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갈 4:12-20)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한 후에 구원받은 성도들을 향한 뜨겁고 분명한 목표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를 믿어 영원한 생명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에게 반드시 ‘그리스도의 형상’이 그 마음속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어 피 흘려 죽게 하시고, 저와 여러분을 구원하신 궁극적인 목적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단순히 우리를 지옥 형벌에서 건져 천국 백성 삼아주신 것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진짜 목적은, 하나님의 형상은 회복하는 것입니다. (고후 4:4)“…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하나님의 형상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 삶의 인격과 성품, 가치관과 삶의 모든 영역에서 예수의 향기가 나고, 예수의 흔적이 나타나는 것,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가지신 간절한 소망입니다. 왜냐하면 그래야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온전히 변화된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 19절을 보십시오.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나는 정말 내 인격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져가고 있는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분명한 목표는 바로 우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목적은 단순히 마음의 위안을 얻거나, 이 땅에서 복을 받아 잘 살거나, 죽어서 지옥 안 가고 천국 가기 위한 ‘보험’을 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최초에 인간을 창조하실 때의 말씀이 창 1:26입니다. (창 1:26)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인간은 본래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으로 지음받은 영광스러운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죄가 들어옴으로 인해 그 아름다운 형상이 처참하게 깨어지고 일그러졌습니다. 죄로 오염된 인간은 하나님을 닮는 대신 오염된 세상을 닮고, 마귀를 닮아 분노와 시기와 정죄 속에서 죽어가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그런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고 구원을 받음으로 아담의 형상에서 벗어나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옷입게 되는 것입니다. (골 3:10)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구원의 목적은 우리 안에 깨어진 하나님의 형상, 곧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회복하여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기위함입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서 이루어진 구원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 성도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이렇게 권면합니다. (고전 11:1)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서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이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인 것입니다.
(롬 8: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은 우리 구원의 목적이자 하나님의 절대적인 명령입니다.
1. 그리스도의 형상은 예수님의 성품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고린도후서 4장 4절에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고 하셨고, 골로새서 1장 15절은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라고 말씀합니다. 즉, 우리가 예수님을 바라볼 때 비로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참모습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삶에 나타나야 할 ‘실제적인 하나님의 형상’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닮아간다는 것은 거룩한 척 옷을 입거나 종교적인 형식을 취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인격과 내면이 예수님의 성품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성품은 무수히 많지만, 성경 전체를 관통하여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예수님의 성품은 크게 세 가지입니다.
1)사랑의 성품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 중 가장 본질적이고 뿌리가 되는 성품은 바로 ‘사랑’입니다. 사도 요한은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일 4:16)고 정의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이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모든 생애는 한마디로 ‘사랑의 확증’이었습니다. 본문 19절에서 바울이 갈라디아 교인들을 향해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라고 외칠 수 있었던 원동력이 어디에 있습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바울의 심령을 강권하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나같은 죄인을 살리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쏟으신 그 사랑을 경험하고 나니, 자신을 배반하고 비판하는 성도들을 향해 끝없는 사랑이 흘러나온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조건적인 사랑이 아닙니다. 우리가 무언가 잘해서, 자격이 있어서 사랑하신 것이 아닙니다. 롬 5장 8절은 말씀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우리가 여전히 하나님을 멀리하고, 죄의 낙을 누리며, 내 고집대로 살아가던 바로 그 부끄러운 순간에도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셨고, 그 사랑때문에 십자가의 고통을 묵묵히 참으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따라서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는 내 안에 ‘사랑의 성품’이 자라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내 마음에 드는 사람, 나에게 유익을 주는 사람만 사랑했다면, 이제는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사람까지 품는 역사가 나타나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원수까지도 품으셨던 그 예수의 사랑이 오늘 여러분의 가슴속에 흐르고 있습니까? 가정에서 배우자를 바라볼 때, 교회에서 상처를 준 지체를 바라볼 때, 판단과 정죄의 눈이 아니라 예수님의 긍휼한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시기를 바랍니다. 성령께서 우리 마음을 만지셔서, 율법의 차가운 정죄를 넘어 허다한 죄를 덮는 예수의 사랑이 우리 인격가운데 가득 차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온유의 성품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당신의 성품을 소개하신 유일한 말씀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11장 29절입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예수님이 직접 계시하신 당신의 성품, 그 두 번째는 바로 ‘온유’입니다. 많은 사람이 온유라고 하면 그저 성격이 유약하고, 유순하며, 쓴소리 못하고 거절못하는 유약한 태도를 떠올립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온유는 결코 약함이 아닙니다.
