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명을 위해 살라(행 20:17-24)
여러분, 인간이 살아가는데 아주 중요한 원초적인 질문 3가지가 있습니다. 1)나는 누구인가? 2)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3)나는 왜 사는가? 누구나,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인생을 살면서 묻게되는 원초적 질문입니다. 인생의 의미와 가치와 목적을 묻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 땅을 살아가면서 이런 생각을 깊이 해보신 적 있습니까?
이런 근본적인 질문에 답을 찾지 않고 그저 현실에 메여서 열심히 살아가는 것만이 전부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우리를 이 땅에 태어나게 하시고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신 분명한 목적이 있습니다. 구약시대에 출애굽의 영웅인 모세를 보십시오. 그가 애굽의 왕자로 살아온 것이 그 인생의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미디안광야에서의 목동으로 사는 것이 하나님께서 그를 이 땅에 보내신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그를 부르신 하나님은 그에게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애굽에 노예로 붙잡혀있는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그의 사명이었습니다. 사명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일이요 우리가 이 땅에 존재하는 이유입니다. 그러므로 사명을 모른다는 것은 목적이 없이 바다위에 떠있는 배와 같은 것입니다. 아무리 큰 배를 탔다고 해도 그 배가 가는 목적지가 없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우리의 창조자이시고 우리의 구원자이신 하나님께서 아무 이유없이 저와 여러분을 이 땅에 보내셨다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무지의 소산인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맡겨주신 사명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사명을 찾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과제입니다. 사도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주 예수께로부터 받은 사명’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사명을 끝까지 감당할 수만 있다면 자신의 생명조차 조금도 아깝지 않다고 했습니다.
저는 이것이 사도바울이 사도 바울일 수 있었던 위대한 선언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는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의 주님을 만난 이후, 주께로부터 받은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생명을 걸었습니다. 이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그는 수많은 고난과 위험도 기쁘게 받았습니다. 그는 평생을 사명적 존재로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 예수께로부터 받은 사명은 비단 바울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도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이 세상에 태어날 때에 그냥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사명을 가지고 태어난 사명적 존재입니다. 이 세상에 무의미하게 태어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모든 것에는 존재의 의미가 있습니다. 이것을 깨달을 때에 살아가는 삶의 가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내게도 주 예수께로부터 받은 사명이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이 사명이 무엇입니까? 한문으로 '사명'이라는 말은 '심부름 사(使)자에 목숨 명(命)자'를 씁니다. 그러니까 목숨을 걸고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을 감당하는 것을 사명이라고 합니다. 그 사명이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 24절,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사명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는 일입니다. 은혜란 "받을 만한 자격도 없는 자에게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결국 은혜의 복음이란 받을 자격도 없는 나같은 죄인에게 하나님이 값없이 부어주시는 선물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인 것입니다. 이 복음을 증거해야 사람이 삽니다. 영원히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인을 살리기 위해서 반드시 이 복음이 증거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생명을 걸고 이 복음을 증거하는 일을 감당했던 것입니다. 이 은혜의 복음, 이 생명의 복음을 증거하는 일은 우리 모두의 사명인 것입니다. 이 일보다 더 긴급한 일이 어디 있습니까? 예수님은 이 일 때문에 창조주이심에도 불구하고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취하시고 사람이 되신 것입니다. 이 일때문에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속죄제물이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 바로 은혜의 복음인 것입니다. 이 복음을 위해 친히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 그 생명의 복음을 증거하는 것이 바로 저와 여러분의 사명인 것입니다. 목사가 아니어도 장로가 아니어도 복음을 증거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명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먼저는 우리 가정을 구원해야 합니다. (행 16:31) “이르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이것이 첫 번째 사명입니다. 금식을 해서라도 기도하고 가족을 먼저 구원해야 합니다. 그리고 멀리가서 이방사람보다 내 가까이에 있는 이웃에게 이 복음을 증거해야 합니다. 이것이 생명보다 더 중요한 사명인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이렇게 말합니다. 중생이 제2의 출생이라면 사명은 제3의 출생이라고 말합니다. 칼 힐티는 말하기를 “내 인생 최고의 날은 사명을 깨닫는 날이다”라고 했습니다. 사명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인생의 의미, 가치, 목적이 다 사명안에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우리가 길을 갈 때 힘들고 지치는 것은 길이 멀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이 길을 왜 가는지(어디까지 가야하는지)”를 모를 때 몇 십배 더 힘들고 쉽게 지치는 것처럼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사명을 알고 사는 것은 너무나 중요한 것입니다.
더군다나,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소명)에는 반드시 사명이 있습니다. 그냥 우연히 심심해서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내가 감당해야 할 사명(미션)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사명을 찾고 사명을 회복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명에 대해서 사도바울은 24절에서 3가지를 증거했습니다.
