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을 따른다는 것은?(마 16:24-25)
신앙생활이란 결국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요 14:6에서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시기를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입니다. 영원히 변하지 않는 진리입니다. 영원히 죽지않는 영생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따라 살면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라 살면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속에서도 하나님 나라를 누리며 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은 예수님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바울사도는 그리스도인다운 그리스도인을 자기의 경험에 비추어 ‘그리스도를 닮는 것’으로 이야기합니다. 그리스도를 닮은 삶은 그리스도처럼 살아가는 것이고,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자기의 뜻대로 살아가는 삶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따라 성령에 이끌리는 삶을 살기를 소망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앞에서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26:39)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닮아가던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면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주리라(행 21:10)’는 예언자의 말 앞에서 당당하게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행21:13)라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를 따라간다는 것은 내 뜻이 아니라 우리를 이끌러 가시는 성령의 인도를 받아 하나님의 원하시는 뜻을 알고 그 뜻대로 이해하고 살아가는 삶을 의미합니다.
문제는 우리가 예수님을 따라가기에 너무 약하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우리가 세상에 살고 있지만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기 때문에 세상이 미워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 다락방 강화를 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 15:19)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세상이 미워한다는 말은 대적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 16: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예수님께서 너희가 내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해주시겠다. 그리고 약속하십니다.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안에 거하기만 하면 어떤 시련과 환란이 와도 세상을 이길 수 있고 평안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으로 만족하지 마시고 예수님을 따라가는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안에는 세종류의 사람들로 구별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교인으로 교회에 다니는 사람입니다. 교회에 나와서 신앙생활은 하고 있지만 아직 구원의 확신이 없습니다. 말씀을 듣고는 있지만 무슨 이야기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습관적으로 교회에 나오지만 나오면 마음이 평안하고 집안의 평안을 위해서, 또 하나님의 축복을 받기 위해서 등등 여러 가지 이유로 교회를 다니는 사람도 있습니다.
둘째는 신자입니다. 예수님이 구원자이심을 믿습니다. 영원한 천국이 있음을 믿습니다. 복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께서 영혼을 구원하실 뿐 아니라 사업과 건강과 자식에게 풍성한 복을 내려 주실 것을 기대합니다.
셋째는 성도입니다. 주님을 사랑합니다. 사랑하는 주님을 위하여 무엇을 할 것인가를 생각합니다. 주님을 위하여 기꺼이 시간과 재물과 재능을 사용합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무엇을 받을까 하는 것보다, 예수님에게 무엇을 드릴까를 생각합니다. 성도의 삶을 사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칭찬과 상급이 있을 것입니다.
오늘 봉독한 말씀은 예수님께서 공생애 3년동안 12명의 제자들을 뽑아 가르치셨습니다. 함께 동거동락하며 삶과 말씀을 통해 많은 것을 경험하게 하셨습니다. 수많은 이적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의 권능은 하나님의 권능이셨습니다. 그러므로 못하실 일이 없습니다. 죽은 자도 살리십니다. 그런 예수님께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신앙고백을 하였습니다. 그때 비로소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엄청난 충격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예루살렘에 올라가 많은 고난을 받은 뒤에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실 것과 죽은지 사흘 만에 다시 살아 나실 것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제자 베드로가 이런 일이 주님께 결코 일어나서는 안된다고 단호하게 말합니다. 주님께서는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하고 말씀하신 뒤에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구나”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의 제자는 사람의 일보다 하나님의 일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이고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는 사람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사람인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교인에서 신자로, 신자에서 성도로 나아가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여기에는 3가지 동사가 나오고 있습니다. 자기를 부인하라. 자기 십자가를 지라. 나를 따르라.
예수님의 제자로 성도로 살기를 원하는 여러분!
1. 자기를 부인해야 합니다.
