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계 1:1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것은 예수님께서 주신 계시(啓示)라는 말씀이다. "계
시"란 말은, 헬라 원어로 아포칼류시스(* )라고 하는데 감취었던
것이 열리어 나타난 것을 의미한다(Lohmeyer). 이 세상 끝에 관한 일을 누가 알리요
마는 창조주께서 계시하면 알 수 있는 것이니 알게 하는 권세가 그에게만 있다. 그러
므로 옛날부터 철학이나 과학이 그것을 알지 못하였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일
에 대하여 그것들이 월권(越權)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누구에게 이 계시가 임하였는가? 그것은 사도 요한에게 임하였다. 계시 받
은 이가 사도인 만큼, 그것의 효용(效用)은 모든 신자들에게 공동(共同)으로 미친다.
곧, 그것은 선지자나 사도의 사용(私用)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온 교회의 공동 유익한
것이다. 그러므로 계시록(啓示錄)을 읽는 자는, 그것이 사도에게와 마찬가지로 그 자
신에게 직접 관계를 가지고 임함을 알아야 할 것이다.
반드시 속히 될 일.- "반드시"라는 말은, 헬라 원어로 다이(* )라고 하는데,
예언적 필연성을 함축(含蓄)한다. 곧 로마여(Lohmeyer)의 말과 같이 그것은, 하나님
께서 그 정하신 대로 성위하실 일의 절대적 확실성을 가리킨다(* bezeichnet
eine prophetische Notwendigkeit die absolute gewissheit, dass Gottes Plan sich
erfllt. off. p.8). 본서에 기록된 예언은, 그대로 성위되지 아니할 수 없는 불가항
적(不可抗的)인 실현력(實現力)을 띠고 있으니 그것을 믿는 자는 지자(智者)이다.
"속히"라는 말은, 헬라 원어로 엔타카이(* )라고 하는데, 크레다너스
(Greijdanus)는 그것을 "급히"(成就行步의 속도를 이름이고 그 기간의 짧음을 이름이
아님)란 의미로 본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시기 위하여 신적
(神的) 속도로 모든 일을 성취해 가신다고 생각된다. 그는 이런 간절한 열성으로 이
렇게 우리를 위하여 일하시지만, 좁고 미련한 우리의 심정에는 그것이 더디게 생각된
다.
지시하신 것이라.- "지시하신"이란 말은 헬라 원어로 에세마넨(* )
이니, 상징(象徵)으로 표시하였다는 의미이다(Greijdanus). 그러므로 계시록은 여자
적(如字的)으로 해석하는 것보다 상징적으로 해득(解得)함이 옳다. 그러한 상징이 계
시록에 사용된 목적이 무엇인가? (1) 귀 있는 자는 들을 수 있게 하려 함이다(계 2:7;
마 13:9). 곧, 성령을 받아서 신령한 귀가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만 그것을 깨닫도록
하려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미래사(未來事)가 상징으로 표시될 때에 분명히 깨달아
지는 방면이 많다. (2) 진주 같이 귀한 진리가 천히 내던지우지 않고(마 7:6), 상징
(象徵)의 막(幕)으로 가리움이 된 것은, 간절히 사모하는 자만이 깨닫도록 하기 위함
이다. 곧, 진리를 애모(愛募)하지 않는 자들에게는 그것이 숨겨지기 위한 것이다(마
13:1-15).
계 1:2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곧 자기의 본 것을.- 여기 세가지 엇구는
동일한 내용을 가리키는 다른 형식(形式)의 표현(表現)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예수님
으로 말미암아 증거되어 나타났고, 그것이 사도 요한에게 보여진 것이다. 계시록(啓
示錄)의 내용은, 곧, 주님의 증거에 관한 것이다.
계 1:3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지키는 자들.- 여기에,"읽는 자"(*
)라고 단수로 쓰고, "듣는 자들"(* ) 또는 "지키는 자들"(*
)이라고 복수로 쓴 목적은 무엇인가? 그것은 교회의 공석에서 한 사람이 성경을 읽
고, 회중은 듣는 장면을 가리키려는 것이다. 즈안(Theodore Zahn)은, 2,3세기 교회가
성경의 어느 다른 부분보다 계시록을 이렇게 읽어서 핍박 가운데서 위로 받은 사실을
지적하였다. 이것을 보면, 성경을 사사로이 독학(獨學)함보다 교회적으로 성경을 공
독(公讀)하며 풀어서 설교함을 듣는 것이 원칙이고, 더욱 영감(靈感)에 부요한 일이
다.
때가 가까움이라.- 이 점에 근거하여 크레다너스(Greijdanus)는, 계시록을 순전히
역사적(歷史的)으로 보는 학자들의 그릇된 것을 지적하였다. 그리고 그는 계시록을
가리켜 미구(未久)에 발생하기 시작할 일들과 세상 끝의 일들과 및 내세(來世)의 일들
을 포함하는 예언(豫言)이라고 하였다(bestijds spoedig aanvangen zoude te
gebeuren, en vervorgens in snel verloop plaats grijpen zoude den ganschen loop
des tihds df der eeuwen...),이 견해는 문의(文意)에 적합(適合)하고 자연스럽다.
예언을 상고하고 지키는 자들이 복 있음은 예언이 그렇게 연구하는 자에게만 축복을
가져다 주게끔 되어 있기 때문이다.
계 1:4
일곱 교회.- 왜 "일곱"수를 택하였는가? 아시아에는 이 밖에 다른 교회들(골로새,
히에라폴리스, 막네시아, 드로아 등)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일곱 교회"만을 선발
(選拔)하여 말하였으니, 저자 요한의 염두에는 일곱 수의 영적(靈的) 의미를 생각한
것이 분명하다. 일곱 수의 영적 의미는 거룩하고 완전한 것으 상징한다(Moffatt,
Greijdanus). 그렇다면 일곱 교회는 각 시대의 모든 세계 교회를 대표한다. 카이퍼
(A. Kuyper)도 이런 의미로 말하기를, "그리스도께서 7 교회에서 일곱 가지 교회 형편
을 보신다. 이 일곱 가지 형편은 모든 시대와 모든 지방에 나타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다(The Revelation of St. John, p.42).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로 말미암아).- 이 말씀은, 헬라 원어
로 아포 호 온 카이 호 엔 카이 호 엘 코메노스(*
)라고 한다. 여기 아포(* =말미암아)라는 전치사(前置詞)가, 하나님 성호의 주
격 명사(* ) 위에 놓인 것(아포
는 소유격 명사 위에 놓이는 전치사인데도 불구하고)은 파격(破格)이다. 이 파격은,
영원 불변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고유 명사에 대하여 침범하지 않으려는 경외(敬畏)
의 동기에서 표현된 것이다. 크레다너스(Greijdanus)도 말하기를, "이런 문투는 부주
의도 아니며 실수도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불변성을 가리키기 위한 것이다"라
고 하였다(Openbaring, p.14). 이 성호는,구약의 여호와(* =영원 자존자)란
말 뜻과 같은 것을 의미한다(출 3:14 참조). 그러므로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 택한
백성에게 계약하신 대로 어김 없이 구원을 성취하여 주신다는 뜻을 가진다(말 3:6).
일곱 영.- 이것은 성령님을 가리키는데, "일곱"수로서 말한 이유는, 스가랴 예언서
에 벌써 성령님을 여호와의 일곱 눈으로 비유했기 때문이다(슥 3:9; 계 5:6), 일곱 수
는 완전과 성결을 상징하는 듯한데 성령님의 위(位)는 단일(單一)하시되, 그의 속성과
권능(權能)은 완전하시다는 의미이다. 반 델 모일렌(Van Der Meulen)은, "일곱 영"이
란 뜻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완전수(完全數)의 은사(恩賜)들을 부어 주시는 하나님
의 은혜의 신(神)을 가리킨다고 하였으니(사 11:2), 가장 이연(理然)한 해석이다(De
Openbaring in Het Laatste Bijbel-boek, pp.38-39). 이 성령님께서 "보좌 앞에"계시
다 함은, 그가 성부신(聖父神)님의 왕적 권위(王的權威)와 능력과 기타 모든 속성들을
그대로 나타내시는 사역자(使役者)라는 의미이다. 크레다너스(Greijdanus)는 이 점에
있어서 성막(聖幕)의 구조를 연상하였다. 곧, "보좌"는 지성소(至誠所)요, "일곱 신"
은 성소(지성소 앞)에 있는 일곱 등(燈)에 해당하며, 다음 절의 그리스도는 속죄자(贖
罪者)니 만큼, 제단에 해당하다고 하였다(출 40:1-6 참조)(In het heilige der heili
gen was de ark. Daar troonde God, EX. 25:22. Voor dit binnenste heiligdom was
het heilige, waarin de kandelaar mit zijne zeven lamen brandde, Ex, 40:24, 25.
En voor dit heilige bevond zich het voorhof, waarin de dienst der verzoening
uitgericht werd, Ex. 40:25-33-Openbaring, p.16).
계 1:5
충성된 증인.- 본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삼직(三職), 곧, 선지(충성된 증인), 제사
(죽었던 자), 왕(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을 가리켜 말한다. 그 중에도 이
문구(충성된 증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일생을 통하여 가진 고초를 무릅쓰시고
심지어 죽으시므로 무지 몽매한 인류에게 하나님을 알리는 일을 하신 것을 가리킨다
(마 11:27; 요 1:18, 14:6, 18:37; 딤전 6:13). 하나님을 알려고 하면 예수 그리스도
를 아는 것이 그 독일 무이(獨一無二)한 길이다(요 14:6). 누구든지 예수를 믿으면
하나님의 어떠하심과 그의 계심을 알게 된다. 인간은 자기의 지능(知能)으로 하나님
을 아는 자리에 들어갈 수 없다. 그 이유는, 인간이 죄로 인하여 어두워진 까닭이다
(고전 1:21). 하나님이 인생에 구원(救援)을 주시는 영지(靈智)는 오직 예수를 믿음
에 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仲保)이시니, 우리는 그를 통해서만
하나님과 교제(交際)할 수 있다.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시고.- 여기 이 문구(*
)는, "죽은 자들 중의 그 먼저 난 자"라고 함이 적역(適譯)인 것이다. 그렇다면 그
의미는, 모든 죽은 자들의 선봉적 부활자(先鋒的復活者)란 것이다. 그것은, 그가 먼
저 그의 백성을 위하여 죽음을 이기시고, 죽음을 소멸하셨기 때문에 그의 백성들은 그
의 공덕(功德)으로 말미암아 부활의 영광에 들어가게 됨을 가리킨다. 크레다너스
(Greijdanus)는 말하기를, "그 먼저 난 자"란 원어 프로-토토고스(*
)는, 시간적 수위(時間的首位)인 동시에 부활권세(자기와 모든 신자들을 위하여 사망
을 이기는)의 소유(所有)를 표시한다(* drukt de gedacht uit
van eerste in tijd voor ganger en dan, daarmede samenhangende van
machthebber.-Openb.p.16)(1:18 참조). 예수님 이전에 몸으로 다시 산 자들이 없지
않으나, 예수님의 부활(復活)처럼 다시 죽지 않는 부활을 취한 자는 이때까지 예수님
밖에 전연 없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의 선봉이라 함은, 그가 사망을 이기시고 몸
된 교회를 이끌고 부활에 들어가셨으므로 그에게 연합한 몸되는 교회는, 동일(同一)한
부활에 끌려 들어간다. 그리스도께서 사시므로 우리가 살게 됨이 성경의 부활 교리이
다(요 14:19; 엡 2:5,6 참조).
