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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문의 메시지

에벤에셀의 하나님(2)(삼상7:12-17)

작성자야베스|작성시간21.12.26|조회수821 목록 댓글 0

에벤에셀의 하나님(2)(삼상7:12-17)

 

에벤에셀, 하나님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는 뜻입니다. 올한해도 생각해보면 하나님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습니다. 에벤에셀의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사사시대 말기는 정말 힘들고 암울한 시대였습니다. 왜 그렇게 사사시대가 어렵고 힘든 시대였느냐고 묻는다면 사사기의 핵심 말씀을 보면 알수 있습니다. 삿 21:25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그렇습니다. 지금까지 자기가 최고인 시대입니다. 자기중심으로 모든 것을 결정하고 그것이 정의라고 생각하던 시대였습니다.

 

그러면 가장 행복한 시대여야 하는데 실제로는 가장 힘들고 어려운 시대였습니다. 영적으로 말하면 어둠의 시대였습니다.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기도 하고 블레셋과의 전쟁은 계속되었습니다. 사실 오늘 말씀에 나오는 에벤에셀의 승리를 경험하기 전, 이스라엘은 두 번에 걸친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쓰디쓴 패배를 맛보았습니다. 첫 전쟁에서는 4천명 가량이 전사했습니다.

 

이 전쟁에서 패한 이후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언약궤까지 전쟁에 동원하여 블레셋을 이기려고 했지만 또다시 패하고 말았습니다. 두 번째 전쟁에서는 무려 3만 명의 군사가 전사하고 언약궤마저 빼앗겼습니다. 그 때 엘리 제사장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도 전쟁터에 나갔다가 함께 전사했습니다.(삼상4:10-11) “블레셋사람들이 쳤더니 이스라엘이 패하여 각기 장막으로 도망하였고 살륙이 심히 커서 이스라엘 보병의 엎드러진 자가 삼만 명이었으며 [11] 하나님의 궤는 빼앗겼고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죽임을 당하였더라” 이스라엘은 블레셋과의 전쟁에 연속으로 패하고 하나님의 영광이 떠난 이가봇의 시대를 도래하고 말았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이전 전쟁에서는 언약궤까지 동원했음에도 패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번 전쟁에서는 에벤에셀의 승리를 경험했습니다. 무슨 차이가 있는 것입니까? 싸움의 대상과 장소가 바뀌었습니까? 아닙니다. 싸움의 대상은 여전히 블레셋이었고, 싸움의 장소 역시 에벤에셀이었습니다. 처음 블레셋과 싸울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진을 쳤던 곳이 어디입니까?

 

(삼상 4:1a)“이스라엘은 나가서 블레셋 사람들과 싸우려고 에벤에셀곁에 진치고" 에벤에셀입니다. 블레셋과의 두 번째 전투에서 패배한 장소 역시 에벤에셀입니다.(삼상 5:1)"블레셋 사람들이 하나님의 제를 빼앗아 가지고 에벤에셀에서부터 아스돗에 이르니라" 에벤에셀이라는 지명의 뜻은 '도움의 돌'입니다. 누가 돕습니까?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도우신다는 바로 그 에벤에셀에서 이스라엘은 블레셋에게 두 번에 걸쳐 참패를 당했습니다.

 

3만 4천 명이 전사하고, 제사장 가문이 몰락하고,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언약궤마저 빼앗기는 수모를 당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번에는 이스라엘이 블레셋 군대를 물리치고 승리했습니다. 패배의 아픔을 당했던 바로 그 에벤에셀에서 말입니다. 하나님이 우레를 발하여 블레셋 군대를 어지럽게 하셨고, 이스라엘은 혼비백산해 도망치는 블레셋을 끝까지 추격해 물리쳤습니다. 이후 사무엘은 돌을 취해 에벤에셀에 승리의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패배와 절망의 자리였던 그곳에 '하나님이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며 에벤에셀의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이 과거에는 왜 패배했고, 이번에는 어떻게 승리할 수 있었습니까? 단순합니다.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되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관계를 회복했습니까? 먼저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이 섬겨 왔던 우상들을 철저하게 제거했습니다. 미스바 광장에 모여 종일 금식하며 자신들의 죄를 낱낱이 자백하고 회개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람 사무엘은 적군이 쳐들어오는 위급한 상황속에서도 젖먹는 어린 양을 취해 온전한 번제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여호와께 부르짖어 기도했습니다. 이전에는 자신들의 힘으로만 싸우려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찾지도 않으면서도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승리할 줄 알았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으면서도 미신적으로 언약궤를 동원하면 승리할 줄 알았습니다. 결과는 참담한 패배였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철저하게 회개함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했습니다.

