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탁의 도시 델피에서 <2>
델포이의 청동 마부상. 일명 전차를 모는 청동 마부상.
고대 그리스의 청동조각상 중 최고로 꼽히는 이 작품은 높이가 1.7m이고 눈동자, 홍채, 흰자위, 입술, 심지어 속눈썹까지 실물 크기로 조각된 섬세하고 귀중한 그리스의 문화유산이다. 기원전 478년 고대 그리스 시칠리아 섬의 도시국가 겔라의 왕이었던 폴리잘로스가 피티아 제전의 전차경주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여 델포이에 봉헌한 청동상. 전차를 끄는 말들은 사라지고 이 마부상은 1896년의 발굴작업 중에 신전 부근의 땅속에서 발견했다고 한다. 아울러 고삐와 전차 등의 단편들도 함께 발견되었다.
청동마부상의 측면사진.
전차 위의 마부상과 네 마리 말의 전체 모형도.
안타깝게도 이 청동 말은 기구한 운명을 타고났나 보다. 로마의 황제 콘스탄니누스는 서기 324년 고대 그리스의 식민도시였던 비잔티움을 공략하여 정복했고, 로마제국이 동서로 분열되자 비잔티움은 동로마 제국의 수도로 정함으로써 ‘새로운 로마’라는 인식이 싹트기 시작했다.
콘스탄티누스는 약 6년여에 걸쳐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고 이 새로운 도시를 그의 이름을 따서 콘스탄티노폴리스(지금의 이스탄불)로 부르기 시작했다. 그 이후 이곳 동로마의 지배자들은 그리스 델포이에 있던 귀중한 문화유산인 네 마리의 청동말과 이 또한 역사적 유물인 청동 뱀 기둥을 약탈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전차경기장으로 사용되던 히포드롬 광장(현재 술탄 아흐메트 광장으로도 불림)에 가져다 놓았다.
그러나 11세기에는 이탈리아의 도시국가들이 지중해 동쪽으로 세력을 넓혔다. 특히 베네치아 공화국은 동로마와 대립이 깊어지고 1204년 제4차 십자군의 침공 때 베네치아를 위시한 유럽 라틴인들의 협공으로 콘스탄티노플은 함락되었다. 이때 십자군 병사들은 이곳에서 온갖 폭행과 학살, 약탈을 자행했고 십자군의 지도자였던 엔리코 단돌로는 히포드로모스 광장에 있던 네 마리 청동 말을 비롯 수많은 미술품과 보물을 베네치아로 가져갔다.
그 후 아폴론 신에게 봉헌했던 이 청동말은 베네치아의 산 마르코 성당 정문 위쪽의 높은 자리에서 금방이라도 뛰쳐나갈 듯한 기세로 위용을 뽐내는 광장의 명물로 관광객의 사랑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현재는 성당 내부의 박물관 특별전시관에 보관 중이라고 한다.
십수년 전 베네치아에 갔을 때 카메라에 담아둔 웅장한 모습의 산 마르코 성당. 정문 위쪽의 난간에서 위용을 뽐내던 네 마리 청동말이 보인다. 현재는 성당 박물관에 보관 중이라고 한다.
살아있는 듯한 네 마리 말의 각기 다른 생동감 넘치는 표정이 그야말로 뛰어난 예술성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안티노우스 Antinous. 일명 우울한 로마인.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총애를 받았던 안티노우스 조각상. 서기 130년 이 미소년이 나일강에세 익사하자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목놓아 통곡했고 이후 안티노우스를 기리기 위해 이집트에 안티노폴리스란 도시를 건설하고 그곳에 안티노우스를 신격화한 신전까지 건설했다고 한다.
시프노스 보물창고 동쪽 앞면에 있던 페디먼트(pediment)와 프리즈(frieze).
위의 부조는 아폴론과 헤라클레스의 싸움을 번개를 쳐서 말리는 제우스의 모습. 아래 부조는 그리스인들을 응원하는 신들의 모습이라고 한다.
보물창고의 부조물 일부.
