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를 이기는 비법
어렸을 때 나는 공기놀이를 하기를 좋아했다.
나는 뒷마당에 가서 땅에 동그라미를 그리고 공기 돌을 한 줌 주전자에 놓고 한시간 내내 던지곤 했다.
나는 자주 동무들하고 놀면서 우리 각자는 열 개의 공기 돌을 원안에 놓고 돌아와서 돌을 던졌다. 놀이를 계속했을까?
물론이다. 나는 큰 공기 돌 주머니를 갖고 있었다. 나는 이 놀이를 그만 둘 날이 오리라는 생각은 할 수 없었다.
어느 날인가 이미 충분히 나이가 들면 친한 동무들과 땅에서 놀이하는 것이 우습게 보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날을 생각하려고 하지 않았다. 나는 영원히 이 놀이를 하기를 원했다.
어느날 내가 밖에서 연습하고 있을 때,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나는 뒷마당을 넘어서 내 친구를 보았다.
필립이었다. 거기에는 리키와 데니가 있었다. 그들은 농구대 아래 있었다. 그 전에는 한번도 놀아본 적이 없었다. “
우리 게임할거다. 우리는 네 번째 사람이 필요해 같이할까?” 그들이 물었다.
나는 그날 공기 돌을 땅위에 던져 놓고 다시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나는 새로운 열정을 갖게 된 것이다.
나는 농구를 사랑했다. 하루도 나는 학교가 파한 후에 집에 머물러 있지 않았다. 뒷마당으로 뛰어나가 공을 갖고 놀았다.
매일 우리는 어두워질 때까지 놀았다. 금요일에는 특별히 신났다.
왜냐하면 우리는 다음날은 수업이 없기 때문에 부모님들은 우리가 밖에서 늦게까지 있는 것을 허락하셨다.
공을 던지면서 우리는 거의 농구대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놀았다. 그때는 소년기의 아이들에겐 낙원이었다.
이제는 이것이 내 삶의 모든 것이다! 이렇게 말한 이유가 있었다.
길 건너에 사는 렘버트 씨는 와서 여전히 농구를 하고 있다.
그는 어른인데도! 그 당시에 나는 농구 시합을 하지 않는 금요일 밤은 없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나는 심취되어 있었다.
우리는 죄와 싸워서는 승리를 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을 예수님에게 두었을 때 이길 수 있다.
주일날 내가 거의 16살이 되었을 때 우리 가족은 교회에 갔다.
그 날 아침 주일학교 교실에서 앉아 있을 때, 처음보는 소녀가 교실로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이전에 한번도 본적이 없는 아이였다. 그 때까지 나는 한번도 데이트를 해보지 못했다. 그녀가 내 곁을 지나갈 때 나는
그녀를 점찍었다. 그리고 테이트를 하면 참 좋겠다고 생각했다. 집으로 돌아와서 아버지에게 무리한 부탁을 했다.
“아빠, 금요일에 테이트를 할건데 아빠 차를 써도 될까요?” “너 데이트 약속있니?” 아빠가 물었다.
아마도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남자가 되어가는구나 생각하며 기뻐하시는 듯했다. “아직은 아니예요?” 내가 대답했다. “
그러나 아빠가 차를 쓰게 해주시면 여자친구와 함께 밖으로 나가려고 해요.” “그 아이가 누군데.” 아빠가 물었다. “
지난 주에 교회에 나온 아이예요.” 내가 말했다. “좋아, 쓰거라” 아빠가 대답했다. “네가 데이트를 하게 된다면 써도 좋다.”
나는 다음 일요일 까지 기다리기가 힘들었다. 교회가 끝나자마자 나는 직선코스로 그녀에게 다가갔다.
사소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한마디 던졌다. “금요일 밤에 무엇하니?” 내가 물었다. “아무것도 안해.” 그녀가 대답했다.
“왜 그런데?” “글쎄, 이번 주말에 바바라 스트라이젠드 영화가 들어와. 함께가서 영화를 보고 나서 피자를 먹으러 가자,
네가 원한다면,” 내가 말했다. “좋아, 재미있겠는걸,” 그녀가 말했다.