땅의 임금들의 머리(*
).- 이것은, "땅의 왕들의 통치자"하는 뜻이다. 그리스도의 죽으셨다가 다시 살으심
은, 그로 하여금 교회의 왕이 되게 함과 온 인류의 왕되심을 성립시켰다(롬 14:9).
사단은 그리스도로 하여금 범죄케 하여 천하 만국을 받도록 유혹하려 하였으나(마
4:8-), 그리스도는 자기의 죽으심으로 그것(천하 만국)을 얻으셨다(제 19:12,16).
그가 만왕의 왕이시기 때문에 신자들의 부활과 구원을 이루신다(요 3:35,36; 빌
3:21). 여기서 그리스도를 만왕의 왕으로 보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종말관적(終末
觀的) 지위를 바라봄이다. 그의 종말관적 내림(來臨)은, 그 구체적 통치를 특색으로
한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주의해야 될 것이 있으니, 곧, 그것이 그 방식
과 형태에 있어서 이 세상에 속한것도 아니거니와 섭리적(攝理的)인 것도 아니고 초자
연적인 것이라는 것이다(17:19 참조).
우리를 사랑하사.- 사랑은 속죄(贖罪)의 기본이다. 사랑이 없는 곳에 희생이 없
다. 죄인인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신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사랑의 극치(極致)이다.
사랑은 보수적(報酬的) 행위가 아니고 순 희생적 행위인 것이다.
그의 피로.- "피"는 생명과 같은데, 죄 값은 오직 "피" 곧, 생명의 지불로서야 성
립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죄 값은 피(생명의 지불, 사망)로써만 물어줄
수 있다(창 9:4; 히 9:22). 그리스도의 피는 하나님의 아들의 "피"니 만큼, 그 많은
택한 백성들의 죄 값을 담당하고도 무한히 남는 귀한 "피"인 것이다. "피"란 말은,
성경에 도합 700번 나온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피 밖에는, 우리를 구원하실 길이
없음을 이렇게 힘있게 약속하셨다. 우리로서는 그리스도의 피를 그 만큼, 힘있게 믿
어야 된다.
바울은 신자들을 속죄하여 주시는 그리스도의 보혈을 힘있게 믿는 의미에서 말하기
를, "내가 너희중에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 하였다. 루터(Luther)는 말하기를, "하나님의 아
들은 나를 사랑하여 자기 자신을 나에게 주셨으니 그것은, 율법과 및 인간의 행위의
의(義)에 대하여 터진 뇌성벽력 같은 반대이다. 만일 네가 하나님의 아들을 비교할 수
없는 보화로 여길진대 네 모든 종교 의식과 행위와 공로는 지옥으로 던져라. 그 이유
는, 네가 하나님 아들의 죽음 밖에 하나님의 진노를 멈추어 화해시키는 것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해방하시고.- 이것은, 헬라 원어로 뤼산티(* )라고 하는데 이는 알려
(* )과 알렉산드리아 사본(寫本)의 사구(寫句)이고, 어떤 사본(R, Q)에는 루-우산티
(* )로 되어 있으니, 그 뜻은 "씻으시고"라고 한다. 크레다너스
(Greijdanus)와 기타 유명한 주석가들은 첫째를 택하였다. 모팟트(Moffatt)도 그리하
였다. 죄는 우리를 멸망의 형벌에 매는 줄인데, 그리스도는 그의 죽으심(피)으로 이
무서운 줄을 끊으시고 멸망의 형벌에서 우리를 해방하셨다. 기독 신자들은 예수 그리
스도의 보혈로 말미암아 이 형벌을 면하게 되었으니 어찌 찬송하지 않으랴!
계 1:6
그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그리스도의 구원 행위의 업적은 물론 제 1착으로 우
리에게 미쳤다. 그러나 그것의 최종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데 있는 것이다
(계 22:3; 엡 1:6).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사 자기를 알고 또 섬기게 하려는 것을
일향(一向) 목적하시는데(엡 1:5,6), 그리스도께서 그 구원 행위로써 이를 이루신 것
이다.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나라와 제사장"이라는 말은, 헬라 원어로 바실라이안
히에라이스(* , )인데 그 뜻은 "나라, 곧 제사장들"이
다. 무질서한, 혹은 개인주의의 제사장들의 군중(群衆)이 아니고, 그리스도를 임금으
로 모시고 질서 있고 평화로운 단체로서의 제사장들을 가리킨다. 땅 위의 교회는 이
렇게 질서와 평화를 생명 같이 지니어야 한다. 이는, 출 19:6의 예언의 궁극적(窮極
的)성위인 것이다(5:10, 7:15, 20:6, 21:3). 롬 12:1; 히13:15; 벧전 2:5 참조. 모든
신자들은 다 함께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들이니, 그들의 왕(그리스도)의 말씀(선지와
사도들의 증언-성경)을 엄수(嚴守)하여 영적 질서를 세워야 된다. 벡크위드
(Beckwith)에 의하면, 여기 이른바, "나라와 제사장"이란 문구는, 신자들이 내세에서
왕됨과 겸하여 제사장됨을 가리킨다고 한다(The kingship of God's people in the
Messianic kingdom is another aspect of their priesthood.-The Apocalypse of John,
p.430).

( 주님 께서 다시 오심 )
계 1:7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앞의 4절에는 성부(聖父)되신 하나님께 대하여 "오실 자"
로 말하고, 여기서는 그리스도에게 대하여 그렇게 말하였다. 요한은, 그리스도의 활
동을 하나님 아버지의 그것과 동일시(同一視)함이 그 특색이다. 이는 물론 위(位)에
대한 동일시가 아니고 신성(神性)에 대한 것이다. 크레다너스(Greijdanus)는, 이 점
을 선히 간취(看取)하고 해명하였다(in vs 4heet de vader * .
Hier wordt van Heere Christus gezegt, dat Hij komt voor Johannes is dus Zoon
volkomen gelijk aan den Vader. vgl. ook vs.8, wel niet wat persoon aangaat, vgl.
vss. 4 en 5,5:1, 6. maar wat wezen betreft. De vader komt in den Zoon). "구름"
은 무엇을 상징하는가? 여자적(如字的)으로 자연계의 구름인가? 크레다너스
(Greijdanus)는 이것을 하나님의 영광의 가견적(可見的) 계현(啓現)이라 하였다(deze
wolken zijn de zichtbare openbaring van zijn Goddeliike majesteit). 출 13:21,
14:16, 14:19 참조. 그렇다면, 이 "구름"은 보통 구름이 아니고 기이한 구름일 것이
다. 모세가 미디안 광야에서 가시덤불에 붙은 불을 보았는데 그 불은 자연계(自然界)
의 불이 아니었다. 그 불이 가시덤불에 붙었으나 가시덤불이 타지 않았던 기이한 불
이었음과 같이, 여기 "구름"도 그러한 기이한 구름이 아닐까? 행 1:9-11 참조. 그러
나 이 구름을 문자적으로 자연계의 것으로 보아서 틀릴 것 없다(Lange). 그가 승천하
실 때에는 구름이 그를 가리운 일도 있었고(행 1:9), 그가 다시 오실 때에 그와 같은
모양으로 오실 것이라고 하였다(행 1:10).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이것을 보면, 주님의 종말적(終末的) 내림(來臨)은 조
금도 숨김이 없어서 누구나 볼 수 있게 오신다. 그것이 어떻게 그와 같이 되는지에
대하여는 우리가 예측(豫測)하기 어렵다. 그렇게 그것이 초자연적(超自然的) 사리(事
理)에 속하는 한, 우리의 자연적 지식으로써 예측하기 어려움이 오히려 마땅한 것이
다.
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요.- 슥12:10; 요19:34,20:25,27 참조. "그를 찌른 자
들"은 누구 누구냐? 이들은 그를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이며, 그의 옆구리를 창으로
"찌른 자들"이라고 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주님을 박해하는 자들에게 대한 통칭(通
稱)이다. 그리스도께서 처음 오셨을 때에는 그를 주(主)로 알아 보지 못한 자들이 많
았다. 그러나 그가 다시 오실 때에는 가장 악한 원수들도 그를 하나님으로 알고 떨게
된다. 모팟트(Moffatt)는, "그를 찌른 자"란 말이 유대 민족을 가리킨다고 하였으나,
적합한 해석이 아니다.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들이 "애곡"(哀哭)하는 이유는, (1) 그렇게 종말이 이
르기 전에 회개(悔改)하지 못한 것을 뉘우쳐(회개는 아님-마 27:3) 통분히 여기는 까
닭이며, (2) 이제 오신 주님으로 말미암아 무서운 심판 받을 것을 두려워하는 까닭이
다(마 8:12).
그러하리라 아멘.- 여기 "그러하리라"란 말은, 헬라 원어로 아니(* )라고 하
는데, "예"(참되다는 뜻)라는 뜻이다. 이것이, 그 아래 있는 히브리어 아멘(* )
에 해당한 말이다. 이 점에 있어서 크레다너스(Greijdanus)는 말하기를, "요한은 여
기서 그리스도의 종말적(終末的) 내림(來臨)의 확실성에 대하여 두 나라 말로 이중(二
重) 확보(確保)를 표시한 것이다. 이렇게 그가 이중 확보한 이유는, 주님의 종말적
내림이 그 약속하신 대로 불변함을 강조하려는 까닭이다"(De Grieksche en de
Hebreeuwsche woorden ter bevestiging woor den hier bijeengevoegd om te sterker
de stellige zekerheid uit te spreken, dat de Heere alzoo komen zal, gelijk Hij
beloofd heeft)라고 하였다.

( 주님 께서 다시오심 )
계 1:8
본절은 앞절에 말한 주님의 종말적 내림에 대한 확보니, 이는, 하나님의 성호(聖號)
로써 표시된다. 하나님의 성호 그것의 의미가 벌써 그의 재림을 함축(含蓄)한 것이
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본질 성호는 그 본질의 표호이므로 벌써 그의 종말적 내림
이 필연적으로 포함된 것이다. 크레다너스(greijdanus)는 말하기를, "그의 본질(本
質)로 좇아 그의 행사들이 나온다"라고 하였다(uithet zijn of wezen Gods, volgt
zijn werkin).
알파와 오메가.- 이것은, 헬라어 문자의 첫 글자(* )와 끝 글자(* )를 가리킨
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시작하신 신(神)이시고 또한 귀정(歸正) 결말(結末)하시는
신이라는 뜻이 여기 있다. 다시 말하면, 그는 창조자이시고 또한 심판자이시다.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이 성호는 4절에도 있는데, 출 3:14의
"영원 자존자"란 말의 히브리어인 여호와(* )의 해설적 번역임에 틀림 없다
(Greijdanus). "영원 자존자"의 의미는, 창조를 받지 않고 자존(自存)하사 영원 불변
하시고 만사 만물을 그 기쁘신 듯대로 주재(主宰)하시며 또 때가 이르면 그것들을 임
의로 심판하사 정리하시는 자라는 뜻을 가진다. 이 해설적 번역에 있어서 "장차 있을
자"라고 하지 않고 "장차 오실 자"라고 의역(意譯)하여 옮긴 것은, 여호와(* )
란 성호가 포함한 재림의 뜻을 의식적으로 적발(摘發)함이다.
전능한 자.- 헬라 원어로 판토크라토-르(* )이니, 재림하실
자가 가지지 않으면 안될 속성(屬性)을 보여주는 말씀이다. 우주(宇宙)의 최종적(最
終的) 귀정(歸正)을 하실 주님이 무소불능(無所不能)하시지 않을 리는 만무하다.
