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과의 만남, 예배
성경역사 학자들이 하는 질문 가운데, “이스라엘이 안식일을 지켰는가?, 안식일이 이스라엘을 지켰는가? 하는 것이 있다. 이 질문의 뜻은 이스라엘 민족이 나라 없이 2천년을 방황하는 사람들이었지만, 오랜 세월동안 안식일을 부지런히 지켰더니 결국 안식일이 이스라엘 민족을 지켜주었다는 말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교회에 와서 전심으로 하나님께 예배하고 교회를 섬기며 봉사하는 동안에 하나님께서 우리 생명과 명예와 사랑하는 가족을 지켜주신다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가 누리게 되는 복이다.
예배의 가장 본질적인 의미는 ‘하나님과의 만남’이다. 우리는 하나님께 예배하면서 찬송 중에 거하시는 하나님, 말씀하시는 하나님, 기도 속에서 응답하시는 하나님, 성도들의 아름다운 섬김과 헌신 가운데 계신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
진정한 만남은 상호간의 교제이다. 영혼과 인격의 감동이 없으면 그건 만남이 아니라 한 순간의 마주침에 불과하다. 단순히 일주일동안 지은 죄만을 씻으러 오는 ‘세차장식의 예배’는 하나님과의 진정한 만남이라기보다는 그저 단순한 마주침일 뿐이다.
1. 만남의 주도권(요4:1-9)
예배가 하나님과의 만남이라고 할 때 그 만남의 주도권, 즉 예배의 주도권은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있다. 죄인 된 인간이 스스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길은 전혀 없기 때문에 오직 하나님께서 열어 놓으신 그 길을 통해서만 나아갈 수 있다.(사59:1-2, 히10:19-20)
※ 창3:21 ‘가죽 옷’
범죄 한 아담이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나무 뒤에 숨었다. 죄를 지은 아담에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온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아담이 어디 숨어 있는지를 몰라서 묻는 질문이 아니라 이것은 인간 실존에 관한 질문이며, 장소가 아니라 상황을 묻고 계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벌거벗은 수치와 공포로 떨고 있는 인생을 위하여 ‘가죽 옷’(창3:21)을 지어 입히셨다. 하나님은 죄인인 인간을 만나기 위해 하나님 편에서 희생의 값을 지불하시기로 결정하셨다. 결국 ‘가죽 옷’이라는 것은 죄 없는 동물의 피를 흘려 인간의 죄를 대속한다는 희생제사의 모형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범죄 한 인간을 먼저 찾아 주시고 가죽 옷을 입히시며, 그의 부끄러움과 수치를 가려 주시고 만남의 길을 주도적으로 열어주셨듯이 예배, 즉 만남의 주도권은 전적으로 하나님에게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전통적인 예배 프로그램의 첫 순서를 보면 「예배의 부름, Call to Worship」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누가 누구를 부르는 것일까? 인간이 하나님을 부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범죄 한 아담을 부르듯이, 죄의 부끄러움을 가려 주시는 은혜를 베푸시면서 까지 다시 만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으신 후에 인간을 초청하시면서 부르시는 것이다.(막2:17)
구약시대에는 동물을 제물로 드리는 피의 제사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났다. 신약시대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의 은혜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 “예배 보다”는 말과 “예배 한다”는 말은 전혀 그 의미가 다른 것이다. “예배 한다”는 것은 예배를 직접 행하는 ‘주체자의 입장에 서는 것’을 의미하지만, “예배 본다” 는 것은 예배를 구경하는 ‘방관자의 입장에 있는 것’을 의미한다.
2. 만남의 대상(요4:16-19)
조직 신학자 벌코프(Louis Berkhof)는 인간을 가리켜 “치료 불가능한 종교적 존재” 라고 말했다. 즉,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종교적 본능이 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신을 전제하지 않은 인간의 문화나 역사는 상상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행17:22) 우리 인간에게는 그것을 느끼든 못 느끼든 누구를 막론하고 그 심령이 하나님을 찾고 있다.(전3:11)
예배의 영어 표기인 ‘Worship'은 ’가치‘의 의미를 지닌 ’Worth' 와 ‘신분’의 의미를 지닌 ‘Ship'의 합성어이다. 그래서 예배라고 하는 단어는 “자신이 가장 아끼고 높이며 사랑하는 대상에게 최고의 가치를 돌려 드린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인간이 하나님께 대하여 최고의 가치와 그에 합당한 영광을 올려 드리고자 할 때, 그 자리에서 자신은 철저히 부인되어지고 오직 하나님만 드러나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예배가 하나님께서 기대하시는 참 예배이며, 이러한 예배를 드리는 자가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참 예배자이다.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더 소중히 여기며 거기에 가치를 더 부여하고 머리를 조아리면서도 정작 하나님께 대하여는 특정한 시간, 특정한 공간에서 특정한 절차를 따라 행해지는 종교행위만을 반복한다면 그것을 참된 예배라고 할 수 없다. 예배는 신앙인의 액세서리가 아니고, 일종의 수양하는 종교가 되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만을 높이는 예배가 되어야하고 그 외에 그 누구도 예배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우리가 하나님보다 더 가치를 두고 섬기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우상인 것이다.(빌3:19, 골3:5)
3. 만남의 목적(요4:10-15)
우리는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시간을 통해서도 “누구를 위한 예배인가, 무엇을 위한 예배인가?” 하는 방향감각을 분명히 하고 목적의식을 분명히 하지 않으면 자칫 빗나간 예배를 드릴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한다.