온유(프라우스)의 진짜 의미는 ‘야생마가 주인의 손에 의해 길들여진 상태’, 즉 ‘하나님의 통제 아래있는 강력한 힘’을 뜻합니다. 예수님을 보십시오. 주님은 하늘의 천군천사를 호령하여 자신을 잡으러 온 군대들을 한 번에 쓸어버릴 수 있는 힘이 있으셨습니다. 빌라도 앞에서 호통을 치며 역사를 심판하실 권세가 있으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무한한 힘을 자신을 변호하거나 보복하는 데 쓰지 않으셨습니다.
오직 인류 구원이라는 아버지를 뜻을 이루기 위해 그 힘을 철저히 십자가 아래 굴복시키셨습니다. 채칙에 맞고 침 뱉음을 당하고, 뺨을 맞아도 묵묵히 참으셨습니다. 이 모습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진짜 온유입니다. 사도바울이 갈라디아 교회를 대하는 태도 역시 이 온유함이었습니다. 율법주의자들의 거짓 선동에 속아 자신을 ‘가짜 사도’라 비난하고 거역하는 갈라디아 교인들을 향해, 바울은 당장 사도의 권위를 가지고 징계하거나 저주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12절에 “형제들아 내가 너희와 같이 되었은즉 너희도 나와 같이 되기를 구하노라”라며 부드러운 음성으로 권면합니다. 자신의 감정과 혈기를 하나님의 뜻 앞에 복종시킨 온유함의 극치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 속에서 그리스도의 형상인 온유가 가장 절실히 필요한 순간은 언제입니까? 내 자존심이 짓밟힐 때입니다. 억울한 일을 당할 때입니다.
내 안에서 혈기가 솟구치고 복수하고 싶은 마음이 불일듯 일어날 때, 내 감정과 입술을 성령의 통제 아래 두는 것, 그것이 바로 온유입니다. “내가 누군데 감히 나를 무시해?”하는 거친 야생마 같은 자아가 아직도 살아 있습니까? 거친 내 감정의 고삐를 주님께 맡겨드립시다. 날마다 십자가 앞에서 내 혈기를 쳐서 복종시키고 주님의 통제를 받음으로, 거친 세상 속에서 부드러우면서도 강력한 예수의 온유함을 드러내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겸손의 성품입니다. 사도바울은 (빌 2:6-8)에서 예수님의 겸손을 이렇게 증거합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예수님의 겸손은 시늉이 아니었습니다. 온 우주의 창조주이신 분이 피조물인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 자체가 우주적인 낮아짐이요, 겸손입니다. 주님은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낮고 천한 말구유에 오셨습니다. 세상의 왕들처럼 대접받으려 하지 않으셨고, 오히려 제자들의 더러운 발을 씻기시며 (마 20: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죄인의 모습으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보여주신 겸손의 극치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유대인의 기득권과 사도의 권위를 다 내려놓고 이방인과 같이 낮아진 이유가 바로 이 예수님의 겸손을 배웠기 때문입니다. 영혼을 살리기 위해 기꺼이 종이 되는 자리, 낮아지는 자리를 선택한 것입니다. 사탄이 틈타는 곳의 공통점은 언제나 ‘교만’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갈라디아 교회에 들어온 거짓 교사들은 자신들의 의를 자랑하고, 할례받은 것을 자랑하며 영적으로 교만했습니다. 자신이 남들보다 더 우월하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어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탄의 형상이지 하나님의 형상이 아닙니다. 교회 안에서 상처를 주고받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서로 높아지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더 인정받아야 하고, 내 목소리가 더 커야 하고, 대접받지 못하면 견디지 못하는 사탄의 교만이 우리 자아 속에 숨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진 사람은 낮아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내가 마땅히 누릴 수 있는 권리일지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그리고 연약한 형제를 실족하게 하지 않기 위해 기꺼이 포기할 줄 아는 사람이 진짜 겸손한 사람입니다. 주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던 것처럼, 더 낮은 곳으로 내려가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지체들을 섬길 때, 우리 안에 주님의 겸손한 형상이 찬란하게 완성될 줄 믿습니다.
