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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문의 메시지

성탄의 참된 의미(빌2:5-11)

작성자야베스|작성시간21.12.25|조회수442 목록 댓글 0

성탄의 참된 의미(빌2:5-11)

 

오늘은 우리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을 기뻐하면서 하나님께 감사하며 경배하는 성탄절입니다. 인류의 범죄이후 구약 4천년 역사속에서 수많은 예언자들을 통해서 메시야가 여자의 후손으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다는 예언이 성취된 것입니다. 이것을 신학적으로 성육신사건이라고 말합니다. 성육신 사건은 천지 창조 이래 가장 큰 신비의 사건이며, 가장 위대한 사건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피조물인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찾아온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인 것입니다. 인도에 한 선교사가 힌두교 승려를 전도하기 위해 가깝게 지냈습니다. 어느 날 두 사람이 함께 길을 가는데 선교사가 실수로 개미굴을 밟았습니다. 이것을 본 힌두교 승려는 매우 놀란 얼굴로 압사당한 개미들을 걱정하면서 선교사를 힐책했습니다. "이렇게 많은 살생을 범했으니 어찌하겠소?" 선교사는 어떻게 해야 개미한테 사과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승려는 "당신이 죽어서 개미가 되어 개미한테 직접 사과하시오"라고 말했습니다. 힌두교에서도 불교처럼 윤회설을 믿으니까 사람이 개미가 되고 개미가 소가 되고 소가 사람이 될 수도 있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 말을 들은 선교사가 크게 깨달은 바가 있어 "아, 바로 그렇습니다. 그래서 그 이유때문에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라고 성육신을 설명했다고 합니다.

 

개미와 이야기하려면 인간이 개미가 되어야 하듯, 사람과 이야기하고 사람을 구원하려면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셔야 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대화가 통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이 되셨다고 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성육신입니다. 성육신의 의미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하늘의 영광을 버리시고, 천한 육신의 몸을 입으셨다는 것입니다. 또하나는 우리의 진정한 본이 되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기 위해 예수님을 본으로 삼게 하신 것입니다. (빌 2: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러므로 구원받은 우리가 성탄의 참된 의미를 깨닫고 예수님을 닮아갈 때 비로소 진정한 성탄을 맞이할 수 있는 것입니다. 본문말씀에서 이 성탄의 참된 의미를 세 가지 단계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1. 첫 단계가 자기를 비웠다는 것입니다(6-7절).

본문 7절에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이 '비웠다'는 말은 영어로는 empty입니다. 아주 텅비었다는 말입니다. 자기를 비웠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됨을 비웠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셨습니다. 하나님으로서 누릴 수 있는 모든 특권과 영광을 포기하셨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성육신의 시작입니다. 그분은 비천한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창조주의 옷을 벗으셨습니다.

 

그리고 영원에서 순간으로, 무한에서 유한으로, 영광에서 초라한 모습으로, 왕에서 종의 모습으로, 창조자가 피조물의 모습으로, 철저하게 자기 비웠습니다. 자기 부정입니다. 가장 낮아진 자리로 내려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비웠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성탄을 맞이하면서 우리는 자기를 비우신 예수님처럼 우리 안에 가득한 욕심과 자아를 버려야 진정한 성탄을 맞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첫번째 성탄절 예수님은 어디에서 탄생하셨습니까? 눅2:7 "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그 어린 주예수 눌자리 없어 그 귀하신 몸이 구유에 있네 저 하늘의 별들 반짝이는 데 그 어린 주 예수 꼴위에 자네" 비극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찾아 오셨지만 누우실 곳이 없어 구유에 나셨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굉장히 낭만적으로 크리스마스를 맞이하지만 실제적으로 이 땅에 오셨을 때는 참으로 참담한 현실이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주님이 오시면 우리의 형편은 어떨까요? 잘 맞이하실 수 있겠습니까? 요한계시록에 보면 7교회에 보낸 편지가운데 종말의 교회를 상징하는 라오디게아교회에 찾아오신 예수님은 교회당 문밖에 계신 예수님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교회당 문을 열어주지 않아서 문으로 들어오시지 못해 문밖에 서 계셨다는 것입니다.

