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이란 무엇인가/김세윤
구원이란 무엇인가
개요 제1과 우리가 구원받아야할 이유 ① 구원의 포괄적 개념 ② 죄의 본질은 하나님에 대한 옳지 않은 태도 ③ 자기 주장 의지로 하나님을 떠나는 인간 ④ 자기 주장 의지는 하나님같이 되고자 하는 의지 ⑤ 죄는 삼중적인 소외를 가져온다 제2과 사람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는가? ① 사람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는가 ② 우리가 구원 받아야 할 이유 ③ 문명 낙관론은 금물 제3과 예수의 삶과 죽음과 부활은 구원의 사건이다 ① 왜 예수님이 우리의 구원자가 될 수 있나 ② 목숨을 주기 위해 오신 예수님 ③‘인자’로 오신 분은 인류의 구원자이시다 ④ 메시아는 인류의 죄를 짊어지는 대속 제물 ⑤ 하나님의 구원은 예수님의 죽음 안에서 일어났다 ⑥ 복음의 유일성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속에 있다 제4과 예수의 구속적 죽음에 대한 해석의 성경적 범주들 ① 제사 ② 화해 ③ 구속 ④ 새 언약 제5과 하나님의 구원의 주관적 적용 ① 십자가의 사건이 나에게는 어떻게 적용되는가 ② 믿음의 본질은 선포된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 ③ '주관적 구원 사건'에 대한 성경의 은유들 (의인됨 ,화해함,하나님의 아들됨,새로운 피조물) 제6과 구원의 종말론적 구조 ・시작하는 말 ・예수님의 부활은 사타의 등뼈를 꺾은 사건 ・성령은 구원의 첫 열매에 대한 보증 ・믿음은 하나님의 자원으로 살아가는 삶의 실재 ・고난은 믿음이 실재화되어 가는 과정 ・제자도는 믿음의 종말론적 구조 속에 들어 있다 ・믿음의 삶은 아들의 형상을 닮는 것 ・그리스도인의 고난은 새 생명이 강해지는 과정 제7과 예정과 지키심 ・시작하는 말 ・예정을 이해하는 데는 시간 개념이 중요하다 ・예정 교리는 계시의 밝은 빛에 비추어 이해해야 ・예정 교리의 중심은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계시 ・예정의 교리는 믿음의 미래를 가르치려는 가르침 ・하나님의 구원은 실패하지 않는다 제1과 우리가 구원받아야 할 이유 1. 구원의 포괄적 개념 구원(redemption)이란 포괄적인 개념으로 모든 악과 고난에서 해방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거짓, 증오, 개인적인 결핍이나 아픔, 이웃과의 갈등, 사회적・국가적・국제적 차원의 갈등 등 여러가지 모양으로 나타나는 악과 고난에 둘러싸이고 짓눌려 있습니다. 이런 악과 고난들은 죽음의 증상들로 대개 인간이 겪는 최대의 악이요 고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감기에 걸리면 목이 따갑고, 콧물이 나며, 머리가 아프는 등 감기에 대한 여러 증상들이 나타납니다. 그래서 그런 증상들이 나타나면 우리가 감기에 걸렸으며, 감기의 병균이 우리 몸속에 역사하고 있음을 압니다. 마찬가지로 죽음의‘병균’이 우리 속에서 역사하여 노쇠 현상들과 질병들을 유발하여 위에서 말한 온갖 형태의 악과 고난을 낳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모든 악과 고난의 현상들은 죽음의 증상들이요, 우리가 그런 악과 고난에 짓눌리고 있다는 것은 우리가 지금 죽음의 힘 아래 놓여 있고 감기에 걸리듯 우리가 죽음에‘걸려’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금 살아 있다고 하지만, 사실은 벌써 죽음에‘걸려’있는 자들이요, 팔십 평생 또는 구십 평생을 지내고 무덤에 이르는 것은 우리 가운데 지금 역사하는 죽음의‘병균’이 확산되어 우리의 존재를 완전히 점령한 결과로 나타납니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우리의 수명이 다하여 육신이 죽는 것은 우리의 현재가 죽음의 상태임을 재확인하는 데 지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은 악과 고난에 짓눌려 있는 인생을‘죽은 자’라고 합니다. 사람들이 보통 말하듯 육신적으로는 살아 있지만 영적으로는 죽어 있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앞서 설명한 대로 인생이 죽음에‘걸려’있다는, 또는 죽음의 권세 아래 놓여 있다는, 또는 죽음의‘병균’에 의해 점령당하여 가는 상태에 놓여 있다는 의미로 성경은 인생이 죽어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죽음가 그 증상들인 모든 악과 고난에서 해방되는 것이‘구원’입니다. 우리가 이‘구원’을 받아야 할 이유는 우리가 이렇게 죽음과 그 증상들인 악과 고난에‘걸려’있기 때문입니다. 2. 죄의 본질은 하나님에 대한 옳지 않은 태도 그러면 이 구원을 어떻게 얻을 수 있습니까?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서는 왜 죽음에‘걸리게’되었는지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죄의 삯은 죽음’(롬6:23)이라고 말합니다. 죽음은 죄의 대가로서, 우리가 죄를 지으면 우리에게 꼭 죽음이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죄가 도대체 무엇이기에 죄를 지으면 죽음이 주어집니까? 죄라면 우리는 보통 여러가지 구체적인 실행 죄들을 생각합니다. 물론 남을 증오하고 악을 도모하는 등 생각으로 짓는 죄, 남에게 욕하여 상처를 주고 거짓말을 하며 해를 끼치는 말로 짓는 죄, 남을 때리고 남의 것을 빼앗는 등 행동으로 짓는 죄가 죄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그 죄들이 생각에서 말로, 말에서 행동으로 발전할수록 더 큰 파괴력을 가지고 앞서 말한 죽음의 증상들인 고난들을 낳는 것도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죄의 본질에 대한 형상에 불과합니다. 죄의 본질은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옳지 않은 태도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죄의 개념에는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것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인간은 자기 의지에 의하여 그리고 자기 힘으로 스스로 존재하는 자가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에게서 창조주 하나님에게서 생명을 받은 존재입니다. 따라서 인간이 자신의 생명의 영위를 위해 창조주 하나님에게 의존하는 태도가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올바른 태도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님께 의존한다는 것은 하나님께 순종한다는 말과 같습니다. 특권은 항상 의무를 수반하는 것이라는 원칙을 내세우며“하나님께 의존할 수 있는 특권을 가진 성도들은 그분께 순종해야 할 의무가 있다”는 설교를 우리는 흔히 듣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대한 의존과 순종은 이보다 훨씬 더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실 하나님께 대한 진정한 의존은 그분에 대한 순종으로 표현되게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대한 의존은 곧 그분에 대한 순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관계를 다음과 같은 예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전지(全知)하시고 사랑이 완전하신 분이므로 그의 지혜와 사랑을 100으로 나타내기로 합시다. 이에 반해 인간은 지혜에서도 사랑에서도 완전하지 못하므로, 나의 지혜와 사랑을 10으로 나타내기로 합시다. 내가 나를 아는 것보다 하나님은 나를 더 잘 아시고, 내가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하나님은 나를 더 사랑하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100의 지혜와 나에 대한 100의 사랑으로 나더러 동쪽으로 가는 길이 생명의 길이라며 그리로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반면 나는 10밖에 되지 않는 지혜와 10밖에 되지 않는 나에 대한 사랑을 기준으로 헤아려 볼 때, 동쪽으로 가는 길은 손해보는 길이며 차라리 서쪽으로 가는 길이 이로울 듯싶습니다. 이때 나의 지혜와 사랑보다 10배나 큰 하나님의 완전한 지혜와 사랑에 진정으로 의존한다면, 나의 불완전한 지혜와 사랑이 제시하는 서쪽 길을 택하지 않고 하나님이 제시하는 동쪽 길을 택할 것입니다. 이렇듯 하나님께 대한 의존은 순종으로 표현되게 마련입니다. 다시 말해 의존과 순종은 동전의 양면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 대한 순종이 없는 의존은 가짜 의존이며, 그것은 또한 미신의 한 특징입니다. 3. 자기 주장 의지로 하나님을 떠나는 인간 앞서 우리는 하나님께 의존하는 태도가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올바른 태도라고 규정했고, 이 의존은 순종으로 표현된다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하나님께 의존하고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올바른 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대한 의존과 순종의 관계일 때 인간은 그분과 올바른 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죄의 본질은 바로 하나님께 대한 이러한 인간의 올바른 태도를 버린 결과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갖지 못한 데 있습니다. 이렇게 올바른 관계를 깨뜨리는 것은 인간의‘자기를 주장하려는 의지(Selbstbehauptungswille ; Self-assertive will)’의 발로의 결과입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께 대해 독립을 선언한 것입니다. 즉 자기의 지혜・자기의 사랑・자기의 힘・자기의 시간 등 자기 속에 내재한 자원으로 자기의 생명과 행복을 추구할 수 있다는 환상 가운데, 하나님께 의존하고 순종하는 것을 속박의 상태로 인식하고, 자기 뜻대로・자기 멋대로 살고자 하나님께 대항하여 자기를 주장하고 독립을 선언한 것입니다. 이것은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께 등을 돌리는 행위입니다. 인간이 온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무한한 지혜・무한한 힘・무한한 사랑・영원 등 무한한 자원을 공급받아 그 자원에 의존하여 살 수 있는 존재로서의 활로를 끊어 버리고 스스로를 스스로에게 닫아 버리는 것입니다. 그 결과 인간은 자기 속에 내재한 극도로 제한된 자원에 갇히게 됩니다. 그리하여 인간은 길어야 100년이라는 제한된 시간, 영원에 비하면 순간에 불과한 시간을 살아갑니다. 자원의 공급마저 떨어져 그 짧은 인생 동안 한 시간 후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는 제한된 지혜와 무슨 일이 일어난들 그 모두를 해결할 수 없는 제한된 힘과, 이웃에 대한 극히 제한된 사랑등으로 살아야 하는 처지입니다. 앞서‘죽음의 증상들’이라고 규정한 모든 악과 고난들은 창조주 하나님께 의존하고 순종하여 그의 무한한 자원들을 계속 공급받기를 거부하고, 그에 대항하여 자기 주장을 함으로써 자기의 제한된 자원에 스스로를 가두어 버리는‘죄’의 열매요 대가(곧 삯)입니다. 인간은 짧은 시간에 제한된 존재이기에 늙고 병들고 죽는 고난을 겪게 되고, 지혜가 제한된 존재이기에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 불안과 근심에 사로잡힙니다. 힘이 제한된 존재이기에 좌절과 실패와 결핍을 맛보며, 사랑이 제한된 존재이기에 다른 사람들과의 갈등 속에서 고통을 당합니다. 이 고난들은 분명히 죽음의 증상들입니다. 이 모두는 인간이 자기 생명의 근원인 하나님께 대항하여 자기 주장을 함으로써 그와의 관계가 끊어지고, 그로부터 분리되어 시작된 죽음의‘병균’이 역사하며 인간들에게 일으키는 증상들입니다. 자기 주장을 하려는 의지로 자기 생명의 창조주인 하나님에게서 분리된 인간은 생명의 근원인 땅에서 분리된 뿌리뽑힌 풀에 비유될 수 있습니다. 그 풀은 그 속에 들어 있는 제한된 수분과 영양분이 있을 때까지만 잠시 살다가 곧 말라 비틀어져 죽고 맙니다. 그의 생명의 근원인 땅에서 더 이상 수분과 양분을 공급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 풀이 땅에서 뽑히는 순간 그 풀의 죽음은 사실상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잎사귀가 마르고 꽃이 떨어지고 시들어 가는 현상을 가리켜 그 풀 속에서 역사하는 죽음의 증상들이 나타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그의 생명의 근원인 하나님께 의존하고 순종하는 올바른 관계를 단절하고 스스로를 스스로에게 닫아 버렸더라도 그는 자신 속에 있는 제한된 자원에 의해 얼마 동안은 계속 존재합니다. 그러나 자원의 제한성 때문에 존재는 고난으로 얼룩지고, 자원이 고갈되어 감에 따라 말라 비틀어지는 풀 한 포기처럼 되어 무덤에 묻히고 맙니다. 4.‘자기 주장 의지’는 하나님같이 되고자 하는 의지 이 진리는 구약의 창세기 3장에 명료하게 선포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태초에 인류의 조상 아담과 하와를 자기의 형상대로 지으시고 그분이 만드신 모든 만물을 다스리고 즐기며 살도록 하셨습니다.(창1:26-30) 이것은 아담과 하와로 하여금 하나님께 의존하고 순종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것들(하나님의 재산, 하나님의 자원)을 먹고 살도록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금지하신‘선악과’를 먹었습니다. 그들은 그‘선악과’를 먹음으로써“하나님과 같이 되리라”는 뱀의 유혹에 넘어가‘죄’를 저질렀습니다. 인간은 의존과 순종의 관계를 유지함으로써 죽지 않고 살 수 있도록 하신 선한 의지(사랑)의 하나님께 대한 신뢰와 순종을 저버리고, 악과 고난만을 가져다 주는 사탄에게 순종한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불신과 불순종의 동기는 스스로‘하나님같이 되고자’하는 의지였습니다. 사탄은 피조물인 인간으로 하여금‘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하는 의지’곧 자기 주장을 하려는 의지를 갖도록 항상 충동질합니다.(창3:5) 하나님께 대한 의존과 순종은 인간의 비하이며 속박이라고 생각하게 하고, 스스로 주가 되어 뜻대로 멋대로 살 수 있다고 생각하게 하고, 온 세상의 중심이 자신이라고 생각하게 합니다. 그러나 이 충동에 넘어가는 순간, 인간은 온 우주의 창조주이시며 자기의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에게서 분리되어 그의 무한한 자원에 더이상 참여할 수 없게 되고 자신의 제한된 자원에 갇히게 됩니다. 더욱이 인간은 스스로‘하나님같이’되는 것 즉 자신이 주가 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사탄에게 순종하는 사탄의 종이 되고 맙니다. 이와 같이 스스로‘하나님같이 되려는’망상 가운데, 진리와 의와 사랑으로 다스리시는 생명의 주 하나님의 통치에서 등을 돌리고 거짓과 악과 고난으로 다스리는 사탄의 통치권으로 들어가는 것이 죄로 인한‘타락’이요 죽음의 시작입니다. 우리는 여기서‘인본주의’곧 창조주 하나님을 부인하고 인간을 우주의 중심이라 선포하고 인간성을 만물의 척도로 삼으며 인간이 스스로의 주가 되어야 한다고 고취하는 사상이 바로 태초에 아담과 하와를 스스로‘하나님같이’되도록 유혹했던 뱀의‘사상’임을 알게 됩니다. 인간을 높이고 생명으로 이끄는 사상이 아니라, 인간을 하나님께서 원래 지으신 하나님의 형상의 고양된 지위에서 떨어지게 하는, 곧 인간 이하로 비하하는 사상이요 죽음으로의 사상임을 깨닫게 됩니다. 스스로‘하나님같이’될 수 있다는 사탄의 꾐에 빠져 하나님에 대해‘자기 주장’을 하고 그 분으로부터 소외되어 사탄의 종으로 자기의 제한된 자원에 갇히게 된 인간은 자신의 자원에 빈곤을 본능적으로 감지하고서는 자신의 자원을 늘릴 수 있는 한 가지 길을 추구하게 됩니다. 그것은 곧 다른 사람의 자원을 빼앗는 길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굴종시켜 그들의 자원으로 자신을 섬기도록 하여 자신의‘삶’을 풍요롭게 하려는 것입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그 길이 인간을 죽음으로부터 건져낼 수 있는 길은 아닙니다. 다만, 죽음의 증상들을 약간 완화하는 데 불과합니다. 그러나 빈곤한 자기 자원에 갇히게 된 모든 인간들은 그 길이‘삶’의 길인 양 서로에게 자기를 주장하며, 상대를 자기에게 굴종시키고, 상대의 자원을 착취하려 합니다. 그래서 인간 사회가 치열한 생존경쟁과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의 정글 곧 금수의 세계가 되어 버렸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모든 갈등과 그로 인한 고난이 여기에서 나오게 됩니다. 만인이 만인과 더불어 다툼으로 빚어지는 인간 사회의 갈등과 고난은 개인과 개인뿐 아니라 집단과 집단, 국가와 국가 사이에도 나타나고, 크게는 세계 대전으로까지 나타나 수천만이 살상되기도 합니다. 이 모든 고난은 궁극적으로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자기 주장을 하여 자신의 제한된 자원에 갇힌 데서 기인합니다. 이렇게 죄의 본질인‘자기 주장을 하려는 의지’는 인간을 하나님으로부터 소외시키고 그분과 갈등을 일으키며, 동시에 동료 인간들로부터도 소외시키고 그들과도 갈등을 일으킵니다. 5. 죄는‘삼중적 소외’를 가져온다. 사실 죄는 삼중적인 소외를 가져옵니다. 하나님으로부터의 소외, 이웃으로부터의 소외, 그리고 진정한 자아로부터의 소외를 가져옵니다. 인간의 본질은 피조물입니다. 인간의 진정한 실존은 창조주 하나님께 의지하고 순종하는 관계에 있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자아입니다. 우리의 자원이 무한하다고 환상을 가지면서 우리를 하나님으로 만들때 우리는 진정한 자아를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자기 주장을 하게 되면 자아를 찾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진정한 자아를 잃어버립니다. 죄는 자기를 자기로부터 소외시키는 삼중적인 소외를 가져옵니다. 인간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소외되었을때 나타나는 정신병, 불안과 같은 신경증 등이 다 여기에서 옵니다. 이웃과의 갈등 속에서 오는 모든 고난과 궁극적으로 인간의 제한된 자원에서 오는 모든 고난이 바로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된 죄 때문에 오는 것입니다. 죄에는 두 가지 죄가 있습니다.‘원죄(原罪)’와‘실행 죄(失行罪)’입니다. 지금까지 다룬 것은 원죄입니다. 자기를 하나님으로부터 닫아 버리는 것이 원죄라면, 원죄의 결과로 나타나는 현상으로서의 죄를 실행 죄라고 볼 수 있습니다. 실행 죄에는 생각의 영역에서 일어나는 죄(예를 들면 증오・미움・시기), 말의 영역에서 일어나는 죄(남을 욕하고・남에게 상처 주는 언어), 행동으로 나타나는 죄(폭력)가 있습니다. 생각에서 말로 그리고 행동으로 죄가 발달할수록 파괴력이 큽니다. 이제 인간은 자기를 스스로 닫아 버림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무한한 자원에서 분리되어서 자기의 제한된 자원에 갇혀 모든 악과 고난의 상태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구원이란 인간이 이러한 악과 고난의 상태에서 해방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 구원이 이루어질 수 있는지를 계속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제2과 사람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는가
