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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운명]호접지몽(胡蝶之夢)

작성자도방장사(慶禹顯)|작성시간19.05.05|조회수3,961 목록 댓글 0

 


 

나비가 되어 날아다닌 꿈으로, 현실과 꿈의 구별이 안 되는 것 또는 인생의 덧없음의 비유하는 말이다.

 

: 되 호(/5)

: 나비 접(/9)

: 갈 지(丿/3)

: 꿈 몽(/11)

 

(유의어)

물심일여(物心一如)

장주지몽(莊周之夢)

주객일체(主客一體)

호접몽(胡蝶夢)

접몽(蝶夢)

 

 

중국의 장자(莊子)가 꿈에 나비가 되어 즐겁게 놀다가 깬 뒤에 자기가 나비의 꿈을 꾸었는지 나비가 자기의 꿈을 꾸고 있는 것인지 알기 어렵다고 한 고사에서 유래한 말로, 자아(自我)와 외물(外物)은 본디 하나라는 이치를 설명하는 말이다.

 

두 쌍의 커다란 날개를 휘저으며 바쁘게 꽃 사이로 드나드는 조그만 곤충, 나비는 예로부터 많이 민요로 불렸고 시인묵객들이 다투어 묘사했다.

 

尋艶復尋香 似閒還似忙.

심염부심향 사한환사망.

예쁜 것도 찾고 향기로운 것도 찾으며, 한가한 것 같기도 하고 바쁜 것도 같네 라고 노래한 당()의 시인 정곡(鄭谷)도 그 중 하나다.

 

이런 작품 외에 잘 알려진 것이 나비효과다. 기상관측 때 처음 이야기됐다고 하는데 브라질에 있는 나비의 날갯짓이 미국 텍사스에 토네이도를 발생시킬 수도 있다는 과학이론이다.

 

작은 변화가 결과적으로 엄청남 변화를 몰고 왔을 때 자주 인용된다. 성어 중에서는 나비의 꿈인 장자(莊子) 이야기가 유명하다. 장자는 이름이 주()로 사기(史記) 노자한비(老子韓非) 열전에 소개되어 있다.

 

맹자(孟子)와 비슷한 시대의 사람으로 벼슬길에 들지 않고 은거하면서 저술에 전념했다. 학문은 노자(老子)를 근원으로 물아(物我)가 동등하여, 자연 그대로 살아가는 무위자연(無爲自然)을 주창했고 재미있는 우화를 많이 등장시켰다.

 

호랑나비인 호접(蝴蝶)으로도 쓸 수 있는 이 말은 장자 제물론(齊物論)에 나온다. 부분을 인용해 보자.

 

昔者莊周爲胡蝶. 栩栩然胡蝶也.

석자장주위호접. 허허연호접야.

장주(莊周)는 꿈에 나비가 되었다. 펄펄 나는 것이 확실히 나비였다.

自喩適志與, 不知周也.

자유적지여, 부지주야.

스스로 유쾌하여 자기가 장주인 것을 몰랐다.

俄然覺, 則蘧蘧然周也.

아연각, 즉거거연주야.

그러나 얼마 후 문득 꿈에서 깨어 보니 자기는 틀림없이 장주였다.

不知周之夢爲胡蝶與, 胡蝶之夢爲周與.

부지주지몽위호접여, 호접지몽위주여.

장주가 나비 된 꿈을 꾼 것인지, 아니면 나비가 장주가 된 꿈을 꾼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周與胡蝶, 則必有分矣, 此之謂物化.

주여호접, 즉필유분의, 차지위물화.

그러나 장주와 나비는 분명히 구분이 있을 것이니, 이를 일러 만물의 변화라고 하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장자(莊子) 제물론(齊物論)에 나온다. 장자는 여기에서 장주와 나비는 분명 별개의 사물이지만, 물아의 구별이 없는 만물일체의 절대 경지에서 보면 장주도 나비도 꿈도 현실도 구분이 없으며, 다만 있는 것은 만물의 변화일 뿐이라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여기에서 유래하여 호접지몽(胡蝶之夢)은 피아(彼我)의 구별을 잊는 것, 또는 물아일체의 경지를 비유하는 말로 쓰이게 되었는데, 오늘날에는 인생의 덧없음을 비유하는 말로 쓰이기도 한다.