박물관 전시물은 그밖에도 소개할 것이 많지만 이 정도로 끝내고 이제부터 기둥 몇 개와 토대만 남아있다는 아폴론 신전의 모습을 보러 가기 위해 박물관문을 나서기로 했다.
아폴론이 화살로 쏘아 맞춘 피톤(python)이 뭔가 해서 그리스 신화를 들춰보니, 파르나소스 산의 델포이 신탁소를 지배하던 거대한 뱀신이라고 한다. 대지의 신인 가이아가 남자 없이 낳은 자식으로, 자신이 지배하고 있던 이 성지 피토(델포이의 고대 이름)를 피톤에게 주고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제물을 받고 예언을 내리게 했다. 또한 가이아는 성질이 급하고 사나운 피톤에게 이 신성한 땅을 넘기면서 매사 조심하고 너를 노리는 적이 있으니 항상 경계를 늦추지 말라고 당부한 후 한가지 예언을 남겼다. 다음에 태어나는 제우스의 아들이 네 목숨을 앗아갈 것이라고.
예언의 성지를 차지한 피톤은 여신 레토가 제우스의 자식을 임신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 자식이 태어나기 전에 어미와 함께 먹어치우는 것이 상책이라 여기고 기회를 노렸다. 제우스의 정부인 헤라 역시 레토가 임신한 쌍둥이가 제우스 다음가는 권력을 누릴 것을 우려한 나머지, 거대하고 사나운 뱀 피톤에게 그녀가 해산을 못하도록 막으라는 명령을 내렸다.
레토는 진작부터 시기심 많은 헤라의 해코지를 피하고자 전국을 떠돌며 출산할 피난처를 찾아 헤매던 끝에 바다에 떠도는 바위섬(델로스) 위에서 쌍둥이 오누이인 아르테미스와 아폴론을 출산했다. 전설에 따르면 이 바위섬은 파도에 떠밀려 떠돌고 있었으나 여러 신들이 레토의 딱한 사정을 생각해 아폴론과 아르테미스의 출산을 돕고자 하늘의 도움을 얻어 바위 밑바닥을 고정시켜 주었다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도 있다.
아버지 제우스는 레토의 출산 소식에 크게 기뻐하며 아폴론에게 예언을 관장하는 능력을 주었고 딸인 아르테미스에겐 달과 사냥, 순결, 출산을 관장하는 여신의 능력을 부여했다.
그러나 예언의 땅 피토는 이미 피톤의 지배 아래 있었기에 아폴론은 이 신탁소를 차지하고자 활과 화살을 들고 피토로 향했다. 신들은 태어나 며칠 만에 어른으로 성장한다지만 아직 앳된 모습이 가시지 않은 아폴론을 보고 피톤은 ‘이런 애숭이는 한 입 거리도 안되겠다고 방심한 채 숲속에서 관망하는 사이, 아버지 제우스로부터 궁술의 능력까지 부여 받은 아폴론은 순간을 놓칠세라 활을 당겼다. 화살은 여지없이 피톤의 몸을 관통했고 피톤은 미처 저항도 못해본 채 숨을 거두고 말았다.
이로써 신탁의 권리는 아폴론에게 넘어갔고 피톤의 시체는 불태워져 신탁소 안에 있는 세계의 중심을 가리키는 옴파로스 밑에 묻었다. 이후 피톤을 죽인 자리에 자신의 성소를 세우고 이곳의 지명을 ‘대지의 자궁’을 뜻하는 델포이로 바꾸었다. 이리하여 옛 지명 피토는 사라지고 델포이로 불리었다고 한다.
기원전 6세기경 델피의 전성기라고 불리던 시기의 델포이 성역 복원도.
웅장한 규모의 신전과 남쪽 신전 울타리 중앙에 높이 솟은 대리석 기둥 위에는 스핑크스 상이 서있었고 그 아래쪽으로는 그리스 여러 도시국가들이 신전에 바칠 보물을 보관하는 보물창고가 늘어서 있었다. 일부 봉헌물은 미처 창고 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밖에 전시되어 있다.