종교 개혁자인 마틴 루터는 “인간이 사는 중요한 목적과 이유는 구원을 받기 위함이 아니라, 구원받은 자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는 데 있다.” 라고 말하였다. 하나님으로부터 지음을 받은 피조물이라면, 나를 지으시고, 또한 독생자 예수를 통해 구원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올려드리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이다. 예배를 뜻하는 헬라어 ‘프로스퀴네오’(προσκυνεω)는 존경의 표시로서, 무릎을 꿇거나 엎드리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곧 예배가 무엇을 받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드리는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예배의 본질은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넘치는 만족감이다. 예배는 무엇보다 그리스도 안에 오신 하나님의 성품과 섭리를 소중히 여기는, 내적이며, 영적인 경험이다. 예배는 그리스도를 마음에 품는 것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위해 오신 하나님으로 인해 온전히 만족하는 것이다.(시16:11) 예배의 본질이 하나님 안에서 만족하는 것이라는 의미는 곧, 예배는 더 이상 다른 어떤 것을 얻기 위한 도구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마치 “하나님 나는 하나님 안에서 이미 만족하였으므로 또 다른 것을 얻고 싶습니다.”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예배를 통하여 자신이 하나님께 올려 드려야 하는 부분에 대한 관심보다는 예배를 통하여 무엇인가 얻고자 하는 데만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다양한 프로그램을 구비하고 있는 교회, 분위기가 좋은 교회를 찾아다닌다. 설교가 좋은 교회, 재정적으로 풍족하여 부담 없이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교회를 찾아다닌다. 그래서 짐 그레인 목사는 오늘날 현대 교회의 예배에 대하여 “하나님보다 인간에게 눈을 돌리고 있다. 하나님의 영광보다 인간의 필요한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이것은 기독교가 인간 중심의 종교가 되어가고 있다는 증거이다.”라고 말하였다. 만일 하나님께 나아가는 이유와 목적이 진정 현실적인 것에만 국한되어 있다면 기독교가 샤머니즘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 되고 만다. 샤머니즘에서 제사를 행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신의 노여움을 달래기 위함이고, 또 다른 하나는 욕망의 충족을 위해 복을 구하는 것이다.
진정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하는 목적은 무엇일까?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하는 첫 번째 목적은, 이미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은총에 대한 응답으로 하나님께 나아가 감사와 찬양과 경배를 드리는 것이어야 한다. “예배란 피조물인 인간이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와 수많은 은총에 감격하여 그 하나님을 경외하고 찬양하며 감사하며 봉헌하려는 피조물의 응답적인 행위”라고 정 장복 교수는 그의 책 「예배학개론」 (서울 종로서적, 1985)에서 말한다.
두 번째 목적은, 소속감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마귀의 세력에서 해방된 것을 경험하는 것이며, 하늘나라를 맛보고 그 나라의 멤버쉽을 확인하고 돌아가는 것이다.
세 번째 목적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가는 것이다. 자범죄를 씻는 것과 더불어 속사람의 변화를 통해 주님의 성품을 본받는 것이다.
네 번째 목적은, 인생의 목적과 가치관의 문제를 하나님 안에서 늘 새롭게 발견하면서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여 헌신된 삶을 살도록 결단하는 데 있다.
4. 만남의 태도(요4:20-24)
참된 예배, 즉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께서 영(靈)이시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가 잘못된 예배를 드리게 되는 결정적인 이유는 바로 하나님께서 영이시라는 사실을 잊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형식에 집착하게 되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형식에 집착하다보면 눈에 보이지 않는 영이신 하나님과의 만남, 영이신 하나님과의 사귐, 영이신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 뒷전으로 밀리게 된다. 결국 빈 껍질만 남는 허망한 예배가 되고 마는 것이다. 특정한 장소나 시간, 어떤 절차가 반드시 중요한 것은 아니라는 말씀이다. 예배의 시간, 장소, 스타일, 순서 등의 형식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예배자의 믿음 즉, 예배자의 마음의 태도라고 가르치고 계시다.