신앙생활을 오래했다고 자동으로 예수님 닮아가지 않습니다. 목사, 장로, 권사, 집사 타이틀이 우리를 거룩하게 만들지 못합니다. 날마다 내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며 “주님, 나는 오늘도 주님의 은혜가 아니면 단 한 순간도 살 수 없는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하는 심령 위에, 주님은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형상을 빚어 가십니다. 오늘 이 시간, 나의 공로와 행위의 겉옷을 다 벗어버리고 오직 사랑과 온유와 겸손의 성품으로 잃어버린 하나님의 성품을 회복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그리스도의 형상은 '사랑의 수고'를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반드시 ‘사랑의 수고’, 즉 누군가의 눈물 어린 해산의 고통이 필요합니다. 본문 19절을 다시 한번 다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여기서 바울은 참으로 놀랍고도 실제적인 비유를 씁니다. 바울이 자신을 ‘아이를 낳는 어머니’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해산의 수고’가 무엇입니까?
한 생명을 태어나게 하기 위해 어머니는 열 달 동안 자신의 배가 부르고 뼈가 삭고, 살이 트는 고통을 견뎌냅니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에는 극심한 산고를 겪으며 아이를 낳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을 향해 내가 그 해산의 고통을 ‘다시’ 겪고 있다고 말합니다. 이미 개척할 때 한 번 겪었는데, 거짓 복음에 미혹되어 영적으로 병들어가는 그들을 보면서, 그들의 영혼이 다시 살아나고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회복하기까지 내가 또다시 산고를 겪겠다는 결단입니다.
이것이 영혼을 향한 목자의 심정이며, 우리를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반드시 깨달아야 할 영적 법칙이 있습니다. 사람은 절대로 그냥 변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인간적인 잔소리나 비판, 날카로운 지적으로는 절대로 새로워지지 않습니다. 오직 누군가가 그 영혼을 붙들고 밤낮으로 흘린 눈물의 기도, 포기하지 않는 사랑의 수고가 있을 때에만 영혼은 변화됩니다.
구약의 모세를 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산 아래에서 금송아지를 만들어 우상 숭배를 하며 하나님을 배반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진노하셔서 “내가 이 목이 곧은 백성들을 다 쓸어버리고 너를 통해 새 민족을 만들겠다”고 하셨습니다. 세상적인 안목으로 보면 모세에게는 기회였습니다. 맨날 원망하고 불평하는 이 백성들, 다 심판받게 놔두고 자기 자손들이 번성하면 좋은 것 아닙니까? 그러나 모세는 어떻게 합니까? 목숨을 걸고 하나님 앞을 가로막아 서서 엎드렸습니다.
(출 32:32) “그러나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아니하시오면 원하건대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 내 이름이 생명책에서 지워져 지옥에 갈지언정, 저 백성들을 지옥 가게 둘수 없다는 배수진의 기도, 이것이 바로 영혼을 품은 해산의 수고입니다.
선지자 사무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백성들이 하나님을 왕의 자리에서 밀어내고 인간 왕을 구하며 배은망덕하게 굴 때, 사무엘은 가슴이 찢어졌습니다.
그러나 그는 백성들을 저주하거나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삼상 12:23)“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범하지 아니하겠다” 선언하며 기도의 무릎을 꿇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한결같이 영혼을 위해 울 줄 아는, 해산의 고통을 아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교회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신학자이자 성자로 일컬어지는 어거스틴을 잘 아실 것입니다.
그는 젊은 시절 마니교라는 이단에 빠졌고, 사창가를 드나들며 사생아를 낳을 정도로 방탕한 삶을 살았던 타락한 청년이었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이 “저놈은 인간 말종이다, 소망이 없다”라며 손가락질하고 포기했습니다. 그러나 단 한 사람, 그의 어머니 모니카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모니카는 아들을 위해 눈물로 침상을 적시며 수십 년간 새벽마다 제단을 눈물로 적셨습니다.
