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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생활은 신앙적 가치가 있는가?

작성자야베스|작성시간17.11.01|조회수320 목록 댓글 1

일상생활은 신앙적 가치가 있는가?     

      송인규. 합신 조직신학

 

   나는 어느 작은 외국 풍의 간이 식당에 앉아 오랜만에 샌드위치와 커피를 즐기고 있습니다. 근 3개월에 걸친 프로젝트를 마치고서, 보람 가운데 그야말로 느긋이 시간의 흐름을 완상하는 것입니다. 감미로운 음의 선율이 귓전을 간지럽히고, 가게 밖으로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모습조차 한가롭기 그지없습니다. 가벼운 몽상과 끊임없이 머리를 스쳐가는 상념들은 삶의 감칠맛을 더해 줍니다.

바로 그 순간 … 나의 이런 존재 양식은 하나님 보시기에 어떨까 하는 생각이 퍼뜩 떠올랐습니다. 별로 하나님께 생각을 집중한 것도 아니고 (물론 누가 묻는다면 그런 순간들도 분명 하나님 안에 있는 것이었다고 대답했겠지만 적어도 그런 의식적 방향 전환이 있기 전의 나의 상태를 볼 때), 그렇다고 그 생각의 내용들이 특별히 신앙적인 것도 아닐 경우, 과연 나와 나의 생각 및 행위가 하나님께 가납(嘉納)(*)될 수 있을까라는 것이었습니다. 가납되지 않는다면 무엇 때문에 가납되지 않는 것이고, 만일 가납된다면 어떤 근거에 의해서 그렇다고 할 수 있을까요?


(*가납-바쳐지는 물건이나 잘못한 일을 고치기를 권면하는 주장을 받아들임.)


이것은 결국 일상 생활의 신앙적 가치 문제로 귀결이 됩니다. 
만일 일상 생활에 신앙적 가치가 있다면, 나의 그런 순간들은 하나님께 가납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일상 생활에 신앙적 가치를 부여할 수 없다면, 그런 순간들은 그 자체로서는 하나님께 가납될 수 없을 것입니다.

 

I. 일상 생활의 특징과 세 가지 수준

 

우선 "일상 생활"이 무엇인지부터 설명해야 하겠습니다. 일상 생활이란, "한 인간이 참여해 활동하고 있는 생활 반경 내의 모든 사건과 경험의 총화"라는 정의로부터 출발하고자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현재, 세상 속에서의 비종교적 영역에 초점을 맞추어 문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위의 정의가 취급하는 영역으로부터 교회의 삶과 생활 속 개인적·그룹적 신앙 행위는 제외시키겠습니다. 그렇다면 일상 생활은 우리의 일상적 삶의 터전 (가정, 직장, 사회)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사적·공적 경험, 인간 관계, 공동체에서의 역할과 책임, 각종 활동 등을 총망라한다고 하겠습니다.

이상과 같이 정의된 우리의 일상 생활은 대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특징을 띄고 있습니다.

 

첫째, 공통성(commonality)입니다. 일상 생활의 경험이나 활동은 누구에게나 기회가 주어져 있습니다. 어느 특정 대상만이 일상 생활을 특권으로 누리거나 겪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둘째, 반복성(repetitiousness)이 일상 생활의 또 한 가지 특징입니다. 일상 생활은 거의 예측이 가능할 정도로 반복됩니다. 이것은 시간의 흐름, 계속된 프로그램의 진행 등에 따라 저절로 일어나는 일입니다.