※ 창4장 가인과 아벨의 제사
이 말씀에서 유의할 것은, “아벨과 그 재물”, “가인과 그 재물”을 하나님께서 보셨다고 하는 것이다. 아벨이나 가인이 가져온 재물보다는 아벨과 가인 그 자신 즉, 예배를 드리는 사람 자체를 하나님께서 주목하여 보셨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은 언제나 제물보다는 사람을 먼저 보신다. 하나님께서 아벨을 가인보다 편애하신 것이 아니라, 아벨은 하나님께 대한 감사한 마음과 신뢰하는 믿음으로 더 나은 제사를 드렸고, 반면에 가인은 감사의 마음이나 정성이 없이 다만 대가나 보상을 바라는 마음으로 적당한 제물만 꾸려서 형식적인 제사를 드렸다고 볼 수 있다.(히11:4, 사1:11-12)
※ 신령과 진정으로(요4:24)
‘신령’이라는 말은 영어성경에 “in spirit"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즉 신령으로 예배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 안에서, 성령의 도우심안에서 드리는 예배를 말한다.
다음으로 ‘진정’이라는 말은 영어로 “in truth"이다. 즉, 진리의 말씀에 근거하여 예배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자를 찾으신다“ 는 말씀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예배와 ”진리의 말씀이 살아 있는“ 예배를 드리는 자들을 찾으신다는 의미를 갖는다.
예수 당시의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의 예배를 ‘신령과 진정(진리)’라는 관점에서 볼 때 이 둘은 매우 대조적인 모습을 보인다. 유대인들의 예배는 한 마디로 “신령이 없는 진리”였다. 진리의 말씀은 있는데 신령, 즉 성령의 인도하심이 없는 그래서 예배의 감사와 감격이 없는 형식적인 예배이었다. 반면에 사마리아인들의 예배는 한 마디로 “진리 없는 신령”이었다. 이런 예배는 감정에 치우치는 예배가 되기 쉽다. 춤을 추고, 손뼉을 치고, 찬양할지라도 그 속에 생명력이 없으면 의미가 없는 것이다. 아무리 열정적이고, 감격적이고, 체험적이고, 눈물이 흐르는 예배일지라도 그 속에 진리가 없으면 미신적인 예배가 되고 마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신령과 진정’은 예배함에 있어서의 가장 중요한 기본인데, 이것을 둘로 나누어 가질 것이 아니라 하나로 합하는 참 예배가 오늘날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이다. 즉, 신령과 진리의 균형 잡힌 예배가 되어야 한다.
예배를 드릴 때에는 예배드리는 것에만 신경을 써야 한다. 찬송을 부르면 찬송을 부르는 것에 집중해야 하고, 기도를 할 때에는 기도하는 것에 집중해야 하고, 설교시간에는 설교를 듣는 것에 집중을 해야 한다. 이와 같이 예배할 때에는 오직 성령을 의지하고,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뜻에 집중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예배자가 된다.
한국 교회의 예배의 문제점
매주 교회당에 갈 때마다 똑같은 형식의 예배순서를 따를 것이다. 어떤 교파(침례, 감리, 개혁, 장로, 그리스도의 교회, 오순절...)에 관계없이, 주일 아침 예배는 대동소이하다. 약간씩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배순서는 사실상 모든 교회에서 본질적으로 같다.
ex)찬송가를 사용하는 교회들 ― 복음성가를 도입한 교회들
회중이 손을 드는 교회들 ― 허리 위로는 손이 올라가는 법이 없는 교회
매주 주의 만찬을 하는 교회들 ― 석 달에 한번, 일 년에 한 번하는 교회
∴형식화된 예배로 전락함.(말1:13 ‘번폐스러운고’ ; ‘따분한가’ kjv)
성도들에게 인내를 필요로 하는 종교적인 의무라고 이해함.
→예배는 ’드리는 것’이 아니라 ‘견디는 것’
초대교회의 예배순서
사도행전 2:42, 46, 20:7 에 보면 교훈, 설교, 기도, 떡을 떼는 것이 언급되어 있다. 이러한 요소들이 처음부터 기독교 공동체의 예배를 구성하는 기본 요소들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초대교회의 예배형식은 경우에 따라서는 형식에 구애 받지 않고 자유롭게 만들어 지기도 하였으며, 또는 일정한 형식으로 고정되어 예배 때마다 반복되었다.