1. 사람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는가 이러한 죄가 있는 곳에는 항상 죽음의 요소가 따라 다닙니다. 대지로부터 뿌리 뽑혀 땅에서 분리된 나무가 제한된 양분으로 살다가 죽듯이, 인간은 100년이라는 짧은 세월을 마치면 죽고 맙니다. 죄 때문에 일어나는 불안, 증오, 상처라든가 서로 싸우고 죽이고 하는 모든 악과 고난은 죽음의 그림자라고 볼 수 있습니다. 100년 후에 올 죽음이 미리 그 영향력을 행사하는 현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불안해 하거나 증오 속에서 마음에 평안이 없다든가 다른 사람과 상처를 주고 받는 고난 속에 있다든가 하는 사실은 죽음의 그림자가 이미 우리에게 드리워져 있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과 분리된 사람은 사실상 이미 죽은 것입니다. 만일 인간이 스스로의 자원으로 생명과 행복을 추구하고 영위할 수 있다면 구원 받아야 할 아무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자원이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악과 고난이 발생하고, 또한 그 악과 고난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제한된 자원 때문에 일어나는 악과 고난을 우리의 그 제한된 자원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논리적으로 모순입니다. 2. 우리가 구원 받아야 할 이유 우리가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힘이 있다면, 우리에게는 애초부터 구원 받아야 할 이유가 발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이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모순이고 환상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종교, 예컨대 불교나 힌두교나 이슬람교 같은 종교들뿐만 아니라 유사 종교, 가령 마르크스주의나 인류 문명에 대한 낙관론 같은 것들은 인간이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즉 스스로 종교심을 발휘하거나 수양을 잘하면, 또는 선한 행위를 많이 하고 업적을 쌓으면 구원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인간의 힘으로 유토피아를 건설할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처럼 구체적인 계획안은 제시하지 않지만, 문명에 대한 낙관론자들도 이와 비슷하게 인류가 스스로의 지혜를 계속 계발하면 전쟁이 없고 평화로운 유토피아를 언젠가는 건설할 수 있다고 봅니다. 이러한 문명 낙관주의는 계몽주의 이후 19세기의 자유주의에서 절정을 이루었습니다. 인간의 이성을 재발견하고 이성을 계발하여 교육을 시키고 과학과 기술을 발전시킨다면 인간에게 악과 고난이 없고 싸움이 없는 평화와 풍요의 상태에 이를 수 있으리라는 낙관론이었습니다. 그러나 1, 2차 세계 대전은 이러한 낙관론을 잿더미로 만들고 말았습니다. 최고도로‘발달’된 과학과 기술은 인간을 최대로‘파멸’하는 결과를 가져왔고, 바로 인간의 계발된 지성 혹은 인간의 계발된 지혜가 인류 역사에서 일찍이 보지 못한 죄악을 초래하였습니다. 두 세계 대전은 인간의 이성 계발의 한계를 극명하게 드러내고 말았고, 인간의 근본 문제인 악과 고난을 이성의 계발로써는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 이후 신학자들은 죄에 대해 더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었고, 종말론에 대해 더 새롭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3. 문명 낙관론은 금물 이와 같은 사상적인 변천에도 불구하고 오늘날도 문명의 발달에 대해 낙관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인간이 가진 지혜와 이성과 힘으로 언젠가는 모든 악과 고난에서 인간을 해방시킬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만일 인간이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다면, 근본적으로 인간에게는 애초부터 구원 받아야 할 이유가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이 가지고 있는 자원이 완전할 때에만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가진 자원이 제한되어 있음으로 인해 발생하는 악과 고난의 문제를 그 제한된 인간의 자원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은 논리적 모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구원은 인간의 내재된 힘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 밖에 있고 우주 밖에 있는 하나님으로부터만 올 수 있습니다. 우리 밖에서(extra nos), 우리를 위해서(pro nobis) 구원의 힘이 아야 합니다. 우리 밖의 무한한 힘을 가진 초월자로부터 우리를 위해 오는 것이야만, 즉 오직 은혜로 올 때 우리 인간에게 구원이 이루어집니다. ‘복음’은 바로 이러한 제한된 자원 속에서 죽어 가는 인간들에게 하나님이 우리 밖에서 우리를 위하여 오셔서 구원을 이루셨다는‘기쁜 소식’입니다. 그러면 그 구원의 사건이 어떻게 일어났습니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났습니다. 제3과 예수의 삶과 죽음과 부활은 구원의 사건이다 1. 왜 예수님이 우리의 구원자가 될 수 있나 이번 장에서는“예수의 삶과 죽음과 부활은 구원의 사건이다”라는 선포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우리는“예수는 구원자이다”,“예수는 그리스도이다”라는 선포를 많이 듣습니다.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어떻게 알게 됩니까? 우선 믿어야 한다고 말들을 합니다. 그런데 예수를 맹목적으로 믿는 것이 아니라면, 왜 예수가 구원자라는 것을 믿어야 하는지를 우리는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왜 예수님이 우리의 구원자가 될 수 있나 예수가 구원자라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알게 됩니까?‘예수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살펴볼 때, 이 세 단계를 통하여 예수가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구원자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것을 알려면 우리는 예수를 따라다니던 초대 교회 제자들의 처지에서 보아야 합니다. 실존주의 철학의 영향 아래 20세기 전반부 세계 신약학계에 군림한 불트만(R. Bultmann)은 예수의 역사적인 삶과 가르침에 대해서는 알 수도 없으며 알 필요도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단지 예수의 부활 사건을 통해 제자들에게 예수가 메시아요 주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앙 고백이 나타났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최근 더 많은 학자들이 연구한 결과, 그의 이러한 주장은 옳지 않다고 증명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구약이나 유대 문서를 보면 메시아가 부활한다는 가르침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가 부활했다는 확신만으로는 제자들이 예수가 메시아라는 신앙 고백을 할 수는 없었습니다. 부활이라는 사건만으로는 예수가 메시아요, 구원자라는 신앙 고백을 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오직 예수 스스로가 자기가 구원자임을 가르쳤고, 그 가르침이 예수의 죽음으로 인해 헛된 것 같았으나 예수의 부활에 의해 그 가르침이 옳았음이 확인될 때라야만 부활은 예수가 구원자임을 확인하게 되는 효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가 절실히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예수의 자기에 대한 가르침, 곧 예수가 제자들에게 자기를 어떻게 가르쳤는가 하는 것입니다. 2. 목숨을 주기 위해 오신 예수님 예수의 가르침이 한마디로 잘 요약된 곳이 있는데, 그곳이 바로 막10:45절입니다.“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그리 길지 않은 이 한 구절의 말씀 안에 예수의 자기에 대한 이해와 자기의 사역에 대한 이해가 요약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은 구약의 두 예언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단7:13절과 사53장입니다. “인자(人子)”라고 번역된 것은 다니엘서를 반영하고,“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들을 위한 대속물로 주러 왔다”고 기록된 것은 이사야서를 반영한 것입니다. 우리말로 인자(人子)라고 한 번역은 상당히 애매합니다. 정확히 하려면“그 사람의 아들 ”이라고 표현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스스로‘주(主)’다, ‘그리스도’다,‘하나님의 아들’이다. 라는 칭호를 쓰지 않으셨습니다. 사람들이 그런 칭호를 사용하여 예수님께 신앙 고백을 하면 그런 신앙 고백들을 받아들이기는 하셨지만, 직접 그런 칭호를 사용하면서 자기를 나타내 보이지는 않으셨습니다. 그 대신 항상“그 사람의 아들 ”이라는 칭호를 사용하셨습니다(마16:13-20). 그러므로 예수님이 독특하게 사용하신 이 칭호가 무슨 뜻인지를 알아본다면, 우리는 예수님이 스스로를 어떻게 생각하셨는지, 또한 예수님 스스로가 가져 온다고 주장한 구원이 어떤 것인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신학자들 사이에서 이 칭호에 대한 연구가 최근 집중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3.‘인자’로 오신 분은 인류의 구원자이시다 먼저‘인자’라는 칭호에 대한 대표적인 오해를 간단히 살펴보겠습니다. 첫째,‘인자’라는 칭호는 예수님의 인성을 강조하고‘하나님의 아들’이란 칭호는 예수님의 신성을 강조한다는 일반적인 견해가 있는데, 사실 이 견해는 잘못된 것입니다. 기독교 역사상 고대 교회로부터 그렇게 가르쳐 오기는 했지만, 그 고대 교회가 주로 희랍 사람들이었기 때문에‘이자’라는 예수님의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던 것입니다. 즉 희랍 사람들이 히브리어의 숙어가 무슨 말인지를 제대로 모르는 바람에 고대 교회로부터 잘못 가르쳤던 것입니다. ‘인자’라는 칭호에 대한 두 번째 오해는 이 칭호가 유대 문서, 특히 묵시 문학에 유행하던 메시아에 대한 칭호 가운데 하나였다는 주장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이 스스로를 이렇게‘인자’라고 불렀을 때, 자기가 곧 메시아라는 것을 밝힌 것이었다고 주장하는 책들을 펴내기도 하는데,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선 이 말은 도대체 칭호로 쓰인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유대 문서에서‘사람의 아들’이라는 표현이 더러 나오기는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처음으로‘사람의 아들’이라는 말에‘그’라는 관사를 붙인 표현, 즉“그 사람의 아들”을 하나의 칭호로 만들었습니다. 따라서 이상하게 느껴지기까지 하는 이 칭호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푸는 열쇠는‘그’라는 지시 관사에 있습니다. 유대 문서에‘사람의 아들’이란 말은 많이 나옵니다. 이 말은 단순히‘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셈족 언어의 숙어입니다. 칭호가 아니었습니다. 이 표현에다 예수님이‘그’라는 관사를 붙임으로써 자기가 어느 특정한 사람이라는 것을 지적하고 있음을 나타냈고, 그리하여‘그’라는 관사와 더불어“사람의 아들”은 하나의 칭호가 되었습니다. 단7:13절에‘사람의 아들’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 말은 시편 8편에도 나오고 에스겔에서도 여러 번 나옵니다. 다니엘이 환상 가운데 하나님을 보고 하나님 앞에 구름을 타고 오는 한 분을 보는데, 그분이‘사람의 아들’같이 생겼다고 했습니다. 여기서‘사람의 아들’이라는 말은 칭호가 아닙니다. 어떤 한 분이 나타났는데, 그분이 사람같이 생겼다는 의미의 표현입니다. 그분이 구름을 타고 왔다는 점에서 신적(神的) 존재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구름은 오직 하나님이 나타나실 때에만 동반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천사가 나타나도 구름을 타고 나타났다는 말은 없습니다. 구름이 나타나는 현상은 하나님이 나타나시는 현상입니다. 따라서 다니엘서 문맥을 보면, 구름을 타고 오는 사람의 아들 같은 분이라는 것은‘한 사람의 신적 존재’임을 알 수 있으며 그 신적 존재가‘사람같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자기를“그 사람의 아들 ”이라 하셨을 때, 그리고 종말에 구름을 타고 천사를 동반하고 와서 이 세상을 심판하는 이로 나타난다고 하셨을 때, 분명히 단7:13절을 두고 하신 말씀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그런 신적 존재라는 말씀입니다. 단7:3절에서 다니엘이 환상 가운데 본 사람과 같이 생긴 신적 존재가 7:18절 이하에 해석되어 있는데, 그분이 종말 때에 하나님의 진정한 백성의 대표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자기를“그 사람의 아들 ”이라고 한 것은 자기가 바로 다니엘의 환상 가운데 나타난 하나님의 아들들을 창조하고 대표하는 분이심을 미리 나타내신 것입니다. 구약에서는 천사들도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표현했고 이스라엘 백성들도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으로서 하나님께 의존하고 순종하며 사는 관계를 맺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의존하지도 않고 순종하지도 않아서 이 언약이 깨졌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레미야나 이사야를 통해 새 언약을 세워, 종말 때 하나님을 섬기고 순종하고 의지하는 진정한 하나님의 새 백성을 창조할 것을 예언하시고,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도록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다니엘 7장의 예언도 바로 이러한 새 언약의 예언입니다. 종말에 하나님의 아들이 곧 오셔서 하나님의 진정한 백성을 창조하고 대표하리라는 것을 뜻합니다. 4. 메시아는 인류의 죄를 짊어지는 대속 제물 그러면 왜 하나님이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분명하게 고백하지 않았을까요? 예수님 당시‘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일반적인 이해는 삼하7:12절 이하 말씀의 전통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의 아들로서 다윗과 같은 군사적, 정치적 메시아를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일반적인 이해와는 달리 예수님은 그런 식의 메시아가 되고자 한 것이 아니셨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은 군사적, 정치적 메시아가 아니라 종말에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을 창조하는 그런 메시아로 오신 것입니다. 이사야 42-53장의 이른바“주의 고난받는 종의 노래”의 그 마지막 노래에서, 배역한 이스라엘을 위해 그 종이 그들을 대신하고 대표하여 자기 목숨을 버려 속죄하는 역할을 감당한다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고난받는 종’의 역할입니다. 이사야에서 주의 고난받는 종의 첫 번째 노래라고 할 수 있는 사42:6절에 보면,“나 여호와가 의로 너를 불렀은즉 내가 네 손을 잡아 너를 보호하며 너를 세워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니”라고 쓰여 있습니다(사49:8참고). 주의 종이 새 언약을 세우는 분이라고 합니다. 주의 종이 새 언약을 세우면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이 탄생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조상들과 언약을 맺었듯이 이제 하나님께 완전히 순종하고 의존하는 주의 종을 통해 새 언약을 이루시고 새로운 백성을 창조하시겠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이 두 예언을 종합하여 막10:45절에서 자기의 오신 목적을 나타내셨습니다. 즉 이사야 53장에 예언된 대로 죄인들을 위해‘대신적이고 대표적인 죽음’을 함으로 말미암아 사42:6절에 예언된 대로 새 언약을 세워 하나님의 진정한 백성을 창조하고 대표하는 바로“그 사람의 아들”(단7:13)과 같이 나타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이상의 내용을 알기 쉽게 간단히 종합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예수님 자신과 자신의 과업에 대한 이해는 막10:45절에 가장 잘 요약되어 있습니다.“그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섬기기 위해, 그리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들을 위한 대속물로 바치려고 왔습니다. 