 

셋째, 일상 생활은 단조성(monotony)의 특징을 갖습니다. 일상 생활은 극적 경험이나 기상천외의 사건과는 거리가 멀고, 평범하고 진부하며 하찮은 것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일상 생활이 만인 공통적이고 반복적이며 단조로운 것이 사실이지만, 그 가운데 모든 일을 똑같은 의미 수준으로 경험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일상 생활을 구성하는 여러 사항들에 대해서 각각 다른 수준의 의미/가치를 부여합니다. 아마도 세 가지 수준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첫째, 의미 있는 수준(Meaningful Level, ML)은 일상 생활 가운데에서도 그 경험자에게 의미, 가치, 보람 등을 주는 그런 사건이나 경험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결혼, 승진, (기다리던 아기의) 출생, 진학, 음악 콩쿠르에 참가, 출판기념회, 생일 파티, 수학 여행 준비 등이 그것입니다. 이런 수준은 당사자에 주는 의미나 가치가 크기 때문에 일상 생활의 것이라도 당사자가 귀하게 여기는 그런 항목들입니다.

 

둘째로 평범한 수준(Commonplace Level, CL)이 있는데, 이는 일상 생활 가운데 우리가 아무런 의미, 기대감, 가치 없이 그저 덤덤히 받아들이고 참여하는 그런 종류의 삶을 지칭합니다. 먹고, 마시고, 공부하고, 묻고, 답변하고,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하고, 살아가는 대부분의 시간은 바로 이 CL의 수준에서 이루어집니다. 우리가 일상 생활을 지루해하고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여기는 것도 바로 이 수준의 삶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장 낮은 수준으로서 불편한 수준(Uncomfortable Level, UL)을 거론할 수 있겠습니다. 이 수준의 일상 생활은 어쩐지 공개하고 싶지 않은 - 누구든지 다 알면서도 말하기는 꺼리면서 쉬쉬하는 - 그런 종류의 활동과 연관이 됩니다. 우선, 죄된 영역의 삶이 있습니다. 성적 부도덕, 뇌물 수수, 부정 행위, 세금 조작 등이 그런 예입니다. (혹은 개인이 통제할 수 없는 구조적 죄악에의 연루 행위도 포함됩니다.) 또, 꼭 죄라고까지는 할 수 없지만 어쨌든 적극적인 가치를 부여하기에 난감하다고 생각하기 쉬운 그런 일들 - 거래처에서의 승강이, 노조 스트라이크 주도, 물건 흥정, 법무 이사와의 말다툼, 사원 회식 자리 참여, 주일의 해외 출장, 기금 확보를 위한 캠페인 - 또한 무시할 수 없습니다. 게다가 윤리적 성격과 무관하지만 (혹은 윤리적 성격에 저촉되지 않지만) 공적으로 드러나면 수치스러운 사항들 - 배설 행위, 부부의 성관계, 생리 기간의 행동 거지, 성적 공상, 코딱지 처리에 대한 습관, 자는 모습, 신체 기관의 기형적 특징, 화·짜증·신경질의 분출, 과거로 인한 마음의 상처 등 - 역시 이 범주에 들어간다고 할 수 있습니다.

 

II. 부정적 답변의 근거들

 

왜 그리스도인들은 일상 생활에 신앙적 가치를 부여하지 않으려 할까요? 아니 … 그렇게까지 나갈 필요도 없이, 일상 생활과 신앙 사이에 왜 아무런 관련조차 짓지 않는 것일까요? 네 가지 서로 연관된 이유를 제시하고자 합니다.

 

첫째, 일상 생활의 일상적 특성 -- 공통성, 반복성, 단조성 -- 이 신앙의 특징적 양상과 맞지 않기 때문에 전자는 신앙과 무관하거나 비신앙적인 것으로 분류합니다. 우리는 보통 드라마틱하고, 비상(非常)하며(extraordinary), 남의 이목을 끌만한 것들만을 신앙과 연관시킵니다. 그래서 일상적이고 평범한 삶의 영역으로 옮겨갈라치면 그 순간부터 아예 신앙적 안목과 정신은 배제시킵니다.

