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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1 - 강해 ( 계 1-10 장 )

작성자야베스|작성시간17.08.06|조회수885 목록 댓글 0
요한계시록 1 - 강해 ( 계 1-10 장 )   
                                                                                   

 

 

 

계 1:1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것은 예수님께서 주신 계시(啓示)라는 말씀이다. "계
시"란 말은, 헬라 원어로 아포칼류시스(* )라고 하는데 감취었던
것이 열리어 나타난 것을 의미한다(Lohmeyer). 이 세상 끝에 관한 일을 누가 알리요
마는 창조주께서 계시하면 알 수 있는 것이니 알게 하는 권세가 그에게만 있다. 그러
므로 옛날부터 철학이나 과학이 그것을 알지 못하였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일
에 대하여 그것들이 월권(越權)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누구에게 이 계시가 임하였는가? 그것은 사도 요한에게 임하였다. 계시 받
은 이가 사도인 만큼, 그것의 효용(效用)은 모든 신자들에게 공동(共同)으로 미친다.
곧, 그것은 선지자나 사도의 사용(私用)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온 교회의 공동 유익한
것이다. 그러므로 계시록(啓示錄)을 읽는 자는, 그것이 사도에게와 마찬가지로 그 자
신에게 직접 관계를 가지고 임함을 알아야 할 것이다.
반드시 속히 될 일.- "반드시"라는 말은, 헬라 원어로 다이(* )라고 하는데,
예언적 필연성을 함축(含蓄)한다. 곧 로마여(Lohmeyer)의 말과 같이 그것은, 하나님
께서 그 정하신 대로 성위하실 일의 절대적 확실성을 가리킨다(* bezeichnet
eine prophetische Notwendigkeit die absolute gewissheit, dass Gottes Plan sich
erfllt. off. p.8). 본서에 기록된 예언은, 그대로 성위되지 아니할 수 없는 불가항
적(不可抗的)인 실현력(實現力)을 띠고 있으니 그것을 믿는 자는 지자(智者)이다.
"속히"라는 말은, 헬라 원어로 엔타카이(* )라고 하는데, 크레다너스
(Greijdanus)는 그것을 "급히"(成就行步의 속도를 이름이고 그 기간의 짧음을 이름이
아님)란 의미로 본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시기 위하여 신적
(神的) 속도로 모든 일을 성취해 가신다고 생각된다. 그는 이런 간절한 열성으로 이
렇게 우리를 위하여 일하시지만, 좁고 미련한 우리의 심정에는 그것이 더디게 생각된
다.
지시하신 것이라.- "지시하신"이란 말은 헬라 원어로 에세마넨(* )
이니, 상징(象徵)으로 표시하였다는 의미이다(Greijdanus). 그러므로 계시록은 여자
적(如字的)으로 해석하는 것보다 상징적으로 해득(解得)함이 옳다. 그러한 상징이 계
시록에 사용된 목적이 무엇인가? (1) 귀 있는 자는 들을 수 있게 하려 함이다(계 2:7;
마 13:9). 곧, 성령을 받아서 신령한 귀가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만 그것을 깨닫도록
하려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미래사(未來事)가 상징으로 표시될 때에 분명히 깨달아
지는 방면이 많다. (2) 진주 같이 귀한 진리가 천히 내던지우지 않고(마 7:6), 상징
(象徵)의 막(幕)으로 가리움이 된 것은, 간절히 사모하는 자만이 깨닫도록 하기 위함
이다. 곧, 진리를 애모(愛募)하지 않는 자들에게는 그것이 숨겨지기 위한 것이다(마
13:1-15).



계 1:2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곧 자기의 본 것을.- 여기 세가지 엇구는
동일한 내용을 가리키는 다른 형식(形式)의 표현(表現)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예수님
으로 말미암아 증거되어 나타났고, 그것이 사도 요한에게 보여진 것이다. 계시록(啓
示錄)의 내용은, 곧, 주님의 증거에 관한 것이다.



계 1:3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지키는 자들.- 여기에,"읽는 자"(*
)라고 단수로 쓰고, "듣는 자들"(* ) 또는 "지키는 자들"(*
)이라고 복수로 쓴 목적은 무엇인가? 그것은 교회의 공석에서 한 사람이 성경을 읽
고, 회중은 듣는 장면을 가리키려는 것이다. 즈안(Theodore Zahn)은, 2,3세기 교회가
성경의 어느 다른 부분보다 계시록을 이렇게 읽어서 핍박 가운데서 위로 받은 사실을
지적하였다. 이것을 보면, 성경을 사사로이 독학(獨學)함보다 교회적으로 성경을 공
독(公讀)하며 풀어서 설교함을 듣는 것이 원칙이고, 더욱 영감(靈感)에 부요한 일이
다.
때가 가까움이라.- 이 점에 근거하여 크레다너스(Greijdanus)는, 계시록을 순전히
역사적(歷史的)으로 보는 학자들의 그릇된 것을 지적하였다. 그리고 그는 계시록을
가리켜 미구(未久)에 발생하기 시작할 일들과 세상 끝의 일들과 및 내세(來世)의 일들
을 포함하는 예언(豫言)이라고 하였다(bestijds spoedig aanvangen zoude te
gebeuren, en vervorgens in snel verloop plaats grijpen zoude den ganschen loop
des tihds df der eeuwen...),이 견해는 문의(文意)에 적합(適合)하고 자연스럽다.
예언을 상고하고 지키는 자들이 복 있음은 예언이 그렇게 연구하는 자에게만 축복을
가져다 주게끔 되어 있기 때문이다.



계 1:4

일곱 교회.- 왜 "일곱"수를 택하였는가? 아시아에는 이 밖에 다른 교회들(골로새,
히에라폴리스, 막네시아, 드로아 등)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일곱 교회"만을 선발
(選拔)하여 말하였으니, 저자 요한의 염두에는 일곱 수의 영적(靈的) 의미를 생각한
것이 분명하다. 일곱 수의 영적 의미는 거룩하고 완전한 것으 상징한다(Moffatt,
Greijdanus). 그렇다면 일곱 교회는 각 시대의 모든 세계 교회를 대표한다. 카이퍼
(A. Kuyper)도 이런 의미로 말하기를, "그리스도께서 7 교회에서 일곱 가지 교회 형편
을 보신다. 이 일곱 가지 형편은 모든 시대와 모든 지방에 나타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다(The Revelation of St. John, p.42).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로 말미암아).- 이 말씀은, 헬라 원어
로 아포 호 온 카이 호 엔 카이 호 엘 코메노스(*
)라고 한다. 여기 아포(* =말미암아)라는 전치사(前置詞)가, 하나님 성호의 주
격 명사(* ) 위에 놓인 것(아포
는 소유격 명사 위에 놓이는 전치사인데도 불구하고)은 파격(破格)이다. 이 파격은,
영원 불변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고유 명사에 대하여 침범하지 않으려는 경외(敬畏)
의 동기에서 표현된 것이다. 크레다너스(Greijdanus)도 말하기를, "이런 문투는 부주
의도 아니며 실수도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불변성을 가리키기 위한 것이다"라
고 하였다(Openbaring, p.14). 이 성호는,구약의 여호와(* =영원 자존자)란
말 뜻과 같은 것을 의미한다(출 3:14 참조). 그러므로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 택한
백성에게 계약하신 대로 어김 없이 구원을 성취하여 주신다는 뜻을 가진다(말 3:6).
일곱 영.- 이것은 성령님을 가리키는데, "일곱"수로서 말한 이유는, 스가랴 예언서
에 벌써 성령님을 여호와의 일곱 눈으로 비유했기 때문이다(슥 3:9; 계 5:6), 일곱 수
는 완전과 성결을 상징하는 듯한데 성령님의 위(位)는 단일(單一)하시되, 그의 속성과
권능(權能)은 완전하시다는 의미이다. 반 델 모일렌(Van Der Meulen)은, "일곱 영"이
란 뜻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완전수(完全數)의 은사(恩賜)들을 부어 주시는 하나님
의 은혜의 신(神)을 가리킨다고 하였으니(사 11:2), 가장 이연(理然)한 해석이다(De
Openbaring in Het Laatste Bijbel-boek, pp.38-39). 이 성령님께서 "보좌 앞에"계시
다 함은, 그가 성부신(聖父神)님의 왕적 권위(王的權威)와 능력과 기타 모든 속성들을
그대로 나타내시는 사역자(使役者)라는 의미이다. 크레다너스(Greijdanus)는 이 점에
있어서 성막(聖幕)의 구조를 연상하였다. 곧, "보좌"는 지성소(至誠所)요, "일곱 신"
은 성소(지성소 앞)에 있는 일곱 등(燈)에 해당하며, 다음 절의 그리스도는 속죄자(贖
罪者)니 만큼, 제단에 해당하다고 하였다(출 40:1-6 참조)(In het heilige der heili
gen was de ark. Daar troonde God, EX. 25:22. Voor dit binnenste heiligdom was
het heilige, waarin de kandelaar mit zijne zeven lamen brandde, Ex, 40:24, 25.
En voor dit heilige bevond zich het voorhof, waarin de dienst der verzoening
uitgericht werd, Ex. 40:25-33-Openbaring, p.16).



계 1:5

충성된 증인.- 본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삼직(三職), 곧, 선지(충성된 증인), 제사
(죽었던 자), 왕(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을 가리켜 말한다. 그 중에도 이
문구(충성된 증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일생을 통하여 가진 고초를 무릅쓰시고
심지어 죽으시므로 무지 몽매한 인류에게 하나님을 알리는 일을 하신 것을 가리킨다
(마 11:27; 요 1:18, 14:6, 18:37; 딤전 6:13). 하나님을 알려고 하면 예수 그리스도
를 아는 것이 그 독일 무이(獨一無二)한 길이다(요 14:6). 누구든지 예수를 믿으면
하나님의 어떠하심과 그의 계심을 알게 된다. 인간은 자기의 지능(知能)으로 하나님
을 아는 자리에 들어갈 수 없다. 그 이유는, 인간이 죄로 인하여 어두워진 까닭이다
(고전 1:21). 하나님이 인생에 구원(救援)을 주시는 영지(靈智)는 오직 예수를 믿음
에 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仲保)이시니, 우리는 그를 통해서만
하나님과 교제(交際)할 수 있다.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시고.- 여기 이 문구(*
)는, "죽은 자들 중의 그 먼저 난 자"라고 함이 적역(適譯)인 것이다. 그렇다면 그
의미는, 모든 죽은 자들의 선봉적 부활자(先鋒的復活者)란 것이다. 그것은, 그가 먼
저 그의 백성을 위하여 죽음을 이기시고, 죽음을 소멸하셨기 때문에 그의 백성들은 그
의 공덕(功德)으로 말미암아 부활의 영광에 들어가게 됨을 가리킨다. 크레다너스
(Greijdanus)는 말하기를, "그 먼저 난 자"란 원어 프로-토토고스(*
)는, 시간적 수위(時間的首位)인 동시에 부활권세(자기와 모든 신자들을 위하여 사망
을 이기는)의 소유(所有)를 표시한다(* drukt de gedacht uit
van eerste in tijd voor ganger en dan, daarmede samenhangende van
machthebber.-Openb.p.16)(1:18 참조). 예수님 이전에 몸으로 다시 산 자들이 없지
않으나, 예수님의 부활(復活)처럼 다시 죽지 않는 부활을 취한 자는 이때까지 예수님
밖에 전연 없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의 선봉이라 함은, 그가 사망을 이기시고 몸
된 교회를 이끌고 부활에 들어가셨으므로 그에게 연합한 몸되는 교회는, 동일(同一)한
부활에 끌려 들어간다. 그리스도께서 사시므로 우리가 살게 됨이 성경의 부활 교리이
다(요 14:19; 엡 2:5,6 참조).
땅의 임금들의 머리(*
).- 이것은, "땅의 왕들의 통치자"하는 뜻이다. 그리스도의 죽으셨다가 다시 살으심
은, 그로 하여금 교회의 왕이 되게 함과 온 인류의 왕되심을 성립시켰다(롬 14:9).
사단은 그리스도로 하여금 범죄케 하여 천하 만국을 받도록 유혹하려 하였으나(마
4:8-), 그리스도는 자기의 죽으심으로 그것(천하 만국)을 얻으셨다(제 19:12,16).
그가 만왕의 왕이시기 때문에 신자들의 부활과 구원을 이루신다(요 3:35,36; 빌
3:21). 여기서 그리스도를 만왕의 왕으로 보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종말관적(終末
觀的) 지위를 바라봄이다. 그의 종말관적 내림(來臨)은, 그 구체적 통치를 특색으로
한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주의해야 될 것이 있으니, 곧, 그것이 그 방식
과 형태에 있어서 이 세상에 속한것도 아니거니와 섭리적(攝理的)인 것도 아니고 초자
연적인 것이라는 것이다(17:19 참조).
우리를 사랑하사.- 사랑은 속죄(贖罪)의 기본이다. 사랑이 없는 곳에 희생이 없
다. 죄인인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신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사랑의 극치(極致)이다.
사랑은 보수적(報酬的) 행위가 아니고 순 희생적 행위인 것이다.
그의 피로.- "피"는 생명과 같은데, 죄 값은 오직 "피" 곧, 생명의 지불로서야 성
립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죄 값은 피(생명의 지불, 사망)로써만 물어줄
수 있다(창 9:4; 히 9:22). 그리스도의 피는 하나님의 아들의 "피"니 만큼, 그 많은
택한 백성들의 죄 값을 담당하고도 무한히 남는 귀한 "피"인 것이다. "피"란 말은,
성경에 도합 700번 나온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피 밖에는, 우리를 구원하실 길이
없음을 이렇게 힘있게 약속하셨다. 우리로서는 그리스도의 피를 그 만큼, 힘있게 믿
어야 된다.
바울은 신자들을 속죄하여 주시는 그리스도의 보혈을 힘있게 믿는 의미에서 말하기
를, "내가 너희중에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 하였다. 루터(Luther)는 말하기를, "하나님의 아
들은 나를 사랑하여 자기 자신을 나에게 주셨으니 그것은, 율법과 및 인간의 행위의
의(義)에 대하여 터진 뇌성벽력 같은 반대이다. 만일 네가 하나님의 아들을 비교할 수
없는 보화로 여길진대 네 모든 종교 의식과 행위와 공로는 지옥으로 던져라. 그 이유
는, 네가 하나님 아들의 죽음 밖에 하나님의 진노를 멈추어 화해시키는 것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해방하시고.- 이것은, 헬라 원어로 뤼산티(* )라고 하는데 이는 알려
(* )과 알렉산드리아 사본(寫本)의 사구(寫句)이고, 어떤 사본(R, Q)에는 루-우산티
(* )로 되어 있으니, 그 뜻은 "씻으시고"라고 한다. 크레다너스
(Greijdanus)와 기타 유명한 주석가들은 첫째를 택하였다. 모팟트(Moffatt)도 그리하
였다. 죄는 우리를 멸망의 형벌에 매는 줄인데, 그리스도는 그의 죽으심(피)으로 이
무서운 줄을 끊으시고 멸망의 형벌에서 우리를 해방하셨다. 기독 신자들은 예수 그리
스도의 보혈로 말미암아 이 형벌을 면하게 되었으니 어찌 찬송하지 않으랴!



계 1:6

그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그리스도의 구원 행위의 업적은 물론 제 1착으로 우
리에게 미쳤다. 그러나 그것의 최종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데 있는 것이다
(계 22:3; 엡 1:6).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사 자기를 알고 또 섬기게 하려는 것을
일향(一向) 목적하시는데(엡 1:5,6), 그리스도께서 그 구원 행위로써 이를 이루신 것
이다.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나라와 제사장"이라는 말은, 헬라 원어로 바실라이안
히에라이스(* , )인데 그 뜻은 "나라, 곧 제사장들"이
다. 무질서한, 혹은 개인주의의 제사장들의 군중(群衆)이 아니고, 그리스도를 임금으
로 모시고 질서 있고 평화로운 단체로서의 제사장들을 가리킨다. 땅 위의 교회는 이
렇게 질서와 평화를 생명 같이 지니어야 한다. 이는, 출 19:6의 예언의 궁극적(窮極
的)성위인 것이다(5:10, 7:15, 20:6, 21:3). 롬 12:1; 히13:15; 벧전 2:5 참조. 모든
신자들은 다 함께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들이니, 그들의 왕(그리스도)의 말씀(선지와
사도들의 증언-성경)을 엄수(嚴守)하여 영적 질서를 세워야 된다. 벡크위드
(Beckwith)에 의하면, 여기 이른바, "나라와 제사장"이란 문구는, 신자들이 내세에서
왕됨과 겸하여 제사장됨을 가리킨다고 한다(The kingship of God's people in the
Messianic kingdom is another aspect of their priesthood.-The Apocalypse of John,
p.430).



 

                            ( 주님 께서 다시 오심 )

 

 

계 1:7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앞의 4절에는 성부(聖父)되신 하나님께 대하여 "오실 자"
로 말하고, 여기서는 그리스도에게 대하여 그렇게 말하였다. 요한은, 그리스도의 활
동을 하나님 아버지의 그것과 동일시(同一視)함이 그 특색이다. 이는 물론 위(位)에
대한 동일시가 아니고 신성(神性)에 대한 것이다. 크레다너스(Greijdanus)는, 이 점
을 선히 간취(看取)하고 해명하였다(in vs 4heet de vader * .
Hier wordt van Heere Christus gezegt, dat Hij komt voor Johannes is dus Zoon
volkomen gelijk aan den Vader. vgl. ook vs.8, wel niet wat persoon aangaat, vgl.
vss. 4 en 5,5:1, 6. maar wat wezen betreft. De vader komt in den Zoon). "구름"
은 무엇을 상징하는가? 여자적(如字的)으로 자연계의 구름인가? 크레다너스
(Greijdanus)는 이것을 하나님의 영광의 가견적(可見的) 계현(啓現)이라 하였다(deze
wolken zijn de zichtbare openbaring van zijn Goddeliike majesteit). 출 13:21,
14:16, 14:19 참조. 그렇다면, 이 "구름"은 보통 구름이 아니고 기이한 구름일 것이
다. 모세가 미디안 광야에서 가시덤불에 붙은 불을 보았는데 그 불은 자연계(自然界)
의 불이 아니었다. 그 불이 가시덤불에 붙었으나 가시덤불이 타지 않았던 기이한 불
이었음과 같이, 여기 "구름"도 그러한 기이한 구름이 아닐까? 행 1:9-11 참조. 그러
나 이 구름을 문자적으로 자연계의 것으로 보아서 틀릴 것 없다(Lange). 그가 승천하
실 때에는 구름이 그를 가리운 일도 있었고(행 1:9), 그가 다시 오실 때에 그와 같은
모양으로 오실 것이라고 하였다(행 1:10).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이것을 보면, 주님의 종말적(終末的) 내림(來臨)은 조
금도 숨김이 없어서 누구나 볼 수 있게 오신다. 그것이 어떻게 그와 같이 되는지에
대하여는 우리가 예측(豫測)하기 어렵다. 그렇게 그것이 초자연적(超自然的) 사리(事
理)에 속하는 한, 우리의 자연적 지식으로써 예측하기 어려움이 오히려 마땅한 것이
다.
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요.- 슥12:10; 요19:34,20:25,27 참조. "그를 찌른 자
들"은 누구 누구냐? 이들은 그를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이며, 그의 옆구리를 창으로
"찌른 자들"이라고 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주님을 박해하는 자들에게 대한 통칭(通
稱)이다. 그리스도께서 처음 오셨을 때에는 그를 주(主)로 알아 보지 못한 자들이 많
았다. 그러나 그가 다시 오실 때에는 가장 악한 원수들도 그를 하나님으로 알고 떨게
된다. 모팟트(Moffatt)는, "그를 찌른 자"란 말이 유대 민족을 가리킨다고 하였으나,
적합한 해석이 아니다.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들이 "애곡"(哀哭)하는 이유는, (1) 그렇게 종말이 이
르기 전에 회개(悔改)하지 못한 것을 뉘우쳐(회개는 아님-마 27:3) 통분히 여기는 까
닭이며, (2) 이제 오신 주님으로 말미암아 무서운 심판 받을 것을 두려워하는 까닭이
다(마 8:12).
그러하리라 아멘.- 여기 "그러하리라"란 말은, 헬라 원어로 아니(* )라고 하
는데, "예"(참되다는 뜻)라는 뜻이다. 이것이, 그 아래 있는 히브리어 아멘(* )
에 해당한 말이다. 이 점에 있어서 크레다너스(Greijdanus)는 말하기를, "요한은 여
기서 그리스도의 종말적(終末的) 내림(來臨)의 확실성에 대하여 두 나라 말로 이중(二
重) 확보(確保)를 표시한 것이다. 이렇게 그가 이중 확보한 이유는, 주님의 종말적
내림이 그 약속하신 대로 불변함을 강조하려는 까닭이다"(De Grieksche en de
Hebreeuwsche woorden ter bevestiging woor den hier bijeengevoegd om te sterker
de stellige zekerheid uit te spreken, dat de Heere alzoo komen zal, gelijk Hij
beloofd heeft)라고 하였다.



 

                 ( 주님 께서 다시오심 )

 

계 1:8

본절은 앞절에 말한 주님의 종말적 내림에 대한 확보니, 이는, 하나님의 성호(聖號)
로써 표시된다. 하나님의 성호 그것의 의미가 벌써 그의 재림을 함축(含蓄)한 것이
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본질 성호는 그 본질의 표호이므로 벌써 그의 종말적 내림
이 필연적으로 포함된 것이다. 크레다너스(greijdanus)는 말하기를, "그의 본질(本
質)로 좇아 그의 행사들이 나온다"라고 하였다(uithet zijn of wezen Gods, volgt
zijn werkin).
알파와 오메가.- 이것은, 헬라어 문자의 첫 글자(* )와 끝 글자(* )를 가리킨
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시작하신 신(神)이시고 또한 귀정(歸正) 결말(結末)하시는
신이라는 뜻이 여기 있다. 다시 말하면, 그는 창조자이시고 또한 심판자이시다.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이 성호는 4절에도 있는데, 출 3:14의
"영원 자존자"란 말의 히브리어인 여호와(* )의 해설적 번역임에 틀림 없다
(Greijdanus). "영원 자존자"의 의미는, 창조를 받지 않고 자존(自存)하사 영원 불변
하시고 만사 만물을 그 기쁘신 듯대로 주재(主宰)하시며 또 때가 이르면 그것들을 임
의로 심판하사 정리하시는 자라는 뜻을 가진다. 이 해설적 번역에 있어서 "장차 있을
자"라고 하지 않고 "장차 오실 자"라고 의역(意譯)하여 옮긴 것은, 여호와(* )
란 성호가 포함한 재림의 뜻을 의식적으로 적발(摘發)함이다.
전능한 자.- 헬라 원어로 판토크라토-르(* )이니, 재림하실
자가 가지지 않으면 안될 속성(屬性)을 보여주는 말씀이다. 우주(宇宙)의 최종적(最
終的) 귀정(歸正)을 하실 주님이 무소불능(無所不能)하시지 않을 리는 만무하다.



계 1:9

나 요한은 너의 형제요...동참하는 자.- 여기 "형제"란 말과 "동참하는 자"란 말
이, 헬라 원문에는 한 관사(冠詞)에 함께 속하여(*
) 서로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 그것은, "형제"이므로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
게 된다는 인과(因果) 관계를 암시한다. 여기서 요한이 자기의 직명(職名=사도 혹은
선지자)을 기입하지 않은 사실에 대하여 우리는 이상히 여길 것 없다. 그는 본서를
기록함에 있어서 물론 사도의 권위로 하나님의 말씀을 교회에 전한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그는, 그 자신이 교회로 더불어 고난과 영광에 동참하는 형제라는 것을 강조하
면서 본서를 기록한 것이다. 마 23:8 참조.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 이 문구에 있어서 "예수의"란 말은 "환난", "나라",
"참음"의 세 말을 공통적으로 연결한다(*
). 그러면 그것은, "예수의 환난", "예수의 나라", "예수의 참음"을 의미한다. "예
수의"란 말은, 헬라 원어로 엔 예수(* )이니, "예수 안에"한 말이다.
예수 안에 환난과 나라는, 예수와 연합한 관계로 참예할 환난과 천국이요, 예수 안에
참음은, 예수께서 모본으로 보여 주시고 또 힘 주시어 참게 하시는 참음이다
(Moffatt). 환난은 나라에 이르는 길이요,참음은 그 길을 걷게 하는 힘이다.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인하여.- 2절 해석 참조.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
곧, 복음을 위하여 핍박을 받아 밧모섬으로 추방된 것이다.
밧모.- 이것은 작은 섬 이름인데, 에베소에서 14시간 쯤 항해하여 도착되는 곳이
다. 그 때에 이섬에 범죄자들을 많이 정배 보냈다고 한다(Moffatt).



      ( 밧모라 하는섬에 있는 사도 요한 )

 

 

계 1:10

"주의 날" - 은, 우리들이 지키고 있는 성일(聖日)을 이름인데, 이 날은 사도 시대
부터 벌써 성별(聖別)한 날이었다(고전 16:2). 교회가 이 날을 지켜 내려온 증거는
사도 후시대(使徒後時代)에도 많이 있다(Didache 14.Ignatius ad Man. 9).
성령에 감동하여.- 이는 헬라 원어로 에게노멘 엔 프뉴마티(*
)이다. 그 의미는 "성령 안에 있었다"는 것이니, 로마여(Lohmeyer)의 해석은 다음과
같다. 곧, 이것은, 성령 안에 있다는(롬 8:9) 관습적(慣習的) 상태가 아니고 일반적
입신(入神)도 아니라 황홀(恍惚)한 영계(靈界)에 옮겨졌음을 이름이다(계 4:1; 고후
12:1).-Nicht einen dauernden havitus gleich dem *
(Rm. 8:9) auch wohl nicht nur allgemein den eintritt des ekstatischen Zustandes
sondern speziell die ekstatische entruckung (S. zu 4:1 und vgl. etwa 2 cor.
12:1 ff). 그러나 이 때에 요한이 잠이 들었던 것도 아니고, 정신을 잃은 혼수 상태
에 빠진 것도 아니며 그와 반면에 그 정신이 똑똑하여 자주 의식(自主意識)을 가지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Greijdanus).
나팔 소리 같은.- "나팔 소리 같은"것이고 나팔 소리는 아니다. 옛날에는 민중을
깨워 부를 때에 나팔을 사용했다(민 10:2). 그러므로 이 "소리"는 깨우는 영음(靈音)
임에 틀림 없다.