 

한 가지 작은 계기가 큰 사건으로 확대되는 것은 검은 유착에서도 볼 수 있었다. 나비효과나 장자의 나비와는 관련이 없어도 작은 사건에서 번지는 것이나, 작은 욕심에서 비롯돼 평생 공적이 와르르 무너지는 것을 보면 덧없기도 하다.

 

사기(史記) 노자한비열전(老子韓非列傳)에 따르면 장자는 몽() 사람으로 이름은 주()이다. 일찍이 몽의 칠원(漆園)의 관리가 되었다. 양혜왕(梁惠王), 제선왕(齊宣王)과 동시대 사람으로, 박학하여 모든 서적에 막히는 것이 없었는데 학문의 근본은 노자(老子)에 두었다.

莊子者, 蒙人也. 名周.

장자자, 몽인야. 명주.

周嘗爲蒙漆園吏.

주상위몽칠원리.

與梁惠王, 齊宣王同時.

여양혜왕, 제선왕동시.

其學無所不窺, 然其要本歸於老子之言.

기학무소불규, 연기요본귀어노자지언.

 

그는 물()의 시비, 선악, 진위, 미추, 빈부, 귀천을 초월하여 자연 그대로 살아가는 무위자연(無爲自然)을 제창했으며, 우화(愚話)를 많이 이용했다.

 

장자(莊子)는 도가(道家) 계열의 책으로 여러 사람의 글들을 편집한 것이다. 33편이 현존하며, 내편(內編), 외편(外編), 잡편(雜編)으로 나뉘는데, 전통적으로 장자 자신이 이 책의 내편을 썼고, 그의 제자와 같은 계열의 철학자들이 외편과 잡편을 썼다고 본다.

 

장자 자신이 어느 부분을 직접 저술했다는 명백한 증거는 찾기 어려우나, 내편의 소요유(逍遙游), 제물론(齊物論), 대종사(大宗師)편이 장자 자신의 사상을 보여주는 것으로 분석된다. 현존하는 장자 33편 중, 내편 7편이 장자의 저술이며 나머지는 문하생들이 지은 것이라 한다.

 

장자에 따르면, 우리의 삶은 유한하나 인식할 수 있는 것은 무한하며, 유한으로 무한을 추구하는 것은 어리석다. 우리의 언어, 인식 등은 자신의 관점에 치우쳐 있기 때문에, 우리가 내린 결론이 모든 것에 대해 동등하게 옳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장자의 사상은 다문화주의 및 가치 체계에 대한 상대주의의 선구로 볼 수 있다. 그의 다원주의는, 삶이 좋고 죽음이 나쁘다는 전제처럼 인간 생활 영위의 기반이 되는 실용적 명제에 대한 의심으로까지 나아간다.

 

외편 지락(至樂)편의 한 우화에서 장자는 노상에서 죽은 해골을 보고 슬퍼하지만, 정작 해골은 죽음이 나쁘다는 것을 어찌 알 수 있는가?’라고 반박한다.

 

제물론편의 다른 글에서 화자는 미의 절대적 기준은 없다고 지적한다. 모장과 여희는 사람들이 미녀라고 여기지만, 물고기가 본다면 물 속으로 깊이 숨을 것이며, 새가 본다면 공중으로 날아가 버릴 것이며, 사슴이 본다면 멀리 달아나 버릴 것이다. 이 넷 중, 누가 세계의 진정한 아름다움을 아는 것일까?

 

그러나, 이 주관론은 물고기의 즐거움(魚之樂)이라 불리는 다음 유명한 우화에서 보듯이 일종의 감각적 전체론으로 균형을 잡고 있다.

 

장자와 혜자가 강둑에서 산책하고 있었을 때,

장자가 말했다. “피라미가 밖으로 나와 즐겁게 헤엄치니, 저것이 물고기의 진정한 즐거움이겠지.”

