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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아무나 믿을 수 있는가

작성자야베스|작성시간17.09.18|조회수183 목록 댓글 1


예수는 아무나 믿을 수 있는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하려 하심이니라.' 요한 3:16.-개역.


이 성경구절은 전통적으로 교회가 비신자들에게 전도할때 사용하는 대표적인 말씀이다. 이 말씀은 모든 사람들에게 주신 말씀이고 그 내용에서 어떤 인간적인 차별도 없다.
세상의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구원의 대상인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는 누구나 믿을수 있는가.'


우리의 신앙적 관행에서 볼때 이 질문은 파격적인 면이 있다.
교회의 문은 항상 열려있으며 주께서는 언제나, 누구나 자기에게 나아오는 자를 영접 하신다고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복음서는 분명히 '그렇지 않다' 고 한다

'거룩한것을 개에게 주지말며 진주를 돼지에게 던지지 말라

그것들이 발로 그것을 짓밟고 돌아서서 너희를 물어 뜯을지도 모른다.-공동.


마태 7:6절의 이 기록은 누가나 마가에는 없는 독립적인 단락이다.
마태복음이 유대인 기독교 공동체의 복음서임은 주지의 사실이며 전통적으로 유대인들은 모든 이방인들에 대해 부정한 동물인 개와 돼지를 빗대어 호칭했다.
심지어 마태 15:1-20 에는, 주께서도 자기의 딸을 고쳐달라고 간청하는 가나안 여인을 향해, '자녀들이 먹을빵을 강아지에게 (개역은 개들에게.) 던져 주는것이 옳지않다'고 말씀하신다.
따라서 당시의 기준에서 볼때 이방인-이교도는 개나 돼지로 불려지는것이 일상적인 관행임을 알수있다.
물론 여기에는 유대인의 선민의식과 우월주의가 깔려 있음은 말할것도 없다.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마태7:6 절이 본래 독자적으로 전승 되어오던 '격언' 이 마태복음 기자에 의해 복음서에 삽입되었을 것으로 판단한다.
그렇다면 대단히 과격한 표현을 가지고 있는 이 부분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것인가는 큰 숙제가 아닐수 없다.
우선 복음서에는 불필요한 기사가 없다는 점이다.
모든 내용은 반드시 어떤 절실한 필요에 의해 선택된 것임을 알아야 한다.


신약성경은 그 형성과정과 전승과정에서 온갖 공격을 다 받은, 그래서 정제되고 정제된 내용으로 가득한 책이다.
따라서 마태7:6절도 그런 과정을 거쳐 기록으로 남은, 깊은 의미를 담고있는 기사로 보는게 옳다.
먼저 생각할수 있는것은,
이 격언이 채택된 가장 큰 이유는 마태공동체의 '선교체험' 이 반영된 것으로 보는 견해다.
하나님의 진리와 주의 말씀도 어떤 사람들에게는 거부되었다.
심한경우는 반대와 박해까지 받았으며 그들이 부딪쳤던 그 제한성은 인간적으로 극복할수 없는 커다란 벽이었으며 순교하는 일까지 있었다.
자칫 거룩한것이 개나 돼지같은 인간들에 의해 훼손될수도 있다는 아픈 체험인 것이다.

마태복음의 이 본문을 해설한 주석가 한분은,
개나 돼지로 비유된 부류는 복음을 의도적으로 왜곡하는 자들과 복음을 반대하는 자들, 그리고 복음을 받을 준비가 안된자들 이라고 설명한다.
또 지금은 작고하신, 비교적 보수적 입장에 섰던 이상근 목사는,
'복음은 모든이에게 전해져야 하고 교회는 누구와도 대화해야 한다. 그러나 교회의 
신성성(神聖性) 은 반드시 방어(防禦) 되어야 한다.' 고 해석했다.

우리가 다 아는대로,
전도가 안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나쁜 사람들이 아니다. 물론 개중에는 악을 저지르는, 범법자들도 있지만 대개는 선량한 사람들이다.
그런데 왜 그들은 전도가 안될까.


