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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문의 메시지

주의 뜻이면(약4:11-17)

작성자야베스|작성시간20.08.23|조회수614 목록 댓글 0

주의 뜻이면(4:11-17)

 

오늘날 우리가 교회안에서 가장 많이 듣고, 가장 많이 말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가 찬송할 때도 그렇고, 기도할 때도 그렇습니다.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주님 뜻대로 살기로 했네'라고 찬송합니다. 그리고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기도할 때마다 한번도 빠뜨리지 않는 내용입니다. 그 이유는 우리 성도들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만큼, 그리고 우리가 말하고, 원한 것만큼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오히려 주님의 뜻보다는 내 뜻을 앞세우고, 내 뜻대로 살아온 것을 솔직이 고백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은 자기가 사업해서 이를 보겠다고 자신만만해 있는 사람을 향하여 '들으라'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기적인 욕망에 사로잡힌 사람들의 모습과 불확신한 미래를 향하여 큰소리치며 살아가는 허무한 인생의 모습을 봅니다.

 

오늘 13절을 보시겠습니다. (13),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어떤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머물며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 하는 자들아"고 하였습니다. 여기 이 사람은 구체적으로 계획을 세우고 있습니다. 1년동안 돈을 벌어서 부자가 되겠다는 것입니다. 치밀한 계획입니다. 그럴싸한 계획입니다. 나쁜 짓을 하겠다는 것도 아닙니다, 도둑질을 하겠다는 것도 아닙니다. 결코 못할 짓을 하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아주 지혜로운 계획인 것 같습니다.

 

이 사람의 계획을 살펴보면 네 가지가 분명합니다. '어떤 도시에' 우선 행선지가 분명합니다. '일 년을 머물며' 체류 기간이 분명합니다. '장사하여' 할 일이 분명합니다. '이익을 보리라' 목적이 분명합니다. 당시에는 이웃나라를 오가며 장사하는 상인들이 있었습니다. 아주 머리가 비상한 사람입니다. 부지런히 사업 계획을 세우고 앞으로 얼마나 돈을 많이 벌 것인가를 생각했습니다. 1년쯤 장사하면 큰 돈을 벌 수 있겠다는 실제적인 계획이었습니다.

 

나름대로는 완벽한 계획이었습니다. 그러나 신앙적인 관점에서 보면 여기에 중요한 문제가 나타납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이 계획 속에는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빠져 있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도, 하나님의 목적도 없다는 것입니다. 단지 돈 벌 생각만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이러한 인생을 보면서 인생의 본질에 대해 몇 가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1. 내일 일을 모르고 사는 인생이라고 하였습니다.

14"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의 생명이 도대체 무엇이냐? 내일 일도 모르고 살아가는 것이 인생입니다. 27:1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동안에 무슨 일이 날는지 네가 알 수 없음이니라". 구약성경에 보면 이스라엘을 멸망시킨 바벨론제국의 벨사살왕은 내일 일을 짐작치 못하고, 나라가 위기에 빠져있는 데도 평안하다 안전하다고 큰 소리치며 날마다 호화로운 잔치를 배설하고 먹고 마시다가 패망하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인간은 내일 일을 알지 못합니다.

 

오래 전에 제가 어떤 분을 만났는데, 그분의 얼굴에 수심이 가득합니다. 서울에서 사업을 하다가 어려움을 당해 멀리 경남까지 야밤도주하다시피 내려왔다는 것입니다. 어려서부터 신앙생활을 한지라 한때는 교회를 잘 다녔습니다. 그런데 사업이 조금씩 잘되고 사람들이 많아지다보니 바쁘다는 핑게로 교회도 멀어지고 세상과 가까워졌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경제적인 어려움이 찾아오면서 사업이 기울어지고 부도처리가 되어 도망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날 별로 아픈 데가 없었는데, 다만 조금 피곤한 것 같기도 하고 몸이 찌뿌등해서 아내와 함께 병원에 가서 의사를 만나서 진단을 받았는데 위암말기라는 것입니다. 평소 이렇다 할 자각증상이 없었는데도 이미 임파선까지 전위되고 온몸에 암이 퍼졌다고 했습니다. 수술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입니다. 그저 기다려 볼 수밖에 없다고 의사는 말합니다.

