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한 일과 잘못한 일이 반반이라는 뜻으로, 공도 있고 잘못도 있음을 이르는 말이다. 인간은 완전하기가 쉽지 않다는 의미이다.
功 : 공 공(力/3)
過 : 지날 과(辶/8)
相 : 서로 상(目/4)
半 : 반 반(十/3)
잘한 것이 일곱이고 잘못한 게 셋(功七過三)이라는 글을 읽다가 공과상반(功過相半)이라는 말이 나와 찾아보니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 유효원(柳孝源)
조선조 영조 때부터 순조 때까지 활동한 유효원(柳孝源)이라는 무장이 있다. 1811년 홍경래(洪景來)의 난이 일어나자 다시 순무중군(巡撫中軍)으로 기용되었다.
정주성(定州城)을 점령한 홍경래군과 일진일퇴를 거듭하며 전투를 벌였고, 마침내 군기를 쇄신한 뒤 정주성 아래 토굴을 파고 화약을 설치하여, 성벽을 폭파하고 난을 평정하였다.
항복한 반군 2,983명 중 부녀자와 노인, 어린아이를 제외하고 1,917명을 함부로 즉결 처분한 사실이 문제가 되어 대간에서 공과상반(功過相半)이라고 평가되어 삭직을 청하기도 하였다.
1813년 우포대장에 임명 되었다가, 그해 사망하였다. 1830년(순조 30) 병조판서에 추증되었다.
🔘 홍경래의 난(洪景來─亂)
정주성의 봉기군은 서울에서 파견한 순무영(巡撫營) 군사와 지방에서 동원된 관군의 연합 부대에 맞서 전투를 계속하면서 오랫동안 성을 지켰으나, 땅굴을 파 들어가 성을 파괴한 관군에 의해 1812년 4월 19일 진압되었다.
이때 2,983명이 체포되어 여자와 소년을 제외한 1,917명 전원이 일시에 처형되었고, 지도자들은 전사하거나 서울로 압송되어 참수되었다.
🔘 조선왕조실록에서
순조 12년 임신(1812)4월 27일(기사)
순무영에서 중군 유효원의 정주성 수색 보고를 아뢰다.
순무영(巡撫營)에서 아뢰기를, 신의 영(營)의 중군(中軍)인 유효원(柳孝源)이 보고하기를,
생포한 남녀 2천 9백 83명 안에서 여자는 8백 42명이고, 남자는 10세 이하가 2백 24명이니, 다스리지 않는 데 부쳐 모두 풀어 주었습니다.
生擒之男女二千九百八十三口內, 女口八百四十二, 男口十歲以下二百二十四, 則付之罔治, 一幷全釋。
그외 1천 9백 17명은 모두 적 중에서 이른바 친기(親騎), 장초(壯抄), 총수(銃手), 창수(槍手) 등으로서 적의 혈당(血黨)이 되었던 자들인데, 은유(恩諭)를 여러 번 반포했음에도 끝내 감격해 뉘우치지 않고 더욱 사납고 완고하여 왕사(王師)에 감심(甘心)했던 자들이니, 결코 한 시각이라도 천지간에 살려 둘 수 없는지라, 모두 진 앞에서 효수하였습니다.
其外一千九百十七口, 皆是賊中, 所謂親騎、壯抄、銃、鎗手等, 而爲賊血黨, 恩諭屢頒, 而終不感悟, 獰頑益逞, 而甘心王師者, 決不可晷刻假貸於覆載之間, 幷梟首陣前。
순조 13년 계유(1813,가경 18) 10월30일 (계해)
차대하여 김재찬이 유효원의 포상과 정만석의 연임에 대해 아뢰다
차대(次對)하였다. 영의정 김재찬이 말하기를, “순무 중군(巡撫中軍) 유효원(柳孝源)이 전쟁에 나아갔을 때 과연 공과(功過)가 상반(相半)한 점이 없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선사(旋師)한 뒤에 끝내 상과 벌을 아울러 시행함을 면치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토평(討平)한 공이 딴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닌데도 상이 공에 걸맞지 않았습니다. 이미 죽어 고인이 되었으니 나라에서 공로에 대한 보답하는 조처가 실로 긍탄(矜歎)스럽습니다. 특별히 정경(正卿)을 추중하여 포상하고 구휼하는 두 가지의 뜻을 보여주소서.”하니, 그대로 따랐다.
次對。 領議政金載瓚曰: “巡撫中軍柳孝源出戰之時, 果不無功過相半者。 故旋師之後, 竟未免賞罰竝施。 然其討平之功, 不在他人, 而賞未稱功。 身已作故, 在朝家酬勞之典, 實爲矜歎。 請特贈正卿之職, 以示褒恤兩行之意。” 從之。
⏹ 다음은 임철순 기자의 공칠과삼(功七過三) 글이다.
(前略)
안희정 충남지사도 지난해 지방선거를 앞두고 출간한 <산다는 것은 끊임없는 시작입니다>라는 책에서 박 전 대통령을 ‘공칠과삼’으로 평가한 바 있다. 공이 7이라는 것보다 과가 3이라는 걸 강조한 언급이지만, 어쨌든 그나마도 화제가 됐던 말이다.
공칠과삼은 안 지사가 그 책에서 소개한 대로 덩샤오핑(鄧小平)이 마오쩌둥(毛澤東)을 평가한 말이다. 문화혁명 당시 마오에 의해 숙청돼 큰 피해를 당했는데도 그의 공을 7로 평가한 게 놀랍다.
공칠과삼은 원래 공로와 허물이 반반이라는 공과상반(功過相半)을 응용한 말이다. 공과상저(功過相抵), 공과참반(功過參半)도 같은 말이다.
시대와 개인의 평가에 따라 같은 인물이라도 공칠과삼이 되거나 공팔과이(功八過二)가 될 수 있다. 큰 인물일수록 훼예포폄(毁譽褒貶)이 엇갈린다.
누구든 되도록이면 공엄기과(功掩其過; 공적이 그 허물을 가린다)로 평가하는 게 좋지 않을까. 전적으로 과만 저지른 사람은 어쩔 수 없지만.
우리 역사에는 조선 영조~순조 연간의 무신 유효원(柳孝源)이 홍경래의 난을 평정한 공을 세우고도 2000명 가까운 반군을 모두 처형했다 해서 공과상반으로 비판받은 기록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