계 1:9
나 요한은 너의 형제요...동참하는 자.- 여기 "형제"란 말과 "동참하는 자"란 말
이, 헬라 원문에는 한 관사(冠詞)에 함께 속하여(*
) 서로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 그것은, "형제"이므로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
게 된다는 인과(因果) 관계를 암시한다. 여기서 요한이 자기의 직명(職名=사도 혹은
선지자)을 기입하지 않은 사실에 대하여 우리는 이상히 여길 것 없다. 그는 본서를
기록함에 있어서 물론 사도의 권위로 하나님의 말씀을 교회에 전한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그는, 그 자신이 교회로 더불어 고난과 영광에 동참하는 형제라는 것을 강조하
면서 본서를 기록한 것이다. 마 23:8 참조.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 이 문구에 있어서 "예수의"란 말은 "환난", "나라",
"참음"의 세 말을 공통적으로 연결한다(*
). 그러면 그것은, "예수의 환난", "예수의 나라", "예수의 참음"을 의미한다. "예
수의"란 말은, 헬라 원어로 엔 예수(* )이니, "예수 안에"한 말이다.
예수 안에 환난과 나라는, 예수와 연합한 관계로 참예할 환난과 천국이요, 예수 안에
참음은, 예수께서 모본으로 보여 주시고 또 힘 주시어 참게 하시는 참음이다
(Moffatt). 환난은 나라에 이르는 길이요,참음은 그 길을 걷게 하는 힘이다.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인하여.- 2절 해석 참조.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
곧, 복음을 위하여 핍박을 받아 밧모섬으로 추방된 것이다.
밧모.- 이것은 작은 섬 이름인데, 에베소에서 14시간 쯤 항해하여 도착되는 곳이
다. 그 때에 이섬에 범죄자들을 많이 정배 보냈다고 한다(Moffatt).

( 밧모라 하는섬에 있는 사도 요한 )
계 1:10
"주의 날" - 은, 우리들이 지키고 있는 성일(聖日)을 이름인데, 이 날은 사도 시대
부터 벌써 성별(聖別)한 날이었다(고전 16:2). 교회가 이 날을 지켜 내려온 증거는
사도 후시대(使徒後時代)에도 많이 있다(Didache 14.Ignatius ad Man. 9).
성령에 감동하여.- 이는 헬라 원어로 에게노멘 엔 프뉴마티(*
)이다. 그 의미는 "성령 안에 있었다"는 것이니, 로마여(Lohmeyer)의 해석은 다음과
같다. 곧, 이것은, 성령 안에 있다는(롬 8:9) 관습적(慣習的) 상태가 아니고 일반적
입신(入神)도 아니라 황홀(恍惚)한 영계(靈界)에 옮겨졌음을 이름이다(계 4:1; 고후
12:1).-Nicht einen dauernden havitus gleich dem *
(Rm. 8:9) auch wohl nicht nur allgemein den eintritt des ekstatischen Zustandes
sondern speziell die ekstatische entruckung (S. zu 4:1 und vgl. etwa 2 cor.
12:1 ff). 그러나 이 때에 요한이 잠이 들었던 것도 아니고, 정신을 잃은 혼수 상태
에 빠진 것도 아니며 그와 반면에 그 정신이 똑똑하여 자주 의식(自主意識)을 가지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Greijdanus).
나팔 소리 같은.- "나팔 소리 같은"것이고 나팔 소리는 아니다. 옛날에는 민중을
깨워 부를 때에 나팔을 사용했다(민 10:2). 그러므로 이 "소리"는 깨우는 영음(靈音)
임에 틀림 없다.
계 1:11
본절에 있는 "일곱 교회"에 대하여는, 2, 3장에 나오는 각 교회에 대한 해석을 참조
하여라.
계 1:12
일곱 금 촛대.- 이것은 20절에 해석되었으니, 곧, 일곱 교회이다. 출 25:31-40 참
조.

( 촛대 한가운데 인자와 같은 이 )
계 1:13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 이 분은, 단 7:13에 있는 "인자" 곧, 메시야(그리스
도)이시다. 이 분이, 교회들 가운데 언제나 계시는 그리스도이신데, 그 분에 대하여
이 아래에 많은 비유의 말씀들이 나온다. 사이스(Seiss)는 이 아래 기록된 모든 표현
들을 비유로 보지 않고 여자적(如字的)으로 보았으니 잘못이다(A. Rieters, Studies
in The Revelation of St. John. p. 87). 헨드릭센(Wm, Hendricksen)은, 여기 묘사
(描寫)된 그리스도는 늘 교회에 계심을 그 특징으로 한다는 의미로 말하고, 따라서 이
부분 말씀과 다음 장들(2,3장=교회론)과의 연락이 밀접하다고 역설(力說)한다(More
Than Conquerers, pp. 33-34).
발에 끌리는 옷.- 이것은 대제사장의 옷이고(출 28:4, 29:5),
"가슴에 금 띠"- 는 군왕의 옷이다(Greijdanus). 그러면 요한은 여기서 제사장 겸
왕이신(시 110편; 사 6:1-5) 메시야를 본 것이다.

계 1:14
그 머리와 털의 흐기가 흰 양털 같고.- 이것은, 그리스도의 영생(단 7:9)과 성결
(사 1:18)을 상징(象徵)하는 것이다.
그의 눈은 불꽃 같고.- 이것은 그의 전지성(全知性), 곧, 무엇이나 모르심이 없으
신 지능(知能)이시다. 단 10:6 참조.

계 1:15
그의 발은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이것은, (1) 단 2:41-43의 "진흙과 무
회가 섞인 발"처럼 붕괴(崩壞)되기 쉬운 것이 아니고, 견고무비한 신국(神國) 혹은 심
판을 상징한다. 단 2:31-35 참조. (2) 예수님의 초림 시(初臨詩)에는 그의 발이 십
자가에 못 박힐 때에 상함이 되었지만 재림하실 때에는 영광과 권능으로 오시기 때문
에 원수를 밟아도 상하지 않는다.
그의 음성은 많은 물 소리와 같으며.- 이것은 그리스도를 하나님과 동일시하는 엇
구이다. 겔 43:2을 보면, 하나님의 음성이 많은 물소리와 같다고 하였다. 시편 29:3
에서도 역시 그리하였다. 이것은, 힘있는 소리여서 어떤 때는 모든 죄 있는 인간들을
두렵게 하는 회개의 도전(挑戰)이기도 하지만 세상 끝날에는 심판 선고의 무서운 말씀
이다.
계 1:16
그 오른 손에 일곱 별이 있고.- "오른 손"은 힘있는 손이니, 일하는 손이며
(Greijdanus), 보호의 역할을 하는 손이다. 그러므로 "일곱 별"을 "오른 손"에 잡았
다함은 교회의 사역자들(20절)을 통하여 능력 있게 일하신다는 뜻이다.
그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이것은 사람의 심혼 골수(心魂骨髓)를 쪼개
며 또한 죄악을 날카롭게 판단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킨다. 이 말씀이, 영적 병자
곧, 죄인을 해부아여 구원하며(히 4:12), 또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 자들을 정죄하며
심판한다(계 19:20; 요 12:48).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취는 것 같더라,- 하늘 나라의 영광을 얻으신 이의 광채
는 이렇게 빛난다. 그가 변화산(變化山)에서 영광을 나타내신 때에도 역시 그렇게 보
이신 것이다(막 9:3). 천국에 참예한 의인(義人)들의 모습도 역시 해와 같이 빛난다
고 하였다(마 13:43).

계 1:17
죽은 자 같이 되매.- 겔 1:28; 단 8:17 참조. 그가 이렇게 된것은 두려움에 붙잡
힌 까닭이다. 왜 그에게 그런 두려움이 임하였는가? 그것은 그가 인간이니 만큼, 연
약하고 죄도 있는 까닭이었다. 크레다너스(Greijdanus)는 말하기를, "그가 그렇게 된
것은, 그의 연약성 때문이라기보다 오히려 죄 때문이었겠다"(사 6:5 참조)라고 하였다
(De verklaring dezer overweldiging ligt niet zoozeer in's menschen broosheid als
wel in zijne zondigheid,vgl Jes, 6:5).
두려워 말라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이 문구의 헬라 원어(*
)를, 즈안(Theodore Zahn)은 다음과 같이 번역하였다. 곧, "두려워 말라. 이는 나로
다. 나는 처음과 나중이니"라고 하였다. "처음"과 "나중"에 대한 해석은 8절에 있으
니 참조하여라.
계 1:18
산 자라.- 헬라 원어로 호 존(* )이라고 하는데 불사성(不死性)을 가지시
고 늘 살아계신 분이라는 뜻이다.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열쇠"는 주권(主權)을 의미하는데(Greijdanus),
"사망과 음부"(陰府=죽은 자가 있는 곳)의 주권을 "가졌"다는 것은, 그가 친히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셨으니 만큼, 이제부터는 사망의 지배(支配) 아래 있는 자들을 그의
권세로 석방(釋放)하실 수 있다는 것이다. "음부"는 무엇인가? 그것은 헬라 원어로
하데스(* )니, 구약성경의 스올(* )에 해당한다. 신약에서는 이것이,
회개하지 않은 자들이 죽은 후에 가는 흉한 곳을 의미한다. 그러나 구약에서는 스올
이란 말이, 육신의 죽음 상태와 무덤을 의미하기도 하나, 별세한 영혼들이 가는 곳을
가리키는 말로도 사용되었다. 특별히 선한 사람이나 악한 사람이 다 갈 수 있는 곳인
듯이 가리킨다(왕상 2:2,9; 욥 3:13, 30:23; 시 89:48; 사 14:9; 겔 32:28). 거기 간
사람들이 서로 이야기할 수 있다고 말한다(사 14:9). 델리취(Delitzsch)는 이 장절을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곧, "여기 음부에 대한 견해가 비록 신화적인 성격을 가지나
두 가지 진리에 근거하고 있다. 그것은, (1) 인간이 무덤 이편에서 어떻게 생활한 것
이 무덤 저편에서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 (2) 하나님이 주신 환경에서 인간의 비물질
적인 형태가, 그 자결정(自決定)으로 이루어진 내용이 거울에 드러나는 것과 같이 드
러남을 보여 준다"고 하였다. 헬만 바빙크(Herman Bavinck)는 말하기를, "구약에서
'음부'에 대하여 말할 때에 죽은 자들이 거기 가서 존재하며 산다 하고, 또한 그들은,
땅에서처럼 서로끼리 알며 서로 만남으로 정서(情緖)도 움직여진다"라고 하였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구약의 "스올"이란 말에서 결론할 수 있으니, (1) 스올
은 무덤과 언제나 동일한 것이 아니라는 것, (2) 스올이란 말로써 악인이 가는 곳을
의미하는 동시에, 의인이 가는 곳을 의미하기도 하였다는 것이다(창 37:35). 그렇다
면 문제가 생긴다. 어떻게 악인과 선인이, 사후에 같은 곳에 갈 수 있을까? 그것은,
신약 사상에는 물론 안맞거니와 구약 사상에도 맞지 않는다(시 16:11, 17:15; 마
8:11,12). 그러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구약에서 "스올"이란 말이, 어
떤 때는 단지 육신의 무덤을 의미하는 것으로 그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또한 이
것은. 사후의 세계를 가리키기는 하나, 그 세계의 성격에 대하여는 길흉화복(吉凶禍
福)을 아직 포함시키지 않은 중세적(中世的)인 것으로서 그저 내세를 가리킨다(창
37:35). 로레인 뵈트너(Boettner)도 같은 의미로 말하기를, "구약에서 의인이나 악인
이 다 스올에 간다고 한 것 만큼, 스올이란 말이 반드시 상(賞)이나 벌(罰)에 대한 개
념을 가진다고 할 수 없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스올이란 말이, 신약에 와서는 헬라
어 아이데스(* )로 번역되고(행 2:27), 내세의 흉한 처소를 의미하고 있다
(눅 16:23). 악한 자들은 거기에 가서 고통을 받도록 되어 있다.