 

다급한 상황속에서도 하나님께만 집중하고 하나님만을 의지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승리의 비결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에벤에셀의 승리를 경험할 수 있었던 또 하나의 이유가 있습니다. 역설적으로 블레셋의 침공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미스바에 모여 종일 금식하며 회개할 때 블레셋 사람들이 쳐들어오지 않았다면, 그들은 하나님이 자신들의 기도에 응답하고 도우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이심을 경험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블레셋이 쳐들어왔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고 우리를 위해 싸우시는' 에벤에셀 하나님을 경험한 것입니다. 물론 블레셋의 갑작스러운 공격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엄청난 공포였습니다. 하지만 이 커다란 위기로 인해 이가봇의 저주가 끊고, 이스라엘은 에벤에셀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 에벤에셀의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그래서 고난이 하나님의 은혜가 된 것입니다. 성도들에게 고난은 우연이 아닙니다. 거기 감추어진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그것을 깨닫고 하나님앞에 엎드려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뿌리부터 새롭게 되는 계기가 된다면 고난이 유익이 되는 것입니다. 시편기자가 (시 119:67,71) [67]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71]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다윗을 보십시오. 다윗은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형들을 만나러 전쟁터에 갔다가 블레셋의 장수 골리앗을 만났습니다. 만일 그때 다윗이 이스라엘 왕과 군인들이 두려워하던 골리앗을 만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저 베들레헴의 한 평범한 목동 소년으로 남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의 인생 가운데 누구도 감당할 수 없는 거인 골리앗을 만났기 때문에,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이스라엘 왕과 군인들앞에 드러냈고 나아가 이스라엘의 위대한 용사가 될 수 있었습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만난 것은 우연이 아닌 그를 향한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입니다.

 

사도바울 역시 죄수의 신분으로 재판을 받으러 로마로 향하다 유라굴로 광풍을 만났습니다. 만약 바울의 생애에 그런 위기가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바울은 계속 죄수의 신분으로 남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유라굴로라는 광풍을 만났기에 배 안의 사람들에게 "안심하라 두려워하지 말라"는 구원의 소망을 주고, 죄수의 신분이던 그가 그 배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사람이 될 수 있었습니다.

 

유라굴로라는 광풍을 만났기에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드러낼 수 있었고, 배에 탄 사람과 멜리데 섬에 있는 많은 영혼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그들을 주께로 인도하는 놀라운 열매를 맺을 수 있었습니다. 유라굴로 광풍이 바울을 바울 되게 만든 것입니다.

 

요셉도 마찬가지입니다.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혔기 때문에 해몽을 통해 애굽의 국무총리가 될 수 있었습니다. 다니엘도 사자 굴에 던져졌기 때문에 바벨론 왕과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만이 살아 계신 참 신이심을 믿게 만들 수 있었습니다. 믿음은 말에 있지 않고 현장에 있습니다. 그냥 현장이 아닌 고난의 현장에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만나는 고난의 현장이 중요합니다.

 

믿음으로 사는 자에게는 고난의 현장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드러내는 은혜의 현장이 될 수 있습니다. 풍랑과 절망의 현장이 당장은 고통스러울지 몰라도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기적과 소망의 현장이 됩니다. 우리의 믿음은 현장을 필요로 합니다. 현장이 중요합니다. 우리 인생 가운데 고난이 없다면 편안한 삶을 살 수는 있겠지만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세상사람들에게 생생하게 드러내는 기적은 결코 경험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에벤에셀의 승리를 경험하고 에벤에셀의 기념비를 세우고 난 이후 누린 에벤에셀의 축복은 무엇입니까?

