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가(釋迦)와 가섭(迦葉)이 마음으로 마음에 전한다는 뜻으로, 말로써 설명할 수 없는 심오한 뜻은 마음으로 깨닫는 수밖에 없다는 말 또는 마음과 마음이 통하고, 말을 하지 않아도 의사가 전달됨을 이르는 말이다.
以 : 써 이(人/3)
心 : 마음 심(心/0)
傳 : 전할 전(亻/11)
心 : 마음 심(心/0)
(유의어)
교외별전(敎外別傳)
불립문자(不立文字)
심심상인(心心相印)
염화미소(拈華微笑)
염화시중(拈華示衆)
출전 : 전등록(傳燈錄)
(유래)
송(宋)나라의 중 도언(道彦)이 석가(釋迦) 이후 고승(高僧)들의 법어를 기록한 전등록(傳燈錄)에 보면 석가가 제자인 가섭(迦葉)에게 말이나 글이 아니라 이심전심(以心傳心)의 방법으로 불교(佛敎)의 진수를 전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에 대해 송(宋)나라의 중 보제의 오등회원(五燈會元)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어느 날 석가(釋迦)는 제자들을 영산에 불러 모았다. 그리고 그들 앞에서 손가락으로 연꽃 한 송이를 집어들고(拈華) 말없이 약간 비틀어 보였다. 제자들은 석가(釋迦)가 왜 그러는지 그 뜻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가섭(迦葉)만은 그 뜻을 깨닫고 빙긋이 웃었다. 가섭만이 연꽃은 진흙 속에서 살지만 꽃이나 잎에는 진흙이 묻지 않듯이 불자(佛子) 역시 세속의 추함에 물들지 말고 오직 선을 행하라는 뜻을 이해했던 것이다.
그제야 석가는 가섭에게 말했다. "나에게는 정법안장(正法眼藏; 인간이 원래 갖추고 있는 마음의 묘덕)과 열반묘심(涅槃妙心; 번뇌를 벗어나 진리에 도달한 마음), 실상무상(實相無相; 불변의 진리), 미묘법문(微妙法門; 진리를 아는 마음), 불립문자 교외별전(不立文字敎外別傳; 모두 언어나 경전에 의하지 않고 이심전심으로 전하는 오묘한 뜻)이 있다. 이것을 너에게 전해 주마."
▣ 이심전심(以心傳心)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한다는 뜻으로, 진심은 너절한 말들이 필요없다는 말이다.
빈 깡통이 시끄럽고, 빈 수레가 요란하다. 물이 얕으면 자갈조차 소리를 내며 떠내려간다. 세상이 시끄럽고 요란하다. 서로 자기 주장만 내세우고, 자기만 옳다 한다. 너와 나는 어디서나 마주보고, 저쪽에서 보면 내가 네가 된다는 사실을 모른다.
석가는 노자의 무언지교(無言之敎)를 몸소 실천한 성인이다. 경전보다는 마음으로 가르치고, 말보다는 자신의 삶으로 깨우쳤다. 석가는 참으로 큰 스승이다. 송나라 승려 도언은 석가 이후 고승들의 법어를 기록한 전등록에서 '석가는 말이나 글이 아니라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제자들을 가르쳤다'고 적었다. 불교의 진수는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해지면서 고통받는 중생에게 마음의 길을 터줬다. 석가는 제자들의 물음을 늘 칭찬했고, 자신의 가르침을 강요하지 않았다.
송나라 스승 보제의 '오등회원'에는 석가가 이심전심으로 제자들을 가르치는 장면이 나온다. 어느 날 석가가 영취산에 모인 제자들에게 연꽃 한 송이를 집어들고 줄기를 살짝 비틀어 보였다. 제자들은 스승의 그 뜻을 헤아리지 못했다. 오직 가섭만이 석가의 뜻을 깨닫고 미소를 지었다. 말이 아니라 마음으로 통한다는 염화미소(拈花微笑)는 이 영취산 설법에서 나왔다. 석가가 연꽃을 집어드니(拈華), 제자 가섭이 그 뜻을 헤아려 미소를 지었다(微笑)는 의미다.