견디다 못한 모니카가 당시 암브로시오감독을 찾아가 눈물로 하소연할 때, 감독이 그 어머니에게 유명한 위로를 건넸습니다. “눈물로 기도한 자식은 결코 망하지 않습니다.” 결국 그 눈물의 기도대로 어거스틴은 방탕의 자리에서 돌아와 기독교 역사상 가장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어거스틴이라는 찬란한 그리스도의 형상은, 어머니 모니카의 수십 년에 걸친 눈물의 해산 수고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의 가정과 교회 안에 바로 이 사랑의 수고가 회복되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너무 쉽게 판단하고 쉽게 포기합니다. 낙심하고 방황하는 남편을 향해, 세상으로 나아가는 자녀들을 향해 “너는 왜 그 모양이냐”라고 비판하고 소리지르기는 쉽지만, 그 영혼이 예수를 닮기까지 가슴을 치며 기도하는 해산의 고통은 피하려고 합니다.
목원들이 실족하여 교회를 떠날 때, “믿음이 저것밖에 안 되니 나간 거지”라며 정죄하진 않았습니까? 기억하십시오. 그리스도의 형상은 차가운 비판의 얼음판 위에서는 자라지 않습니다. 오직 눈물의 중보기도와 포기하지 않는 사랑의 품안에서만 빚어집니다. 내 목장식구를 위해, 내 자녀를 위해, 믿음에서 멀어진 내 이웃을 위해 바울처럼 “내가 너를 위해 다시 해산하는 수고를 하겠다” 결단하며 눈물로 무릎 꿇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그리스도의 형상은 오직 '성령의 역사'를 통해 완성됩니다.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는 것은 인간의 의지나 결단이 아니라, 오직 ‘성령님의 역사’를 통해서만 완성됩니다. 본문 19절에서 바울이 강조하는 핵심 단어는 사역이나 성공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형상’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단순히 도덕적으로 세상 사람보다 조금 더 착한 교양인으로 만드시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속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온전히 연합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일이 가능합니까?
우리가 아무리 결심하고 결단해도 그 결심이 며칠이나 갑니까? 사소한 말 한마디에 또다시 분노가 치밀어 오르고, 내 자존심 하나 건드리면 무너져 내리는 것이 우리 연약한 인간의 의지 아닙니까? 인간의 노력으로는 절대로 그리스도의 형상을 만들어낼 수 없습니다. 고린도후서 3장 18절은 이 거룩한 변화의 비밀을 이렇게 선포합니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여기에 핵심이 있습니다.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우리를 변화시키고, 우리 안에 예수를 조각해 내시는 분은 내 의지가 아니라 오직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성령을 받기 전 사도 베드로를 보십시오. 그는 예수님 앞에서 호언장담했습니다. “주님, 다른 사람들이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죽는 자리까지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대단한 결심이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위기가 찾아오고 어린 여종이 다그치자, 무서워서 벌벌 떨며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하고 저주했던 비겁한 겁쟁이였습니다. 그것이 베드로의 한계였고, 인간 의지의 바닥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베드로가 오순절 마가다락방에서 성령의 충만함을 받자 어떻게 바뀝니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던 서슬퍼런 종교 지도자들 앞에서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담대하게 복음을 전합니다. “내가 사람의 말을 듣는 것이 옳으냐,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옳으냐 판단하라!” 예수를 전하다 채찍에 맞고 감옥에 갇혀도 “내가 주의 이름을 위해 고난받는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했다”라며 찬송을 부릅니다.
마침내 거꾸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까지 신앙의 지조를 지켰습니다. 겁쟁이 베드로를 위대한 순교자 베드로로, 예수의 형상을 가진 사람으로 변화시킨 동력이 무엇입니까? 베드로의 수양입니까? 결단입니까? 아닙니다. 오직 그 안에 역사하신 성령의 능력입니다! 이것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성도 여러분, 조각가가 거대한 돌덩어리를 가지고 아름다운 작품을 만들 때, 단 한 번의 망치질로 완성하지 않습니다.
