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갈 2:6-10)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기독교 신앙의 가장 중요한 핵심이자 본질인 ‘은혜’에 대해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는 늘 은혜라는 단어를 입에 달고 삽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여기까지 왔습니다.", "은혜 많이 받았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말하는 은혜는 과연 무엇입니까? 많은 사람들은 일이 잘 되면 은혜라고 생각합니다. 사업이 잘 되고, 자녀가 좋은 대학에 가고, 건강하면 은혜라고 말합니다. 물론 그것도 은혜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은혜는 그보다 훨씬 깊고 본질적입니다. 사도 바울은 감옥에서도 은혜를 말했고, 매를 맞고도 은혜를 말했고, 배가 파선해도 은혜를 말했습니다. 왜 그렇게 말했습니까? 은혜는 환경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이 기록된 갈라디아서는 사도바울이 격정적인 어조로 기록한 편지입니다. 당시 갈라디아 교회에는 야고보나 베드로처럼 예루살렘의 ‘유력한 자’들, 즉 정통파 사도들의 권위에 기댄 거짓 교사들이 들어왔습니다.
그들은 바울을 향해 “저 사람은 예수님의 직계 제자가 아니다. 그러기 때문에 정식사도도 아니다”라며 바울의 사도권을 부정하고, 그리고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받는다는 복음의 진리조차 왜곡시켜 율법을 지켜야 구원받는다고 가르쳤습니다. 주변의 수많은 시선과 비교, 깎아내리는 비난속에서도 사도바울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는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진짜 은혜’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바울이 붙잡았던 세 가지 은혜의 차원을 깊이 깨닫는 시간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비교 의식을 깨뜨리는 은혜(6절)
바울이 발견한 첫 번째 은혜는 사람의 외모나 조건을 보지 않게 하시는, ‘비교 의식을 깨뜨리는 은혜’입니다. 본문 6절을 다시한번 함께 읽겠습니다. “유력하다는 이들 중에 (본래 어떤 이들이든 내게 상관이 없으며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시나니) 저 유력한 이들은 내게 의무를 더하여 준 것이 없고” 바울은 예루살렘 교회의 기둥같은 존재들, 즉 베드로, 요한, 야고보같은 사람들을 ‘유력한 자’라고 불렀습니다.
세상 기준으로 보면 그들은 예수님과 3년동안 동고동락한 대선배들이고 엄청난 스펙을 가진 자들입니다. 반면 바울은 과거에 교회를 핍박했던 자요, 부활하신 예수님을 다메섹도상에서 만난 늦깎이 사도였습니다. 겉으로만 보면 바울은 그들 앞에서 위축되고 기가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당당하게 선포합니다. “그들이 본래 어떤 이들이든 내게 상관이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여기서 ‘외모’란 단순히 얼굴 생김새를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이 가진 배경, 학벌, 가문, 과거의 이력, 사회적 지위를 말합니다. 헬라어 원어의 뜻을 살펴보면 ‘겉모습을 보고 판단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라는 의미입니다. 바울은 예루살렘 사도들의 권위를 무시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는 그 어떤 외적인 조건도 절대적이지 않다는 은혜의 복음을 꿰뚫어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이 사람을 쓰실 때의 기준이 세상과 얼마나 다른지 명확히 드러납니다. 사무엘 선지자가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다음 왕을 세우기 위해 이새의 집을 방문했을 때를 기억하십니까? 이새의 첫째 아들 엘리압이 들어왔을 때, 사무엘은 그의 훤칠한 키와 위엄있는 용모를 보고 “여호와의 기름부으실 자가 과연 여기 있도다”라며 감탄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사무엘상 16:7절에서 무어라 말씀하십니까?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결국 왕으로 기름부음받은 사람은 양을 치느라 집안의 잔치 자리에 초대받지도 못했던 막내 아들 다윗이었습니다. 은혜는 자격있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상이 아닙니다. 은혜는 자격없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사탄은 끊임없이 비교하게 만듭니다.
"저 사람은 저런데 너는 뭐냐?" “너는 부족하다.”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 “내가 너를 선택하였다.” “너는 나의 걸작품이다” 성도는 비교하며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사탄은 끊임없이 우리를 비교하게 만듭니다.