여기서“그 사람의 아들”이란 구약의 단7:13절에 나오는“한 사람의 아들 같은”존재를 가리키는 것으로서 예수님이 자기를“그 사람의 아들”이라고 부르셨을 때, 그분은 사실 자기가 단7:13절에 나오는 바로“그 사람의 아들”임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구약과 묵시 문학에서 하나님의 나타남(Theophany)의 전통에 대한 연구로 미루어 볼 때, 우리는 다니엘의 환상 가운데 하늘의 구름을 타고 오는“한 사람의 아들 같은” 존재란 사람의 형상으로 나타나는 신적인 존재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자신을“그‘사람의 아들 같은’”이라고 부르며 바로 그 존재라고 하셨을 때 이렇게 함으로써 자신의 실체(Identity)를 조심스레 내보이시는 것이었습니다. 말하자면,“내가 한 환상 가운데 다니엘에게‘한 사람의 아들’(곧 한 사람)과 같이 나타난 하나님의 아들이다”라고 가르친 것입니다. 그런데 다니엘의 환상 가운데‘한 사람의 아들같이’나타난 신적 존재(곧 하나님의 아들)는 이스라엘의 조상 야곱(하나님으로부터‘이스라엘’이란 이름을 받은 그 개인)이 이스라엘 민족을 자기 안에 내포하듯 대표한 것(Inclusive Representative)과 똑같이 종말에 백성을 자기 안에 내포하듯 대표하는 분이심이 밝혀진 것입니다(단7:18-27). 구약에서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이었고 그러기에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불렸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의 언약에 의해 하나님께 의지하고 순종하며 살아야 하는 관계를 가진 백성임을 말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누차 불순종하여 언약의 관계를 파기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예레미야, 에스겔 같은 선지자들을 통해 하나님의 새로운 백성을 창조할 것을 선언하시고, 다니엘의 환상을 통하여 자기 아들로 말미암아 종말에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을 창조하여 그들로 하여금 자기의 자녀들이 되게 하겠다는 약속을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가 바로 그 약속을 성취하기 위해 온 하나님의 아들임을 깨닫고 하나님의 백성(곧 하나님의 자녀들)의 숙명, 즉 하나님께 의존하고 순종함을 대신적으로 그리고 대표적으로 이루어야 함을 깨달으셨습니다. 그것은 곧 이사야에 의해 예언된 대로 죄인들을 위해 대속의 죽음을 감당함으로 말미암아 그들의 죄 사함을 이루어(사53장) 새 언약을 세우고, 그럼으로써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을 창조하는(사42:6, 49:8)‘주의 고난받는 종’의 역할을 감당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들을 위한 대속물로 주기 위해 왔다”(막10:45, 사53:12참고)고 했습니다. 십자가에서 자기 목숨을 죄인들을 위한 대속물로 주기 전날 밤 제자들과 나눈 최후의 만찬에서 그는 자기의 죽음을 새 언약을 세우기 위한 피 흘림으로 해석함으로써 그들이 마시던 포도주를 상징화하셨습니다(막14:24). 이와 같이 예수님은 다니엘의 예언대로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진정한 백성(즉 하나님의 자녀들)을 종말에 창조하는 사명을 가지셨는데, 이사야의 예언대로‘주의 고난받는 종’의 역할을 감당하여 대속적 죽음을 죽음으로 죄 사함을 이루고 새 언약을 세움으로써 그 사명을 성취한다고 보셨습니다. 이러한 자기 이해를 그의 자기 칭호“그 사람의 아들”에 담아 들을 귀 있는 자에게 나타내려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앞서 관찰한 대로) 그가 하나님을“아바(=나의 아빠)”라고 부르시면서 자기를 믿고 순종하여 종말의 하나님의 백성의 중심체가 될 자기 제자들에게 하나님을“우리 아바”라고 부르게 가르치고 하나님 아들 됨에 함께 참여하게 하여 특권을 나누게 한 것과 근본적으로 일치합니다. 즉 그는 하나님의 독특한 아들로서 제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 사람의 아들”이라는 자기 칭호로 나타낸 자기 이해는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선포와도 일치합니다. 죄악과 고난으로 다스리는 사탄의 주권에서 떠나 자기 안에 체현된 하나님의 의와 사랑의 다스림을 받아들이라는 선포는 곧 창조주 하나님께 의존하고 순종하여 사는 하나님 나라 백성을 창조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5. 하나님의 구원은 예수님의 죽음 안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이제 십자가의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십자가를 볼 때 어떻게 보았겠습니까?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말을 쓰지는 않으셨지만 알쏭달쏭한 말로 메시아적 권위를 주장하고 사죄의 권세를 내세움으로 인해, 유대인들은 예수님께“네가 누구냐”라고 물었습니다(요12:34). 메시아라는 말은 그 당시 유대인들에게 곧 왕이라는 말이기 때문에 그들은 이 말을 근거로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정치적으로 고소하고자 했습니다. 로마의 식민지에서 정치적으로 반란하는 자는 무조건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유대인들은 신21:23절에서“나무에 달려 죽은 자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다”는 율법의 선언을 보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당하게 하여 모든 사람들에게 그가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죽은 것으로 나타내고자 하였습니다. 그들은 그러한 방법으로 예수님을 메시아라고 생각하고 그를 따르는 자들에게 예수에 대해 오히려 환멸을 느끼게 하려고 하였습니다. 가령 예수님을 유대인들이 직접 붙잡아 죽여 버린다면, 예수님의 말씀대로 그들이 전에도 그랬듯이 이제도 선지자를 죽인 백성이 되어 도리어 예수님이 선지자로 높임을 받아 더욱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가 많아질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그런 식으로 예수님을 처치하지 않고 교묘하게 예수님을 정치범으로 몰아 재판받게 하여 십자가에 처형하려 했습니다. 그러면 신명기의 말씀대로 예수가 나무에 달려 죽음으로 인해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가 되는 셈이기에,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모든 제자들로 하여금 예수님이 거짓 선지자이며 예수님이 주장하던 모든 메시아적 행위가 거짓이라는 결론을 얻어 예수 운동을 스스로 종결하도록 하려 했습니다. 결국 빌라도는 예수님의 죄목을 유대인의 왕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라고 써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제자들의 입장에서 볼 때 이것은 큰 일이었습니다. 다윗과 같은 왕으로서의 메시아가 될 것을 기대했던 예수님이 기대와는 정반대로 사실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죽은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환멸과 슬픔을 안고 뿔뿔이 헤어졌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부활이 일어났습니다. 이 부활은 여러가지를 우리에게 말해 주는 사건입니다. 그중에 가장 근본적인 것은 하나님이‘예수님이 옳았다’라고 선포하셨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부활시켰다는 것은 곧 예수님이 옳았음을 하나님이 인정하셨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부활은 동시에 예수님의 가르침이 옳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주장이나 자기가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는 구원자라는 주장이 옳았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알게 되었습니다. 부활로 인해 예수님이 하나님의 진정한 아들로 인정되었다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예수님에 대한 하나님의 저주가 아니라, 예수님 자신의 주장처럼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해 죽은 것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다시 말해, 제자들은 예수님이 자기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저주를 받으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대신해 돌아가셨구나 하는 깨달음을 갖게 된 것입니다. 자기가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을 위한 대속물로 주겠다고 가르치신 것이 십자가에서 완성되었음을 제자들이 깨달은 것입니다. 그래서“예수의 죽음이 곧 우리를 위한 구원의 사건이었다”,“예수가 곧 구원자다”라는 깨달음이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예수가 우리를 위해(우리의 죄를 위해) 죽었다”라는 선포가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공식적인 선포(formulation)가 된것입니다. 이와 같이 이 세 사건, 즉 예수님의 가르침과 십자가와 부활은 연결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십자가를 설명하고, 부활은 십자가가 우리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 사건임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관계를 통해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죽음 안에 하나님의 구원 사건이 일어났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예수님이 곧 구원자다’라는 복음이 선포되기 시작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 운동을 종결시키기 위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유대인들의 죄악을 통해 하나님 당신의 뜻을 성취하셨습니다. 십자가에 예수님이 못박히시는 순간 유대인들은 뭐라고 고백했습니까? 요19:15절에 보면, 빌라도가“너희 왕을 십자가에 못박으랴”고 물었을 때, 유대인들은“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다”고 선언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유대인들의 진정한 왕은 하나님인데, 자기들의 메시아요 하나님의 대권을 받은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메시아 못박는 순간 자기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고 선언했다는 말입니다. 행동으로만이 아니라 말로도 자기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고 선언한 것입니다. 이것은 역설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께 의존하고 순종하면서 살아야 하는데 그렇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음으로 예수 운동을 종결시키려고 했고, 이로써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다는 것을 더 이상 속일 수 없을 정도로 드러내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유대인들의 죄악을 이용해서 자기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만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경륜이 끝나고 그럼으로써 동시에 옛 언약이 끝나고, 다른 한편 바로 그 순간에 새로운 언약의 피 흘림이 일어남으로써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의 중심체가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구원이 일어났다고 선포하고 그것을 복음이라고 선포한 것입니다. 6. 복음의 유일성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속에 있다 고전15:3절에 보면“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부인하는 고린도인들에게 말하길, 먼저 사도 된 자에게서 자기가 제일 중요한 것으로 선포한 복음을 받았다고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예수가 우리를 위해 죽었다. 그리고 부활했다.”는 복음 선포의 첫 형식이 아주 오래된 신앙 고백임을 알 수 있습니다. 롬4:25, 5:5, 8:3 등을 비롯하여 특히 갈3:13“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는 말씀에서 같은 내용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구원이 일어났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맹목적으로 또는 없는 것을 그냥 꾸며내어 예수님 안에 구원이 일어났다고 선포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왜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이 구원자라고 주장하는가”,“모든 종교들은 결국 다 똑같은 목표를 향해 가는 것이고, 단지 그 길이 서로 다른 것 아닌가”라는 질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철학적으로 말한다면, 예수님의 가르침과 십자가와 부활이 어떻게 2천 년이라는 시간을 초월하고 또 수만리 공간을 뛰어넘어 오늘 여기에 있는 나에게 효력을 발생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이 사건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오늘의 나를 위한 구원의 사건이 될 수 있느냐는 질문입니다. 인간의 모든 사건은 상대적인 의미밖에 없습니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절대적인 의미를 가지지 않습니다. 그 시간에, 그 장소에만 가치를 갖는 상대적인 의미밖에 없습니다. 2천 년 전 유대에서 일어난 예수님의 사건이 왜 나에게 의비가 있습니까? 예수님의 부활 때문입니다. 부활은 자연적인 사건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주 밖의 초월자가 직접 개입한 창조의 사건입니다. 생명이 없는 상태에 생명을 주었으므로 창조의 사건입니다. 시간과 공간 밖에 있는 초월자의 사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은 절대적인 의미를 갖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사건만이 우리를 위한 구원의 사건이라고 선포하셨기 때문에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오늘 나에게 절대적인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이 말은 불교나 이슬람교, 힌두교 같은 기타 다른 종교들의 모든 사건은 역사 속에서 일어난 인간의 사건임을 뜻하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 다른 모든 종교의 내용들은 인간의 지혜로 깨달은 사건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사건에는 상대적인 의미밖에 없습니다. 절대적인 구원의 사건이 아닙니다. 절대적인 것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을 부활시키심으로 말미암아 이 예수님이 곧 우리를 위한 구원자라고 선언하셨으므로, 유독 이 사건만이 절대적인 구원의 사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이 2천 년 전 팔레스타인에서 일어난 그 구원이 오늘 여기에 사는 나에게도 효력이 있는 하나님의 구원이라고 믿는 한편, 오직 이 사건만이 구원의 사건이지 다른 종교들에 구원이 있다고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가 하늘 아래 인간에게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주지 않았다고 선포할 이유가 바로 여기 있습니다.(행4:12) 이와 같은 경로를 통해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구원자로 예수님의 죽음을 곧 우리를 위한 죽음으로 생각했고, 예수님의 그 구원이 하나님의 우리를 위한 절대적인 구원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초대 교인들의 처지로 돌아가 어떻게 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구원이 나타났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면 이제 십자가에 나타난 예수님의 죽음, 즉 예수님의 구원자적인 죽음을 성경은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제4과 예수의 구속적 죽음에 대한 해석의 범주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은 십자가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사건 안에서 발생한 구원을 어떻게 설명해야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겠습니까? 신약 성경은 그 당시 사람들에게 이 구원을 구약의 배경속에서 구약의 방법을 이용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신약 성경은 크게 4가지 중요한 그림 언어(meta-phors)을 사용하여 십자가에서 나타난 구원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1. 제사( 祭祀) 구약 성경에 제시된 옛날 이스라엘 백성이 구원 방법을 생각해 봅시다. 1년에 한 번씩 구속의 날에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가서 언약궤를 덮는 자비석(시은좌)에 속죄 짐승의 피를 뿌림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백성의 1년의 죄가 용서받았습니다. 