정을 들고 수천 번, 수만 번을 쪼고, 깎아내고, 다듬는 지루하고 섬세한 과정을 거칩니다. 하루 이틀 볼 때는 돌덩어리에 아무 변화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조각가의 손길이 계속되면, 어느 날 거친 돌덩어리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듯한 아름다운 작품이 탄생합니다. 성령님께서 우리 삶을 만지시는 손길이 이와 같습니다.
우리가 매일 드리는 예배를 통해, 날마다 묵상하는 말씀을 통해, 무릎 꿇는 기도의 시간을 통해 성령님은 우리 안에 완악하고 거친 자아의 돌덩어리들을 조금씩 깎아내고 계십니다. 어제보다 오늘 조금 더 참게 하시고, 오늘보다 내일 조금 더 용서하게 하십니다. 낙심의 자리에 소망을 품게 하시고, 미움이 가득한 곳에 눈물로 사랑의 씨앗을 심게 하십니다. 내 힘으로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던 원수같은 그 사람을, 성령이 내 마음을 만지시니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생기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신앙생활은 내 힘으로 끙끙대며 도덕적인 바른 생활을 하는 종교 행위가 아닙니다. 내 안에 계신 성령님께 내 인생의 운전대를 온전히 맡겨드리는 과정입니다. 예배를 드리는 이유도, 말씀을 읽는 이유도, 기도의 자리에 나오는 이유도 단 하나, 성령의 통치 아래 들어가 예수님을 닮기 위함입니다. 오늘 이 시간, 우리 마음을 성령님께 내어 드립시다.
“성령 하나님, 내 거친 인격과 혈기를 깎아주시고, 내 안에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온유하고 겸손한 형상만을 이루어 주옵소서.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기까지 주님의 손에 나를 맡기오니 성령이여 내 심령을 충만하게 사로잡아 주옵소서!” 이렇게 고백하며 성령께 순종할 때, 성령께서는 반드시 저와 여러분을 날마다 예수 닮은 거룩한 천국 백성으로 변화시켜 주실 줄 믿습니다.
이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교인들을 향해 간절히 열망했던 소원,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이 소원은 비단 바울만의 개인적인 바램이 아닙니다. 오늘 세속화되어 가고 무기력해진 우리를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붙타는 소원입니다. 예수믿는 목적을 단순히 이 땅에서 복 받고 잘 살다가 죽어서 천국가는 차원에 가두어 두지 마십시오.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라면 마땅히 왕의 자녀다운 성품, 즉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성숙함 이 있어야 합니다. 언젠가 우리 모두는 이 땅의 장막 집을 벗고 거룩하신 하나님 보좌 앞에 단독자로 서게 될 날이 올 것입니다. 그 심판대 앞에서 하나님께서 과연 우리에게 무엇을 물으실 것 같습니까? “너 세상에서 아파트 몇 평짜리에 살다 왔느냐?” “너 세상에서 통장 잔고가 얼마였고, 네 자식들 얼마나 출세시켰느냐?” “너 교회에서 얼마나 높은 직분을 얻고 대접받다 왔느냐?”
하나님은 그런 것들을 묻지 않으실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중심을 꿰뚫어 보시며 단 하나의 질문을 던지실 것입니다. “너는 내가 준 인생의 시간 동안, 내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얼마나 닮아왔느냐? 네 심령 속에 내 아들 예수의 형상이 얼마나 선명하게 새겨져 있느냐?” 그 엄숙한 날에, 주님 앞에 부끄러움 없이 서서 “주님, 참으로 부족하고 연약한 자였지만, 오직 주님의 은혜와 성령의 도우심으로 주님 닮기를 몸부림치며 여기까지 왔습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 나눔이야기-------------------------------------------------------
1. 예수님의 세 가지 성품(사랑·온유·겸손) 중 내 삶에서 가장 먼저 회복되어야
할 성품과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2. 바울처럼 한 영혼이 예수를 닮기까지 내가 포기하지 않고 눈물로 해산의 수고
(중보기도·섬김)를 다해야 할 대상은 누구입니까?
3. 나는 지금 성령님의 다듬으심에 얼마나 순종하고 있습니까? 최근 성령께서 내
삶가운데 변화시키고 계시는 부분이 있다면 무엇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