연꽃은 탁한 연못에서 피어난다. 하지만 더없이 청아하고 맑고 깨끗하다. 속세도 탁하다. 흐리고 탐심이 가득하다. 하지만 스스로 깨달으면 탁한 연못에서 피어나는 연꽃처럼 중생도 맑고 깨끗하게 거듭난다. 그 깊은 뜻을 석가는 마음으로 전했고, 가섭은 오롯이 마음으로 받았다. 불립문자 교외별전(不立文字 敎外別傳), 오묘한 진리는 말이나 경전보다 이심전심으로 전해진다.
참고로 사성제(四聖諦)는 불교의 기본 교리다. 사제(四諦)로도 불리는 이 교리는 고(苦), 집(集), 멸(滅), 도(道) 네 진리가 핵심이다. 고(苦)의 진리(고제)는 고통으로 가득찬 현실을 바로 보라는 거고, 집(集)의 진리(집제)는 탐심 욕망 이기심 등 고통이 생기는 원인을 바로 보라는 거다. 멸(滅)의 진리(멸제)는 온갖 번뇌를 벗고 해탈을 얻으라는 가르침이다. 도(道)의 진리(도제)는 해탈에 이르는 구체적 수양이다. 바르게 보고, 바르게 생각하고, 바르게 말하고, 바르게 행동하고, 바르게 목숨을 유지하고, 바르게 노력하고, 바른 신념을 갖고, 바르게 마음을 안정시키는 팔정도(八正道)가 그것이다.
큰 것은 담담하다. 바다는 고요하고, 태산은 늘 그 자리다. 큰 가르침은 말이 적다. 큰 부모는 자식을 윽박하지 않는다. 말로 깨우치기보다 스스로 모범을 보인다. 그런 부모 밑에서 자란 자식은 세상을 살면서 어긋남이 적다.
행동으로 깨우치는 상사는 어디서나 대접을 받는다. 가정이든 직장이든, 사회든 국가든 이치는 같다. 작은 것은 번잡하다. 따지고, 훈계하고, 목청을 높인다. 권위는 위엄이 세운다고 착각한다. 속이 비어서 시끄러운 줄 모르고, 아는 게 많아서라고 오해한다. 짐이 가벼워서 덜컹대는 줄 모르고 많이 실은 때문이라고 오판한다. 그러니 세상만사 요지경이다.
▣ 양육에 이심전심(以心傳心)이란 없다
이심전심(以心傳心)이란 말은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하다는 뜻으로 굳이 말이나 다른 방법으로 표현하지 않아도 상대에게 자신의 의도나 감정이 잘 전달된다는 의미입니다. '말하지 않아도 안다'든지 '텔레파시가 통했다'든지 하는 말들과 비슷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살면서 이심전심의 경험을 얼마나 많이 하였나요? 눈빛이나 미소만 보고서도 서로의 마음이 통하는 그런 경우가 있기는 하겠지만 사실 자주 있는 일은 아닐 것입니다. 더욱이 이심전심을 일상의 소통 방식으로 사용하기에는 부적절하며 오해와 불통, 답답함을 유발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지난 날 소통의 부재를 뼈저리게 경험한 우리로서는 모호한 이심전심 염화미소는 경지에 이르지 못했다면 오히려 경계해야 할 소통의 방식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표현 하지도 않았으면서 이심전심으로 상대가 내 마음을 알아줄 걸 기대하는 것은 마치 감나무 밑에 누워 감 떨어지길 기대하는 것과 같습니다.
상대가 여러분의 마음을 잘 몰라준다면, 그 상대의 둔감함을 탓하기 전에 여러분이 여러분의 마음을 분명하게 표현하고 전달했는지 생각해볼 일입니다. 표현되지 않는 마음은 공허합니다.
정신과 상담을 하면서 다양한 일을 겪습니다. 꽤 오래전에 저에게 오셨던 한 할머니가 생각납니다. 그 할머니는 진료실에 들어와서 한참 동안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질문을 해도 대답해 주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얼마가 지나서야 할머니는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말문을 열었습니다. "아이 정신과 의사 양반, 내가 왜 왔는지 맞혀 봐야지"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아마도 할머니는 정신과라는 곳이 마음, 심리, 정신 등등에 대한 상담을 하는 곳이니 정신과에 가면 의사가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볼 거라고 생각하신 것 같습니다. 독심술처럼. 하지만 제가 아무리 유능한 정신과의 의사라도 하더라도 표현해주지 않는다면 상대의 마음을 헤아릴 수는 없습니다.