"너는 왜 저 사람만큼 성공하지 못했느냐?" "너는 왜 저 사람처럼 똑똑하지 못하냐?" "너는 왜 저 사람처럼 능력이 없느냐?“
그래서 우리는 늘 남의 인생을 바라보며 스스로를 초라하게 여기곤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공장에서 찍어낸 제품처럼 만드시지 않으셨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을 하나님의 손으로 빚으신 특별한 작품으로 만드셨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우리는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하나님의 걸작품입니다. 바울도 엡 2:10절에서 말합니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즉 하나님은 우리를 단순한 생산품이 아니라 하나의 아름다운 걸작품으로 만드셨다는 뜻입니다. 미켈란젤로의 조각품을 보면서 다른 조각과 비교하지 않듯이, 하나님의 작품인 우리도 다른 사람과 비교할 이유가 없습니다. 장미는 장미대로 아름답고, 백합은 백합대로 아름답습니다. 독수리가 참새를 부러워하지 않고, 참새가 독수리를 흉내 내려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각각의 존재에게 다른 아름다움과 다른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비교 속에서 자신을 평가하는 사람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보시는가를 바라보는 사람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하나님께서 나를 얼마나 귀하게 여기시는지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는 증거가 십자가입니다. 하나뿐인 아들을 내어주실 만큼 나는 하나님께 소중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사 43:1)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시말하면 "내가 너를 사랑한다.", "세상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나의 걸작품이다." =>나는 세상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이 사실을 깨달을 때 비교는 감사로 바뀌고, 열등감은 자존감으로 바뀌며, 교만은 겸손으로 바뀌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주신 은혜는 비교의식을 깨뜨립니다. 왜냐하면 은혜는 내가 누구보다 잘 나서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신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평가에 흔들리지 마십시오. 사람들의 시선에 매이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만드신 하나님의 작품이라는 사실을 믿고, 세상의 평가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당당하게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나를 나되게 하시는 사명의 은혜(7-8절)
우리가 깨달아야 할 은혜는 나만의 독특한 부르심을 발견하게 하는 ‘사명의 은혜’입니다. 본문 7절과 8절을 보겠습니다. “도리어 그들은 내가 무할례자에게 복음 전함을 맡은 것이 베드로가 할례자에게 맡음과 같은 것을 보았고 베드로에게 역사하사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가 또한 내게 역사하사 나를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셨느니라”
바울은 아주 놀라운 고백을 합니다. 베드로와 자신이 ‘맡은 영역’이 다를 뿐, 그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은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유대인 할례자를 위한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고, 바울 자신은 이방인 무할례자를 위한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역할의 차이가 있을 뿐, 우열의 차이가 없다는 것입니다. 베드로에게 역사하셔서 기적을 행하시고 교회를 세우신 그 하나님이, 동일하게 바울에게도 역사하셔서 이방 땅에 복음의 문을 열어주셨습니다.
바울은 베드로가 가졌던 ‘예수님의 수제자’라는 타이틀을 부러워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에게는 ‘이방인의 사도’라는 하나님이 주신 고유한 사명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내게 맡겨주신 사명입니다. 이것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잃어버린 영혼을 구원하는 일입니다. 사도바울은 (행 20:24)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우리모두는 바로 잃어버린 영혼을 구원하는 사명을 맡겨주셨습니다. 여러분 주변을 보십시오. 분명히 내게 맡겨주신 영혼이 있을 것입니다. 그는 나에게 맡겨주신 영혼입니다. 그를 구원하기 위해서 사도바울은 자신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이 귀한 사명은 우리에게도 중요한 본질적인 사명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저들을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먼저 그들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우리가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역사하십니다.
그리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내가 만난 예수님을 증거하십시오. 반드시 때가 되면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날 줄 믿습니다. 이 일이 바로 가장 중요한 사명입니다. 종교개혁자 존 칼빈의 동역자 중에 기욤 파렐(Guillaume Farel)이라는 목회자가 있었습니다. 파렐은 불같은 열정을 가진 설교자였고 제네바의 종교개혁을 처음으로 시작한 위대한 인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글을 쓰고 체계적인 신학을 정립하는 데 한계가 있음을 알았습니다.