다음 주 금요일 밤 나는 그녀를 태우고 나의 첫 데이트를 시작했다. 데이트는 아주 좋았다.
그 다음날 친구들이 날이 밝자마자 일찍 내 집으로 몰려왔다. “너 어디 있었니?” 그들은 이유를 대라고 말했다.
“너를 한참 기다렸어. 우리는 금요일 마다 농구시합을 하잖아!”
그들은 우리의 신성한 일과에 대하여 부주의하게 처신한 나에게 역력히 화가나서 소리쳤다. “왜 오지 않았어?”
나는 어깨를 으쓱하면서 머리를 높이 쳐들고는 말했다. “짜식들, 나 데이트했어!”
그들이 놀랐지만, 나는 그녀에게 전화를 해서 다음 토요일에 함께 나가자고 했다. 그녀는 응락을 하였다.
사실 나는 그 이후 3년 동안 매주 금요일 마다 그녀와 함께 나갔다. 그리고 그녀와 결혼했다. 우리는 1973년에 결혼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마지막으로 금요일 밤에 농구를 했던 때를 기억할 수 없다. 나는 더 나은 것을 발견한 것이다.
죄에 대한 승리는 훈련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사람이 죄에 빠진 것을 알았을 때, 언제나 그 죄에서 깨끗하게 될 것인지 상상하는 것은 때때로 어렵다.
사람이 어떻게 습관적인 죄에서 자유 하게 될 것인가?
확실한 것은, 이것은 삶에 종교적인 율법을 적용해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어떻게 율법이 사람에게 죄에 대한 열망을 일으키는지 보았다. 율법을 엄격하게 적용하므로 죄를
막아보려는 생각은 믿는 자들에게 죄의 비밀무기가 된다. 율법은 항상 죄를 자극한다.
공기놀이나 농구같이 건전한 놀이를 죄에 비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내 경험을 통해서 비유로 사용하고자 하는 것뿐이다. 내가 어렸을 때 공기놀이를 하는 것을 그만두어야 한다고 말했다면,
나는 그 생각에 반대했을 것이다. 만약에 누군가 16살 나이의 소년에게 금요일 밤에 농구를 하는 것을 그만둘 것을
요구했다면, 나는 그 생각에 대하여 저항했을 것이다. 나는 두 가지를 포기하는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나는 간단히 다른 일에 사로잡힐 수 있었고 이전 것 보다 더 좋아하게 되었다.
어떤 사람은 멜라니가 나를 농구에서 구했다고 말했다. 이것은 나에게 싸움이 아니었다;
나는 내 마음을 그녀에게 주었고 농구에 대한 마음은 사라져갔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우리를 죄에서 구하는 방법이다!
우리 안에 있는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알았을 때 그리고 그 안에 있는 우리가 누구인지 알았을 때, 우리는 짖지 않고는
살 수 없었던 죄가 매력이 없어졌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는 죄와 싸워서는 승리 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을 예수님에게로 둘릴 때 승리할 수 있다. 이 사실을 바울사도는 골로새3:1-3에서 간결하게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우리는 결코 순수한 결심과 자기 훈련으로는 죄를 이길 수 없다.
이런 부정적인 동기는 우리의 눈을 예수에 대하여 감게 하고 죄에 대하여 뜨게 한다.
우리는 그분에게 초점을 두어야 한다. 죄에 대하여 두어서는 안된다. 우리가 예수님과의 사랑에 빠지면 빠질수록,
우리가 단단히 품고 있던 죄는 점점 더 매력을 잃게되어 그것을 버리기를 원하게 된다.
내가 어렸을 때, 우리는 오래된 찬송을 부르곤 했다. 그 노래는 죄를 이기는 하나님의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
당신의 눈을 예수님에게 돌리세요; 그분의 놀라운 열굴을 보세요; 그러면 세상의 일은 이상하게도 그분의 영광과
은혜의 빛 안에서 사라지고 말아요.” 죄에 대한 극약은 자기 노력이 아니다. 예수 외엔 치료약이 없다.