계 1:11

본절에 있는 "일곱 교회"에 대하여는, 2, 3장에 나오는 각 교회에 대한 해석을 참조
하여라.



계 1:12

일곱 금 촛대.- 이것은 20절에 해석되었으니, 곧, 일곱 교회이다. 출 25:31-40 참
조.

 


 

     ( 촛대 한가운데 인자와 같은 이 )

계 1:13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 이 분은, 단 7:13에 있는 "인자" 곧, 메시야(그리스
도)이시다. 이 분이, 교회들 가운데 언제나 계시는 그리스도이신데, 그 분에 대하여
이 아래에 많은 비유의 말씀들이 나온다. 사이스(Seiss)는 이 아래 기록된 모든 표현
들을 비유로 보지 않고 여자적(如字的)으로 보았으니 잘못이다(A. Rieters, Studies
in The Revelation of St. John. p. 87). 헨드릭센(Wm, Hendricksen)은, 여기 묘사
(描寫)된 그리스도는 늘 교회에 계심을 그 특징으로 한다는 의미로 말하고, 따라서 이
부분 말씀과 다음 장들(2,3장=교회론)과의 연락이 밀접하다고 역설(力說)한다(More
Than Conquerers, pp. 33-34).
발에 끌리는 옷.- 이것은 대제사장의 옷이고(출 28:4, 29:5),
"가슴에 금 띠"- 는 군왕의 옷이다(Greijdanus). 그러면 요한은 여기서 제사장 겸
왕이신(시 110편; 사 6:1-5) 메시야를 본 것이다.



 

계 1:14

그 머리와 털의 흐기가 흰 양털 같고.- 이것은, 그리스도의 영생(단 7:9)과 성결
(사 1:18)을 상징(象徵)하는 것이다.
그의 눈은 불꽃 같고.- 이것은 그의 전지성(全知性), 곧, 무엇이나 모르심이 없으
신 지능(知能)이시다. 단 10:6 참조.

 

 

계 1:15

그의 발은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이것은, (1) 단 2:41-43의 "진흙과 무
회가 섞인 발"처럼 붕괴(崩壞)되기 쉬운 것이 아니고, 견고무비한 신국(神國) 혹은 심
판을 상징한다. 단 2:31-35 참조. (2) 예수님의 초림 시(初臨詩)에는 그의 발이 십
자가에 못 박힐 때에 상함이 되었지만 재림하실 때에는 영광과 권능으로 오시기 때문
에 원수를 밟아도 상하지 않는다.
그의 음성은 많은 물 소리와 같으며.- 이것은 그리스도를 하나님과 동일시하는 엇
구이다. 겔 43:2을 보면, 하나님의 음성이 많은 물소리와 같다고 하였다. 시편 29:3
에서도 역시 그리하였다. 이것은, 힘있는 소리여서 어떤 때는 모든 죄 있는 인간들을
두렵게 하는 회개의 도전(挑戰)이기도 하지만 세상 끝날에는 심판 선고의 무서운 말씀
이다.



계 1:16

그 오른 손에 일곱 별이 있고.- "오른 손"은 힘있는 손이니, 일하는 손이며
(Greijdanus), 보호의 역할을 하는 손이다. 그러므로 "일곱 별"을 "오른 손"에 잡았
다함은 교회의 사역자들(20절)을 통하여 능력 있게 일하신다는 뜻이다.
그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이것은 사람의 심혼 골수(心魂骨髓)를 쪼개
며 또한 죄악을 날카롭게 판단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킨다. 이 말씀이, 영적 병자
곧, 죄인을 해부아여 구원하며(히 4:12), 또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 자들을 정죄하며
심판한다(계 19:20; 요 12:48).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취는 것 같더라,- 하늘 나라의 영광을 얻으신 이의 광채
는 이렇게 빛난다. 그가 변화산(變化山)에서 영광을 나타내신 때에도 역시 그렇게 보
이신 것이다(막 9:3). 천국에 참예한 의인(義人)들의 모습도 역시 해와 같이 빛난다
고 하였다(마 13:43).



계 1:17

죽은 자 같이 되매.- 겔 1:28; 단 8:17 참조. 그가 이렇게 된것은 두려움에 붙잡
힌 까닭이다. 왜 그에게 그런 두려움이 임하였는가? 그것은 그가 인간이니 만큼, 연
약하고 죄도 있는 까닭이었다. 크레다너스(Greijdanus)는 말하기를, "그가 그렇게 된
것은, 그의 연약성 때문이라기보다 오히려 죄 때문이었겠다"(사 6:5 참조)라고 하였다
(De verklaring dezer overweldiging ligt niet zoozeer in's menschen broosheid als
wel in zijne zondigheid,vgl Jes, 6:5).
두려워 말라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이 문구의 헬라 원어(*
)를, 즈안(Theodore Zahn)은 다음과 같이 번역하였다. 곧, "두려워 말라. 이는 나로
다. 나는 처음과 나중이니"라고 하였다. "처음"과 "나중"에 대한 해석은 8절에 있으
니 참조하여라.



계 1:18

산 자라.- 헬라 원어로 호 존(* )이라고 하는데 불사성(不死性)을 가지시
고 늘 살아계신 분이라는 뜻이다.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열쇠"는 주권(主權)을 의미하는데(Greijdanus),
"사망과 음부"(陰府=죽은 자가 있는 곳)의 주권을 "가졌"다는 것은, 그가 친히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셨으니 만큼, 이제부터는 사망의 지배(支配) 아래 있는 자들을 그의
권세로 석방(釋放)하실 수 있다는 것이다. "음부"는 무엇인가? 그것은 헬라 원어로
하데스(* )니, 구약성경의 스올(* )에 해당한다. 신약에서는 이것이,
회개하지 않은 자들이 죽은 후에 가는 흉한 곳을 의미한다. 그러나 구약에서는 스올
이란 말이, 육신의 죽음 상태와 무덤을 의미하기도 하나, 별세한 영혼들이 가는 곳을
가리키는 말로도 사용되었다. 특별히 선한 사람이나 악한 사람이 다 갈 수 있는 곳인
듯이 가리킨다(왕상 2:2,9; 욥 3:13, 30:23; 시 89:48; 사 14:9; 겔 32:28). 거기 간
사람들이 서로 이야기할 수 있다고 말한다(사 14:9). 델리취(Delitzsch)는 이 장절을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곧, "여기 음부에 대한 견해가 비록 신화적인 성격을 가지나
두 가지 진리에 근거하고 있다. 그것은, (1) 인간이 무덤 이편에서 어떻게 생활한 것
이 무덤 저편에서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 (2) 하나님이 주신 환경에서 인간의 비물질
적인 형태가, 그 자결정(自決定)으로 이루어진 내용이 거울에 드러나는 것과 같이 드
러남을 보여 준다"고 하였다. 헬만 바빙크(Herman Bavinck)는 말하기를, "구약에서
'음부'에 대하여 말할 때에 죽은 자들이 거기 가서 존재하며 산다 하고, 또한 그들은,
땅에서처럼 서로끼리 알며 서로 만남으로 정서(情緖)도 움직여진다"라고 하였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구약의 "스올"이란 말에서 결론할 수 있으니, (1) 스올
은 무덤과 언제나 동일한 것이 아니라는 것, (2) 스올이란 말로써 악인이 가는 곳을
의미하는 동시에, 의인이 가는 곳을 의미하기도 하였다는 것이다(창 37:35). 그렇다
면 문제가 생긴다. 어떻게 악인과 선인이, 사후에 같은 곳에 갈 수 있을까? 그것은,
신약 사상에는 물론 안맞거니와 구약 사상에도 맞지 않는다(시 16:11, 17:15; 마
8:11,12). 그러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구약에서 "스올"이란 말이, 어
떤 때는 단지 육신의 무덤을 의미하는 것으로 그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또한 이
것은. 사후의 세계를 가리키기는 하나, 그 세계의 성격에 대하여는 길흉화복(吉凶禍
福)을 아직 포함시키지 않은 중세적(中世的)인 것으로서 그저 내세를 가리킨다(창
37:35). 로레인 뵈트너(Boettner)도 같은 의미로 말하기를, "구약에서 의인이나 악인
이 다 스올에 간다고 한 것 만큼, 스올이란 말이 반드시 상(賞)이나 벌(罰)에 대한 개
념을 가진다고 할 수 없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스올이란 말이, 신약에 와서는 헬라
어 아이데스(* )로 번역되고(행 2:27), 내세의 흉한 처소를 의미하고 있다
(눅 16:23). 악한 자들은 거기에 가서 고통을 받도록 되어 있다.



계 1:19

네 본 것과 이제 있는 일과 장차 될 일.- 여기 "네 본 것"은 다음 귀절이 해명
(解明)하였고, "이제 있는 일"은 2,3장에 기록된 교회 현상인 듯하고, "장차 될 일"은
6장 이하에 기록된 계시의 내용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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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 2:1

에베소 교회.- "에베소"는, 소아시아의 가장 중요한 도시인데 무역항이고, 당시 동
서양 문화의 교류 지점이었다(Greijdanus). 에베소는 소아시아의 중요한 교회인 고로
여기 첫머리에 기록된 듯하다.
오른 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이가 가라사대.- 일곱
서신은 그 첫 머리에 이처럼 주님의 사역적 명칭(使役的名稱)을 내걸고 시작하는데,
각 명칭은 각 서신 내용에 부합한다. "일곱 별을 붙잡"으시고다니시는 분은 곧, 교회
의 선악을 아실 것이니, 에베소 교회의 내용을 잘 아실 것은 시실이다.



계 2:2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 "행위"는 어떤 특별한 한개의 덕행(德行)이라기보다
이 아래 있는 몇 가지 덕행들을 총괄하는 머리말이다. "수고"란 말은 헬라 원어로 코
포스(* )인데 특별히 신산(辛酸)한 수고를 가리킨다. 에베소 교회에는 거짓
스승들의 활동이 적지 않은 듯하니, 그들을 축출(逐出)하는 일은 용이하지 않은 것이
었다. 그것은, 혈기로 할 수 있는 투쟁이 아니고 덕을 쌓으면서 싸워 나아갈 일이다.
이런 영전(靈戰)을 체험하지 못하고는 그 고생이 어떠함을 이해하기 어렵다. "인내
"란 말은, 헬라 원어로 휘포모네(* )라고 하는데 그 어원(語源)은 "아래
에 머문다"는 뜻이다. 인내야 말로 모든 고초하(苦楚下)에서도 개의(介意)치 않고 머
물러 서는 것이며 백절불굴(百折不屈)함이다. 이것은, 소극적으로 견디는 것 뿐만 아
니라 적극적으로 극복(克服)하고 나아가는 것을 가리키는 글자이다.
"악한 자"- 란 말의 헬라 원어(* )는, 관사(冠詞)없는 복수 명사(複數
名詞)이므로 "악한 것들"이라고 번역함이 적합한 듯하다(Greijdanus). 이 말의 헬라
원어 카코스(* )는, 본질적 악성(本質的惡性)을 의미하나니, 인자하신 하나
님과 및 교회도 그런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그런 악은 거짓 스승들의 교훈 곧, 이단
일 것이다.
자칭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회를 향하여 그런 거짓 스승들의 화를 주의하라고 미
리 경고한 바 있었다(행 20:28-30). 그 교회는 그대로 잘 주의하려고 한 듯하다. 마
7:26; 고후 11:13; 갈 1:8,9 참조.



계 2:3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 이 귀절은, 앞절 초두에
있는 말씀 내용을 중복하여서 역설한 듯하다. "내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하신
복음이다.



계 2:4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대하여 칭찬할 바를 먼저
찾으시고, 꾸지람은 뒤에 하시니, (1) 사람을 긍휼히 여기시는 인자(仁慈)요, (2) 후
에라도 책망할 것은 반드시 책망하셨으니 그의 공의이다. 그러나 이 꾸지람도 혈기에
속한 것이 아니고, 사람의 죄과를 고쳐 주시는 사랑의 동기로 하신 것이다. "처음 사
랑"(하나님과 사람에게 대한)은, 에베소 교회 신자들이 처음 예수님을 믿을 때에 가졌
던 사랑이다. 그들이 교리를 지키려는 열심은 가졌는데 왜 사랑을 버리게 되었던가?
그것은, 경험과 역사가 증명함과 같이 그렇게 되기 쉽다. 논전(論戰)과 투쟁이 있는
곳에는 사랑과 인정이 식어지기 쉽다. 그 이유는, 사람은 그 생활의 양면(兩面)을 구
비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힘써 사랑을 지키려고 하면 은혜 가운데서 될 수 있
다. 논전(論戰)이 필요한 시기가 있으나 그것을 혈기로 혹은 포학(暴虐)으로 하지 말
고, 지혜(智慧), 인내, 노력, 건덕(建德)으로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일 개인
신자가 단독(單獨)으로 하기 어렵고 모든 신자들이 합력하여야 할 일이다. 그들이 합
력하면, 지혜, 인내, 노력, 건덕이 있다. 에베소 교회에는 인내와 노력은 있었으나(2
절), 지혜와 건덕이 부족하였던 듯하다. 만일 그들에게 지혜와 건덕이 있었더면 사랑
도 있었을 번하였다.



계 2:5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이것은, 죄의 원인을 탐지하는 행위의 필
요를 역설함이다. 회개와 사죄(赦罪)의 길은 오직 기독교에만 있다. 산 같은 죄라도
진심으로 회개하면 용서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누가, 한번 죄를 회개했다가 불행히 다
시 범죄했어도,그가 참으로 회개하면 하나님은 사하시는가? 사하신다. 그것이 곧 사
죄다운 사죄이다. 그것이 곧 하나님이 생각하신 사죄이다(마 18:21,22). 회개는 이
와 같이 귀한 것이로되, 사람들이 범죄하고도 뻔뻔스럽게 그 귀한 회개를 하지 않는
때가 많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이런 죄인들로 하여금 회개케 하기 위하여 그들을
징벌하시는 일이 있다. 그런데, 이 징벌은, 회개를 목적한 것이요, 영멸(永滅)을 목
적한 것이 아니니 만큼, 그것은, 육신적 고통을 받는 정도의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무서운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범죄했으면 곧 회개해야 된다. 회개하되 그 죄행의 출발점이 무엇
인지 알아야 한다. 죄는 번연성(繁延性)을 가진 것이기 때문에 출발점을 완치(完治)
해 버려야 근치(根治)가 된다.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이것은, 에베소에서 교회가 없어질 것을 예언
(豫言)함인데, 오늘에는 과연 그 도시 전체가 폐허만 남았다고 한다(greijdanus,
Charles). 그 교회가 예수님의 이 권면을 듣지 않은 까닭으로 이렇게 된 것이다
(Newell). 램세이(Ramsay)는, 이 말씀의 의미가 그 교회가 딴 곳으로 옮겨진다는 뜻
이라고 하나 옳지 않다.



계 2:6

니골라당.-이레네오(Irenaeus)는, 이것을 서도 행전의 일곱 집사 중 한 사람이 타
락하여 꾸민 이단(異端)이라고 한다(Adv. haer I,26, 3). 그러나 성신 충만한 집사
(행 6:5)가 어떻게 타락할 수 있을까? 어떤 사람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곧 "니골
라"란 원어는 "백성을 이긴다"는 뜻을 가진 말인데, 구약(민 22:12)의 히브리어 발람
(* =백성을 이김)에 해당하는 바 개인(個人)의 이름이 아니고, 이단 교훈으로
신자들(하나님의 백성들)을 정복하며 파괴하는 거짓 스승들의 무리라고 한다. "니골라
당"이 가르친 교훈은, 2:14, 20에 있으니, 그것은 물론 행 15:28,29에 있는 성령님의
명령을 순종치 않은 것이다(Charles).



계 2:7

이기는 그에게.- 이것은, 과거 분사(過去分詞)가 아니고 현재 분사(現在分詞, *
)이니 승리의 완필(完畢)이 아니고 진행을 염두에 둔 말이다(Greijdanus)(마 24:13 참
조). 신앙의 승리는 현세에 완성되는 시간을 가지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의 별세 시
각(別世時刻)까지 되어 가는 일이다. 여기 "이김"이란 말은 사도 요한의 필적(筆跡)
이다. 요한 일서에도 이 말씀이 있다. 요일 5:4,5 참조.
하나님의 낙원.- 이것은 의인(義人)이 별세한 후 그 영혼이 가는 곳이다(눅
23:43). 바울이 거시 가 본 일이 있으니, 곧, 삼층천(三層天)과 동일시(同一視) 된다
(고후 12:4). 이 밖에 예수님께서 낙원(樂園)에 대하여 직접 말씀하시지는 않았으나,
간접적으로 "아브라함의 품"이라고 비유적으로 말씀하신 것이 있다. 가경(假經)저자
들이 낙원에 대하여 감성적(感性的)으고 많이 말한 바 있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님
과 그 사도들이 말한 것에 비교하면, 이채(異彩)를 띠고 있으니, 그것은 인간의 상상
(想像)에서 나온 그릇된 것이다. 페론(Perowne)은 말하되, "낙원에 대하여 정경서(政
經書)가 침묵하는 점을 신비주의 문학은 가장 화사(華奢)하게 묘사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정경 문서의 간결한 기록을 오히려 진실미 있게 본다. 일설에, "낙
원"은 음부의 일부(一部)라고 한다. 곧, 음부의 일부에는 악인들의 영혼들이 가 있
고, 다른 일부에는 의인들의 영혼들이 가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옳지 않은 학
설이다. 구약에서 음부란 말로써 별세한 육신 상태 (무덤)을 가리켜 말한 적이 많다
(욥 10:21, 26:5; 시 88:10-12, 94:17, 22, 115:12; 잠 2:18, 15:11, 21:16; 사 14:,
26:14). 이 귀절들은 모두 무덤을 의미한 것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은 또한
음부를 가리켜 악인들의 영혼이 가 있을 곳으로도 말한다(시 44:23; 겔 26:20; 사
9:9, 10;마 11:23 참조). 그리고 "낙원"은 천계(天界)에 있는 것이다(고후 12:4).
생명 나무의 과실.- 이것은, 구약 창세기(창 2:9, 3:22)에 처음 나온 말인데, 풍
유적(諷諭的)으로 보는 해석도 있고, 역사적(歷史的)으로 보는 해석도 있다. 풍유적
해석은 이 과수가 실재(實在)한 것이 아니고, 다만 "영생"의 개념(槪念)을 시적(詩的)
으로 이렇게 비유한 것 뿐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것도 너무 지나친 독단(獨斷)이다.
우리는, 이 과수(果樹)를 실재한 과수로 보면서 그것이 생명의 주(主) 그리스도를 비
유하였다고 한다(Dr. Geerhardus Vos). 몸이 영생하여 있으면서 식물(食物)을 섭취한
다고 함이 역시 내세의 현상이다(계 22:2 참조). 이기지 못한 아담은 이러한 영생의
식물을 상실했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는 자들은 이것을 도로 받는다. 그 과수 자
체가 사람을 영생케 하는 마술적 능력을 가진 것이 아니다. 영생하게 하는 능(能)은
오직 그리스도에게만 있다. 그 과수는 내세(來世)에서 성도들의 분깃이 된다.
가경(假經)에 이 과수에 대하여 여러가지로 이야기한 바가 있으니, "성도들이 이 생
명수를 향유(香油)로 사용한다"고 하였고(2 Esd. 2:12), "이 생명 나무의 향기는 모든
향기에 뛰어나고, 그 잎과 꽃과 나무는 시들지 않고, 그 실과는 대추 야자의 열매와
같다"고 하였다(Ethiopic Enoch 24:4). 그러나 가경의 이 이야기는 사랑의 상상(想
像)의 산물이고 진리는 아니다.
귀 있는 자.- 이것은, 하나님 말씀을 알아 들을 수 있는 신령한 귀의 소유자를 가
리킨다. 그렇기 때문에 그 아래 "성령이...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라고 하였다.
이 문구는 , 교회를 상대하고 가르치는 말씀인 동시에 각 개인별로 그 회중(會衆)을
다룬 것이 분명하다.
교회들에게(* ).- 에베소 개교회에 보내는 말씀을
"교회들(複數)에게"하시는 말씀이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이 서신이, 모든 교회를 상대
하고 기록된 것임을 보여 준다.



계 2:8

서머나.- 이것은, 에베소 북쪽에 있는 곳인데 현존하며, 그곳에 강이 있는데 멜레
(Meles)라고 한다. 당시에, 폴리갑(Polycharp)이 이 지방 교회의 감독이었으며, 그가
순교한 연대는 주후 168년이었다.
처음이요 나중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 이것은, 수난하는 서머나 교회에게 위
안과 소망이 될만한 주님의 칭호이다. 여기 7서신(書信)에 있는 주님의 칭호는 이렇
게 각 교회 형편에 적합하도록 고안 되었다. "처음"과 "나중"은 영생하신 자란 의미
도 있고, 우주를 지으시고 유지하시고 귀정하시는 자란 의미도 있다. "죽었다가 살아
나신 자"란 이름은, 죄인을 구속하시려고 죽으셨다가 사망을 이기시고 부활하시어, 완
전히 신자들에게도 같은 부활을 주시는 자라는 것이다.



계 2:9

환난과 궁핍.- "환난"(* )은 그리스도 신앙을 인하여 받는 외래(外來)의
압박이고, "궁핍"(* )은 그 압박의 결과로 당한 생활상 빈곤을 가리킨
다. 이런 핍박은 그 때에 기독자들이 불신 유대인 또는 이방인 폭도(暴徒)로 말미암
아 당했던 것이다(히 10:34).
부요한 자.- 그들이 육신상으로는 빈핍하나 영적으로는 부요할 것을 가리킨다. 눅
12:21; 딤전 6:17,18; 고후 6:10; 계 3:17; 약 2:5 참조.
자칭 유대인.- 유대주의는, 서머나 지방에서 강하여 기독교를 박해 하였다고 한다
(Just. Dial. 16,11, 3). 유대주의자들은, 예수님을 구주로 믿지 않고 그들이 아브라
함의 자손 곧, 유대인 된 것을 천국 시민권으로 오해하였다. 폴리갑이 순교할 때에도
그들은 이방의 폭도들과 합작했고, 그 시체도 기독 신자들에게 주지 못하게 한 것이다
(Moffatt). 그들은, 그렇게 기독 신자들을 박해하면서 스스로 유대인 된 자세를 한
것이다.
사단의 회.- 이 말이 구약에는 없고 다만 악인들의 회(민 14:27,35; 시 21:16)라고
만 하였으나 계시록의 "사단의 회"라는 의미와 비슷할 것이다. 이런 유대인의 무리는
여호와를 경외하지 않고 또 기독 신자들을 기탄 없이 박해하였다. 서머나 교회 감독
폴리갑(Polyc. Mart. 13-)의 글에도 복음을 박해한 유대인들에게 관한 말이 있다. 그
리고 서머나 주민의 종류표를 보이는 조각서(彫刻書)에도 이스라엘 종교를 내버린 유
대인들에게 대한 말이 있다고 한다(CIG. 3148).



계 2:10

십일 동안 환난.- 이것은 알기 어려운 말이다. (1) 어떤 주석가들은 여기 날수(日
數)는 햇수(年數)의 상징이라 하여 로마의 디오클레시안(Diocletian)황제의 10년 간
혹독한 핍박을 가리킨다고 말하며, (2) 또 어떤이는 말하기를, 이것은 로마의 십대 핍
박자(十代逼迫者) 곧, 네로, 도미시안, 트라얀, 하드리안, 아우렐리우스, 세베루스,
맥시멈, 데키우스, 발레리안, 도미클레시안 황제(Nero(54-68), Domitian(81-96),
Trajan(98-117), Hadrian(117-138), Marcus Aurelius(161-180), Septimins
Severins(193-211), Maximinus(236-238), Decius(249-251), Valerianus(253-260),
Deocletianus(284-305))등의 열 시대를 가리킨 것이라고 하였으나 확실하지 않다.
(3) 크레다너스(Greijdanus)는 이것을 한정(限定)있고 길지 않은 기간을 비유한 것이
라고 하였다(De tien dagen spreken van een bepaalden tijd die eindigt, aan welken
vaste grenzen gesteld zijn)(11:3, 12:6, 11:9-11 참조). (4) 여기 십일이란 것은
단 1:12,14에 나온 것이라고 생각된다. 곧, 기독자가 받는 고난은 결국 그의 영혼을
유익하게 해주는 뜻 있는 것이라는 것이다. 다니엘은, 십일 동안 채소와 물만 먹는
시험을 당했으나 결국 그의 얼굴은 윤택하여졌다고 한다.
우리는, 세째 해석과 네째 해석을 합하여 생각하는 것이 합당 하다고 본다. 기독자
들이 받는 환난은 하나님의 견지에서 보실 때에 사실 "십일 동안"과 같은 잠간 되는
것이다(벧전 1:6; 롬 8:18). 그 뿐만 아니라 그들이 당하는 환난은 그들의 영혼을 유
익하게 하여 준다.
생명의 면류관.- 이것은 내세의 생명을 받을 뿐 아니라 영광까지 가리킨다. 우리
가 현세에서 그것이 어떠한 것이라고 형언하기는 어렵다. 그러면 이 세상에서 순교에
참예하는 자가 죽음에 아주 빠지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살고, 살 뿐만 아니라, 그 삶
의 극치(極致)에 빛나기까지 하는 영화로운 생명에 이른다. 이런 의미에서 크레다너
스(Greijdanus)는 적합한 평주(評註)를 썼다(Gaan de geloovigen dus ook den
marteldood in, toch zullen zij daarin niet onder gaan, maar leven, en in
onvergankelijke levensheerlijkheid schitteren). 본장 끝에 있는 설교(죽도록 충성
하라)를 참조하여라.