 

저들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우리의 실상을 보지 못한다면 우리 역시 주님을 맞이하기에는 너무 세상 것에 부요하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의 상태는 내 속에 내가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내 잇속부터 먼저 챙기고 내게 유익한가를 생각하니까 욕심이 가득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자기를 비우지 않으면 주님이 기뻐하시는 성탄을 맞이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5장에 팔복가운데 첫번째 복이 무엇입니까? 마 5: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심령이 가난하다는 말을 심령을 비웠다. 욕심을 비웠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세상 것으로 채우는 일에 너무 급급합니다. 그래서 가져도 가져도, 끝없은 욕망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도 그 은혜를 깨닫지 못하고 삽니다.

 

자기를 비울 때에 놀라운 은혜를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그릇에 비유했습니다.(딤후 2:21)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고 말씀합니다. 우리 모두는 그릇에 비유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그릇의 재질은 다양합니다. 금그릇도 있고 은그릇도 있고 토기그릇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인에 쓰시기에 합당한 그릇은 바로 깨끗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심령의 그릇을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정결하게 씻어 보배로운신 예수 그리스도를 담는 성도가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은 한마디로 하나님의 권리를 포기하셨습니다. 주권 행사를 포기하셨습니다. 여러분, 왜 예수님이 포기하셨습니까? 비천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스스로 비우셨다는 말입니다. 생명을 살리고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 자기의 권리를 포기한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성탄의 참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탄을 맞이하면서 우리 주님의 비우심을 배워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너무 권리만을 따지지 않습니까? 내가 누군데, 나를 이렇게 무시해, 내게 맡겨진 책임은 잊어버리고 내 권리만을 주장하는 오늘 우리의 현실속에서 진정으로 주님을 기쁘시게 맞이하는 사람은 바로 자기 권리를 내려 놓습니다. 주님의 영광을 맞이하기 위해서 내 영광을 내려놓습니다.

 

주님, 지금 나를 비웠습니다. 욕심도, 세상욕망도, 하고싶은 것도 내 자존심도 다 주를 위해 내려놓습니다. 주장하고 싶은 내 권리도 내려놓습니다. 주님, 이제 제게 오시옵소서. 지금 지금 내가 지고 있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자기 욕심과 자기 권리를 다 주님앞에 내려놓고 이땅에 오신 주님을 진정으로 맞이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하여 오늘 성탄절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왕으로 모신 진정한 성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두번째 단계는 자기를 낮추는 것입니다(6-8절).

예수님은 자기의 마음을 비우는데서 끝나지 않고 실질적으로 자기를 낮추었다고 하였습니다. 6-8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여기서 종의 형체를 가졌다는 말은 종으로 이 땅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피조물인 사람이 되신 것입니다. 이것을 신학적으로는 성육신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비운 것만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겸손은 저 하늘높은 곳에서 이 낮은 땅까지 낮아지신 것입니다. 더 낮아질 곳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실 때 마굿간에 태어나셨습니다. 나사렛이라는 작은 시골 동네에서 자랐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남의 무덤에서 장사되었습니다. 한결같이 낮아지심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하늘에서 땅까지 낮아지셨습니다. 의인이 죄인이 되신 것이요, 주인이 종이 되신 것이요, 영광을 버리고 부끄러움을 입으신 것이요, 왕자가 거지로 변신하신 것이요,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것입니다. 창조주가 피조물이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현대사회는 자기 PR시대이기에 자기를 낮추기보다는, 오히려 자기를 높이고 있지는 않습니까? 성탄은 이 땅에 낮아지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봄으로 그동안 우리가 잊어버린 겸손을 되찾게 되는 기회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영국의 기독교 문학가 C.S. Louise는 이런 진지한 말을 합니다."만일 어떤 사람이 겸손해지고자 한다면, 내가 그에게 말할 수 있는 첫 단계는 교만하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라고 말합니다.