뿌린 것을 거둔다.
죄를 극복하기 위해 집중하면 승리를 거둘 수 있다는 생각은 문제에 대한 완전히 잘못된 접근방법이다.
우리 마음을 육체에 두는 것은 승리를 하는데 실패를 가져올 뿐 아니라, 이 것은 실제적으로 우리의 실패를 영속시킨다.
율법주의자는 항상 우리의 행위에 초점을 둔다, 그러나 은혜가 다스릴 때 우리는 예수에게 초점을 둔다.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롬8:5-6)
바울은 당신이 무엇에 마음을 두던지 그것이 당신의 행동을 결정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어떤 사람이 항상 그의 마음을 농어 낚시에 두고 있다면, 그가 어떻게 고기잡이 배를 살 것인가를 계산하는 것은
시간의 문제일 뿐이다. 축구에 마음을 두고 있는 사람은, 휴일 날 텔레비젼 앞에 있게 될 것이다.
또는 운동장에서 친구들과 공을 차고 있을 것이다.
만약 사람이 육체의 죄에 마음을 두고 있다면, 그 마음에 따라서 행동을 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것이다.
사람이 죄를 극복하기 위하여 죄에 집중하게 되면 이것은 실패를 보증하는 것이다.
하나님께 도와달라고 부탁해도 변하는 것은 없다. 하나님은 구원받기 전에 죄를 극복하도록 우리를 도왔던 것 보다,
구원 이후에 죄에서 빠져 나오려는 우리의 노력을 더 축복하는 것은 아니다.
그분은 죄에 대하여 승리를 쟁취하려는 우리의 시도가 쓸모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우리의 시선을 예수를 향하여
두기를 원하신다. 우리의 행위를 통하여 승리를 얻으려는 노력을 할수록, 그분은 우리가 우리의 방법에 완전히 지칠 때
까지 인내하면서 기다리신다. 그분은 우리 자신이 할 수 없는 것을 우리를 위해 하시길 원하신다.
이때가 바로 그분의 응답을 받을 준비가 된 시점이다.
얽어매는 거짓말
죄에 대하여 자유를 경험하는 첫걸음은 죄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태도를 이해하는 것이다.
특정한 죄에서 놓여난 많은 믿음의 사람들은 그들이 죄를 사랑하였다는 잘못된 믿음에 서 있었다.
그들은 사랑했던 것으로부터 자유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고 가정한다.
“나는 내 자신을 미워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서로 소개한 이후에 처음 던진 짐의 말이었다.
그는 나와 만날 스케줄을 잡고 “개인적인 문제”데 대하여 이야기 하고자 했다. “왜 자신을 미워합니까?”
나는 그에게 물었다. 짐은 자신의 문제를 나에게 이야기하였다. 그는 포르노에 중독되어 있음을 알았다. “
나도 어쩔 수 없어요.” 그는 말했다. “나는 포르노 영화를 좋아하게 되었어요.
나는 나에게 그런 것을 더 이상 보아서는 안 된다고 말했지만 어느새 시계추처럼 비디오가계의 카운터 뒤어서
대여 불가능한 비디오를 빌리고 있는 것입니다.”
짐은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죄에 묶어 놓았던 똑같은 거짓말의 희생자가 된 것이다.
그는 자신을 미워하며 죄를 사랑한다고 고백했다. 사실 짐은 자신을 알지 못했다.
그리고 그는 틀림없이 죄를 사랑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완전한 절망의 자리에서 그 죄를 나에게 가져온 것이다.
그 주간에 나는 짐과 그를 자유케 할 수 있는 진리에 대하여 나눌 수 있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8:32). 하나님의 진리는 언제나 사람을
자유케 한다. 이 말씀에 함축된 내용은 진리가 사람을 자유케 하지만, 거짓은 사람을 묶는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속박을 경험하는 만큼, 그는 거짓을 믿게 된다. 그러나 그가 진리를 알게될 때, 그는 자유를 발견하게 된다.