계 2:11

둘째 사망의 해.- 이것은, 멸망 받을 자들이 최후로 받는 분깃이니, 곧, 계 19:10,
20:10, 21:8에 있는 불못과 동일시 된다. 일설에 말하기를, "불못"은, 필자(筆者)가
사해(소돔과 고모라의 자리)라는 흉해(凶海)를 들어서 불가 형언(不可形言)의 흉소(凶
所)인 지옥을 상징한 듯하다고 한다. 에녹경에 사해를 악령들의 벌 받는 곳으로 말한
바 있다. 그러나 우리는, 계시록이 말하는 지옥을, 악한 자들이 영벌(永罰)받는 곳인
줄로 믿을 뿐이다.



계 2:12

버가모.- 이것은 무시아의 카이쿠(Caicus) 강 가에 앉은 땅인데 여기는 로마 황제
를 예배하는 신전(神殿)이 있고, 또 제우스(Zeus) 신전이 있으니, 우상 숭배의 총 본
부라고 할 수 있는 곳이다. 그러므로 우리 본문은 이곳을 가리켜 사단의 위가 있는
곳이라고 하였다.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진 이.- 영전(靈戰)의 필요가 있는, 버가모 교회에 대하여 이
런 칭호를 가지시고 임하심은 매우 적합하다(2:16 참조). "좌우(左右)에 날선 검"은,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하는데, 죄인들을 귀정(歸正)시키며, 혹은 심판하는데 사용되는
것이다(1:16 해석 참조).



계 2:13

사단의 위가 있는데.- 이것은 버가모가 사신 우상의 중심지였음을 염두(念頭)에 둔
말이다. 버가모에는 제우스, 다오니우스, 아데나, 에이스클레피우스의 네 개의 큰 우
상 전각들이 있었고, 또 로마 황제 숭배를 위한 두 개의 전각이 있었다. 특별히 에이
스클레피우스 전각에는 각처에서 불구자(不具者)들이 모여 들어 있어 에이스클레피우
스라는 신이 주는, 요법 현몽(療法現夢)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버가모는 요
한의 때에 아시아에서 우상 숭배의 본부(本部)로 되어 있었다. 제우스 우상 숭배의
고적(古蹟)은, 독일 사람 휴만(Humann)의 발굴(發掘)한 바 있어 백림 박물관(伯林博物
館)에 간직되었다(E.J. Banks).
안디바.- 이 사람은 버가모에서 순교한 성도인 듯한데, 제 3세기에 버가모의 어떤
조각에 이 이름이 있고(Deissm. 187), 터툴리안(Tertullian)은, 이 사람을 실제적 버
가모의 순교자로 여긴다(adv. Gost Scrp. 12). 그러나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에 대
한 상세한 역사는 없다. 시몬 마타프라테스(Simon Mataphrates)의 보도(報導)하는 전
설(이는 전설이고 성경은 아님)에 의하면, "안디바"는, 버가모 교회의 강의(强毅)한
감독이었는데 그의 명성(名聲)이 높은 고로, 로마 황제 예배 종파(皇帝禮拜宗派)에게
잡혀서 놋으로 만든 황소 속에 소살(燒殺)되었다고 한다(Moffatt). 유세비우스
(Eusebius)는, 칼푸스(Carpus), 파필루스(Papyus), 아가도니게(Agathonike), 기타 다
른 순교자들이 요한의 후대(後代)에 버가모 교회에서 났다고 하였다(Eusebius H.E.
4:15,48). 핍박자들이, 그 순교자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훼방하는 말을 하게 하려
고, 불가형언(不可形言)의 악형을 가했으나 그들은 항복하지 않았다고 한다.



계 2:14,15

두어가지 책망할 것.- 여기 "두어가지"란 말은, 헬라 원어로 올리가(* )
라고 하는데 적은 수량을 의미하며, 둘 이상의 복수를 가리키거나 한 수(一數)도 역시
이 말로 표시될 수 있다(Greijdanus).
이스라엘 앞에 올무.- 민 31:16, 25:1-5 참조. 발람이 발락의청구대로 이스라엘을
거슬러 저주는 안했지만, 이스라엘을 유혹하여 모압 여인들과 음행케 하는 꾀를 발락
에게 가르쳐 주었다(민 24:25, 26:1, 31:16). 버가모 교회에도 이런 악한 자들이 몰
래 들어와, 신자들을 유인하여 우상 섬기는 장소에 가게 하고, 그 제물까지 먹게 하였
으니 참으로 괴악하다. 이런 행동은, 사도행전 15장에 사도들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제정하여 이방 교회에 보낸 금령을 어긴 것이다(행 15:20,29).



계 2:16

본절은, 발람이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고 모압 왕 발락의 요청대로 가다가 칼을 뽑아
든 천사를 만나게 된 사실을 염두에 두고 한 말씀이다(민 22:31 참조). 겔 3:17-20,
33:6,13 참조.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 주님께서는 선민을 해하는 자들을 그대로 두지
않고 반드시 대적하신다. 이런 대적은 발람을 향하여도 있었던 것이다(민 22:31,32
참조). 위태하다 하나님의 백성을 해하려는 어리석은 행동이여!



계 2:17

감추었던 만나.- 랍비의 전설에 의하면, 예레미야나 이사야가 "만나"를 담은 법궤
를 어디 감추었는데 메시야 시대에는 이 만나가 다시 공개된다고 한다(2 Macc.
2:4-6, Mechilta Ex 16:25). 본절의 이 말씀은 이런 전설을 염두에 둔 것인가? 우리
는 그렇게 생각지 않는다. 마이어(Meyer)는 여기 "감추었던"이란 말을, 이 세상에는
없고 하늘에만 있다는 의미로, "만나"는 천계(天界)에서 먹는 양식이라고 하였으니,
적당한 해석인 듯하다. 클다너스(Greijdanus)도 역시 이와 비슷한 해석을 취하여 말
하기를, "감추었던 만나는 신령하고 놀랍고 영화롭고 참된 양식이라"고 하였다.
흰돌.- "돌"은 신자의 상징이며(벧전 2:5,6), 택한 백성의 표호(標號)이다(출
28:15-21). "흰" 빛은 성결을 의미한다. 모팟드(Moffatt)는, "흰 돌"이 이방의 미신
사상에서 유래(由來)한 것이라고 잘못 생각하여, 다음과 같은 몇 가지 미신을 소개하
였다. (1) 고대인들에게는, 흰 돌은 운수 좋은 부적(符籍)을 의미하는데 거기 신(神)
의 이름을 쓰면 그것으로 사귀를 물리칠 수 있다 하였고, 또 자기들이 섬기는 신의 거
처에 접근하여 출입할 수 있다고 한다(Dieterich. Mithras Liturgie 31). 이 미신에
의하여 흰 돌에 그리스도의 이름을 쓴 것은 그 소유자로 하여금 모든 위험에서 안전을
얻게 하고 또 하나님 앞에 밀접히 나아갈 수 있게 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
해석은 너무도 성경 저자의 마음을 몰이해한 것이다. 성경 저자들은 미신의 풍습(風
習)을 미워하고 멀리하였다. (2) 모팟트는 다시, 로마 황제 예배와 관련된 제사장이,
그 이름의 영존을 위하여 말한, "내 이름을 돌 위에 써라 그리하면 영존(永存)하리라"
고 한 말을, 이 점에 연결시켜 본다. 그러나 이것도 억설이다. 성경 기자들은, 우상
숭배를 미워했는데 어찌 그것과 관련된 사상을 채용하였으랴! (3) 그는 또 다시 신비
종파(神秘宗派)의 견습생(見習生)이 그 종교의 정회원으로 입참(入參)할 때에 흰 돌에
그의 새 이름을 쓰는, 그 풍속에서 이 말씀이 유래한 듯하다고도 하였다. 그러나 이
것도 성경 저자들의 마음을 모르고 한 말이다. 성경 저자들은 이교(異敎)의 풍속을
미워할 뿐이고 결단코 채용하지 않았다.
새 이름...받는 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 크레다너스
(Greijdanus)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으니, 곧, "흰 돌에 쓴 새 이름은, 그 이기는 자에
게 세워 주는 그의 본질과 인격과 거기에 해당하는 영광과 지위의 선물을 상징한다.
이 세상에서 우상 제연(祭宴)에의 참석을 거절한 신자는 모두 박해를 받았으며, 심지
어 생활의 길까지 빼앗긴 것이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이 다 모르게 그는 천적(天的)
으로 영예(榮譽) 있는 인격과 지위를 얻는 것이다"-(意譯)라고 했다(Greijdanus,
Openbaring, p. 77). 이 해설은 정견(正見)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로마여
(Lohmeyer)는 여기 "새 이름"은 그리스도의 것이라고 한다. 그는 말하기를, "그것은
새 것이다. 그 이유는, 그것이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다가 그것을 받는 자만 비로소
하늘에서 알게 되는 까닭이다"(Der name ist naturlich der Christi; er ist "ne",
Wenn er in der Form bisher unbekannter, nur dem Empfager verstandlicher Zeichen
und Zahlen auf dem stein eingeschrieben ist.-Die Offenbarung Des Johannes, p.
27)라고 하였다. 계 19:12을 참조해 보면, 이 해석도 일고(一考)할만하다. 그리스도
께서 자기의 "새 이름"을 흰 돌에 써서 이기는 자에게 주신다 함은, 그리스도께서 그
이긴 자에게 전에 없던 긴밀한 교제를 시작해 주시는 특은(特恩)을 의미한 듯하다.
그러나 우리는 이 해석을 신임하기 어렵다.



계 2:18

두아디라.- 이는 현명(現名) 아키사(Akhissar)라고 하는데 무시아의 접경에 있고,
자주 장사 루디아가 이곳 여인이었는데(행 16:14), 그로 말미암아 여기 교회가 설립된
듯하다. "두아디라"에는 남신(男神)과 여신(女神)을 우상으로 섬기는 악한 풍속이 있
었는데, 특별히 그 신당 중의 하나에는, 그 사신(邪神)의 신탁(神託)을 받는 소위 여
선지(女先知)가 있었다고한다. 어떤 이는 말하되, 이 인물이 계 2:20의 이세벧이라고
하나 확실하지 않다. (2) 그곳에 공인 조합(工人組合)이 많이 있었느데, 동업 조합(銅
業組合), 염료 조합(染料組合) 등이다. 루디아는 이 지방 출신으로서 염료(染料) 행
상(行商)을 하고 있었다(행 16:14). 이렇게 조합의 지배력이 강한 곳에는 생활 통제
가 있어서, 복음과 충돌된 경우도 많이 있었을 수 있다. 그러므로 미약한 교회는 그
충돌을 면하려고 타협의 길을 취하기 쉬웠다. 두아디라 교회의 신자들은 그 지방 조
합의 지도에 따라서 우상 관계의 연석(宴席)에 끌려서 참예한 듯하니, 그렇게 된 경우
에는 그들이 우상의 제물을 먹었겠고, 또한 우상 숭배자들과 함께 음란한 일에까지 유
인 되었을 수 있다. 복음은 신자를 율법에서 해방해 준다는 대교리(大敎理)를 오해하
여, 반 율법주의(反律法主義)로 떨어지는 악한 사상이 고대 교회에 유행되었다. 그
악한 사상에 감염(感染)된 무리는, 우상의 제물을 먹는 것과 음행 같은 것을 기탄 없
이 행하였을 듯하다.
그 눈이 불꽃 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과 같은. 1:14,15 - 의 해석 참조. 심판적
행위로 경계하는(22, 23)이 서신에 있어서는 이 칭호(稱號)가 적절하다.



계 2:19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 여기 "사업"이란 말은 그 아랫 말들의 총괄어
(總括語)이다. "사랑"이 첫 머리에 놓인 것을 보면, 이 교회는 사랑에 붕한 듯도 하
다. 그러나 여기 나온 어순(語順)으로 보아 사랑 다음에 "믿음"이 놓였으니, 이 교회
의 경건이 순리(順理)대로는 자라지 못했다는 의미가 포함된 듯하다(살전 1:3, 3:6,
5:8 참조). 사랑은, 마땅히 믿음을 근본으로 하고 나와야 신본주의(神本主義)의 것
이다. 먼저 계시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거기서 나타나는 결실로서 사랑이 와야
할 것이다. 그러나 두아디라 교회는, 소위 "사랑"을 앞 세우다가 "믿음"(하나님의 말
씀 대로 믿는 믿음)을 둘째로 여긴 듯하다. 따라서 그 교회는 진리를 기본으로 파수
하지 않고, 포옹주의(抱擁主義)의 사랑만 위주(爲主)하다가 비진리(非眞理) 곧, 이세
벧 이단 같은 것을 포용(包容)하게 된 듯하다. 그것은 선후 전도(先後轉倒)에서 생긴
과오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말의 순서에서 뜻을 캐는 것은, 부자연스러운 듯하다. 크레다너
스(Greijdanus)의 해석은 다음과 같다. 곧, "여기 사랑이란 것은 그 아래 나타나는
모든 활동의 근본이다. 사랑에서 믿음(신실한 활동)과 섬김과 인내가 나온다"는 것이
다.
특별히 "섬김과 인내"는 그 위에 있는 "사랑"의 외부적 표현이다. 두아디라 교회의
형편은 에베소 교회의 그것과 대조된다. 에베소 교회는 믿는 도리를 강조하노라고 아
였으나 그것을 건전히 못하여 사랑을 떨어뜨렸고, 두아디라 교회는 사랑을 힘쓰노라고
하다가 그것을 진리대로 하지 못하여 탈선하였다.



계 2:20

여자 이세벧.- 즈안(Zahn)은, 어떤 사본(A.Q)에 "너의"란 말이 있음을 보고 "너의
여자 이세벧"이라고 번역하였다. 그리고 "너의 여자"란 말이 그 교회 교역자의 아내
란 의미라고 하였다. 모팟트(Moffatt)는 여기 "너의"라는 사구(寫句)가 몇몇 유력한
사본의 지지를 가지면서도 신뢰하기는 어렵다고 하였다. 또한 어떤 이는 이것이, 바
벧론 신(神) 사이빌)이름이 이세벧과 비슷함=Sibylle)과 상관되는 어떤 인물을 가리킨
다고 한다. 쉬렐(Schurer)의 증거 (Theol. Abhandlungen, p. 39)에 의하면 두아디라
에 바벧론 신당(神堂)도 있다고 한다. 우리는 이 점에 대하여 확실한 결론은 못내린
다. 요컨대 이세벧은 이스라엘 왕 아합의 아내니 이방의 우상 숭배를 수입하여 이스
라엘의 종교를 어지럽게 한 요망한 여자였다(왕상 16:31; 왕하 9:22). 엘리야가 이
여자를 두고 예언하기를, (1) 개가 그 죽은 시체를 핥으리라고 하였는데(왕상 21:23),
과연 그대로 성취되어 예후로 말미암아 창문에서 내려 던지움이 되어 떨어져 죽었고
(왕하 9:33), (2) 그 자녀들에 관하여 예언하기를, 하나님께서 그들을 다 멸망시키리
라고 하였는데(왕상 21:21), 과연 그대로 성취되었다(왕하 9:6-37). (3) 이세벧의 상
에서 먹는 바알 선지 450인을 죽였다(왕상 19:40). 위의 세 큰 사건은, 계 2:22,23
의 세 큰 위협은, 1 그여자 자신을 병상에 던져 죽일 것(22절), 2 그와함께 음행하는
자들 곧, 그의 교훈과 타협하면서 교역하는 자들을 환난 중에 던짐, 3 그의 자녀 곧,
완전히 그에게로 귀속(歸屬)한 자들을 죽임이다. 그러므로 두아디라 교회의 이세벧은
외래의 이교 인물로서 자기의 사상을 가지고 복음을 변경시킨 자이다. 이 인물이 여
자인지 남자인지는 알 수 없으나, 교회에 들어와서 이세벧의 역할을 하였던 사실은 분
명하다. 그 인물의 교훈은, 그노시스학(Gnosticism)의 율법파(物質皆惡說을 주장하며
苦行主義를 爲業함)가 아니라, 그 반 율법파(反律法派)에서 영혼과 물질과의 무관계를
믿고 몸으로 자행 자지(自行自止)케 하여 무슨 추행이든지 꺼릴것 없다는 교훈이다.
두아디라 교회에는 이런 이단이 침입하여 교권(敎權)을 잡은 것이 분명하다.
행음하게 하고.- 당시의 음행은 우상 숭배와 함깨 묻어 다니는 죄악이었다(민
25:1-5). 우상 숭배 그것이 영적으로 벌써 하나님께 대한 변절(變節)이니, 하나님께
대하여 변절하므로 영적 음행을 범한 자가, 인륜상(人倫上) 불결한 죄는 더욱 쉽게 범
할 위험성을 가진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 백성에게 우상 숭배와 및 그 제물
을 멀리 하라고 엄명(嚴命)하신 것이 성경에 많이 있다(행 15:20, 28, 29).



계 2:22,23

침상에 던질 터이요.- 이것은 이세벧을 벌하여 질병에 걸리게 히시겠다는 말씀이다
(1 Macc. 1:5). 소아시아에서 발견된 여러 조각문(彫刻文)에 음행으로 인하여 벌받아
병든 사실이 적지 않다(Moffatt).
그로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 이들은 그 여자의 우상 숭배에 이따금 동참하는 자들
을 가리킨다. 그리고
"그의 자녀"- 는 그 여자의 교훈에 아주 귀화(歸化)한 자들을 가리켜서 말한다.
그들에게 화벌(禍罰)이 미치는 것은, 이스라엘의 이세벧의 자녀들이 죽임 당한 사실과
비슷하다(왕상 21:20; 왕하 10:7, 8).
행위를 회개치 아니하면.- 이 말씀을 보면, 하나님은 언제나 은혜로우신, 참되신
신(神)이심을 알 수 있다. 가장 큰 죄를 범한 자도 회개만 하면, 하나님은 그를 용서
하신다.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찌라.- 시 7:10; 렘 11:20 참조. 여기
"뜻"이란 말은, 헬라 원어로 네프루스(* )니 사람의 가장 깊은 욕구(慾
求)와 감각의 근원을 가리킨다.
"사람의 가장 깊은, 그 감추인 속에도 하나님 앞에서는 절대로 감추일 것이 없다"
(Bavinck, Bijbelsche en Religieuze Psychologie, blz. 65-Er in het verborgenste
wezen van den menseh volstrekt niets voor God verborgen is).



계 2:24

사단의 깊은 것.- 이것은 당시 두아디라 교회를 둘러싸고 침입한 그노시스주의였
다. 그들은, 사리(事理)의 가장 깊음에 대한 지각의 필요를 말하고, 또 그 지각(知
覺)을 얻으려면 내 자신을 그것에 적응시켜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죄의 의미를 알려고
죄악에 몸을 적시는 일을 한 것이다(Zahn, julicher). 그들은 생각하기를, 그렇게 몸
을 죄악에 던져도 그들의 고상한 심령의 정체(正體)는 아무런 더럽힘을 입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마귀 숭배를 해 보기도 한 것이다. 이 사상에 미혹 받아
들든 어떤 기독교인들은 그 때의 우상 숭배나 음행에 참가하기를 기탄 없이 한 듯하
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이런 위험한 일을 여기서 엄금하신 것이다. 이와 같
은 해석은 모팟트도 한 것이다.(The Expositors' Greek Testament, Revelation of St.
John by James Moffatt, p. 362). 모팟트가 보수파(保守派) 학자는 아니지만 그의 주
석에 역사 문학(歷史文學)의 재료들이 있는 대로 우리가 참고할 만한 것이 있다.
다른 짐으로 너희에게 지울 것이 없노라.- 행 15:28, 29 참조.



계 2:26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 시 2:8을 보면, 그리스도께서 이 권세를 받으신다. 기독
신자들은 그리스도와 연합되었기 때문에 그의 이 영광에 동참한다(딤후 2:11, 12 참
조).



계 2:28

새벽 별.- 이것은 그리스도 자신을 상징한다(제 22:16). 왜 그리스도를 "새벽 별"
로 비유하였는가? 그것은 그의 왕적(王的) 영광을 생각하여 그리한 듯하다(민
24:17).



계 2:20

귀 있는 자.- 7절에 있는 같은 말 해석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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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 3:1

"사데"- 는 두아디라 남쪽에 있었는데 부요함과 사치로 이름난 곳이다.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진 이.- "일곱 영"에 대하여는 계 1:4에 있는 같은 말 해석
참조. "일곱 영"을 가지심은, 그가 성령님의 일을 주관하신다는 의미를 포함한다.
그리스도께서 성령님의 일을 주관하신다 함은, 요한 사도의 사상이다(요 14:16). 성
령님의 풍부한 생명력을 떠난, 사데 교회에 대하여 이 칭호로 오시는 주님께서 적절한
해결을 주실 것이다. "일곱 별"에 대하여는 성경 본문(1:20)에 해석되었다.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 이것은 외형(外形)에 있어서 교리와 의식
(儀式)으로 빛나지만, 내적(內的)으로 신령한 생명이 빈핍(貧乏)한 것을 가리킨다.
이런 교회는 현대에도 많이 있다. 교회 역사의 각 시대에 7교회를 배정(配定)하는 학
파에서는, 여기 사데 교회를 가리켜 종교 개혁한지 얼마 후에, 죽은 정통화(死正統化)
한 교회라고 한다. 그러나 그것이 정당한 견해라고 하기는 어렵다.



계 3:2

일깨워.- 이 말은 헬라 원어로 기누 그레고론(* )이니
일시 동안만 깨는 것이 아니고 계속적 경성(繼續的警醒)을 의미한다.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게 하라.- 그 교회에 아직 영적 생명이 남아 있는데 그
것을 견고히 보존하는 것은, 그 교회의 급선무(急先務)이다. 생명은 잘 보호하고 배
양하기만 하면, 비록 미약한 것이라도 충실한 대로 자라가는 법이다. 그러므로, 사데
교회도 그렇게 해야 된다.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사데 교회가 교회적 행
사로서 외부적으로는 적잖게 발휘하였으나, 하나님 앞에는 합격되지 못했다
(Greijdanus). "온전함"은 절대성을 띤 완전을 의미하지 않고, 그저 인간으로서 행할
수 있는 한도에서 하나님의 요구하시는 표준을 의미한다. 이 말은 사도 요한이 즐겨
쓰는 말이다(요 17:23; 요일 1:5; 요이 1:12). 영적 생명은 없이 외모로만 나타내는
것은 허수아비에게 바람이 풍긴 현상과 같다.



계 3:3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키어 회개하라.- 살전 1:5,
2:1; 고전 2:1 참조. 과거에 받은 기이한 은혜에 대한 회고(回顧)는, 현재의 답답한
심령으로 하여금 영계(靈界)의 확실성에 대한 새로운 신념을 가지게 하며, 신앙 모험
(信仰冒險)의 용기를 분발(奮發)케 한다. 그러므로 과거의 영적 체험은 비록 적은 것
이라도, 우리가 기억하여 보수(保守)하면, 그것이 현재의 큰 암흑을 깨뜨리고 하늘 문
을 열어 보이는 열쇠가 된다.
내가 도적 같이 이르리니.- 이것은 주님께서 깨어 있지 않은 자들에게 임하시는 방
법이다(살전 5:1-8). 이것은, 그 아랫 문구가 보이는 바와 같이 그가 뜻 밖에 오실
것을 가리킨다. 이것은 여기서 주님의 재림이 아니고, 사데 교회를 벌하시는 섭리적
내방(攝理的來訪)일 것이다. 일 개인도 그 죄악의 잠에서 경성하지 아니하면, 뜻밖에
징벌(懲罰)을 받는 일이 현저하다.



계 3:4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모팟트(Moffatt)는, "더럽히지 아니한" "옷"이 단순
한 인본주의의 도덕적 순결을 의미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그가 소아시아의 이
교 사상에서 취한 그릇된 해석이다. 이 말씀은, 받은 구원과 의(사 61:10)에 합당하
게 행하여 세상에 물들지 않는 기독교적 성결을 가리킨 것이다(고후 7:1). 물론 그것
도 어떤 의미에서는 도덕적 순결이겠으나, 생활의 동기와 그 결과가 신본주의(神本主
義)에 속한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입혀주신 구원과 의를 오손(汚損)치
않고 보수하는 경건 생활이다.
몇 명.- 헬라 원어에서 자역(字驛)하면, "몇 이름들"이란 말이니, 그들의 이름이
주님에게 상달된 사실을 염두에 두고 한 말씀이다.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여기 "흰 옷"은, 성도들이 천계에 들어가서 받
는 하나님의 영광과 및 완전한 성결(聖潔)을 가리킨다. 모팟트(Moffatt)는 잘못 말하
기를, 여기 "흰 옷"이란 것은, 에녹서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하며,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에녹서(書)에 흰색은 의(義)를 상징하였으니(85, 90), 여기서도 그러할
것이다. 그것은 마치 베드로 계시록이라는 가경(假經)에서, 낙원(樂園)의 거주자들이
빛을 입었다고 하였으며, 지옥에서 죄인들 벌하는 천사들이 검은 옷을 입었다고 함과
도 같다"고 하였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하기는, 정경(正經) 계시록이 말하는 "흰 옷"
은, 다니엘서(7:9, 12:3)에 기초(基礎)한 사상(思想)이라고 한다. "흰 옷"이라는 말
을 사도가 성경으로 인정하지 않는 에녹서에서 취하였다고 할 수 없고, 사도 후의 상
상(想像) 문학(文學)인 베드로 계시록에 의지 하여 생각될 수도 없다. 그러면, 이
"흰 옷"은 무엇인가? 이것은, 부활(復活)의 몸을 가리키지는 안았으니 그 이유는,
6:11을 보아서 그것은 별세한 성도가 즉시 하늘에서 받는 것이고 그리스도 재림시에
받는 것이아닌 까닭이다. 혹설에, 이것은 하나님의 완전한 성결과 영광을 가리킨다고
한다. 성도들이 주님과 "함께 다닌다"함은, 그들이 하늘에서 주님과의 밀접한 교제에
참예할 것을 가리킨다(Greijdanus).
그들은 합당한 자.- 이것은, 그들이 유공(有功)하다는 의미가 아니고, 복음에 합당
하게 행하여(빌 1:27) 천국에서 주님과 함께 다닐 자격이 있다는(자기의 功義가 있다
는 말이 아님)뜻이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그런 축복을 받을 수 있는 참된 신앙 노
선(信仰路線)을 걸어 온 것이다.