계 1:19
네 본 것과 이제 있는 일과 장차 될 일.- 여기 "네 본 것"은 다음 귀절이 해명
(解明)하였고, "이제 있는 일"은 2,3장에 기록된 교회 현상인 듯하고, "장차 될 일"은
6장 이하에 기록된 계시의 내용인 듯하다.
/////////////////////////////////////////////////////////////////////////////////////////////////////////////////
계 2:1
에베소 교회.- "에베소"는, 소아시아의 가장 중요한 도시인데 무역항이고, 당시 동
서양 문화의 교류 지점이었다(Greijdanus). 에베소는 소아시아의 중요한 교회인 고로
여기 첫머리에 기록된 듯하다.
오른 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이가 가라사대.- 일곱
서신은 그 첫 머리에 이처럼 주님의 사역적 명칭(使役的名稱)을 내걸고 시작하는데,
각 명칭은 각 서신 내용에 부합한다. "일곱 별을 붙잡"으시고다니시는 분은 곧, 교회
의 선악을 아실 것이니, 에베소 교회의 내용을 잘 아실 것은 시실이다.
계 2:2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 "행위"는 어떤 특별한 한개의 덕행(德行)이라기보다
이 아래 있는 몇 가지 덕행들을 총괄하는 머리말이다. "수고"란 말은 헬라 원어로 코
포스(* )인데 특별히 신산(辛酸)한 수고를 가리킨다. 에베소 교회에는 거짓
스승들의 활동이 적지 않은 듯하니, 그들을 축출(逐出)하는 일은 용이하지 않은 것이
었다. 그것은, 혈기로 할 수 있는 투쟁이 아니고 덕을 쌓으면서 싸워 나아갈 일이다.
이런 영전(靈戰)을 체험하지 못하고는 그 고생이 어떠함을 이해하기 어렵다. "인내
"란 말은, 헬라 원어로 휘포모네(* )라고 하는데 그 어원(語源)은 "아래
에 머문다"는 뜻이다. 인내야 말로 모든 고초하(苦楚下)에서도 개의(介意)치 않고 머
물러 서는 것이며 백절불굴(百折不屈)함이다. 이것은, 소극적으로 견디는 것 뿐만 아
니라 적극적으로 극복(克服)하고 나아가는 것을 가리키는 글자이다.
"악한 자"- 란 말의 헬라 원어(* )는, 관사(冠詞)없는 복수 명사(複數
名詞)이므로 "악한 것들"이라고 번역함이 적합한 듯하다(Greijdanus). 이 말의 헬라
원어 카코스(* )는, 본질적 악성(本質的惡性)을 의미하나니, 인자하신 하나
님과 및 교회도 그런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그런 악은 거짓 스승들의 교훈 곧, 이단
일 것이다.
자칭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회를 향하여 그런 거짓 스승들의 화를 주의하라고 미
리 경고한 바 있었다(행 20:28-30). 그 교회는 그대로 잘 주의하려고 한 듯하다. 마
7:26; 고후 11:13; 갈 1:8,9 참조.
계 2:3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 이 귀절은, 앞절 초두에
있는 말씀 내용을 중복하여서 역설한 듯하다. "내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하신
복음이다.
계 2:4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대하여 칭찬할 바를 먼저
찾으시고, 꾸지람은 뒤에 하시니, (1) 사람을 긍휼히 여기시는 인자(仁慈)요, (2) 후
에라도 책망할 것은 반드시 책망하셨으니 그의 공의이다. 그러나 이 꾸지람도 혈기에
속한 것이 아니고, 사람의 죄과를 고쳐 주시는 사랑의 동기로 하신 것이다. "처음 사
랑"(하나님과 사람에게 대한)은, 에베소 교회 신자들이 처음 예수님을 믿을 때에 가졌
던 사랑이다. 그들이 교리를 지키려는 열심은 가졌는데 왜 사랑을 버리게 되었던가?
그것은, 경험과 역사가 증명함과 같이 그렇게 되기 쉽다. 논전(論戰)과 투쟁이 있는
곳에는 사랑과 인정이 식어지기 쉽다. 그 이유는, 사람은 그 생활의 양면(兩面)을 구
비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힘써 사랑을 지키려고 하면 은혜 가운데서 될 수 있
다. 논전(論戰)이 필요한 시기가 있으나 그것을 혈기로 혹은 포학(暴虐)으로 하지 말
고, 지혜(智慧), 인내, 노력, 건덕(建德)으로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일 개인
신자가 단독(單獨)으로 하기 어렵고 모든 신자들이 합력하여야 할 일이다. 그들이 합
력하면, 지혜, 인내, 노력, 건덕이 있다. 에베소 교회에는 인내와 노력은 있었으나(2
절), 지혜와 건덕이 부족하였던 듯하다. 만일 그들에게 지혜와 건덕이 있었더면 사랑
도 있었을 번하였다.
계 2:5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이것은, 죄의 원인을 탐지하는 행위의 필
요를 역설함이다. 회개와 사죄(赦罪)의 길은 오직 기독교에만 있다. 산 같은 죄라도
진심으로 회개하면 용서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누가, 한번 죄를 회개했다가 불행히 다
시 범죄했어도,그가 참으로 회개하면 하나님은 사하시는가? 사하신다. 그것이 곧 사
죄다운 사죄이다. 그것이 곧 하나님이 생각하신 사죄이다(마 18:21,22). 회개는 이
와 같이 귀한 것이로되, 사람들이 범죄하고도 뻔뻔스럽게 그 귀한 회개를 하지 않는
때가 많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이런 죄인들로 하여금 회개케 하기 위하여 그들을
징벌하시는 일이 있다. 그런데, 이 징벌은, 회개를 목적한 것이요, 영멸(永滅)을 목
적한 것이 아니니 만큼, 그것은, 육신적 고통을 받는 정도의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무서운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범죄했으면 곧 회개해야 된다. 회개하되 그 죄행의 출발점이 무엇
인지 알아야 한다. 죄는 번연성(繁延性)을 가진 것이기 때문에 출발점을 완치(完治)
해 버려야 근치(根治)가 된다.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이것은, 에베소에서 교회가 없어질 것을 예언
(豫言)함인데, 오늘에는 과연 그 도시 전체가 폐허만 남았다고 한다(greijdanus,
Charles). 그 교회가 예수님의 이 권면을 듣지 않은 까닭으로 이렇게 된 것이다
(Newell). 램세이(Ramsay)는, 이 말씀의 의미가 그 교회가 딴 곳으로 옮겨진다는 뜻
이라고 하나 옳지 않다.
계 2:6
니골라당.-이레네오(Irenaeus)는, 이것을 서도 행전의 일곱 집사 중 한 사람이 타
락하여 꾸민 이단(異端)이라고 한다(Adv. haer I,26, 3). 그러나 성신 충만한 집사
(행 6:5)가 어떻게 타락할 수 있을까? 어떤 사람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곧 "니골
라"란 원어는 "백성을 이긴다"는 뜻을 가진 말인데, 구약(민 22:12)의 히브리어 발람
(* =백성을 이김)에 해당하는 바 개인(個人)의 이름이 아니고, 이단 교훈으로
신자들(하나님의 백성들)을 정복하며 파괴하는 거짓 스승들의 무리라고 한다. "니골라
당"이 가르친 교훈은, 2:14, 20에 있으니, 그것은 물론 행 15:28,29에 있는 성령님의
명령을 순종치 않은 것이다(Charles).
계 2:7
이기는 그에게.- 이것은, 과거 분사(過去分詞)가 아니고 현재 분사(現在分詞, *
)이니 승리의 완필(完畢)이 아니고 진행을 염두에 둔 말이다(Greijdanus)(마 24:13 참
조). 신앙의 승리는 현세에 완성되는 시간을 가지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의 별세 시
각(別世時刻)까지 되어 가는 일이다. 여기 "이김"이란 말은 사도 요한의 필적(筆跡)
이다. 요한 일서에도 이 말씀이 있다. 요일 5:4,5 참조.
하나님의 낙원.- 이것은 의인(義人)이 별세한 후 그 영혼이 가는 곳이다(눅
23:43). 바울이 거시 가 본 일이 있으니, 곧, 삼층천(三層天)과 동일시(同一視) 된다
(고후 12:4). 이 밖에 예수님께서 낙원(樂園)에 대하여 직접 말씀하시지는 않았으나,
간접적으로 "아브라함의 품"이라고 비유적으로 말씀하신 것이 있다. 가경(假經)저자
들이 낙원에 대하여 감성적(感性的)으고 많이 말한 바 있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님
과 그 사도들이 말한 것에 비교하면, 이채(異彩)를 띠고 있으니, 그것은 인간의 상상
(想像)에서 나온 그릇된 것이다. 페론(Perowne)은 말하되, "낙원에 대하여 정경서(政
經書)가 침묵하는 점을 신비주의 문학은 가장 화사(華奢)하게 묘사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정경 문서의 간결한 기록을 오히려 진실미 있게 본다. 일설에, "낙
원"은 음부의 일부(一部)라고 한다. 곧, 음부의 일부에는 악인들의 영혼들이 가 있
고, 다른 일부에는 의인들의 영혼들이 가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옳지 않은 학
설이다. 구약에서 음부란 말로써 별세한 육신 상태 (무덤)을 가리켜 말한 적이 많다
(욥 10:21, 26:5; 시 88:10-12, 94:17, 22, 115:12; 잠 2:18, 15:11, 21:16; 사 14:,
26:14). 이 귀절들은 모두 무덤을 의미한 것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은 또한
음부를 가리켜 악인들의 영혼이 가 있을 곳으로도 말한다(시 44:23; 겔 26:20; 사
9:9, 10;마 11:23 참조). 그리고 "낙원"은 천계(天界)에 있는 것이다(고후 12:4).
생명 나무의 과실.- 이것은, 구약 창세기(창 2:9, 3:22)에 처음 나온 말인데, 풍
유적(諷諭的)으로 보는 해석도 있고, 역사적(歷史的)으로 보는 해석도 있다. 풍유적
해석은 이 과수가 실재(實在)한 것이 아니고, 다만 "영생"의 개념(槪念)을 시적(詩的)
으로 이렇게 비유한 것 뿐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것도 너무 지나친 독단(獨斷)이다.
우리는, 이 과수(果樹)를 실재한 과수로 보면서 그것이 생명의 주(主) 그리스도를 비
유하였다고 한다(Dr. Geerhardus Vos). 몸이 영생하여 있으면서 식물(食物)을 섭취한
다고 함이 역시 내세의 현상이다(계 22:2 참조). 이기지 못한 아담은 이러한 영생의
식물을 상실했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는 자들은 이것을 도로 받는다. 그 과수 자
체가 사람을 영생케 하는 마술적 능력을 가진 것이 아니다. 영생하게 하는 능(能)은
오직 그리스도에게만 있다. 그 과수는 내세(來世)에서 성도들의 분깃이 된다.