제자란 스승의 가르침을 받는 사람이요, 스승의 가르침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요, 스승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사람이요, 스승의 삶을 따라가는 사람입니다. 스승의 가르침과 자신의 생각이 다르다면 어떻게 하여야 하겠습니까?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고 스승과 논쟁을 해서는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자신의 생각을 버리고 스승의 가르침을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참 제자는 하나님 앞에서 무조건 “예”만이 있을 뿐입니다. 자기 생각에 맞지 않아도 예합니다. 자기 경험과 맞지 않아도 예합니다. 사실 우리가 주님을 따라가는데 가장 큰 장애는 바로 나자신입니다. 내가 지금까지 주인되어 살았기 때문에 내 마음에 들어야 옳은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해야 마음이 기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주님을 따르는 제자는 나를 부인합니다. 나를 내려놓고 주님의 뜻을 따릅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사도바울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고후 1:19) “우리 곧 나와 실루아노와 디모데로 말미암아 너희 가운데 전파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 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셨으니 그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 예수님이 예만 하셨습니다.
죽기까지 복종하시면서 하나님의 뜻앞에 자기를 다 내려놓으셨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말씀대로 순종하면 당장은 고통인 것같고 희생인 것같지만 아닙니다. 말씀속에 생명의 신비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주님을 따라가기 위해서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에 가서 회개를 선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요나는 앗수르나라의 니느웨에 가고 싶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앗수르는 자기 민족인 북이스라엘을 멸망시킨 나라입니다. 하나님께서 저들을 멸망시키신다면 속이 시원할 것입니다. 때가 왔구나 죄악이 너무 깊어 하나님께서 멸망시키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서 회개를 선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회개하면 멸망받지 않고 구원을 받게 된다는 것이 싫었습니다. 요나는 싫었습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명령이라 항구로 나오기는 하였지만 니느웨로 가는 배를 타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니느웨와 멀리 떨어진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탔던 것입니다. 자기 생각과 판단을 앞세운 요나는 선지자이지만 결코 하나님의 제자는 아닙니다.
베드로가 밤새도록 그물을 내렸지만 단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그 때에 예수님께서 오셔서 그물을 오른편 깊은 곳에 던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밤새 수고하였지만 잡은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주님 그곳에는 고기가 없습니다. 주님 그곳에 이미 그물을 내려 보았습니다. 제가 고기 한 두 번 잡아 보겠습니까?
어려서부터 이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를 잡아 왔습니다. 갈릴리 호수라면 제가 손바닥처럼 들여다 보고 있습니다. 고기잡는데 있어서는 제가 전문가입니다. 오른편 깊은 곳에 그물을 던지라구요? 그런 말씀 마십시오!”보통 사람이라면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제자이기에“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제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자기 경험, 자기 생각, 자기 판단을 접고, 자신을 부인하고, 오직 주님의 말씀을 의지하여 그물을 내린 것입니다. 그랬더니 주님이 역사하셨습니다. 주님의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고기가 잡힌 것입니다. 어떤 분은 “저는 신앙생활을 오래 했는데 기쁨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구체적으로 느껴보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에 대하여 간증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왜 이렇게 믿음이 자라지 않는지 모르겠습니다.”하고 말합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제자의 삶을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기 경험, 자기 생각, 자기 판단으로 살기 때문입니다. 가시나무새란 노래가 있는데 앞부분이 이런 가사입니다.“내 속에 내가 너무도 많아 주님 쉴 곳 없네!”우리의 입으로는 주님, 주인이라고 부르면서 우리 마음 속에서는 내가 주인이 되어 내 마음대로 하고 있는데, 세상의 것들로 가득차 있는데, 어떻게 예수님께서 주인이 되셔서 능력있게, 권능 있게 역사하실 수 있겠습니까? 내가 주인으로 사는 한 주님의 역사하심, 주님의 능력, 주님의 권능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자기 자신의 개인적 희망과 목표와 꿈이 있습니다. 인간은 대부분 이기적입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은 자신을 위하여 생각하고, 자신을 가장 우선적으로 생각하고 자신에 관해서 걱정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예수를 따르는 것은 자기 자신의 목표와 계획과 희망을 부인하는 것과 함께 연결되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기를 원하는 자,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원하는 자는 자신의 희망과 갈망과 욕망을 없애버리고 자신을 남김없이 예수그리스도에 복종시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죄인되었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부인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러면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것은 우리 인생에 가장 중심된 자리를 그리스도께 내어주는 삶을 의미합니다. 이 중심된 자리는 보통 자기 자신의 "내적 자아"가 차지하고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부인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의 이기적인 욕망. 이익. 희망. 정욕과 계획보다 그리스도나 자기의 이웃을 먼저 우선해서 앞에 세운다는 의미입니다.