죄는 그리스도인에게 냉혹하다
짐은 비밀스런 죄를 사랑한다고 믿었다. 사실 그는 전혀 그것을 사랑하지 않았다. 그는 죄를 미워했다.
그는 죄를 사랑한다고 오해했는데 이는 그가 그것을 탐닉했기 때문이다.
그가 진정 그 죄를 사랑했다면 그는 절대로 내 사무실에 와서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완전히 만족하여 그의 죄에 머물러 있을 것이다. 그가 감정적으로 비참해 진 것은 그가 미워하는 죄의 노예가
되었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죄의 경험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 ---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롬7:15,19)
바울은 정직하게 죄를 지었다고 고백한다. 나는 그가 정직한 것이 맘에 든다.
당신이 개인적인 죄와 싸운 유일한 사람으로 생각하지 말라.
신약의 대부분의 책을 쓴 이 사람도 공개적으로 그가 죄와 힘겹게 싸웠던 날들을 인정하고 있다.
바울은 그가 죄를 지었지만 전혀 그것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확신하고 있다.
죄에 대한 그의 서술은 로마서 7:15-25절에 나온다. 그의 싸움을 서술한 다음에 그는 24절에서 선언한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바울은 죄 때문에 감정적인 고통을 경험한다. 이것은 결국 죄와 싸우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경험이다.
어떤 사람들은 죄를 즐기는 동시에 죄를 미워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만약 당신이 죄를 미워하다면, 그 죄와 싸우지 않을 것이다.
이 말을 들을 때 당신의 마음에 떠오르는 죄가 있는가? 죄에 대한 당신의 진정한 태도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므로 죄의 권세에서 자유할 수 있다. 당신이 죄로 돌아가고 이것을 즐긴다고 해도, 이것이 죄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믿지 말라. 성경은 말하길 죄는 잠시 즐거움을 주지만 결국에는 믿는 자의 삶에 쓴 맛으로 변한다.
어떤 사람들은 죄를 즐기는 동시에 죄를 미워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만약 당신의 죄를 미워하다면, 그 죄와 싸우지 않을 것이다.
당신이 죄를 즐긴다는 사실은 당신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단순히 죄란 즐길만하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짐은 이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가 포르노그라피를 사랑한다는 거짓말을 받아들인 것이다.
죄는 그리스도인 속에 거주한다.
“내 자신을 미워합니다.”라는 짐의 선언은 그가 믿고 있는 다른 거짓말을 드러낸다 -
죄가 그를 포로로 삼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을 잡고 있는 죄로 자신을 확인한다.
그는 포르노그라피는 옛사람의 일부라고 믿는다. 그는 그의 죄와 자신의 정체성 사이의 구분을 못한다.
결과적으로 그는 자신을 가장 악한 적으로 간주한다.
짐의 오해는 그리스도 안에서 정체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일반적인 것이다.
자신이 누구인지 알기 전에는, 자신에 대한 개념이 행동과 정체성을 하나의 실체로 융합시킬 것이다.
성경은 죄에 대하여 분명하게 가르친다. 즉 그리스도인이 죄를 지으면 그 죄는 그가 어떤 존재인지를 반영하는 것이
아니고, 그 안에 계셔서 활력을 주는 그리스도를 의지하지 않았을 때 그가 어떻게 행동하는가를 반영하는 것이다.
죄의 행위에 대한 바울의 서술에서 그는 두가지 점을 분명히 했다.
첫째는 그가 얼마나 죄를 미워했는지를 표현한다.
그는 자신의 정체성과 그 안에 있는 죄의 권세 사이의 차이점을 규명한다.
두 번째로 그가 죄를 범했을 때 죄를 지은 자는 더 이상 그가 아니고, “내 안에 거하는 죄”라고 주장한다. (롬7:17,20)
바울이 이말을 했을 때, 그는 죄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려고 한 것인가?
그는 어떤 다른 사람이 하는 것 처럼 “악마가 나를 그렇게 만들었다?”고 둘러대는 것인가? 절대로 아니다.