 

내가 교만하다는 것을 깨닫기만 해도 우선은 덜 교만해질 수 있습니다. 진정한 겸손은 하나님이 누구이시며, 내가 누구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의 창조자이시며 나의 구원자이십니다. 나는 그의 피조물이며 그의 종입니다.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은 그가 내게 맡겨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바로 아는 성도의 고백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내가 사나 죽으나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겸손입니다.

 

그 전능하신 하나님이 아무 것도 모르는 어린아이로 시작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창조주 하나님이, 전능하신 분이 모든 것을 새롭게 배워야 하는 어린아이로 다시 태어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이 얼마나 엄청나고 놀라운 일입니까? 구약에서 하나님이 인간을 만나실 때는 무서운 천둥소리가 들리거나, 강한 바람이 불거나, 화염 속에서 나타나셨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두려움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신약에 나타난 하나님의 모습은 무서운 모습이 아니라 천진난만한 어린아이로 태어나신 것입니다. 그것도 말구유에 놓인 아기 예수님, 만물의 창조자가 힘없고 나약한 어린아이로 오셨다는 말입니다.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의 아들이 그 화려한 옷을 벗고 가장 낮아진 모습으로, 비천한 인간을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성육신을 통해서 하나님은 자신과 피조물 사이에 있는 커다란 장벽을 무너뜨리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장벽을 제거하시면서, 자신이 말할 수 없는 고통과 모욕과 아픔과 상함의 위험을 감수하셔야만 했습니다.

 

우리와 만나시고, 우리를 사랑하시기 위해, 우리와 같은 사람의 모양을 취하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으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죄인들을 가까이 하시고, 병든 자들을 치료해주시고, 상한 심령들을 위로하시고"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요 13:1)고 약속하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연약함을 다 체휼하시고, 우리의 눈물과 슬픔과 고통을 아셨습니다.

 

다미안 신부의 이야기를 들어 보셨습니까? 그는 평생을 하와이의 몰로카이라는 섬에서 나병 환자(문둥병환자)들과 함께 살다가 죽은 사람입니다. 그가 처음에 나병환자들이 사는 몰로카이 섬을 지나다가 그들이 불쌍한 생각이 들어서 그들에게 전도하기로 결심합니다. 그래서 많은 구호물자를 가지고 섬을 방문하여 여러 해 동안 전도했으나 그들이 받아들이지를 않습니다. 건강한 사람이 사치로 돕는 것은 필요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이처럼 끝까지 마음문을 열지 않자 다미안은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하나님, 나에게도 나병을 주십시오." 결국 그는 나병에 걸리고 맙니다. 그리고 다시 나병환자들을 찾아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 우리 나병환자들을 하나님이 사랑하십니다. 우리가 되었을 때 그들 비로소 마음의 문을 열어 주더랍니다. 건강한 사람이 나병환자의 마음을 열기 위하여 똑같은 환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전에도 환자들에게 먹을 것을 줄 수도 있고 치료를 해 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과 하나될 수 없었습니다.

 

결국은 다미엔신부가 자신도 나병환자가 되고서야 저들과 하나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이것이 복음입니다. 하나님은 높은 보좌에 팔짱을 끼고 앉아 사람들이 구원받기를 기다리는 분이 아닙니다. 이 땅에 사람이 되어 오셨습니다. 그러기 위해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취하시기 위해 보좌를 떠나서 본체를 버리시는 일이었습니다. 종의 모습으로, 가장 가난하고 천한 사람으로 나타나셔야 했습니다.