프랭크 바이올라와 조지 바나는 그들이 공동으로 저작한 “이교도에 물든 기독교”라는 책에서 초대교회의 예배모습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초대교회의 예배는 모든 지체가 기능을 발휘하고, 자발적이고, 자유스럽고, 역동적이며, 누구나 다 참여하도록 열려있는 특징이 있다. (고전 14:1-33; 히10:25 1세기 교회 모임은 수동적인 요식행위가 아니라 역동적인 모임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현대 교회의 예배와는 달리 종종 예측할 수 없는 모임이었다.
더 나아가서, 1세기 교회 모임은 최근의 몇몇 저자들이 제시하는바 유대 회당의 의식에서 따온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은 완전히 독특한 문화를 형성했다. 기독교 예배는 성전예배와 회당예배의 전통 안에서 이루어졌다. “성례전”은 희생제사를 드린 성전예배와 연결되고, “말씀”은 희생제물을 드리지 않고 성서를 낭독하며 가르친 회당예배와 맥을 같이한다. 그리고 회당예배와 다락방 예배의 내용이 통합되어 “말씀”과 “성례전”을 주축으로 하는 기독교의 예배의 윤곽이 생겼다.
초기의 예배는 유대교의 예배와는 다른 형식들을 갖게 되었다. 그들은 주로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랐다. 그러나 자신들이 속해있던 유대종교생활을 버리지는 않았다. 그들이 행하였던 예배의 순서는 다음과 같다. ①기도(감사, 소원, 중재기도, 주기도), ②찬송(시편송과 성전의 찬송), ③교훈(성서낭독, 성서주해), ④예언, ⑤방언, ⑥축도로 구성되었고, 밤에는 애찬이 뒤따랐다.
초기 기독교의 예배는 성서적 요소와 성례적 요소 사이에 균형이 잡혀 있음을 볼 수 있다. 또한 교훈을 곁들인 성서낭독과 성별 및 떡과 포도주를 받드는 일은 예배의식의 통전적 부분들이었음을 알 수 있다. Ibid.
초대교회는 네 가지 중요한 신학적 내용을 가지게 되었는데, 첫 번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지와 성역, 두 번째로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이 우리와 함께 하심, 세 번째로 하나님의 종말적 구원행동에 대한 감사와 찬양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종말론적 구원행동에 대한 감사와 찬양이며 주님의 다시 오심에 대한 대망이 그것이다.
※주의 만찬(고전11:20) : 1세기와 2세기 초에는 주의 만찬이 저녁에 하는 식사이었으나 2 세기 자료들은 그것이 오직 일요일에만 거행되었음을 보여준다. 유카리스트"(Eucharist)는 '감사하는 마음을 갖다'라는 의미로 흥겨운 공동식사모임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주관한 성 직자는 없었다. 주의 만찬이 한때는 평신도가 주도했지만 결국 안수 받은 목사가 집례 하 도록 되었음.
개신교의 예배순서는 어디서 유래되었는가?
개신교의 예배순서는 중세 카톨릭의 미사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미사가 신약성서에서 유래하지 않았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것은 고대 유대교와 이교사상에서 생겨난 것이다. 윌 듀란트(Will Durant)에 의하면, 카톨릭 미사는 “부분적으로는 유대 성전제사와 부분적으로 그리스의 신비의식인 정결의식, 대리제사, 동참의식 등에 기초하고 있다.”
미사(mass)라는 말은 회중을 “해산시키다”라는 뜻으로서, 4세기말에 성찬을 거행하는 예배의식을 지칭하는 말이 되었다.
수도사 출신으로는 최초로 교황이 된 그레고리(Gregory the Great 540-604)야 말로 중세 미사를 완성한 장본인이라 할 수 있다. 그레고리가 아주 관대하고, 탁월한 행정가요 외교술에 능한 사람이라고 인식되어 있지만, 듀란트는 그레고리가 또한 이교의 마술적 개념들에 영향을 받은 지나치게 미신적인 사람이었음에 주목했다. 그레고리는 이교사상과 마술과 기독교의 영향을 받은 중세 사상을 구체화 했다. 듀란트가 그레고리를 가리켜 “최초의 완벽한 중세 사람”이라고 칭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중세의 미사는 그것을 시작한 사람의 사상을 반영했다. 그것은 이교와 유대교 의식이 합성되어 카톨릭 신학과 기독교용어를 뒤집어쓰고 나온 것이다. 듀란트는 미사가 그리스의 연극뿐 아니라 이교의 마술사상에 깊이 관련되어 있음을 지적했다. 그는 그리스 사상에서의 죽음이 교회의 신학과 의식에는 환생으로 둔갑했고, 수 세기 동안 철학을 지배해왔던 그리스어는 기독교 문학과 의식의 전달수단이 되었고, 그리스 신비주의는 미사의 인상적인 신비로움으로 이어졌다“고 했다.