가족중에도 전도가 안되는 식구들이 많다.
심지어는 성직자의 자녀중 신앙생활을 하지않는 케이스도 있다.
참으로 불가사의한 이 일에 대해 우리는 적절한 설명을 하기가 매우 어렵다.
과학자로서 공과대학에서 평생을 교수로 지낸 평신도 한분이 쓴 책에 이런 대목이 있다.
'의(義) 를 사모하는 마음이 없으면 예수를 믿을수 없다.'
평생을 신앙생활하신 노 교수의 이 한마디는 참으로 시사 하는바가 크다.
노 교수의 이 주장은,

마태 5:6절에 근거한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가 그 부분이다.
'의에 주리고 목마르다' 는 것은,
옳은것, 올바른것에 대한 염원을 가지고 일상을 산다는 뜻이다.
그런 심성(心性) 이 없이는 예수를 믿을수 없다는 얘기다.

다른 한가지는 하나님의 피조물인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할수 있는가 하는 문제다.
노 신학자 한분이 신앙강좌에서 이런 설명을 했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다는 말은 인격적(人格的) 존재라는 의미다.
따라서 무엇에 종속되지 않은 인격적 존재인 인간은 선과 악에대해 자기의 의지로 선택할수있다.'
이 세상에 악과 악한 인간이 존재할수 있는 신학적 입장의 설명이다.
뱀의 유혹이 이브를 통해 아담에게 전달되고,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사건의 전모가 그러했다.
인간은 그 잘못된 선택의 결과에 대해 응분의 책임을 지고 낙원에서 쫓겨났다.
그게 실락원(失樂園) 의 역사다.

이제 남은문제는 하나님 앞에서의 죄악의 문제다.
기독교적 입장에서 복음을 거부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는 악이다.
그건 개나 돼지에 비유되는 인간들의 잘못이다.
그러나 그런 인간이라 하더라도 '실정법' 을 어긴것은 아니기 때문에 교도소에는 가지 않는다.
문제의 핵심이 바로 여기에 있다.
기독교가 정의하는 죄와 악은 실정법을 기준하는것이 아닌, 하나님 앞에서의 '거역' 인 것이다.
인간적으로 선량한 사람은 '실정법' 상 선량한 시민이다.
그러나 복음을 거부하는 경우 하나님 앞에서는 죄인이며 '구원' 에서 제외되는 인격이다.
개나 돼지는 오직 '먹이' 만 알뿐, '거룩한것' 에 대해서는 본능적으로 알지 못한다.
본문에서 개나 돼지로 비유된 인간들도 마찬가지다.
그 속에 복음을 받아 들일만한 '인격적자리' 가 없다.
심정적(心情的) 으로 의에 주리고 목마를 일이없는 태생적인 불구자 들이다.
오직 개인의 이기적인 일에만 관심하는, 다른것에는 의미를 두지않는, 본능적으로 사는 사람들이다.

평생을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 예배당 안에서 살아도 구원에서 제외되는 인간이 있을수 있으며

평생을 예배당 밖에서 살아도 구원되는 인간이 있을수 있는것이 신앙의 세계다.


마지막 순간, 그 결정적인 시간에 예수를 신앙고백할수 있는 마음이 있고 없고의 문제이기에 그렇다.
교회안에는 예수에 대해 '잘 아는것' 을 잘 믿는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어리석은 인간들이 있으며 교회밖에는 자기는 예수와 '무관' 한줄알고 사는 어리석은 인간들이 있다.
그러나 결정적인 시간, 절대적인 순간앞에서 구원받는것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심성이기에 그 안팎의 위치는 바뀔수 있다.
하나님이 구원하시는 인간은 예배당 안에 있거나 밖에 있거나 관게없이 '예수를 믿는자' 들이다.
형식이 내용을 담는다는 의미에서는 보이는 교회가 중요하지만 단지 보이는 교회에 다니기 때문에 구원받는것은 아니다.
진실된 '신앙고백' 만이 구원의 조건일 뿐이다.


'예수는 아무나 믿을수 있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값싼 은혜나 값싼 구원이란 없다.


믿을수 있는 사람은 따로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이다.
개나 돼지처럼 사는 인간은 예수를 믿을수가 없다.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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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김상목 | 작성시간 17.09.18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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