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의 간증(2)(행 22:11-21)
간증이란 자신의 신앙적 체험을 고백함으로써 하나님의 존재를 증거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간증을 듣다보면 하나님은 찾아볼 수가 없고 자신의 성공사례를 발표하는듯한 느낌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간증의 주인공은 내가 아니고 하나님이십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자신이 수고하였으나 나의 공로가 아니라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자수성가를 한 입지전적인 인물들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만나기가 힘든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자신이 피땀으로 이룬 성과라고 생각하기에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지 못하고 자신의 노력을 더 신뢰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 그가 어느날 진정으로 하나님을 만나고 나서 고백합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은혜중의 은혜요 복중의 복인 것입니다.
작은 돌맹이로 골리앗을 넘어뜨린 다윗이나 지팡이 하나로 홍해를 가른 모세가 위대한 것이 아니라 만군의 하나님이 위대하시며 찬송과 영광을 받는 것이 마땅한 도리입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교만한 자를 대적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자는 결코 교만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 주권자이십니다.
그러므로 이 모든 것이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하나님의 계획대로 이끌어 가는 것입니다. 결코 낙심하거나 교만할 이유가 없습니다. 사도바울이 그랬습니다. 아무리 어려운 일이 다가와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러기에 온몸이 피투성이가 될 정도로 매를 맞고 쇠사슬에 메여 로마군병들에게 끌려가면서도 자기를 죽이려는 핍박자들에게 가던 길을 멈추고 할 말이 있다고 한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두 가지 부분으로 간증이야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첫번째는 예수만나기 전에 자신의 옛모습이었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자기를 죽이려는 유대인들과 똑같은 사람이었다고 고백을 합니다. 자기도 하나님의 도에 열심했기 때문에 예수믿는 사람들을 죽이는 데 앞장섰던 폭행자요 핍박자였다고 고백합니다. 그런 그가 다메섹도상에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거기서 참진리를 발견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인생을 달라졌습니다.
여기까지가 지난 주에 살펴본 바울의 간증입니다. 계속해서 오늘 본문은 예수님을 만난 후 변화된 삶이 대한 이야기입니다. 자기를 죽도록 두드려 때려서 피투성이 만들었던 저들을 향해 바울은 거침없이 자신의 지난날의 모습과 오늘 변화된 자신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직접 경험한 생생한 자기 간증이었습니다. 간증의 핵심은 언제나 현재형입니다. 예수님 만난 이후의 얘기가 있어야 됩니다. "예수님 만나서 내가 오늘 이렇게 변했습니다. 내 생각이 이렇게 바뀌었습니다. 내 가치관이 바뀌었습니다. 지금 바울은 그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1. 앞을 보지 못하게 된 바울(11-13절)
11-13절, “나는 그 빛의 광채로 말미암아 볼 수 없게 되었으므로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의 손에 끌려 다메섹에 들어갔노라 [12] 율법에 따라 경건한 사람으로 거기 사는 모든 유대인들에게 칭찬을 듣는 아나니아라 하는 이가 [13] 내게 와 곁에 서서 말하되 형제 사울아 다시 보라 하거늘 즉시 그를 쳐다보았노라”
빛의 광채 때문에 눈이 멀어서 볼 수 없게 된 바울이 함께 가던 사람의 손에 이끌려서 다메섹에 가서 아나니아를 만나 다시 눈뜨게 되었습니다. 사도행전 9장에서는 아나니아가 안수하여 보게 했다고 했지만 오늘 본문에서는 그런 설명은 생략이 되어 있습니다. 12절에 아나니아에 대하여 '경건한 사람'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경건한 사람이란 표현은 기독교로 개종하기 전까지는 유대교의 정통 신앙을 잘 지키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바울은 이어서 아나니아가 진정으로 경건한 사람이었음을 강조하기 위하여 모든 유대인들이 그를 칭찬했다는 말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바울은 왜 이처럼 아나니아에 대하여 좋게 설명하고 있습니까? 유대인의 관점에서 보아도 흠없고 온전한 신앙을 가진 아나니아와 자신의 회심의 과정을 강조하여 관련시키는 이유가 있습니다. 바울의 회심에 대하여 경건한 유대인이요 칭찬받는 유대인이었던 아나니아도 인정하였으니 "당신들도 인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냐?"하는 것입니다.
