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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문의 메시지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것(미가서 6:6-8)

작성자야베스|작성시간21.04.11|조회수4,731 목록 댓글 0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것(미가서 6:6-8)

 

오늘 본문은 매우 짧지만 많은 의미를 던져주고 있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미가 선지자가 활약한 시대는 악한 왕으로 악명 높은 아하스가 통치하던 시대였습니다. 그 당시 부와 권력을 가진 소수의 사람들은 자신의 지위를 이용하여 사리사욕을 채우는데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정치계나 종교계를 가릴 것없이 부패하여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분간조차 힘들 정도였습니다. 가히 부정부패 시대의 원형이라고 할만큼 어두운 시대였습니다.

 

놀라운 것은 세상이 그렇게 철저히 부패했음에도 불구하고 성전에는 아침 저녁으로 재물을 바치러 나오는 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그 어두운 때에 성전을 찾는 사람이 많다는 것은 매우 고무적인 일이 아니겠느냐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그러한 열심은 결코 그리 좋은 의미로 볼 수 있는 현상이 아니었습니다. 생활은 엉망진창으로 하면서 종교 행사에 유달리 집착하고 있는 모습은 정상적이기 보다는 병적이기 때문입니다.

 

사회에 만연되어 있는 이러한 기현상을 바라보며 미가는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은 던져 보았습니다.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 일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여호와께서 천천의 수양이나 만만의 강수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를 인하여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6-7)

 

질문의 골자는 이것입니다. 사람들이 제사에 대해서 보이는 그러한 열심히 과연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입장에서 이것을 진단해 보기를 원했습니다. 그는 먼저 스스로에게 이 질문들을 던져 보았습니다. '내가 일년된 수송아지를 가지고 나가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실까?' 그 당시 사람들은 적어도 일년된 수송아지 정도를 드려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송아지는 생후 7일이면 제사 제물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1년 정도를 키운 것이라면 꽤 값비싼 제물이라 할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이와같은 값비싼 제물을 좋아하실 거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또는 그는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아니, 수를 좀 더 늘려서 백만 마리 숫양을 드린다면 어떨까? 그 기름이 강을 이룰 만큼 많은 제물을 드리면 좋아하실까?" 그 당시 사람들은 자기가 얼마나 많은 제물을 바쳤느냐에 대해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보다 많은 제물을 드려야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미가는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당시 아하스 왕이 자기 아들을 몰렉이라는 우상에게 제물을 드린 것같이(왕하16:3) 내가 맏아들을 제물로 드린다면 하나님이 기뻐하실까? 미가는 일년 된 수송아지 한 마리에서 시작하여 수를 백만 마리의 숫양으로, 그 다음에는 광적인 열심이 맏아들을 드리는 제사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의 종교적 열심을 하나하나 짚어보면서 하나님께서 과연 이러한 제물들을 기뻐하실까 하고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그가 내린 결론은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결코 이러한 제물들을 기뻐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미가 자신뿐 만 아니라 그 당시의 모든 예배자들에게 해당되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질 좋고 값비싼 제물을 드린다고 해서 기뻐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많은 제물을 드린다고 기뻐하시는 분도 아닙니다. 자기 아들을 제물로 바치는 광적인 열심을 보인다고 해서 그 제사를 기뻐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이 진정으로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님께서 원하시지도, 기뻐하시지도 않는 제물을 바치는데 열심을 내고 있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몰랐기 때문일까요?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8절을 보십시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미가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무엇을 기뻐하시는지를 이미 다 보여 주셨다고 말합니다.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 자신이 무엇을 원하시는지 분명히 말씀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몰라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못했노라고 핑게댈 수 없습니다. 분명히 알고 있었지만 의도적으로 그것을 무시했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신이 무슨 제물을 얼마나 많이 드리느냐에 대해서만 관심을 쏟았습니다. 그들은 종교적인 자기 만족감에 흠뻑 취해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헌금을 얼마나 드리면 하나님이 기뻐하시겠습니까?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께 봉사해야 하나님이 기뻐하시겠습니까? 보이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예를 들면 제가 부모님 집에 가면서 선물을 10만원치 사 갔습니다. 그래서 부모님이 기뻐서 어쩔 줄 모릅니까? 그 선물 때문에 좋아하십니까? 물론 선물을 더 좋은 것 사가면 더 좋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것은 나 자신입니다. 내가 올바른 삶을 살고 내가 올바른 정신을 가지고 사는 것을 더 기뻐하십니다. 진정한 부모라면 자식을 보는 것보다 더 기쁜 일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중요한 것은 우리 자신입니다. 창세기 4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보시는 것은 제물만이 아닙니다. 제물보다 먼저 사람을 보셨습니다. 그 이유를 요한일서 3:12절에서 사도 바울은 “가인같이 하지 말라 그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떤 이유로 죽였느냐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의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일을 많이 하느냐, 얼마나 예배를 많이 드리느냐, 얼마나 헌금을 많이 하느냐 하는 것들이 아닙니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 자신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와 예배를 드리고 봉사를 하고 헌금을 드리는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 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가인같은 삶을 살면서 하나님앞에 제물을 많이 드린다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겠습니까? 제사를 하루 열두번 드린다고 기뻐하시겠습니까? 악한 자의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십니다.