바울은 그가 저지른 선택에 대한 책임을 완전히 받아들인다. 그리스도인이 죄를 지었을 때, 그것은 자신의 본성과
모순된 것이라고 그는 단호하게 명시한다. 죄에 대해 언급하면서 그는 그가 아닌 그 안에 있는 권세를 밝혀냈다.
몇몇 믿는 사람은 각각 우리 안에 죄의 행동으로 이끌어 가는 권세가 있다고 의식하고 있다.
성경은 이 권세는 우리의 육신 안에 거주하고 있다고 말한다.(롬7:23). 그 권세는 우리가 아니다.
우리가 승리를 경험하길 원한다면 이 사실을 깨달아야만 한다.
내 아들 엔드류가 20살이었을 때 그는 공사장에서 떨어져 등이 부러졌다. 그의 부상은 수술을 필요로 했다.
만약에 의사가 어쩌다가 수술후에 스폰지를 그의 몸 안에 넣고 꼬맺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겠는가 상상해 보자.
수술을 한지 며칠 후에 의사가 환자를 돌보기 위해 엔드류의 병실에 왔다면 이런 대화가 오갔을 것이다.
“느낌이 어떻습니까, 젊은이?”
“선생님, 무엇인가가 심각하게 잘못된 것 갖습니다. ”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무엇이 잘못되었나요?” 의사가 묻는다.
“글쎄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어요. 첫째는 수술 후 나는 갈증이 해소가 안돼요. 물을 아무리 마셔도 안돼요.
그리고 선생님 다른 점도 있어요. 수술실에서 나온 이후에 부풀은 것이 꺼지지 않아요.”
“흠,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검사를 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 의사가 말했다.
“간호원, 이 환자의 스케줄을 잡아 빨리 엑스레이를 찍어보세요.”
몇 시간이 지난 후에 의사가 방으로 돌아온다. 그는 양같이 순한 걸음으로 침대에 온다. “당신의 문제의 원인을 찾았어요.
당신에게는 잘못된 것이 없습니다. 당신 안에 잘못된 것이 들어있을 뿐입니다.
이 바보같은 이야기는 그리스도인이 안에 거하는 죄와 관계하는 정확한 방법을 보여주고 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나는 실제적으로 내적으로 악한 사람일 것이라고 믿었다.
나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자 하는 열망이 있었지만, 그러나 그 생각을 한 것은 나 자신의 또 다른 면이라고 보았다.
나는 내 안에 살면서 내 삶을 조절하기를 원하는 악한 쌍둥이를 갖고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과 그의 안에 거하는 죄를 강하게 구분한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내가 이로 율법의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롬7:16-20)
이 글은 악한 사람의 고백처럼 들리는가?
이 글은 죄를 사랑하는 자의 소리 같은가? 바울은 자신은 행하길 원치 않은 그 일을 범했다고 말했다.
그는 안에 선을 행하기 원함은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행동은 즉시 다르게 드러났다는 것이다.
이 곤경이 당신의 경험과 비슷한가? 당신 안에 있는 무엇이 당신을 죄로 끌고가는 것을 느꼈기에 당신은
나쁜 사람이라고 추측하였는지 모르겠다. 당신 안의 이런 경향은 당신이 아니다. 당신 안에 있는 무엇이다.
당신은 아니다. 바울은 계속해서 말한다.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롬7:21-23)
그리스도인이 악하지 않음을 깨닫는 것은 놀라운 발견 아닌가? 그리스도인에게는 악한 무엇인가가 있다.
그러나 그 자신은 악하지 않다. 바울은 우리의 이런 상황을 완전하게 서술한다. “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그는 죄의 권세와 자신의 정체성 사이의 차이점을 깨닫고 있다. 그는 자신을 악한 사람으로 보지 않는다.
도리어 악한 것이 그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승리의 열쇠
우리가 우리의 적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닭았을 때 우리는 비로서 승리를 향한 첫걸음을 내딛는 것이다.