이 구약의 속죄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종말론적으로 완성될 구원에 대한 그림자였습니다. 그림자였기 때문에 구약의 그 제사는 매년 되풀이되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십자가에서의 속죄적 죽음을 그러한 구약의 제사 그림을 통하여 설명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십자가에서의 제사였다는 것입니다. 제사에는 두 가지 기능이 있습니다. 하나는 죄를 덮는 것(expiation)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를 보시지 않도록 피로 덮어 버리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풀어 버리는 것(propitiation)입니다. 예수님의 죽음 곧 예수님의 십자가에서의 피 흘림이 우리 죄에 대한 덮어 버림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더이상 우리를 죄인으로 인정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의 죽음으로 우리 죄에 대한 하나님의 저주를 대신 받으신 것입니다.(갈3:13, 신21:23) 바로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이 속죄를 위한 것임을 깨닫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부활시키신 것을 보니 예수님은 죄가 없는 자임이 분명한데,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는가? 아! 우리 죄를 위해 우리 대신 죄의 저주를 받으셨구나!'라고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나타난 구원을 제사 용어를 통해 설명하셨습니다. 2. 화해(和解) 예수님의 피가 우리 죄를 덮고 우리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풀어 버린 결과로 일어난 것이 '화해'입니다. 하나님과 우리가 더이상 갈등하지 않는 관계를 갖게 된 것입니다. 곧 친구가 된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 관계 속에서 온 그림(metaphor)입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반목하고 싸우는 관계였다면 이제는 더이상 싸울 일이 없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평화가 일어났습니다. 샬롬(shalom), 즉 평화란, 내적인 주관적 평화의 느낌도 포함하기는 하지만 그 이전에 하나님과 인간이 더이상 적대하지 않는 객관적인 친분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샬롬이란 단어는 상당히 포괄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는 표현입니다. 이와 같은 샬롬, 곧 하나님과의 화해의 결과는 인간이 하나님과 친구 관계가 되어 하나님의 무한한 자원을 끌어다 쓰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의존하고 순종하는 올바른 관계를 갖게 된 것입니다. 3. 구속(救贖) 구속이란 말은 노예 시장에서 온 그림 언어(metaphor)입니다. 옛날에 노예를 사고팔 때 어느 노예를 해방시키고자 한다면 그의 주인에게 노예에 대한 값을 치르고 그 노예를 사서 해방시켰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우리의 죄에 대한 몸값을 치른 것입니다. 죄의 노예된 우리의 대가를 예수께서 지불하고 사셔서 우리를 죄와 사탄과 율법과 죽음의 노예 상태에서 해방시키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 목숨을 대속물, 즉 몸값이라고 하셨습니다.(막10:45) 이 구속의 결과가 무엇입니까? 자유입니다. 우리가 자유를 얻게 되었습니다. 4. 새 언약(新言約) 새 언약은 무엇을 가져옵니까? 새 언약은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 되게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란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자녀들은 무엇을, 무슨 특권을 가집니까? 하나님의 무한한 자원을 우리 것으로 누리는 특권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아 하나님의 무한한 자원을 우리 것으로 쓰게 됩니다. 왜 그렇게 쓸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새 언약은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무한한 자원을 영원히 내 것으로 누리면서 살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합니다. 이와 같이 십자가에서 일어난 구원의 사건을 여러 그림(metaphor)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다룬 것을 하나님의‘객관적인 구원 사건’이라고 합니다. 내 밖에서 일어났기에 객관적인 구원 사건이라고합니다. 이제부터는“십자가에서 일어난 구원 사건이 어떻게‘나’개인에게 효력을 발생하는가”하는 하나님의 주관적인 구원 사건을 다루고자 합니다. 제5과 하나님의 구원의 주관적 적용 2천 년전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신 구원 사건이 어떻게 오늘 우리 각자에게 효력을 발생할 수 있는가 하는 이른바 주관적인 구원 사건의 문제를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받습니까? 믿으로 받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이루신 구원이 믿음을 통해 우리에게 효력을 발생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일어난 하나님의 객관적인 구원 사건이 우리에게 효력을 발생하게 하는 수단입니다. 이 믿음이 유일한 수단이라는 점에서 구원의 조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믿음은 하나님의 구원을 얻어 내기 위한 인간의 종교적 업적으로서의 조건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은혜로 이룬 구원을 믿음으로 받는다는 곧 믿음으로만 받을 수 있다는 의미에서 조건입니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우리에게 주어지는데, 믿음이 이 구원을 받는 꼭 필요한 수단이라는 의미에서 조건입니다. 1. 십자가의 사건이 나에게 어떻게 적용되는가 로마서의 말씀을 먼저 묵상하면서 논의를 진행해 나가겠습니다. •롬3:21~26 21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26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여기서 강조된 것은 하나님께서 객관적인 구원 사건을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으로 이루셨는가, 그리고 그 구원 사건을 우리가 어떻게 믿음으로 덕( 德) 입을 수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그러면 믿음이 도대체 무엇이기에 우리가 믿음을 통해 하나님의 엄청난 구원 사건을 덕(德) 입을 수 있습니까? 우리가 무턱대고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고 말하곤 하지만, 여기서 좀 더 믿음의 성격을 분석해 봄으로써 우리의 구원을 확실하게 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믿음의 요소에는 첫째로 앎의 요소, 둘째로 의지하는 요소, 셋째로 순종하는 요소, 넷째로 소망하는 요소, 다섯째로 두려워하는 요소 등이 있다고 합니다. 다 맞는 말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이러한 여러가지 말로 대치될 수 있을 정도로 여러가지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요소들을 분석하는 방법으로 믿음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깨달을 수 있다기보다는, 신약 성경이 지닌 특수한 믿음의 의미를 깨달음으로써 이런 의미들이 그 본질적인 의미에서 어떻게 파생되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믿음의 본질적인 의미는 선포된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선포된 복음(kerygma)을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입니다. 신약 성경에 보면‘믿는다’는 동사가 항상 영어의‘that절(節)’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예컨대“To Believe + that Christ died for us”라는 형식으로 표현됩니다. 여기서‘that’이하에는‘Christ died for us’라는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즉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돌아가셨다는 것입니다. 따라서“예수가 우리를 위해 죽고 부활했다”는 것이 복음(kerygma)의 구원론적 정의입니다. 이것은 고전15:3‘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에서 볼 수 있는 복음의 요약입니다. 이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런데 영어 표현으로는‘that’이하의 내용이 요약되어 신약 성경에 다음과 같이 나옵니다. 즉‘To Believe in Christ ’입니다. 영어‘Believe’에 해당하는 헬라어 동사는 원래 전치사를 수반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신약 성경에서는 전치사를 수반합니다. 영어도 마찬가지입니다.‘Believe’라는 동사는 전치사를 수반하지 않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신약 성경에서는‘in’이라는 전치사가 붙습니다. 그리고 그 뒤에는 대개의 경우‘Christ(그리스도)’라는 칭호가 옵니다. 따라서 전치사‘in’은‘that절’이하의 요약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이라는 것은 본질적으로 선포된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선포된 복음이 무엇입니까?“예수가 주(主)입니다, 예수가 그리스도입니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기독론적으로 말할 수 있지만,“예수가 우리를 위해 죽고 부활했다”고 구원론적으로도 말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선포된 구원을 구원론적으로 표현했을 때 믿음을 설명하기가 훨씬 쉽습니다. 2. 믿음의 본질은 선포된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 그러면 이제 구원론적인 방법으로 복음을 정의하고 믿음을 생각해 보도록 합시다. 지금까지는 우리는 믿음의 본질을 다루었습니다. 믿음의 본질은 선포된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죽고 부활했습니다.”이것이 선포된 복음인데 이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하나님의 구원 사건을 덕(德) 입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우리를 위해’라는 우리말 표현은 한 가지 의미밖에 나타나지 않습니다. 즉“우리에게 이득을 가져오기 위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부분에 해당하는 영어 표현(for us)이 갖는 의미와 마찬가지로 희랍어에서는 적어도 세 가지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즉“우리 대신에, 우리의 대표로, 그리고 우리에게 이득을 가져오기 위해서”입니다. 흔히‘대신에’와‘대표’라는 말을 혼동하여 사용하는데 정확하게 구분해야 할 필요성이 있습니다.‘대표’라는 말은 한 사람(one) 대 모두(all)로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모든 사람을 한꺼번에 대표하셨다는 뜻입니다. 또한 내가 죄인이기 때문에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어서 벌 받을 상태에 있었는데 예수님이 내 대신벌을 받으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인류가 45억 명이라면 45억 번 돌아가셨습니까? 그렇지 않고, 죄인을 대신하여 죽으시되 한 번에 모든 사람을 대표해서 돌아가셨습니다. 이 두 개념을 합치면‘내포적 대신(inclusive substitu-tion)’이라는 개념이 성립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신적 죽음, 대표적 죽음이‘내포적 대신’이라는 말로 종합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죽음은 내포적이요 대신적인 죽음입니다. 우리 각자를 대신하시되 자기 안에 내포하는 것같이 대신합니다. 좀더 자세히 살펴봅시다. 예수님의 죽음의‘대신적 성격’은 죄 없으신 예수님이 우리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벌을 받고 우리의 죄가 초래한 죽음을 우리 대신 감당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죽음의‘대표적 성격’은 그의 죽음에서 예수님이 우리를 대표해서 원칙적으로(하나님의 결정에 의하면) 우리의 죽음이 그의 죽음 안에 내포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고후5:14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예수님의 죽음의 두 성격, 곧 대신적이요 대표적 성격은‘내포적 대신’이라는 개념에 의해 종합됩니다. 곧 예수님의 죽음은 그 자체 안에 우리의 죽음을 내포합니다. 죄 없으신 예수님이 우리 대신 우리 처지에 서서 돌아가셨고 우리를 위한 대표적 죽음이기에 예수님의 죽음은 그 안에 우리의 죽음을 내포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복음을 진리라고 받아들이면, 하나님의 결정에 의하면 우리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하신 객관적 구원 사건입니다. 믿는 이들은 믿음으로 이 구원 사건을 자신에게 적용하여 효력을 발생하게 합니다. 다시 말해, 믿음으로 믿는 이들은 예수님의 죽음이 그들을 위한 대신적이요 대표적인 죽음이라고 곧 그것이 자기들의 죽음을 내포하는 것이라고 인정함으로써 개개인이 그의 죽음을 효과적으로 자기 자신의 죽음으로 만듭니다. 그래서 효과적으로 그의 죽음이 우리의 죽음이 되게 합니다. 바울은 이와 같이 믿음으로 스스로를 자신의 대신이고 대표인 예수님과 그의 십자가의 죽음에 하나 되게 한(연합되게 한) 자를 가리켜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또는 그리스도 안에서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또는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했다고 말합니다(롬6:3-11). 다른 말로 하면 우리의 내포적 대신인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대신하되 어떻게 대신하느냐 하면 우리가 그의 안에 곧 그의 죽음과 부활 안에 내포되도록 대신합니다. 이래서 믿음은 선포된 복음, 곧 케리그마(kerygma)를 받아들이는 것으로 우리의 내포적 대신인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의 죽음에 하나 되게 하고 연합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이와 같이 믿음은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 내포시켜서 그리스도 안에 있게 합니다. 그랬을 때 그리스도는 새로운 아담으로서, 새로운 인류의 조상으로서, 하나님의 새로운 백성의 조상으로서, 하나님의 새로운 백성(새로운 인류, 하나님의 아들들)을 내포하듯 대표합니다. 곧 믿음은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에 내포시키고 연합시키는 역할을 하고 또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내포시키고 연합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이 믿음의 내용을 극(劇)으로 표시한 것이 바로 세례입니다. 세례를 한마디로 말하면, 믿음의 극화(劇化)라고 볼 수 있습니다. 믿음을 하나의 극(drama)으로 표시한 것을 세례라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죽고 부활했다는 것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에 연합되고 그의 부활에 연합된 그 사건을 극으로 나타낸 것이 세례입니다. 물 혹은 물에 빠짐은 예수님과 함께 죽고 장사 지낸 것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물에서 다시 나옴은 깨끗이 씻긴 새로 창조된 하나님의 아들로 부활함을 상징합니다. 그런데 세례는 이와 같은 의미를 단독으로 갖는 게 아니라 이미 믿음 안에 내포된 의미를 극으로 표시한다는데 그 중요성을 가집니다. 상징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와 같은 상징적인 세례가 필요합니다. 세례는 믿는 자가 되어 가는 과정의 종결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세례 후에도 필요합니다. 세례로써 우리의 믿음이 끝나느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다만 믿는 자가 되어 가는 과정의 종결일 뿐입니다. 세례를 받음으로 확실히 믿는 자가 되었다고 문서적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먼저 복음을 받고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죽었다고 선포된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래서 그에 대한 확신이 서면 그것을 극으로 표시함으로 말미암아 세례 때 그 믿음을 모든 사람에게 고백하고, 내가 확실히 믿는 자임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는 믿는 자가 되어 가는 과정의 종결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없는 세례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세례는 믿음의 극화이므로 믿음이 없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믿음을 극으로 표시해서 문서적으로 모든 사람에게 고백하고 스스로에게도 믿는 자가 되었다는 확인을 해야 합니다. 