 

이처럼 악인의 제사는 하나님께서 미워하십니다(잠15:8). 이사야 1:12-17에 보면, 하나님께서 타락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13]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14]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15]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내 눈을 너희에게서 가리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라 [16]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한 행실을 버리며 행악을 그치고 [17] 선행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 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8절 하반절을 봅시다.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공의와 인자와 하나님과의 동행, 이 세 가지입니다.

 

1. 오직 정의를 행하는 것입니다.

정의는 의로운 삶을 말할 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 모든 사람에 대해 공평하게 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늘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죄악과 세상에 묻혀 하나님을 망각하며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말씀은 늘 듣고 있지만 실제 생활에서 말씀이 없습니다. 말씀이 삶과 연결되지 못하고 사는 방법은 매우 세상적으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모든 선택의 기준이 자기 자신입니다. 자기 유익이 전부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생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의 실패가 바로 이 점입니다. 그들은 정기적인 종교 절기를 준수했고 이마에 성경말씀을 들어있는 경문을 붙이는 등 외형적인 종교생활에는 열심을 냈습니다. 그러나 실생활에서 성경의 가르침과는 어긋나는 생활을 했습니다. 부자가 가난한 자의 재물을 약탈하고, 권력자는 백성들의 것을 토색하여 자기들의 배를 불리기에 바빴습니다. 특히 미가 선지자가 활동하던 당시 유다 상황이 그러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는 것입니다.

 

정의는 삶의 실제적인 현장에서 매매 행위나 재판 등에서의 공평정대한 것을 의미합니다. 그 정의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이고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신명기 32장 4절에 보면. "그는 반석이시니 그가 하신 일이 완전하고 그의 모든 길이 정의롭고 진실하고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시니 공의로우시고 바르시도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행함으로 의가 드러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선과 악을 혼동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선을 행하는 자는 천대까지 복을 주시고 악을 행하는 자는 삼사대까지 징계하십니다(출20:5-6). 이와같이 공의로운 성품을 가지고 계시기에 공의를 행하는 자를 기뻐하십니다. 인간 사회에서 공의는 도덕률의 기본, 곧 선악을 판단하는 기준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만일 공의가 무너져 버리면 사회는 법이 공정하게 시행될 수 없을 뿐 아니라 정의가 살아남을 수 없는 끔찍한 사회가 되어 버립니다.

 