혜자가 말했다. “자네는 물고기가 아닌데, 어떻게 물고기의 즐거움을 아는가?”

장자가 말했다. “자네는 내가 아닌데, 어떻게 내가 물고기의 즐거움을 모른다는 것을 아는가?”

혜자가 말했다. “나는 자네가 아니기 때문에 자네가 무얼 아는 지 몰라. 마찬가지로, 자네도 물고기가 아니니, 자네는 물고기의 즐거움을 모르네.”

장자가 말했다. “처음으로 돌아가 다시 생각해 보세. 자네는 물고기의 즐거움을 내가 어떻게 아느냐고 물었지. 이 질문을 했을 때, 자네는 이미 내가 물고기의 즐거움을 안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었어. 나는 이 강가에 서서 물고기의 즐거움을 알게 되었지.”(외편 추수편)

 

장자의 철학은 중국 불교, 특히 선종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장자(莊子)속의 이야기는 대개 우언(寓言)의 형태를 띠고 있어, 해석의 여지를 남겨 두고 있다. 이야기들은 대개 역사적인 사실과는 거리가 멀며 읽을 때마다 다른 느낌을 받게 한다. 뛰어난 우언으로 장주호접(莊周胡蝶), 혼돈개규(混沌開竅), 포정해우(庖丁解牛) 등이 있다. 장자의 작품은 선진(先秦) 시대의 대표적 작품으로 인정받고 있다.

 

장자에 나오는 가장 유명한 이야기 중 하나는 내편 제물론편에 나오는 장주호접 또는 호접지몽(胡蝶之夢)에 대한 것이다. 어느 날 장자가 근심 없는 나비가 되어 즐겁게 날아다니는 꿈을 꿨다. 잠에서 깨어난 후 장자는 자신이 나비가 된 꿈을 꿨는지, 나비가 장자가 된 꿈을 이제 꾸기 시작했는지 분간하기 어려웠다는 이야기이다.

 

내가 존재한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라는 데카르트의 유명한 문제처럼, 이 우화는 심리학, 언어학, 인식론 상의 여러 문제를 제기한다.

 

 

흔히 인생의 덧없음을 뜻하는 말로 아시발꿈과 같은 뜻이라고 알려져 있으나 완전히 틀린 해석이다. 애석하게도, 대다수의 사람들이 교과서에서 이 단어를 관동별곡(關東別曲)에서 정철(鄭澈)이 꿈에 신선놀음하는 것을 지칭하는 말로 배운 탓에 이 고사(故事)의 뜻이 남가일몽(南柯一夢)이나 일장춘몽(一場春夢) 따위와 같다는 잘못된 해석이 널리 퍼져 있다.

 

이 고사(故事)를 통해 장자(莊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만물에 구분이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뜻은 알지 못하겠다. 장주가 꿈에 나비가 된 것인가, 나비가 꿈에 장주가 된 것인가?(不知周之夢為蝴蝶與蝴蝶之夢為周與)라는 말에서 가장 뚜렷하게 나타난다.

 

물론 눈에 보이기에 장주와 나비 사이에는 구분이 있다. 그러나 만물의 변화(物化) 속에서 이것은 의미가 없다. 따라서 어느 한 관점을 갖고 고착될 나()는 존재하지 않으며, 만물에는 구분이 없다. 따라서 장주의 나비 꿈은 역으로 나비의 장주 꿈과 차이가 없다.

 

그러므로 이 고사를 장주의 아시발꿈 이야기라고 해석하는 것은, 결국 장주라는 고정된 가치에 매달린다는 점에서 틀렸다. ()로서 존재할 장주도 상대적 가치에 불과하며, 더 나아가 나비를 비롯한 그 무엇도 고정된 가치가 될 수 없다.

 

그렇다고 일장춘몽이나 남가일몽과 같이 세상 덧없다는 관점에서 이 이야기를 바라보는 것도 바른 해석으로 보기 어렵다. 만물이 변화한다는 변함없는 유일한 사실, 그 도()를 말하고자 하는 것이 호접몽 고사, 더 나아가 제물론의 주제이다. 애초에 저자가 자신을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등장시켜 자신을 상대화시키는 점은 이 이야기의 의미를 다시 한 번 되새기게 해준다.