가끔 광고를 보면 사회 저명 인사가 나와서 어떤 물건 좋다는 이야기합니다. 그 사람의 신뢰도 만큼이나 물건을 믿어도 좋다는 이야기 아닙니까? 아나니아를 믿는다면 내 회심 사건도 의심없이 믿을 수 있는 것 아니냐는 말씀입니다. 11절의 바울로 갑니다. 사도 바울은 빛을 본 후에 그 빛의 광채가 너무나 강렬하여 순식간에 시력을 잃었다고 했습니다. 너무 강한 빛을 보면 눈에 이상이 오는 것 당연하지 않습니까? 바울은 갑자기 시력을 잃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같이 가던 사람들의 손에 이끌리어 다메섹으로 갑니다.
성도 여러분. 여기서 우리는 몇 가지 영적인 교훈을 깨닫게 됩니다. 바울은 지금 다메섹으로 가던 중이었습니다.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인정한, 예수 믿는 사람들을 체포하여 예루살렘으로 데려가려는 데 필요한 공문을 가지고 사람들까지 인솔해서 당당하게 가고 있습니다. 공부도 많이 해서 율법과 학문에 대한 자부심도 대단했고, 난지 팔 일 만에 할례받고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이라는 정통 유대인으로서의 자부심도 대단했고, 세상과 유대교를 혼란시키는 기독교도들을 잡아 벌주는 것이 하나님께 가장 충성하는 일이라는 자부심도 대단했습니다.
당당하게, 기세 좋게 갑니다. 그런 그가 다메섹도상에서 주님을 만나고 강한 광채로 인해 맹인이 되었습니다. 이제 자기 능력으로는 도저히 다메섹까지 갈 수가 없습니다. 하는 수없이 함께 가던 사람의 손을 잡고 이끄는 대로 가야 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앞을 보지 못하는 맹인이 되고 보니 지식도, 유대인으로서의 자부심도 도움이 못 되었습니다. 대제사장과 장로들의 공문이 바울에게 무슨 소용입니까?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갑자기 바울과 같은 경우를 당했다면 무엇이 여러분에게 능력이 되겠습니까? 무엇이 의지가 되겠습니까? 학력입니까? 재력입니까? 인간 관계입니까? 곰곰이 생각해 보세요. 그러나 생각해 보면 바울이 시력을 잃고 세상 것 보지 못하는 동안 오로지 하나님을 향하여 귀가 열리고 눈이 뜨여졌습니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으니까 당장은 불편했지만 내면에서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신령한 것에 눈이 열리기 시작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세상에 대하여 눈을 너무 크게 뜨고 있지 않습니까? 세상에 대하여 너무 귀를 넓게 열고 있지 않습니까? 세상 것이 너무 크게 보이고, 세상 음성이 너무 크게 들리면,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법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는 법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앞을 보지 못하면서 정말로 하나님을 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세상에 대하여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면서 하나님을 정말로 만나게 됩니다.
성도 여러분. 코로나시대에 세상 일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 자식도 마음대로 안 돼요. 건강도 뜻대로 안 돼요. 사업도 생각대로 안 돼요. 세상에 무엇 하나 시원하게 되는 것이 없습니다. 속상합니다. 답답합니다. 그러나 성도 여러분. 바로 그 순간이 하나님께 대하여 눈이 뜨여지고 귀가 열려지는 순간이라는 사실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내 힘으로 할 수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내가 무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내 발로 스스로 걸을 수가 없고 누군가의 손을 잡아야만 걸을 수 있다고 깨달아질 때가 하나님을 정말로 만날 때가 아닙니까? 병원에 입원해서 링겔 주사 꽂고 꼼짝 못하고 누워있을 때 그때부터 자신이 누구인지를 생각하며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는 고백합니다. 성도 여러분. 때로 세상에 대하여 눈감는 일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그래야 정말로 사랑의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만나시기 바랍니다.
2. 바울을 택한 이유(14-16절)
바울이 다메섹도상에 예수님을 만나서 두 가지를 질문했다고 했습니다.1)주여, 당신은 누구십니까? 2)주여 내가 무엇을 하리이까? 그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을 아나니아가 주고 있습니다. 다시말하면 아나니아가 지금 바울에게 하나님께서 택한 이유를 설명합니다.