영화 <굿윌헌팅>에서는 이런 장면이 나옵니다. 주인공인 윌과 그를 상담해주는 정신과의사숀이 호숫가 벤치에 앉아있습니다. 주인공인 윌은 천재적인 두뇌를 가지고 있지만 불행한 어린 시절의 상처를 안고 삐딱하게 살아갑니다. 윌은 숀과 상담을 하지만 자기 마음을 드러내지 않고 회피하거나 변죽만 울립니다.
의사인 숀이 윌에게 말합니다. "너는 고아로 힘들게 살아왔어. 네가 얼마나 힘들게 살아왔는지, 네가 뭘 느끼고 어떤 사람인지 <올리버 트위스트>만 읽어보면 그걸 다 알 수 있을까? 그 책이 널 다 설명할 수 있을까? 네 스스로에 대해 말해야 돼. 네가 누구인지."
부모 자식 간에도 마음을 전달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적극적으로 아이들에게 우리의 마음을, 우리의 사랑을 전달하고 있을까요?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부모는 없을 것입니다. 그건 너무나도 당연합니다.
그렇게 당연해서 인지 그런 마음을 아이들도 당연히 알고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굳이 내색하지 않아도 전달되고 느껴질 것이라고. 그러나 아이들은 우리의 생각만큼, 우리의 기대만큼 우리의 마음을 잘 알 수는 없습니다. 아직은 어리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은 언제부터 다른 사람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을까요? 마음 이론(Theory of Mind)에 의하면 아이들은 만 4세정도가 되면 다름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하기가 가능해진다고 합니다. 아직 인지 발달도 약하고, 정서적으로 성숙하지도 않았고 대인관계 경험도 적고 자기중심적인 우리의 아이들이 이제 막 생겨난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하기 능력을 가지고 과연 부모의 마음을 얼마나 알 수 있을까요?
우리가 흔히 하는 말이 있습니다. "자식 키워보니 부모 마음 알겠다고." 나이가 들어서도 알 수 없었던 부모의 마음, 또는 부모의 사랑을 어린 자녀들이 알아채기가 쉽지 않은 것은 너무도 당연할 것입니다.
아이들은 미숙하고 의존적이고, 그래서 아직은 누군가의 돌봄이 필요합니다. 돌봄에는 생리적 욕구에 대한 돌봄도 필요하지만 관심과 사랑이라는 정서적 돌봄도 반드시 필요합니다. 부모의 사랑하는 마음이 아이에게 잘 전달되지 않는다면, 아이들은 중립적인 상태가 아니라 결핍의 상태가 되어버리고 불안해집니다.
부모의 관심과 사랑은 아이들의 생명유지를 위해 끊임없이 제공되어야 하는 필수 영양분입니다. 그래서 더더욱 우리는 아이들에게 우리의 마음을, 우리의 사랑을 적극적으로 표현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아이들에게 사랑한다는 표현을 절제할 이유가 없습니다. 생명의 영양분을 중단할 이유가 없습니다. 관심의 눈빛으로 바라봐주고, 안아도 주고, 볼도 비벼주고, 뽀뽀도 해주고, 사랑한다고 말해주어야 합니다. 부모의 마음을 자녀에게 전달할 때, 이심전심이란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허균의 소설 <홍길동전>의 유명한 한 장면을 떠올려 봅니다. 아버지인 홍판서 앞에서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는 비참한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는 길동에게 홍판서는 그 마음에 공감하여 내면으로는 애틋함을 느끼면서도 말로서는 "너 같은 사람이 어디 한둘이더냐? 다음부터 이런 말을 입 밖에 내었다가는 살아남기 어려우리라. 물러가거라." 합니다.
홍판서가 내면의 마음 가는대로 안아주고 다독이며 사랑한다고 말해주었다면 길동의 마음은 얼마나 푸근했을까요?