계 3:5

내가 그 이름을 생명 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고.- 20:12 참조.



계 3:6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2:7에 있는 같은 말
해석 참조.



계 3:7

빌라델비아.- 이곳은, 지금 알라솰(Alahschahr)이라고 하는데 오늘날도 거기에 기
독 신자들이 산다.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이.- 크레다너스(Greijdanus)의 해석에 의
하면, "거룩하다"함은, 소극적으로는 그가 죄악에서 절대적 절연(絶緣)된 상태이고,
적극적으로는 그의 숭엄(崇嚴)하신 신성(神性)과 및 그의 백성을 구원하시는 성덕(聖
德)을 가리킨다. "진실"이란 말은, 헬라 원어로 아레디노스(* )니 거
짓에 대한 반대를 가리킴보다, 그림자(影像)나 불완전성에 반대되는 실물(實物), 본체
(本體)를 가리킨다. 그러면, 이 말은 그리스도의 계시로서의 완전과 극치(極致)를 가
리킨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에게서 완전 무결(完全無缺)하시게 나타나시고, 그의 약
속들도 역시 그리스도에게서 완전히 성취되었다(고후 1:20). "다윗의 열쇠"는 그리스
도의 신국 주권(神國主權)을 가리킨다. "다윗"은 구약 시대에 사용하던 메시야 곧,
그리스도에게 대한 예언상 칭호이다(겔 34:23).



                                   ( 다윗의 열쇄를 가지고계신 주님 )

 

 

계 3:8

네 앞에 열린 문.- 이것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게 하는 기회를 비유한
것이다. 핍박하는 유대인들이 아무리 그것을 막으려고 해도(9절) 어찌할 수 없다.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키며.- 그리스도께서 빌라델비아 교회를 칭찬하는
이유는, 그 교회가 소유한 영적 자원(靈的資源)이 "적은"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다 기
울여 신앙 보수(信仰保守)에 진력(盡力)한 까닭이다. 그것은, 그가 가난한 과부의 헌
금을 보시고 칭찬하신 것과 같다(막 12:41-44). 주님은, 많은 것을 가지고 방종하는
자를 좋아하시지 않고, 적은 것을 가지고 힘쓰는 자를 귀히 보신다.



계 3:9

자칭 유대인.- 2:9 해석 참조. 유대주의자들이 빌라델비아에서 기독 신자들을 많
이 핍박한 사실은, 익나디오(Ignatius)도 증거하였다(Philad. 6)
네게 주어...네 발 앞에 절하게 하고.- 사 60:14, 45:14, 49:23 참조. 이것은, 유
대인들 중에서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 교회에 돌아올 것을 예언한 것이다. 그러나 혹
설(或說)에 이것은, 끝날 심판 때에 불신 유대인들이 성도들 앞에 굴복하고 심판 받을
것을 가리킨다고 하나, 첫째 해석이 옳다(Greijdanus).



계 3:10

네가...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키어.- 이것은 댓구적(對句的)으로 역설하는 재
미 있는 표현이다.
나의 인내의 말씀.- 이것은, (1) 인내(忍耐)를 가지고야 파악하며 나갈 수 있는 복
음이라는 의미라고 할 수 있고, (2)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까지 참아 견디신 그리스도
의 고난으로 된 복음이라는 뜻이라고도 하며(Greijdanus), (3) 로마여(Lohmeyer)는,
"나의 인내"라는 엇구(語句)를, "나를 기다리는 신고"(辛苦:Harren auf mich)로 해석
하였다.
시험의 때.- 이것은 환난의 시기를 가리키는데, 언제인지 자세히 알 수 없다.
면하게 하리니.- 그들이 벌써 유대인의 박해(9절)를 이겼으니 만큼, 앞으로 있을
보다 큰 환난은 주님의 특별한 도우심으로 면하게 된다. 이것은 적은 일에 충성하고
큰 은혜를 입는 원칙에 의한 것이다.



계 3:11

아무나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이것은, 경기장(競技場)에서 되는 일로
영적 사리(靈的事理)를 비유함인데 상을 잃지 않도록 끝까지 힘쓰라는 말이다. 히
12:1-4 참조.



계 3:12

기둥.- 이것도 작은 일에 충성하여 큰 상급을 받는 원칙(마 25:23)에 의한 보상이
다. 위의 10절의 같은 원리를 참조하여라. "기둥"은 든든하여 건축에 가장 힘받이
되는 중역(重役)에 소용되는 것이다. 빌라델비아 교회가 이 세상에서 그 적은 힘을
가지고도 충성한 고로 내세(來世)에서 든든한 기둥의 중대한 지위를 얻게 되었다. 누
구든지 이 세상에서 많은 힘을 가졌으나 불충(不忠)하여 영원한 내세에서 미미한 자가
된다면 그것은 유감스럽다. 그러나 이 세상에 적은 힘을 가진 자라도 충성하므로 내
세에서는 영광에 부요한 자가 된다면 그것은 놀랄 만한 기쁨이다.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이것은, 그가 내세의 축복을 받는 지위에서
영원히 변동되지 아니할 것을 가리켜 말한다. 혹설에 의하면 빌라델비아는 지진이 많
은 도시이므로 그 시민은 무너지는 집을 너무 자주 수리하는 까닭에 국세(國稅)의 면
제를 받았다 한다. 그런 변천과 동요가 많은 지대에 거하는 그들에게 영구 부동(永久
不動)의 안전성을 띤 "기둥" 같은 내세적 축복은 목마른 자에게 물같이 귀한 것이다.
하나님의 이름과...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
이것은, 그 이기는 자를 하늘의 보물로 여겨서, 그에게 대한 하나님의 소유권을 삼중
으로 확보하는 말씀이다. 그를, 하나님의 소유, 새 예루살렘의 소유, 그리스도의 소
유로 영존케 하려고, 세 가지 거룩한 이름을 그에게 기록하시겠다고 한다. 그리스도
의 이름을 씀에 있어서 새 이름을 쓴 것은 우리의 주의를 끈다. 그의 새 이름은 그만
아신 것이라고 했으니(19:12), 그것이야 말로 그의 살 중의 살이요, 뼈 중의 뼈다운
가장 살 깊은 내막(內幕)을 표하는 이름이다. 그것은 이 세상에는 나타나지 않은 것
이다. 이런 의미의 성호(聖號)로써 소유를 확보하심은, 그가 이 소유를 견고히 또는
귀중히 파악 하신다는 의미이다. 빌라델비아 교회가 그 적은 힘으로 주님의 복음을
붙잡은 일은(3:8), 주님에게 그렇게도 귀여웠다. 그들이 그 적은 힘으로 애를 쓸 때
에 넘어질 듯한 때도 있었겠고, 또 혹은 넘어진 것 같은 적도 있었겠다. 그러나 주님
은 그것을 허물하시지 않고 오히려 귀히 보셨다. 그러므로 그들이 비틀거리는 고생스
러운 싸움의 정형(情形)과는 정 반대로, 이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기둥" 같이 든든
하여 나가지 않도록 삼중 서명(三重署名)하여 천적 소유(天的所有)로 확보(確保)하셨
다. 이것은 은혜의 "파라독스(Paradox)"니 적은 일에 충성한 자가 큰 상을 받는 복음
의 원리이다(마 25:21). 이 말씀을 보고서 우리와 같이 약한 자도 위로와 소망과 용
기를 가진다.



계 3:13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이 말씀을 보면, 계
시록의 말씀은 택함을 받은 성도에게 국한하여 주신 말씀이다. "귀 있는 자"는, 영적
(靈的) 청취력(聽取力)이 있는 자니 이는 곧, 택함을 받은 자이다. 누구든지 영리(靈
理)를 식별(識別)하는 자는 그 자신이 택함을 받은 자라는 신념(信念)을 가질 수 있
다.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이란 말을 보니, 이 개체 교회에 보낸 서신이
실상은 모든 교회들을 목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계 3:14

라오디게아.- 이는, 루카강 남쪽 강변에 자리 잡고 있는 부요한 상공업 도시로서
빌라델바아 동남(東南)에 있었는데, 현재 이름은 에스키힛사(Eski-hissar)라는 중요치
않은 도시이다.
아멘.- 계 1:6; 사 65:16 참조.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들을 다 성취
하셨다. 그는 그렇게 하나님의 신실(信實)을 성립시키셨다. 이 의미에서 그는, "아
멘"(* =진실함)이시다. 고후 1:20 참조.
충성되고 참된 증인.- 이것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계시하시고 또 하나님의 신실
을 증거하시려고, 구약의 예언들을 모두 다 성취하신 업적(業績)을 염두에 둔 말씀이
다. 1:5 해석 참조.
창조의 근본.- 이것은 예수님께서 창조자라는 말씀이다. 이와 같은 주님의 칭호는
불신실하고 영적으로 빈핍(貧乏)한 라오디게아 교회를 갱정(更正)하시기에 적합한 성
격을 가지고 있다. 주님의 신실은 그 교회의 불신실에의 대조요, 주님의 창조의 부요
(富謠)는 그들의 영적 빈궁(靈的貧窮)을 치료할 수 있다.



계 3:15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여기 이른 바 찬 것은 전연 복음과
접촉 없는 불신(不信)의 상태요, 더운 것은 복음을 믿는 자로서 사랑과 열심으로 가득
한 것을 의미한다(Greijdanus).



계 3:16

미지근.- 이것은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아는 가증(可憎)한 행위와 태도이다(17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그가 토하시는 이유는 그의 속에 역스러우신
까닭이다.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아는 태도는, 주님께서 가장 미워하시는 두 가지 죄
악을 합한 것이니, 곧, 외식과 교만이다. 주님께서 땅 위에서 가장 많이 책하신 죄는
바리새인들의 외식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은혜 주시기를 좋아하시되, 교만한 자만은
물리치신다(약 4:6).



계 3:17

본절은, 그들이 되지 못하고 된 줄 아는 죄를 드러내어 지적하시는 말씀이다.
부요하여.- 곧, 자칭 영적 생명이 부요하다고 말한다는 의미이다.
곤고, 가련.- 이 두 가지는 그들의 영적 빈핍(靈的貧乏)으로 인한 비참한 정형(情
形)에 대한 말씀이다. 그 비참한 정형의 원인은,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 세 가지이다. 다음 절이 이 세 가지에 대
하여 다시 말한다.



계 3:18

불로 연단한 금.- 이것은 순연 무잡(純然無雜)한 믿음을 가리키고(벧전 1:7),
"흰 옷"- 은, 그리스도께서 그 십자가에 죽으시므로 신자에게 주신 칭의(稱義)요,
"안약"은, 성령님이 밝히 보게 하여 주시는 은혜의 비유이다.
사서.- 이것은 값을 주지 않고 사는 영적 매수(靈的買收)이다(사 55:1).



계 3:19

내가 사랑하는 자.- 여기 "사랑한"다는 말은, 헬라 원어로 필레오* )인
데, 벴겔은 이것을 고맙게 돌아보는 애정의 활동으로 여겼다. 잠 3:12; 히 12:6-13
참조. 위에 말한 빌라델비아 교회는, 주님의 아가페(* =평가적 사랑이니 빌
라델비아 교회의 좋은 점을 보시고 귀히 여겨 사랑함)를 받았으나(9절), "라오디게아
교회"는 지금 긍휼로서의 은고의 사랑을 받은 것이다. 삼상 7:3; 대하 7:14; 시
34:18, 51:17, 147:3 참조.



                                       ( 문밖에서 기다리시는 예수님 )

 

 

계 3:20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이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죄 있는 신자들을 회개시키려
고, (1) 만반 노력(萬般努力)을 하시며, (2) 간절히 권면하심이다.
더불어 먹고.- 아 5:1,2 참조. 이것은 비유인데 영적 사랑의 교제를 가리킨다(계
19:9, 17; 눅 14:12, 17:8).



 

                              ( 문밖에서 두드리시는 예수님 )

 

계 3:21

이기는 그에게.- 이것은, 죄를 회개하므로 승리하는 자를 가리킨다.
보좌에 함께 앉게.- 이는 이기는 신자가 내세에 들어가 주님과 함께 왕노릇하게 될
것을 가리킨다. 딤후 2:12 참조.



계 3:22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2:7과 3:13에 있는
같은 말 해석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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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2 - 강해 ( 계 4-6 장 ) 요한계시록 / 신약성경강해

2009.10.02. 19:23

복사 http://blog.naver.com/apectria/903837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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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 4:1

하늘.- 이것은, 종교적 이상(理想)이나 심령적 상태를 가리킨 것이 아니고, 영화로
운 하늘 장소를 의미한다. 성경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후에 그곳에 올
라 가셨고(행 1:9; 엡 4:10; 고후 12:1-4), 그곳에 하나님 아버지께서 계시고(창
28:17; 시 80:14; 사 66:1; 마 5:12-16,45,48, 23:9), 그곳에 천사들이 있고(마
24:36, 28:2; 막 13:22; 눅 22:43), 그곳에 구원 받은 성도들이 거하며(마 5:12;,
6:20, 18:10; 엡 3:14; 벧전 1:4; 계 19:1,4), 그곳으로부터 그리스도께서 오셨고(요
3:13), 그가 장차 그곳에서 다시 오신다(마 24:30; 살전 4:16; 빌 3:20, 21). 그런데
우리가 하늘 나라에 관계하는 방식은 다음과 같다. (1) 현세(現世)에서는 기독 신자
가 성령님의 감화로 말미암아 심령으로 그곳을 알며, (2) 기독신자가 별세하는 때에는
그의 영혼이 완전히 그곳에 들어가며, (3)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에는 신자의 몸까
지 부활하여 영혼과 몸이 함께 하늘 나라에 들어간다.
처음에 내게 말하던 나팔 소리 같은.- 1:10 해석 참조.

 

 

                                      ( 하늘에 있는 열린문 )

 

 

계 4:2

성령에 감동하였더니.- 1:10 해석 참조.
보좌.- 이것은 하나님의 우주 통치(宇宙統治)를 가리키는 상징이다.
앉으신 이.- 그의 "앉으심"은 그의 대주재권(大主宰權)의 부동(不動)을 상징한다.
그는, 불안전 불확실의 태도가 전연 없으신 대 주재이시다(Greijdanus).



                               ( 하늘에 있는 에메랄드빛 보좌 장면 )

 

 

 

계 4:3

앉으신 이의 모양이...같고.- 이것은 헬라 원어로 호 카데메 노스 호모이오스 호라
사이(* )라고 하는데, 여기 한역(韓
驛)은 오역(誤譯)에 가깝도록 번역되었다. 이것을 자역(字驛)하면, "앉으신 이는 보
이기가...같고"라고 함이 가하다. "보이기가"란 말을, "모양이"라고 번역하면 독자가
하나님을 혹종(或種)의 물적 형상으로 오해하기 쉽다. 그러나 "보이기가"라고 하면
그런 오해를 면한다. "보이기가"란 말의 헬라 원어 호라사이(* )는 "환상
으로" 보임을 가리킨다(계 9:17; 행 2:17). 하나님은 물적 형상이 없으시고, 그 영광
만이 계시된 대로 요한의 영안(靈眼)에 보인 바 있었다. 우리는 하나님의 계시에 의
하여 그의 영광을 볼 뿐이고 그의 본질은 볼 수 없다.
벽옥.- 헬라 원어로 이하스피디(* )라고 하는데, 21:11에 다시 나오
는 바, 거기에서는 수정처럼 맑은 빛으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상징하였다. 그러면, 여
기서 하나님의 성결의 영광이 이 "벽옥"으로 상징된 것이 확실하다.
홍보석.- 헬라 원어로 살디오(* )라고 하는데, 그 홍색은 죄에 대한 하
나님의 심판을 상징한다고 생각된다.
무지개가 있어 보좌에 둘렸는데.- 이 말씀은 계 1:28의 말씀을 인용한 듯하다. 이
"무지개"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은 하나님의 신실(그의 계약에 대하여)을 상징한
듯하다(창 9:13). 그의 세우신 계약은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하나님께서 태초부터
사람과 관계하심에 있어서 계약적(契約的)으로 하신다. 이 계약은 스킬더 박사의 말
대로(Dr. K. Schilder, Wat is de Hemel?) 사중(四重)으로 되었다. (1) 행위 계약
(Werkverbond)이니(창 2:16, 17), 인간이 이 계명(율법)을 순종하면 생명을 얻고 불순
종하면 저주를 받게 되는 계약이다. (2) 은혜 계약이니, 그리스도의 은공(恩功)으로
인하여 그리스도를 신앙하는 자들을 무조건 용서하시고 축복하시는 계약이다. (3) 자
연 계약(自然契約)이니, 주님께서 그 지으신 우주의 현상을 불변의 법칙 대로 유지하
심이다(창 8:22). (4) 평화 계약(平和契約)이니, 인생과 우주가 그 본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또 그로 더불어 거룩하게 평화로이 함께 있던 원상으로 회복되게 하리라는
계약이다. 우리는, 스킬더와 같이 하나님의 계약을 4종(四種)으로만 분류해야 되는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대하여 신실하시고 자비하신
계약으로 관계하시면서 그들을 구원하신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인생과 우주를 계약
적(契約的)으로 관계해 오시는데, 이 계약 관계의 욧점은 하나님의 신실과 자비의 덕
이다. 그는 인류와 피조물에 대하여 자비롭게 한번 작정하신 것을 영원히 변치 아니
하신다. 그는 무지개로 그 계약 행위의 신실성과 자비성을 상징하셨다(창 9:12-17).
랍비들은, 무지개가 하나님의 영광을 상징한 것이라고 생각하며, 그것에 대한 연구를
금했으니(Chagiga. 16. a), 이것은 너무 치우친 것이다.



계 4:4

이십 사 장로.- 이들은 누구인가? 그들은 천사들이 아니므로 천사들과는 따로 분
별되었다(7:11). 그들의 직명은 물론이거니와, 그들의 옷과 그들의 행동 성격이 구속
받은 자의 그것과 같으므로(7:14, 5:8). 그들이 교회의 대표자들임에 틀림 없다. 교
회의 대표자들인 그들이 신구약 교회의 어떤 실재 인물들로 생각될 것인가? 혹은 단
순한 환상인가? 크레다너스(Greijdanus)는 1:1에 있는, "지시하신"이란 말씀을 "상징
한다"는 의미로 보고, 계시록 책이 상징체로 되었다고 하여, 상징적 환상으로 간취(看
取)하였다(Wij hebben nu niet aan bepaalde Oud-en Nieuwetestamentische personen
te denken. We zouden dun ook in groote moeilijkheid komen. Doch ook met deze
24 ouderlingen spreekt de openbaring in beeld, 1:1 zoodat we slechts de
zinnbeeldige gedachte te grijpen hebben van vertegenwoordiging der geheele
gemeente des Heeren, alle eeuwen door, van het begin der wereld, tot haar
einde.-Openbaring, p. 122). 1:1에 있는 "지시하신"이란 말의 해석 참조.
그러나 우리는, 천계에 이런 장로들이 실존하지 않는다고 단언하지는 못한다. 이들
은 천계에 실재(實在)한 인물들에게 대한 환상일 것이다. 천계에는 장로들의 일을 하
는 자들이 많이 있다. 그들은 성도들이다. 매튜헨리(Matthew Henry)는 말하되, 여기
24 장로들이 앉은 보좌들이 하나님의 보좌를 두룬 것은, 그들이 오직 하나님을 즐거워
함과 및 계속적으로 그를 알고 접근하는 생활을 상징한다고 하였다. 모팟트(Moffatt)
는 말하기를, 여기 24 잘로란 말은, 본서 저자(本書著者)가 바벧론의 24 성신 신화(星
神神話)를 염두에 둔 표현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그가 성경의 권위를 무시하고
한 말이다. 24 란 수효가 바벧론 신화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구약에도 있으니, 요한
은 구약에서 24 수호의 사상을 취했을 것이다. 구약(대상 24:1019)의 제사장의 24 반
렬(班列)은 여기 24 수와 통한다. 혹은 사도 요한이, 여기서 이스라엘 12 비파(支派)
의 12수로써 구약 교회를 대표하게 하고, 12 사도의 12 수로써 신약 교회를 대표하게
하였을 수 있다(21:12, 14).
흰 옷.- 이것은, "어린 양"의 피에 죄를 씻고서 칭의(稱義)의 인격을 얻고, 또 천
계의 영광에 참예한 것을 가리킨다(계 7:14).
금 면류관.- 이것은 승리의 상징이며, 또 왕적(王的) 영광의 상징도 된다. 이런
영광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것인데, 그들은 주님의 공로(功勞)를 힘입어서 거기에 동
참한 것 뿐이다(딤후 2:12).



계 4:5

번개와 음성과 뇌성.- 출 19:16-19 참조. "번개"와 "뇌성"은 하나님의 위엄, 능
력, 진노, 심판에 대한 상징이다(시 29:3-11). 그러나 "음성"이란 것은, 그의 사랑하
시는 자들에게 주시는 말씀을 상징한 듯하다. 시내산에 나타난 그 위엄스러운 현상
(우뢰,번개)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모세에게는 "음성"으로 말씀하셨다고
한다(출 19:19). 그는, 죄에 대하여 엄위로우시되 그 택한 백성에 대해서는 일향(一
向) 자비로우시다.
일곱 등불.- 이것은 구약의 성막(聖幕)에 있는 등불의 시설과 같다. 성막에는 지
성소(보좌)가 있고 지성소의 전면(前面)에 일곱 등불이 있다. 그처럼 계시록에서도
하나님의 보좌 앞에 "일곱 등불"이 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일곱 등불"은 하반절이
밝힌 바와 같이, 성령님을 가리키는 상징이다. 1:4의 해석 참조.



계 4:6

수정과 같은 유리 바다가 있고.- 헬라 원어로 호스 달랏사 휘알리네 호모이아 크뤼
스탈로라고 하는
데 개역하면, "수정과 같은 유리 바다 같이 있고"라고 할찌니 곧, 수정 같은 유리 바
다 같은 무엇이 있다는 말이다. 이것은 맑고 투명(透明)하고 동요(動搖)없는 것을 특
성으로 한다(21:11). 이것도 성막(聖幕) 혹은 성전의 시설과 같다. 성전에서 제사장
들이 사역하기 전에 먼저 그 손을 씻는 큰 대야가 성전 안에 있다(출 30:18-21; 왕상
7:23). 그러므로 이것은 그리스도의 의(義)와 성결을 상징한다. 그리스도의 의와 성
결을 힘입지 않고, 하나님에게 나아갈 자는 없다(7:14 참조).
네 생물.- 이들에게는 그 몸 전체에 두루 눈이 있다고 했으니, 불휴(不休)의 관찰
과 부단(不斷)의 경성과 통찰을 할 수 있는 그들임을 상징한다. 크레다너스
(Greijdanus)는, 이들이 단순한 상징적 의의를 가지어 피조물들을 대표할 뿐이고 실재
물(實在物)은 아닌 듯이 말하였다(Het zijn wedrom symbolische gestalten). 그러나
사 6:2과 창 3:24을 보면, 스랍이나 그룹과 같은 실존들이 하늘에 있다. 요한이 본
바 생물들은, 천계(天界)에 있는 이런 실존들이나 혹은 기타 영물들의 상징이라고 생
각된다. 이는 마치, "어린 양"으로 상징된 그리스도께서 확실히 천계의 실존이심과
같다. 그런데 그들이 하는 일이 무엇인가? (1) 그들은 하나님의 근위(近衛) 시종(侍
從)하는 자요(11:5, 10:2), (2) 그들은 주야로 쉬지 않고 하나님을 찬송하는 자이다
(4:8).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자로서야 어찌 찬송을 끊으랴? (3) 일곱인 뗄 때에 말
탄 자가 나온 일과, 일곱 대접 재앙을 쏟는 일이 이들의 인도로 시작된다(6:1, 15:7).
그러면, 그들은 하나님의 진노의 일을 땅 위에 개시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직전에서 사
역하는 가장 성엄(聖嚴)한 영물들이다. 그러나 혹자들은, 이 네 가지 생물들을 실재
의 영물(靈物)들로 보지 않고, 하나님의 섭리(攝理) 행사의 네 가지 형태에 대한 상징
으로만 본다. 또 혹자들은, 이 생물들이 피조계를 대표하는 상징이라고 한다.
모팟트(Moffatt)는, "네 생물"에 대하여 잘못 말하기를, 이것은, 생명과 지능의 완
전성을 가리키는 괴기(怪奇)한 상징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사대 영물(四大靈
物)의 실존(實存)을 무시하는 견해이다. 에녹서(40:2)에도 하나님 앞에 있는 네 천사
에 대한 말이 있으나, 거기서는 내왕하는 천사에 대하여 말한다. 그러나 계시록은 보
좌를 두루고 체재(滯在)하는 실존들을 말하니 계시록의 것은 독특한 것이다.