 

1. 하나님의 손이 함께했습니다.

(13절) “이에 블레셋 사람들이 굴복하여 다시는 이스라엘지역 안에 들어오지 못하였으며 여호와의 손이 사무엘이 사는 날 동안에 블레셋사람을 막으시매”"여호와의 손"은 여호와의 능력, 여호와의 임재를 상징합니다. 이가봇시대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떠났습니다. 그런데 에벤에셀의 은혜로 말미암아 다시 하나님의 손이 함께하는 축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블레셋은 틈만 나면 이스라엘에 쳐들어왔습니다. 이스라엘을 압제하며 땀흘려 지은 곡식과 가축을 빼앗아가기 일쑤였습니다. 그런데 더 이상 블레셋이 이스라엘 지경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여호와의 손이 블레셋을 막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스스로의 힘과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능한 손이 함께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손이 블레셋 사람들의 침입을 막아준 것처럼, 전능하신 주님의 손이 우리와 함께하면 악한 어두움의 영이 우리 안에 들어올 수 없습니다. 아무리 철저하게 준비하고 무장해도 나 스스로의 힘과 능력으로는 하나님이 내게 주신 것들을 온전히 지킬 수 없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하루아침에 건강이나 재물, 평생에 걸쳐 쌓아 둔 명성과 명예를 잃어버리고 싶은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하지만 우리 주변에는 잘못된 선택이나 안타까운 사건 사고로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잃고 망연자실한 채 살아가는 이가 많습니다.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것들을 빼앗기지 않고 지키는 것은 무척 중요합니다. 은혜를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은혜를 유지하고 지키는 것 역시 중요합니다. 복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이 주신 복을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받은 복을 잘 관리하고 유지하는 것은 더욱 중요합니다. 하지만 악한 영은 우리의 영혼을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 합니다.

 

어디를 가든지, 무엇을 하든지, 누구를 만나든지 끊임없이 우리 안에 있는 것들을 빼앗으려 합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것들을 빼앗기지 않으려면,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이 막아주어야 합니다. 가정을 허무는 작은 여우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나님의 손이 우리 가정의 울타리를 지켜 주어야 합니다.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악한 영이 성도의 기업과 일터에 역사하지 못하도록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이 지키고 보호해 주어야 합니다.

 

2. 잃어버렸던 땅을 회복했습니다.

(14절a)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에게서 빼앗았던 성읍이 에그론부터 가드까지 이스라엘에게 회복되니 이스라엘이 그 사방 지역을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도로 찾았고” 에벤에셀의 은총이 임했을 때, 이스라엘은 잃었던 땅을 다시 찾았습니다. 안타깝게도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자신들에게 기업으로 주셨던 땅을 블레셋사람들에게 빼앗겼었습니다. 하지만 에벤에셀의 은혜가 임하자 하나님은 빼앗긴 기업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지금까지 인생을 살아오면서 여러분은 무엇을 잃어버렸습니까? 최근에 하나님이 은혜로 내게 주셨던 것들 가운데 무엇을 빼앗겼습니까? 건강입니까? 물질입니까? 가정입니까? 하나님이 주신 소망입니까? 하나님에 대한 사랑입니까? 기도생활입니까? 봉사생활입니까? 예배생활입니까? 돌이켜보면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것들 중에 내가 제대로 유지하고 관리하지 못해 잃어버린 것이 참 많습니다.