원수는 우리 몸 안에 있는 죄의 권세이다. 우리 자신과 안에 거하는 죄 사이의 차이점을 구분하면 우리는 승리를 향한
두 번째 걸음을 내디딜 수 있는 자리에 있는 것이다.
이 걸음은 바울에게서 제시된 중요한 질문에 대한 답을 포함하고 있다.
바울은 롬7:24절에서 죄에 관하여 궁극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가 죄를 이기려면 올바른 질문을
해야한다. 내가 그리스도인이 된지 29년 동안 나는 잘못된 질문을 했었다.
잘못된 질문은 절대로 올바른 답을 끌어내지 못한다. 내 죄에 관하여 나는 때때로 이렇게 물었다.
“승리를 체험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다른 때는 나는 기도했다. 주님, 어떻게 죄를 극복할 수 있습니까?“
바울은 그렇게 질문하지 않았다. 그는 승리의 열쇠는 무엇을, 어떻게에 대하여 묻는다고해서 오는 것이 아님을 알았다.
죄를 이기는 승리의 열쇠는 누구냐에 있다. 무엇을, 어떻게라고 묻는 것은 사람이 죄를 이길 수 있는 계획과 방법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우리의 죄를 향한 하나님의 준비는 계획이 아니라 한사람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예수와 함께 비상하라.
우리 안에 죄가 거한다는 원리는 모든 믿는 자들의 삶의 실제다.
우리가 물리적인 몸 안에 사는 한, 이 원리는 우리가 염두해야 할 힘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예수를 통하여 죄의 권세에 대한 해독제를 주었다.
롬7장에 이 문제에 대한 긴 설명을 한 후 바울은 8장에서 명료하게 이 진리를 내세운다.
2절;“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매 순간 우리가 완전히 그분께 의존할 때
그분은 우리를 통하여 그의 생명을 드러내고,
우리는 죄에 대하여 승리를 경험하게된다.
죄와 사망의 법은 항상 존재하고 있어서 그리스도인을 모든 순간 독립적으로 살게하려고 한다. 그러나 다른 법이 있다.
그 안에서 그리스도인이 쉴 수 있는 법이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다. 이 법은 항상
사망의 법을 대체한다. 우리가 그분을 믿으면, 예수님은 절대로 죄와 사망의 법을 이기는데 실패하지 않는다.
뉴욕의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에서 뛰어내린 한 사람에 대하여 이야기 한다고 상상해 보자.
당신의 마음에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는가? 당신은 그 사건에 대하여 많은 질문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묻지 말아야 할 질문이 있다. “그는 떨어졌나요?” 당신은 중력의 법칙을 알기 때문에 그 사람이
떨어졌을 것이라고 추측하게 된다. 이것은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는 우주의 법칙이다.
그러나 당신이 지금 행글라이더를 타고 있는 사람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고 있다면 어떻게 되는가?
당신의 마음의 그림은 즉시 바뀔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은 다른 법을 즉 공기역학의 법칙을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해진 정보에 의해서 당신은 그 사람이 떨어지는 그림을 그리지 않고 반대로 뉴욕의 하늘을 날아오르는 그를 보고
있을 것이다. 당신은 중력의 법칙을 인식하고 있지만 이와같은 상황에서는 공기역학의 법칙이 중력의 법칙을
대체한다는 것을 또한 알고 있을 것이다.
그 사람이 행글라이더를 타고 날을 때 중력의 법칙은 중지되었는가? 절대로 아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더 높은 법안에서 쉬고 있었다. 이와같이 믿는 자들도 그렇다.
죄의 법이 항상 그리스도인 안에 있지만 믿는 자가 그리스도의 충만한 가운데 쉬고 있다면 죄와 사망의 법은 드러나지
않는다. 매 순간 우리가 완전히 그분께 의존할 때 그분은 우리를 통하여 그의 생명을 드러내고, 우리는 죄에 대하여
승리를 경험하게된다.
만약에 행글라이더를 타는 그 사람이 거기에서 독자적으로 역할하기로 결심했다면 어떤 일이 일어나겠는가?