 

교만한 자에게는 하나님의 세계가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 자신을 철저히 깨트려야 십자가의 도가 깨달아지고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처럼 철저하게 자아를 깨트려 버렸습니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취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낮아지심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진리는 그런 의미에서 매우 역설적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말씀 하나를 소개하겠습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막 10:44)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이번 성탄절을 통해서 예수님처럼 낮아지심의 진리를 몸으로 체험하고 종이 되는 삶을 사는 성도가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세 번째 단계가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9-11절)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찾아오신 예수님은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취하시고 하늘 높은 곳에서 이 땅까지 낮아지셨습니다. 억지로가 아니라 자원한 낮아지심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머물러 있지 않으셨습니다. 마지막으로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구원하심은 바로 십자가에 있었습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 12:24) 하셨습니다.

 

하나의 씨앗이 싹을 내기 위해서는 껍질을 깨트려야 합니다. 꽃은 열매를 맺기 위해 자기 꽃잎을 떨굽니다. 열매는 씨앗이 되기 위해 스스로 썩어야 합니다. 새로운 삶을 위해 자기를 비우고 희생하는 일은 참으로 중요한 일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복종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내가 죽어야 예수님의 생명이 내속에서 살아 역사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십자가속에 생명의 비밀이 담겨 있습니다. 죽어야 산다는 것입니다. 죄의 몸이 죽어야 의의 몸으로 다시 사는 것입니다. 내가 죽는 만큼 주님이 사십니다. 주님의 영광이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신앙은 죽는 데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고전 1:18절에서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씀합니다. 십자가는 장식품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처절한 죽음입니다. 자기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죽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을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내가 하고 싶은 것, 육신이 하고 싶은 것을 희생하고 하나님의 원하시는 것에 나의 삶을 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하게 보입니다. 이 좋은 시대에 왜 도대체 그렇게 고리타분하게 살아야 하냐고 사람들이 조롱합니다. 세상이 핍박합니다.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이 싫어합니다. 몽골 선교사인 이용규선교사의 이야기를 읽어보니까 서울대학교, 하버드 대학교 박사학위를 받았지만 모든 좋은 자리를 다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 위해 몽골선교사로 자원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하나님의 뜻에 자기를 다 내려놓았습니다.

 

무엇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습니까? 십자가의 도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도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여러분에게 이런 십자가가 있습니까? 예수님이 왜 이 땅에 오셨습니까? 십자가 지시러 오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과 무리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16:24) 자기 십자가가 있다고 말씀하시면서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아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특별한 사람들만 지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따라가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져야 할 자기 십자가인 것입니다. 이 십자가가 여러분 속에, 삶의 현장에 있습니까? 주님을 위해서 희생하고 내가 날마다 죽노라고 고백하고 있습니까? 십자가는 우리의 생명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이러한 십자가가 죽음을 의미하지만 결코 죽음이 전부는 아닙니다. 십자가를 통해 영원히 죽을 수 밖에 없는 우리가 구원받았습니다. 뿐 만 아닙니다.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십자가의 도가 얼마나 큰 능력이 있는지, (9-11절)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하나님이 세워주신 것입니다. 십자가를 졌더니 하나님이 높혀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핵심 진리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승리자의 모습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예수님의 성탄은 우리에게 커다란 메시지를 주고 있습니다. 바로 성탄은 예수님이 자기를 비어 종이 되신 것입니다. 낮아지심이요, 진정한 겸손입니다. 뿐 만 아니라 진정한 성탄은 죽기까지 복종하는 데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철저히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를 희생하는 것입니다. 내가 죽는 것입니다. 육신의 욕심이 죽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도를 깨닫고 거기에 내 생명을 바치는 것입니다. 놀라운 비밀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었더니 인류의 구원의 길이 열린 것입니다. 뿐 만 아니라 하나님 영광의 보좌우편에 앉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탄의 참된 의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이번 성탄절을 맞이하면서 이 성탄의 참된 의미를 깨닫고 주님이 원하시는 성도, 종의 되어 자기를 비우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만을 따라가는 결단이 있는 성탄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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