 

하늘이 노랐고 땅이 뒤집히는 것같은 커다란 충격을 받고 한동안 정신을 차릴 수 없었는데 그 때 생각나는 분이 하나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인생의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창조자이신 하나님을 찾게 된 것입니다. 잃어버렸던 하나님 아버지를 찾아온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이 어리석습니다. 내일을 알지 못합니다.

 

어리석은 부자는 오곡백과가 무르익은 자신의 들녘을 바라보면서 "내 영혼아 창고를 크게 지어서 쓸 것을 많이 두고 너는 나와 함께 즐기자"라고 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No"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내가 찾겠다"고 하셨습니다. 이와같이 인생을 내일일을 알지 못합니다.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계산하지 않고 오로지 하나님없는 계획을 세우고 자기만족을 위해 열심히 달려가지만 끝이 다가온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그 끝에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는 사실을 알지못하고 천년만년 살것처럼 계획을 세우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늘 종말론적인 삶을 살아갑니다. 언제든 하나님이 부르시면 갈수 있는 준비를 합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에 주목합니다. 나의 모든 주권이 하나님께 달려 있다는 사실을 알기에 결코 교만하지 않습니다.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주목하고 그 뜻앞에 자기를 내려놓습니다. 이것이 믿음의 삶입니다. 우리는 내일 일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하루 하루의 삶속에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누리며 그 은혜속에서 감사하는 삶을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14,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우리 인생이 무엇입니까? 야고보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라고 말합니다. 일순간 있다가 사라지는 안개와 같다고 표현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영원히 살 것같은 착각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마치 토기그릇과 같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에 불과합니다. 대단한 것 같지만 반드시 끝이 있고 끝에는 결산이 있습니다.

 

잠언 271절에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날는지 네가 알지 못한다"라고 말합니다. (9:25)"나의 날이 경주자보다 빨리 사라져 버리니 복을 볼 수 없구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달리는 경주자, 얼마나 빠릅니까? 모세는 시편 90:10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인생이 날아갑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말하기를 모든 인생은 풀과 같고 그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든다고 말했습니다. 희랍 철학자가 한 제자로부터 질문을 받았습니다. "선생님, 도대체 이 짧고 허무한 인생이 왜 태어났을까요?" 그때 그 철학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것은 영원의 가치를 알기 위해서"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시간의 허무를 깨달을 때 영원의 가치를 압니다. 영원은 사모할만한 것입니다. 아니 우리 인생의 깊은 욕구속에 영생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다고 전도서 3:11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소위 영성이라고 부릅니다.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은 동물에게 있지 않습니다. 인생에게만 있습니다. 순간을 사는 인생이지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이것이 채워질 때까지는 인생이 만족하지 않습니다.

 

이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그 마음에 평안이 없습니다. 가진 것 같았는데 허무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복음이 이 문제를 해결해 줍니다. 복음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내 말을 듣고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믿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생을 소유했습니다. 이것이 성도들의 최대의 특권입니다.

 

짧은 순간의 인생이 영원한 생명을 얻었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 내가 여기서 죽어도 그 다음 순간에는 내 아버지의 영원한 나라에서 영원히 삽니다. 이것이 구원받은 우리의 간증입니다. 다른 것은 다 빼앗겨도 이것은 빼앗길 수 없습니다. 이 세상의 자랑은 다 지나가도 이 영생을 주신 주님은 빼앗길 수 없습니다. 이 놀라운 사실을 생각하기만 하면 저는 감격이 있습니다. 어쩌다가 내가 영생을 선물로 받았는지 생각할 때마다 감격이 있습니다.

 

우리는 잠깐 뿐인 안개와 같은 인생을 인정해야 합니다.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잠깐이기 때문에 오히려 소중한 것입니다. 우리는 그 때를 모릅니다. 우리가 정하는 것이 아니요 우리 뜻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 뜻을 그대로 받아들일 뿐입니다. 순종할 뿐입니다. 언제 부르시든지 준비된 사람은 걱정할 것 없습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잠깐을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영원을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지나가는 것을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변하지 않는 하나님을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우리의 목적도 우리의 계획도 우리의 모든 것의 초점을 영원을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3. 허탄한 자랑을 하는 인생이라고 하였습니다.