사실상 6세기에 생겨난 카톨릭 미사는 본질적으로 이교사상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이교 제사장의 제복, 정결의식용 향과 성수의 사용, 예배 때 켜놓는 촛불, 로마 바실리카의 건축양식을 본뜬 교회 건물, 로마법을 기초로 한 ‘교회법’, 수석 감독의 칭호로 폰티펙스 막시무스(Pontifex Maximus; 로마 대신관), 그리고 카톨릭 미사를 위한 이교의 제사의식을 받아들였다. 미사가 일단 제정되자 천 년 동안 거의 변함없이 이어졌다. 그러나 이런 의식의 정체상태도 마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의 등장으로 그 첫 번째 수정을 거치게 되었다. 각종 개신교 교파들이 출현하면서, 그들은 카톨릭 의식의 틀이 다시 잡히도록 도와주었다.
루터의 예배순서
루터는 예배형식을 로마 카톨릭으로부터 분열할 생각은 없었고, 다만 개혁할려고 했다. 김득용, p.87. 루터는 근본적으로 보수적이었다. 루터교회의 예배형식이 담고 있는 가장 중요한 신학적 내용은 “하나님의 말씀”과 “믿음에 의한 칭의”이다. 여기서 하나님의 말씀 루터에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은 둘로 구성된다. 하나는 “들을 수 있는 말씀”으로 예전적 성서의 말씀과 설교이며, 다른 하나는 “볼 수 있는 말씀”으로 주의 만찬이다. 박은규, p.123.은 꼭 성서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전체적인 계시를 뜻한다. 또한 믿음에 의한 칭의가 의미하는 것은 헌물이나 봉헌을 드리는 행위에 의해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시는 그 은혜를 신뢰하는 신앙을 하나님께 바칠 때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Ibid., pp.123-124.
루터는 이 예배순서에서 말씀중심의 예배와 성만찬을 하나의 예배로 연결시키고 있다. Ibid., p.89. 즉 루터의 예배는 설교와 주의 만찬을 통해,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감사를 드리는 찬송과 기도의 응답을 통하여, 하나님과 인간이 그리스도 안에서 만나고, 그 만남 안에서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을 경험하는 것이다. 박은규, p123.
칼빈의 예배순서
칼빈은 루터보다 더 급진적이었으나, 쯔빙글리 보다는 덜 급진적이었다. 칼빈은 주님의 만찬을 자주 행하고 잘 모여야 한다고 믿었다. John Calvin, 「기독교강요」 제4권 편집부 번역 (서울:성문, 1993), p.831. 칼빈도 루터와 마찬가지로 초대교회의 “말씀의 예배”와 “다락방의 예배”를 개신교회의 예배 이념으로 삼았다. 김동수, 「예배학개론」 (서울:대한기독교서회, 1967), p.226. 칼빈은 예배에서 죄의 고백의 기도를 강조했다. Bard Thomson, pp.197-198.
칼빈의 예배는 부처의 영향을 받았다. 부처의 예배가 칼빈에게 영향을 준 것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새로운 예배의 형성이며, 다른 하나는 시편송의 사용이었다. 새로운 예배 형성이란 성찬을 포함할 수도 있고, 삭제 할 수도 있는 예배형을 말한다. 이것은 후에 스코틀란드 교회에 크게 영향을 주게 된다. 시편송의 사용은 일반적인 찬송의 사용이 아니라, 회중이 노래할 수 있는 운율적 시의 사용을 말한다. 박은규, p.128. 칼빈의 예배가 가진 특성은 성실성과 존엄성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며, 찬양하며, 그분께 간구하며, 하나님의 위대하심 앞에 머리를 숙이는 일이 칼빈의 예배의 목표였다. Ibid., p.129-130.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측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측 헌법에 보면 예배란 “하나님을 섬기는 성도들의 응답이며 구체적인 행위이다.”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통합), 「헌법」 (서울:한국장로교출판사, 1987), p.246. 라고 정의 하고 있다. 예식서에 나타난 순서를 보면 다음과 같다.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교육부(통합), 「예식서」 (서울: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교육부, 1981), p.27.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측 헌법에는 예배에 관하여 설명하고 있는데 사람은 온 마음과 정성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고 찬양하고 부르고 의지하고 섬겨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또한 예배의 대상은 성부, 성자, 성령이신 하나님임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예배는 항상 거룩하게 드릴 것을 강조한다.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통합), pp.115-119.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측 영락교회 주일 낮 예배순서
2012년 9월 30일 영락교회 주일 낮 예배순서
예배의 부름
송영
찬송
참회기도 - 사도신경
성시교독
기도-평신도의 기도
찬송
성경봉독
성가대의 찬양
설교
설교자의 기도
찬송
봉헌 - 봉헌송
성도의 교제
찬송
축도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측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측의 「표준예식서」에 보면 예배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이 예배는 구약시대부터 신약시대에 이르는 하나님의 자기 백성 구 속 사역에 대한 예언과 성취의 알파와 오메가요, 거룩한 은혜에 보답 하는 구원받은 자의 엄숙한 신앙고백와 경건한 삶의 표현이다.”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합동), 「표준예식서」 (서울: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1993), p.19.