1. 사명은 일평생 달려갈 길입니다.
24절,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사명은 잠시 잠깐 달리고 마는 단거리선수의 삶이 아닙니다. 일평생 달려가야 할 장거리의 인생인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사명에서 자신의 인생길을 찾았고, 사명을 일평생 달려갈 길로 삼았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옥중서신에서 이렇게 권면하였습니다. (빌 3:13,14)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여기서 말하는 ‘푯대, 부름의 상’ 이것이 그가 일평생 달려가야 할 목표였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일평생 돈을 벌기 위해 살고 일평생 권세를 얻기 위해 살고, 쾌락을 좇아 살지만 그것이 인생의 목적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세상에서 어떤 일을 하든지 그것을 통해서 이루어야 할 하나님의 목표가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어떤 직분을 맡고 있든지 그 직분자체가 목적이 되면 안되는 것처럼, 내가 세상에서 어떤 직업을 가졌든지 그 직업에서 대성하고 인정받고 성공하는 것 자체가 목적이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수단에 불과하고 그것은 통로에 불과한 것입니다. 일평생 가져야 할 목표는 그런 세상의 성공이 아니라 그것을 통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사명인 것입니다. 어떤 분이 사업을 하고 있습니다. 그 사업의 목표가 돈을 많이 버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고 나서 보니 그것은 인생의 목표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 사업을 주신 하나님의 목표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그 사업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일평생을 달려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사명인 것입니다.
2. 사명은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일입니다.
24절,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누가 나에게 사명을 맡겼습니까? 사명은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 예수께 받은 사명입니다. 예를 들면 사도바울이 언제 사명을 받았습니까? 멀리 다메섹까지 군대를 이끌고 예수믿는 성도들을 붙잡으려고 가다가 도중에 주님을 만났습니다.
하늘로부터 큰 빛이 그를 둘러 비추었고, 그 빛가운데서 나타나신 예수님께서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그 앞에 엎드리어 ‘주여, 누구시니이까?’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주님 무엇을 하리이까’, ‘너는 나의 이름을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이것이 사도바울이 주님께 받은 사명입니다. 이전까지는 예수님을 핍박하던 사람이 이제는 예수님을 전하는 전도자로 세움받게 된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믿음의 사람들은 다 이렇게 하나님께 부름받고 사명을 받는 사람들입니다. 특별히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은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사명을 주시는 말씀입니다.
미디안의 처갓집에서 양치기하던 모세를 찾아가셔서 하나님께서 부르십니다. “모세야 모세야”,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에게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하리라”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십니다. 그리고 그에게 사명을 주십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부르심 다음에는 반드시 부르심의 목적이 있습니다. 그것이 사명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여러분의 사명은 무엇입니까? 일생을 살아가면서 무엇을 하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까? 이 다음에 우리가 하나님앞에 서는 날 그 사명의 결과를 물으실 것입니다. 네가 너에게 한 달란트를 맡겼는데 너는 그것으로 어떻게 살았느냐? 물론 두달란트, 다섯달란트맡은 종에게도 똑같이 물었습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나에게 맡겨주신 사명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 사명을 위해 어떻게 감당하고 있습니까?
3. 사명은 끝까지 감당해야 할 일입니다.
24절,“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사도바울은 그 사명에 생명을 걸었습니다. 사도바울을 보세요. 그가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복음을 전할 때, 어떤 일들이 있었습니까? 쫓겨나기도 하고, 매도 맞고, 옥에도 갇히고, 재판도 받고, 돌에 맞아 죽을 뻔도 하고, 온갖 시련, 역경, 환난을 당했습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울이 10여년 넘게 1,2,3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가려고 할 때, 제자들이 만류합니다. 결박과 환난이 기다린다는 것입니다. 22,23절에 보면 여러 번 만류합니다. 그런데도 바울이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행 21:13) “바울이 대답하되 여러분이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
그는 일사각오의 신앙으로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습니다.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이 사명을 감당하는 길이였기 때문입니다. 우리 예수님도 십자가를 바라보시면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왜냐하면, 그 길만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사명의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한국 기독교사의 순교자이신 주기철 목사님이 계십니다. 일본의 신사참배 강요에 반대에 앞장섰다가 일본경찰에 붙잡혀 마침내 1944년 4월 21일 금요일 밤 9시 30분경 “내 여호와 하나님이여 나를 붙잡으소서”란 마지막 말을 남기며, 비록 몸은 온갖 고문으로 찢겨졌지만 얼굴에는 천국의 소망으로 인한 밝은 웃음을 머금은 채 평양 형무소에서 이 땅에서의 마지막 운명을 다하였습니다. 그가 살아생전에 일본경찰에 삼엄한 감시 속에서 평양 산정현교회에서 마지막 설교를 하시게 되셨습니다. 그때 주목사님은 다섯 가지 설교대지로 전하셨다고 합니다.