 

둘째, 일상 생활의 어떤 요소나 양상이 기독 신앙과 마찰을 일으킨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일상 생활 전체를 싸잡아서 신앙과 양립(兩立)할(compatible) 수 없다는 식으로 몰아갑니다. 이것은 특별히 지난 분단에서 소개한 의미 수준 가운데 UL의 경우와 연관이 됩니다. 죄된 삶의 영역은 말할 것도 없고, 윤리적 가치 판단이 힘든 영역과 행동들, 우리의 내면적·이면적 모습에 연관되는 사항들은 분명 우리로 하여금 적극적인 가치 부여를 하기 어렵게 만듭니다.

 

셋째, 우리가 일상 생활을 신앙과 무관한 것으로 여기게 만드는 또 다른 요인은, 우리의 종교적 의식(religious consciousness) 문제입니다. 우리는 사적인 종교 행위 (QT, 기도 등) 때에나 기독 공동체의 모임 (주일 예배, 그룹 기도회 등) 때 우리가 어떤 의식을 견지하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 경우 우리 의식은 종교적 사항과 관련해 강렬하고 심원하고 몰입적이며, 극도로 예민한 감수성과 간파력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의식이 이런 상태에 있을 때에야 그 때 관여하는 활동과 경험 내용을 신앙적인 것으로 간주합니다. 반대로 만일 우리에게 이런 의식이 결여되면, 자연히 우리는 그 당시의 행위를 신앙과 무관하든지 비신앙적인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일상 생활에 처할 때 우리의 의식은 그저 덤덤하고, 신앙적 감수성으로 예민하지도 않으며, 어떤 특유의 정신 상태를 구성하지도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일상 생활은 신앙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라고 결론 짓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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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째, 우리는 신앙의 의미를 그리스도인만이 수행하거나 누리는 영역에서만 찾아야 한다는 편견에 거의 무의식적으로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일상 생활에 대해 신앙적 가치를 부여하지 못합니다. 여기 최근에 그리스도인이 된 A라는 인물을 생각해 봅시다. 그는 철두철미한 비신자였다가 친구의 도움으로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그는 과거 자기가 추구하던 삶 -- 회사 근무, 취미 생활, 친구 관계, 경제 활동 등 --은 의미가 없고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 가운데 만족을 찾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전에는 알지도 못하고 하지도 않던 영역의 활동들 -- 예배 참석, QT, 성경 공부, 구역 모임, 교회 봉사, 성도와의 교제, 전도 훈련 등 --에 심취하기 시작했습니다. A는 이제 일상 생활 -- 그리스도인이나 비그리스도인이나 공동적으로 참여하는 삶의 영역 -- 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신의 신앙과 무관하기 (아니 심지어는 신앙을 저해하는 요인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네 가지 이유는 서로 맞물린 가운데, 우리가 일상 생활을 부정적인 시각으로 조망하도록 만들고 있습니다.

 

 III. 일상 생활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의 장이다

 

우리의 일상 생활은 신앙과 무관한 것도 아니고 그 자체로서 신앙적 가치관에 저해의 요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는 우리의 일상 생활에 적극적 가치를 부여할 수 있고, 또 그렇게 해야 합니다. 이러한 주장이 어떻게 가능한지, 네 가지 항목에 의거해 밝히고자 합니다.

 

1. 일상 생활이 신앙적으로 긍정적 가치를 갖는 것은, 성경의 세계관이 제시하는 바입니다.

기독 신앙은 종교적 영역의 사항과 활동뿐만이 아니라 일상적 영역의 모든 것과도 연관이 됩니다. 일상 생활을 구성하는 제요소 -- "만물"의 범주에는 이런 요소들도 포함이 되는데 --는 그리스도의 창조에 의해 생겨났고 (골 1:16; cf. 요 1:3), 그의 말씀으로 유지되고 있으며 (골 1:17; 히 1:3), 그의 십자가의 피로 하나님과 화목되었습니다 (골 1:20). 따라서 우리는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고전 10:31),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골 3:17) 해야 하며, 일상 생활을 포함해 무슨 일을 하든지 주께하듯 해야 합니다 (골 3:22-23). 일상 생활은 하나님의 영광을 반영하고, 신앙적 가치관을 실현하는 구체적 훈련의 장인 것입니다.