 

책망받은 한 달란트받은 종처럼 하나님이 맡기신 은사를 사용하지 못하고 땅에 파묻어 두었습니다.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책망받았습니다. 여러분 오늘이 은혜받을 만한 때요 구원의 날입니다. 오늘이 주님과 교회를 위해 충성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오늘 내게 주신 달란트를 헤아려 보십시오. 얼마나 많은지,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베드로사도가 벧전 5장에서 말씀하신 것처럼“너희는 이 은혜에 굳게 서라”(벧전5:12하)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깨닫고 그 은혜안에 굳게 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하나님앞에 바로 서면 잃어버렸던 것도 다시 찾을 수 있습니다. 에벤에셀의 하나님을 체험하며 잃어버렸던 모든 은혜를 회복하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잃어버린 하나님과의 첫사랑도, 무너진 자존감도 다시 회복할 수 있습니다. 에벤에셀의 은혜를 구하십시오. 그래서 여러분의 인생과 가정에 에벤에셀의 기념비가 견고하게 세워지길 바랍니다.

 

3. 평화가 임했습니다.

(14절)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에게서 빼앗았던 성읍이 에그론부터 가드까지 이스라엘에게 회복되니 이스라엘이 그 사방 지역을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도로 찾았고 또 이스라엘과 아모리 사람 사이에 평화가 있었더라” '평화가 있었더라'는 말은 더 이상 전쟁이 진행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전쟁이 사라지니 자연스럽게 그 땅 가운데 고통과 괴로움이 사라지고 평화가 임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유심히 보아야 할 점은, 성경은 이스라엘과 블레셋이 아닌 이스라엘과 아모리 사람사이에 평화가 있었다고 말한다는 점입니다. 아모리 족속은 가나안 족속으로, 단 지파를 자신들의 기업에서 쫓아낼 정도로 몹시 강한 족속이었습니다. 그런데 블레셋이 이스라엘에 패했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듣자 스스로 겁에 질려 이스라엘과 평화 조약을 맺었습니다.

 

이렇게 이스라엘과 아모리 사람사이에 평화가 임한 것입니다. 에벤에셀 하나님의 은혜가 임할 때, 이스라엘은 블레셋으로부터 보호받는 축복을 누렸습니다. 에벤에셀 하나님의 손이 함께할 때,그들은 잃었던 땅을 다시 찾는 회복의 축복을 누렸습니다.

 

뿐만 아니라 전쟁이 사라진 평화의 축복을 누렸습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삶에 에벤에셀의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면 악한 영들의 공격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손이 함께하면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것들을 되찾는 회복의 축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또한 평안의 축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보호와 회복 그리고 평화의 축복, 이 모든 것이 에벤에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함으로 주시는 참된 선물입니다.

 

본문에는 한 가지 특이한 반복 어구가 나옵니다.(13절)“이에 블레셋 사람들이 굴복하여 다시는 이스라엘 지역 안에 들어오지 못하였으며 여호와의 손이 사무엘이 사는 날 동안에 블레셋 사람을 막으시매” (15절)“사무엘이 사는 날 동안에 이스라엘을 다스렸으되” "사무엘이 사는 날동안에"입니다. 반복은 강조의 또 다른 의미입니다.

 

준비된 한 사람 사무엘을 통해 그 땅 가운데 하나님의 보호와 회복, 평화의 축복이 임했습니다. 또한 이가봇의 저주가 끊어지고 에벤에셀의 은혜가 임했습니다. 이를 통해 그 시대에 사무엘이 얼마나 영향력 있는 사람이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는 나라의 운명을 좌우하는 영향력있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시지만 언제나 사람을 통해 그분의 위대한 역사를 이루어 가십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사무엘을 통해 놀라운 역사를 이루셨습니까?

 

첫째, 그가 기도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8절) “이스라엘 자손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당신은 우리를 위하여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쉬지 말고 부르짖어 우리를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구원하시게 하소서 하니”이스라엘의 모든 백성들은 사무엘을 기도의 사람으로 인식했습니다. 때문에 미스바에 모여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블레셋이 쳐들어왔을 때 가장 먼저 사무엘에게 기도를 부탁했습니다. 기도의 사람 사무엘이 기도하면 하나님이 분명 그 기도에 응답해서 자신들을 구원해 주실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위급한 상황속에서 사무엘은 늘 이스라엘을 위해 부르짖어 기도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기도를 쉬는 것을 죄라고 생각했습니다.(삼상 12:23)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범하지 아니하고 선하고 의로운 길을 너희에게 가르칠 것인즉”어머니 한나의 기도로 태어난 그는,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마지막 순간에도 기도를 이어 갔습니다. 이렇게 기도하는 사람이었기에, 한 시대에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거룩하게 쓰임받은 것입니다.