첫째로, 주여 죽음의 권세를 이기게 하여 주옵소서. 나는 지금 죽음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내 목숨을 빼앗으려는 검은 손이 시시각각으로 내 가까이에 뻗어오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주기철 목사가 죽는다고 슬퍼하지 마시요. 나는 내 주님 밖에 다른 신 앞에서 무릎을 끓을 수가 없습니다. 더럽게 사는 것보다 차라리 죽고 또 죽어 주님을 향한 정절을 지키려 합니다. 나에게 일사각오가 있을 뿐입니다. 소나무는 죽기 전에 찍어야 푸르르고 백합화는 시들기 전에 떨어져야 향기롭습니다. 그러므로 주여 제게 죽음의 권세를 이길 수 있는 힘을 주시옵소서.
둘째로, 주여, 장기간의 고난을 견디게 하옵소서. 1,2년의 고난이거나 단번에 받은 고난은 이길 있으나 오래 계속되는 고난은 참기 어렵습니다. 제 믿음을 한걸음만 양보하면 그 무서운 고통을 면하고 도리어 상 준다는데 많은 사람이 넘어집니다. 그러나 천국 가서 주님이 너는 내 이름으로 평안과 즐거움을 다 받아 누리고 고난의 때에 어찌했냐고 물으시면 나는 무슨 대답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주여 저로 하여금 장기간의 고난을 견디게 하옵소서.
세 번째, 주여, 내가 섬기던 교회는 물론 나의 노모와 내가 사랑하는 처자를 우리 주님께 부탁합니다. 나는 80이 넘은 어머님이 계시고, 병든 아내가 있고 자식들이 있습니다. 사람이 제 몸에 고통은 견딜 수 있으나 부모와 처자를 생각하면 철석같은 마음도 변질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린 자식이 목메어 우는 소리에 순교의 길에서 돌아선 자도 허다합니다. 부모나 처자를 예수보다 더 사랑한 자는 우리 주님이 합당치 않다고 하셨습니다.
넷째로, 주여, 나로 하여금 의에 살고 의에 죽게 하여 주소서.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사람으로서 마땅히 해야할 의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정조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신부는 다른 신에게 정절을 깨뜨리지 못합니다. 신사(神寺)에 절하지 못합니다. 칼날이 나를 기다리나 나는 저 칼날을 향해 나가겠습니다.
다섯째, 주여, 내 영혼을 주님께 부탁합니다. 제가 십자가를 굳게 붙잡고 쓰러질 때 옥중에서나 사형장에서나 내 목숨 끊어질 때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라고 기도하겠습니다.
이 다섯가지는 주 목사님의 유언적 최후의 기도요 일사각오를 결단한 설교입니다. 결국 주기철 목사님은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순교의 제물이 되었습니다.
해방 후에 정부에서 항일투사라고 상장과 상금을 타러 오라고 해도 가시지 않으니 그것을 보내왔습니다. 그때에 생계에 어려우면서도 조옥련 사모님은 그 상장과 상금을 도로 갖다주면서 “여보시오, 우리 목사님은 항일 투사가 아니라 목사님으로서 믿음을 지키다가 순교한 것이라”하고 돌아오셨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 모두에게는 한평생 달려갈 길, 사명이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께 받은 사명입니다. 그는 목숨 걸고, 생명 받쳐 사명을 감당했던 것입니다.
본문 19절을 보면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로 말미암아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라고 했습니다. 바울을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모든 겸손과 눈물로 섬겼습니다. 사도바울은 잃어버린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예수님의 심정으로 눈물을 흘리며 안타까워하고 하나님앞에 눈물로 기도했습니다. 자기자신을 철저히 낮추어서 종된 삶을 살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사명자의 길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감담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성품은 겸손입니다.