어느 날 제네바를 지나가던 젊은 학자 칼빈을 만난 파렐은, 칼빈에게 제네바에 남아 종교개혁을 이끌어달라고 강력하게 권했습니다. 칼빈이 거절하려 하자 파렐은 “당신의 학업과 안일만을 생각한다면 하나님의 저주가 임할 것”이라며 무섭게 권면했습니다. 결국 칼빈은 제네바에 남았고, 전 세계 기독교 역사를 바꾼 위대한 신학적 업적을 남겼습니다.
이때 파렐은 어떻게 했을까요? “내가 먼저 시작한 사역인데 왜 칼빈이 더 주목받지?”라며 질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기꺼이 칼빈의 뒤에서 돕는 역할을 자처했습니다. 파렐은 베드로와 바울처럼, 하나님이 자신에게 맡기신 사명의 분량과 칼빈에게 맡기신 사명의 분량이 다를 뿐, 모두가 하나님의 역사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사명은 남과 경쟁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를 똑같은 모양의 찍어내는 로봇으로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어떤 사람은 베드로처럼 눈에 보이는 자리에서 강력하게 쓰임받아야 하고, 어떤 사람은 바울처럼 거친 이방 땅을 밟으며 개척의 길을 가야 합니다. 어떤 이는 교회에서 드러나는 직분으로 섬기지만, 어떤 이는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눈물로 기도하며 주방에서, 각방에서, 안내로, 차량 봉사, 다양한 봉사로 교회를 섬깁니다.
이처럼 각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은사를 따라 직분과 할 일을 맡겨주셨습니다. 그 일이 어떤 일이든 하나님의 일입니다. 마치 온몸에 각 지체가 있어 제각기 맡겨진 기능을 함으로 건강한 행동을 하는 것처럼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모두는 주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교회를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일이 어떤 일이든 그 일은 다 하나님께서 내게 맡겨주신 하나님의 일인 것입니다.
우리는 사명감을 가지고 어떤 일이든 충성되이 감당함으로 마지막 날에 달란트 비유에서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받은 종처럼 (마 25:21)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결국 결산할 날에 그 직분을 어떻게 감당했느냐가 영원을 결정한다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남의 사명을 부러워하지 마십시오. 교회 안에서도 그렇습니다.
설교하는 목사만 귀한 것이 아닙니다. 찬양하는 사람만 귀한 것이 아닙니다. 기도하는 사람, 안내하는 사람, 청소하는 사람, 주방에서 섬기는 사람, 성도를 위로하는 사람, 모두 하나님의 이름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내게 맡겨주셨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그 주어진 일이 어떤 일이든 하나님을 섬기듯 충성되이 감당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도 바울이 훗날 고린도전서 15장 10절에서 고백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내가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나를 나되게 하시는 그 사명의 은혜를 깨닫고 그 사명에 충성을 다하는 것입니다. 남의 떡을 바라보며 부러워하는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 손에 맡겨주신 사명의 달란트를 기쁨으로 은혜로 충성되이 감당하여 하나님께 인정받는 충성된 종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함께 세워가는 동역과 나눔의 은혜 (9-10절)
바울이 고백하는 은혜는 홀로 독주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세워가는 동역과 나눔의 은혜’입니다. 본문 9절과 10절을 읽겠습니다. “또 기둥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나와 바나바에게 친교의 악수를 하였으니 우리는 이방인에게로, 그들은 할례자에게로 가게 하려 함이라 다만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을 기억하도록 부탁하였으니 이것은 나도 본래부터 힘써 행하여 온 바니라”
예루살렘 교회의 리더들이었던 야고보, 게바(베드로), 요한이 바울을 인정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무엇입니까? 9절에 나오듯, 바울에게 ‘하나님이 주신 은혜’가 있음을 그들이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바울의 가문이나 학벌을 본 것이 아니라, 바울의 삶 속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흔적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기꺼이 ‘친교의 악수’를 나눕니다.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복음 안에서 하나 됨을 선포한 동역의 악수였습니다.