이후 델포이의 아폴론
성역은 그리스 전 지역은 물론 인근 외국에까지 알려지는 성소로 각인되었고, 기원전 586년부터 4대 범 그리스 경기 중 하나인 피티아 경기가 열렸고, 4년마다 모든 그리스의 도시국가에서 온 사람들이 기량을 겨루고, 이
경기의 승자는 피톤의 살해를 재현한 소년이 템피 계곡에서 잘라온 월계수로 만든 월계관을 쓰는 영예를 얻었다.
일설에 따르면, 이곳에서 4년마다 피티아 제전이 열렸던 것은 괴물 피톤을 죽인 죄를 정화하고 대지의 여신이며 피톤의 어머니인 가이아의 노여움을 위로하기 위한 제전이었다고도 한다. 그리스의 다른 3대제전이 내국인만 참가할 수 있었던데 반해 이곳은 유일하게 외국인도 참가할 수 있었고 경기의 우승자에게는 월계관을 씌워준다. 흔히 올림픽 하면 월계관을 생각하지만 실은 올림픽 우승자에게는 올리브관을 수여한다.
박물관을 나서 델포이 성역을 향해 조금 오르다 보면 가장 먼저 당도하는 곳은 로만 아고라 터이다. 이곳에서는 생필품은 물론 신전에 바칠 각종 제물이나 기타 종교물품을 팔았던 시장터 겸 이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의 만남의 장소 역할을 했던 셈이다.
아마도 좌측으로 점포들이 들어서 있고 편평한 바닥이 사람들이 모여 대화를 나누던 광장이 아닐까 싶다. 광장의 넓이는 사진에 보이지 않는 전면과 우즉으로 꽤 넓은 공간을 품고 있다.
델피의 아폴론 신전은 부유한 개인은 물론이고 그리스 인근에 있는 국가의 지도자들도 국가적인 난제나 타국과의 전쟁을 앞두고 어떤 결정을 내리는 게 옳을지 신탁을 받기 위해 찾아왔다고 한다.
유적지 입구부터 아폴론 신전으로 이어지는 길을 신성한 길 또는 참배의 길이라고 부른다. 이 길 양쪽으로는 그리스 각 도시국가들이 신전에 바칠 공물을 보관하던 보물창고들이 들어서 있었다. 지금은 초석들과 일부 남은 돌무더기만이 그 자리를 지키면서 그 옛날 이곳에 건물들이 들어서 있었던 흔적만을 암시하고 있을 뿐이다.
신전으로 가는 길 초입에는 초석 위에 놓인 큰 원추 모양의 돌이 하나 보인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인들이 세계의 중심이라 믿었던 장소에 놓았던 옴파로스(그리스어의 배꼽을 뜻함)이다. 그러나 이것은 옴파로스의 모형을 본뜬 모조품이고 진품은 박물관에 보관 중이다. (그것 역시 복제품이지만).
그리스 신화에 보면 신들의 왕 제우스가 어느 날 세계의 중심이 어디일까 알아보고자 독수리 두 마리를 각각 동쪽과 서쪽으로 날려보냈다. 얼마 후 독수리들은 거대한 바위산이 햇살을 반사하며 번쩍이는 이곳 파르나소스 산 위를 선회하더니 델포이의 공중에서 다시 만나 상공을 비행한 후 멀리 날아갔다고 한다.
제우스는 독수리가 상공에서 만났던 위치의 바로 아래 대지에 원추형 돌을 세워두고 이 돌을 세상의 중심을 상징하는 옴파로스로 불렀다고 한다. 그밖에도 이곳 델피, 델포이는 ‘대지의 자궁’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옴파로스 바로 위쪽에는 아테네가 신전에 바칠 봉헌물을 넣어두던 보물창고가 있다. 이 창고에는 기원전 490년에 있었던 마라톤전투에서 아테네가 페르시아 대군을 물리친 것을 신의 뜻으로 여기며 아폴론 신께 바친다는 글을 남쪽 벽에 새겨 두었다고 전한다.