16"이제도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하니 그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 허탄하다는 말은 거만하고 오만하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에 대해 상관하지 않고 물질적 이익을 얻기 위해 계획을 세우는 오만한 태도를 의미합니다. 어떻게 하든 자기를 드러내고 싶고 자기 생각을 성취하고 싶어하는 오만한 자랑입니다. 이것을 요한일서 216절은 이생의 자랑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허탄한 자랑, 하나님을 무시하는 오만한 자랑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에게는 복음서가 하나 더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복음입니다. 모든 것의 중심에 자기가 앉아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자리까지 차지하고 자기가 주장하면 그것을 우리는 오만이라고 말합니다. 이 오만은 갈등의 원천입니다. 성경은 이 오만이 하나님과 원수되었다고 합니다. 이 오만은 계속 자기를 높이기 위해서 남을 비난하고 조소합니다. 이 사람은 이래서 나쁘고 저 사람은 저래서 나쁘고‥‥남의 험담이 끊이지 않습니다.

 

내 입에서 남이 나쁘다는 말이 많이 나오면 나쁜 사람은 남이 아니라 ""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11형제들아 서로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관이로다.” 비방한다는 것은 이웃에 대해 험담을 늘어놓는 것이므로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증거입니다. 진정으로 사랑하면 혹 형제의 허물이 보일지라도 비방의 내용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허물을 덮어줍니다.

 

유대인의 지혜서 탈무드를 보면 험담은 살인보다 더 위험하다고 가르칩니다. 살인은 한 사람씩 죽이지만, 험담은 세 사람을 동시에 죽인다고 하였습니다. 1)험담을 퍼뜨리는 자신, 2)험담을 들은 사람, 3)험담의 대상이 된 그 사람을 죽인다고 하였습니다. 마귀는 헬라어로 '디아볼로스'라는 말입니다. 이 단어의 의미는 '비방자, 참소자'입니다. 아담과 하와를 무너뜨릴 때 사탄은 하나님을 비방했습니다. 선악과를 따먹으면 눈이 밝아져 하나님처럼 될까 염려되어서 먹지 못하게 했다고 비방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이 비방의 유혹에 넘어가서 에덴의 행복을 잃었듯이 우리안에서 서로를 비방하면 관계를 통한 행복을 잃어버립니다.

 

우리는 비방이 마귀 것이라는 사실을 확실하게 인식하고 비방과 싸워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비방하기 전 먼저 상대를 만나서 대화를 해야 합니다. 만나서 상대방과 이야기하면 많은 오해가 풀릴 수 있습니다. 사랑은 이해입니다. 상대방의 입장에 서 보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알면 훨씬 더 가까이 갈 수 있습니다. 사실 이해만 되면 비방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설혹 비방하고 싶은 마음이 있더라도 하나님의 관점에서 다시한번 문제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는 그리스도안에 있는 영원한 하나님의 가족입니다. 형제자매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안에서 이렇게 어려운 시대에 서로를 비방하고 비판한다면 희망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비방하는 것은 죄악입니다. 사탄의 종노릇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비방하기 보다 먼저 이해하고 용서하고 허물을 덮어주는 사랑을 실천하시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남을 비방하는 사람들의 특징은 자기는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지금까지 살면서 깨닫는 것은 인간은 다 연약한 존재입니다. 하나님앞에 보면 다 부족한 것밖에 없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 가운데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이라는 본성이 있습니다. 이렇게 육신의 정욕을 십자가에 못박지 않으면 언제나 자기를 자랑합니다. 자기를 높이기 위해서 남을 멸시하기도 합니다.

 

오만한 사람은 자기는 항상 옳고 남은 항상 틀리다고 생각하며 삽니다. 그리고 허탄한 자랑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나 허탄한 자랑의 허무함과 인생의 욕망이 얼마나 헛되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 머리를 숙입니다. 솔로몬 왕이 기록한 마지막 책이 바로 전도서입니다. 그는 인간으로서 최고의 영광과 기쁨을 누리며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가 깨달은 것은 해아래 있는 모든 것이 다 헛되고 헛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마지막 고백은 전도서 마지막장인 12:13,14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 [14]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 그가 깨달은 것입니다. 모든 인생의 마지막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결론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명령들을 지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간에 심판하시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솔로몬은 그의 모든 것을 다 하나님의 뜻앞에 내려놓았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말씀을 지키는 것이 인간의 본분임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앞에 자기를 다 내려 놓았습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정말 세상의 보이는 것의 허탄한 자랑에 속지 않으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항상 우리에게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진정한 성도는 하나님의 뜻에 주목합니다. 15,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이라고 말합니다. 계획을 세우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꿈을 갖지 말라는 이야기도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너희가 "도리어"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고 인생의 계획을 세우는 것에서부터 돌아서라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과는 다른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반드시 이에 대항하여 도리어의 태도를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태도입니까? 어떤 계획을 세우고 어떤 꿈을 갖는다 할지라도 언제나 주님의 뜻이면, 주께서 허락하시면 난 이것을 하리라. 얼마나 멋진 그리스도인의 자세입니까?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좋은 계획을 세워야 합니다. 주님을 위해서 큰일들을 마음속에 품어야 합니다. 그러나 마음 속에 새로운 계획을 품기 전에 생각해야 할 첫 단어는 "주의 뜻이면, 주께서 허락하시면"이라는 것입니다. "주의 뜻이면 하리라" 매우 중요한 말입니다.