즉 장로교 합동측의 예배는 하나님의 구속에 대한 예언과 성취, 그리고 구원 받은 자의 신앙고백과 경건한 삶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측의 주일 낮 예배 순서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Ibid., p.21.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측 승동교회 2012년 9월 30일의 예배순서
묵도
성훈과 주기도
찬송
교독문
신앙고백
찬송
기도
성경봉독
찬양
설교
기도
찬송 - 성가대
헌금
봉헌기도
교회소식
찬송
축도
인사나누기
예배순서의 제안
예전이란 예배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 실행되어지는 약속되어진 행동 이라고 하겠다. 그것은 개인적이거나 즉흥적으로 드려지는 비예전적이거나 비공식적인 예배가 아니라 교회 공동체가 인정하는 공식적인 예배의 의식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예전은 예배의 공식적 행위를 돕기 위해 필요하며, 그 공식적 행위는 준비되어지며, 개개인이 예배에 직접 참여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그러므로 예배에 있어서 예전은 반드시 필요하며, 그 예전은 연구 되어져야 한다.
아울러 20세기 초에 미국의 부흥운동을 토대로 받아들여진 한국 개신교회의 경우 예전적인 모습은 찾아보기가 힘들고, 이런 신앙의 유형을 가진 서양선교사와 한국의 재래 문화에 의해 혼합된 예배의 형태는 성도들로 하여금 기복신앙과 방관자적 입장의 예배를 만들어 내었다.
이제 갱신되어지는 예배 속에서 이런 문제들을 지적해 보면서 예배되기 위한 예배로서 한국개신교회에 맞는 예전의 필요성을 절감한다. 한국개신교회는 한국개신교회 실정에 맞는 예전을 가져야 하며, 그 예전 속에서 올바른 예배를 드리는 모습이 필요하다.
본 장에서는 한국 개신교회의 예배갱신을 통한 올바른 예배를 드리기 위한 시도로서 한국 개신교회 주일 낮 예배를 위한 예전을 제시하고자 한다.
열린예배, 구도자 예배
구도자 예배는 미국에서 1975년 빌 하이벨스 목사가 개척한 윌로우크릭 교회에서 처음으로 구상하고 시도함으로 시작된 새로운 예배 형태이다. 하이벨스는 영적인 갈급함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구도자라 칭하고 이들을 위한 예배를 준비하여 이를 구도자 예배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이것이 한국에 도입될 때 예배의 개방성에 초점을 맞추어 불신자를 포함한 누구에게나 예배의 기회가 열려 있다는 의미로 한국에서는 열린 예배라는 의미로 자리매김을 하였다. 수정교회의 로버트 슐러, 윌로우크릭교회의 빌 하이벨스, 새들백교회의 릭 워렌, 레이크우드교회의 조엘 오스틴 등이 특히 한국 교회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이 형식은 전통적인 예전의 틀을 벗고 자유로운 옷차림과 일상적인 말투를 강조하면서 비디오상영, 연극, 뮤지컬, CCM 찬양 등 다양한 형태의 접근을 통해 ‘보여주고 참여하는 예배의 틀’을 제공하고 있다.
구도자 예배의 특징은 믿지 않는 사람들을 존경과 사랑으로 대하여 예배를 그들의 필요와 연결시켜 실제적이고 이해하기 쉬운 방법을 통해 말씀을 나눠야 한다고 믿고 예배를 기획하는데 있다. 그래서 구도자 예배의 분위기는 기존 교회의 예배 분위기와는 다르다 할 수 있겠다. 구도자 예배에는 긍정적인 요인이 있다. 미디어 홍수 속에 문화의 변혁이 일어나고 있는 요즘 다양한 문화의 옷을 입고 개방성을 특징으로 불신자들, 젊은이들의 발걸음을 교회로 돌리게 할 수 있다. 실제 현재의 많은 메가처치들이 이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예배의 본질을 잃어버리게 할 수 있고, ‘드리는’ 예배가 아닌 ‘구경하는’ 예배가 될 수 있으며 예배라는 이름으로 인간의 즐거움과 오락을 더 추구하게 될 위험성이 존재한다.