 

둘째, 예배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무엘은 군대가 쳐들어오는 위급한 상황속에서도 젖 먹는 어린 앙을 취해 온전한 번제를 드렸습니다. (9절a) “사무엘이 젖 먹는 어린 양 하나를 가져다가 온전한 번제를 여호와께 드리고”온전한 번제를 드렸다는 것은 그가 젖 먹는 어린 양을 제단에 올려 완전하게 모두 타서 없어질 때까지 그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멀리서부터 블레셋 군대의 말발굽 소리가 들려옵니다. 그 군대가 날선 기세로 먼지를 일으키며 돌진해 옵니다. 머뭇거리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긴박한 상황입니다. 그러나 사무엘은 흔들림 없이 여호와께 집중했습니다. 나의 기도에 귀기울이시는 하나님을 철저히 신뢰했기 때문입니다. 예배를 기뻐 받으시며 내 백성을 돌보시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사무엘은 1년에 한 차례씩 벧엘로, 벧엘에서 길갈로, 길갈에서 미스바로, 그리고 미스바에서 자신의 고향 라마로 순회하면서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일, 즉 재판을 했습니다. 이 모든 사역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았습니다.(17절) “라마로 돌아왔으니 이는 거기에 자기 집이 있음이니라 거기서도 이스라엘을 다스렸으며 또 거기에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았더라”"또"라는 표현은 한 가지 중요한 힌트를 줍니다.

 

이 표현을 통해 사무엘이 사역을 마치고 돌아올 때마다 반드시 하나님께 예배드렸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과 역사를 보면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서 한 시대에 영향력있는 인물로 쓰임 받았던 이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바로 기도와 예배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 가운데 기도와 예배없이 영향력을 끼쳤던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저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모든 성도들이 삶의 현장에서 영향력있는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특히 교회의 다음 세대가 정치, 종교, 문화, 사업 등 모든 영역에서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들로 세워지기를 원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실력이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실력만 있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붙잡으시고 세워주시고 높여 주셔야 합니다. 악한 시대에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쓰임받기 위해서는 기도의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코로나로 인해, 그리고 여러 가지 삶의 어려움으로 세상이 어두워질 때 우리는 일어나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 모두가 빛의 사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빛이 없으면 동토의 땅이 되고 맙니다. 우리의 가정도 우리의 사업장도, 우리의 교회도 빛의 사자가 필요합니다. 사무엘 한 사람이 바로 서니까 그로 인해 민족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앞에 다 나아와 금식하며 회개하고 기도하였습니다.

 

저는 여러분 모두가 사무엘처럼 어떤 상황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 앞에 바로 서서 믿음을 지켜야 합니다. 복음의 빛을 발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온전한 예배를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시간을 정해 놓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십시오. 예배를 생명처럼 귀하게 여기십시오. 사탄은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찾으며 두루 다닌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며 깨어 있어야 합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말씀과 기도로 하나님과 교제의 줄을 놓치말아야 합니다. 진정한 예배자로 하나님 앞에 서야 합니다. 사무엘처럼 기도를 쉬는 죄를 범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무엘이 사는 날 동안 전능하신 하나님이 그분의 손으로 원수의 공격을 막아주시고, 잃어버린 것들을 회복시켜 주시고, 여러분이 있는 그 현장에 세상이 줄 수 없는 놀라운 평화를 주신 것처럼 여러분이 살아있는 동안 전능하신 하나님이 여러분과 함께 계셔서 에벤에셀되셔서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는 성도가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기까지 하나님이 인도하셨다"는 에벤에셀의 축복을 풍성하게 누리며 살아가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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