 

주의 뜻으로만 살기를 바랍니다. 6:3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우리가 이것을 하리라"

1)주님 뜻대로 살기로 했네(*3) 뒤돌아서지 않겠네. 2)이세상 사람 날 몰라줘도(*3) 3)세상등지고 십자가 보네(*3). 주의 뜻이라면 할 수 있고, 주의 뜻이라면 안할 수도 있어야 될 줄 믿습니다. 주의 뜻만 따라 사는 믿음의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말로만이 아니라 주의 뜻을 절대 권한, 절대 명령으로 삼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 그러므로 선을 행하라고 하였습니다.

[17] "그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죄니라" 여기서 선이란 윤리적인 선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선의 기준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행하는 것이 바로 선입니다. 주의 뜻대로 사는 것이 선입니다. 반면에 주의 뜻을 거부하고 내 뜻대로 사는 것은 악입니다. 세상을 좇아 사는 것도 악입니다. 우리는 이제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압니다. 그런데 행하지 않고 말로만 외친다면 죄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주의 뜻을 외치지만 정작 주의 뜻대로 살지 않고 현장에서는 항상 내 뜻이 앞섭니다. 주의 뜻을 우선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사하는 것도 좋은 집, 앞으로 전망이 있는 집으로 이사가는 것이 기준이 아니라 주의 뜻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주님이 뜻이라면 내가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겠습니다. 항상 주의 뜻을 먼저 구하고 그뜻대로 결단하고 행하는 것이 바로 선입니다.

 

그런데 선을 행할 줄 알면서 하지 않으면 그것은 죄인 것입니다. 달란트 비유 중에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이 악한 짓을 해서 주님께 꾸중을 들은 것이 아닙니다. 한 달란트로 아무 것도 하지 않은데 대해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는 책망을 받은 것입니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에서 레위인과 제사장이 악을 행해서 주님께 책망들은 것이 아니라 도움을 주어야 할 때 피한 사실,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사실에 대해서 책망을 들은 것입니다.

 

주님이 심판하실 때 의인과 죄인을 나누셨습니다. 그리고 우편에 있는 의인들에게 말합니다.

"너는 내가 배고플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헐벗었을 때에는 입을 것을 주었고 내가 옥에 갇혔을 때 돌아보았고 내가 병들었을 때에 찾아와 주었다" 그들은 주님의 이름으로 연약한 사람들을 위해 그런 일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좌편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너는 이것도 안했고 저것도 안했고라고 책망하시며 태만의 죄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선을 알고도 행치 않는 것이 죄니라"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우리의 삶의 결정에 하나님의 뜻이 우선되고 있습니까? 말로만이 아니라 도리어 우리의 계획 속에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고 결단할 수 있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 무엇보다 나를 향하신 주님이 뜻이 무엇인가를 발견해야 합니다. 잘 모르시면 성경을 펴시고 일으십시오.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보일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뜻을 안다면 결코 허탄한 자랑을 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많은 말을 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면, 믿음의 말이 아니라면 교만을 만들어 낼 뿐입니다. 뿐 만 아니라 세상적인 성공을 이루고 자기를 자랑할 만한 일을 이루었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지 않고 자기를 드러내고 자기자랑에 눈이 어두워졌다면 허탄한 자랑입니다. 이제 거기서 내려옵시다. 주님의 뜻앞에 내 미래를 맡기고 한걸음 한걸음 선을 행하며 하나님의 말씀 앞에 순종하는 거룩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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