 

다만, 이 사유가 특별히 동양적인 것인가? 혹은 동양이 선점한 주제인가? 라고 묻는다면, 사실 별로 그렇지도 않은 것이 서양에서도 이와 같은 논의는 희랍시대부터 계속 되어온 것이다.

 

우리가 보고 듣고 느끼는 현실이 가상인가 아닌가 라고 하는 주제는 인류 보편적인 것이며, 게다가 서양철학은 이 주제를 가지고 칸트를 거쳐 현상학, 하이데거의 존재론까지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며 진화한 반면, 동양에선 그같은 논의의 치열함이 좀 부족했다고 할 수 있다. 이 호접지몽만 하더라도 문제를 제기하는 정도에 그칠 뿐, 논지 전개는 미흡한 감이 있는 것이다.

 

영화 매트릭스를 평할때 한 70%의 평론가는 이 고사를 들먹이곤 한다. 나비와 인간, 어느 쪽이 현실이고 어느 쪽이 꿈인지 모르는 상황이 현실이라고 믿어왔던 게 사실은 가상이었다는 매트릭스의 상황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다만 호접몽은 장자의 물아일체 사상을 주장하기 위한 사유라서 의식적으로는 가상과 현실의 경계가 모호하지만 공간적으로는 가상과 현실의 경계가 확실한 매트릭스에 이 고사를 인용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반박도 있었다. 마찬가지로 인셉션을 호접몽에 비유한 글에도 이런 반박이 나온 적이 있었다. 호접지몽 고사는 매트릭스나 인셉션의 상황보다는 지구멸망 문서의 신적인 존재의 실험 중단에 적혀있는 상황과 더 비슷한 모양이다.

 

 

()는 형성문자로 ()의 간자(簡字)이다. 뜻을 나타내는 육달월(=; , )와 음()을 나타내는 (, )로 이루어진 글자이다. 소의 턱밑살의 뜻으로 음()을 빌어 어째서, 무엇인가의 뜻의 어조사(語助辭)로 쓰인다. ()는 중국에서 이적(夷狄)을 이르던 말이다. (), () 시대에는 흉노를, () 때에는 널리 서역의 여러 민족을 일컬었다. 또한 되(분량을 헤아리는 데 쓰는 그릇 또는 부피의 단위), 오랑캐의 이름, 수염, 구레나룻, 턱밑살, , ()의 하나, 어찌, 오래 살다, 장수하다, 아래로 늘어지다, 멀다, 크다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오래도록 삶을 호수(胡壽), 오랑캐들로 인하여 일어나는 난리를 호란(胡亂), 오랑캐의 옷을 호복(胡服), 여자들의 얼굴을 단장하는 데 바르는 흰 가루를 호분(胡粉), 호두나무 열매를 호도(胡桃), 알이 굵고 거친 소금을 호염(胡鹽), 오랑캐 나라의 장수를 호장(胡將), 오랑캐의 풍속을 호풍(胡風), 깨를 통틀어 일컫는 말을 호마(胡麻), 걸상처럼 된 간단한 접이 의자를 호상(胡床), 오랑캐의 노래를 호가(胡歌), 오래 삶을 호고(胡考), 함부로 끼적거려 어지럽게 쓴 글씨를 호서(胡書), 함부로 되는 대로 지껄이는 말을 호설(胡說), 나비가 되어 날아 다닌 꿈이라는 호접지몽(胡蝶之夢), 북쪽의 말은 북풍이 불 때마다 머리를 들어 북쪽을 바라본다는 호마의북풍(胡馬依北風),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호언난어(胡言亂語), 몹시 뒤섞이고 착잡하여 어수선하게 생각함을 호사난상(胡思亂想), 함부로 날뛰며 어지러이 행동함을 호행난주(胡行亂走), 고향이 다르고 서로간에 서먹서먹한 사람들이 한집에 모인다는 호월일가(胡越一家) 등에 쓰인다.