가경(假經)에 이 과수에 대하여 여러가지로 이야기한 바가 있으니, "성도들이 이 생
명수를 향유(香油)로 사용한다"고 하였고(2 Esd. 2:12), "이 생명 나무의 향기는 모든
향기에 뛰어나고, 그 잎과 꽃과 나무는 시들지 않고, 그 실과는 대추 야자의 열매와
같다"고 하였다(Ethiopic Enoch 24:4). 그러나 가경의 이 이야기는 사랑의 상상(想
像)의 산물이고 진리는 아니다.
귀 있는 자.- 이것은, 하나님 말씀을 알아 들을 수 있는 신령한 귀의 소유자를 가
리킨다. 그렇기 때문에 그 아래 "성령이...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라고 하였다.
이 문구는 , 교회를 상대하고 가르치는 말씀인 동시에 각 개인별로 그 회중(會衆)을
다룬 것이 분명하다.
교회들에게(* ).- 에베소 개교회에 보내는 말씀을
"교회들(複數)에게"하시는 말씀이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이 서신이, 모든 교회를 상대
하고 기록된 것임을 보여 준다.
계 2:8
서머나.- 이것은, 에베소 북쪽에 있는 곳인데 현존하며, 그곳에 강이 있는데 멜레
(Meles)라고 한다. 당시에, 폴리갑(Polycharp)이 이 지방 교회의 감독이었으며, 그가
순교한 연대는 주후 168년이었다.
처음이요 나중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 이것은, 수난하는 서머나 교회에게 위
안과 소망이 될만한 주님의 칭호이다. 여기 7서신(書信)에 있는 주님의 칭호는 이렇
게 각 교회 형편에 적합하도록 고안 되었다. "처음"과 "나중"은 영생하신 자란 의미
도 있고, 우주를 지으시고 유지하시고 귀정하시는 자란 의미도 있다. "죽었다가 살아
나신 자"란 이름은, 죄인을 구속하시려고 죽으셨다가 사망을 이기시고 부활하시어, 완
전히 신자들에게도 같은 부활을 주시는 자라는 것이다.
계 2:9
환난과 궁핍.- "환난"(* )은 그리스도 신앙을 인하여 받는 외래(外來)의
압박이고, "궁핍"(* )은 그 압박의 결과로 당한 생활상 빈곤을 가리킨
다. 이런 핍박은 그 때에 기독자들이 불신 유대인 또는 이방인 폭도(暴徒)로 말미암
아 당했던 것이다(히 10:34).
부요한 자.- 그들이 육신상으로는 빈핍하나 영적으로는 부요할 것을 가리킨다. 눅
12:21; 딤전 6:17,18; 고후 6:10; 계 3:17; 약 2:5 참조.
자칭 유대인.- 유대주의는, 서머나 지방에서 강하여 기독교를 박해 하였다고 한다
(Just. Dial. 16,11, 3). 유대주의자들은, 예수님을 구주로 믿지 않고 그들이 아브라
함의 자손 곧, 유대인 된 것을 천국 시민권으로 오해하였다. 폴리갑이 순교할 때에도
그들은 이방의 폭도들과 합작했고, 그 시체도 기독 신자들에게 주지 못하게 한 것이다
(Moffatt). 그들은, 그렇게 기독 신자들을 박해하면서 스스로 유대인 된 자세를 한
것이다.
사단의 회.- 이 말이 구약에는 없고 다만 악인들의 회(민 14:27,35; 시 21:16)라고
만 하였으나 계시록의 "사단의 회"라는 의미와 비슷할 것이다. 이런 유대인의 무리는
여호와를 경외하지 않고 또 기독 신자들을 기탄 없이 박해하였다. 서머나 교회 감독
폴리갑(Polyc. Mart. 13-)의 글에도 복음을 박해한 유대인들에게 관한 말이 있다. 그
리고 서머나 주민의 종류표를 보이는 조각서(彫刻書)에도 이스라엘 종교를 내버린 유
대인들에게 대한 말이 있다고 한다(CIG. 3148).
계 2:10
십일 동안 환난.- 이것은 알기 어려운 말이다. (1) 어떤 주석가들은 여기 날수(日
數)는 햇수(年數)의 상징이라 하여 로마의 디오클레시안(Diocletian)황제의 10년 간
혹독한 핍박을 가리킨다고 말하며, (2) 또 어떤이는 말하기를, 이것은 로마의 십대 핍
박자(十代逼迫者) 곧, 네로, 도미시안, 트라얀, 하드리안, 아우렐리우스, 세베루스,
맥시멈, 데키우스, 발레리안, 도미클레시안 황제(Nero(54-68), Domitian(81-96),
Trajan(98-117), Hadrian(117-138), Marcus Aurelius(161-180), Septimins
Severins(193-211), Maximinus(236-238), Decius(249-251), Valerianus(253-260),
Deocletianus(284-305))등의 열 시대를 가리킨 것이라고 하였으나 확실하지 않다.
(3) 크레다너스(Greijdanus)는 이것을 한정(限定)있고 길지 않은 기간을 비유한 것이
라고 하였다(De tien dagen spreken van een bepaalden tijd die eindigt, aan welken
vaste grenzen gesteld zijn)(11:3, 12:6, 11:9-11 참조). (4) 여기 십일이란 것은
단 1:12,14에 나온 것이라고 생각된다. 곧, 기독자가 받는 고난은 결국 그의 영혼을
유익하게 해주는 뜻 있는 것이라는 것이다. 다니엘은, 십일 동안 채소와 물만 먹는
시험을 당했으나 결국 그의 얼굴은 윤택하여졌다고 한다.
우리는, 세째 해석과 네째 해석을 합하여 생각하는 것이 합당 하다고 본다. 기독자
들이 받는 환난은 하나님의 견지에서 보실 때에 사실 "십일 동안"과 같은 잠간 되는
것이다(벧전 1:6; 롬 8:18). 그 뿐만 아니라 그들이 당하는 환난은 그들의 영혼을 유
익하게 하여 준다.
생명의 면류관.- 이것은 내세의 생명을 받을 뿐 아니라 영광까지 가리킨다. 우리
가 현세에서 그것이 어떠한 것이라고 형언하기는 어렵다. 그러면 이 세상에서 순교에
참예하는 자가 죽음에 아주 빠지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살고, 살 뿐만 아니라, 그 삶
의 극치(極致)에 빛나기까지 하는 영화로운 생명에 이른다. 이런 의미에서 크레다너
스(Greijdanus)는 적합한 평주(評註)를 썼다(Gaan de geloovigen dus ook den
marteldood in, toch zullen zij daarin niet onder gaan, maar leven, en in
onvergankelijke levensheerlijkheid schitteren). 본장 끝에 있는 설교(죽도록 충성
하라)를 참조하여라.
계 2:11
둘째 사망의 해.- 이것은, 멸망 받을 자들이 최후로 받는 분깃이니, 곧, 계 19:10,
20:10, 21:8에 있는 불못과 동일시 된다. 일설에 말하기를, "불못"은, 필자(筆者)가
사해(소돔과 고모라의 자리)라는 흉해(凶海)를 들어서 불가 형언(不可形言)의 흉소(凶
所)인 지옥을 상징한 듯하다고 한다. 에녹경에 사해를 악령들의 벌 받는 곳으로 말한
바 있다. 그러나 우리는, 계시록이 말하는 지옥을, 악한 자들이 영벌(永罰)받는 곳인
줄로 믿을 뿐이다.
계 2:12
버가모.- 이것은 무시아의 카이쿠(Caicus) 강 가에 앉은 땅인데 여기는 로마 황제
를 예배하는 신전(神殿)이 있고, 또 제우스(Zeus) 신전이 있으니, 우상 숭배의 총 본
부라고 할 수 있는 곳이다. 그러므로 우리 본문은 이곳을 가리켜 사단의 위가 있는
곳이라고 하였다.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진 이.- 영전(靈戰)의 필요가 있는, 버가모 교회에 대하여 이
런 칭호를 가지시고 임하심은 매우 적합하다(2:16 참조). "좌우(左右)에 날선 검"은,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하는데, 죄인들을 귀정(歸正)시키며, 혹은 심판하는데 사용되는
것이다(1:16 해석 참조).
계 2:13
사단의 위가 있는데.- 이것은 버가모가 사신 우상의 중심지였음을 염두(念頭)에 둔
말이다. 버가모에는 제우스, 다오니우스, 아데나, 에이스클레피우스의 네 개의 큰 우
상 전각들이 있었고, 또 로마 황제 숭배를 위한 두 개의 전각이 있었다. 특별히 에이
스클레피우스 전각에는 각처에서 불구자(不具者)들이 모여 들어 있어 에이스클레피우
스라는 신이 주는, 요법 현몽(療法現夢)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버가모는 요
한의 때에 아시아에서 우상 숭배의 본부(本部)로 되어 있었다. 제우스 우상 숭배의
고적(古蹟)은, 독일 사람 휴만(Humann)의 발굴(發掘)한 바 있어 백림 박물관(伯林博物
館)에 간직되었다(E.J. Banks).
안디바.- 이 사람은 버가모에서 순교한 성도인 듯한데, 제 3세기에 버가모의 어떤
조각에 이 이름이 있고(Deissm. 187), 터툴리안(Tertullian)은, 이 사람을 실제적 버
가모의 순교자로 여긴다(adv. Gost Scrp. 12). 그러나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에 대
한 상세한 역사는 없다. 시몬 마타프라테스(Simon Mataphrates)의 보도(報導)하는 전
설(이는 전설이고 성경은 아님)에 의하면, "안디바"는, 버가모 교회의 강의(强毅)한
감독이었는데 그의 명성(名聲)이 높은 고로, 로마 황제 예배 종파(皇帝禮拜宗派)에게
잡혀서 놋으로 만든 황소 속에 소살(燒殺)되었다고 한다(Moffatt). 유세비우스
(Eusebius)는, 칼푸스(Carpus), 파필루스(Papyus), 아가도니게(Agathonike), 기타 다
른 순교자들이 요한의 후대(後代)에 버가모 교회에서 났다고 하였다(Eusebius H.E.
4:15,48). 핍박자들이, 그 순교자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훼방하는 말을 하게 하려
고, 불가형언(不可形言)의 악형을 가했으나 그들은 항복하지 않았다고 한다.
계 2:14,15
두어가지 책망할 것.- 여기 "두어가지"란 말은, 헬라 원어로 올리가(* )
라고 하는데 적은 수량을 의미하며, 둘 이상의 복수를 가리키거나 한 수(一數)도 역시
이 말로 표시될 수 있다(Greijdanus).
이스라엘 앞에 올무.- 민 31:16, 25:1-5 참조. 발람이 발락의청구대로 이스라엘을
거슬러 저주는 안했지만, 이스라엘을 유혹하여 모압 여인들과 음행케 하는 꾀를 발락
에게 가르쳐 주었다(민 24:25, 26:1, 31:16). 버가모 교회에도 이런 악한 자들이 몰
래 들어와, 신자들을 유인하여 우상 섬기는 장소에 가게 하고, 그 제물까지 먹게 하였
으니 참으로 괴악하다. 이런 행동은, 사도행전 15장에 사도들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제정하여 이방 교회에 보낸 금령을 어긴 것이다(행 15:20,29).