이곳에 세워진 다른 도시국가들의 보물창고와 마찬가지로 아테네 보물창고 역시 무너진 채 여기저기 돌무더기로 흩어져 있었으나 주위에 남아있던 자재들을 찾아 맞추고 부서진 부분은 새로 만들어 복원한 것이다.(색깔이 선명한 부분은 새로 제작한 자재). 델피 유적지의 붕괴된 건물 원형을 짐작해 볼 수 있는 유일한 건축물로 보인다.
복원한 아테네 보물창고.
정면에 있는 6개의 메토프는 아마존 전투, 북면의 9개는 헤라클레스의 임무, 서쪽의 6개는 게리온의 가축을 훔치는 모습 등이 새겨져 총 30개의 메토프가 있다고 한다.
신전 아래쪽으로 이 또한 어느 도시국가들의 보물창고 터로 보이는 곳들. 여기저기 건물의 초석들과 군데군데 무너진 돌 더미가 옛 보물창고의 잔재를 보여주는 쓸쓸한 모습. 그 옛날에는 이곳에도 신전에 바칠 봉헌물이 가득 들어차 있었을 것이다. 좌우로 초석만 자리를 지키는 여러 개의 창고 터가 그 옛날 전성기의 델포이 모습을 헤아려보게 한다.
시빌 바위 (Rock of Sibyl)
시빌 또는 시빌레란 신전에서 신탁을 행하던 여자 예언가를 뜻한다. 아폴로 신전이 세워지기 전 시빌은 이 바위 위에서 예언을 했다고 한다. 이 시빌에게도 전해오는 전설이 있다.
전설에 따르면 아폴론은 이 바위 위에 앉아있는 시빌을 보고 그 매력에 빠져 사랑을 고백한다. 그러나 사람이 아닌 신과의 사랑을 두려워한 시빌은 아폴론의 청혼을 거절한다. 사랑을 거절당한 아폴론은 시빌에게 그래도 아름다운 당신을 위해 소원 하나를 말하면 들어주겠다고 제안했다네.
시빌은 잠시 생각하다가 바닥에 있는 모래 한 줌을 손바닥에 올리고 이 모래알만큼 살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영원한 젊음을 유지하면서’라는 말을 덧붙이지 못했다지요. 결국 나이가 들어가면서 몸은 쪼그라들고 허리는 굽어 고개를 쳐들기도 어려운 쇠약한 몸으로 자리에 누워 눈만 껌벅이는 처지가 되었다. 그제서야 자신의 부질없는 욕심을 후회하면서 제발 죽기만을 소원했다고 합니다.
아폴론 성지를 사방으로 감싼 축대. 이 돌들은 네모난 모양이 아니라 자연석 모양을 최대한 살려 쌓은 것이 특징이다. 이렇게 축대를 쌓으면 지진이라든가 기타 자연재해의 충격에도 잘 견디어낸다고 한다. 기원전 6세기에 쌓았다는 이 축대는 거의 2,600년을 이 자리에서 꿋꿋이 버티고 있다.
아폴론 신전 정면.
오랫동안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지고 심지어 그 위에 마을까지 형성되어 19세기 말까지 카스트리라는 마을이 들어서 있던 이곳. 프랑스 고고학발굴 팀에 의해 이곳이 델포이 성지임이 밝혀지자 1890년 이곳에 있던 마을을 이주시킨 후에 1892년부터 시작한 유적 발굴작업으로 마침내 고대의 성지가 눈앞에 펼쳐졌다.
현존하는 유적은 BC 4세기에 세워진 신전 중의 일부로 초석과 몇 개의 계단, 둥근 기둥 몇 개만 납아 있다. 이 자리에는 그 이전에도 신전이 있었으나 BC 650년경에 세운 첫 번째 신전은 BC 548년에 불에 타 무너졌고 당시의 유적 중에 남아있는 것은 고대 기둥머리 몇 개와 벽돌 덩어리 등이라고 한다.
이어서 BC 500년 경에 지어진 두 번째 신전도 기원전 4세기에 일어난 지진으로 붕괴되었고 그 잔해로는 많은 벽돌 더미와 페디먼트를 장식했던 조각품이 남아있다고 한다.