구도자 중심의 예배를 기획하고 추구하는 목회자들의 경우, 그 초점이 어떻게 효과적으로 전도해서 교회에 사람들을 더 많이 불러 모을 수 있느냐에 있지, 성도 개인으로 하여금 제자도의 삶을 살게 하고 또 교회로 하여금 복음의 본질을 회복하여 대사회적인 공신력을 회복하는데 목적을 두고 있지 않고 있다. 즉 많은 구도자 중심의 교회들이 교회를 찾아오는 개인들의 피상적인 욕구와 흥미와 관심을 더 잘 충족시켜주는데 그 초점이 있다.
그러나 이 모델은 이미 윌로우크릭교회의 자체 보고서 [발견(Reveal), 국제제자훈련원 역간]에서 거론되고 있는 바와 같이 개교회의 유지나 성장에는 일시적 도움을 줄지 모르나, 성도들 영성의 지속적인 성장과 성숙에는 큰 문제를 안고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대중을 향한 문화적 접근은 물론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이들이 말하는 문화적 사역이란 교회의 문화적 취향을 바꾸는데 그치기 쉽고 복음의 본질적인 가치와는 얼마든지 무관할 수 있으며 하나님중심이 아니라 사람중심으로 흘러갈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제안된 순서의 특징
앞에서 제시된 예배의 순서는 기존의 예배에서 보다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 온다. 제시된 예배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예배자의 자세이다. 목회자 중심의 예배에서 예배드리는 성도중심으로 예배의 모습이 바뀌어 진다. 즉 “구경하는 예배”에서 “드리는 예배”로의 변화이다. 인간중심의 예배에서 하나님께 경배 드리는 예배로의 변화이다. 그리고 예배자의 직접적인 죄의 고백이 있으며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응답이 있다.
둘째, 하나 된 예배공동체로서의 모습을 갖추게 된다. 집례자 중심의 예배에서는 개인적이며 비협조적인 예배의 형태를 갖게 되지만 회중중심의 예배에서는 전체가 유기적이며 협력하는 예배공동체의 모습이 된다.
셋째, 기복적이며 미신적인 예배의 형식으로 부터의 탈피이다. 그동안 한국 개신교회에 만연되어 왔던 물질적 축복과 은사의 강조로부터 하나님을 경배하는 경배의 예배로 변화가 되게 된다. 또한 깊숙하게 자리 잡고 있는 여러 가지 미신적 요소들이 제거되며 예배의 혼란을 막을 수 있다.
넷째, 예배의 순서를 통하여 자신이 드리는 예배의 의미를 잘 파악할 수 있다. 질서 있고 조화 있게 구성된 예배 순서를 통하여 예배자들은 자신이 지금 드리고 있는 예배의 의미를 알고, 다음에 이어지는 순서의 의미까지 알게 되어 역동적인 예배, 활력 있는 예배가 되게 한다.
다섯째, 경배와 참회와 말씀과 감사와 은혜와 파송으로 이어지는 질서 있는 예배이다. 각 예배의 요소 안에서 충분히 그리고 바르게 위치한 예배순서를 발견케 된다. 기독교 예배는 경외심에서 출발하여 용서함을 받아 헌신하는 방향으로 진행되며,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시작하여 아들을 통하여 성령의 영감을 간구하는 방향으로 진행된다.
여섯째, 말씀의 예배와 성만찬의 예배의 조화 있는 균형이다. 말씀의 예배와 성만찬의 예배를 통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그리스도의 구속적 행위를 깨닫게 된다. 또한 예배에 임재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케 된다.
이러한 새로 제시된 예배 순서는 한국개신교회의 주일 낮 예배에 있어서 좋은 모델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그리고, 예배 집례자나 예배 하는 공동체 모두에게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의 감격을 누리게 될 것이다.
한국 개신교회 주일 낮 예배의 효과적 운영 방안
앞에서 제시된 예배의 순서가 아무리 좋다고 하더라도 이것만 가지고 예배가 조화 있고, 질서 있게 드려지는 것은 아니다. 예배가 예배되기 위해서는 예배 집례자와 예배드리는 회중이 예배의 의미를 바로 깨닫고 하나님을 향하여 바르게 예배드릴 때 제안된 예배순서는 그 가치를 발하게 될 것이다.
A. 예배집례자의 예배운영의 방법
예배 집례자는 다른 사람들을 대신하여 공적인 기능을 담당하는 사람으로 하나님의 제단에서 제사장적 의식이나 희생의식을 맡은 사람이다. 예배인도자는 예배를 인도할 때, 그 자신만을 위하여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회중을 위하여 그리고 회중과 더불어 행동하고 있는 것이다.