계 2:16
본절은, 발람이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고 모압 왕 발락의 요청대로 가다가 칼을 뽑아
든 천사를 만나게 된 사실을 염두에 두고 한 말씀이다(민 22:31 참조). 겔 3:17-20,
33:6,13 참조.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 주님께서는 선민을 해하는 자들을 그대로 두지
않고 반드시 대적하신다. 이런 대적은 발람을 향하여도 있었던 것이다(민 22:31,32
참조). 위태하다 하나님의 백성을 해하려는 어리석은 행동이여!
계 2:17
감추었던 만나.- 랍비의 전설에 의하면, 예레미야나 이사야가 "만나"를 담은 법궤
를 어디 감추었는데 메시야 시대에는 이 만나가 다시 공개된다고 한다(2 Macc.
2:4-6, Mechilta Ex 16:25). 본절의 이 말씀은 이런 전설을 염두에 둔 것인가? 우리
는 그렇게 생각지 않는다. 마이어(Meyer)는 여기 "감추었던"이란 말을, 이 세상에는
없고 하늘에만 있다는 의미로, "만나"는 천계(天界)에서 먹는 양식이라고 하였으니,
적당한 해석인 듯하다. 클다너스(Greijdanus)도 역시 이와 비슷한 해석을 취하여 말
하기를, "감추었던 만나는 신령하고 놀랍고 영화롭고 참된 양식이라"고 하였다.
흰돌.- "돌"은 신자의 상징이며(벧전 2:5,6), 택한 백성의 표호(標號)이다(출
28:15-21). "흰" 빛은 성결을 의미한다. 모팟드(Moffatt)는, "흰 돌"이 이방의 미신
사상에서 유래(由來)한 것이라고 잘못 생각하여, 다음과 같은 몇 가지 미신을 소개하
였다. (1) 고대인들에게는, 흰 돌은 운수 좋은 부적(符籍)을 의미하는데 거기 신(神)
의 이름을 쓰면 그것으로 사귀를 물리칠 수 있다 하였고, 또 자기들이 섬기는 신의 거
처에 접근하여 출입할 수 있다고 한다(Dieterich. Mithras Liturgie 31). 이 미신에
의하여 흰 돌에 그리스도의 이름을 쓴 것은 그 소유자로 하여금 모든 위험에서 안전을
얻게 하고 또 하나님 앞에 밀접히 나아갈 수 있게 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
해석은 너무도 성경 저자의 마음을 몰이해한 것이다. 성경 저자들은 미신의 풍습(風
習)을 미워하고 멀리하였다. (2) 모팟트는 다시, 로마 황제 예배와 관련된 제사장이,
그 이름의 영존을 위하여 말한, "내 이름을 돌 위에 써라 그리하면 영존(永存)하리라"
고 한 말을, 이 점에 연결시켜 본다. 그러나 이것도 억설이다. 성경 기자들은, 우상
숭배를 미워했는데 어찌 그것과 관련된 사상을 채용하였으랴! (3) 그는 또 다시 신비
종파(神秘宗派)의 견습생(見習生)이 그 종교의 정회원으로 입참(入參)할 때에 흰 돌에
그의 새 이름을 쓰는, 그 풍속에서 이 말씀이 유래한 듯하다고도 하였다. 그러나 이
것도 성경 저자들의 마음을 모르고 한 말이다. 성경 저자들은 이교(異敎)의 풍속을
미워할 뿐이고 결단코 채용하지 않았다.
새 이름...받는 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 크레다너스
(Greijdanus)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으니, 곧, "흰 돌에 쓴 새 이름은, 그 이기는 자에
게 세워 주는 그의 본질과 인격과 거기에 해당하는 영광과 지위의 선물을 상징한다.
이 세상에서 우상 제연(祭宴)에의 참석을 거절한 신자는 모두 박해를 받았으며, 심지
어 생활의 길까지 빼앗긴 것이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이 다 모르게 그는 천적(天的)
으로 영예(榮譽) 있는 인격과 지위를 얻는 것이다"-(意譯)라고 했다(Greijdanus,
Openbaring, p. 77). 이 해설은 정견(正見)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로마여
(Lohmeyer)는 여기 "새 이름"은 그리스도의 것이라고 한다. 그는 말하기를, "그것은
새 것이다. 그 이유는, 그것이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다가 그것을 받는 자만 비로소
하늘에서 알게 되는 까닭이다"(Der name ist naturlich der Christi; er ist "ne",
Wenn er in der Form bisher unbekannter, nur dem Empfager verstandlicher Zeichen
und Zahlen auf dem stein eingeschrieben ist.-Die Offenbarung Des Johannes, p.
27)라고 하였다. 계 19:12을 참조해 보면, 이 해석도 일고(一考)할만하다. 그리스도
께서 자기의 "새 이름"을 흰 돌에 써서 이기는 자에게 주신다 함은, 그리스도께서 그
이긴 자에게 전에 없던 긴밀한 교제를 시작해 주시는 특은(特恩)을 의미한 듯하다.
그러나 우리는 이 해석을 신임하기 어렵다.
계 2:18
두아디라.- 이는 현명(現名) 아키사(Akhissar)라고 하는데 무시아의 접경에 있고,
자주 장사 루디아가 이곳 여인이었는데(행 16:14), 그로 말미암아 여기 교회가 설립된
듯하다. "두아디라"에는 남신(男神)과 여신(女神)을 우상으로 섬기는 악한 풍속이 있
었는데, 특별히 그 신당 중의 하나에는, 그 사신(邪神)의 신탁(神託)을 받는 소위 여
선지(女先知)가 있었다고한다. 어떤 이는 말하되, 이 인물이 계 2:20의 이세벧이라고
하나 확실하지 않다. (2) 그곳에 공인 조합(工人組合)이 많이 있었느데, 동업 조합(銅
業組合), 염료 조합(染料組合) 등이다. 루디아는 이 지방 출신으로서 염료(染料) 행
상(行商)을 하고 있었다(행 16:14). 이렇게 조합의 지배력이 강한 곳에는 생활 통제
가 있어서, 복음과 충돌된 경우도 많이 있었을 수 있다. 그러므로 미약한 교회는 그
충돌을 면하려고 타협의 길을 취하기 쉬웠다. 두아디라 교회의 신자들은 그 지방 조
합의 지도에 따라서 우상 관계의 연석(宴席)에 끌려서 참예한 듯하니, 그렇게 된 경우
에는 그들이 우상의 제물을 먹었겠고, 또한 우상 숭배자들과 함께 음란한 일에까지 유
인 되었을 수 있다. 복음은 신자를 율법에서 해방해 준다는 대교리(大敎理)를 오해하
여, 반 율법주의(反律法主義)로 떨어지는 악한 사상이 고대 교회에 유행되었다. 그
악한 사상에 감염(感染)된 무리는, 우상의 제물을 먹는 것과 음행 같은 것을 기탄 없
이 행하였을 듯하다.
그 눈이 불꽃 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과 같은. 1:14,15 - 의 해석 참조. 심판적
행위로 경계하는(22, 23)이 서신에 있어서는 이 칭호(稱號)가 적절하다.
계 2:19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 여기 "사업"이란 말은 그 아랫 말들의 총괄어
(總括語)이다. "사랑"이 첫 머리에 놓인 것을 보면, 이 교회는 사랑에 붕한 듯도 하
다. 그러나 여기 나온 어순(語順)으로 보아 사랑 다음에 "믿음"이 놓였으니, 이 교회
의 경건이 순리(順理)대로는 자라지 못했다는 의미가 포함된 듯하다(살전 1:3, 3:6,
5:8 참조). 사랑은, 마땅히 믿음을 근본으로 하고 나와야 신본주의(神本主義)의 것
이다. 먼저 계시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거기서 나타나는 결실로서 사랑이 와야
할 것이다. 그러나 두아디라 교회는, 소위 "사랑"을 앞 세우다가 "믿음"(하나님의 말
씀 대로 믿는 믿음)을 둘째로 여긴 듯하다. 따라서 그 교회는 진리를 기본으로 파수
하지 않고, 포옹주의(抱擁主義)의 사랑만 위주(爲主)하다가 비진리(非眞理) 곧, 이세
벧 이단 같은 것을 포용(包容)하게 된 듯하다. 그것은 선후 전도(先後轉倒)에서 생긴
과오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말의 순서에서 뜻을 캐는 것은, 부자연스러운 듯하다. 크레다너
스(Greijdanus)의 해석은 다음과 같다. 곧, "여기 사랑이란 것은 그 아래 나타나는
모든 활동의 근본이다. 사랑에서 믿음(신실한 활동)과 섬김과 인내가 나온다"는 것이
다.
특별히 "섬김과 인내"는 그 위에 있는 "사랑"의 외부적 표현이다. 두아디라 교회의
형편은 에베소 교회의 그것과 대조된다. 에베소 교회는 믿는 도리를 강조하노라고 아
였으나 그것을 건전히 못하여 사랑을 떨어뜨렸고, 두아디라 교회는 사랑을 힘쓰노라고
하다가 그것을 진리대로 하지 못하여 탈선하였다.
계 2:20
여자 이세벧.- 즈안(Zahn)은, 어떤 사본(A.Q)에 "너의"란 말이 있음을 보고 "너의
여자 이세벧"이라고 번역하였다. 그리고 "너의 여자"란 말이 그 교회 교역자의 아내
란 의미라고 하였다. 모팟트(Moffatt)는 여기 "너의"라는 사구(寫句)가 몇몇 유력한
사본의 지지를 가지면서도 신뢰하기는 어렵다고 하였다. 또한 어떤 이는 이것이, 바
벧론 신(神) 사이빌)이름이 이세벧과 비슷함=Sibylle)과 상관되는 어떤 인물을 가리킨
다고 한다. 쉬렐(Schurer)의 증거 (Theol. Abhandlungen, p. 39)에 의하면 두아디라
에 바벧론 신당(神堂)도 있다고 한다. 우리는 이 점에 대하여 확실한 결론은 못내린
다. 요컨대 이세벧은 이스라엘 왕 아합의 아내니 이방의 우상 숭배를 수입하여 이스
라엘의 종교를 어지럽게 한 요망한 여자였다(왕상 16:31; 왕하 9:22). 엘리야가 이
여자를 두고 예언하기를, (1) 개가 그 죽은 시체를 핥으리라고 하였는데(왕상 21:23),
과연 그대로 성취되어 예후로 말미암아 창문에서 내려 던지움이 되어 떨어져 죽었고
(왕하 9:33), (2) 그 자녀들에 관하여 예언하기를, 하나님께서 그들을 다 멸망시키리
라고 하였는데(왕상 21:21), 과연 그대로 성취되었다(왕하 9:6-37). (3) 이세벧의 상
에서 먹는 바알 선지 450인을 죽였다(왕상 19:40). 위의 세 큰 사건은, 계 2:22,23
의 세 큰 위협은, 1 그여자 자신을 병상에 던져 죽일 것(22절), 2 그와함께 음행하는
자들 곧, 그의 교훈과 타협하면서 교역하는 자들을 환난 중에 던짐, 3 그의 자녀 곧,
완전히 그에게로 귀속(歸屬)한 자들을 죽임이다. 그러므로 두아디라 교회의 이세벧은
외래의 이교 인물로서 자기의 사상을 가지고 복음을 변경시킨 자이다. 이 인물이 여
자인지 남자인지는 알 수 없으나, 교회에 들어와서 이세벧의 역할을 하였던 사실은 분
명하다. 그 인물의 교훈은, 그노시스학(Gnosticism)의 율법파(物質皆惡說을 주장하며
苦行主義를 爲業함)가 아니라, 그 반 율법파(反律法派)에서 영혼과 물질과의 무관계를
믿고 몸으로 자행 자지(自行自止)케 하여 무슨 추행이든지 꺼릴것 없다는 교훈이다.