계 4:7

"사자"- 는 용기와 힘의 표상이고,
"송아지"- 는 충성과 희생의 표상이고,
"사람"- 은 지혜의 표상이고,
"독수리"- 는 영적 생명의 표상이다. 여기 네 가지 형상은, 하나님께 근시(近時)
하여 사역하는 영물들이 이런 능력들을 가진 사실을 상징한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종들도 이런 능력들을 가져야 한다.

 

                                     ( 하늘 보좌앞의 생물 )

계 4:8

여섯 날개.- 사 6:2 참조.



계 4:9

영광과 존귀.- 이것은 하나님의 지극히 높으신 품성의 광휘(光輝)를 이름이니, 인
간의 표현이 부족하므로 이 말로 밖에는 말할 방도가 없다.
"감사"- 는 하나님의 하신 일 곧, 그의 창조 사역의 위대함을 인함이다. 본장에서
는 생물이나 장로가 같이 하나님의 창조를 찬미한다(11절 참조).



계 4:10

면류관을 보좌 앞에 던지며.- 이것은, 그들이 받은 금관(金冠)의 영예가 실상은 하
나님께만 적합하고, 그 자신들에게는 그것을 받음이 오히려 감당할 수 없다는 뜻이다.



                                    ( 보좌 앞에 면류관을 던짐 )

 

계 4:11

영광과 존귀.- 9절 해석 참조.
"능력"- 은 하나님의 창조하시는 능이니 그것이 우주 만물로 증명된다. 피조물들
의 지혜로운 구조는, 그것들의 자작 속성(屬性)이 아니고 하나님의 능력의 표현이다.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헬라 원어에는 이 문구가 "왜 그런고 하면"이라는 말
호티(* )로 시작하여, 그위의 말씀의 이유를 보여 준다.
주의 뜻대로 있었고.- 여기 "주의 뜻대로"란 말은, 헬라 원어로 디아 토 델레마 수
(* )라고 하는데, 그 의미는 "당신의 뜻 때문에(혹은
위하여) 있었고"이다. 그러면 이 말씀의 의미는, 만물 조성(造成)의 방법 뿐 아니라,
그 원인(意志的原因)을 보여 준다. 크레다너스(Greijdanus)는 말하기를, "이것은 만
물 성립의 방도를 말할 뿐 아니라, 만물 존재의 기원(起源)을 말한다. 따라서 만물이
그 현상, 그 유지(維持), 또는 그 양상(樣相)에 있어서 전혀 하나님의 무상적(無上的)
주재(主宰) 의지에 의뢰되어 있고, 그로 말미암아 결정되어 그에게 안식하고 있음을
말한다"고 하였다(Hiermede wordt die Wilniet maar als middeloorzaak, of
instrument, zoodat zij in hun ontstaan, en bestaan, en voortbestaan, en wijze
van bestaan, geheel afhankelijk zijn van dien will, en door hem bepaald zijv,
als op hem rusten.-Openbaring, p. 130).
"있었고"라는 말은, 만물이 그 창조되기 전에는 하나님의 예정적 계획 가운데 있었
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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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 5:1

오른 손에 책.- 이것은, 세계의 장래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과 및 그것에 대한 그의
주재권(主宰權)을 표시한다. 하나님만이 세계의 장래를 아시고 이것을 주재하신다.
오른 손은 힘 있는 손이니, 잘 보관하고 또 주재하는 것을 상징한다.
안팎으로 썼고.- 이것은, 세계의 장래에 대한 그의 계획이 만전적(萬全的)으로 작
정되어 있으므로 누구든지 그것에 가감(加減) 할 수 없음을 상징한다. 그러나 즈안
(Zahn)은, 여기 "안팎으로 썼고 일곱 인으로 봉하였더라"고 한 엇구(語句)를 다음과
같이 번역하였으니, 곧, "안에 썼고 밖으로 일곱 인으로 봉하였더라"고 하였다. 이
번역이 옳다면 그 뜻은, 그 책 내용의 비밀성을 역설하는 것이다. 그러나 재래의 번
역이 옳으니, 그 이유는, 겔 2:10에도 "안팎으로 쓴" 두루마리 책에 대한 말이 있고,
또 헬라 원문(* )의 문법
도 재래역(在來驛)에 적합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이 인봉한 책을 오른 손에 가지신 이유는, 그 오묘를 그의 교회에 알게
하시려는 까닭이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하시려는 것을 그의 택한 백성에게 알리시기
를 기뻐하신다. 그가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려고 하실 때에도 아브라함에게 말씀
하시기를, "나의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창 18:17)고 하셨다.
일곱 인으로 봉하였더라.- "일곱"수는 완전수를 의미하는 바, 일곱 인봉(印封)은,
계시의 일곱 내막(內幕)에 대한 엄중한 은익(隱慝)을 상징한다. 이 칠인 내막은 6장
이하에 하나씩 계현(啓現)된다. 혹설에, 여기 일곱 인봉은, 로마 나라에서 유언을 확
정하기 위하여 일곱번 인봉하는 풍속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 의미는, 하
나님께서 그 자녀에게 주시려는 기업(基業)에 대한 확보이겠다. 그러나 우리는 이 학
설을 확신하기 어렵다. 그런데 이제 문제는 누가 이것을 열수 있는가에 달렸다.



계 5:2

힘 있는 천사가.- 이렇게 "힘 있는 천사가" 나타나는 이유는, 큰 소리로 발성(發
聲)하기 위한 것이다. 그의 부르는 소리는 천상(天上), 지상(地上), 지하(地下)에 두
루 미쳐야 할 것이었다. 일곱번 인봉한 그 책은 저 유력한 천사 자신에게도 미지(未
知)의 것이었으므로, 저렇게 큰 소리로 부르짖었다. 구속의 대사업은, 천사도 경이
(驚異)와 흥미로 구경하려는 장관(壯觀)이다(벧전 1:12).
합당하냐.- 이것은 헬라 원어로 악시오스(* )라고 하는데 여기서는 위의
일곱번 인봉한 책을 열 수 있는 의로운 자격을 의미한다(Greijdanus).



계:5:3

"하늘 위"- 는 천사들과 별세한 성도들이 있는 곳이고,
"땅 위"- 는 모든 인생들과 생물들이 있는 곳이고,
"땅 아래"- 는 승천하지 못한 영들이 있는 곳인 듯하다. 이 셋은, 우주와 및 우주
밖의 모든 경역(境域)을 총망라(總網羅)한다. 세계의 종말에 대한 하나님의 오묘한
계획을, 죄 있는 인간이 알 수 없다. 또 다른 생물들도 알 수 없다(마 11:25-). 그
뿐 아니라, 구것을 알 수 있는 자 곧, 신인 간(神人間)에 중보자(仲保者)의 자격을 가
지는 자는 천사들 중에도 없다. 이 자격자가 누구냐? 그것은 제 5절이 잘 알려 준
다.



계 5:4

내가 크게 울었더니.- 요한이 크게 운 이유는 무엇인가?
(1) 그가 애모하는 계시(책을 열어 보임)가 중지될 듯이 생각된 까닭임. 이것을 보
면, 하나님 나라의 일을 보려는 그의 심령이 얼마나 간절하였던 사실을 추측할 수 있
다.
(2) 그가 크게 운 또 한 가지 이유는, 일곱번 인봉한 책을 받아 열 자 없는 원인이,
인류의 죄악이었음을 알게 된 까닭이다. 천사의 부르짖는 소리에 온 우주는 고요하고
아무 대답이 없었으니, 우주는 죄악의 비참한 폐허(廢墟)인 사실이 알려졌다. 이것을
느낄 줄 아는 예언자는 통곡하지 않을 수 없다.
(3) 어떤 학자는 말하기를 요한이 크게 운 이유는, 그가 기다리던 구원의 푸로그람
(일곱번 인봉한 그 책은 성도 구원에 관한 종말적 푸로그람이라고 할 수 있음)을 받아
서 성취시킬 자가 없음을 통탄한 까닭이라고도 한다.
이상에 말한 세 이유가 다 일리를 가지고 있다. "우니"란 말이, 헬라 원문(*
)에서는, 과거 미완료 동사(過去未完了動詞)이므로 그것을 직역(直譯)하면 "우는 중에
있었으니"라고 하여, 울음을 계속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천사의 부르는 큰 소리에
대하여 전 우주(全宇宙)에 한 마디 대답이 없으니, 이는 할 수 없는 죄악 세상의 적막
(寂寞)이었다. 이것을 느끼는 자는 큰 울음을 울지 않을 수 없었다. 이 곡성(哭聲)
은 천성(天上), 지상(地上), 지하(地下)를 진동하리 만큼 호소력(呼訴力)을 가졌다.
전 인류의 죄와 자기의 죄를 통감(痛感)하는 회개의 울음 소리! 계시자와 구원을 애원
하는 울음 소리! 이 울음 소리는 하나님의 보좌에 들리는 귀한 소리이다. 천사의 부
르는 소리도 장대(壯大)했지만 요한의 곡성도 위대했다.



                                      ( 봉인한 두루마리의 펼침 )

 

계 5:5

유대 지파의 사자.- 이것은 창 49:9,10의 예언을 염두에 두고 쓴 말씀이다. 야곱
은, "유대 지파"에서 메시야가 나실 것을 예언하여 말하되, "유다는 사자 새끼로다...
수사자 같고 암사자 같으니 누가 그를 범할 수 있으랴"고 하였다. 이 예언이 성취되
어 과연 예수는 유다 지파에서 나셨다(히 7:14). "사자"는 이기는 자의 표상이요 이
기는 것은 메시야의 특징이다. 창 3:15에 메시야에게 대하여 예언하기를, "여인의 후
손은 네 머리를 상하고 너는 그 발꿈치를 상하리라"고 하였다. "사단의 머리를 상함"
은 곧, 메시야의 승리를 말한다. 사도 바울도 성령님의 감동으로 말하기를, "평강의
하나님께서 속히 사단을 너희 발 아래 상하게 하시리라"(롬 16:20)고 하였으니, 이것
은 분명히 위의 창 3:15 말씀을 염두에 두고 한 것이다. 창 3:15의 메시야 예언이 있
은 후, 고래(古來)로 하나님의 택한 백성은 이기는 자 곧, 메시야를 대망하여 온 것이
다. 예언자들은 메시야를 사자로 비유하기도 하였고(창 49:9,10), 혹은 왕이라고 하
였다(미 5:2).
다윗의 뿌리.- 이는 다윗 왕통(王統)의 베어진 그루터기를 이름이다. 다윗 왕통이
오랫동안 끊어졌다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다시 계승된 것이다(명적으로). 사
11:1,10; 계 22:16; 롬 15:12 참조.
이기었으니.- 이것은 메시야의 특성이니(창 3:15), 곧,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시므
로 승리하시고, 구속 사업을 성취하신 일이다(골 2:14,15). 그 승리는, 사단과 죄의
권세와 사망과 세상을 이긴 것이다. 눅 10:18; 요 14:30, 12:31; 계 1:18 참조. 이
와같은 승리자, 곧, 메시야께서만 신인 간(神人間)의 중보자가 되시며 하나님의 비밀
을 그의 택한 백성에게 계시하며, 또 계시 대로 구원을 완성하신다 함이 성경적 교훈
이다. 히 7:26-28 참조.
다윗의 뿌리가 이기었으니 이 책과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 그리스도께서 일곱 인
으로 봉한 책을 받아 여심은, 계시의 의미를 가질 뿐 아니라, 그 계시의 내용대로 집
행하실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계시, 구원, 심판을 하신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세가지 일을 하실 수 있는 이는 그리스도 밖에 없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 만이 중보자이시기 때문이다. 그는, 하나님으로서 다윗의 자손이 되사(人生
이 되사) 우리의 짐을 맡아 지시고, 하나님 앞에 서신 자니 만큼, 계시, 구원, 심판의
책임자이시다.



계 5:6

보좌...생물...장로.- 계 4:2, 4, 6의 해석 참조.
사이에 어린 양이 섰는데.- "어린 양"께서 장로들의 밖에 서시지 않고 그들의 "사
이에"(* )서신 것은, 그의 중보성(仲保性)을 보인다. "어린 양"은 이스라엘이
유월절에 먹은 것이니, 곧, 속죄 제물(贖罪祭物)을 상징한다. 그러므로 이것은 속죄
자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요 1:29,36; 사 53장 참조. 그런데 여기 "어린 양"이
라는 말이, 요 1:29의 그것(* =암노스)과 다르게 아르니온(* )이
라고 했으니, 이는 어학상 아형 명사(兒形名詞: Dimunitive)이다. 여기서 이 아형 명
사가 사용된 목적은, 그리스도의 부드러우심, 온유하심, 희생이 되심, 사랑이 충만하
심을 역설하려는 것이다(Greijdanus,de idee van het teedere, zachte, overgegevene,
liefdevolle, te accentueeren).
예수를 사자로 지적하고 여기서 돌연히 "어린 양"으로 나타내는 계시는 의미 심장하
다. 메시야는 사자 같은 승리자이시다. 그러나 그의 행동 원리는 사자 같지 않고 어
린양 같았다. 그는 어린 양 같이 자신을 하나님 앞에 희생으로 드리시고 십자가를 지
신 고로, 사자 같이 승리자가 되신 것이다. 불신 유대인들은, 메시야의 사자 같이 이
기는 행동 원리가 이 세상 권세를 잡은 자 같을 것이라고 그릇되이 알았으므로 실패했
으나, 요한은, 이 사자 같은 승리자를 어린 양 같은 속죄적 희생자에게서 찾아 만난
것이다. 모든 기독 신자들은 다 사도식으로 메시야를 찾는 것이다. 메시야(그리스
도)가 이 세상에서 승리의 사업을 하실 때에 항상 어린 양 같으셨다. 마 12:18-21에
메시야에 대하여 말하기를, "보라 나의 택한 종 곧 내 마음에 기뻐하는 바 나의 사랑
하는 자로다 내가 내 성령을 줄 터이니 그가 심판을 이방에 알게 하리라 그가 다투지
도 아니하며 들레지고 아니하리니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상한 갈대
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또
한 이방들이 그 이름을 바라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 하였고, 행 8:32, 33에 메
시야께 대하여 말하기를, "저가 사지로 가는 양과 같이 끌리었고 털 깍는 자 앞에 있
는 어린 양의 잠잠함과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 하였도다 낮을 때에 공번된 판단을 받
지 못하였으니 누가 가히 그 세대를 말하리요 그 생명이 땅에서 빼앗김이로다"라고 하
였다. 혹설에, 여기 사용된 아형명사(兒形名詞) "어린 양(* )"은, "친애"
(親愛)의 의미까지 포함하였다고 한다(Bengel).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대신하여 죽
으셨던 것이니 만큼, 지금 천계(天界)에 계시면서도 우리에게 친애한 관계를 가지시는
자이시다.
일찍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 이 엇구는 그 윗말, "섰는데"를 형용한다. 곧, 어
린 양께서 서 계시되 죽은 듯이 서서 계시더라는 말이다. 곧, 그가, 그의 몸에 전에
죽으셨던 표를 아직 가지고 계신다는 말이다(Charles, * ,
i.e.as though slain in sacrifice and still retaining the appearance of death
wounds on its body).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대속(代贖)의 공로
(功勞)를 세우신 것이 하늘에서 영원토록 효과를 가진다는 상징적(象徵的) 표현이다.
다시 말하면, 그가 하나님을 순종하여 속죄의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신 공로는, 내세에
서도 영원히 남아 있다. 그러므로 그는 우리의 영원한 속죄요, 의요, 성결이요, 지혜
가 되신다(고전 1:30).
일곱 뿔.-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부활 승천하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고, 그 얻으
신 완전 무결하신 권세와 능력을 상징한다. 빌 2:9-11; 행 2:36, 마 11:27, 28:18 참
조.
일곱 눈.- 슥 3:9, 4:10 참조. 이것은 이 아래 문구 대로 보아서 성령님을 상징하
는 것이다. 성령님께서는 거룩하신 하나님과 동행하실 뿐 아니라, 역시 성자님과 동
행하신다(사 11:2, 4:1). 성자님께서 승천하신 후에는, 성령님을 특수한 방식으로 보
내시어(행 2장) 자기를 증거케 하셨으니, 본절의 이 말은 이 점을 가리킨다(요 14:26,
15:26, 16:8,13-15).



계 5:7

취하시니라. 이 말은 헬라 원어로 아이레-펜(* )이니, 현재분사(現在
分詞)로서 그 취한 책을 영구히 가지고 계심을 이름이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계시를 참간 동안만 취급하시지 않고 영구히 맡아 가지고 계신다.



                                   ( 24 장로들의 새노래 )

 

 

계 5:8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 대접을 가졌으니.- "거문고"는 하나님께 감사의 노
래를 드리는 악기(樂器)요. "금대접"은 거기 담긴 향을 요점으로 한 것이니, "향"은
성도들의 기도에 대한 상징이라고 본문이 밝힌다. 향을 성도들의 기도라고 했으니,
하나님은 기도를 향취(香臭)와 같이 즐기심이 여기도 나타난다. 기도는 하나님에게만
향기처럼 귀여운 것이 아니고, 성도 자신에게도 그런 것이다. 참된 신자에게는 기도
하는 때처럼 기쁘고 향기로운 것이 없고, 또 그가 남의 기도 소리를 듣는 때에도 그런
향기를 느낀다.



계 5:9

새 노래.- 이것은 구원의 새로운 체험으로 터지는 새로운 찬송이다.
"족속"- 은 혈족적(血族的) 유래 (由來)를 염두에 두었고,
"방언"- 은 종족과 종족의 원근(遠近)을 막론하고 단순히 언어가 같은 국민을 가리
키고,
"백성"- 은 정치적으로 모인 인민의 집단이고,
"나라"- 는 생활 습성(習性)의 유사(類似)로 인한 집단이다(H. Cremer-J. Kogel,
Worterbuch d. Neutest. Grazitat). 위의 정의(定義)가 정확 무오(正確無誤)하다고
단언하기는 어렵다. 우리가 확신하기는, 이 네 가지 말이 전 인류를 망라(網羅)한다
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되 어느 민족을 차별하시지 안으셨다. 그러
나 나의 이 말은, 그가 인류 전체를 한 사람도 유루(遺漏)없이 다 구원하신다는 의미
는 아니다. 이 아랫말,
"가운데서"- (* )란 것이 선택적 구원(選擇的救援)을 가리키고 있다. 하나님께
서 민족이나 인종은 차별하시지 아니하셨으되 그의 기쁘신 뜻대로 구원할 자들을 선택
하신 사실은, 성경의 어느 부분에서든지 일률적으로 가르친다.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이 말씀은, 복음의 골수(骨髓)이다. 참 신자는 하
나님께서 거저 얻으신 습득물(拾得物)이 아니고, 그의 피로 사신 고가(高價)의 보배이
다.



계 5:10

나라와 제사장.- 1:6의 해석 참조.
저희가 땅에서 왕노릇 하리로다.- 여기 "왕노릇하리로다"란 말은, 헬라 원어로 바
실류-수-신(* )이니 미래 동사(未來動詞)로서 중요 사본(寫
本)들의 사구(寫句)이다. 어떤 사본들(A.Q)에는, 이 말이 현재사(*
)로 씌어져 있으나, 모팟트(Moffatt)는 첫째 것을 채택하였다. 우리가, 20:4의 내용
(성도들이 말일에 부활한 후에 왕이 됨)을 염두에 두고 생각할 때에, 현재사보다 미래
사 바실류-수-신(왕 노릇하리로다)이 적당해 보인다. 촬스(R.H. Charles)는, 이것이
현재사인 경우에도 20:4의 종말관적(終末觀的) 군림(君臨)의 의미를 가리킬 수 있다고
하였다.



 

                                   ( 찬양하는 수많은 천사 )

 

 

계 5:11

보좌와 생물들과 장로들을 둘러 선 많은 천사.- 여기 "천사"들의 위치가 천계에서
성도들을 대표한 장로를 둘러 싸고 움직인다. 그것은, 그들이 성도들의 수종자인 사
실을 보인다. 천사의 존재에 대하여 성경의 증거가 많으니, 마 22:30, 24:36; 눅
1:13, 9:26, 15:10; 히 1:6; 벧전 1:12; 유 1:6, 9; 계 12:7, 14:10; 창 19:1; 삼하
14:20; 슥 1:9등의 성구들을 들 수 있다. 이 성구들에 의하면, 천사들은, 이성(理性)
이 있고 도덕(道德)이 있고, 지능(知能)이 있는 자요, 격위(格位) 있는 자로서 행동하
며, 혹 사랑하며, 기뻐하며, 다투며, 경배하며, 말하며, 왕래하는 자들이라고 하였다.
천사의 성질은 그 피조성(被造性)이다. 천사가 언제 창조되었는가 하는 문제는 확답
하기 어려우나, 욥 38:7을 보면 천사가 하나님의 만물 창조에 참관(參觀)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이 천사가 만물 창조 전에 창조됐다고까지 말할 근거는 못된다. 천사는
만물 창조와 동시에 창조된 듯하고(골 1:16; 느 9:6; 시 103:20,21, 148:23), 이성적
(理性的), 도덕적(道德的), 불사적(不死的) 실존이다(엡 3:10; 벧전 1:12, 5:8). 천
사의 종류는 몇 가지로 생각할 수 있으니, 선한 천사와 악한 천사(마 8:10; 막 8:38;
눅 9:26, 20:36; 고후 11:14; 딤전 5:21; 벧후 2:4; 유 1:6; 계 14:10)라고 하는 도덕
적 유별(類別)이 있고, 또 직별(職別)로서 몇 가지 이름이 있으니, 곧, 그룹들(창
3:24; 출 25:18; 삼하 22:11; 시 18:10, 99:1; 사 37:16; 히 9:5), 스랍들(사 6:2),
가브리엘과 미가엘(단 8:16, 9:21, 10:13, 21; 눅 1:19, 26; 유 1:9; 계 12:7)이다.
만만이요 천천-. 곧, 만의 만이고 천의 천이란 말이다(시 68:17; 단 7:1;
히 12:22 참조).



계5 :12

능력.- 헬라 원문에는, 이 첫말 바로 앞에 "그"라고 번역되는 관사(* ) 하나
가 있다. 그것은, 본절에 있는 칠언 찬송(七言讚頌=능력, 부, 지혜, 힘, 존귀, 영광,
찬송)을 일속(一束)으로 하여 가리키는 공통 관사(共通冠詞)이다. 태양의 칠색(七色)
이 일체화(一體化)하여 한개의 흰 빛을 나타내는 것처럼 여기 천사들의 칠언은 일체가
되어 한개의 완전한 찬송을 이룬다. 위에 말한것과 같이, 이 칠언이 한개의 공통 관
사를 가졌으니 우리는 이 칠언, 마디 마디에 모두 다 "그" 라는 말을 붙여서 읽어야
한다. 그리고 이 칠언에 관사가 붙은 이유는, 이 칠언에 각기 표시된 내용을 남김 없
이 "어린 양"에게 전속(專屬)시키려는 까닭이다. 일례(一例)를 들어 설명하면, "그
능력"이란 말 뜻은, 무슨 능력이든지 다 "어린 양"께 속한다는 말씀이다. 여기서 "능
력(* )"은 천연계(天然界)의 일반적 능력과 및 초자연적(超自然的) 신능
(神能)을 가리킨다.
"부"- 는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신 후에 성부(聖父)에게 받으신 모든 것을 가리킨
다(마 28:18; 엡3:8, 4:7-13; 대상 29:11,12 참조).
"지혜"- 는 신자들에게 주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영지(靈智)이고(고전 1:30; 골
1:9),
"힘"- 은 그의 행사상 강력을 염두에 둔 말이다. 그런데 이것이 능력에 비하여 무
엇이 다른가? "능력"은 그의 행사의 불가사의(不可思議)의 방면이고, "힘"은 그것의
불가항적(不可抗的)인 방면을 생각케 한다. 이 귀절에 있어서 크레다너스
(Greijdanus)는, "힘"을 가리켜 "그의 원하시는 대로 무엇이나 하시려면 하시는, 막을
수 없는 실행력"(Staat hier in verband met de openbaring van's Heeren mogend heid
als onwederstandelijke alles wat Hij wil, werkende kracht) 이라고 했다. 위의 네
가지 덕(능력, 부, 지혜, 힘)은, 그가 자기를 위함보다 교회에 구원을 베푸시려고 받
으셨다. 그리고 나머지 세 마디 찬송은, 주님의 높으신 덕을 칭송(稱頌)하는 의미의
것이다.
존귀와 영광.- 4:9의 해석 참조. "존귀"는 주님의 본체의 고귀하심이고, "영광"은
그 고귀하신 본체가 밖으로 빛나는 장관(壯觀)이다.
"찬송"- 은 헬라 원어로 율로기아(* )이니 위의 "영광"이 천사와 성
도들에게 인식되어 고백되는 것이다.