방향을 바꿔서 한 컷 더 담아본다. 현존하는 유적은 기원전 330년에 완성한 세 번째의 석조신전. 유적은 신전의 토대와 원주 몇 개, 원주의 토대 일부가 남아 있을 뿐이지만 일부가 복원되어 페리스튀리움(안뜰을 둘러싸는 열주량)이 곁들여진 정면에 6개, 측면에 13개, 총 38개의 도리아식 열주로 둘러싸인 직사각형 신전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게 되었다. 아폴론 신전 내부는 3개 부분으로 나뉘어 있었고 신탁이 이루어지던 가장 안쪽에 있는 성소는 2층 구조로 되어 1층 중앙에는 황금으로 만든 아폴론상이 놓였고 지하의 밀실에는 옴파로스(대지의 배꼽) 대리석이 놓여 있었으며 그 앞쪽의 세 발 받침대에 놓인 청동 가마솥 위에 앉은 피티아가 신탁을 신관에게 전했다고 한다.
거대한 장방형의 신전 터에는 몇 개의 원기둥과 기단, 초석들이 그 옛날의 웅장했던 신전 모습을 상상케 한다. 신전 길 건너 파르나소스 산쪽으로 보이는 세 마리 첨동뱀 기둥. 꽈리를 틀며 올라간 기둥 모양의 저 부조물 역시 사연이 깊다.
가까이에서 본 청동 뱀기둥.
안타깝게도 이것은 진품을 본뜬 모조품이다. 원래 이 기둥은 기원전 479년 아테네가 페르시아 제국과의 살라미스 해전 및 플라타이아이 전투에서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적군의 방패와 무기들을 녹여 만든 구조물로 아폴론 신에게 바친 승리의 기념비이다. 기둥의 아랫부분에는 전투에 함께 참가한 31개 폴리스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고 한다. 청동으로 된 3마리 뱀이 서로 꽈리를 틀고 서있는 모습(그리스 도시국가 연합의 결집을 상징했다고 함)으로 원래 8미터 높이였으나 머리부분이 소실되어 5.5m만 남았다. 또한 이 뱀의 머리 위에는 금으로 된 삼각 받침대가 있고 그 위에 황금 꽃병(일설에는 황금 가마솥 모양이라고도 한다)이 놓여 있었다고 한다.
이후 로마의 황제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새로운 로마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장식하기 위해 당시 로마의 속국이었던 그리스의 이 구조물을 앞에서 언급했던 네 마리의 청동말과 함께 약탈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현 이스탄불)의 히포드로모스(전차경기장) 광장에 옮겨놓았다..
2018년 가을 터키 방문 중 히포드로모스 광장 한쪽에 외롭게 서있는 청동 뱀기둥의 가련한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기둥 상단의 금으로 된 삼각 받침대는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약탈하기 전에 이미 사라진 상태였다고 한다. 그나마 약탈 당시에도 청동기둥 위의 세 마리 뱀의 머리는 남아 있었으나 어느 술탄이 뱀 머리 하나를 파괴했고 이후 1700년 경 만취한 오스만 제국의 폴란드 대사와 그 일행이 혐오스럽다 하여 나머지 뱀 머리도 잘라 버렸다고 한다. 그 후 사라진 세 마리 뱀 머리 중 하나는 1847년 발굴되어 이스탄불 고고학박물관에 소장되었고 다른 하나는 영국 대영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는 이야기. 사라진 머리 하나는 영원히 행방불명.
뱀기둥 상단의 모습. 청동 뱀기둥의 복원도에서
신전에서 다시 위쪽으로 조금 올라가면 넓은 터에 만들어진 야외 원형극장이 보인다. 극장의 기원은 기원전 4세기에 세워졌다고 하나 지진으로 무너지고 현존하는 것은 기원전 2세기 로마인들이 복원한 것이라고 한다.
35열의 석조계단으로 구성된 이 원형극장은 관람석과 분장실, 무대를 갖추고 있으며 주로 델포이의 축제기간에 아폴론 신을 찬양하는 연극을 비롯 각종 공연에 사용되었고 약 5,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