다르게 표현하면, 자기 자신의 욕망으로 가득 찬 내면세계에 나의 구원자이신 주님이 들어오시도록 자신을 비우고 그 공간을 내어드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려면 자기를 부인해야 따라갈 수 있습니다. 자기가 가장 장애물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진정으로 따라가기를 원한다면 내 생각이 부인하고 하나님의 생각을 받아들이는 것이 첫 번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안에 선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안다면 내속에 나를 지배하고 있는 죄성을 잘 안다면 무엇보다 먼저 자기를 부인해야 합니다. 내가 부인될 때 예수님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2.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하였습니다.
1 세기에 사람들이 자신의 어깨에 나무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사람을 보았을 때 사람들은 그 사람이 곧 십자가에 달려 죽을 사람이라고 이해했습니다. 그들에게 십자가는 필연적인 죽음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리스도를 따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십자가는 그리스도를 위해 치러야 할 의무와 주를 위해 받는 고난입니다. 그것의 크고 작음과는 상관없이 우리는 십자가를 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에 대해서 정확한 개념을 가지고 있지 못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나의 십자가는 나의 평생동안 나를 괴롭히는 술중독자 남편`이라고 말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육체의 병을 십자가`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또 다른 사람은 ‘나이가 많고 병든 부모를 돌보는 것을 십자가`라고 생각합니다. 십자가는 무엇인가를 어쩔 수 없이, 체념 속에서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주신 일을 스스로 자원해서 받아들이는 것이며, 또 사역을 하거나 그리스도를 따르다가 입게 되는 여러가지 고난과 그 결과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뜻에 복종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 십자가를 지시기 전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무엇을 기도하셨습니까? 내 뜻대로 마옵시고 하나님의 뜻대로 하옵소서입니다. 저는 바로 이것이 십자가라고 생각합니다.
내 뜻을 내려 놓고 하나님의 뜻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십자가속에 생명의 비밀이 담겨 있습니다. 한 알이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입니다. 그런데 죽으면 거기서 생명의 역사가 시작되어 싹이 나고 꽃이 피우고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에게 있어서 필연적으로 따라가야 할 사명은 바로 십자가입니다.
십자가가 없이는 결코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가 죽음을 의미합니다. 거기에 내가 없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영원한 나, 예수생명을 가진 내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사도바울이 갈라디아서 2:20절에서 이렇게 고백을 하였습니다.(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우리가 세례를 받을 때 영적으로 이미 예수님과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입니다.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내 옛사람이 죽는다는 것이고 하나님의 제단 위에 자신을 내어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십자가없이 주님을 따라가는 것은 생명없이 종교적으로 주님을 믿는 것입니다. 거기에 생명이 없습니다. 거기에 예수님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살았다 하는 이름은 있으나 실상은 죽은 것입니다.
산부인과 의사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가끔 이런 분이 있답니다. “저는 아픈 것을 결코 참을 수 없어요. 아이 낳는 것이 무서워요. 진통이 오기 전에 수술해 주세요” 부모가 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한 해산의 고통을 통하여 가능한 것입니다. 해산의 고통을 피한다고 수술을 할 수 있지만 다른 고통이 있습니다. 산고를 겪어 엄마가 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아이를 바라보며 방끗 웃으며 집으로 갈 수 있지만 수술을 하면 수술한 부위가 아물 때까지 거의 한 주간 고생을 해야 합니다.