계 5:13

이 귀절은, 위의 천사의 칠언 찬송에 대한 만물의 사언 화답(四言和答)을 말한다.
그 화답은, 묘하게도 천사들의 노래의 종결어(終結語)인 "찬송"이란 말을 받아서, 그
찬송을 시작하였으니, 이는 화답의 성격을 잘 보인다. 그리고 우리가 주목할 것은,
양자(兩者)가 함께 그리스도의 죽으셨다가 영광 얻으신 사실을 찬송한다는 것이다.
천사들은,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이라 하고, 만물은
"어린 양"- (희생이 되신 자)에게 찬송한다고 한다.
만물이 가로되.- 이것은, 만물이 영계(靈界)로 더불어 통화(通話)할 수 있다는, 물
아 동체론 원리(物我同體論原理)에서 나온 말이 아니다. 성경은, 엄연히 만물과 하나
님과의 분별, 또는 만물과 인생과의 분별을 두고 행각한다. 창세기 3장에, 뱀이 인간
으로 더불어 말한것은, 뱀 스스로 한 것이 아니고, 마귀가 그렇게 시킨 것이며, 민수
기에 나귀가 말한 것도 그것 스스로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권능으로 그렇게 하
게 하신 것 뿐이다. 한국 고담(古談)에, 백발 노인이 변하여 범, 여우가 된다든가 혹
은 그런 동물이 인간으로 더불어 통화하였다는 것은, 물아 동체론 곧, 범신론(汎神論)
에서 나온 사상이다. 성경 계시록에, 만물이 말한다 함은, 의인적(擬人的)표현법이
다. 이것은, 만물이 무언 중에도 단지 그것이 속한 우주의 구속(救贖)에 호응(呼應)
하여 움직이게 된다는 말씀이다.(롬 8:19).


/////////////////////////////////////////////////////////////////////////////////////////////////////////////////////////

계 6:1

네 생물 중에 하나가 우뢰소리 같이 말하되.- 이것은 첫째 "생물"인 사자 같은 자
의 소리이니, 이는 승리자의 소리이다. 이것은 첫째 인을 뗄 때에 나타난 자(흰 말
탄 자)가 승리자 곧, 그리스도의 복음 운동인 사실을 한층 더 밝힌다.
오라 하기로.- 이것은, 하나님의 섭리를 주관하는 영물이 전달하는 하나님의 명령
이다. 이것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복음적 섭리의 내림(來臨)을 가능케 한다. 그리
스도의 복음 운동(흰 말 탄 자)이 선봉이 되어서 모든 사건들이 뒤 따른다. 복음이
승리하기 위하여 모든 재난들이 뒤이어서 역사상(歷史上)에 일어난다. 특별히 일곱
인의 칠수(七數=神的數)는, 그 재난들이 하나님의 계획 중에서 움직이고 있음을 암시
한다. 그러므로 이런 재난들은 하나님의 장중에서 제재(制裁)를 받고 있는 것이다.
비록 그것이 무서운 것이라 하여도 하늘에서 그것을 제재하여 성도를 유익하게 한다.
성도는 그것을 볼 때에 머리를 들어야 한다. "오라"는 말씀은, 이 복음 중심한 섭리
들의 내림을 호청(呼請)하는 것이다. 우주(宇宙)의 구원 완성을 위하여는 되어야 할
일들이 쓰건 달건 신속(迅速)히 와야겠다. 혹설에 이 "오라"는 말은, 그리스도의 재
림을 재촉하는 기도라고 한다(롬 8:19-21). 그러나 이것은 이치에 맞지 않으니, 그
이유는, "우뢰 소리 같이" 나타난 어투(語套)가 기도의 성격이 아니기 때문이다.



계 6:2

흰 말이 있는데 그 탄 자가 활을 가졌고.- 이것은 무엇에 대한 상징인가? (1) 어
떤 학자들은, 여기 "흰 말 탄 자"가 적그리스도를 상징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기고 또 이긴"- 다는 말씀이 적그리스도에게 부합되지 않는다. (2) 람세이
(Ramsay)는 이것을 파사 왕이라고 하였다. 파사 왕과 및 그 군대는 흰 말을 타고 활
을 무기로 사용했다고 한다. 그러나 크레다너스(Greijdanus)는, 계시록이 상징적(象
徵的) 문학(文學)이고 직설적 역사(直說的歷史)가 아닌 이유로, 이 직설적인 학설을
배척했다(De Openbaring Spreekt met de beelden 1:1). (3) 엘리오트(Elliott)는, 이
흰 말 탄 자가 로마의 전성시대(全盛時代=도미시안황제 死後부터 콤모더스황제가 卽位
한 때까지)라 하나, 우리는 이 견해를 받을 수 없다. 그 이유는, 다음 학설이 정설
(正說)인 까닭이다. (4) 크레다너스(Greijdanus) 자신은 이것을 복음의 상징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혹자가 평하기를 "다른 모든 인들을 뗄 때마다 심판적 재앙이 나오는
데도 불구하고 하필 첫째 인을 뗄 때엔 복음의 축복이 나온다함은 이 체재(體裁)에 적
합하지 않다"고 하였다. 그러나 실로 복음은, 멸망 받을 자들에게는 심판인 것이다
(요 3:16-21, 9:39-41; 고후 2:16). 그러므로 크레다너스의 해석이 정당해 보인다.
뉴웰(Newell)은, 이 점에 있어서 합당하게 말한 바 있으니, 크레다너스의 해석을 지지
하는 것으로 보인다. 곧, "이 흰 말 탄 자는 세계의 종말기를 당하여 멀리서 땅을 향
하여 싸우시는 그리스도이고, 활은 멀리서 적을 사격(射擊)하는 무기이니 곧, 하나님
의 말씀을 상징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시 45:5 참조.



계 6:3,4

둘째 생물이 말하되 오라 하더니 이에 붉은 다른 말.- 이 아랫 말을 읽어 보면, 붉
은 말이 전쟁의 표상인 것만은 사실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이 어느때의 전쟁을 가
리키는가 함에 있다. 크레다너스(Greijdanus)는 이 아래 세 인을 뗄 때의 재앙들을
복음 전파(그는 흰 말 탄 자를 복음으로 봄)의 방편으로 보았다(Rampen van
hongersnood en ziekte grijpen de harten aan, en maken ze ontvankelijk voor het
aanhooren en aannemen van de Evangelieprediking). 그렇다면 그의 견해 대로는 이
전쟁이 종말 심판에 관계 있는 것이 아니고, 신약 시대에 일어나는 모든 전쟁을 가리
킬 것이다. 일례를 들면, 주후 100-138년까지 유대인들이 전쟁으로 인하여 많이 살륙
당한 참사와 같은 것이다. 그 때에 58만이라는 많은 수의 유대인들이 살해되었다고
한다(Scott).
허락을 받아.- 이것을 보면, 그 무서운 전쟁들도 하나님의 관하(管下)에서 움직이
고 있다. 그러므로 그것은 하나님의 허락이 있는 동안만 존속(存續)할 수 있을 것이
며, 또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도록 이용되거나 전용(轉用)된다.
큰 칼을 받았더라.- 이것은 전쟁에 쓰는 군도(軍刀)를 가리키는데, 엘리오트와 빤
스(Elliott and Barnes) 양씨는, 로마의 내란(內亂) 시대(주후 185-284년)를 상징한다
고 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이 전쟁을 기어이 어떤 한 사변(事變)에만 국한하여 생각
할 필요는 없다. 복음 전파에 관련성 있는 전쟁들은 역사상에 많이 있었다. 1장 주
석 끝에 있는 설교를 읽어보아라.



계 6:5,6

검은 말.- "검은" 빛은 슬픔의 상징인데(애 5:10), 그 탄 자가
"저울"- (흉년의 상징: 겔 4:10)을 가졌으니 만큼, 이 계시는 흉년과 기근에 대한
것이다. 이 계시는 위의 계시에서 반드시 시대적으로 별립(別立)되는 것은 아니겠다.
동일한 시대에 이 일들이 함께 있을 수도 있다. 전시(戰時)에는 흔히 기근의 재앙도
있는 법이다.
한 데나리온.- 이것은 로마의 화폐이니 노동자의 하루 임금(賃金)이고, 이 가격에
"밀 한되"는 보통 가격보다 8배나 비싼 것이라고 한다.
보리.- 이것은 밀보다 천한 곡물이므로 비교적 값이 싸다. 이렇게 기근을 당하여
양곡이 귀하므로 사람들이 도탄(塗炭)에 빠졌다. 스콧트(Scott)는, 이것이 주후
138-192년의 로마 제국의 흉년을 예언한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한
시대의 일로만 간주할 바 아니다.
감람유와 포도주는 해치 말라.- 팔레스틴과 소아시아에 있어서는 이것들이 호화로
운 식료품이 아니고 상식품(常食品)이다. 이것들을 해하지 않음은 하나님의 긍휼이
다. 로마여(Lohmeyer)는, 이것을 가리켜 신자들의 종교 생활에 대한 보호를 상징한다
고 하였다(Dann bedeutet die Schonung von oel und wein fur den Seher vielleicht
Shonung der Glaubigen im Hinblick auf die Erfullung religioser
Pflichten.-Offenbarung, p. 61). 기름과 포도주는 성경에서 종교를 상징한다(약
5:14; 눅 10:34; 사 55:1).



계 6:7,8

청황색 말.- 청황색은 공포(恐怖)와 시체(屍體)의 빛이다. 이 단계의 환난은 그
절정(絶頂)에 이른 것이다. 그러므로 그 상징은 청황색이며,
"검과 흉년과 사망과...짐승"- 의 모든 재앙의 총 출동으로 나온다. "검"은 천시
(戰時)의 살륙(殺戮)을 상징한다. 이방 각지에 복음이 선포될 때에 전쟁과 정변(政
變)이 유조(有助)하게 된 일은, 역사상에 얼마든지 있다. 7장 주석 끝의 설교를 참조
하여라. 고대 로마에는 내란이 심하여 살륙이 쉬지 않고 계속된 시기가 있었다. 곧,
콤모더스 황제가 살해된 뒤에(주후 193년) 90년 간 소요(騷擾)가 쉬지않아, 그 동안에
32 황제가 폐립(廢立)된 중, 22황제가 위군(僞君)이었다(Gibbon pp.50-197). 이렇게
땅 위의 질서가 혼란하여 안전성이 없으므로, 사람들이 복음으로 돌아왔다. "흉년"은
정치가 어지러워지고 전화(戰禍)가 편만(遍滿)한 때에 기근(饑饉)이 동반하는 것이 역
사의 경험이다. "사망"은, 헬라 원어로 다나토스(* )인데, 70인역(LXX)
은 온역(히브리어로 떼베르 * )의 의미로 이 다나토스를 사용한 것이 적지 않다
(30/50). 그러므로 헬라어 다나토스는 온역의 의미를 가진다. 여기서도 "사망(다나
토스)"이 온역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재앙들은, 예수님의 예언하신
그것(눅 21:10, 11, 전쟁, 기근, 온역)과 근사(近似)하고, 에스겔서에 예언한 그것(겔
14:21)과도 잘 합한다. 온역으로 인하여 인명이 상한 일은 역사상에 많다. 로마에는
하루에 10만명이 죽은 일이 있었으므로, 이 계시는 그것을 가리킨다는 학자도 있다.
땅 사분 일.- 이것은, 8:7-12에 있는 3분의 1보다 적은 수량인 듯하다. 그러나 이
것이 단순한 상징적 의미만 가지는지, 혹은 여자적(如字的) 의미를 가지는지 알기 어
렵다.
땅의 짐승으로써 죽이더라.- 고대의 로마에도 이런 수해(獸害)가 많았다. 그 때
사람들이 말하기를, 이런 수해가 있는 이유는, 기독교인들 때문에 신의 진노가 임한
까닭이라고 하였다. 그 말에 혹이 대답하기를, "기독교인들이 우리 나라에 있기 전에
는 이런 재난(災難)이 없었는가?" (Non ante nos?) 하면서 비웃었다고 한다. 어떤 설
에, 이 수해(獸害)는 적그리스도들의 핍박 행위를 상징한다고 한다.



 

                                  ( 다섯번째 인 : 순교자들의 영혼들 )

 

 

계 6:9-11

죽임을 당한 영혼들.- 이 엇구는 헬라 원어(*
)의 바른 번역이 아니다. 그 바른 번역은, "죽임을 당한 자들의 영혼들"이라고 한다.
이것은, 역사상에 있는 순교 사건들을 일반적으로 가리킨 듯하다. 혹설에 이것은, 주
후 270-304년의 로마 디오클레시안황제의 기독교 박해를 예언한 것이라고 한다.
제단 아래 있어.- 모세가 설립한 성소의 제단은, 하늘에 있는 것에 대한 모형이라
고 성경이 말한다(히 9:23). 주님 예수께서 승천하시고, 헌신하신 제단도 그것인 듯
하다(히 9:24). 순교자들은, 하늘에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이 성단 아래서 겸손히 애
걸한다. 그 기도는 이러하니 말하기를,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신원하여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나이까"- 라고 한다. 혹자는 말하기를, 이것은, 신
약적(新約的)이 아니고 구약적(舊約的)인 복수(復舊)사상이라고 하며, 구약 시대의 순
교자들의 기도라고 한다. 그러나 우리가 알 것은, 구약 시대의 성도들도 함부로 복수
해 주시기를 기도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시편을 읽어보면, 성도는 오직,
"하나님의 원수"에게 한하여서만 저주를 발설하였고, 자기 개인의 원수에 대해서는 그
리하지 않았다. 그것은 신약시대에도 일반이다. 신약시대의 신자도, 하나님의 원수
를 위하여는 복을 빌지 않고 저주를 빌었다(갈 1:8). 누가 그런 원수인지 알기 어려
우니 만큼, 그는 그런 기원(祈願)을 함부로 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천계(天界)에 가
서는 그 원수를 분명히 알수 있으니, 그런 기원을 발할 수 있겠다. 그러므로 이 기도
는, 신약시대 순교자들의 것일 수 있다. 모팟트(Moffatt)는, 이 순교자의 기도에 대
한 말이, 에녹 가경(假經)에서 섭취된 사상이라고 한다. 에녹 가경의 귀절은 다음과
같다. 곧, "심판을 위하여 부르짖기를 계속하라. 그것(심판)이 반드시 오리라. 너
희가 받은 고난이 너희를 괴롭게 한 자들에게 돌아가리라"(En. 104:3)고 한다. 그러
나 모팟트(Moffatt)의 이 견해는 억측이고 신임할 수 없는 말이다. 에녹 가경의 것은
부르짖기를 "계속하라"고 한 반면에, 요한 계시록 문구는 "아직 잠시 동안 쉬"라(11
절)고 하지 않았는가? 순교자의 피가 하나님께 호소한다는 것과(창 4:10), 또 그것이
갚음을 받는 다 함은, 주님께서 친히 가르치신 바니(마 23:35), 이 귀절은 정경에 근
거한 것이다. "거룩함"은 죄에 반대하는 성질이니 성도를 신원(伸寃)하실 성품이고,
"참되신 대주재"란 말은 진정하신 대주재란 의미이니, 그가 과연 상선 벌악(賞善罰惡)
하실 권세를 가지셨다는 말이다. "대주재"란 말은, 헬라 원어로 데스포테스(*
)니, 전재자(이는 타락한 인간의 불의한 專恣가 아님)란 의미이다. 이 전재란 것은
누구나 그의 뜻을 항거할 수 없다는 의미의 주권자이다. 그가 그 성도를 신원하려 할
때에 아무나 그의 행위를 방해할 수 없다. "땅에 거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의
대적인데 땅에 속한 자들이다(3:10, 8:13, 11:10). 요 8:23 참조. "어느 때까지 하
시려나이까"란 말을 보니,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는 신으로서 사람들의 죄악이 관영하
기 전에는 함부로 벌하시지 않으심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그 기산 동안
고대하며 신음한다.
흰 두루마기.- 이것은, 촬스(Charles)의 견해와 같이 혹종의 영체(靈體)가 아니고,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 사함 받아서 얻은 완전한 칭의(稱義)와 구원(救援)의 영광을 가
리킨다. 모팟트(Moffatt)는 이것을 가경(Ascension of Isaiah 9:6)의 유사구(類似句)
와 관련 있게 보았다. 그 귀절에 말하기를, "칠층천에서 아벧, 에녹, 기타 유대의 성
도들이 윗세계의 옷을 입었는데 그것은 부활체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 가경의 사상
은 계시록의 것과 판이하다. 계시록의 흰 옷은 결코 부활체를 가리키지 않는다
(14:13).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 히 11:39, 40 참조.



                                       ( 여섯번째 인 : 자연의 파괴 )

 

 

 

 

계 6:12

큰 지진.- 8:5, 11:13, 16:18 참조. 이것은, 여자적으로 지진(地震)을 의미할 수
도 있겠으나, 상징적(象徵的)으로 정치나 사회의 큰 동란을 의미하는 듯하다. 국가나
사회에 큰 동란이 있을 때에 실제로 큰 지진이 있음도 사실이다. 동양에서도 일본이
패망하던 전 년(1994년 겨울)에 큰 지진이 한국과 만주에 있었다. 빤스(Barnes)는 말
하되, 이 부분에서 묘사로 나타낸 정치의 큰 동란은, 로마가 고트족(族)과 반달족으로
인하여 망할것을 가리킨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이 말씀이 로마의 멸망 사
건에서 그 성취의 완필(完畢)을 보았다고는 하지 않는다. 이것은 필경 그리스도의 재
림시에, 이 세상 국가들의 멸망으로써 그 절정적(絶頂的) 성취를 보게 될 것이다.
총담.- 이것은 털로 짠 검은 자루이다.
해가...검어지고 온 달이 피 같이 되며.- 겔 32:7; 욜 2:10,13; 사 13:10, 50:3;
마 24:29; 막 13:24; 눅 21:25 참조.



계 6:13

별.- 단 8:10 참조.



계 6:14

하늘은 종이 축이 말리는 것 같이 떠나가고.- 사 34:4 참조. 일월성신(日月星辰)
과 천공(天空)의 변동은 정치계의 대변이(大變異)를 상징한다.



계 6:15-17

이 귀절들이 말하는 대로,
"굴과 산 바위 틈에 숨어"- 서 하나님과
"어린 양의 진노"- 를 두려워하며 떠는 자들(15절)은, 모든 층계의 사람들이다.
거기는 특별히 권세 잡은 자들이 많다. 일이 이렇게 되어지는 이유는, 권세 잡은 자
들이 흔히 죄를 많이 범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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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3 - 강해 ( 계 7-10 장 ) 요한계시록 / 신약성경강해

2009.10.02. 19:21

복사 http://blog.naver.com/apectria/90383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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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방의 바람을 붙잡은 네천사 )

 

 

계 7:1

네 천사가...사방의 바람을 붙잡아.- 4수는 땅에 관한 수이다. "네 천사가...사방
의 바람을 붙잡"았다 함은, 구원 확보를 상징하는 성도 날인이 완필되기 전엔 대 환난
(네 바람은 땅에 임할 대환난을 상징함)이 오지 못하게 만류(挽留)시킴이다. 성도
날인은 무엇인지 3절 해석을 참조하여라. "바람"은 전쟁의 재앙을 가리킨다(렘
49:36-39, 51:1). 세상 끝에 바람이 땅을 휩쓸리라는 사상은 가경(假經)(Sibyll
1.8.203 Enoch 13:22)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보는 학자가 있으나, 구것은 이 계시록 문
구를 읽을 줄 모르는 자의 오설(誤說)이다. 계시록의 이 문구의 의미는 상징적의 것
이고, 가경에서 처럼 여자적 의미(如字的意味)의 풍재(風災)가 있으리라는 것이 아니
다. 상징적 의미의 풍재에 대한 말은, 구약에도 있다(렘 49:36, 37, 51:1). 요한이
정경을 버려두고 가경 문학을 인용했을 리는 만무(萬無)하다.
"땅"- 은 계시록에서 불신앙의 영역(領域)이고,
"바다"- 는 이 세상 국가들이요(단 7:2),
"나무"- 는 이 세상 사람들을 상징한다(사 10:18,19; 겔 31:3,4,5,15,17).



계 7:2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인.- 하나님을 "살아 계신"자라 함은, 그가 환난중에서 성도들
을 돌아보시는 사실을 생각케 하는 귀한 진리이다. 마 16:16, 26:63; 롬 9:29; 히
3:12; 계 4:9, 10, 15:7 참조. 그런데, 여기 "하나님의 인"을 치는 행위는 무엇을 의
미하는가? 겔 9:4-6에도 하나님께서 그 성도의 이마에 인치사 환난에서 벗어나게 하
신 일이 있는데, 거기 인친다는 것은 히브리 문자의 타우(* )자로써 표하는 일이었
다. 이 구약 사상에 의하여, 인을 치는 행위는, 이 세상의 환난에서 영적 구원을 확
보하는 복음 전도를 상징한다(딤후 2:19).
어떤 학설에 본장의 인치는 행위는, 그리스도 재림시의 성도 소집(聖徒召集)(마
24:31)과 동일하다고 한다. 그 이유는, 계시록의 이 사건도 일월 성신(日月星辰)의
대소동(大騷動)에 뒤이었고(6:12-17), 마태 복음에 기록된 성도 소집 사건도 그러하기
때문이다(마 24:29). 또 일설에 의하면, 이 날인 사건은, 그리스도의 재림에 직전(直
前)하여 회개하고 그리스도께로 돌아올 유대인들에게 대한 전도 행위를 상징한다고 한
다(롬 11:12-15). 가경 (솔로몬의 시:Psalms of Solomon 15:6)도, 세상 끝에 의인들
이 환난에서 면하게 됨을 말한다. 곧, "하나님의 표가 의인에게 구원을 위하여 인쳐
지리니 흉년, 검(劍), 사망이 그들에게서 멀어지리라"(*
)고 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가경의 이 문구를 우리 계시록의 기본이라고 생각할 수
없다. 우리 계시록의 기본은 언제나 정경 구약(正經舊約)이다. 성도 구별을 위한 인
표 행사(印票行事)는, 출 12:13; 계 9:4-6등에 벌써 나타나 있다.
해 돋는 데.- 이것은 자비(慈悲)의 방위(方位)를 이름이다(겔 43:2; 말 4:2).



계 7:3

위의 2절 해석 참조.


 


                                            ( 하나님의 인을 받음 )

 

 

 

계 7:4

이스라엘 자손의 각 지파.- 이것은, 여자적(如字的)으로 유대 민족을 가리키지 않
고 영적 이스라엘 곧, 기독 신자들을 상징한 듯하다. 이것을 그렇게 보는 이유는,
(1) 계시록은, 신약의 구원 운동의 신령한 이치들을 옛날 이스라엘의 구원 역사상 술
어로 표시하는 습관을 가진 까닭이다. 예를 들면, 계 7:4과 21:12등의 문체(文體)이
다. (2) 이 아래 기록된 지파들의 순서와 내용이 영적이어서, 그리스도께서 나신 유
다 지파가 맨 먼저 있고, 적 그리스도 지파로 간취되는 단 지파는 아주 빠졌다. 단을
적그리스도의 지파로 보는 것은 이레네오(Irenaeus)에게서 명백해졌으나, 그 전에도
많은 성경 학자들이 그리했다. 그들이 단 지파를 그렇게 보는 근거는, 창 49:16-27;
신 33:22; 렘 8:16에 둔다. 안드레아(Andreas)는 계 16:12을 해석함에 있어서, 적그
리스도가 파사(Persia)에서 난다고까지 하였으니, 그 이유는, 그가 파사를 단 지파의
후예(後裔)라고 생각한 까닭이다.
십 사만 사천.- 로마여(Lohmeyer)는 이것을 가리켜 계시용 숫자 곧, 종교상 완성수
혹은 만수(滿數)라고 하였다(Die Zahl ist apokalyptisch d. h. ihr Sinn ist nur der
religiosen Vollendung und vollstandigkeit.-Offenbarung, p. 69). 크레다너스
(Greijdanus)는 이 숫자를 다음과 같이 풀었다. 곧, 한 지파에서의 12,000은, 12에다
가 10으로 세번 곱한 것이고, 10이란 수는 만수이다. 이렇게 성립하는 12,000을 다시
종교적 의미 있는 12로 곱하면 144,000이 된다. 그러면 이 숫자의 의미는, (1) 하나
님의 속수와 세상의 속수와의 연합 곧, 임마누엘(神人同在)의 수(선민수)인 12를 기본
으로 하고, (2) 그것을 10이란 만수로 증식(增殖)시켰으니, 하나님께서 하실 수 있는
대로 많이 구원하시는 대긍휼(大矜恤)에 의한 이상적 충만(理想的充滿)의 수(數)이다.



계 7:5-8

이 귀절들에는 이스라엘의 각 지파 이름이 열거된다. 그 이름들의 순서와 내용은
영적 의미를 가진다. 그러므로 그것들은 여자적으로 유대의 12지파를 가리켜 말하지
않는다. 로마여(Lohmeyer)는 말하기를, "이스라엘"이란 칭호는 계시록(2:9, 3:9)에서
만 아니고 원시 기독교인들이 영예롭게 여기는 방명(芳名)이었다(롬 2:29; 갈 3:29,
6:16; 빌 3:5; 벧전 1:1; 약 1;1). 그리고 12지파의 이름들도 역시 그러하였던 것이
다(Vielmehr ist der Name Israel nicht nur in der Apc.2:9, 3:9, sondern im
gasnzen Urchristentum ein Ehrentitel der urchristlichen Gemeinschaft Rm. 2:29,
gal. 3:29, 6:16, Ph. 3:3, 1 Peter. 1:1, jac. 1:1. Auch die nennung der
Stammsnamen-diese Namen sind Iangst eine ideal Grosse geworden.-Offenbarung, p.
69). 그러므로 원시 기독교에서는 이런 이름들로써 교회를 상징하기 좋아하였다. 여
기 기록된 방식으로 보아, 이 지파들은 다음과 같이 영적 의미를 보인다.
유다...르우벤.- "유다"는 그리스도께서 나신 지파이므로 초두에 놓이고, "르우벤"
은 장남(長男)인데도 불구하고 뒤떨어졌다. 여기 "에브라임"은 제외됐으니, 그 이유
는, 그 지파가 교만했던 까닭인 듯하다(삿 8장, 12장).
"단"- 도 여기 없으니, 그 이유는, 그 지파가 적그리스도 지파로 알려진 까닭인 듯
하다. 위의 3절 해석 참조.