이상에서 믿음은 우리를 우리의 내포적 대신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그이 부활에 연합시키는 역할을 하며, 세례에 의해 잘 표현되는 것으로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객관적 구원 사건을 덕 입게 하는 수단임을 배웠습니다. 믿음이 그리스도와 우리를 연합시킴으로 인해 우리는 그리스도의 됨됨이(What he is)에 참예하고 그리스도가 하신 일(what he has done)에 참예합니다. 그러니까‘그리스도가 어떤 분인가’가 곧‘내가 어떤 사람인가’가 되며,‘그리스도가 어떤 일을 하였는가’가 곧‘내가 어떤 일을 하였는가’가 됩니다. 그리스도와 우리가 하나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므로 나도 하나님의 아들이고, 하나님에 대한 그리스도의 순종이 나의 순종이 됩니다. 이것이 곧‘주관적 구원 사건’입니다. 3.‘주관적 구원 사건’에 대한 성경의 은유들 성경은 이 주관적인 구원 사건을 4가지 그림(meta-phor, 은유)으로 표시했습니다. 즉 의인 됨(justification), 화해(reconciliation), 하나님의 아들 됨(adoption), 새로운 피조물(new creation)등 입니다. 다시 말해 성경 이와 같은 그림 언어들을 사용하여 주관적인 구원 사건을 묘사하고 설명합니다. 이 주관적인 구원 사건의 실재(reality)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됨됨이에 참예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하신 일에 참예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 주관적인 구원 사건의 실재를 여러가지 그림으로 나타냅니다. 하나하나 살펴봄으로 그 의미를 분명히 해야 하겠습니다. ① 의인 됨(稱義 justification) 의인 됨이란 말은 법정에서 온 그림입니다. 심판관에 의해 무죄 석방을 받는 것이 의인 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보호하시고 사랑하시며 우리는 하나님께 의존하는 것이 하나님과 우리의 올바른 관계인데, 이 올바른 관계를 파괴하는 것이 죄입니다. 그 죄에 대해 용서함을 받고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로 들어가는 것이 의인 됨입니다. 그러므로 과거의 죄에 대하여 용서함을 받고 하나님께 의존하고 순종하는 올바른 관계 속에 들어가는 것이 의인 됨의 의미입니다. 그러면 이것이 어떻게 이루어집니까?“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롬4:25)”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은 우리에게 하나님께 대한 올바른 관계를 가져다줍니다. 하나님께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순종이 우리의 순종이 됩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하여 죽고 부활했다는 것을 받아들이면, 예수님 안에 우리가 내포되어서 그의 됨됨이(what he is)에 우리가 참예하고, 그의 하신 일(what he has done)이 우리가 한 일이 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완전한 순종(그가 하신 일 what he has done)이 나의 순종이 되고 예수님의 죄를 짊어짐과 그에 대한 하나님의 정죄함(심판)을 받음과 율법의 저주를 받음이 우리의 받음이 된 것입니다. 즉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가 하신 모든 일이 내가 한 일인 것입니다. 믿음으로 예수님이 나를 위해 죽었다고 받아들임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이 파괴의 힘들(악과 고난의힘, 하나님의 정죄함, 율법의 저주등)로부터 해방받음이 나의 해방받음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에 우리가 참예할 뿐아니라 그의 부활에도 우리가 참예해서 예수님이 파괴의 힘들로부터 해방받음이 우리의 해방받음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더 이상 하나님께 등을 지고 자기를 주장하며 자기 힘으로 살려고 하는 거스르는 관계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회복한 인간 곧 하나님과 언약의 관계를 갖는 인간이 됩니다. 이것이 의인 됨입니다. 의인(義人)이란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갖는 사람입니다. 과거에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파괴한 죄에 대한 대가를 예수님이 내 대신 치르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예수님을 믿는다면 내가 진짜 죄에 대한 벌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더 이상 내게 벌이 없습니다.“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롬5:1)”,“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8:1)”믿음으로 우리는 이미 의롭다 함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어떻게 있습니까? 믿음으로 있습니다. 믿음으로 우리가 그를 받아들이면 우리가 그 안에 연합된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정죄함이 더 이상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미 내가 다 받아 버렸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정죄함 받음이 우리의 받음이 되고 그의 십자가의 죽음이 우리의 옛 죄에 대한 청산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곧 새로운 관계가 수립되었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의존하고 순종하는 올바른 관계 속에 들어간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이 왜 구원입니까? 인간의 모든 고난과 불행은 자기 자원이 제한되었기 때문에 발생한 것입니다. 우리가 제한된 자원 속에 갇혀서 사는 것이 곧 죽음이요, 악과 고난입니다. 이것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 구원입니다. 어떻게 해방됩니까? 우리가 믿음으로 하나님께 의존하고 순종하는 관계, 하나님께 스스로를 여는 관계를 갖고 하나님의 무한한 자원을 공급받아 하나님의 무한한 힘으로 사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이것이 곧 의인 됨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율법을 지킴으로는 의인이 되지 못한다고 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것은 하나님께 의존하고 순종하는 것인데, 이것을 어떻게 자기 주장을 통하여 자기의 제한된 자원으로 자기를 수양해서 곧 율법을 지켜 이룰 수 있습니까? 인간에게 고난과 불행이 있는 것으로 보아 우리는 제한 속에 갇혀 있음이 사실이고, 제한됨을 특성으로하는 인간이 스스로의 힘과 지혜와 행위로 그 제한됨의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 곧 구원의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은 모순입니다. 그러므로‘업적’또는‘공적’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진정한 의인이 되는 길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굴복하고 하나님이 이미 그리스도 안에 이루신 구원을 받아들이는 것, 곧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는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만약 인간이 자기 자원으로 업적을 쌓아야 하나님이 그것을 보시고 인간에게 구원을 주신다면, 자기의 제한된 자원 속에 갇혀 있는 존재인 인간은 도저히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② 화해함(和解 Reconciliation) 화해함이란 인간 관계에서 온 그림입니다. 하나님과 인간은 적대하는 관계였는데 이제 하나님과 인간은 친구 관계로 회복되었습니다. 더 이상 불화가 없고 평화가 있습니다. 이 객관적인 화평 상태에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는 주관적인 평안함이 유래됩니다. 또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된 자의 불안에서 해방감이 있습니다. 이런 의인 됨이나 화해함 또는 뒤에 언급할 그림들이 나타내는 구원의 실재는 다 똑같습니다. 다만 이런 그림들을 다양하게 사용함으로써 구원의 실재를 더욱 분명히 나타내고자 함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그림들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구원의 실재가 중요합니다. 구원이란 인간이 자기의제한된 자원으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원에 힘입어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생명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의 실재입니다. ③ 하나님의 아들됨(入養 Adoption) 하나님의 아들 됨은 가족 관계에서 오는 그림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에게 선택 받은 약속의 백성으로 하나님의 아들 또는 아들들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의존하고 순종하지 않음으로 인해 하나님의 백성 됨에 실패했습니다. 다시 말해, 언약이 파기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단7:13절이하와 사42:6절과 사49:8절과 사53장의 예언을 성취하는 분으로 오셔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게 하기 위해 십자가에 대속적인 죽음을 하고 새 언약을 세우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밤 최후의만찬 때 이 떡은 너희를 위하여 부서지는 나의 몸이고 이 잔은 새 언약을 세우기 위한 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아들 됨에 참여하여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 자기가 아주 독특하게 하나님을‘아바’라고 부르면서 그를 따르는 제자들에게도 하나님을‘아바’라고 부르게 했습니다. 이 말은 곧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을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은 굉장히 의미심장한 그림입니다. 영국 찰스 왕세자가 엘리자베스 여왕의 아들이라고 해서 기세등등하게 다닙니다. 그러나 그 정도는 정말 아무것도 아닙니다. 영원한하나님, 무한한 능력과 지혜와 사랑을 가지신 하나님이 나의‘아빠’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의존해서 하나님의 무한한 자원을 자기 것으로 쓸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의존해서자기의 제한된 자원에서 오는 모든 고난에서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곧 영생입니다. 영생이란 악과 고난으로 얼룩진 인생을 여름날에 엿가락을 늘이듯 길게 늘이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 단지 물리적인 시간을 길게 늘여 놓은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성경이 말하고 예수님이 가져다 주시는 영생이란 근본적으로 신적인 삶이라는 뜻입니다. 믿음으로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써 그의 됨됨이에 참여하여, 곧 그의 하나님의 아들 됨에 참여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의 아들 된 그의 특권을 누리게 되고,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무한한 자원을 나의 것으로 받아 나의 삶이 가난한 삶이 아니라 신적인 풍성한 삶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도무지 지혜가 없어서 불안하고 능력이 없어 두려우며 시간적으로 제한되어 죽어가는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의 무한한 자원 즉 그 무한한 사랑과 그 영원한 시간에 동참하는 신적인 삶인 영생을 누리는 인생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영생은 질적으로 전혀 다른 삶이며 시간적으로도 하나님의 영원에 동참하는 삶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은 우리의 피조물성 곧 우리의 제한성, 그 제한성으로 인한 인간의 모든 고난에서 해방되어 풍성한 삶을 누릴 수 있다는 것임을 말합니다. 즉 하나님의 풍성한 삶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이유를 밝힌 막10:35-45절을 읽어 보면, 세배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와서 예수님이 장차 세상적인 왕이 되면 우리를 수상이나 외무부 장관이라도 되게 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화를 냈습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보시고‘세상의 도’라고말씀하십니다. 세상의 도는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착취해서 자기의 자원을 풍부하게 하고 자기의 행복을 추구합니다. 자기 주장하는 의지를 잘 행사하는 것이 세상에서 성공하는 길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것이 인간의 근본 문제라고 보셨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첫째로, 자기를 주장하려는 의지는 하나님으로부터 우리를 분리하여 우리의 제한된 자원에 갇히게 했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자기를 주장하려는 의지는 우리의 이웃과 우리를 갈라놓았기 때문입니다. 인간 사회는 만인이 만인과 더불어 싸우는 살벌한 전쟁터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 세상의 도가 예수님의 제자 중에 일어난 것입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은‘너희들 중에는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없다’고 말씀하셨고, 예수님은 이런 세상의 도에서 허덕이는 인간을 구원하러오신 구원자로 자신을 나타내셨습니다. 예수님은“그‘사람의 아들’”로서, 섬김을 받는 것이 아니라 섬기려고 그리고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주려고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자기 주장 의지로 하나님께 스스로를 닫아 버려 자기의 제한된 자원을 보호하고 남의 자원을 빼앗아 자기 자원을 확장하려고 남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완전히 의지하고 순종하는“그‘사람의 아들’”로서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바쳐 많은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갖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다고 했습니다. 그 죽음은 십자가의 죽음이고, 믿으므로 그것을 덕 입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고 자기 이상(以上 above)이 되고자 했을 때 초인이 된 것이 아니라, 역설적이게도 인간 이하로 떨어져 죄인이요 살인자요 불안과 공포로 떨고 피와 땀과 눈물에 허덕이는 인간이 되었습니다. 그 반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처럼 자기를 내어 줌으로써, 하나님께 완전히 의존하고 순종함으로써, 인간의 피조물성을 받아들임으로써 진정한 인간이 될 수 있습니다. 곧 우리가 하나님께 의존하고 순종하지 못한 죄의 대가를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치르고 죽음에서부활하셨음을 받아들이고 예수님과 연합했을 때 우리는 진정한 인간이 됩니다. 이렇게 할 때 우리는 신적인 삶인 하나님의 무한한 자원에 참예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유일하고도 진정한 초월의 길입니다. 인간의 유일한 초월의 길은 그 피조물의 제한성을 부인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무한한 자원에 의존하고 순종하는 데 있습니다. ④ 새로운 피조물(New creation) 이 그림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해 죄에 죽고 새로운 삶으로 부활했다는 구원의 실재를 나타냅니다. 즉 새로운 피조물은 옛 존재와 같이 스스로를 하나님께 닫아 버리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원래 뜻대로 하나님께 열린 존재로서 하나님께 의존하고 순종하는 올바른 관계를 갖는 전혀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했습니다(고후5:17). 우리가 어떻게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게 됩니까? 그가 우리를 위해 돌아가시고 부활하셨다는 것을 받아들임으로, 그가 나의 대신이고 대표이심을 인전함으로 그의 안에 있게 됩니다. 그리하면 그의 됨됨이에 참예합니다. 하나님께 대한 그의 완전한 순종함에 참예하게 되고, 하나님께의존하고 순종하는 관계에 참예하게 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완전히 새롭게 창조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요한은 이와 똑같은 실재를‘거듭남’또는‘위로부터 남’이라는 그림으로 표시했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죽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아담이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새로운 피조물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상의 내용을 종합하여 간단히 정리해 봅시다.