이와같이 법과 정의가 무너진 사회에서는 사람들이 절대 평등한 존재로, 인간답게 대우받지 못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서로간의 신뢰가 무너질 수 밖에 없습니다. 누가 무슨 말을 해도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미가 시대의 유다가 바로 이러한 상황에 놓여 있었습니다. 7장 5절을 보십시오. (미 7:5) "너희는 이웃을 믿지 말며 친구를 의지하지 말며 네 품에 누운 여인에게라도 네 입의 문을 지킬지어다"누구보다 믿고 흉금을 털어 놓아야 할 자기 아내에게 조차 함부로 솔직한 말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정도로 신뢰할 수 없는 세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창세기 6:5~9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6]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7] 이르시되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8]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9] 이것이 노아의 족보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악이 관영한 세상에서도 하나님께 은혜를 입은 노아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안에 살아가는 노아는 의롭게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노아를 보시고 얼마나 기뻐하셨겠습니까? 오늘도 우리가 세상은 죄악이 관영합니다. 물질이 전부인 것처럼 살아가고 있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성도들 보실 때 하나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 첫번째가 바로 정의, 곧 공의를 행하는 것입니다. 좀 더 말씀을 드리면 하나님의 뜻이 공의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면 걸리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내 뜻, 내생각, 내유익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 뜻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여기에 바로 십자가가 있는 것입니다. 요즘 요한복음가운데 예수님의 마지막 한 주간을 묵상하고 있는데 예수님은 언제나 하나님의 뜻을 찾고 그 뜻앞에 자기를 다 내려 놓으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생애속에서 하나님의 공의를 확실하게 보여주신 곳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공의가 성취되었습니다. 죄와 내 자아를 십자가에 못박은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의 공의가 이루어진 곳에 우리가 말하는 정의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의를 행하는 것은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할 때 나타나는 것은 바로 공의입니다. 어떠한 상황가운데서도 하나님의 공의를 붙잡고 그 공의를 행함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인자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인자’라는 말의 원어는 히브리어로 ‘헤세드’라는 말인데, 곧 ‘언약적 사랑’이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과 언약을 맺으시고 그들을 변함없이 끝까지 사랑하시는 그 사랑을 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공의로우시며 인자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공의와 인자는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기본적인 원칙이 됩니다. 그래서 선지자들은 다른 사람에게 ‘헤세드’를 보이지 못할 경우 하나님과의 언약을 어긴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언약은 하나님의 ‘헤세드’를 얻게하는 매개체가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자신의 속성인 ‘헤세드’를 보여주고 그로 인해 언약을 맺었던 것처럼, 자기 백성들도 이웃에게 ‘헤세드’를 보여 하나님과의 언약을 신실하게 지킬 것을 요구하신 것입니다. 그언약의 핵심이 바로 헤세드, 사랑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성경 마태복음 22장 37절로 40절에서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러므로 그리스도인의 행동의 동기는 바로 사랑과 섬김이 되어야 하며 복음을 전하는 일도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디엘 무디는 ‘거짓 사랑은 혀끝에 있고 참 사랑은 손끝에 있다’고 했습니다. 인자를 사랑한다는 것은 가난하고 힘없는 이웃을 불쌍히 여기는 태도를 말합니다. 이것은 공의보다 한 단계 더 높은 것입니다. 이 땅이 공의로운 사회가 되면 힘없고 가난한 자들이 가장 많은 이득을 보게 됩니다. 공의를 행한 사람은 반드시 이웃을 사랑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인자를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처럼 무엇을 하든지 사랑에 근거해서 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요한복음을 묵상하면서 더욱 깨닫는 것은 예수님께서 내 계명이라고 말씀하신 것이 있습니다. (요 15:12)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이 주신 계명이 바로 인자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옆에 있는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속에 진정한 헤세드가 있습니까? 우리의 삶의 동기가 바로 이러한 헤세드입니까? 헤세드는 예수님처럼 사랑하기로 언약한 것입니다. 원수라 할지라도 용서하고 이해하고 존중해주고 세워주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사랑해야 합니까? 주님이 먼저 우리를 그렇게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하물며 가까이에 있는 이웃을 사랑하지 못해서야 어찌 하나님의 인자를 사랑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누가복음 6:33~36절에서 “너희가 만일 선대하는 자만을 선대하면 칭찬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이렇게 하느니라 [34] 너희가 받기를 바라고 사람들에게 꾸어 주면 칭찬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그만큼 받고자 하여 죄인에게 꾸어 주느니라 [35]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시니라 [36]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도의 실제가 되어야 합니다.

 

미국의 뉴욕 시장까지 지낸 라과디아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가 뉴욕시 즉결 재판부 판사로 있었을 때의 일화입니다. 어느 날 라과디아는 빵을 훔치려다가 붙잡혀 온 노인을 재판하게 되었습니다. “당신은 어째서 빵을 훔쳤소?” 노인은 울먹이면서 대답했습니다. “죄송합니다. 빵 가게 앞을 지나가다 배가 너무 고파서. 그만 저도 모르게 손을 대고 말았습니다. 이 늙은이가 죽을 죄를 졌습니다.” 노인은 눈물을 흘리며 용서를 구했습니다.

 

장내는 불쌍한 노인의 울먹임으로 조용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이윽고 노인의 답변을 묵묵히 듣던 라과디아가 판결을 내렸습니다. “당신의 죄는 벌금형에 해당됩니다. 따라서 벌금 10불을 언도합니다.” 그리고 난 후 라과디아는 자신의 지갑에서 10불을 꺼내 놓으며 말을 이었습니다.