         ( 인맞은 십사만사천명과 흰두루마기를 입은 수많은 사람들 )

 

 

계 7:9

본절은 무수한 대중에 대하여 말하였으니, 이 대중은 다른 이들이 아니고, 위의
144,000이라는 수로 상징된 동일한 사람들을 가리킨다. 이것이 이방인 사자들만을 가
리킨다는 학설이 있으나, 그것은 이연(理撚)치 않다.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이 문구는 셀 수 없는 무리의 유래를 말한다.
이 엇구들의 의미는, 5:9의 해석에서 참조하여라.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 크레다너스(Greijdanus)는 말하기를, 이것은
사람도 셀 수 없고 천사도 셀 수 없는 대중의 성도군(聖徒群)이란 의미라고 하니 일고
(一考)를 요한다. 구원 받은 자들의 수는 너무도 많으므로 누구나 셀 수 없으되, 하
나님께서는 그 무리를 개인 개인으로 아신다(요 6:37-39).
"흰 옷"- 은, 14절이 밝혀 줌과 같이 성도가 그리스도의 보혈로 사죄 받고, 또 칭
의(稱義)의 영광으로 빛나는 것을 가리킨다.
종려 가지를 들고.- 요 12:13 참조. "종려 가지"는 승리의 상징보다 기쁨의 상징
이다. 이것을 승리의 표호로 사용한 것은 가경 문학(假經文學)(1 Macc. 13:51)에 있
다.



계 7:10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이 말씀은, 천상
성도(天上聖徒)들의 신앙 고백이니, 과연 광명한 전 세계의 신조가 역시 어두운 이 세
상의 우리의 신조(信條)와 같은 것이다. 우리는 캄캄한 밤에 등불을 가진 격이다.
구원은, 인간의 공로로써 매수(買收)할 수 있는 염가(廉價)의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
님의 그 독생 성자(獨生聖子)의 피로야 살 수 있는 보배로운 것이다. 하나님은 그런
값진 구원을 그 믿는 자들에게 거져 주신다.



계 7:12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능력과 힘.- 이 엇구들의 의미에 대하여는,
5:12 해석에서 참조하여라. 이 찬송의 7수는 완전성을 의미한다. 이 칠언 찬송(七言
讚頌)에서 주목되는 바는, (1) 헬라 원어 대로는 그 칠언이 모두 다 관사("그"라고 역
술됨)를 소유한 것이다. 여기 "그"라는 관사들은 그 말들에 대하여 가해 준 의미가
있다. 일례를 들어 설명하면, "찬송"이란 말에 대하여 "그 찬송"이라고 되어 있으니,
그 의미는, "찬송이면 그 무슨 찬송이든지 다"라는 것이다. (2) 그리고 그 칠언 찬송
은 "아멘"으로 시작하여 위의 흰옷 입은 성도(白衣聖徒)들의 구원 찬송에 화답한 것이
다. 찬송은, 이렇게 화답하는 정신을 금과옥조(金科玉條)로 하는 것이다. 영적 화답
이 없는 찬송은 생명 없는 것이다. 로마여(Lohmeyer)는, 이 찬송이 주님의 우주 창조
와 및 그 유지에 대한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 찬송 역시 구속에 대한 것이라고
못할 리는 없는 듯하다.



계 7:13

장로 중에 하나가 응답하여.- 여기 "응답"하였다는 이유는, 사도 요한이 무언 중에
의문(疑問)을 가지고 있었던 까닭이다. 영계(靈界)에서는 이처럼 말로 발표되지 않은
생각의 움직임을 아는 사실이 여기 드러난다.
이 흰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뇨.- 사도 요한의 의문을 해답 하려는
장로는 질문식으로 말한다. 이런 방식의 교수(敎授)는, 배우는 자로 하여금 깨닫게
하는데 매우 효과적이다.



계 7:14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 여기 "큰 환난"이란 말은, 헬라 원어로 테스 들립
세오스 테스 메갈레스(* )니, 알포-드
(Alford)는, "그 환난, 그 큰 것"이라고 번역하여 그 문구에 크다는 형용사의 강세적
용법(强勢的用法)이 있음을 지적하고, 이 환난은 세상 끝날에 있을 특대(特大)의 환난
을 가리킨다고 하였다. 그러나 크레다너스(Greijdanus)는, 이것을 이 세상 환난들의
통칭(通稱)이라고 하였다. 그는 말하기를, "성경은, 우리의 이 세상 생활 다시 말하
면, 땅 위의 생활을 가리켜 신자들과 교회들에 대하여는, 비애(悲哀), 핍박, 궁핍, 위
험이다"라고 한다. 창 5:29, 47:9; 시 90:10; 요 16:33 참조.
죄와 부패와 옛성질(롬 7:18, 24; 마 26:41)과 세상과(요 15:19; 요일 3:14, 5:19;
행 14:22), 마귀의 왕국(엡 2:2, 6:10,11; 벧전 5:8; 요 12:31)은, "모든 신자를 넘어
뜨리며 온 교회를 부패케 한다"고 하였다(Openbaring, p. 175). 천국의 성도들은, 이
세상의 환난, 특히 세상 끝의 대환난(8:7에서 부터 기록될)에서 영적으로 피해 없이
구출(救出)되어 통과한 자들이다.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이 말씀을 보면, 성도가 구원을
얻는 것이 순연히 사죄(赦罪)로 인한 것이고 자기의 공적(功績)으로 인한 것이 아니
다. 죄를 어린 양의 피로 씻었다 함은 곧 사죄의 의미 밖에 다른 뜻을 가지지 않는
다. 인간은 사죄의 문을 통해서만 구원을 얻는다. 그 이유는, 인간은 언제나 누구나
죄인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전적 부패에 대하여 우리는 일고(一考)를 요한다.
(1) 칼빈(Calvin)이 이른 바, "인간의 전적 부패"는 바울 사도의 교훈(롬 3:20)에서
만 아니라 예수님의 교훈에서 나온 것이다. 스테븐스(G. B. Stevens)는, 예수님의 인
생관을 바울이나 칼빈의 것과 다르게 본 셈이다. 그것은 예수님의 본심(本心)을 오해
한 것이다. 칼빈은 바울에게서 뿐 아니라 예수님에게 올라가서, 그의 인생관을 얻은
것이다. 예수님께서 그 성역 출발(聖役出發)에 있어서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
1:15)고 하셨으니, 그것은 사람들 중에 어떤 자들 만이 유죄(有罪)한 고로, 그들은 회
개해야 된다 함이 아니다. 이 말씀은 요 3:3의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
라를 볼 수 없느니라"는 말씀과 같은 것이다. 여기 "사람"이란 말은, 헬라 원어로 티
스(* )니 "누구든지"란 뜻을 함축하는 부정 대명사(不定代名詞)이다. 천국의 문
앞에서는, 누구나 다 죄인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죄인을 상
대로 오신 것이다. 바빙크(Herman Bavinck)는 말하기를, "예수님께서 그 성역 초두
(聖役初頭)에 이 세상 사람을 상대로 하여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하신 것을 보아
서, 예수님께서 인간의 전적 부패(全的腐敗)를 염두에 두신 것이다"라고 하였다
(Grerformeerde Dogamatiek, * . p 63). 예수님께서, 하나님만이 선하신 분이라고
역설하셨다(마 19:17).
(2) 스테븐스(Stevens)는, 마 9:37의 "추수할 것은 많되"라고 한 말씀을 보아서 예
수님께서 그 목전(目前)의 모든 사람들에게 흑종의 가능성(義의싹)을 인정하신 것이
분명하다고 하였다. 이것은 예수님의 본심을 전연 오해한 해석이다. 예수님이 인간
들에게서 무슨 가능성을 발견하셨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그는 그들
에게서 가능성보다는 불가능성, 곧, 그들이 죄로 몹시 상한 것을 보시고 긍휼히 여겨
구원코자 그렇게 말씀하셨다. 스테븐스는 다시, 마 18:3에 있는, "돌이켜 어린 아이
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하신 말씀을 생각하였
다. 그는, 예수님께서 "어린 아이들"을 천국인의 표본으로 보셨으니 만큼, 인휴의 전
적 부패란 것은 예수님의 염두에 없었다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진정코 "어린 아이
들"을 천국인의 표본으로 보셨는가? 과연 그리하셨다. 그러나 그것은 어떤 의미의
표본이 된다는 말씀인가? 그들에게는 도무지 교정(校正) 받아야 할 죄과가 없어서 그
렇다는 말씀인가? 그것은 결코 그렇지 않다. 어린이들에게도 부패성이 있고, 교정
받아야 할 행동들이 많음은 상식으로도 말할 수 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천국에 대
한 비유니, 어린 아이들은 부모를 믿는 신뢰심(信賴心)에 부하다는 것을 가리킬 뿐이
다. 어린 아이들의 신뢰심은 특별 은총의 결과가 아니고 자연 은총(自然恩寵)의 결과
니, 그것이, 그들로 구원 받게 하는 조건은 못된다. 구원 받게 하는 조건은 오직 특
별 은총 관계의 것이다. 어린 아이들이 구원 받는 것도 예수님의 공로로만 되는 것이
다.



계 7:16

다시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 아
니할찌니.- 이것은, 이스라엘의 위험한 광야(열대 지방)생활 체험을 염두에 두고 한
말씀이다(렘 2:6). 광야에는 음식물이 핍절하고 일광(日光)의 열이 심하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입어,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었고, 반석에서 나오는 물
을 마셨으며, 또 낮이면 하나님의 구름 기둥으로 인하여 일광의 열을 면하게 된 것이
다. 그런데 이런 광야는 이 세상을 상징한다. 천계(天界)에는 이 세상에서와 같은
고생이 없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거기 간 성도들을 장막으로 가리우듯이 친히 보
호하시기 때문이다.



계 7:17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 양.- "보좌 가운데"란 말씀은, 하나님의 보좌와 이십 사 장
로들과의 중간에 있는 중앙 위치를 가리킨다. 그리스도의 이 좌석(座席)은 그의 중보
자 직(仲保者職)을 상징한다. 이렇게 그리스도는 하늘에서도 중보자로서 그 성도들을
목양(牧養)하시니 그들에게 부족함이 없다. "여호와께서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
이 없으리로다"(시 23:1).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러라.- 사 25:8-10 참조. 위의 9-17 절 말씀은, 믿는
영혼이 들어가는 천국(死後에 가는 곳)에 있을, 복된 생활을 묘사한다. 본장 설교(구
원에 대하여)를 참조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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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 8:1

하늘이 반시 동안쯤 고요하더니.- "반시 동안쯤 고요함"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여
기에 대한 여러가지 의견이 있다. (1) 빅토라이너스(Victorinus)는, "성도들이 장차
누리리 영원한 안식의 징조"라고 하였고(Semi hora nitium puictis aeternae), (2) 크
레다너스(Greijdanus)는, 이것이 "장차 화벌(나팔 재앙)의 두려움을 암시한다"고 했다
(En dat wijst op het verschrikklijke van hetgeen te wachten staat)(습 1:7 참조).
(3) 스웨테(H. W. Swete)는 말하기를, "이것은 다만 잠간 동안 하나님의 계시가 중단
된 것을 가리킨다"하고, (4) 촬스(Charles)는, 이것이 앞으로 나올(3, 4)기도를 위한
정숙(靜肅)을 의미한다고 하였다. 그는, 이 견해를 성립시키기 위하여, 다섯째 하늘
에서 봉사하는 천사의 무리가 밤에는 찬송하지만 낮에는 이스라엘 백성의 찬송이 상달
되게 하기 위하여 그들(천사의 무리)은 고요히 있다고 하는 것이다. 우리 본문대로
는, 성도들의 기도가 상달되기 위하여 천사들의 찬송이 중단되고 고요하다(I.C.C
Commentary, Revelation, p. 223-224). 기도하는 시간에 모든 사람이 조용할 것은,
구약도 가르치고 있다(대하 29:29). (5) 릭날다(Ringnalda)는 말하기를, "이것은, 이
세상 종말에 일어날 일을 앞에 놓고 있을 수 밖에 없는 최대의 긴장을 가리킨다"라고
했다. 그는 말하기를, "이것은 종말의 시작이다. 지금은 마지막 날이 온다. 그리스
도께서 온 세상에 왕권 실행을 시작하려고 하신다"고 했다(Het Koningschap Van
Christus, p. 157). (6) 어떤 설에 의하며, 이 고요함은 죄인에게 대한 하나님의 은인
적(隱忍的) 긍휼(矜恤)의 상징이라 한다. 하나님께서는 죄인이 죽는 것을 기뻐하시지
않는다(겔 33:11). 그리하여 그는 회개치 않는 죄인들을 향하여 오래 동안 은인 침묵
하신다. 그것은, 회개하는 자에게는 생명에 이를 좋은 기회가 되지만, 회개치 않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진노를 쌓는 무서운 기간이 되고 만다. 위의 여러가지 의견들 중,
네째 것이나 여섯째 것이 옳은 것 같다.



 

                                  ( 일곱번째인 : 일곱천사, 일곱 나팔 )

 

 

계 8:2

하나님 앞에 시위한 일곱 천사.- "천사"에 대한 말은 사 36:9에도 있으나 그들의 7
수는 여기서 처음 나타난다. 모팟트(Moffatt)는 이것이 가경(假經)(Tobit 12:15)에서
유래된 듯이 말한다. 위의 토빗 가경에는 말하기를, "나는 성도들의 기도를 가지고
지극히 거룩한 자의 영광 앞에 들어가는 일곱 천사들 중의 하나인 라파엘이다"라고 하
였다. 그러나 계시록에 있는 일곱 천사라는 문구가 반드시 가경에서 유래되었다고 함
은 억측(臆測)이다. 여기 천사의 7수는 일곱 나팔과 관련되어 사용되었으며 또 상징
적 의미를 가졌을 터이다. 그러나 가경 문학의 7수는 여자적 의미(如字的意味)를 가
진다.



계 8:3

다른 천사.- 이 천사의 하는 일이 중보자(仲保者)의 행위와 같은 고로 그를 그리스
도로 보는 학자가 있다. 그러나 여기 이 천사는 자기의 공로를 가지고 사역하는 중보
자에 미치지 못한다. 이 천사는
"많은 향을 받았"- 다고 했으니(* ), 그 "향"이 자기의 것이 아니다.
"향"(贖罪의 功勞)은 그리스도 뿐이시다. 그러므로 이 천사는 그리스도 앞에서 수종
드는 자이다(계 1:1).
"많은 향을...성도의 기도들과 합하여.- 크레다너스(Greijdanus)는 말하기를, "기
도 그것은 하나님에게로 오를 아무런 힘도 없다"라고 하였다. 기도는 하나님께 올라
갈 수 있게 하는 그리스도의 공로를 받아야 한다. 그런데 이 기도는 어떤 기도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함이니, 소극적(消極的)으로는 죄와 및 천구구의
공적(公敵)을 처분하여 버리시는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기를 구함이다(마 6:33; 눅
18:7; 계 6:10 참조). 옛날부터 성도들의 이런 기도들은, 하늘에 오르고 또 오르다가
이제 일곱 나팔 재앙으로 말미암아서 갚음을 받는다. 그러나 우리 본문에 "많은 향
"(뒤미아마타 폴라=* )이란 말을 보아서 성도들에게서
먼저 많은 기도가 올라가야 한다. 하늘은 성도들의 많은 기도가 오를 동안 고요하다
가(계 8:1), 그 위에는 하나님의 진노로써 크게 요란하게 될 터이니, 곧, 일곱 나팔
소리에 따라서 떨어지는 무서운 재앙들이다.



계 8:4

이 말씀에 있어서 기도(祈禱)보다 향연(香煙)이 그 주동 역할을 하면서 기도들이 하
나님의 보좌 앞으로 올라가게 해 준다. 5:8에서는 성도의 기도를 향이라고 했으니,
그 만큼 기도의 성립 요소는 향(그리스도의 공로)이기 때문이다.



계 8:5

단 위의 불을 담아다가 땅에 쏟으매.- 제단의 불은 하나님의 진노를 의미한다. 그
러므로 여기 "단 위의 불을 담아다가 땅에 쏟음"은, 땅 위에 회개하지 않은 죄인들을
멸하는 하나님의 진노가 내림을 상징한다. 이 점에 있어서 우리의 주의를 끄는 것은,
기도와 향을 담았던 금화로(金火爐)가 이제는 진노의 불을 담는데 사용된 사실이다.
이 화로는, 한편 성도에게는 하나님의 호의(好意)를 끄는 그릇이고, 다른 한편 천국의
공적(公敵)에게는 진노를 담아 붓는 그릇이 된다. 이것은 이상한 대조이다. 성도에
게 생명의 냄새가 되는 것이, 멸망 받을 자에게는 사망의 냄새가 된다(고후 2:14-16).
뇌성과 음성과 번개와 지진.- 이것은 대부분 하나님의 진노를 상징한다. 여기 "음
성"은 인간이 지각(知覺)할 수 있게 부르짖는 회개의 재촉인 듯하니, 그것만은 아직도
하나님의 자비의 표시인 듯하다. 그러나 우리는 이 점에 있어서 확실성 있는 결정은
못짓는다. 그 이유는, "음성"도 역시 무서운 심판의 소리일 수 있기 때문이다(시 29
편). 4:5 해석 참조.


                                   ( 처음 여섯개의 나팔심판들 )

계 8:7

나팔을 부니.- 나팔은 전쟁 시작의 경보(警報)를 의미한다. 여기 천사의 나팔은
땅(교회와 반대 되는 순연한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의 발동을 선언한다. 여리고
성은 이런 나팔 소리로 인하여 무너졌다. 세상 끝에도 이런 의미의 천벌(天罰)이 있
을 것이다(렘 4:19 참조).
피 섞인 우박과 불.- 출 9:18-26을 보면, 천국의 원수 애굽에 이와 비슷한 천벌이
내렸다. 그러나 "피"에 대한 말은 거기 없다. "피"는 그 우박 재앙으로 인한 사상자
(死傷者)들이 많을 것을 암시한다. 이 문구는 여자적으로 해석될 말씀이 아니고, 천
벌로 인하여 일어난 전쟁을 상징한다. "우박과 불"은 하나님의 진노의 상징이다. 사
28:2-7, 30:30; 시 18:13; 겔 13:13, 38:22 참조.
삼분의 일.- 슥 13:8,9; 겔 5:2 참조. 혹설에 "3"은 하나님의 속수(屬數)니, 이
재앙은 하나니께서 친히 보내신 고로, 그 재앙의 결과(3분의 1 사라짐)를 이 숫자로
말한 것이라고 한다. 다른 학자들은 말하기를, "로마는 고트족과 반달족의 침략으로
인하여, 동부, 중부, 서부의 3부분으로 갈리어 있었는데, 계시록 여기서 3분의 1은 이
지역(地域) 중의 하나를 가리킨다고 한다. 어쨌든 이 숫자는 이 세상의 한 부분을 벌
하신다는 것을 가리키기 위하여 여기 사용되었다. 그가 이 재앙에 있어서 목적물의 3
분의 1씩만을 벌하셨으니, 이는 그의 긍휼의 덕에 의한 것이다. 이 재앙을 여자적(如
字的)으로 보는 학자들은, 다음과 같은 사실에서도 하나님의 긍휼을 본다. 곧, 하나
님께서 이 재앙에서 사람을 벌하시지 않고, 자연계를 벌하시는 사실이다.
땅, 수목, 푸른 풀.- 혹설에 이것들은, 여자적으로 위의 우박 재앙으로 인한 피해
물(被害物)들을 가리킨다고 한다. 그러나 어떤 학자는, 이것들이 장래의 천벌(天罰)
에 참예할 사람들까지 상징한다고 한다. 곧, "땅"은 죄인들의 거처(居處)요, "수목"
은 권세 있는 자들이고(렘 7:20, 17:8; 겔 31:3; 단 4:20-22), "푸른 풀"은 평민을
가리킨 것이라고 한다(사 40:7). 혹설에, 이 우박 재앙은 전쟁의 상징으로서 주후
395년에 로마의 영토에 침입한 고트족(Goths)의 약탈을 예언한 것이라고 한다. 그러
나 이 재앙에 대한 바른 해석은, 본장 주석의 머리말에 있다.



계 8:8,9

불 붙는 큰 산과 같은 것이 바다에 던지우매.- 이 문구에 있어서 우리가 여기서
"같은 것"이란 말을 주의해야 된다. 우리는 글자 대로도 이런 일들이 있을 수 있음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 계시의 요지는, 이 엇구의 상징적 의미에 있다. 주후
1570년에, 밧모섬 있는 에게(Aegean) 바다에 대화산(大火山)이 터져서 그 20마일 주위
의 해수(海水)는 피빛 같은 흙 빛이 된 일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주후 1707년에는
그 바다에 큰 암석(岩石)이 솟아 나오면서 물이 독기(毒氣)를 띤 까닭에 항만(港灣)에
있는 모든 고기들이 다 죽었다고 한다(Moffatt). 땅 위에 이런 재변(災變)이 있을 수
있으나, 우리는 그런 자연계의 흉조(凶兆)가 이 예언의 목표한 것이라고는 하지 않는
다. "불 붙는 큰 산과 같은 것"은, 차라리 천국의 원수로서 천벌 받는 나라이다. 고
대에는 이것을 바벧론이라고 하였다(렘 51:25). "바다"는 열국을 상징한다(17:15).
피가 되고.- "피"는 죽음을 상징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적기독국 애굽을 벌하
실 때에 사용하신 재앙이었다. 그러므로 이것은, 한편 412-450년에 훈스(Huns)의 침
략으로 인하여 로마가 도탄 중에 빠진 것 같은 사실을 예언한다는 학자들이 있다. 비
록 문자적으로 물이 피가 된 일은 없다 해도 그 악한 나라가 열국(바다)중에서 파멸되
어 그 국민들이 죽게 되면 그것이 곧 피가 되는 일이다. 이 예언이 로마의 멸망 사건
으로 성취되었다고 하더라도 거기서 남김 없이 다 이루어졌다고 우리는 생각하지 않는
다. 이 예언은, 역사상에 여러번 적기독 국가들의 멸망에서 그 부분적 성취를 본다.
그러나 그 본격적 성취는 나중에 온다. 예언이란 것은 단회적(單回的) 성취로 이루어
지는 것도 있지마는, 점층적(漸層的)으로 응하다가 그 절정적 성취에 이르는 것도 있
다. 이것은 마치 멀리서 큰 산을 바라볼 때 한개의 산을 볼 뿐이나 가까이 가보면 그
큰 산을 바라볼 때 한개의 산을 볼 뿐이나 가까이 가보면 그 큰 산에 가기 전에 여러
작은 산들이 있음을 발견함과 같다.
"생명 가진 피조물들...배들"- 은 열국 가운데 있는 모든 소유물들을 가리킨다.
열국 가운데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벌을 받게 될 때에는 모든 다른 피조물들도 따라
서 그렇게 되는 법이다. 습 1:3; 욘 4:11 참조.
혹설에, "불 붙는 큰 산과 같은 것"은 주후 412-450년에 훈스족(Huns)의 침략으로
인해서 도탄(塗炭) 중에 빠진 로마를 가리킨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 예언은 로마의
멸망 사건으로 다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근대와 현대에도 적 기독 국가들이 멸망한
일이 있으니, 이것을 명심하고 생각해야 된다.
삼분의 일.- 위의 7절 해석 참조.



계 8:10

횃불 같이 타는 큰 별이 하늘에서 떨어져.- 이것은 교역자가 타락하여 하나님의 말
씀을 혼잡케(고후 2:17) 하므로 많은 영혼들을 죽이게 된것을 상징한다. 본장 해석의
머리말 참조하여라. 혹은 이것을 이단자 아리우스(Arius)라 하고, 또 혹은 펠라기우
스(Pelagius)라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역사상에 나타나는 이단 운동들을 모두 다 가
리키는 동시에, 특별히, 이 세상 끝에 일어날 이단자들을 가리켜 말한다. 주님의 재
림이 접근해 올 때에 땅 위에는 대배교(大背敎)가 있을 터인데(살후 2:307), 이 일을
위하여 이단 교훈이 먼저 성한다.



계 8:11

이 별 이름은 쑥이라.- 히 12:15에, "쓴 뿌리"란 것이 곧, 거짓 선지(僞先知)를 가
리킨다. 그러므로 여기서 "쑥"이란 말은, 이 떨어진 별이 거짓 선지의 상징임을 명백
히 한다.
물들이 쓰게 됨을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더라.- 참된 선지 모세는 쓴 물을 달게 하
였으나, 그와 반대로 거짓 선지는 물을 쓰게 만든다. 물은 영혼을 살리는 복음을 상
징하는데(유 1:12; 요 7:8; 계 22:17), 그것을 쓰게 만든다 함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케 하는 것을 가리켜 말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대로 순전하게 전파되어야 그것
을 받는 자들이 영생한다. 그러나 그것에 다른 교훈을 섞어 변경시키면, 그것의 효과
는 상실(喪失)된다.



계 8:12

본절의 일월 성신의 3분의 1이 빛을 잃는 그것은, 글자 대로도 될수 있으나(출
10:21, 22), 보다도 상징적 의미를 가진다. 사 13:10을 보면 바벧론이 메대(Msedes)
로 말미암아 망하게 될 일에 대하여 일월 성신이 빛을 잃는다는 상징으로 예언되었다
(사 13:13 참조).