14-15절 “그가 또 이르되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이 너를 택하여 너로 하여금 자기 뜻을 알게 하시며 그 의인을 보게 하시고 그 입에서 나오는 음성을 듣게 하셨으니 [15] 네가 그를 위하여 모든 사람 앞에서 네가 보고 들은 것에 증인이 되리라” 하나님께서 바울을 택한 이유에 대해서 네 가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네 가지 원리는 바울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를 택하신 하나님의 의도이고 우리가 깨닫고 지켜야 할 신앙 생활의 원리입니다.
1)하나님의 뜻을 알게 하셨습니다.우리도 나를 향하신 하나님 뜻 바로 알고 살아야 합니다.
바울은 지금까지 하나님 뜻대로 산다고 믿었습니다. 율법을 잘 지켰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들이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보니 그것은 내 생각이었습니다. 그것은 내 생각에 사로잡혀서 하나님의 뜻을 잘못 알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생각하는 하나님의 뜻은 어떻습니까? 히브리서 6:17을 보면, 하나님의 뜻은 변치 않습니다. 이사야 25:1을 보면, 하나님의 뜻은 꼭 성취됩니다. 하나님의 뜻은 내 주관적 판단이나 기분에 따라 왔다갔다 하지 않습니다.(사 55:8-9)"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9]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여러분, 신앙생활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뜻을 아는 것입니다.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하나님 뜻이라면 참아낼 수 있지 않습니까? 아무리 힘들어도 하나님 뜻이라면 견뎌낼 수 있지 않습니까? 문제는 하나님 뜻이냐? 아니냐? 분명히 아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내 생애
"내게 주신 사명(mission)이 무엇이냐?"를 바로 아는 것입니다. 평생 예수 믿어도 이것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산다면 참으로 답답한 일입니다. 언제나 "주여, 무엇을 하리이까?" 기도하며 내게 주신 하나님 뜻 바로 깨달아 감당하시기 바랍니다.
2)그 의인(예수 그리스도)을 보게 하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 바라보고 살아야 합니다.
'그 의인'은 메시야에 대한 별칭으로 유대인들이 죄인으로 여겨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예수가 바로 의인이고 메시야이셨음을 말해 줍니다. 바울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체험은 매우 중요합니다. 히브리서의 저자는 (히 1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예수님은 믿음의 시작이요 또 믿음을 온전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 예수님은 그 앞에 있는 영원한 기쁨, 부활의 승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시고 부끄러움도 개의치 않으셨습니다. 그 예수님을 우리에게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그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바울처럼 우리도 그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만나 체험이 있습니까? 어떤 분들은 말씀 보다가 주님을 만나기도 합니다. 말씀 듣다가 주님을 만나기도 합니다. 기도하다가 주님을 만나기도 합니다.
부흥회 참석했다가 주님을 만나기도 합니다. 어느 때 어느 곳에서 어떤 경우든지 주님 만나는 체험은 누구에게나 반드시 필요합니다. 사도 바울을 보십시오, 사도바울은 주님 만나기 전과 주님 만난 후의 삶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먹고 입고 사는 것이야 주님 만난 사람이나 만나지 않은 사람이나 크게 다를 것이 없겠지만, 분명히 달라지는 것이 있습니다. 주님 만난 사람은 삶의 목적이 달라집니다. 이 땅에 살아가는 이유가 분명해집니다.
제가 가끔 이야기를 드린 것처럼 젊었을 때는 성공지향적으로 살아왔습니다. 어떻게든지 목적을 이루어 성공해야겠다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러나 삶을 살다보면 하프타임을 만나게 되면 결코 무엇을 성취하는 것이 전부가 아님을 알게 됩니다. 결국 인생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어떻게 살아야 의미있는 삶을 살 것인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 때 나의 창조자이시며 구원자이신 하나님, 나의 통치자이신 하나님을 만나면 내가 이 땅에 존재하는 이유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살아가는 이유를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주님을 만나십시요. 확신을 가지십시요.(시 107:9) “그가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 (시 143:6) “주를 향하여 손을 펴고 내 영혼이 마른 땅 같이 주를 사모하나이다(셀라)”
주님을 만날 때 비로소 분명하고 확신있는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바울만이 아니라 나도 우리 모두가 신앙생활하면서 주님 만남의 경험이 있어야 합니다.