예배집례자는 기도하고 증거하며 하나님께 헌신하는 가운데 회중을 한 목소리로 통일시키는 사람이다. 회중은 경외와 찬양과 고백에 있어서 참석한 모든 사람들을 하나로 묶을 대표적인 하나의 목소리를 필요로 하고 있다. 예배집례자는 예배를 전적으로 준비하여야 함은 물론이고 예배의 공동체가 다함께 기도하고 신앙을 고백하며 확신을 얻고 헌신하는 일에 모두가 참여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할 책임이 있다.
이런 예배를 대표하는 집례자는, 내적소명과 외적 확증에 의하여, 요구되는 기도를 인도할 수 있으며 훈련을 통하여 정화된 사람이어야 한다. 예배 집례자는 단독적인 인도자가 아니라 전체 평신도들이 기도할 수 있도록 유도하며 공도체가 가진 여러 은사들이 표현되도록 애쓰는 사람으로서 정당하게 지명된 사람이다.
개신교 전통은 히브리서 6장의 내용에 따라 하나님의 백성 모두를 제사장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러나 믿는 사람들은 모두 제사장이라는 말은 각 성도 개개인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를 대신해서 속죄양이 되신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모이고 하나가 된 전체공동체에 대하여 하는 말이다.
즉 각 사람은 단순히 자기 자신의 제사장이란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고 각 사람은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제사장이란 것을 뜻한다. 이것은 공동체를 말한다. “왕같은 제사장들”로서의 회중의 모든 회원들은 공중 예배에 한 책임을 가진다는 것을 뜻한다.
교회성장과 예배
교회성장의 요소는 예배, 전도, 봉사, 교육으로 예배는 교회의 최대 사명으로 예배에 성공해야 교회가 성장한다. 예배란 하나님을 만나고 적극적으로 응답하는 것이다.
예배 역동의 원리
⑴ 교회성장 형 예배가 되게 하라.
성장하는 교회의 예배는 은혜로운 예배로서 축제적, 우호적, 해방적, 긍정적, 희망적이다.
⑵ 모든 예배를 철저하게 준비하라.
예배는 예배자가 하나님을 만났다고 느낄 수 있도록 영감을 불어넣어야 한다. 따라서 예배가 역동적이고 성령이 임재 하는 예배가 되도록 준비해야 한다. 예배는 영적전투로서 비전기도와 중보기도로 준비한다.
⑶ 가장 은혜로운 설교를 하라.
설교란 사람들의 필요를 채우도록 설교자의 삶을 통해 전하는 하나님의 진리로 목회자의 감동과 사람들의 복지가 분명해야 한다.
교회성장 형 설교는 성경에 기초하고, 성령 충만하고, 그리스도 중심의 설교, 실제적인 설교, 긍정적, 기도가 뒷받침되며, 전도와
선교를 지향한다.
⑷ 하나님을 마음껏 찬양하게 하라.
교회의 예배는 축제로 은혜로운 메시지와 함께 하는 찬양이다. 찬양하고 예배함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는 것이다.
⑸ 기도를 통한 사역을 극대화시켜라.
찬양, 말씀, 기도는 은혜로운 예배가 되게 하고 교회를 성장시키는 거룩한 도구이다.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예배가 되게 하기위해
사역기도와 중보기도는 중요하다.
⑹ 예배가 전도와 양육이 되게 하라.
진정한 예배는 전도로 드려져야 한다. 예배가 전도가 되기 위해서는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임재가 느껴져야 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이해되어야 한다.
⑺ 예배를 습관화, 생활화시켜라.
예배는 삶 전체로서 항상 찬양하고, 기뻐하고, 주님과 교제하고, 하나님을 지속적으로 찾고, 기적을 기대하고, 하나님을 필요로 하고,
죄는 즉시 자백하며, 하나님을 즐거워해야한다.
예배에 대하여 개혁할 사항들
①성찬테이블위에 있는 두 개의 촛불
촛불은 4세기에 로마 황제들의 의전에 사용되었음.
②성직자가 입장할 때 회중이 일어나 노래하는 것
4세기에 로마황제들의 의전에서 유래되었고, 칼빈이 개신교 의식으로 도입하였음.
③성직자의 복장
성직자가 로마 행정관들의 가운을 입기 시작한 것은 330년에 시작되었음.
교회성장형 예배
①예배철학을 정립
각 예배의 성격을 정립하고 목적을 분명히 할 것
②예배 계획을 수립
③거룩한 긴장감이 있어야 함.
역동적(力動的)이어야 함.
④새신자를 위한 예배이어야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