이것 저것 다 싫으면 데려다 입양하여서 기를 수 있지만 그렇게 하여서는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의 신비와 자식에 대한 깊은 사랑을 느낄 수 없습니다. 고통 없이는 부모의 기쁨을 맛볼 수 없습니다. 십자가를 지지 않고서도 제자의 길을 걸을 수 없고, 제자된 기쁨, 제자된 감격, 제자로서 누리는 영광을 결코 느낄 수 없습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않는다면 결코 제자가 아닙니다. 주님의 제자는 주님의 뒤를 묵묵히 따라가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예수님의 뒤를 따른다고 하지만 내가 진 십자가가 주님의 십자가만큼 무겁겠습니까? 내가 진 십자가가 주님 십자가만큼 고통스럽겠습니다. 주님께서는 “내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말씀하시지 않으시고 “자기에게 주어진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는 일은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실 때 고통당하신 것과 같이 봉사할 때도 몸이 아프도록 일해야 하고 내가 즐길 수 있는 시간도 드려서 수고해야 하고 쾌락에 쓸 수 있는 돈도 남을 위해 사용하는 손해도 맛보아야 합니다. 결국 십자가는 곧 죽음입니다. 자기 자존심, 자기 만족, 자기 쾌락, 자기 욕심, 자기 이익을 모두 죽여야 합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목숨까지 아끼지 않고 바치는 것입니다.
우리의 육신이 백 년 동안 아무리 부귀 영화를 다 누리면서 산다고 해도 그것은 하나님 나라의 영원한 삶에 비하면 한 순간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혼을 구원하는 일, 상대방으로 하여금 영생복락을 누리게 하는 일을 위해 희생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짊어져야 하는 십자가가 아무리 무겁다고 하여도 어찌 주님의 십자가와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짊어질 내 몫의 십자가가 아무리 힘들다고 하여도 어찌 주님의 십자가와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자기 십자가 반드시 지고 가야 합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렵다해도 주님이 먼저 지신 십자가입니다. 우리는 바로 그 주님의 뒤를 따라가는 제자들입니다. 그러므로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온전히 믿고 믿음으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른 성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그리스도를 따르라고 하였습니다.
따른다는 것은 뒤를 따라서 움직이거나 걸어간다는 것입니다. 어떤 모델을 정해놓고 따르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길을 선택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나아가는 삶입니다. 거기에 놀라운 부활의 신비가 있습니다. 거기에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기적을 체험합니다. 일반적으로 따른다는 것은 어떤 모델을 따르든지, 누구를 닮기 위해 따라서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은 무엇을 하든지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내 삶의 가장 첫째 우선순위에 놓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도바울의 표현을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은 ‘혈과 육과 의논하지`(갈1:16)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자기 인생의 중심에 두고, 개인적인 유익이나 생각은 뒤로 미뤄두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고 그분에게서 나의 시선을 떼지 않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과정에서 어떤 것이든 어떤 사람이든 우리를 멈추도록 허락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우리 주변의 상황에 지나친 관심을 가질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는 끝까지 주님과 함께 나아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끝까지 지키는 것이 영적 생명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매일 그분을 위해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여러분은 오늘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서 자기 부인과 희생의 대가를 치를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가장 귀하고 가치 있는 것은 매우 비싼 대가를 요구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우리 구원을 위해서 골고다에서 피를 흘리시는 가장 큰 희생의 대가를 치르셨습니다. 매일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묵묵하게 따라가는 여러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참된 예수님의 제자의 길은 세상을 거슬러 올라가는 삶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많은 사람들이 가는 길로 갈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믿는 우리들은 세상을 거슬러 올라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희생도 있고 아픔도 있고 손해도 있고 미련하게 보입니다. 바보처럼 생각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도는 멸망하는 자에게는 미련하게 보이지만 구원을 얻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비밀입니다.
여러분, 오늘 임직후보자로 세워진 여러분, 그리고 하나님께서 세우신 직분을 받은 집사,권사,장로 임직자여러분, 이제 여거시 다시한번 우리의 본질을 점검해 봅시다. 우리의 본질은 예수님께서 가신 그길을 따라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만 따라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