 

“여러분, 벌금 10불은 내가 내겠습니다. 저 노인이 허기진 배를 감싸쥐고 뉴욕의 거리를 비틀대고 다닐 때, 나는 좀 더 좋은 음식을 찾아 배부른 방황을 하고 있었습니다. 내가 죄인입니다. 그 벌로 내가 10불을 내겠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계신 신사, 숙녀 여러분! 여러분 중 나와 같은 잘못을 저지른 분이 계시다면 자원하는 마음으로 벌금을 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는 자신의 모자를 벗어 장내에 돌리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모두 47불이 모금되어 즉시 가난한 노인에게 건네졌습니다. 이에 감격한 노인은 눈물을 흘리며 법정문을 나섰다고 합니다. 사실 우리는 바르게 살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의 허물을 보고 정죄하고 판단할 때가 많습니다. 이 얼마나 모순된 행위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겨주심으로 우리가 용서함을 받고 구원을 얻었으니 우리도 마땅히 다른 사람에게 긍휼과 자비를 베풀어야 할 것입니다.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본받는 것이며 이를 보시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우리와 함께 하여 주실 것입니다.

 

3.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입니다.

겸손히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은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엄청난 특권입니다. 특히 공의를 행하고 인자를 사랑하는 자가 하나님께 받는 특권이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공의를 행하고 인자를 아끼고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 분은 자기 마음을 기쁘게 하는 자를 결코 혼자 내버려 두시지 않습니다. 항상 그와함께 하시고 위로하시며 힘이 되어 주기를 기뻐하십니다. 우리는 이 진리의 가장 완벽한 증거를 예수님에게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요 8:29)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나는 항상 그가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 예수님은 항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을 행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를 혼자 두시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남보다 바르게 살 때 교만해지기 쉽습니다. 또 남에게 자비를 베풀며 사는 생활이 세상에 알려지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교만해지기 쉽습니다. 심지어 남보다 특별한 은혜를 많이 받았을 때에 더욱 교만해지기 쉽습니다.

 

고린도후서 12장에 보면, 사도 바울 같은 경우 하나님의 계시를 많이 받고 3층천까지 올라가 신비한 하나님의 세계를 목격하였습니다. 그런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교만한 마음이 생기려 했는지 모릅니다. 이때 사도 바울을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육체의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보내어 사도 바울의 육신을 쳐서 병들게 함으로 약하게 만드셨습니다. 그리하여 은혜받은 것으로 인해 교만해지지 않도록 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남보다 은혜를 많이 받았을 때 교만해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교만한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을 도적질하고 모든 영광을 자신이 받으려고 합니다. 그러다가 하나님과 원수가 됩니다. 교만한 사람은 자신의 부족과 허물을 모릅니다. 남들의 충고도 잘 받아들이지 않게 됩니다. 더구나 책망조차도 받지 않게 되면 자신의 허물을 더더욱 깨닫기 어렵게 됩니다. 교만한 사람의 실체를 알아보면 자기가 주인인 사람입니다.

 

다시말하면 하나님이 계실 곳이 없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의 판단 기준이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교회생활도 사업도 가정도 모든 것의 판단 기준은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문제는 그러면서도 자기의 선택이 가장 옳았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겸손은 무엇입니까? 겸손은 범사에 하나님은 인정하고 자기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왔으니 하나님이 주인이십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이렇게 겸손하면 주권이 하나님께 있으므로 하나님의 뜻을 기뻐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사람이 됩니다. 그러므로 무엇이 많다고 교만하지 않습니다. 사업이 잘 되든지 생각했던 것이 잘 되든지 결코 자기를 자랑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나타낼 뿐입니다.

 

그러므로 겸손한 마음을 가진 사람은 자신의 허물을 알고 부족을 압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하나님의 축복인줄 알아서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립니다. 겸손한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잠시도 살 수 없음을 늘 고백하며, 항상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감사하며 삽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하면 무엇보다도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과 동행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특별히 이번에 임직받으시는 직분자 여러분, 더 낮아져야 합니다. 더 겸손해야 합니다.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주시는 힘으로 사명을 감당하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온 것 주의 크신 은혜입니다. 은혜 아니면 우리가 어찌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남을 판단하지 말고 자신이 더 낮아져서 하나님을 섬기듯 이웃을 섬기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면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행하시는 성도가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우리 모두는 단순히 교회에 나와 예배만 드리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순종하는 삶을 살지 않으면서 교회의 문턱만 닳게하는 그러한 예배자들을 가장 싫어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배를 드릴 때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일까를 생각하고, 어떻게 그 열매를 맺을까 궁리하고 다짐하며 세상을 향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이 시간, 주의 성령이 우리 모두에게 임하셔서 십자가의 능력을 체험케 해주시고 의를 위해서 생명이라도 바칠 수 있는 용기와 꿈을 심어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진정한 예배는 예배당을 나서는 바로 그순간부터 시작된다는 사실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가 하니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행함으로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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