3)주님 음성을 듣게 하셨습니다.우리도 주님 말씀을 들으며 살아야 합니다. 왜 말씀을 들어야 합니까? 하나님 말씀은 살아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은 힘이 있습니다. 사람 속을 꿰뚫어 혼과 영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면 우리영혼을 새롭게 합니다. 마음의 품은 생각과 의향을 가려냅니다(히4:12). 하나님 말씀은 성도를 자유케 합니다. 요 8:32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말씀은 병든 자를 치료하십니다(시 107:20). 말씀은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됩니다(딤후 3:15-17). 중요한 이유가 또 있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계속적으로 말씀을 들어야 믿음이 성장합니다. 믿음이 자라기 원하십니까? 말씀 읽으세요. 말씀 들으세요. 기도도 말씀이 내 속에 있을 때 더 힘이 있고 응답도 빠릅니다. 말씀이 내 속에 있어 믿음이 분명해지면 기도도 더 분명해지고 중언부언하지 않습니다. 내 주장만 하지 않습니다. 어떤 기도를 응답해 주시는 지도 알게 됩니다. 그러니 응답도 더 분명하지 않겠습니까? 성도 여러분. 말씀과 깊이 만남으로써 분명하고 확신있는 믿음을 소유하시기 바랍니다.
4)모든 사람 앞에서 증인되라. 우리의 궁극적 사명은 두 가지입니다.
①하나님 영광을 위해서 살라는 것입니다. (고전 10:31)“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②예수의 증인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예수 증인의 삶은 결국 생명을 살리는 일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나를 통해서 죽어가는 영혼을 살리는 일입니다. 이 일을 위해서 에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사도바울의 고백을 살벼보았지만(행 20:24)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복음의 증인, 예수의 증인되는 삶을 사는 것이 궁극적인 사명인 것입니다. 아나니아는 바울에게 분명히 말합니다. '당신은 모든 사람 앞에서, 그분을 위하여, 당신이 보고 들은 것을 증언하는 증인이 될 것입니다' 바울이 하나님 뜻을 깨닫고, 주님 만나고 말씀 듣고 하는 모든 일의 궁극적 목적은 "증인이 되라"는 것입니다. 증인은 증거하는 사람입니다.
무엇을 증거하라는 말씀입니까? "보고 들은 것" 직접 경험한 것, 체험한 것을 증거하라는 것입니다. 어떤 사상을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개인의 신념을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듣고 본 바를 전하는 것입니다. 바울만 그렇겠습니까? 우리 모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있는 최고의 것은 전도입니다. 전도란 무엇입니까? 단순히 '교회에 나오세요. 예수 믿으세요' 하는 것으로는 부족합니다.
가장 확실한 전도는 예수 믿기 전과 예수 믿은 후의 차이, 내가 만난 예수, 내가 체험한 하나님 사랑을 내 삶을 통해 생생하게 전해야 합니다. '예수 믿고 이렇게 변화됐다' '예수님께서 나를 이렇게 건지셨다. 이렇게 구원하셨다' 생생한 자기 체험을 전하는 것이 제일 효과적입니다. 올해도 벌써 년말을 향해 다가가고 있습니다. 코로나로 인해 어렵고 힘든 삶을 살았지만 그래도 포기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사명입니다.
우리에게 맡겨주신 영혼, 우리 가정식구들, 가까운 이웃들에게 이 생명의 복음을 증거함으로 저들을 구원해내는 일에 힘쓰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여러분에게 이 교회의 지체로 삼아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 교회당의 빈 자리를 채우는 일입니다. 평생 전도 한번 못하신 분들이 있다면 회개해야 합니다. 예외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만나 구원받았다면 내가 만난 예수를 증거하면 성령이 역사하십니다. 나를 구원하신 성령님께서 저들도 구원하시기를 원합니다. 이 생명의 복음을 증거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예루살렘을 떠나라(17-21절)
17-21절, “후에 내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성전에서 기도할 때에 황홀한 중에 [18] 보매 주께서 내게 말씀하시되 속히 예루살렘에서 나가라 그들은 네가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말을 듣지 아니하리라 하시거늘 [19] 내가 말하기를 주님 내가 주를 믿는 사람들을 가두고 또 각 회당에서 때리고 [20] 또 주의 증인 스데반이 피를 흘릴 때에 내가 곁에 서서 찬성하고 그 죽이는 사람들의 옷을 지킨 줄 그들도 아나이다 [21] 나더러 또 이르시되 떠나가라 내가 너를 멀리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 하셨느니라”
바울은 후에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성전에 가서 기도했습니다. 기도할 때 하나님을 만나는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환상 중에 주님이 나타나셔서 바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18절을 보면“보매 주께서 내게 말씀하시되 속히 예루살렘에서 나가라 그들은 네가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말을 듣지 아니하리라”바울은 예루살렘에서 예수 만난 경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증거하고 싶었습니다.