 

2. 성경은 우리의 일상 생활이 하나님께서 함께하실 만큼 가치 있는 것으로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항상 함께하신다" (마 28:20)고 약속하셨을 때, 이것은 꼭 종교적인 영역에서의 활동에만 연관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영적 영역의 권세만을 받으신 분이 아니시요 (cf.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 마 28:18), 그의 가르침 또한 소위 "영적" 항목으로만 구성되어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cf. "내가 분부한 모든 것," 마 28:20). 따라서 그는 우리와 "항상" -- 종교적 영역에 관여하든 일상적 활동 가운데 있든 -- 함께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이 약속은 우리의 믿음의 반응만 있으면 얼마든지 실현이 됩니다. 이 약속이 우리의 것이 되기 위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독특한 의식(consciousness)을 보유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경우에는 그러한 의식을 보유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 우리에게 독특한 의식이 없다고 -- 하여 하나님께서 그의 임재를 거두어 가시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일상 생활에 임하면서 하나님의 임재 약속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한, 그에 걸맞은 의식이 있든 없든, 하나님은 항시 우리와 함께하시는 것입니다.

 

3. 신앙적 가치는 꼭 비상하고, 드라마틱하고, 굉장한 활동이나 경험에만 부과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전 항목에서 밝혔듯,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모든 일에는 신앙적 가치를 인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평범하고 반복적이며 단조로운 일상의 삶 속에도 하나님께서 함께하신다는 것은, 성경 인물들의 예를 보면 곧 발견하게 되는 바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마엘이 "장성하여 광야에 거하며 활 쏘는 자가 되는" 일상적 과정에 함께하셨습니다 (창 21:20). 요셉이 가정 총무로서 잡다하고 일상적 업무를 처리할 때에도 (창 39:2-3) 감옥에서 대리자로 일할 때에도 (창 39:22-23) 그와 함께하셨습니다. 다윗이 사울 밑에서 천부장 노릇을 할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함께하신 것 (삼상 18:12-13)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꼭 일상적 경험을 초월하는 극적 사건 가운데에서만 신앙적 가치를 찾을 필요가 없습니다.

 

4. 일상적 영역의 불편한 수준(UL) 가운데 여러 경우들은 신앙적 가치의 부여를 어렵게 만드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이유를 자세히 분석해 보면, 제시된 근거는 일상 생활에 대한 것이 아니거나 아니면 근거 자체가 잘못 형성되어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그러한 "불편함"의 이유도 각각 다르므로, 해결책의 제시를 위해서는 각 사항을 따로따로 취급해야 합니다.

 

(i) 고의적이고 명백한 죄악을 포함한 일상 생활은 결코 신앙적 가치를 보유할 수 없습니다. 이 경우 해당자는 즉시 죄를 자백하고 깨끗함을 받아야 합니다. 이렇게 죄악을 포함한 일상 생활이 문제되는 것은, 그 일상 생활 자체가 본질상 비신앙적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죄악에 연루되었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주장했듯 일상 생활은 하나님 앞에서 긍정적 가치를 지닙니다.

 