계 8:13

독수리.- 이것은 하나님의 심판을 상징한다. 신 28:49; 호 8:1; 합 1:8; 렘
48:40; 겔 17:3; 마 24:28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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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 9:1

하늘에서 땅에 떨어진 별 하나.- 이것은, 타락한 천사 곧, 마귀를 상징하든지 혹은
마귀의 사자(사람으로서 마귀의 사역을 하는 자)를 상징한 것이다(눅 10:18 참조).
그것이 "하늘에서 떨어졌다"는 말을 보니, 분명히 타락한 실존이다. 크레다너스
(Greijdanus)는 말하기를, "이것은 사단과 및 그놈의 타락한 사실과 암흑 세계에 있어
서의 그놈의 권세를 가리킨다"라고 하였다(Daarom kan hier ook van Satan en zijn
zondeval‎, gesproken worden, en van Zijne heerschappij in her rijk der
duisternis, na dien val.-Openbaring, p. 195). 크레다너스의 이 해석은 그리스도
재림 직전에 있을 사단의 어떤 타락을 의미하지 않고, 그 본래의 타락을 가리키는 것
이다. 스콧트(Scott)는 이것이 주후 7세기 초엽에 일어났던 자인, 모하멧트 혹은 그
의 운동을 가리킨다고 한다. 그러나 이 귀절들이 계시하는 사단의 운동은 땅 위의 인
류 생활 말기에 있을 사실이다. 아브라함 카이퍼(A. kuyper)도 이런 의미로 말하였다
(The Revelation of St. John, p. 99).
무저갱의 열쇠를 받았더라.- 하나님은 마귀를 이용하신다. 마귀가 활동하기는 하
나 하나님이 허락하신 한도 안에서 할 뿐이고 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일에 이용
혹은 전용(轉用)될 뿐이다. 그러므로 스콧트(Scott)는 말하기를, "우리는 하나님이
모든 교만한 원수(마귀)를 코 꿰어 잡으시고 또 자갈 물려 붙잡으신 사실에 대하여 기
뻐할만하다"(We may rejoice that the Lord has a hook in the nose and a bridle in
the mouth of every boasting enemy-)라고 하였다.



계 9:2

풀무의 연기 같은 연기.- 이것은 그 아래 말을 보아서 햇빛과 공기를 어둡게 함은,
악한 사상을 세상에 퍼뜨려 진리를 흐리게 함이요, 황충의 무리는 이 악한 사상을 가
지고 모든 비성도(非聖徒)들의 영혼을 멸망케 하는 군대인 동시에 겸하여 거짓 선지의
무리를 상징한다. 아브라함 카이퍼는, 특별히 황충의 무리가 구약에서 군대를 상징한
것인 만큼, 여기서도 그렇다고 역설한다. 그것들이 꼬리로 인간을 해한다 함(1-절)
은, 그것들이 비진리로써 거짓 선지자처럼 사람들을 해롭게 한다는 말이다(사 9:15).
해와 공기가 그 구멍의 연기로 인하여 어두워지며.- 크레다너스(Greijdanus)는, 여
기 "해와 공기"는 하나님의 계시하신 복음, 혹은, 진리를 상징한다고 하였다. 그러
면, 세상 끝날이 가까울 때에 무서운 군세(軍勢)를 가지고 온 세상에 악 사상을 퍼뜨
리는 운동이 일어나 하나님의 교회의 복음을 흐리게 할 것이다.



계 9:3

전갈의 권세와 같은 권세.- "전갈"은 악한 세력을 상징하는데, 그것이 사람을 쏘면
그렇게 붓지는 않지만 사흘 동안 아리며 아프다고 한다. 이것은 인간을 징계하는데
사용된 독한 동물이다(왕상 12:11, 14: 겔 2:6; 눅 10:19).



계 9:4

풀이나 푸른 것이나...해하지 말고 오직 이마에 하나님의 인 맞지 아니한 사람들만
해하라 하시더라.- 어떤 설에, 모하멧트의 군대에 속한 장교 에제드(Yezed)가 행군(行
軍)할 때에 명하기를 수목(樹木)이나 곡초(穀草)를 해하지 말라고 한 일이 있다고 한
다. 그리고 모하멧트의 군대들이 침략한 곳은, 당시 기독교가 부패한 지방(이마에 인
맞지 아니한 자들?)이라고 한다(Thomas Scott). 이 다섯째 나팔 재앙이 모하멧트교의
군사적 침략을 가리킨다는 학자들은 위의 사실들에도 그 학설의 근거를 둔다.
아브라함 카이퍼(A. Kuyper)는, 이것을, 큰 적그리스도가 나타날 준비로 있을 수 있
는 사단의 역사라고 한다. 곧, 인류 사회의 말기에 일어날 배교 운동을 가리킨다는
것이겠다. 살후 2:3-12 참조. "이마에 인 맞지 아니한 사람"은 하나님의 택한 자로
간주되지 않는 자를 가리킨다. 이 점에 대하여 7:1-8을 대조하여라. "해하라" 함은
육체적 해(害)를 이름이 아니고(6절 참조), 영적 화(禍)를 당하게 함이다. 이런 영적
해를 당하는 자는, 그 영혼이 망하게 될 것이다.



계 9:5

다섯 달 동안 괴롭게만 하게 하시는데.- 여기 5개월은, 날수로 150일인데, 계시록
의 날수(日數)를 연수(年數)의 상징으로 잡는 학자들은, 이 기간이 150년을 의미한다
고 한다. 스콧트(Scott)는, 이 연수(150년)가 바로 모하멧트교 군대의 침략 연수라
하였다. 모하멧트는, 612년에 출세하였는데, 그 운동이 150년 후에 최고도에 달하여
쇠퇴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 연수 계산을 정확하다고 생각하기 어
렵다. 모하멧트교 운동이 확실히 150년 동안만 성하였던가? 이 예언이, 설혹 모하멧
트교 군대의 침략 운동에서 어느 정도 성취되었다고 하여도, 그것은 부분적 성취이고
그 성취가 끝난 것은 아니겠다. 이 예언의 최후적 성취는 세상 끝에 일어날 배도(輩
道) 운동일 것이다.
여기 "다섯 달 동안"이란 것은, 황충이 사는 기간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라고 하나,
그보다도 마티아스 리찌(Mathias Rissi)가 말한 것과 같이, 8장에서는 재앙 받은 면적
이 부분적이라(3분의 1이라)고 하는데, 병행(竝行)하여 여기서는 재앙 받는 시간이 부
분적임을 가리키는 것 뿐이다(Dazu ist eine sachliche Parallele zu beachten. Mit
diesem Ausdruck soll offensichtlich etwas Aehnliches ausgesagt werden wie mit
dem, im Zusammenhang der selben Plagenreihe erscheinenden "Drittel" (vgl. 8,
7-13; 9, 18): Der"Drittel" bezeichnet eine raumliche Begrenzung der Plagen, die
funf Monate bezeichnen eine zeitliche. Zeit und Geschichte in der Offenbarung
des Johannes, p. 32).



계 9:6

사람들이 죽기를 구하여도 얻지 못하고.- 이 말씀을 보면, 그 무저갱에서 올라온
재앙은 바로 지옥 형벌의 모형이다. 지옥 형벌은 죽음보다도 무서운 것이다. 이것
은, 이 세상 끝에 회개하지 않는 자들이 받을 해독이다. 곧, 무언 중에 영혼이 깊이
빠지는 심한 고통이다. 하나님께서는 마귀를 따르는 자들로 하여금 그 마귀의 손에서
재앙을 받게 하신다. (1) 그러므로 마귀를 위하는 자는 마귀로 말미암아 복을 받지
못하고 화를 받는다는 교훈이 여기도 있다. (2) 그들이 "죽기를 구하였다"고 하니 그
들은 낙심 절망 상태에 빠진 자들이다. 하나님의 계시 (성경)를 믿는 택한 백성은 그
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평강을 누리나 택함을 받지 못하여 마귀로 더불어 어두움
에 처한 자들(2절)은 절망 상태에 있게 되며, 장래의 소망과 기쁨이 없다
(Greijdanus).



계 9:7-11

황충들의 모양은 전쟁을 위하여 예비한 말들 같고.- 황충이 군가(軍馬) 같이 생겼
다는 것은, 일찌기 요엘 선지도 말한바 있다(요엘 2:4). 군마는 힘 있게 속히 달리는
것이 그 특성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광범위로 빨리 뻐치는 배교 운동을 상징한다.
금 같은 면류관 비슷한 것을 썼으며.- 이것은 비진리 운동(이단)이 일시 승리하여
휘날리는 기세(氣勢)를 의미한다. 금 같으나 실금(實金)은 아니니 그것은 영구성이
없다.
사람의 얼굴 같고.- "사람의 얼굴"은 지능의 표호(表號)이니, 마귀의 세력은 무모
(無謀)하게 나오는 것이 아니고, 피상적(皮相的)일 망정 모략이 있는 것이다.
여자의 머리털 같은 머리털이 있고.- 모하멧트의 군인들이 이런 긴 머리털이 있었
으므로 더욱 이 예언이 가리키는 대상이라고 하는 학자가 있다. 그러나 여기 남자가
긴 머리를 가진 것은 자기 지위를 떠난 것을 상징한다(고전 11:14). 하나님을 배반한
사단의 사자들에게 이런 상징적 묘사가 적합하다.
사자의 이 같으며.- 이것은, 그 무서운 군력(軍力)과 거짓 교훈을 겸병한 저 무리
가 사람들의 영혼을 해하는 잔인성을 가리킨다.
융갑이 있고 그 날개들의 소리.- 이것은 그들의 일시적 정복력을 암시하는 것이다.
"꼬리"는 거짓 선지를 상징하는데(사 9:15), 마귀의 말(마귀의 화살-엡 6:16)을 가
지고 인간의 영혼을 해함에 대하여 상징한다. 이 군대는, 먼저 인간의 육체를 해함보
다 영혼을 해한다. 다시 말하면, 그것들은, 인간의 영혼에 악한 사상을 주입(注入)시
켜 병들게 만든다.
아바돈이요...아볼루온.- 이명칭들은 둘 다 멸망시키는 자라는 뜻을 가진다.



계 9:12

첫째 화.- 이것은 8:13에 말한, 남아 있는 세 가지 화 중 하나를 이름이다. 여기
서 또 앞으로 올 화에 대하여 예고함은, 사람들로 하여금 회개케 하려는 것이다.



계 9:13

하나님 앞 금단 네 뿔에서 한 음성이 나서.- 이것은 성도가 드린 기도의 응답을 상
징한다. 제단의 뿔에는 제사장이 희생의 피를 바르나니, 이것은, 제단의 그 부분에
속죄(贖罪)의 구원 능력이 있음을 상징한다는 의미이다(레 4:25). 그러므로 여기서
음성이 나온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 공로(補血功勞)로 상달된 기도 응답이
나온다는 뜻이다.



계 9:14,15

큰 강 유브라데에 결박한 네 천사를 놓아 주라.- "천사"는, 하나님 앞에서 천지의
모든 것을 관리하는 권이 있는데(계 16:5), "유브라데강에 결박한 네 천사"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그들이 그 지대의 국가들을 가지고 인류의 3분의 1을 죽일 권세
를 받았으나, 하나님의 정하신 때가 이르기 전에는 그 일을 하지 못하게 된 처지를 의
미한다. 어떤 학자들은 이 "네 천사"들을 악한 천사들이라고 해석하기를, 이것은 네
천사들이 유브라데 지대에 네 나라를 일으켜, 침략주의를 쓰게 하여 많은 사람들을 죽
일 것을 가리킨다고 한다. 곧, 이 네 나라는, 토이기가 11세기에 세운 네개의 슐탄
국가인데 주후 1282년에 로마의 영토들을 약탈(掠奪)하기 시작하여 1672년까지 그렇게
하였다. 그 기간이 도합 391년인데, 15절의
"그 년 월 일 시"- 란 기간을 맞는다. 곧, "년"은 360일, "월"은 30일, "일"은 1
일인데 모두 391일인 바, 일수를 연수(年數)로 보는 것이 계시록의 방식이라면 이것을
391년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연대 계산은 이치에 합한듯하나, "그 연 월 일 시"(*
)의 "시"란 말을 제외했으니, 신임하기 어렵다. 그 뿐 아니라, "그 년 월 일 시"란
문구는 문법상으로 보아서 시일(時日)의 기간이 아니고 시일의 위치를 가리킨다. 알
포-드(Alford)는, 이 글귀에 있어서, "그"(* )라는 관사(冠詞)에 주의하였으니,
다음과 같다. 곧, "그"라는 말이 첫머리에 있어서 "년"이라는 말 뿐 아니라, "월",
"일", "시"에도 공통적으로 관계하고 있다. 이것은, 이 국가들의 침략 개시의 시일에
대한 하나님의 작정을 역설한다고 한다.



계 9:16

마병대의 수는 이만만.- "마병대"란 것은 글자 대로의 의미로 읽을 수 없는 것이
다. 이 아래 17절을 보면, 그것은 흑종의 무서운 병기(兵器)이다. 그리고 "이만만"
은 거대한 수(數)이다. 오늘까지 만만을 동원한 전쟁은 없다. 이것을 보아서도 이
예언의 성취는 아직 앞에 있는 듯이 보인다.



계 9:17,18

이상한 가운데.- 이 말의 헬라 원어는, 엔 테 호라사이(*
)인데, "환상 가운데"란 말이다. 그러므로 이 아랫말은, 글자 대로 읽을 것이 아니고
상징적으로 볼 것이다.(Dusterdiek).
불 빛과 자주 빛과 유황 빛 흉갑.- 스콧트(Scott)는, 토이기 침략군(위의 14절 해
석 참조)의 옷색(服色)이 이와 같았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그러나 이 예언이 그것으
로 성취의 완필을 본 것이 아니다. "자주 빛"은 심판이나 살륙을 상징하고, "유환"은
전쟁(특히 현대)의 필수품(폭발물)이다. 그러므로 이 엇구는 앞으로 있을 무서운 전
쟁을 상징한 듯하다.
말들의 머리는 사자의 머리 같고.- 성경에서 "말"(馬)은 무력(武力) 혹은 기동력
(機動力)의 상징으로 사용되어, 글자 대로의 말을 의미 하지 않은 귀절도 있다(시
20:7). "사자(獅子)"는 무자비한 정복력을 상징한다.
그 입에서는 불과 연기와 유황이 나오더라.- 이 엇구를 글자 대로 읽는 것보다도,
상징적으로 보아야 할 것은, 문체(文體) 그것이 요청한다. 글자 대로 읽는다면 이는
사리(事理)에 모순된다. "입"으로 "불"을 토하는 군마(軍馬)가 어디 있으랴? 그러므
로 이것은 명백히 폭격(爆擊), 포격(砲擊), 뇌격(雷擊), 사격(射擊)등이 발달된 전술
을 상징한다.



계 9:19

이 말들의 힘은 그 입과 그 꼬리에 있으니.- "이 말들"의 "입"으로 말미암는 전력
(戰力)과 전술(戰術)은, 윗절에 말하였다. 그리고 "꼬리"의 전력과 전술은, 사 9:15
말씀과 같이 거짓 선지의 교훈이다. 마귀의 군대가 한 때 승리하는 비결은, 그 거짓
교훈과 악한 사상을 사람의 심령에 선포하여 미혹시키는데 있다. 이 전쟁은 하나님께
서 이교국(異敎國)을 일으켜서 땅 위에 징벌을 베푸는 것이니 만큼, 그것이 한 동안
무력으로 또는 사상으로 기세(氣勢)를 얻는다.



계 9:20,21

이 재앙에 죽지 않고 남은 사람들.- 스콧트(Scott)는 이것이 토이기의 침략에서 남
은 로마 사람들을 가리킨다고 하나, 이 예언이 그것으로 성취의 완필을 본 것은 아니
다. 그것의 본격적 성취는 앞에 남아 있을 것이다.
금, 은, 동과 목석의 우상에게 절하고...살인과 복술과 음행과 도적질.- 여기 열거
한 죄목들은, 모세의 십계(十械)에 대한 위반을 가리킨다. 20절("금, 은, 동과 목석
의 우상에게 절하고")은, 우상 숭배의 죄에 관설하였으니, 이것은 하나님에게 대한 범
죄(1계-4계)를 대표한 것이다. 그리고 21절("살인과 복술과 음행과 도적질")은 사람
에게 대하여 범죄한(5계-10계)것을 관설한다. 여기에 제 5계명을 범한 죄는 제외된
듯하나, 그것은 "살인"죄에 포함되었다. 거짓 증거의 죄는 "복술"에 포함되고, 탐심
은 "도적질"하는 죄에 포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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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 10:1

힘센 다른 천사.- 이 "천사"는 그리스도 자신이라고 하나, 크레다너스(Greijdanus)
는 이것을 고급 천사(高級天使)라 하였다(In elk geval‎ is het een zeer hooge engel,
zoo als uit geheel zijne verschijning, en uit zijn doen blijkt.-Openbaring, p.
214).
구름을 입고.- "구름"은 주님과 상관되어 있는데(시 104:3; 단 7:13; 계 1:7,
14:14), 천적(天敵) 장엄(莊嚴)과 화려(華麗)를 상징한다. 이 "천사"는 중대한 사역
을 가지고 오니 만큼, 이런 천적 장엄 가운데 나타난다.
그 머리 위에 무지개가 있고.- 여기 "무지개"란 말은 과사(* )를 가졌음으로 이
말을 정역하면, "그 무지개"이다. 왜 "그 무지개"라고 하였는가? 그것은 4:3의 보좌
에 둘린 그것과 다른 일반 자연계의 무지개 곧, 우리에게 잘 알려진 그 무지개라는 말
이다(Greijdanus). 4:3의 "무지개"란 말은 관사 없이 씌었으니, 그것은 이상한 혹종
의 무지개라는 의미를 가지어 하나님과만 관련되어 있다. 이 천사에게 나타난 무지개
는, 그의 광채가 그의 구름에 반영되어 형성되었다. 이것도 그 천사가 대리한 하나님
의 구원 계약의 신실성을 상징한다. 4:3 해석 참조.
그 얼굴은 해 같고.- 마 13:43 참조. 천계(天界)의 실존들은 의롭고 성결하여 이
렇게 빛나는 얼굴을 가진다.
그 발은 불 기둥 같으며.- 출 14:19, 24참조. 이것은 그의 대현(代現)하는 하나님
의 심판의 우용을 상징한다. 크레다너스(Greijdanus)는 말하기를, "이 귀절은 천사의
위대와 영광을 가리키는 동시에 그의 지위와 사명의 위대성을 상징한다"고 하였다
(Alles spreekt in dit vers van des engels grootheid en schitering, en wijst
daarmede tevens op de grootheid en beteekenis van zijne positie, en van zijn
werk).



                                        ( 천사와 작은 두루마리 )

 

 

계 10:2

펴 놓인 작은 책.- 혹설에, 이것은 다른 책이 아니고 하나님의 오른손에 있던 심판
책(5:1)을 다시 환상으로 나타내어 보이는, "작은 책"이라고 한다. 그러나 다른 학자
들은 말하기를, "이것은 앞으로 11장 이하의 예언을 가리킨다"고 하였다. 그 천사가
이 책을 환상으로 가지고 사도에게 임한 이유는, 그로 하여금 그것을 예언해야 될 사
명을 인식케 하려는 까닭이다(11절 참조).
"바다"와 "땅"- 은, 땅 위세계의 전부를 가리키는 표현이다(출 20:4, 11; 시
69:35, 98:4, 7). 그 천사의 전하는 말(혹은 사도 요한이 받아서 전달할 11장 이하의
예언)이 이렇게 전 세계에 관계를 가진다.



계 10:3,4

사자의 부르짖는 것 같이 큰 소리로 외치니.- 여기 "부르짖는"다는 말은, 헬라 원
어로 뮤카타이(* )라고 하는데 사자의 부르짖음에 대하여 보통으로는 사
용하지 않는 말이다(벧전 5:8). 스웨테(H.B. Swete)는 말하되, "이 말 뜻은 그 음성
의 양이 심히 클 뿐 아니라, 그 어조(語調)가 매우 간절하여 듣는 자들의 주의와 경외
를 일으키는 사실을 가리킨다"고 하였다.
일곱 우뢰가 그 소리를 발하더라.- 이것은 헬라 원어의 뜻을 완전히 나타내지 못한
번역이다. 헬라 원어로 엘랄레산 하이 헵타이 브론 타이타스 헤아우톤 포-나스
(* )
인데 이것을 바로 번역하면, "일곱 우뢰들이 각기 제 소리들로 말하더라"고 할 것이다.
그러면 이것은, 이 일곱 우뢰가 각기 특색 있는 음조로 말하였다는 것이다. 시29편에
"여호와의 소리"란 말이 일곱번 사용되었는데, 계시록의 이 엇구는 그것과 관련된 듯
하다. 그런데 이 우뢰소리처럼 들리는 하나님의 계시의 실례는, 요 12:28, 29에도 있
다. 그러므로 이것은 자연적 우뢰소리가 아니고 초자연적 우뢰소리인데, 곧, 심판성
을 띤 하나님의 말씀을 그 내용으로 가진 것이다(8:5). 그런데 이 일곱 우뢰의 내용은
요한 자신만 이해하고, 기록하지는 않았으니 우리는 그것을 알 수 없다. 우리가 이 점
에 있어서 생각할 것은, 기록되지 못한 일곱 우뢰 계시가 사도 요한에게 무슨 의미 있
는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그것은 다음과 같이 생각될 듯하다. 그는 남들이 알지 못
하게 홀로 그 일곱 우뢰계시를 알고 있었으니, 그의 가슴은 확신으로 뛰고 영열(靈熱)
로 뜨거웠을 것이다. 모든 복음 전도자들은, 이렇게 남들에게 드러내지 않고 식지 않
는, 내적 보류(內的保留)의 영은(靈恩)을 가져야 한다. 고후 12:4 참조.



계 10:5,6

천사가...세세토록 살아 계신 자 곧 하늘과 그 가운데 있는 물건이며 땅과 그 가운
데 있는 물건이며 바다와 그 가운데 있는 물건을 창조 하신 이를 가리켜 맹세하여.-
"천사"는 가까워진 대심판(大審判)을 예고함에 있어서 먼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심을
지적한다. 이런 대주재께서는, 대심판을 하실 수 있고 하시지 않을 리도 없는데, 과
연 이제 멀지 않아 하시기 시작하신다는 것이 이 부분의 사상이다. 크레다너스
(Greijdanus)는 말하되, "그 천사가 저렇게 하나님의 만물 창조의 업적을 지적한 이유
는, 그의 대심판이 그 지으신 만물에 미치지 않음이 없을 것을 암시하려는 까닭이다"
라고 했다(Evenwel moet ook deze breede omschrijving dienen om aan te geven, dat
de geheel wereld, in volle uitgestrektheid, en vaar vollen inhoud betrokken is
bij hetgeen nu gezegd zal worden en dat nu de alles aangrijpende en alles
veranderende, catastrophe intreden zal.-Openbaring, p. 218).
지체하지 아니하리니.- 이것은 헬라 원어로 크로노스 우케티 에스타이(*
)라고 한다. 그 문자적 번역은 우리 한역(韓驛)의 각주(脚註)와 같이, "시간이 다시
없으리니"이다. 이 문구의 의미는, 성도의 피를 신원(伸寃)해 주실 종말적 심판이 박
도(迫到)하게 되었다는 것이니, 6:11의 말씀과 관련되어 있다. 로마여(Lohmeyer)는
이 문구를 단 12:7에 대조시켜 말하기를, "거기(단 12:7)에서 적그리스도의 나라에 대
하여 말한 것 같이, 여기서는 일곱째 나팔을 볼 때에 그 나라가 임할 시간에 대하여
관설한다"(意譯)고 하였다(* Wird Wohl durch
die betonte Beziehung auf Dan, 12:7 sicher Gestellt; Wie es sich dort um das
Reich des Antichrist handelt, so wird auch hier gesagt dass die stunde dieses
Reiches mit der 7 Posaune beginnt.-Offenbarung, p. 85). 적그리스도 나라의 출현
은, 천국의 완성적 실현의 전주곡(前奏曲)이니 만큼, 성도의 피의 신원(구원 완성)이
이르려면, 먼저 적그리스도 나라가 이른다고 할만하다.



계 10:7

하나님의 비밀이...이루리라.- 여기 "하나님의 비밀"(*
)이란 것은 하나님의 복음을 가리킨다. 복음을 왜 "비밀"이라고 하는가? 복음은 성
령을 받지 않은 자가 이해하지도 못하고 또 믿지 못하기 때문에 비밀이라는 명칭을 가
진다. 그 뿐 아니라, 복음의 내용이 심판 때에 완전히 실현되기 전에는 누구에게나
아직 비밀과 같다.



계 10:8-10

입에는 꿀 같이 다나...배에서는 쓰게 되더라.- 겔 2:8, 3:1-3; 렘 15:16 참조.
이 말씀에 대한 해석은 다음과 같다. 그 작은 책은 하나님의 말씀인 고로, 그것을 받
은 예언자는, 거기 포함된 복음의 기쁜 맛을 누린다(Greijdanus). 그것이 달고 기쁜
체험이다. 그런데 그것이 배에서 쓰다 함은 무슨 의미인가? (1) 예언자가 그것을 섭
취한 후 그대로 예언하려면 여러가지 곤난이 있다는 뜻이라 하고, (2) 그 예언의 내용
에는 적그리스도의 재앙도(13장) 포함되었으므로 성도들의 수난(受難)이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요한의 근심이 커서 고통거리가 되었다는 말이라고 한다.



계 10:11

다시 예언하여야 하리라 하더라.- "예언한"다는 말은 하나님을 대리하여 말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그 일은 설영님의 만전적 영감(萬全的靈感)을 받지 않고는 못할 일
이다. 하나님 자신의 권위를 나타내는 일은 성질상 하나님의 완전성으로 역사하지 않
고는 성립될 수 없다. 다시 예언하여야 된다는 말은, 앞으로 일곱째 나팔 불 때 나타
날 일들(7절) 곧, 11:15부터 계시될 새 예언을 말해야 된다는 의미이다(Charles). 그
러나 어떤 학자들은 이 새 예언이, 11:1 이하의 모든 말씀을 전해야 알 것을 가리킨다
고 한다. 예언의 사명을 받은 자는, 그것을 실행하지 않을 수 없는 처지에 있다. 그
는 하나님의 포로(捕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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