어떠한 상황속에서도 하나님의 주권앞에 무릎을 꿇고 자기를 복종시키는 것입니다. 인생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믿습니다. 그렇게 고백할 때 나타나는 현상은 결코 낙심하거나 좌절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이 모든 역사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철저히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사명자에게는 겸손과 눈물이 있습니다. 자기 아픔때문에 서러워서 우는 눈물이 아닙니다. 영혼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마음을 품었기 때문에 눈물을 흘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여러분의 눈물은 어떤 눈물입니까? 정말 이 민족과 나라를 위해서, 그리고 저 북녘 땅에 고통받는 성도들을 위해 눈물 흘리며 기도해 보셨습니까? 아니 여러분의 믿지않는 가족구원을 위해서 그렇게 눈물로 기도해보셨습니까? 우리 주님은 우셨습니다. 나사로의 죽음앞에서 우셨습니다. 멸망할 죄악 도성 예루살렘을 바라보시면서 한없이 우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는 눈앞에 두고 통곡하시면 우셨다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십자가의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려면 눈물이 필요합니다. 눈물로 씨를 뿌리면 기쁨으로 단을 거두는 축복을 맛보실 것입니다. 눈물로 영혼을 사랑하라는 말입니다. 저 영혼이 얼마나 불쌍한지를 알면 울면서 기도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어머니가 자식들을 앞에 두고 아무리 설득해도 듣지 않으면 웁니다. 너무 안타까워서 우는 것처럼 바울이 눈물로 호소했다는 것입니다. 어거스틴의 어머니, 모니카의 눈물기도는 탕자 어거스틴을 성자로 만들었습니다. 자기 몸으로 낳은 아들이 방탕한 삶을 살며 희망이 보이지 않을 때 그 자식을 품고 눈물로 기도할 수밖에 없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여인들에게 ‘나를 위해 울지 말고 자녀를 위해서 울라’고 하신 말씀을 생각해 봅니다.
자식의 영혼을 위해서 어머니의 눈물의 기도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모는 사명으로 자녀들을 양육해야 된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자식들이 내 마음대로 내 욕심대로 안되는 것은 자식을 키워 본 사람이면 다 압니다. 자식을 위해 해 줄 수 있는 것은 사랑과 기도라는 사실입니다. 교회는 이런 모니카의 눈물이 있어야 합니다. 사명으로 흘리는 눈물 말입니다.
성도를 품고 한 영혼을 품고 가난하고 소외된 자를 품고 병든 자를 품고 사명으로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는 심령들이 많으시길 소망합니다.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행 20:31) “그러므로 여러분이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그는 복음을 전하며 울었습니다.
뿐 만 아닙니다. 사명자는 열심이 있습니다. 바울의 선교현장에는 언제나 유대인의 간교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언제나 핍박과 감옥과 죽음이 기다리고 있었지만 바울의 열심을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뜨거운 심장 뜨거운 마음 뜨거운 감동을 가지고 로마제국의 중심부인 로마에서 복음을 전하기를 원했습니다. 결국 사도바울이 순교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로마제국이 기독교를 국교로 받아들였습니다. 사명자는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기도도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찬송도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무엇을 하든지 열정을 가지고 할 때 성령이 역사하십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요즘 살펴보고 있는 요나서를 보십시오. 하나님께 불순종하여 다시스로 도망가던 요나가 하나님의 징계를 받고 물고기 뱃속에 들어갔습니다. 이제 죽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거기서 하나님앞에 엎드려 기도한 것입니다. 욘 2:2 “내가 받는 고난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더니 주께서 내 음성을 들으셨나이다”
요나가 하나님앞에 부르짖어 기도합니다. 그 기도의 응답으로 그가 살아났습니다. 왜 그가 살아났습니까? 아직까지 그가 해야 할 사명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처럼 살아있는 이유는 아직 할 일이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사도바울은 마지막 순간에 이렇게 고백합니다.
(딤후 4:7-8)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8]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신앙안에서는 은퇴가 없습니다. 주님앞에 서는 날까지 싸워야 합니다. 달려가야 합니다. 믿음을 지켜야 합니다. 그래야 이 다음에 하나님앞에 서는 날 의로운 재판장이신 예수님께서 의의 면류관을 씌어 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사명이 무엇인가를 깨닫고 그 사명을 회복하시기를 바랍니다. 그 사명은 이다음에 하나님앞에 서는 날 반드시 물으실 것입니다. 그 때 부끄러움없이 주님을 만날 수 있는 성도가 영원히 성공한 성도인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구원받은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사명은 있습니다. 다만 사명을 깨달은 자와 깨닫지 못한 자가 있을 뿐입니다. 사명을 알고 사는 사람과 모른 채 사는 사람, 사명은 내가 짊어져야 할 십자가요, 내가 품어야할 꿈, 비전입니다. 이 사명을 점검하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나에게 주신 사명을 나는 지금까지 어떻게 감당해 왔습니까? 그 사명을 위해서 나는 무엇을 드렸습니까?
가까이는 내 사랑하는 가족, 그리고 이웃들, 국내외 믿지않는 이웃의 구원을 위해 여러분은 어떻게 헌신했습니까? 어떤 분은 온 힘을 다해서 충성하고 있습니다. 어제도 혼자 지역전도를 나가시는 분을 보면서 십자가의 길은 외롭고 힘든 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어떤 분은 선교비를 내기도하고 어떤 분은 직접 선교를 후원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이런 모든 사역을 통해서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귀한 사명을 충성되이 감당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