(ii) 구조악의 경우 -- 자기 개인으로서는 회개하고 깨끗이 살고자 몸부림을 친다 해도 현재의 생활 영역에 남아 있는 한 악이 당장 제거되지 않는 상황을 의미함 --에는, 문제가 좀 더 복잡합니다. 이는 자신이 현재로서는 통제할 수 없는 사회적·집단적 악에 연루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① 당면한 악에 대한 인식 ② 도덕적 혐오감 ③ 자신의 한계 인정 (cf. 왕하 5:17-18) ④ 장기적 안목에서의 변화에 대한 열망 등을 가지고 그 생활 영역에 남아 있는 것이라면, 하나님께서는 그와 함께 하시고 그와 그의 일은 하나님께 가납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iii) 윤리적인 회색 지대에서의 삶 역시 신앙적 가치의 부여를 어렵게 만드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 나는 야곱의 삶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야곱은 외삼촌 라반과 함께 살면서 배우자 문제와 관련하여 속임을 당했고 (창 29:25), 품삯을 정하는 일에 있어서는 몇 번씩 농락을 당했습니다 (창 31:7, 41). 야곱 역시 가축의 증식에 대한 전략으로 분주했고 (창 30:37-43), 가축들을 짐승으로부터 지키느라 밤낮으로 안간힘을 썼으며 (창 31:39-40), 외삼촌에 대해 연막 전술 (창 31:17-21)과 정면 공격 (창 31:36-42)으로 응수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모든 과정과 관련하여 하나님께서 야곱과 함께하셨다고 말합니다 (창 31:6, 42). 우리의 일상적 삶에서 비윤리적이고 죄악된 것은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야곱도 외삼촌과의 생활에서는 상당히 정직했습니다 (창 31:38-41).] 그러나 선과 악이 명확히 규명되기 힘든 도덕적 회색 지대 -- 다시 말해서, 신앙적으로 받아들이기가 어렵게 느껴지는 그런 영역에서의 삶이라 할지라도, 만일 우리가 양심만 깨끗한 증거를 할 수 있다면 놀랍게도 거기에는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법입니다.

 

(iv) 우리의 성적·생리적·신체적 양상은 결코 하나님으로부터의 호의를 받고 누리는 일에 방해가 되지 않습니다. 구약 시절에는 이런 것들이 부정(不淨)한 일에 속했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로막았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종류의 음식물 섭취는 부정한 것이었고 (레 11:1-23), 짐승의 시체를 접촉하면 부정해졌으며 (레 11:39), 피부병의 감염(레 13:1-8)·남성의 설정(泄精)(레 15:16)·여성의 경도(經度)(레 15:19)는 부정의 원인이었는가 하면, 신낭(腎囊)이 상한 자나 신(腎)이 베인 자 [즉 거세된 자] (신 23:1)와 사생아(신 23:2)는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 참여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신약 시대가 밝으면서 이런 모든 신체적·생리적 조건들은 하나님과의 관계 수립에 하등의 장애 요인이 될 수 없었습니다. 다시 바꾸어 말하자면, 여성의 생리일에도, 부부가 성관계를 할 때에도, 돼지고기를 먹고 피부병 치료를 받으러 갈 때에도 하나님께서 함께하십니다. 성기능을 다하지 못하는 이와 사생아의 삶 속에도 하나님은 기꺼이 함께하십니다.

 

왜냐하면, 신약 시대에는 그리스도께서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를 폐하셨기 (엡 2:15; 골 2:14) 때문이요, 옛언약에 속하는 것들이 낡아지고 쇠해진 (히 8:13) 때문이며, 또 그리스도 안에서 종교적·사회적·문화적·성적 차별이 무효화된 때문이고 (갈 3:28; 골 3:11), 무엇이든지 스스로 속된 없고 다만 속되게 여기는 그 사람에게만 속되기 (롬 14:14) 때문입니다. 구약 시대와 신약 시대 사이에 존재하는 이 놀라운 변화가 복음의 은택 가운데 하나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상의 네 가지 근거에 기초해 볼 때, 우리의 일상 생활은 하나님 앞에서 놀랄만한 신앙적 가치를 갖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일상 생활에 대해서 종교적 영역의 경우나 큰 차이 없이 신앙적 가치를 부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더 이상 유치한 이원론적 게임은 포기하십시오.

 

인습과 전통에 얽매인 채 성경의 가르침을 외면함으로써, 스스로 자신의 신앙적 인식에 족쇄를 채우지 마십시오.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종교적 영역에서의 활동과 행위에 있어서도 …

그리고 일상 생활의 현장에 있어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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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김상목 | 작성시간 17.11.04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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