그리고 그 동역의 구체적인 열매로 10절에서 무엇을 부탁합니까? “가난한 자들을 기억해 달라.” 당시 예루살렘 교회는 심각한 기근과 박해로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방인 교회들을 개척하면서 그들에게 복음만 전한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의 모교회를 돕기 위한 구제 헌금을 정성껏 모금했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돈을 나누는 행위가 아니었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이라는 도저히 좁혀질 수 없었던 영적, 문화적 장벽이 ‘은혜의 나눔’을 통해 무너지고,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가 하나로 연결되는 역사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저 추운 남극에 사는 황제펭귄들은 영하 40도가 넘는 혹독한 겨울 추위와 초속 40미터의 눈폭풍을 견뎌내야 합니다. 이 연약한 생물들이 그 살인적인 추위를 이겨내는 비결은 단 하나, 바로 ‘허들링(Huddling)’이라는 독특한 협동 작전입니다. 수천 마리의 펭귄들이 서로 몸을 밀착해 거대한 원을 만듭니다. 중심부는 온도가 무려 영상 37도까지 올라간다고 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바깥쪽에서 매서운 칼바람을 온몸으로 맞는 펭귄들이 얼어 죽기 전에, 안쪽에 있던 안전하고 따뜻한 펭귄들이 서서히 밖으로 걸어 나온다는 사실입니다. 그렇게 안과 밖이 끊임없이 자리를 바꾸며 서로의 체온을 나누기에, 그 누구도 홀로 얼어 죽지 않고 남극의 기나긴 겨울을 함께 살아냅니다. 은혜는 내 안에만 고여있는 호수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은혜는 흘러가는 강물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건강의 은혜, 물질의 은혜, 재능의 은혜를 주신 이유는 나 혼자 잘 먹고 잘 살라고 주신 것이 결코 아닙니다. 공동체 안에서 연약한 자, 가난한 자, 마음이 상한 자들을 돌보고 그들을 살려내라고 주신 ‘나눔의 은혜’입니다. 누군가 아플 때 함께 울어주는 곳, 누군가 넘어질 때 붙들어 주는 곳, 누군가 힘들 때 기도해 주는 곳, 그곳이 교회입니다. 바울은 “이것은 나도 본래부터 힘써 행하여 온 바”라고 말합니다.
그는 은혜를 아는 자였기에, 움켜쥐는 인생이 아니라 끊임없이 베풀고 나누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교회는 바로 이런 곳이어야 합니다. 내 주장을 펼치고 내 의를 드러내는 곳이 아니라, 내게 주신 은혜를 서로 나누며 아픔이 있는 곳에 위로를, 결핍이 있는 곳에 채움을 주는 동역의 자리가 되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저장하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흘려보내라고 주셨습니다. 물질도, 시간도, 재능도, 위로의 말도, 기도도 흘려보내야 합니다. 흘러가는 물은 썩지 않습니다. 은혜도 흘러갈 때 더욱 풍성해집니다.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흘러갈 때 생명을 살리고 생명을 고치고 생명을 세우는 생명사역자의 사명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사도 바울이 그 극심한 반대와 비난 속에서도 사명의 길을 당당히 걸어갈 수 있었던 비결은 딱 하나였습니다. 세상의 기준과 사람들의 말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하나님이 오직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가치를 붙잡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선포된 말씀을 기억하며 세 가지 질문을 여러분의 마음에 던지시기를 바랍니다.
1)나는 여전히 세상의 외모와 조건으로 남과 나를 비교하며 은혜를 깎아먹고 있지는 않습니까?
2)내게 주신 은혜의 현장인 우리 가정과 일터와 교회에서의 사명을 소홀히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3)하나님이 내게 주신 은혜를 나 혼자만 누리느라 내 곁의 어렵고 소외된 이웃들을 외면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가 받은 가장 큰 은혜는 아무 자격없는 죄인인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입니다. 그 일방적이고 넘치는 은혜를 경험한 사람은 이제 삶의 태도가 바뀌어야 합니다.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않으며, 내게 주신 자리에서 묵묵히 충성하고, 주님의 몸된 교회와 이웃을 위해 내 삶을 기꺼이 나누어 줍니다.
이번 한 주간, 세상의 거친 소리에 귀를 닫고 오직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묵상하십시오. 그리고 그 은혜의 힘으로 비교 의식을 이겨내고, 사명을 완수하며, 사랑을 흘려보내는 복된 은혜의 통로가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나눔이야기-------------------------------------------------------
1. 나는 요즘 누구와 자신을 비교하며 낙심하거나 교만해진 적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시선으로
나 자신을 바라본다면 무엇이 달라질까요?
2. 하나님께서 지금 내게 맡기신 가장 중요한 사명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그것을 위해 어
떤 순종이 필요합니까?
3.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이번 주에 구체적으로 누구와 어떻게 나눌 수 있을지 함께 나누어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