 

()은 형성문자로 ()이 본자(本字)이다. 뜻을 나타내는 벌레 훼(; 뱀이 웅크린 모양, 벌레)와 음()을 나타내는 글자 (, )으로 이루어졌다. 별레의 이름, 나비를 뜻한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재재거릴 첩(), 나비 호()이다. 용례로는 수영 방법의 한 가지 접영(蝶泳), 나비를 접아(蝶兒), 나비 모양의 무늬를 접문(蝶紋), 나비잠이나 나비 모양으로 만든 뒤꽃이를 접잠(蝶簪), 나비춤을 접무(蝶舞), 가자미를 접어(蝶魚), 날개를 편 나비와 같은 모양을 접형(蝶形), 나비의 종류를 접류(蝶類), 옛날에 장자가 꾸었다는 나비꿈을 접몽(蝶夢), 나비 날개의 흰 가루와 벌이 누른 빛이라는 접분봉황(蝶粉蜂黃) 등에 쓰인다.

 

()는 상형문자로 ()는 고자(古字)이다. 대지에서 풀이 자라는 모양으로 전()하여 간다는 뜻이 되었다. ()을 빌어 대명사(代名詞)나 어조사(語助辭)로 차용(借用)한다. ()는 가다, 영향을 끼치다, 쓰다, 사용하다, 이르다, 도달하다, 어조사, , (), ~, , ~에 있어서, , ~, 이에, 이곳에, , 그리고, 만일, 만약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이 아이라는 지자(之子), 자 모양으로 꼬불꼬불한 치받잇 길을 지자로(之字路), 다음이나 버금을 지차(之次), 풍수지리에서 내룡이 입수하려는 데서 꾸불거리는 현상을 지현(之玄), 딸이 시집가는 일을 지자우귀(之子于歸), 남쪽으로도 가고 북쪽으로도 간다 즉, 어떤 일에 주견이 없이 갈팡질팡 함을 이르는 지남지북(之南之北) 등에 쓰인다.

 

()은 형성문자로 ()()은 통자(通字), ()은 간자(簡字)이다. 뜻을 나타내는 저녁 석(; 저녁)와 음()을 나타내는 글자 몽(어둡다의 뜻)이 합()하여 이루어졌다. 본뜻은 저녁이 되어 시계(視界)가 침침하여 뚜렷이 보이지 않는 일이나, 밤이 어둡다의 뜻이다. 꿈의 뜻으로도 쓰인다. 그래서 ()은 꿈, 공상, 꿈꾸다, 혼미하다, 흐리멍덩하다, 똑똑하지 않다, 마음이 어지러워지다, 뒤숭숭하다, 사리에 어둡다, 흐릿하다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어두울 매()이다. 용례로는 잠을 자며 꿈을 꿈을 몽매(夢寐), 자다가 가위에 눌림을 몽염(夢魘), 꿈에 나타나는 길흉의 징조를 몽조(夢兆), 꿈속의 생각이나 꿈 같은 헛된 생각을 몽상(夢想), 꿈에 여자를 가까이 하여 정액을 쌈을 몽정(夢精), 꿈 또는 꿈속을 몽경(夢境), 꿈속에까지 생각한다는 몽사(夢思), 헛되이 살다가 죽음을 몽사(夢死), 꿈처럼 허망한 세상을 몽세(夢世), 꿈과 환상이라는 뜻으로 허황한 생각을 뜻하는 몽환(夢幻), 잠을 자면서 꿈을 꾸는 동안이라는 몽매지간(夢寐之間), 꿈 속에 꿈이야기를 하듯이 종잡을 수 없는 말을 함을 몽중몽설(夢中夢說), 꿈속에서 꿈 이야기를 한다는 몽중설몽(夢中說夢), 꿈속의 꿈이란 뜻으로 덧없는 세상살이라는 몽중몽(夢中夢), 꿈에도 생각하지 못함을 몽상부도(夢想不到), 천만 뜻밖의 일을 몽외지사(夢外之事), 몹시 그리워서 꿈에서까지 서로 찾는다는 몽중상심(夢中相尋), 꿈과 허깨비나 거품과 그림자와 같다는 몽환포영(夢幻泡影) 등에 쓰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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