두아디라 교회에는 이런 이단이 침입하여 교권(敎權)을 잡은 것이 분명하다.
행음하게 하고.- 당시의 음행은 우상 숭배와 함깨 묻어 다니는 죄악이었다(민
25:1-5). 우상 숭배 그것이 영적으로 벌써 하나님께 대한 변절(變節)이니, 하나님께
대하여 변절하므로 영적 음행을 범한 자가, 인륜상(人倫上) 불결한 죄는 더욱 쉽게 범
할 위험성을 가진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 백성에게 우상 숭배와 및 그 제물
을 멀리 하라고 엄명(嚴命)하신 것이 성경에 많이 있다(행 15:20, 28, 29).
계 2:22,23
침상에 던질 터이요.- 이것은 이세벧을 벌하여 질병에 걸리게 히시겠다는 말씀이다
(1 Macc. 1:5). 소아시아에서 발견된 여러 조각문(彫刻文)에 음행으로 인하여 벌받아
병든 사실이 적지 않다(Moffatt).
그로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 이들은 그 여자의 우상 숭배에 이따금 동참하는 자들
을 가리킨다. 그리고
"그의 자녀"- 는 그 여자의 교훈에 아주 귀화(歸化)한 자들을 가리켜서 말한다.
그들에게 화벌(禍罰)이 미치는 것은, 이스라엘의 이세벧의 자녀들이 죽임 당한 사실과
비슷하다(왕상 21:20; 왕하 10:7, 8).
행위를 회개치 아니하면.- 이 말씀을 보면, 하나님은 언제나 은혜로우신, 참되신
신(神)이심을 알 수 있다. 가장 큰 죄를 범한 자도 회개만 하면, 하나님은 그를 용서
하신다.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찌라.- 시 7:10; 렘 11:20 참조. 여기
"뜻"이란 말은, 헬라 원어로 네프루스(* )니 사람의 가장 깊은 욕구(慾
求)와 감각의 근원을 가리킨다.
"사람의 가장 깊은, 그 감추인 속에도 하나님 앞에서는 절대로 감추일 것이 없다"
(Bavinck, Bijbelsche en Religieuze Psychologie, blz. 65-Er in het verborgenste
wezen van den menseh volstrekt niets voor God verborgen is).
계 2:24
사단의 깊은 것.- 이것은 당시 두아디라 교회를 둘러싸고 침입한 그노시스주의였
다. 그들은, 사리(事理)의 가장 깊음에 대한 지각의 필요를 말하고, 또 그 지각(知
覺)을 얻으려면 내 자신을 그것에 적응시켜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죄의 의미를 알려고
죄악에 몸을 적시는 일을 한 것이다(Zahn, julicher). 그들은 생각하기를, 그렇게 몸
을 죄악에 던져도 그들의 고상한 심령의 정체(正體)는 아무런 더럽힘을 입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마귀 숭배를 해 보기도 한 것이다. 이 사상에 미혹 받아
들든 어떤 기독교인들은 그 때의 우상 숭배나 음행에 참가하기를 기탄 없이 한 듯하
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이런 위험한 일을 여기서 엄금하신 것이다. 이와 같
은 해석은 모팟트도 한 것이다.(The Expositors' Greek Testament, Revelation of St.
John by James Moffatt, p. 362). 모팟트가 보수파(保守派) 학자는 아니지만 그의 주
석에 역사 문학(歷史文學)의 재료들이 있는 대로 우리가 참고할 만한 것이 있다.
다른 짐으로 너희에게 지울 것이 없노라.- 행 15:28, 29 참조.
계 2:26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 시 2:8을 보면, 그리스도께서 이 권세를 받으신다. 기독
신자들은 그리스도와 연합되었기 때문에 그의 이 영광에 동참한다(딤후 2:11, 12 참
조).
계 2:28
새벽 별.- 이것은 그리스도 자신을 상징한다(제 22:16). 왜 그리스도를 "새벽 별"
로 비유하였는가? 그것은 그의 왕적(王的) 영광을 생각하여 그리한 듯하다(민
24:17).
계 2:20
귀 있는 자.- 7절에 있는 같은 말 해석 참조.
///////////////////////////////////////////////////////////////////////////////////////////////////////////////////////////////
계 3:1
"사데"- 는 두아디라 남쪽에 있었는데 부요함과 사치로 이름난 곳이다.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진 이.- "일곱 영"에 대하여는 계 1:4에 있는 같은 말 해석
참조. "일곱 영"을 가지심은, 그가 성령님의 일을 주관하신다는 의미를 포함한다.
그리스도께서 성령님의 일을 주관하신다 함은, 요한 사도의 사상이다(요 14:16). 성
령님의 풍부한 생명력을 떠난, 사데 교회에 대하여 이 칭호로 오시는 주님께서 적절한
해결을 주실 것이다. "일곱 별"에 대하여는 성경 본문(1:20)에 해석되었다.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 이것은 외형(外形)에 있어서 교리와 의식
(儀式)으로 빛나지만, 내적(內的)으로 신령한 생명이 빈핍(貧乏)한 것을 가리킨다.
이런 교회는 현대에도 많이 있다. 교회 역사의 각 시대에 7교회를 배정(配定)하는 학
파에서는, 여기 사데 교회를 가리켜 종교 개혁한지 얼마 후에, 죽은 정통화(死正統化)
한 교회라고 한다. 그러나 그것이 정당한 견해라고 하기는 어렵다.
계 3:2
일깨워.- 이 말은 헬라 원어로 기누 그레고론(* )이니
일시 동안만 깨는 것이 아니고 계속적 경성(繼續的警醒)을 의미한다.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게 하라.- 그 교회에 아직 영적 생명이 남아 있는데 그
것을 견고히 보존하는 것은, 그 교회의 급선무(急先務)이다. 생명은 잘 보호하고 배
양하기만 하면, 비록 미약한 것이라도 충실한 대로 자라가는 법이다. 그러므로, 사데
교회도 그렇게 해야 된다.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사데 교회가 교회적 행
사로서 외부적으로는 적잖게 발휘하였으나, 하나님 앞에는 합격되지 못했다
(Greijdanus). "온전함"은 절대성을 띤 완전을 의미하지 않고, 그저 인간으로서 행할
수 있는 한도에서 하나님의 요구하시는 표준을 의미한다. 이 말은 사도 요한이 즐겨
쓰는 말이다(요 17:23; 요일 1:5; 요이 1:12). 영적 생명은 없이 외모로만 나타내는
것은 허수아비에게 바람이 풍긴 현상과 같다.
계 3:3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키어 회개하라.- 살전 1:5,
2:1; 고전 2:1 참조. 과거에 받은 기이한 은혜에 대한 회고(回顧)는, 현재의 답답한
심령으로 하여금 영계(靈界)의 확실성에 대한 새로운 신념을 가지게 하며, 신앙 모험
(信仰冒險)의 용기를 분발(奮發)케 한다. 그러므로 과거의 영적 체험은 비록 적은 것
이라도, 우리가 기억하여 보수(保守)하면, 그것이 현재의 큰 암흑을 깨뜨리고 하늘 문
을 열어 보이는 열쇠가 된다.
내가 도적 같이 이르리니.- 이것은 주님께서 깨어 있지 않은 자들에게 임하시는 방
법이다(살전 5:1-8). 이것은, 그 아랫 문구가 보이는 바와 같이 그가 뜻 밖에 오실
것을 가리킨다. 이것은 여기서 주님의 재림이 아니고, 사데 교회를 벌하시는 섭리적
내방(攝理的來訪)일 것이다. 일 개인도 그 죄악의 잠에서 경성하지 아니하면, 뜻밖에
징벌(懲罰)을 받는 일이 현저하다.
계 3:4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모팟트(Moffatt)는, "더럽히지 아니한" "옷"이 단순
한 인본주의의 도덕적 순결을 의미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그가 소아시아의 이
교 사상에서 취한 그릇된 해석이다. 이 말씀은, 받은 구원과 의(사 61:10)에 합당하
게 행하여 세상에 물들지 않는 기독교적 성결을 가리킨 것이다(고후 7:1). 물론 그것
도 어떤 의미에서는 도덕적 순결이겠으나, 생활의 동기와 그 결과가 신본주의(神本主
義)에 속한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입혀주신 구원과 의를 오손(汚損)치
않고 보수하는 경건 생활이다.
몇 명.- 헬라 원어에서 자역(字驛)하면, "몇 이름들"이란 말이니, 그들의 이름이
주님에게 상달된 사실을 염두에 두고 한 말씀이다.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여기 "흰 옷"은, 성도들이 천계에 들어가서 받
는 하나님의 영광과 및 완전한 성결(聖潔)을 가리킨다. 모팟트(Moffatt)는 잘못 말하
기를, 여기 "흰 옷"이란 것은, 에녹서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하며,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에녹서(書)에 흰색은 의(義)를 상징하였으니(85, 90), 여기서도 그러할
것이다. 그것은 마치 베드로 계시록이라는 가경(假經)에서, 낙원(樂園)의 거주자들이
빛을 입었다고 하였으며, 지옥에서 죄인들 벌하는 천사들이 검은 옷을 입었다고 함과
도 같다"고 하였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하기는, 정경(正經) 계시록이 말하는 "흰 옷"
은, 다니엘서(7:9, 12:3)에 기초(基礎)한 사상(思想)이라고 한다. "흰 옷"이라는 말
을 사도가 성경으로 인정하지 않는 에녹서에서 취하였다고 할 수 없고, 사도 후의 상
상(想像) 문학(文學)인 베드로 계시록에 의지 하여 생각될 수도 없다. 그러면, 이
"흰 옷"은 무엇인가? 이것은, 부활(復活)의 몸을 가리키지는 안았으니 그 이유는,
6:11을 보아서 그것은 별세한 성도가 즉시 하늘에서 받는 것이고 그리스도 재림시에
받는 것이아닌 까닭이다. 혹설에, 이것은 하나님의 완전한 성결과 영광을 가리킨다고
한다. 성도들이 주님과 "함께 다닌다"함은, 그들이 하늘에서 주님과의 밀접한 교제에
참예할 것을 가리킨다(Greijdanus).
그들은 합당한 자.- 이것은, 그들이 유공(有功)하다는 의미가 아니고, 복음에 합당
하게 행하여(빌 1:27) 천국에서 주님과 함께 다닐 자격이 있다는(자기의 功義가 있다
는 말이 아님)뜻이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그런 축복을 받을 수 있는 참된 신앙 노
선(信仰路線)을 걸어 온 것이다.
계 3:5
내가 그 이름을 생명 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고.- 20:12 참조.
계 3:6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2:7에 있는 같은 말
해석 참조.
