를 도우시는 스폰서(후원자)입니다. 전능하신 헬퍼입니다. 그러나 거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우리와 함께 계시는 보혜사이십니다. 우리의 모든 것을 책임져 주시는 주권자이십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우리는 보혜사 성령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성령님의 도우심을 갈망해야 합니다.

 

성령충만의 비결은 분명합니다. 말씀과 기도입니다. 말씀을 묵상하고 말씀을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을 때 성령님이 역사하십니다. 뿐 만 아니라 그 말씀을 붙잡고 기도할 때 오순절 성령강림처럼 성령님이 우리가운데 역사하십니다. 요즘 묵상하는 사도행전을 보면 그렇게 힘들고 어려운 환란속에서도 마음을 같이하여 기도할 때 성령충만을 체험했습니다.

 

성령충만하면 그 증거는 확신이 생깁니다. 기쁨과 평강이 있습니다. 담대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증인의 삶을 삽니다. 성령님이 함께 하실 때 능력이 부어집니다. 그리고 우리가 처한 형편이 어떠하냐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무엇이나 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을 이길 수 있습니다. 이 시간 성령님을 우리 마음에 모셔드림으로 승리하는 삶을 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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