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의인 됨, 하나님과 화해함, 하나님의 아들 됨, 새로운 피조물 됨 등의 그림들로 표시하려 한 구원의 실재가 무엇입니까? 자기의 제한된 자원 속에 갇혀 죽은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께 의존하고 순종하는 올바른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무한한 자원에 동참하여 하나님의 무한한 자원을 끌어다 씀으로써 신적인 삶에 참예하는 삶이 곧 구원이라는 것입니다. 이 구원은 우리를 대신하고 대표하여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어집니다. 제6과 구원의 종말론적 구조 [“이미-그러나 아직”] 구원에는 세 가지 시제가 있다고 합니다. 구원의 과거, 구원의 현재, 구원의 미래입니다. 성경을 자세히 보면 우리가 이미 구원을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롬5:1,롬8:1). 그와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우리가 구원받을 것이라고 미래형으로 기록된 곳도 있습니다(살전1:10). 이것은 바로 기독교의 독특한 종말론 때문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종말론을 좀더 쉽게 이해하기 위해 다음의 그림을 보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이것은 기독교의 역사관을 보여 주는 그림입니다.예수님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나라가이미(already) 시작되었습니다.‘오는 세상’즉 구원의 세상이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예수님의 부활은 사탄의 등뼈를 꺽은 사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이 세상에서 왕 노릇 하는 사탄이 쓸 수 있는 가장 큰 무기인 죽음을 꺾은 사건입니다. 예수님이 사탄을 이기셨습니다. 승리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예수가 주(主)라는 선포가 울려 퍼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로 사탄은 등뼈가 부러졌습니다. 사탄은 더 이상 예수님을 이길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사탄이 이제 힘이 다 빠졌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등뼈가 부러진 사탄은 아직 사지에 힘이 많이 남아서 남은 힘으로 최후의 발악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자를 걸고 넘어집니다. 바로 이 때문에 지금까지 악과 고난이 있습니다. 그러면 이와 같이 등뼈가 부러진 사탄은 언제 꼼짝 못하게 됩니까? 예수님의 재림 때입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사탄을 당신의 발등상(발판)으로 삼는다고 하셨습니다(고전15:25). 그때 사탄의 사지에 힘이 빠져 우리의 구원은 완성될 것입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의 신학자들은 이갓을 재미있는 그림으로 표현했습니다. 예수님이 처음 오셔서(초림)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심으로 사탄을 이기신 결정적인 구원 사건을‘D-day’라고 했습니다. Decision-day, 즉 결판의 날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제2차 대전 때인 1994년 연합군이 노르망디 해안에 성공적으로 상륙한 날을 일컫는 것입니다. 연합군이 그때 결정적인 승리를 했습니다. 전쟁이 사실상 결판난 날이라고 해서‘D-day’라고 합니다. 그런데 1944년 노르망디 해안에 연합군이 상륙해서 독일군을 결정적으로 무찔렀다고 해서 전쟁이 끝났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연합군이 독일의 수도 베를린을 함락했을 때에야 비로소 전쟁이끝났습니다. 그때를‘V-day’라고 했습니다. Victory-day, 곧 승리의 날이라는 뜻입니다. 이와 같이 전쟁이 결판이 난 날과 전쟁이 끝나 승리가 완성된 날까지 사이에는 얼마간의 기간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기독교 역사관, 종말관 그리고 구원의 구조를 잘 설명하는 그림입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부활하심으로써 사탄의 등뼈를 부러뜨리셨습니다. 결정적으로 이기셨습니다. 그러나 아직 승리의 날까지는 시간이 남았습니다. 승리의 날은 예수님의 재림 때 이루어질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결정적인 구원은 이 구원의 첫 열매에 해당됩니다. 따라서 구원의 완성, 즉 완성된 추수를 우리는 아직도 기다리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이 구원의 완성이 이루어 질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다시 말해 구원의 첫 열매를 받았다는 의미에서 우리는 이미 구원을 받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구원이 아직 완성되지 않은 상태이므로 우리는 구원의 완성을 바라보는 자로서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구원받을 것이라고 미래 시제로도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미] 구원의 첫 열매는 받고 [아직] 구원의 완성을 기다리는 자로서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 사이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 사이 어디에 있든지 내일 종말이 오지 않아도 오늘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산다는‘긴장’속에서 사는 것이 올바른 믿음입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시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믿음은 잘못된 믿음입니다. 또한 내일 종말이 온다고 오늘 아무것도 하지 않고 데살로니가 사람들처럼 불안해 히는 것도 옳지 않습니다. 종말론적으로 말하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악과 고난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의 시민으로서 살지 않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 삽니다. 왜 그렇습니까? 더 이상 사탄이 우리의 주(主)가 아니기 때문이고,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주(主)라 부르며 살기 때문입니다.“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삽나이다(요17:16)”“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 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골1:13)” 예수님이 우리를 이 흑암의 세상에서 건져 내사 의와 사랑으로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아들이 주(主)인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 옮기셨습니다. 이것이 곧 구원입니다. 더이상 이 세상에 속하지 않고 사탄을 주라 고백하지 않으며, 이 세상의 도(ethos) 곧 이 세상의 길과 가치를 버리고 예수님이주이신 것과 그분의 뜻대로 살 것을 고백하고 순종함으로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되는 것, 이것이 곧 회개요 구원입니다. ·성령은 구원의 첫 열매에 대한 보증 그러면 우리가 구원의 첫 열매를 받았다는 사실을 무엇이 증명합니까? 성령입니다. 우리가 구원의 첫 열매를 이미 받았다는 증거는 주관적으로 여러가지로 나타납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죄와 인생의 무가치와 허무감에서 해방되어 기쁨과 평화와 앞을 바라보는 소망이 생깁니다. 이런 주관적 감정이 구원의 첫 열매를 잘 나타내 줍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주관적인 것으로 자칫 잘못하면 홀릴 수도 있습니다. 게다가 다른 종교도 이런 기쁨이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첫 열매가 우리에게 기쁨과 평화와 소망을 주지만, 그 자체가 구원을 받았다는 궁극적인 증거가 될 수는 없습니다. 사실, 기쁨과 평화와 소망은 성령의 열매입니다(갈5:22-23). 그래서 우리에게 구원의 첫 열매가주어졌다는 것은 성령이 대변합니다. 구원의 첫 열매를 대변할 뿐만 아니라 구원의 완성을 꼭 받으리라는 보증 역할도 합니다(엡1:13-14). 그래서 바울은 성령을 구원의 첫 열매요 보증이라고 부릅니다. 구원의 첫 열매를 받았으면 곧 구원의 완성까지 받게 됩니다. 우리는 죄를 고백하고 사탄과 이 세상을 거부하고 이 세상의 도, 즉 자기 중심적으로 살겠다는 자기 주장 의지의 도를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고 순종하면서 살겠다는 신앙의 결단을 했습니다. 그리하여 구원의 첫 열매를 얻었습니다. 여기서 그리스도인의 윤리가 나옵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2)” 이 구절에서“너희는 이 세상(세대)를 본받지 말라”는 말씀이 제일 중요합니다. 이 세상에 돌아가지 말라. 이 세상에 동조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즉 자기 주장하려는 의지로 함축되는 이 세상의 도를 따르지 말고, 하나님의 새로운 피조물로 마음을 새롭게 하고 자신을 하나님께 대한 순종의 제물로 바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윤리의 출발점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윤리는 구원을 얻기 위한 조건이 아니라 은혜로 받은 자로 사는 것, 이것이 곧 그리스도인의 윤리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1-11장까지에서 우리가 어떻게 구원받았는지를 설명합니다. 12장부터는 그리스도인의 윤리에 대해 말씀합니다. 즉 우리가 구원을 받아서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 되었으므로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정신에 순종해서 사는 이 세상의 시민으로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 살라는 것이 곧 그리스도인의 윤리입니다. 좀 더 실감나게 이해하기 위하여 빌1:27절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사도 바울이 빌립보에 있는 성도들에게 권면한 말씀입니다. 빌립보는 지금의 터키와 그리스가 맞닿은 곳에 있습니다. 사도행전 16장을 보면 빌립보를 마게도냐 지방의 첫 성이라고 기록했습니다.일찍이 알렉산더 대왕의 아버지 빌립이 트라시아인들에게서 그 도시를 빼앗아 도시를 건설하고 자기 이름을 붙였습니다. 그래서 그 도시 이름이 빌립보가 되었습니다. 나중에 로마 시대에 로마 사람들이 그 도시를 재건하여 전쟁에 공로를 세운 장교들을 거기에 정착시켰습니다. 그래서 빌립보는 그리스 제국 당시 트라시아 지방 사람들에게는 그리스인의 문명을 보여 주는 전시장 구실을 했듯이, 로마 시대에는 로마 제국 저편 변경 사람들에게 로마인의 문명과 문화 수준을 보여 주는 전시장 구실을 했습니다. 빌립보는 로마 제국의 식민지 중에서도 특수한 식민지로서, 빌립보 시민들은 로마 시내에 사는 시민들과 똑같은 대우를 받았습니다. 이곳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바울의 편지를 보낸 것입니다. “너희는 복음에 합당하게 살라” 여기서‘살라’라는 표현이 번역하기 힘든 말입니다.“복음에 합당하게 정치해 나가라”또는“복음에 합당한 시민들의 생활을 하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바울이‘교회’를 이 세상에 둘러 싸여 있는‘하나님 나라의 식민지’로 묘사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나게 합니다. 마치 빌립보가 이방 사람들에게 둘러 싸여 있는 로마 식민지로서 이방인들에게 로마의 문화와 로마 시민의 긍지를 보여 주듯이, 교회는 썩어져 가는 세상에 둘러 싸여 있는 하나님 나라의 식민지로서 이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 어떤 존재인지를 보여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에 있지만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 살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의 윤리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자원으로 살아가는 삶의 실재 바로 여기에 한국 그리스도인들의 문제가 있습니다. 믿음에 윤리를 내포하지 않은 이것이 한국 교회의 문제가 아닌가 합니다. 믿음은 있다고 하나 윤리가 없습니다. 윤리를 내포하지 않은 믿음은 구조상 헛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은 믿음으로 의인이 되고 하나님께 의존하고 순종하는 올바른 관계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능력과 자원으로 살게 되었다는 실재(reality)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때 하나님에 대한 순종 없이 하나님을 의존하는 것이 가능합니까? 하나님께 의존한다고 주장하면서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하나님께 대한 의존입니까? 단지 자기 꾀에 대한 의존일 뿐입니다. 자기가 스스로 상상해 낸 것을 자기가 믿기 때문에 결국 자기를 믿는 것입니다. 전지하시고 사랑이 완전하신 하나님은 이 길로 가는 것이 생명의 길이라고 하는데, 나는 자꾸 저 길로 가야 내게 좋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나에게 축복해 달라고 하나님께 새벽 기도도 드리고 철야 기도도 열심히 합니다.‘하나님도 내가 이용할 수 있다. 내가 열심히 기도하면 하나님도 꼼짝 못하게 할 수 있다’는 식의 생각, 바로 이것이 내 꾀의 절정입니다. 이것이 가장 큰 교만이요 하나님과 가장 크게 분리된 상태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의존은 순종으로 표현됩니다. 앞에서도 이미 말했듯이 이것은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믿음의 상태입니다. 그런데 순종 없는 믿음, 새로운 하나님의 시민으로서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그런 윤리가 없는 믿음은 곧 거짓 의존이며 거짓 믿음입니다. 바로 미신입니다. 결국 순종이 없는 믿음, 윤리가 포함되지 않은 믿음, 이것이 곧 미신입니다. 한국에 그리스도인이 천만 명이나 있다고 자랑하고 다니는 사람이 많은데, 그리스도인이 천만 명인 한국이 왜 이 모양입니까? 암담하기가 날이 갈수록 더합니다. 천만 명의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사업하는 사람, 정치하는 사람, 학자, 의사, 변호사 등 별별 사람들이 다 있습니다. 그 사람들이 진정으로 자기 사업장에서, 정치 분야에서, 자기의 학문하는 데서 구원의 첫 열매를 받은 하나님의 시민으로 살면서 순종으로 표현되는 믿음을 지녔으면 이 나라가 이처럼 암담하겠습니까? 한국 교회가 겉으로는 엄청난 수를 자랑할 정도로 팽창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외적 크기만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다고 자만하는 순간 내적으로 썩어 갑니다. 내부적으로 교권 싸움 때문에 썩고 외부적으로 금권과 정치 권력에 타협해서 썩어 갑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양심이라곤 조금도없는 교회 지도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총회장이 되려고 밥 사주고, 돈 봉투 주고 난리 피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교회가 마치 자기의 세상적인 기업인 양 헌금을 강요하여 큰 교회당 짓고, 지방색과 정실(情實)로 파당지어 두목 노릇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통탄스럽게도 진정한 선교와 가난하고 억눌린 자를 돕지 아니하고, 선교라는 이름을 내세워 돈 거두어 해마다 이 나라 저 나라로 사치스럽게 떠돌아다니는‘사기꾼’목사, 선교 지도자, 선교사들이 적지 않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또 교회를 자꾸만 가르는 정치꾼 목사들, 돈 뜯기가 전공인 모리배 부흥사들은 또 얼마나 많습니까? 이런 자들의 가르침을 받는 평신도들의 신앙과 삶이 건전하겠습니까? 강요된 헌금으로 교회는 날로 부유해지나 가난하고 억눌린 자들은 날로 더 외면되는 현실로 인해 멍들어 있는 사회가 한국입니다. 마25:31-46절은 한국의 많은 교회들의 성경에서 삭제되지나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마25:31-46 31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이런 엄청난 죄를 짓고 있으면서도 자기들이‘장자 교단’이니, 아세아의‘장자 교회’니 하고 떠들어 대는 교만을 하나님은 결코 묵과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이것이 한국 교회의 위기입니다. 세상의 도를 따르는 것이지 결코 하나님 나라의 시민다운 태도가 아닙니다. ·고난은 믿음이 실재화되어 가는 과정 우리는 이 세상에 살지만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옛사람이 죽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새사람으로부활한 사람으로, 이미 하나님 나라레 속한 자로서(구원의 첫 열매를 받은 자로서) 구원의 완성을바라보며 삽니다. 그리스도와 연합해서 나의 옛사람이 죽고 새로운 사람으로 부활한 것이 구원의 사건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나의 옛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새사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리스도가 대표한 신앙 안에서 부활했습니다. 일단 일어났습니다. 어떤 이들은“그것이 원칙적으로 일어났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예수님이 다시 오실때 완성된다.”