19절 20절을 보면 예루살렘에서 예수 믿는 사람들을 가두고 때렸던 일, 스데반이 순교할 때 찬성하고 죽이는 사람들의 옷을 지켰던 일이 못내 마음에 걸렸고, 한걸음 더 나아가서 그들에게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증거하고 싶었습니다. 이것이 바울의 생각이요 계획이었습니다. 이해할 수 있지 않습니까? '내가 예수 믿던 사람들에게 못되게 굴었던 것, 너희도 알지 않느냐? 그런데 그것이야말로 크게 잘못된 일이니 너희도 예수 믿어라' 이 말이 꼭 하고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뜻은 달랐습니다. 18절에서 '속히 예루살렘에서 나가라' 21절에서 '내가 너를 이방인에게 보내리라' 바울은 예루살렘이 아니라 이방인에게 가서 증거하는 것이 내가 네게 준 사명이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바울 생각은 예루살렘이었지만 주님의 계획은 이방 땅 이방인에게 가라는 것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때때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예상과 다르게 명령하실 때가 있습니다. 사도행전 10장에서 베드로는 환상 중에 보자기에 쌓인 네발 달린 짐승, 기는 것, 나는 것을 먹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자신이 살아왔던 율법대로라면 당연히 그래야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더 적극적으로 말씀드리면 바울이 예루살렘 중심으로 전도하고 싶어했다면 하나님께서는 전도의 영역을 넓히고 계십니다.
이방 땅으로 가라. 더 멀리 가라. 감히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이방인 선교를 명하고 계십니다. 성도 여러분. 무엇을 배워야 합니까? 지경을 넓혀 가시기 바랍니다. 새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 새 일 행하는 것, 영혼 구원하는 것을 기뻐하시는 하나님. 분명히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사도행전 전체는 영혼구원의 역사인데 영혼구원의 역사는 반드시 성령께서 역사하셔야 했습니다. 우리 양문의 성도들도 성령 충만하여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영혼구원 사역에 동참하셔서 생명을 살리고 생명을 고치고 생명을 세우는 생명사역에 쓰임받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바울은 지금 자기를 죽이려고 이를 갈고 있는 대적자들을 향해서 내가 만난 예수를 증거하고있습니다. 예수만나기 전의 자신의 모습은 지금 저들과 똑같았습니다. 그러나 다메섹 도상에 예수님을 만난 후 참 진리를 발견했습니다. 지금까지 자신이 얼마나 잘못된 삶을 살아왔는가를 깨달았습니다. 앞을 보지 못하고 다메섹에 가서 아나니아를 만나서 비로소 눈을 떴습니다.
이제 그가 남은 생애를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사명을 알게 된 것입니다. 내가 무엇을 하리이까라고 질문하던 바울에게 그 해답을 주셨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복음을 증거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을 떠나라는 것입니다. 복음의 영역을 예루살렘에서 이방으로 옮겨가기를 원하셨습니다.
행1:8절 말씀처럼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는 말씀처럼 그렇게 복음이 증거되기를 원하셨습니다. 또 바울에게서 배우는 신앙생활 원리가 있습니다.-하나님 뜻 알고, 주님 만나고, 말씀 듣고, 증거하는 것. 바울은 자신이 생각치 못한 이방인의 사도가 되어 이방세계에 복음을 증거하도록 보내집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귀한 것, 예수 전하는 것입니다.
내 삶에서 예수 향기가 나고 내 삶에서 살아 역사하시는 예수가 보이고 내 삶 속에서 나도 저 사람처럼 예수 믿어야겠다고 생각하고 결심하는 많은 사람들이 생기도록 최선을 다하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