그렇게 하기로 결심한 그 순간 중력의 법칙은 다시 작동하여 그는 즉각적으로 떨어지게 될 것이다.
만약 그가 행글라이더에서 분리될 것을 선택하였다면, 그가 떨어지는 것에 대하여 놀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사실, 그들은 다른 것을 기대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 안에 있어서 매 순간 생명의 원천인 주님께 의존되어 있다면, 그는 죄에 대하여 승리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믿는 자가 예수를 떠나 한 몫을 하겠다는 순간 그는 죄를 지을 것이다.
그에게는 다른 가능성은 없다. 거기에 중간지대란 없다.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에게 완전히 의존하기를 선택하든지 아니면 놓던지 해야한다.
우리의 삶이 그분과의 친밀함에 몰입되어있다면 승리는 우리 안에 있는 그분의 생명의 자연스런 표현이 된다.
우리는 주님 사랑의 부드러운 미풍을 따라서 움직이기 때문에 아래로 당기는 안에 거하는 죄를 넘어서 위로 날게 된다.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육체에서 살고 있는 한 그리스도인은 죄의 현존에서 자유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은혜가 믿는 자의 삶을 다스릴 때, 그는 죄의 권세에서 자유함을 발견할 것이다.
물론 하나님은 우리가 선택하여 행하기 원한다면 죄의 땅에서 노는 것을 허락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당신의 죄에서 눈을 들어 당신 옆에 있는 분을 눈여겨 보라고 용기를 주고 싶다.
당신이 그분의 영광스런 아름다움을 보고 그분의 매혹적인 목소리를 듣는다면, 당신의 죄를 떠나 그분을 따르고
싶어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 이후로는, 왜 뒤를 돌아보고 싶어하겠는가?
기 도
사랑하는 주님
당신은 내 삶의 모든 죄를 알고 계십니다.
내가 비록 그 안에서 즐거움을 발견했어도 그 죄들을 미워한다는 사실을 보여주시니 감사합니다.
나는 나의 죄들이 진실한 내가 누구인지를 반영하는 것이 아님을 깨닫습니다.
이 관점에서 더 나아가 내 마음을 죄에게 두는 것이 아니라 당신에게 드립니다. 주
예수님 나는 내 자신을 죄에서 구원할 수 없습니다.
나는 당신이 죄의 권세를 이기고 승리하게 할 것을 믿습니다.
나로 당신의 사랑을 받아들이게 하셔서 당신과 친밀한 관계에 있게 하시고 나의 죄에서 손을 떼게 하소서.
당신이 주신 자유를 경험하게 하실 것을 믿습니다.
질 문
1. 골3:1-3절을 읽으라. 죄의 권세를 넘어서 자유를 찾기 위해서, 우리의 마음을 어떻게 그리스도에게 맞추어야 하는가?
이 글은 바울이 롬8장에서 말한 우리 마음을 육체 위에 두는 것과 어떻게 관련되는지를 논하라.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2. 짐이 믿었던 두가지 거짓말, 짐을 포르노그라피에 노예가 되게 했던 거짓말은 무엇인가?
원수가 그리스도인에게 죄를 이기고 승리를 경험하지 못하도록 하는 다른 일반적인 거짓말들을 써보라.
당신의 죄라고 믿었던 특별한 죄를 규명하라.
3. 안에 거하는 죄에 의미에 대하여 논하라.
죄는 그리스도인의 일체성의 한 부분이 아니라고 어떤 구절이 증거하는가? 롬7:16-20절을 당신의 말로 바꿔말하라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내가 이로 율법의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4. 개인의 죄를 이기려고 할 때 그리스도인들이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방법들은 무엇인가?
롬7:24-25절의 의미를 설명하라.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5. 죄와 사망의 법은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은 무엇인가?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을 경험하는가?
6. 당신은 드러난 죄 가운데 사는 그리스도인 친구와 어떻게 관계하겠는가? 이 사람에게 무엇이라고 말하겠는가?
그를 도와 그리스도를 통한 자유를 얻게 하기 위해서 어떤 말씀을 제시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