고 주장하기도 했지만, 요즘 이런 주장이 반박을 받고 있기도 합니다. 즉 하나님의 눈으로 보면(하나님의 결정에 의하면) 우리의 옛사람은 새사람으로 부활했다고 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관점 곧 하늘에서 이미 일어난 사건이 땅에서 일어나는 데는 시간이 걸립니다. 땅 위에서의 실재(reality)가 되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구원의 첫 열매를 받은 자로서 오는 세상 곧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 살려면, 이 세상의 도 곧 자기 주장하려는 의지를 버리고 하나님을 의존하고 순종하며 사는-온 정성을 다해 하나님을사랑하고 내 몸처럼 사랑하는-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는 고난이 필연적으로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 세상에 살면서 이 세상의 도, 곧 자기 주장하려는 의지를 따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사는 자들이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에게는 고난이 필연적입니다.‘자기 주장 의지’의 정신이 지배하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께 대한 새로운 삶은 희생과 고난을 수반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 고난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믿음으로 동참한 것의 실재화입니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돌아가셨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그 믿음은 내포적 대신인 예수님 안에 우리를 연합시킨다, 우리를 그와 하나 되게 한다, 우리를 내포시킨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를 통해 또는 그 안에서 내 죄에 대한 벌을 받고 죽었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고난은 믿음에서 일어난 옛 죄에 대한 벌 받음, 옛 죄인의 죽음, 이 사건이 실제 생활에서 펼쳐지는 실재화되어 가는(actualize) 과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고만 표현하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서 죽고 부활한 우리가 오늘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인의 삶의 고난은 자기 주장하려는 옛사람 곧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옛사람이 실제로 죽어 가는 과정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고난은 다른 말로 하면, 이 악한 세상에서 이 세상의 정신과 그 가치관에 순종하지 않고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 살기 때문에 받는 고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옛 아담적인 내가 십자가에서 죽은 죽음이 실제 생활에서 실재화되어 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고난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부활에 내포되어 부활한 나의 새로운 삶이 마찬가지로 실재화되어 가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즉 고난은 옛 아담적인 나의 십자가에서의 믿음을 통한 죽음이 실재화되어 가는 과정이면서 동시에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한 나의 새로운 자아가 날로 새로워져 가는, 날로 실재화되어 가는, 날로 뚜렷해져 가는 과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이 세상에 살지만 이 세상에 동조하지 않고 오는 세상 곧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 사는삶을‘제자도’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오는 고난을 제자도라고 부릅니다.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제자도가 무엇입니까?“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막8:34)”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믿음으로 그것을 나의 십자가로 받아들였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지심에 내가 내포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에 내가 믿음으로 내포되어서 새로운 사람으로 부활했습니다. 그 사건이 실제 생활에서 제자도의 삶으로 실재화됩니다. ·제자도는 믿음의 종말론적 구조 속에 들어 있다 십자가에서 죽은 사건이 실재화된다는 것이 무슨 말입니까? 십자가를 진다는 말입니다.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자기를 주장하는 옛사람은 십자가에 못박히고 예수님을 받아들인 새사람이 이제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입니다. 곧 예수님이 걸어가신 자기 부인의 길을 가야 합니다. 이것이 제자도입니다. 이 제자도란 말이 한국에서 잘 쓰이지 않는데, 이것은 믿음이 미신화된 가장 큰 증상입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그리스도인들의 첫 이름이 제자들입니다. 이 제자도는 우리의 믿음의 종말론적 구조에 들어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 긴장 속에서 우리가 진정으로 구원받은 자로 살려면 이 세상에 대해 죽어버린 우리의 옛사람이 실제 생활에서 재확인되어야 합니다. 날마다 내가 나를 주장하려 하고 나의 이기주의로 살려고 하고 남을 윽박지르면서 살려고 할 그 순간 십자가에 못박힌 나를 주장하려는 옛 아담적인 내가 죽어야 합니다. 십자가에 못박혀야 합니다. 바로 그것이 예수께서“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그랬을 때 동시에 고난의 삶은 믿음 안에서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부활한 새로운 삶으로 날로 실재화되어 가는 과정입니다. 우리를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게 하고 그의 죽음에 하나 되게 하는(참예하게 하는) 제자도의 삶은 역설적으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영광된 형상으로 날로 변화되어 가는 과정이며(고후3:18), 예수님의 부활의 새 생명이 우리의 썩어져 가는 몸에 나타나져 가는 과정입니다(고후4:10이하; 빌3:10). 바울이 사도직을 감당하기 위해 그 얼마나 많은 고난을 받았습니까? 돌로 침을 받고 매맞음을 당하고 파선이 되는 고난, 헐벗고 굶주리는 고난, 감옥에 갇히는 고난 등 말입니다. 이 고난을 사도 바울 겉사람이 후패해져 가는 과정이라고 했습니다. 이 겉사람은 이 세상에 속하는 옛 아담적인 죄인을 말합니다. 이 죄인이 실제로 썩어져 가고 닳아 버립니다. 이 세상의 고난을 통하여 닳아 버립니다. 무엇을 마구 문지르면 닳듯이 닳습니다. 곧 십자가에서 일어난 믿음을 통해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그 구원 사건이 실재가 되는 과정입니다. 옛사람이 점점 그리스도인의 고난을 통해 닳아져 갑니다. 그러면 반대로 속사람이 날로 새로워집니다.“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고후4:16)”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동참하여 생겨 난 새로운 삶이 날로 새로워집니다. ·믿음의 삶은 아들의 형상을 닮는 것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의 하신 일에 동참하게 할 뿐 아니라 그의 됨됨이에 동참하게 합니다. 그래서 제자도의 삶은 우리가 예수님의 하나님의 아들 된 그 영광의 형상을 점점 닮아 가는 과정입니다. 하나님의 영광된 형상을 되찾은 예수님의 형상을 닮는 것은 제자도를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이것을 바로 그리스도인의 성화(聖化)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그리스도인의 성화가 구원 현재입니다. 구원의 현재는 이미 과거에 구원을 받은 우리가(믿음으로 의인이 되고 새로운 피조물이 된 우리가) 현재에 의인으로서(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스스로를 재확인하는, 즉 이 세상의 가치를 따르지 않고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천명하고 고난을 받으며, 십자가에 죽은‘자기 주장하는 옛사람’이 실제로 죽어 가는 과정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거룩한 형상으로, 영광된 형상으로 닮아 가는 것이 구원의 현재입니다. 종말에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 오실 때 이 성화의 과정 곧 십자가를 지고 옛사람이 죽어 가며 새로운 사람이 날로 새롭게 되어 가는 과정이 종결지어질 것입니다. 그때 우리가 예수님의 부활에 완전히 참예하게 되고(롬6:5),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마지막 아담인 예수님의 영광된 형상으로 완전히 변화할 것입니다. 이것이 영화(榮化)입니다. 이것이 구원의 미래입니다. 빌3:20-21 20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이 말씀의 바로 앞 구절을 보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고난을 예로 들어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여 그리스도의 죽음에 하나가 되기를 바란다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의 부활에 완전히 동참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빌3:20-21절에 가서 이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 고난받으며 살라고, 이 세상의 시민으로 살지 말라고 합니다. 언젠가는 그 하늘에서 그리스도가 다시 오셔서 죄악과 시험에서 허덕이는 우리의 이 천한 몸을 그의 영광스러운 몸으로 완전히 변화시킬 것이라는 위대한 소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사도직의 고난과 제자도의 고난에 동참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고난은 새 생명이 강해지는 과정 그리스도인들이 경험하는 제자도의 고난은 동시에 우리의 속사람이 곧 새로운 부활의 새 생명이 날로 새로워지고 강건해 가는 과정입니다. 그 과정이 드디어 예수님이 다시 오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더이상 악과 고난과 죄의 시험에 허덕이지 아니하는 영광스러운 형상으로 완전히 변화시킬 때 종결될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의 미래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소망입니다. 이 소망이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는다고 했습니다(롬5:5). 이것이 헛된 소망이 아니고 가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구원의 첫 열매를 이미 받았다는 것은 언젠가는 구원의 완성이 온다는 것을 보증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구원의 첫 열매는 성령의 임재함입니다. 더 나아가서 바울은 로마서 8장에서 우리가 궁극적으로 구원의 완성을 받으리라는 것을 우리와 함께 하시는 성령으로 증명했습니다. 우리가 벌써 하나님을 아바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우리가 지금 악과 고난에서 허덕이지만 하나님께 아바라고 하면서 기도함으로써 벌써부터 그의 힘을 빌어 쓸 수 있습니다. 아직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즉 구원이완성되기 전부터 예수 그리스도가 분명히 오셔서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리라는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소망은 밑바탕이 없는, 근거도 없이 공중에 붕 뜬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벌써 아바라고 부릅니다. 지혜가 없어 불안할 때 하나님께‘아바 아버지’라고 기도하면 지혜를 얻고, 능력이 없어 두려울 때 하나님을‘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며, 심지어 칠십 평생을 살다가 죄악의 세상에서 우리의 옛 아담적인 몸이 죽어 갈 때도 우리 몸을 하나님 아버지께 맡기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구원의 첫 열매를 받은 자로서 구원의 완성을 기다리는 그리스도인의 소망입니다. 제7과 예정과 지키심 지금까지 우리는 구원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구원이 왜 필요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객관적 구원 사건이 일어났는가, 그 객관적인 구원 사건을 우리가 어떻게 믿음으로 덕 입을 수 있는가, 덕 입은 구원이 어떻게 종말론적 구조를 가지고 있는가, 거기서 어떻게 제자도의 윤리가 파생되는가, 그래서 오늘 우리가 사는 삶이 어떠한 삶이 되어야 하는가, 우리가 바라는 소망은 어떠한 것인가 등입니다. 이제 이 모두를 하나님의 구원의 처음과 끝의 관점(perspective)으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예정을 이해하는 데는 시간 개념이 중요하다 예정은 태초를 논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구원 문제를 시간 순으로 본다면 거기사부터 시작해야 할텐데 왜 이처럼 구원에 관한 이야기 끝에 놓아야 합니까? 바로 여기에 중요성이 있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논할 때 태초라는 시점에서 시작할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구원 사건부터 논해야 합니다. 예정을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할 때 예정 교리의 그 오묘함이 완전히 도치되어 오히려 우리를 불안하게 하고 우리를 괴롭히는 교리로 다가올 수도 있습니다. 사실 예정의교리는 우리에게 위안을 갖게 합니다. 예정의 교리를 성경적으로 이해할 때 이 교리의 진정한 의미가 드러나고 그것이 우리에게 진정으로 위안을 가져다 줍니다. 예정의 교리를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올바른 관점을 가지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예정 교리는 역사의 중심에서부터 논하기 시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의 구원이 일어났다고 고백하며 그 안에 하나님의 계시가 완전히 일어났다고 믿습니다. 하나님의 오묘한 진리가 그리스도 안에 계시되었으므로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그 계시가 가장 환합니다.이전까지의 계시, 곧 구약의 계시는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될 계시에 대한 준비 계시였습니다. 그래서 그 구약의 계시는 그 불빛이 그다지 환하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 오시기 전의 계시는 그리스도에 대한 계시였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될 계시에 대한 그림자였습니다. 한편 그리스도께서 오신 이후 곧 신약의 사도들의 선포는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계시를 선포한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 안의 계시 곧 그리스도의 사건은 역사의 중심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흔히 이것을 잘못 이해한 사람들은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의 시간과 그리스도가 오신 이후 재림까지의 시간의 길이가 똑같다는 의미에서 역사의 중심이라고 생각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오해입니다. 그리스도가 역사의 중심이라는 말은 수학적 의미가 아닙니다. 그리스도 오시기 전의 역사는 그리스도가 오시기 위해 준비한 과정으로 그리스도를 향해 가는 역사였고, 그리스도가 오신 이후의 역사는 그리스도의 사건에 의해 의미를 갖는 역사라는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사건이 역사의 중심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의 모든 계시는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미래 지향적 계시였고, 그리스도가 오신 이후의 사도들의 선포는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구원을 되돌아보는 관점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는 역사의 중심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역사의 중심이라는 관점에서 모든 교리를 따져 보아야 합니다. 이 점에서 구약은 구약 자체로서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의미가 없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완전한 계시의 불빛 아래서 보아야 구약의 의미가 생깁니다. 따라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유대인들과는 구약을 보는 시각이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미래도 그리스도 계시의 불빛 아래서 보아야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 완전히 계시 하셨고, 그리스도 안에 계시의 불빛이 가장 환하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이 어떻게 선포했습니까? 