계 3:7
빌라델비아.- 이곳은, 지금 알라솰(Alahschahr)이라고 하는데 오늘날도 거기에 기
독 신자들이 산다.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이.- 크레다너스(Greijdanus)의 해석에 의
하면, "거룩하다"함은, 소극적으로는 그가 죄악에서 절대적 절연(絶緣)된 상태이고,
적극적으로는 그의 숭엄(崇嚴)하신 신성(神性)과 및 그의 백성을 구원하시는 성덕(聖
德)을 가리킨다. "진실"이란 말은, 헬라 원어로 아레디노스(* )니 거
짓에 대한 반대를 가리킴보다, 그림자(影像)나 불완전성에 반대되는 실물(實物), 본체
(本體)를 가리킨다. 그러면, 이 말은 그리스도의 계시로서의 완전과 극치(極致)를 가
리킨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에게서 완전 무결(完全無缺)하시게 나타나시고, 그의 약
속들도 역시 그리스도에게서 완전히 성취되었다(고후 1:20). "다윗의 열쇠"는 그리스
도의 신국 주권(神國主權)을 가리킨다. "다윗"은 구약 시대에 사용하던 메시야 곧,
그리스도에게 대한 예언상 칭호이다(겔 34:23).

( 다윗의 열쇄를 가지고계신 주님 )
계 3:8
네 앞에 열린 문.- 이것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게 하는 기회를 비유한
것이다. 핍박하는 유대인들이 아무리 그것을 막으려고 해도(9절) 어찌할 수 없다.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키며.- 그리스도께서 빌라델비아 교회를 칭찬하는
이유는, 그 교회가 소유한 영적 자원(靈的資源)이 "적은"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다 기
울여 신앙 보수(信仰保守)에 진력(盡力)한 까닭이다. 그것은, 그가 가난한 과부의 헌
금을 보시고 칭찬하신 것과 같다(막 12:41-44). 주님은, 많은 것을 가지고 방종하는
자를 좋아하시지 않고, 적은 것을 가지고 힘쓰는 자를 귀히 보신다.
계 3:9
자칭 유대인.- 2:9 해석 참조. 유대주의자들이 빌라델비아에서 기독 신자들을 많
이 핍박한 사실은, 익나디오(Ignatius)도 증거하였다(Philad. 6)
네게 주어...네 발 앞에 절하게 하고.- 사 60:14, 45:14, 49:23 참조. 이것은, 유
대인들 중에서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 교회에 돌아올 것을 예언한 것이다. 그러나 혹
설(或說)에 이것은, 끝날 심판 때에 불신 유대인들이 성도들 앞에 굴복하고 심판 받을
것을 가리킨다고 하나, 첫째 해석이 옳다(Greijdanus).
계 3:10
네가...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키어.- 이것은 댓구적(對句的)으로 역설하는 재
미 있는 표현이다.
나의 인내의 말씀.- 이것은, (1) 인내(忍耐)를 가지고야 파악하며 나갈 수 있는 복
음이라는 의미라고 할 수 있고, (2)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까지 참아 견디신 그리스도
의 고난으로 된 복음이라는 뜻이라고도 하며(Greijdanus), (3) 로마여(Lohmeyer)는,
"나의 인내"라는 엇구(語句)를, "나를 기다리는 신고"(辛苦:Harren auf mich)로 해석
하였다.
시험의 때.- 이것은 환난의 시기를 가리키는데, 언제인지 자세히 알 수 없다.
면하게 하리니.- 그들이 벌써 유대인의 박해(9절)를 이겼으니 만큼, 앞으로 있을
보다 큰 환난은 주님의 특별한 도우심으로 면하게 된다. 이것은 적은 일에 충성하고
큰 은혜를 입는 원칙에 의한 것이다.
계 3:11
아무나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이것은, 경기장(競技場)에서 되는 일로
영적 사리(靈的事理)를 비유함인데 상을 잃지 않도록 끝까지 힘쓰라는 말이다. 히
12:1-4 참조.
계 3:12
기둥.- 이것도 작은 일에 충성하여 큰 상급을 받는 원칙(마 25:23)에 의한 보상이
다. 위의 10절의 같은 원리를 참조하여라. "기둥"은 든든하여 건축에 가장 힘받이
되는 중역(重役)에 소용되는 것이다. 빌라델비아 교회가 이 세상에서 그 적은 힘을
가지고도 충성한 고로 내세(來世)에서 든든한 기둥의 중대한 지위를 얻게 되었다. 누
구든지 이 세상에서 많은 힘을 가졌으나 불충(不忠)하여 영원한 내세에서 미미한 자가
된다면 그것은 유감스럽다. 그러나 이 세상에 적은 힘을 가진 자라도 충성하므로 내
세에서는 영광에 부요한 자가 된다면 그것은 놀랄 만한 기쁨이다.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이것은, 그가 내세의 축복을 받는 지위에서
영원히 변동되지 아니할 것을 가리켜 말한다. 혹설에 의하면 빌라델비아는 지진이 많
은 도시이므로 그 시민은 무너지는 집을 너무 자주 수리하는 까닭에 국세(國稅)의 면
제를 받았다 한다. 그런 변천과 동요가 많은 지대에 거하는 그들에게 영구 부동(永久
不動)의 안전성을 띤 "기둥" 같은 내세적 축복은 목마른 자에게 물같이 귀한 것이다.
하나님의 이름과...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
이것은, 그 이기는 자를 하늘의 보물로 여겨서, 그에게 대한 하나님의 소유권을 삼중
으로 확보하는 말씀이다. 그를, 하나님의 소유, 새 예루살렘의 소유, 그리스도의 소
유로 영존케 하려고, 세 가지 거룩한 이름을 그에게 기록하시겠다고 한다. 그리스도
의 이름을 씀에 있어서 새 이름을 쓴 것은 우리의 주의를 끈다. 그의 새 이름은 그만
아신 것이라고 했으니(19:12), 그것이야 말로 그의 살 중의 살이요, 뼈 중의 뼈다운
가장 살 깊은 내막(內幕)을 표하는 이름이다. 그것은 이 세상에는 나타나지 않은 것
이다. 이런 의미의 성호(聖號)로써 소유를 확보하심은, 그가 이 소유를 견고히 또는
귀중히 파악 하신다는 의미이다. 빌라델비아 교회가 그 적은 힘으로 주님의 복음을
붙잡은 일은(3:8), 주님에게 그렇게도 귀여웠다. 그들이 그 적은 힘으로 애를 쓸 때
에 넘어질 듯한 때도 있었겠고, 또 혹은 넘어진 것 같은 적도 있었겠다. 그러나 주님
은 그것을 허물하시지 않고 오히려 귀히 보셨다. 그러므로 그들이 비틀거리는 고생스
러운 싸움의 정형(情形)과는 정 반대로, 이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기둥" 같이 든든
하여 나가지 않도록 삼중 서명(三重署名)하여 천적 소유(天的所有)로 확보(確保)하셨
다. 이것은 은혜의 "파라독스(Paradox)"니 적은 일에 충성한 자가 큰 상을 받는 복음
의 원리이다(마 25:21). 이 말씀을 보고서 우리와 같이 약한 자도 위로와 소망과 용
기를 가진다.
계 3:13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이 말씀을 보면, 계
시록의 말씀은 택함을 받은 성도에게 국한하여 주신 말씀이다. "귀 있는 자"는, 영적
(靈的) 청취력(聽取力)이 있는 자니 이는 곧, 택함을 받은 자이다. 누구든지 영리(靈
理)를 식별(識別)하는 자는 그 자신이 택함을 받은 자라는 신념(信念)을 가질 수 있
다.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이란 말을 보니, 이 개체 교회에 보낸 서신이
실상은 모든 교회들을 목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계 3:14
라오디게아.- 이는, 루카강 남쪽 강변에 자리 잡고 있는 부요한 상공업 도시로서
빌라델바아 동남(東南)에 있었는데, 현재 이름은 에스키힛사(Eski-hissar)라는 중요치
않은 도시이다.
아멘.- 계 1:6; 사 65:16 참조.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들을 다 성취
하셨다. 그는 그렇게 하나님의 신실(信實)을 성립시키셨다. 이 의미에서 그는, "아
멘"(* =진실함)이시다. 고후 1:20 참조.
충성되고 참된 증인.- 이것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계시하시고 또 하나님의 신실
을 증거하시려고, 구약의 예언들을 모두 다 성취하신 업적(業績)을 염두에 둔 말씀이
다. 1:5 해석 참조.
창조의 근본.- 이것은 예수님께서 창조자라는 말씀이다. 이와 같은 주님의 칭호는
불신실하고 영적으로 빈핍(貧乏)한 라오디게아 교회를 갱정(更正)하시기에 적합한 성
격을 가지고 있다. 주님의 신실은 그 교회의 불신실에의 대조요, 주님의 창조의 부요
(富謠)는 그들의 영적 빈궁(靈的貧窮)을 치료할 수 있다.
계 3:15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여기 이른 바 찬 것은 전연 복음과
접촉 없는 불신(不信)의 상태요, 더운 것은 복음을 믿는 자로서 사랑과 열심으로 가득
한 것을 의미한다(Greijdanus).
계 3:16
미지근.- 이것은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아는 가증(可憎)한 행위와 태도이다(17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그가 토하시는 이유는 그의 속에 역스러우신
까닭이다.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아는 태도는, 주님께서 가장 미워하시는 두 가지 죄
악을 합한 것이니, 곧, 외식과 교만이다. 주님께서 땅 위에서 가장 많이 책하신 죄는
바리새인들의 외식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은혜 주시기를 좋아하시되, 교만한 자만은
물리치신다(약 4:6).
계 3:17
본절은, 그들이 되지 못하고 된 줄 아는 죄를 드러내어 지적하시는 말씀이다.
부요하여.- 곧, 자칭 영적 생명이 부요하다고 말한다는 의미이다.
곤고, 가련.- 이 두 가지는 그들의 영적 빈핍(靈的貧乏)으로 인한 비참한 정형(情
形)에 대한 말씀이다. 그 비참한 정형의 원인은,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 세 가지이다. 다음 절이 이 세 가지에 대
하여 다시 말한다.
계 3:18
불로 연단한 금.- 이것은 순연 무잡(純然無雜)한 믿음을 가리키고(벧전 1:7),
"흰 옷"- 은, 그리스도께서 그 십자가에 죽으시므로 신자에게 주신 칭의(稱義)요,
"안약"은, 성령님이 밝히 보게 하여 주시는 은혜의 비유이다.
사서.- 이것은 값을 주지 않고 사는 영적 매수(靈的買收)이다(사 55:1).
계 3:19
내가 사랑하는 자.- 여기 "사랑한"다는 말은, 헬라 원어로 필레오* )인
데, 벴겔은 이것을 고맙게 돌아보는 애정의 활동으로 여겼다. 잠 3:12; 히 12:6-13
참조. 위에 말한 빌라델비아 교회는, 주님의 아가페(* =평가적 사랑이니 빌
라델비아 교회의 좋은 점을 보시고 귀히 여겨 사랑함)를 받았으나(9절), "라오디게아
교회"는 지금 긍휼로서의 은고의 사랑을 받은 것이다. 삼상 7:3; 대하 7:14; 시
34:18, 51:17, 147:3 참조.

( 문밖에서 기다리시는 예수님 )
계 3:20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이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죄 있는 신자들을 회개시키려
고, (1) 만반 노력(萬般努力)을 하시며, (2) 간절히 권면하심이다.
더불어 먹고.- 아 5:1,2 참조. 이것은 비유인데 영적 사랑의 교제를 가리킨다(계
19:9, 17; 눅 14:12, 17:8).

( 문밖에서 두드리시는 예수님 )
계 3:21
이기는 그에게.- 이것은, 죄를 회개하므로 승리하는 자를 가리킨다.
보좌에 함께 앉게.- 이는 이기는 신자가 내세에 들어가 주님과 함께 왕노릇하게 될
것을 가리킨다. 딤후 2:12 참조.
계 3:22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2:7과 3:13에 있는
같은 말 해석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