그리스도 안에 계시 나타났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들이 선포한 내용이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계시와 다르다면 그들의 선포는 올바른 것이 아닙니다. 올바른 계시가 아닌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예언을 받았다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 사람들이 그리스도 안에나타난 계시와 근본적으로 어긋난 예언을 한다면 모두 가짜입니다. ·예정 교리는 계시의 밝은 빛에 비추어 이해해야 그런데 이 계시의 불빛은 양쪽으로 멀리멀리 비췰수록 희미해집니다. 이쪽은 태초요 저쪽은 종말인데 중간의 불빛이 양쪽으로 비췰수록 희미해집니다. 중간이 제일 환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계시가 가장 환합니다. 그렇게 하여 우리의 구원에 필요한 것을 완전히 보여 줍니다. 태초와 종말에 관한 계시의 불빛은 인간의 죄에 의해 가려지고, 인간의 어두운 지혜에 의해 가려지고, 인간의 여러가지 부족함들로 인해 가려지고 희미합니다. 바울은 종말에 대하여 거울을 보는 것같이 희미하게 본다고 했습니다(고전13:12). 바울의 이 말은 희미하다는 의미만이 아니라, 그림이 이렇게도 보이고 저렇게도 보인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옛날에 쓰던 구리 거울을 생각해 보십시오. 이렇게 보면 얼굴이 긴 것 같고 저렇게 보면 달처럼 동그랗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 오실 때, 그래서 우리의 구원이 완성될 때, 그 안에 일어난 계시의 불빛이 우리 죄에 거침없이 환하게 드러날 때 우리가 얼굴과 얼굴을 맞댄 듯이 볼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잘 아시듯 우리도 하나님을 잘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잘 아시지만 현재 우리는 완전한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종말에 대해서는 우리의 구원에필요한, 우리의 믿음의 소망을 지탱하는 데 필요한 지식은 다 알 수 있습니다. 계시의 불빛이 그 만큼은 환하게 비취고 있습니다. 그러나 종말이 언제 올지, 우리의 육신의 형제와 친족은 구원을 받을지, 누구는 어떻게 될지 등과같은 이런 모든 자세한 것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우리가 아무리 요한계시록을 깊이 연구하고 그 상징들을 다 안다고 하더라도 종말에 대하여 환하게 다 안다고 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신앙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우리는 종말에 대해 다 알 수 없습니다. 희미합니다. 그러나 그 희미한 것을 믿고 의지하는 바로 그것이 우리 믿음과 우리 구원에 충분합니다. 현재 희미하게나마 나타난 그것을 믿고 하나님의 사랑을 의지하는 것이 진정한 믿음입니다. 희미한 그림을 이렇게 저렇게 해석하고 제멋대로 뜯어 맞추어서 사람을 현혹시키는 것은 올바른 믿음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의지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기 지혜로 자꾸 혜아리려는 것입니다. 666이든 브레즈네프든 하나님께 완전히 의지하고 사는 것이 올바른 믿음입니다. 마찬가지로 계시의 불빛이 중심에서 태초로 갈수록 희미해집니다. 그러나 태초에 관해 우리는 많은 것을 알고 있습니다. 구원에 필요한 것은 다 알 수 있습니다. 태초에 관하여 뭔가 더 알고 싶은우리의 호기심이 있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데 어떻게 하셨을까, 몇 명이나 구원 얻도록 예정되었는지 알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등등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모릅니다. 역사의 양쪽 끝에 대하여는 신비의 요소가 많습니다. 그러나 여러 번 강조한 것처럼 우리의 믿음의 현재와 구원의 소망에 대해 필요한 지식은 계시의 불빛에 의해다 알 수 있습니다. 그것으로 족합니다. ·예정 교리의 중심은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계시 그러므로 예정을 이해하려면 역사의 중심에서부터 되돌아보는 관점으로 보아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 태초라는 시점에서부터 시작하여 이 예정의 문제를 이해하려면 도대체 헤아릴 수없는 역사 철학적인 억측 속에 빠지고 맙니다. 그런데 이것이 그런 문제에 빠지기 좋아하는 사람들만 괴롭히면 좋겠는데, 순전하게 주님을 믿고자 하는 사람들까지 내가 과연 예정을 받았는지 안받았는지 몰라 우리를 불안하게 만드는 것으로 다가오기도 합니다. 사실 이것 때문에 불안해 하는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예정의 교리가 사람을 불안하게 한다는 것은 이 교리의 원래 의도와는 정반대 효과입니다. 태초라는 시점부터 시작하면 내가 예정을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 모를 뿐 아니라 누가 예정을 받았는지조차 알 수 없습니다. 예정의 교리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안해 낸 교리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예정 교리를 그렇게 보아서는 안됩니다. 예정 교리는 성경대로 믿음의 현재라는 시점에서 내가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의 계시를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가진 현재에서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내가 믿음의 현재에서 구원을 받았다는 확신 가운데서 되돌아보면 이런 질문들이 떠오릅니다. 도대체 내가 어떻게 해서 구원을 받았는가? 믿은으로 받았는데 이 믿음이 도대체 내게 어떻게 왔는가? 내가 믿는 순간에는 내가 믿음으로 그 복음을 받아들이겠다고 믿음의 결단을 한 것 같은데 믿느 자가 되고 보니 나처럼 영적으로 눈이 먼 자가 도대체 어떻게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받아들이며 그가 나를 위해 죽으셨다고 받아들이면서 구원을 얻게 되었을까? 이렇게 주님을 믿는 자가 되어 그리고 현재 나의 믿음에 대해 생각해 봤을 때,‘아! 분명히 내가 믿기 전에 내가 알지도 못하는 사이 성령께서 내게 임하셔서 그의 은혜로 나의 보지 못하는 영적인 눈을 뜨게 하시고, 나로 하여금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게 하고, 그가 나의 죄를 위해 돌아가셨다는 것을 받아들이게 하고, 나의 강퍅한 의지를 껏어 그에게 순종하게 했구나’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곧 내가 믿는 순간에는 그 복음을 받아들이겠다고 내가 결단한 듯했으나 믿는 자가 되고 보니 나로 하여금 믿도록 성령께서 미리 역사하셨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된다는 것입니다. 이른바 예정된 은혜(prevenient grace)를 깨닫게 됩니다. 그러니까 믿음 자체가선물입니다. 이것을 깨닫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 더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내가 알기도 전에 내 안에 역사하셔서 나로 하여금 복음 들을 기회를 주실 뿐 아니라 그 복음을 깨달을 수 있도록 내 속에 미리 역사하셨다면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려는 의지가 있으셨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그 구원 의지가 역사하였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은 변치 않으시는 분이요, 신실하신 분이요, 창조주 하나님은 태초의 계획을 당신의 뜻대로 진행하시는 분입니다. 그렇다면‘모월 모시에 나로 하여금 복음을 깨닫게 하신 하나님은 태초부터 나를 구원하시려는 의지가 있었구나, 그렇게 결정하시고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때가 차매 성령의 미리 역사하시는 은혜로 나의 영적인 눈을 뜨게 하시고 자기를 주장하는 나의 강퍅한 의지를깨뜨리셔 복음을 믿게 하고 구원을 받도록 하셨구나’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시려고 예정하셨음을 깨닫게 됩니다. 이처럼 예정의 교리를 깨닫는 것은 믿음의 현재에서 되돌아볼 때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깨닫게 되는 이 예정 교리를 태초의 시점부터 시작하여 생각하면 도무지 알 수 없습니다. 태초에서 시작하면 내가 믿음이 있다고 하나 직접 예정받아서 구원받았는지 도깨비에 홀려 믿음이 있다고 하는지, 부흥회에 갔더니 부흥사가 윽박질러 내가 믿음이 있다고 했는지 알 수가 없어 늘 불안해 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 믿음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알 수가 없게 됩니다. 성경은 그렇게 시작하지 않습니다. 믿음의 현재에서 시작합니다. ·예정의 교리는 믿음의 미래를 가르치려는 가르침 신약 성경 요한복음에 예정의 교리가 잘 나타나 있는데, 예수님이 빛으로 이 세상에 오셨을 때 그분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이 항상 두 가지로 갈라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거부합니다.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그 받아들임으로 말미암아 자기들의 구원으로 예정되었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합니다. 반대로 예수님을 거부하는사람들은 예수님을 거부함으로 말미암아 자기들이 멸망으로 예정되었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합니다. 가끔 제가 예화로 드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어느 미술 전람회가 열렸는데, 피카소의 그림이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후루시초프가 그 그림을 보고,“당나귀가 꼬리를 흔들어서 그린 그림”이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이 이야기가 신문에 보도되었습니다. 그때 그 그림이 그런 평가를 받은 것입니까? 이 사실은 피카소의 그림이 그런 평가밖에 받을 수 없음을 드러낸 것이 아니라, 후루시초프가 그림 볼 줄 모른다는 것, 즉 자신의 무식을 폭로한 것이 아닙니까?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진리로 이 세상에 오셨지만 이 세상 사람들은 이 세상의 신에 눈이 가려져 예수가 진리가 아니라고 정죄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누가 심판을 받았습니까? 사실은 예수님을 심판한 자들이 진리에 속하지 않은 자임을 스스로 드러낸 것입니다. 빛과 생명으로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함으로 말미암아 빛과 진리에 속한 자들이 아니라 어두움과 거짓에 속한 자임을 스스로 명백하게 증명한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예정의 교리는 태초의 시점에서부터 시작하여 생각하는 교리가 아니라, 오늘 복음에 어떻게 반응하느냐 하는 믿음의 현재에 의해 이해되어야 하는 교리입니다. 내가 복음을 믿음의 눈으로 받아들이면 빛에 속했습니다. 반면 그렇지 않으면 구원에 속하지 아니한 것입니다. 예정의 교리는 교리 자체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호기심을 채우기 위하여 존재하는 교리는 더욱 아닙니다. 바울이나 요한 같은 사도들이 이 예정 교리를 깨달아 열심히 가르친 것은 결코 우리의 호기심을 만족시키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무엇을 위해서입니까? 사도들이 이 예정교리에 관한 교훈을 우리에게 가르친 목적이 무엇입니까? 한마디로, 우리 믿음의 미래를 위해서입니다. 믿음을 갖게 된 내가 현재라는 지금 이 시점에서 나에게 믿음이 어떻게 와서 내가 구원받았는지를 생각해 볼 때, 하나님은 신실하시고 변함없으신 분이니까 태초부터 나를 구원하시겠다고 예정하신 그 계회대로 구원받았음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똑같은 논리로, 태초에 나를 구원하시겠다고 예정하시고 구원에 이르게 하신 하나님, 그 신실하시고 변치 않으시는 하나님은 그 계획을 끝까지 성취하시리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나같은 죄인을 은혜로 구원하신 하나님이 내가 중간에 잘못했다고 나를 박차 버리시는 것이 아니라, 내가 설령 거꾸러지고 믿음이 약해 이리저리 방황하고 죄를 짓더라도 끝까지 나를 지탱하시고 지키셔서 종말에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서 구원이 완성될 때까지 나를 붙드실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됩니다. 예정의 교리 는 이와 같은 구원의 확신과 위안을 가져다 주는 교리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정 교리가 없다고 주장하는 극단의 알미니안주의자들이 있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알미니안주의자들이 예정 교리를 강조하지 않는 것이 사실입니다. 인간의 자유 의지에 의해 복음을 받아들이고 믿음을 얻는다는 것을 너무 강조합니다. 그것은 우리를 매우 불안하게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구원과 계획, 그분의 예정에 의해 내가 전적으로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받았다는 예정의 교리가 없으면 믿음이 내가 하는 자유의지의 결단에 의해 생기고 구원이 내 믿음에 달려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문제는 우리 인간입니다. 우리는 살다가 믿음이 깊은 계곡으로 빠질 때면 구원을 잃어버리고 반대로 믿음이 올라가면 구원을 회복하는 것이 됩니다. 인간은 변덕쟁이가 아닙니까? 믿음이 좋으면‘할렐루야’하고, 나의 형제에게 어려운 일이 생기거나 부모님이 교통 사고를 당하거나 해서 삶의 극심한 고난 가운데 처하면‘왜 이러나, 하 나님이 안 계신가 보다’하고 믿음이 바닥나기 일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이 인간의 믿음에 달려 있다면 우리의 구원은 얼마나 불안합니까? 앞으로도 나의 인생에 얼마나 큰 환난이 올지 어떻게 압니까? 그런 환난과 고난 속에서 우리의 믿음이 유지되리라고 누가 자신하겠습니까? 우리의 구원이 우리의 믿음에 달려 있다면 과연 누가 구원을 확신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구원은 실패하지 않는다 이에 반해 예정의 교리는 설령 우리가 약하여 넘어지고 실패한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태초부터 나를 구원하시고자 예정하셨으므로 신실하시고 변치 않으시는 하나님은 끝까지 나를 사랑하시고 끝까지 나를 지키시리라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요약하자면, 나의 구원이 완전히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는 교리가 예정 교리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앞으로 무슨 일을 당하더라도, 내가 감옥에서 두들겨 맞아 무의식 중에 혹은 최면술에 걸려 예수를 부인한다고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나를 지키실 것이고 하나님께서 나를 끝까지 구원하실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 나의 믿음에 대해 확고하게 확신과 위안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주님을 믿는 믿음을 내게 주신 그분이 나를 끝까지 지키시리라는 확신과 위안을 위해 예정의 교리가 중요합니다. 그때 우리는 로마서 8장에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의 자유함을 가지고 살 수 있습니다. 바울은 왜 로마서 8장에서 예정의 교리를 강조합니까? 로마서 8장이 무슨 장입니까? 이미 구원의 첫 열매를 받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 오셔서 구원을 완성할 때까지 우리가 고난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 그 내용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구원의 첫 열매를 받은 자들로서 제자도의 고난을 받으면 갑자기 이런 생각이 날 수 있습니다.‘내가 구원을 받았는데 왜 이처럼 고난이 많지? 내가 구원받았다는 게 거짓말 아닌가?’이런 생각들로 소망이 흐려지고 앞이 캄캄해질 때가 있습니다. 바로 이때 바울은 우리에게 로마서 8장을 가르쳐 줍니다. 우리의 소망은 확실하다! 소망은 결코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가 이미 구원의 첫 열매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 구원의 첫 열매는 태초에 하나님의 결정에 의해 주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 신실하신 하나님이 우리의 믿음을 끝까지 지키시리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예정 교리는 바로 이와 같은 하나님의 신실함을 가르쳐 주고 신뢰하게 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으로서 고난받는 상황 속에서도 구원이 끝까지 완성되리라는 것을 강조하고 그리스도인들에게 위안과 확신을 주기 위해 로마서 8장에 이 예정론의 중요한 진리가 선포되고 있는 것입니다. 롬8:31-39 31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누가 우리를 하나님의 이러한 사랑에서 끊을 수 있겠습니까? 칼입니까? 환난입니까? 높은 것입니까? 깊은 것입니까? 사망이겠습니까? 그의 사랑하는 아들을 내어 주신 이가 자신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않겠습니까? 누가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앞에 닥친 모든 고난이 아무리 크다해도 이 모든 고난을 정복하고 이기는 승리자가 될 뿐 아니라 승승리자(勝勝利者)가 될 것입니다.
구원이란 무엇인가/김세윤 지음/두란노/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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